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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희교수의 이탈리아 예술산책 - ‘붉은색 지붕으로 뒤덮인 도시’피렌체

고종희교수의 이탈리아 예술산책 - ‘붉은색 지붕으로 뒤덮인 도시’피렌체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14 14:02
고종희교수의 이탈리아 예술산책 - ‘붉은색 지붕으로 뒤덮인 도시’피렌체
고딕양식 대성당은 돔 지름이 40m 달해 

 




피렌체의 중앙역에서 밖으로 나오자마자 대형 교회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역시 피렌체답게 대성당도 크군.” 내가 맨 처음 피렌체를 방문했을 때 했던 생각이다. 그러나 그곳은 대성당이 아니라 시내에 있는 많은 교회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피렌체에는 대성당을 중심으로 걸어서 20분 이내에 수많은 성당과 미술관들이 즐비해있다. 이탈리아 어느 도시를 가도 발에 채는 것이 미술관과 교회라지만 피렌체가 특별한 이유는 이들 교회와 미술관 대부분이 미술사상 가장 중요한 작품들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이 교회에서 5분쯤 걸으면 진짜 대성당이 나온다. 토스카나 최대의 웅장한 고딕 건축물이다. 대성당은 특히 거대한 돔 때문에 유명한데 그것은 피렌체의 상징이자 르네상스 건축을 새로 쓰게 한 브루넬레스키의 작품이다.

고딕 시대에 만들기 시작한 이 성당은 돔의 지름이 40m나 되는 바람에 기술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뻥 뚫린 상태로 남아 있었는데 브루넬레스키라는 건축가가 공법상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거대한 돔을 마침내 덮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성당 못지않게 중요한 곳이 있으니 바로 대성당의 부속 세례당과 종탑이다. 모두 대가들의 작품으로 만들어진 곳이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자.

그 유명한 우피치 미술관은 르네상스 회화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지만 1년 365일 언제 가더라도 티켓을 사는 데만 2시간 이상 줄을 서야 하는 단점이 있다. 시간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면 두 시간을 기다리는 대신에 우피치보다는 덜 알려졌으나 질에 있어서는 그에 못지않은 강 건너편의 피티 궁(Palazzo Pitti)으로 향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이 궁은 한 때 메디치가의 궁으로 쓰였는데 메디치가 사람들은 궁과 사무실이었던 우피치(영어의 office)를 연결하기 위해 그들만의 밀폐된 통로를 만들었다. 노출을 꺼린 메디치가 사람들이 신변 보호를 위해 생각해냈다는데 화려한 예술 뒤에 감추어진 정치적 잔혹함의 흔적이라 하겠다.

피티궁은 지금은 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는데 티치아노와 라파엘로의 대표적인 초상화들을 비롯하여 많은 회화 작품들과 공예품들이 있으니 우피치를 못 본 섭섭함 정도는 이곳에서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다. 이 궁의 내부는 당시 군주들이 살았던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볼 수 있도록 모든 방들을 공개하고 있다.

한때 피렌체를 호령했던 사람들의 내밀한 침실을 직접 볼 수 있으니 세월의 무상함은 여기서도 느껴진다. 각 방들은 지금은 비록 빛이 바랬지만 방주인에 걸맞은 색상의 벽지와 가구, 커튼으로 장식되어 있어서 실내 디자인에 대한 그들의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이 궁이 자랑하는 광활한 정원은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으로 대표되는 근대 유럽 정원의 원조라 한다.

피렌체 여행의 백미를 만끽하려거든 근처의 피에솔레라는 산골 마을을 방문하자. 이곳은 피렌체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드라이브를 하기 위해 즐겨 찾는 곳인데 특히 맛 좋은 피자집들이 있어서 값싸고 맛있는 피자를 즐길 수 있다. 이 산동네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붉은색 테라코타 지붕으로 뒤덮인 피렌체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해가 질 무렵 여기서 피렌체를 내려다보면 도시 전체가 노을에 물들며 거대한 붉은 꽃밭을 만들어내는 장관 앞에서 여행의 행복감에 빠질 것이다.
 

금기에 도전한 ‘르네상스의 도시’ 피렌체
 
 
피렌체에는 폰테 베키오라는 다리가 있다. 오래된 다리라는 뜻이다. 수백년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는 듯 그야말로 낡고 오래된 모습인데 이 다리의 양쪽 가에는 의외로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값비싼 보석을 파는 고급 금은방들이 즐비해있다. 옛것과 새것, 낡음과 귀함이 혼재해 있는 곳이다.

이 다리를 뒤로 하고 강을 따라 5분 쯤 걷다 보면 카르미네 성당이 나온다. 겉보기에 화려하지도 인상적이지도 않은 평범해 보이는 교회지만 바로 이 안에서 르네상스 회화가 시작되었다. 교회에 입장하는 것은 무료지만 예배당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입장료를 내야하며 관람하는 시간도 10분 이내로 제한되어 있다.

서양의 교회 내부에는 보통 카펠라라 불리는 작은 예배당(chapel)들이 있다. 무반주 합창을 아카펠라라고 부르는데 바로 교회 안에서 불렀던 성가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카펠라는 보통 교회에 기부를 많이 하는 가문의 소유가 되었다. 일단 카펠라를 소유하게 되면 그들은 앞다투어 화가와 조각가들을 초청하여 장식하게 했다. 교황 선출의 장소인 시스티나 예배당도 당시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미켈란젤로에게 천장화와 벽화를 주문해서 더욱 유명해졌다.

카르미네 성당 안에는 브랑카치라는 가문의 가족 예배당이 있었다. 가문의 수장인 필립포 브랑카치는 피렌체의 상인이자 정치인이었다. 그는 예배당의 벽화를 장식하기 위해 마솔리노라는 화가를 초빙했다. 당시 화가들은 혼자서 일을 다 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조수들을 거느리며 작업을 했는데 이 화가는 자신의 고향 후배인 마사초라는 어린 화가에게 일거리를 준다고 불렀다. 두 사람이 각각 그린 ‘아담과 하와’가 있는데 후배가 그린 그림이 바로 르네상스 회화의 탄생을 알리는 작품이 되었다.

선배의 그림은 중세의 전통을 고수한 전형적인 스타일이었지만, 후배의 작품은 지금까지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과감한 형태였다. 마사초는 태고적 인류의 첫 조상에게 일어난 비극을 마치 방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처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남자가 이렇게 엉엉 우는 모습을 보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신성한 교회 안에 외설에 가까운 남녀의 누드 그림을 허락한 것이 인상적이다.

나는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이런 누드가 우리나라의 교회 안에도 그려질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곤 하지만 아무래도 그건 불가능할 것 같다. 아무리 예술의 자유를 인정하는 현대라지만 교회는 여전히 장소에 합당한 그림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424년 피렌체의 한 교회에서 이 별로 합당하지 않은 그림을 허락한 덕에 르네상스 회화가 탄생했다.

르네상스는 금지된 것에 도전한 끼 많은 예술가들이 만들어 냈다. 이 작품을 그린 마사초를 시작으로 피렌체에서는 천재 예술가들이 봇물처럼 탄생했다. 보티첼리, 다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는 많은 예술가들 중의 일부일 뿐이다. 어떻게 한 도시에서 그 많은 예술가들이 동시대에 탄생할 수 있었을까?

그 이유야 여러가지겠지만 나는 그 공로를 예술후원자들에게 돌리고 싶다. 그들은 재능있는 예술가들을 발굴하고, 예술작품을 유치하는 것을 최고의 자부심으로 여겼으며, 작품 값을 지불하기 위해 아낌없이 지갑을 열었던 사람들이다.
 

피렌체 대성당의 명물 ‘청동문’ 반세기에 걸쳐 완성 ‘예술 극치’
 
 
피렌체 방문의 첫 코스는 단연 대성당이다. 대성당의 이름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즉 꽃의 성모 마리아라는 뜻이다. 이 성당은 예술의 도시 피렌체의 상징답게 규모는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과 밀라노의 대성당에 이어 이탈리아에서 세번째지만 소장 예술품의 중요도는 베드로 성당에 견줄 만하다.

피렌체 대성당은 조토의 종탑, 세례당 그리고 대성당 부속 박물관이 함께 어우러진 복합공간이다. 어느 곳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역사의 흔적들이다.

그 중 대성당 부속 박물관에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비롯하여 한 때 이 성당을 장식했던 르네상스 거장들의 조각, 회화, 금은 세공품들로 가득하다. 궂은 날씨와 공해로부터 작품을 보호하기 위해 원래 성당에 있던 작품들을 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 대성당을 비롯하여 건물 외벽에 보이는 조각들은 모두 모조품이며 진품은 이곳 박물관에서 감상할 수 있으니 평범한 여행을 거부하는 여행객이라면 방문을 권한다.

대성당과 마주한 곳에 성 요한 세례당이 있다. 흰색 대리석과 초록색 화강석이 어우러진 팔각의 얼룩무늬 건물이다. 과거 그리스도교 국가들은 세례의식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세례당을 독립 건물로 짓는 경우가 있었다. 대성당 입장은 무료이나 세례당 입장은 유료다. 걸작을 보려면 지갑을 열라는 그들만의 상술이다. 세례당에 들어가면 천장이 온통 ‘최후의 심판’을 그린 모자이크로 덮여 있는데 그것은 현존하는 중세 모자이크 중에서 단연 으뜸이다. 천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어도 원래의 찬란한 색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세례당 앞에 서 있노라면 관광 가이드들이 청동문 앞에서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이야기를 간추리면 이렇다. 1401년, 피렌체 시는 세례당의 청동문을 제작할 조각가를 뽑기 위해 공모전을 공포했다. 내로라하던 조각가들이 다 응모했는데 최종적으로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가 선정되었다.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던 심사위원들은 두 사람이 공동 작업을 하라고 지시했으나 브루넬레스키가 사양하는 바람에 기베르티 혼자서 청동문을 제작하게 되었다. 작품 제작을 포기한 브루넬레스키는 원근법이라 불리는 수학적 투시도법을 발명한 건축가로서 이후 대성당 돔을 완성하는 공모전에서 선정되어 지름 40m가 넘는 거대한 대성당 돔을 완성한 천재 건축가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 사람들은 좋은 작가를 선정하기 위해 공모전이라는 제도를 적절하게 운영했던 것이다.

기베르티가 청동문을 완성한 것은 작품제작에 착수한 지 23년이 지난 1424년이었다. 문 한 쌍을 만들기 위해 20년 이상이 소요되었다. 그로부터 1년 후 그는 이 세례당의 또 다른 청동문을 제작해달라는 주문을 맡았는데 그것이 바로 미켈란젤로가 그 아름다움에 반하여 별명을 붙여줬다는 ‘천국의 문’이다. 이 문을 만드느라 그는 또 다시 22년을 바쳤다. 기베르티는 천재 예술가의 반열에 서지는 못하였으나 청동문 2개를 완성하는 데 50년 가까운 세월을 바친 진정한 예술가였다. 그 느림의 미학 덕분에 오늘날까지 이 청동문은 관광 가이드들의 목청을 돋우게 하는 피렌체 대성당의 명물이 되고 있다.
 

‘피렌체 예술’ 뒤에는 메디치가문이…
 
 
메디치가(家) 없는 피렌체란 생각하기 어렵다. 피렌체가 역사상 빛나는 주역이 되었던 시기는 1400년쯤부터 1600년쯤까지 약 2세기 동안이다. 이 시기는 또한 메디치 가문의 영광의 시기와도 일치한다.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 역사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초였으며 은행업을 했던 이 가문이 교황청의 재정후원을 담당하게 되면서 일약 유럽의 갑부로 도약하게 되었다. 메디치가 은행은 이탈리아의 주요 도시는 물론이려니와 멀리 네델란드에까지 지점이 있었다고 한다.

메디치 가문 사람들 중에서 역사적 조명을 받은 첫 인물은 코시모 일 베키오이다. 그는 ‘피렌체의 국부(國父)’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로 당시 피렌체 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코시모는 무엇보다도 건축물 건립에 신경을 썼다. 성 로렌초 교회, 성 마르코 수도원, 메디치 궁(Palazzo Medici)이 대표작이다. 세 건물 모두 초기 르네상스 건축 양식을 대표하며 오늘날에는 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 중에서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한 성 로렌초 교회는 최초의 르네상스 식 교회다. 이 교회는 특히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데 이유는 교회의 광장을 중심으로 피렌체에서 가장 큰 시장이 서기 때문이다. 피렌체의 특산품이라 할 수 있는 각종 가죽제품과 실크 제품을 여기서는 비교적 싼 값으로 살 수 있으며, 수다스러운 이탈리아 상인들과 흥정을 하는 재미를 맛볼 수도 있다. 성 로렌초 교회는 메디치가의 가족 교회이다. 한 가문의 교회라 하기엔 그 규모가 대단히 크지만 무엇보다도 소장 예술품의 질을 보면 메디치가 왜 예술 후원자의 대명사처럼 불리는지 그 이유를 말해준다.

많은 미술품들 가운데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 구 제의실(Old Sacrestia)이라 불리는 곳이다. 제의실은 사제가 미사 전후 옷을 갈아입거나 제의를 보관하는 방이다. 성 로렌초 교회의 구 제의실이 특별한 이유는 그곳이 바로 도나텔로와 브루넬레스키가 공동작업을 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의 장식을 위해 르네상스의 두 거장이 머리를 맞대고 일을 했다니 이 작은 방에서 역사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도나텔로는 채색한 테라코타로 벽면을 장식했다. 테라코타란 흙을 구워서 만드는 기법이다. 이전까지교회의 장식품은 대부분 돌로 만들어졌는데 도나텔로는 제작기법이 용이하고 제작 기간도 단축할 수 있는 테라코타로 조각을 만들었고 이를 대중화 했다.

중세에는 일반 시민들이 미술품을 소장하거나 장식하는 것이 거의 허락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상업으로 부를 축적한 시민들이 자신들의 주택을 미술작품으로 장식하길 원했는데 이 때 값이 싸고 제작이 용이한 테라코타가 크게 인기가 있었다. 이 교회에는 또한 도나텔로가 만든 청동 설교대가 있다. 작가가 죽기 직전까지 매달렸던 것으로 노 대가의 예술 혼과 청동 부조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피렌체 예술가들의 뒤에는 늘 이렇게 메디치가문이 있었다.
 

메디치 가문 ‘소년 미켈란젤로’ 발탁
 
 
메디치 가문이 배출한 최고의 예술가는 미켈란젤로(1475∼1564)이다. 미켈란젤로는 열다섯 살이 되기 전에 메디치 가문에 발탁되어서 그들과 한 지붕 아래서 살기 시작했다. ‘위대한 자 로렌초’라는 칭호를 얻은 메디치 가문 최고의 군주이자 예술후원자였던 로렌초 일 마니피코는 미켈란젤로를 특별히 사랑하여 일찍부터 밥상머리 교육을 시켰다.

메디치궁에는 늘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과 철학자들이 드나들었고 그들은 함께 모여서 예술과 철학, 그리고 문학을 논하였다. 이 모임이 바로 철학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신플라톤주의의 모태가 되었으니 멤버들의 지적 수준을 짐작할 만하다. 이 환상적인 모임에 어린 미켈란젤로도 참석하여 교육을 받았다. ‘위대한 자 로렌초’는 미켈란젤로를 가족처럼 생각하여 식사도 함께 했다고 하니 어린 예술가에 대한 총애를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시작된 미켈란젤로와 메디치가의 인연은 작가가 사망하기 전까지 수십년간 지속되었다.

메디치 가문을 위해 일한 미켈란젤로의 가장 중요한 작품이 있는 곳은 피렌체의 구 제의실(Sacrestia Vecchia)이다. 이곳은 지난주에 소개했던 성 로렌초 교회를 미켈란젤로가 손수 증축한 곳이다. 그래서 이름도 신 제의실에 이어 구 제의실이라 붙였다. 이곳은 ‘위대한 자 로렌초’의 아들인 교황 레오 10세의 주문에 의해 미켈란젤로가 건축과 조각을 맡았으며 1520년 착수하여 1534년 마무리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단 한 점만 소장하고 있어도 해당 미술관의 보물이 될 판에 이곳은 건축과 조각 전체가 이 거장의 작품이다.

미켈란젤로는 이곳에 두 메디치가 젊은이의 무덤과 고인들의 초상 조각을 만들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줄리아노인데 그는 교황 레오 10세의 동생으로서 우리가 흔히 줄리앙이라 부르는 석고상의 원작이다. 미남의 전형처럼 알려진 이 대리석 조각이 완성되자 사람들은 작품이 실물과 닮지 않았다고 수군댔다. 그러자 미켈란젤로가 말했다.

“100년 후 줄리아노의 실제 모습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네.”

구 제의실을 감상한 후 나오면 메디치 예배당(capella medicea)이라는 넓은 홀이 나오는데 그곳에는 메디치가문의 역대 인물들의 무덤과 각종 가문에서 수집한 소장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많은 소장품 가운데 메디치 가문의 예술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돌 테이블이 있다. 이들 돌 테이블은 얼핏 보면 정교하게 그려진 그림으로 착각할 정도다. 각종 문양, 정물, 풍경 등이 새겨져 있는데 그것은 그림이 아니라 돌 상감기법으로 만든 것으로서 그 화려함과 정교함이 사람의 손으로 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메디치가문은 당시 유럽의 프랑스나 스페인과 같은 대국의 왕가에 비하면 일개 가문에 불과했지만 유럽의 주요 군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결혼 관계를 맺기도 했다. 메디치가문 사람들은 타국 왕가의 결혼 선물로 돌 테이블을 자주 보냈다고 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꿈도 못 꿀 최고의 예술품을 선물로 보냄으로써 가문의 존재를 각인시켰던 것이다. 메디치 가문에 있어서 예술은 곧 정치이자 생존이기도 했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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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 르네상스 서막 올린 ‘꽃의 도시’

피렌체 - 르네상스 서막 올린 ‘꽃의 도시’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05 15:58

피렌체 -  르네상스 서막 올린 ‘꽃의 도시’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


이탈리아에서 베네치아와 함께 가장 강력한 또 하나의 공국이었던 피렌체로 가기 위해 고속도로를 달린다. 차창으로 스쳐가는 전원의 풍경이 온통 포도밭으로 이탈리아가 세계 제일의 포도주 생산국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한다.

피렌체는 제일먼저 르네상스가 시작된 도시로 그 중심에는 메디치(Medici)라는 가문이 존재하고 있었다. 메디치 가문은 15세기에서 18세기까지 피렌체를 중심으로 상권을 장악하면서 은행을 만들고, 교황청과 상거래를 하면서 상업 자본을 형성하였다. 피렌체의 황금시대를 만든 메디치 가문은 은행장과 국가 원수의 직위를 겸임하면서 국부(國父)의 칭호를 받아 실질적인 피렌체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메디치 가문은 사재를 시정에 투입하였고, 특히 예술과 문학 등 학예를 장려하는데 노력함으로써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출범을 알리는 서막을 열게 되었다. 이는 메디치가의 놀라운 안목이며 미래를 내다보는 현명하고 위대한 결정이었다.

르네상스의 꽃을 피우기 위한 메디치가의 교육기회 제공과 경제적인 지원에 힘입어 이곳 출신인 미켈란젤로, 단테,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천재들이 배출되게 되었으며, 피렌체의 상징인 종교적 중심지 ‘산타마리아 델피오레’(꽃의 성모교회)와 같은 두오모 대성당이 완성을 보게 되었다.

두오모 대성당은 1296년에 아르놀포 디 캄비오에 의하여 설계되고 기공되었으나 그의 죽음과, 뒤이은 종탑 설계자이자 공사감독이었던 조토 디 본도네 역시 세상을 떠남으로써 공사가 중단되는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성당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던 쿠폴라(반구천장)의 공사가 조각가이며 건축가, 화가, 학자로서 이론을 겸비한 초기 르네상스의 거장 부르넬레스키(1400-1450)에 의하여 1434년에 완성되고, 높이 114m인 주황색 돔의 쿠폴라에 바사리가 성서의 이야기를 프레스코화로 그림으로써 두오모가 완성되게 되었다.

이탈리아 최대의 시인 A.단테가 세례를 받았다는 산조반니 세례당 앞에 서니, 미켈란제로가 ‘천국의 문’이라고 칭송했다는 세례당 문이 황금빛으로 눈부시게 다가온다. 10개의 황금 부조작품으로 구성된 천국의 문에는 성서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에서 솔로몬과 시바 여왕에 이르기까지 구약 사건들을 묘사하고 있다. 황금 빛 화려함이 극에 달하고, 미술적 원근감 표현이 수려하며, 예술적 가치가 출중한 이 천국의 문은 로렌초 기베르티에 의하여 28년간에 걸쳐 완성되었다고 한다.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명소 종탑이 두오모 대성당과 함께 84m의 높이로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아 있고, 그 종탑은 장식이 다양하고 아름다운 색채의 대리석으로 되어있어 완벽한 건축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두오모 대성당 가까운 곳에 있는 시뇨리아 광장에 피렌체 공국 당시에 청사로 사용하던 베키오 궁전이 94m 높이의 탑과 함께 웅장하게 버티고 서 있다. 이곳은 정치의 구심점으로 시민들의 토론장과 정사를 결정하던 장소로 이용되었으며, 베키오 궁전 입구 양쪽에 그렇게 보고 싶었던 미켈란제로의 ‘다비드상’과 ‘헤라클레스’상이 궁전의 문을 지키고 있다. 물론 진품은 아니지만 감상하기에는 충분한 걸작들이다. 많은 조각 작품들이 여기저기 서 있는 광장의 한쪽 편에 예쁘게 단장을 한 꽃마차에 날씬한 한 필의 말이 매어있고, 마차위에 기대 누워 졸고 있는 마부의 모습이 여유롭기만 하다. 시뇨리아 광장 곁에 있는 우피치미술관에서 보티첼리의‘비너스탄생’, ‘봄’, 레오나르도다빈치의‘동방박사의 예배’, ‘수태고지’등 많은 명작들을 직접 감상할 수가 있다.

피렌체 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는 미켈란젤로 언덕으로 올라간다. 언덕 위 넓은 광장에 미켈란젤로의‘다비드상’을 중심으로 많은 조각 작품들이 있다. 광장에서 내려다보는 피렌체시의 풍경이 아름답다. 시내를 가로질러아르노강이 흐르고, 강 너머로 빨간 지붕들의 아름다운 시가지 풍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뚜렷하게 우뚝 솟아있는 두오모의 돔과 종탑이 보이고, 베키오 궁전도 보인다.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처음 만나 사랑을 나누며 단테가 베아트리체로부터 시적 영감을 얻었다던 언약의 장소인‘베키오 다리’가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단테가 사랑했던 베아트리체가 실존의 인물인지 아니면 단테의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마음속의 여인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베아트리체를 사랑했던 단테(Alighieri Dante 1265-1321)의 생가 앞에 서니 생가를 지키며 기타를 연주하고 있는 무명 예술가의 선율이 울려 퍼진다.‘Beautiful’이라고 말하며 한 잎의 동전을 떨어뜨리는 나에게 그는 ‘Thank you’하며 정감 있는 미소를 던진다. 평온하고 행복스러워 보이는 그의 얼굴 표정에서 나는 단테의 살아있는 생명력을 찾는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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