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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능가한 폼페이 최후의 날 - 폼페이

‘9·11’ 능가한 폼페이 최후의 날 - 폼페이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14 14:21

‘9·11’ 능가한 폼페이 최후의 날 - 폼페이
플리니우스 편지에 생생하게 기록돼 





 
기원 후 79년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했다. 화산 아래의 도시 폼페이가 순식간에 용암 속에 묻혔다. 언젠가 이탈리아의 TV에서 폼페이 최후의 순간을 다룬 다큐를 본 적이 있다. 이라크 전쟁 현장, 혹은 9·11 뉴욕 쌍둥이 빌딩의 폭발 현장을 보여주듯 생생하게 재현한 프로그램이었다.

폼페이에 관한 자료가 여럿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한 리포터가 참사 현장에서 생생하게 현장을 중계하듯 묘사해 나간 한 장의 편지가 남아 있다.

편지를 쓴 주인공은 로마의 대 역사가 노(老) 플리니우스의 조카로 당시의 대 문호이자 역사가였던 타치투스에게 보낸 것이다.

노 플리니우스는 ‘박물지, Historia Naturalis’라는 전 37권으로 이루어진 대 백과사전을 쓴 로마의 역사가인데 그는 화산이 폭발하던 당시 나폴리 만의 해군 제독으로 재임 중이었고, 화산 폭발 때 현장에서 사망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로마에 관한 지식의 대부분은 바로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 의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함대의 함장이었던 그는 충분히 피신할 시간과 기회, 도구가 있었지만 스스로 참혹한 죽음의 현장에 몸을 던졌다. 군인으로서, 학자로서, 또한 인간으로서 참으로 위대한 인물이었지만 그가 선택한 생애 마지막 순간은 그가 남긴 모든 업적 이상으로 위대했다. 여기에 플리니우스의 최후를 지켜본 그의 조카의 편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삼촌은 당시 나폴리 만에서 함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9월 9일 나의 모친은 삼촌에게 이상한 구름이 생겼다고 알렸다. 삼촌은 그것이 잘 보이는 곳으로 가기 위해 신발을 신고 나갔다. 큰 구름떼가 보였는데 그것은 흡사 가지가 위로 둥글게 뻗은 잣나무와 같았다. 과학자였던 삼촌이 더 가까이에서 관찰하고자 작은 배를 준비시켜서 집에서 나가려 할 때 카스코의 아내가 달려와서 산 아래 있는 자신의 별장이 위험에 처했다며 배로 피신시켜 달라고 애원했다. 과학자적 호기심은 인명을 구출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바뀌었고 삼촌은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구출하려고 외출의 목적을 바꿨다. 많은 이들이 탈출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이미 잿더미가 배를 덮치고 가까이 갈수록 재의 농도는 짙었다. 배를 사타비아 쪽으로 몰았다. 삼촌의 친구 폼포니아누스가 보였기 때문에 그를 구출하기 위해 배를 몰았다. 공포에 떨고 있는 친구를 배에 오르게 하고 그가 가지고 있던 물건들도 싣게 했다. 그리고 서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함을 가장하며 저녁식사를 했다.

한편 베수비오 화산에서 용암의 불덩이가 더 넓게 퍼졌다. 밤이 어두우니 불빛이 더욱 빛나 보였다. 삼촌은 사람들을 위로하였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 사이 용암재가 집을 덮쳐 더 이상 지체하다가는 빠져나올 수가 없다고 판단하자 삼촌은 일어나서 폼페이아노에게 갔다. 그들은 의논 후 밖으로 나오기로 결정했다. 화산재가 비 오듯 쏟아졌고 점점 집을 덮쳐 갔다. 해변에 나가서 배를 탈 수 있는지 살펴보았다. 용암이 다시 덮쳤다. 두 노예의 부축을 받고 삼촌이 피신을 시도했다. 그러나 기관지에 염증이 있었던 삼촌은 먼지와 가스로 인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불을 덮은 채 누워 있었는데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 그는 죽어 있었다.”
 

폼페이 건축물의 美와 견고함
‘신비의 별장 ‘ 벽화 등은 르네상스 작품 능가

 
폼페이는 서기 63년 대지진으로 도시 전체가 파괴되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힘을 모아 재건에 앞장섰으나 그로부터 16년 후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이번에는 도시 전체가 용암에 묻혀 버렸다. 그 후 1700년 동안 도시는 그 존재 자체가 잊혔다가 18세기 초 사람들이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지하 도시의 잔재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후 18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인 발굴 작업이 시작되어 195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18세기 유럽에서는 고전, 고대 문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빙켈만과 같은 유명한 고고학자가 출현하여 고대 그리스 미술에 대한 연구를 본격화했다. 빙켈만은 독일인으로서 로마에서 연구하면서 근대 미술사의 체계를 확립한 중요한 학자이다. 빙켈만으로부터 시작된 그리스 연구가 고대 로마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이루어진 폼페이의 발견과 발굴은 당시 서구 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꿔 놓는 대사건이었다. 폼페이의 회화, 조각, 공예품이 당시 미술계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고, 의상, 가구, 공예, 실내 디자인 심지어는 여인의 헤어스타일에 이르기까지 생활 곳곳에 영향을 미쳤다. 폼페이가 되살아난 것이다.

18세기 중·후반 유럽에 신고전주의라는 미술양식이 탄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현재 폼페이에 남아 있는 유적들은 당시 이 도시가 얼마나 화려했으며 예술적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폼페이는 당시 로마제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그곳의 건축물과 유물을 통해 고대 로마제국 시대의 생활과 문화 수준도 추측할 수 있다.

폼페이의 건축물은 2000년 전에 지어졌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고, 견고하며, 예술적이다. 대부분의 벽은 수준 높은 벽화로 장식이 되었으니 오늘날의 우리들보다 그들이 오히려 예술과 더 친숙했다.

현재 많은 저택과 별장이 남아 있지만 그 중에서 ‘신비의 별장’이라는 곳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별장은 아트리움이라 불리는 집 중앙에 사각형의 중정이 있고 중정 주변은 회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회랑을 비롯하여 집 곳곳을 벽화로 장식했다. 그 중에서도 ‘매질하는 여인’이라는 광경이 있는 벽화는 당시 여인들의 모습과 생활상을 그리고 있어서 흥미롭다. 춤추는 여인, 매질하는 여인, 매를 맞고 동료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위로받고 있는 여인의 모습 등 여인들의 일상이 그려져 있는데 이들의 모습은 1500년 후 르네상스 시대에서나 볼 수 있는 조화, 절제, 우아미를 보여주고 있다. 인체의 비례는 이상적인 비례인 8등신으로 표현되었고, 움직임이 자연스러우며, 공간의 표현 역시 탁월하다. 이후의 미술이 이에 미치지 못함을 보노라면 미술이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교가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음을 이들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폼페이 근처에는 우리나라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폼페이와 같은 운명을 맞이한 에라콜라노라는 마을이 있다. 폼페이를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그곳도 방문하길 권한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폼페이보다 온전하게 유적이 남아 있는가 하면, 폼페이에서는 볼 수 없는 독창적인 건축 장식들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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