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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카라(Ankara) - ‘비잔틴의 역사가 살아있는 터키의 수도

앙카라(Ankara) - ‘비잔틴의 역사가 살아있는 터키의 수도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14 12:31

앙카라(Ankara) -  ‘비잔틴의 역사가 살아있는 터키의 수도  
 




‘갈라디아’는 이스탄불과 카파도키아 지역의 사이에 위치하던 지역으로 터키 중부지방의 옛 이름이다. 갈라디아 지방은 우리들에게 성경을 통하여 매우 친숙한 이름이다. 사도 바울 선생이 초대교회 당시 특별히 갈라디아 지방의 성도들에게 유대주의의 거짓 교사에 현혹되지 말고 하나님 진리의 빛에 거하라는 내용의 ‘갈라디아서’를 보낸 곳이기도 하다. 이 지역은 사도 바울이 2차와 3차 전도여행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며 복음의 씨를 뿌린 곳이다. 성경에 ‘앙고라’라고 나와 있는 곳이 앙카라다. 앙카라는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한 도시로서 이스탄불로부터는 450㎞ 떨어진 곳에 있다. 앙카라는 현재 터키 공화국의 수도로 인구는 약 400만명이다.

1923년 터키공화국 초대 대통령 ‘케말 아타튀르크’는 불과 인구 6만 명이 거주하던 소도시 앙카라로 수도를 옮긴다. 화려했던 이스탄불로부터 앙카라로 수도를 옮긴 아타튀르크는 터키 공화국의 새로운 출발과 개혁의 의지로 불합리한 사회적 제도와 갈등요소를 해소하는데 노력했다. 일부다처제로 살아가던 이들에게 일부일처제로 개선하여 여권을 신장하는 정책을 펼쳤고, 성 소피아 성당과 같은 이슬람사원을 박물관으로 민간에게 공개하였으며, 터키어를 제정하는 등 다양한 개혁으로 터키 공화국을 새롭게 태어나게 했다. 국민을 생각하는 대통령, 나라를 걱정하는 대통령이야말로 국민들로부터 추앙 받는 것이 당연하다.

한 나라가 오직 국민과 나라를 생각하는 지도자를 만날 수 있고 또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민족의 행운이며 그 민족의 지혜인 것이다.

앙카라 시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의 정상에는 1938년 11월 10일에 사망한 터키 공화국의 아버지 케말 아타튀르크 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1944년에 시작해 1953년까지 완성된 아타튀르크 사당인 ‘안느트카비르’가 있다. 고대 그리스의 신전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사각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궁전과 같은 건물이다. 아타튀르크를 모신 사당의 천장 장식은 모자이크로 화려하고 매우 아름답다. 외벽에는 아타튀르크가 청년들에게 고하는 연설의 일부가 새겨져 있다. 나라의 미래는 청년들의 정신에서 기인되기 때문이다. 정문 앞에 서있는 위병의 위풍당당한 모습들이 사당과 어우러져 엄숙한 느낌을 더해준다. 근무 교대를 하는 위병들의 절도 있고 엄숙한 제식동작이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을 긴장시킨다.

앙카라에는 우리가 잊을 수 없는 하나의 기념물이 있다. 바로 한국공원이다. 터키는 6.25 한국 전쟁 때 유엔군 16개국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그 용맹성을 떨치며 한국을 혈맹으로 도와 싸웠다. 이후 한국과 터키는 우호협력의 관계를 보다 심화시키고자 양국에 상대국의 명칭을 딴 공원을 조성하기로 했다. 한국정부는 1973년 한국 참전 토이기 병사 중 전사자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앙카라의 기차역 부근에 한국공원을 조성했다. 한국에는 여의도의 인도네시아 대사관 옆에 앙카라 공원을 조성했다.

앙카라의 한국공원으로 들어서는 입구의 오른쪽 기둥에는 ‘한국공원’이라고 한글로 쓰여 있고, 그 중앙에는 우리나라 전통 석탑 모양의 3층 석탑이 아주 높고 크게 세워져 있다. 그 높이가 10m는 넘어 보인다. 석탑 안쪽의 중앙에는 한국전쟁에서 산화한 토이기 병사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하여 한국에서 옮겨온 흙냄새가 짙게 코끝을 자극한다. 석탑의 하단을 이루고 있는 외곽 벽에는 한국전쟁에 참여한 만 오천 명 중 전사한 740명의 명단과 생년월일, 그리고 전사한 날짜가 기록되어 있다. 모두가 19세에서 20세의 젊은 나이들이다. 한국전쟁에서 죽어간 토이기 병사들의 영령 앞에 삼가 명복을 빈다.

그때 당시 토이기 병사들은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도 모른 채 배에 승선하여 한 달 동안의 긴 항해 끝에 한국전쟁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들은 남쪽을 위해 싸우는지 북쪽을 위해 싸우는지도 정확히 모른 채 전쟁에 임했다고 한다. 그런 끈끈한 인연으로 터키인들은 한국을 혈맹으로 맺어진 형제의 나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는 터키를 멀리 잊고 지내진 않았는가? 터키에 대지진이 일어나 세계가 터키를 지원하고 있을 때 우리나라는 터키를 어떻게 지원하였던가? 매우 소극적인 지원에 터키 국민은 서운해 했고 이곳에 사는 우리 교민들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매우 부끄러웠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외교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앞으로 그렇게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다행이 월드컵 축구 경기가 있어 한국과 터키는 형제의 우애를 다시 되찾게 되었다.

터키가 IMF 터널을 현명하게 통과하여 하루빨리 경제적인 여건도 개선되고, 밝은 미래의 주인공이 될 귀여운 어린이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미래의 땅, 축복의 나라’로 재건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터키를 위한 마음의 기도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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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카파도키아 - 암굴교회에 새겨진 기독교 '수난의 역사'

터키 카파도키아 - 암굴교회에 새겨진 기독교 '수난의 역사'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05 16:32

터키 카파도키아 - 암굴교회에 새겨진 기독교 '수난의 역사'  
 
 



“천자산이 옷을 벗은 누드 카파도키아”

카파도키아는 아나톨리아 고원의 중심부에 자리한 대규모 기암지대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모양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불가사의한 바위들의 군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국의 장가계, 천자산, 계림 그리고 미국의 그랜드 캐년, 베트남의 하롱베이 등 그 어느 곳에 비유해도 손색이 없는 절경이다. 옷을 벗은 누드의 모습으로 매끄러운 피부를 자랑하는 산이다.

이곳의 지층은 수억 년 전에 일어났던 에르제스 산의 화산폭발로 형성된 것이며 그 때 화산재와 용암이 수백 미터의 높이로 쌓이고 굳어져 응회암의 용암층을 만들었고, 그 후 풍화 작용으로 침식되면서 단단한 부분만 남아 이루어진 것이 지금의 카파도키아다. 매끄럽고 아름다운 거대한 바위에 군데군데 검은 바위굴의 구멍이 들어나 보인다. 그 동굴 안에 바로 이곳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다. 직접 보지 않고 어찌 카파토키아를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카파도키아에는 100여 개의 교회가 있고, 그 중 150여 곳에 벽화와 부조가 남아 있다. 대부분 기독교인들이 은신처로 사용하기 위해 바위를 뚫거나 동굴을 파내려간 곳에 교회도 주택도 만들어졌다.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돔 형식의 벽과 천정에 화려하게 그려진 프레스코화가 아름답다. 지하에 만들어진 아름다운 동굴교회를 보고 또 한 번 감탄하게 된다.

이곳을 ‘괴레메’라 부른다. 야외 박물관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자연경관 그대로가 박물관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괴레메 암굴 교회와 집들은 이곳에 9세기 이후부터 대규모 기독교인들이 정착하였음을 말해 준다. 아름다운 그림으로 교회를 장식하기 시작한 11세기의 ‘기둥이 있는 교회들’에서 비잔틴 예술의 황금시대를 엿볼 수 있다. 그림의 주제와 섬세한 표현 등에서 이곳의 그림이 전문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벽면과 아치형 기둥위에 그려진 성화 속 인간의 모습은 우아하고 아름답다. 물에 젖어 비쳐 보이는 의상 속의 뽀얀 살결, 슬프면서도 자애가 넘치는 표정, 그것들은 전문화가의 완벽한 표현이다.

괴레메에 수도사들이 거주했으며 성지순례의 장소로 이용됐다는 것은 벽 위에 남겨진 순례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흔적으로 알 수 있다. 이곳에는 바위를 4층으로 깎아 만든 교회와 터널로 이루어진 여자들의 수도원이 있고, 성모마리아와 예수그리스도, 그리고 세례 요한의 모습 등 성화가 그려진 엘말르 교회, 프레스코화로 유명한 성 바바라 교회, 성 조오지우스와 성 테오도루스가 용과 싸우는 장면이 그려진 뱀 교회를 비롯하여, 푸른빛으로 아름다운 벽화를 자랑하는 가장 큰 토칼르 교회가 있다.

토칼르는 다른 석굴에 비해 굉장히 넓으며, 원통형 천장과 벽에 그려진 다수의 프레스코화가 10세기 후반 비잔틴 미술의 명작으로 그 아름다운 색채로 발길을 잡는다. 맨 꼭대기에 그려진 ‘마리아에게 그리스도의 잉태를 전하는 천사를 비롯하여 ‘엘리자베스와 어린 요한’, ‘골고다로 가는 그리스도의 수난’, ‘물을 와인으로 만드는 예수’ 등 풍부한 기독교의 주제들을 아름다운 색채로 잘 표현해낸 프레스코화의 작품 앞에서 그저 놀라움으로 멍해져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괴레메 교회들을 통하여 기독교인들의 수 없는 수난과 하나님에 대한 동경을 진하게 느끼며 카파도키아의 자연적인 기암괴석의 정점을 이루고 있는 위치히사르 요새에 도착한다. 원주민들이 ‘요새’라고 부르는 이곳에는 작은 바위들로 둘러싸인 가운데 타워처럼 보이는 두 개의 거대한 바위 위치히사르와 오르타히사르가 나타난다. 토착민들이 은신처로 사용하던 곳이다.

비잔틴 시대와 오토만 시대에는 위치히사르의 거대한 암석에서 사람이 살았으며 현재에도 토착민들의 정착지로 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있다. 가장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기암 앞에서 스케치북을 펴본다. 카파도키아의 명물, 세쌍둥이 버섯바위들의 절경이 스케치북으로 옮겨진다. 예로부터 이곳은 수도사들이 살던 곳이다. 높이가 40m에 달하는 원추형 기암의 꼭대기에 현무암의 모자를 쓰고 있는 완전한 버섯모양의 기암들이 괴물같이 하늘로 솟아있다.

1970년대 발굴되어 세계인들을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던 또 하나의 역사가 이곳에 있다. 바로 우리들을 놀라게 했던 지하도시, ‘데린쿠유’다. 동굴주택이라고 말은 하지만 이곳은 마치 지하로 파내려간 개미들의 집을 상상 하게하는 대규모 미로의 동굴이다.

마을에서 기르던 닭 한 마리가 땅을 파고 들어간 다음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아 이상히 여긴 사람들이 조금씩 파 들어가 발굴하게 된 것이 바로 지하묘굴, ‘데린쿠유’였다고 한다.

기원전 400년경에 만들어져 오랜 세월 지하에 감추어졌던 지하도시는 한 도시에 2만 명 정도가 살았으며, 지하 12층 정도를 내려가는 대규모 도시형이다. 이와 같은 지하도시가 이 지역에 30개정도 있으며 현재 관광객에게 공개하고 있는 곳은 두 개소이다.

로마시대 기독교의 탄압으로 지하로 파고든 신앙인들의 생활은 어떻게 유지될 수 있었을까? 지하에서 가축을 기르고, 포도주를 만들었던 흔적, 통로와 환기구, 울림통이 있고, 지하의 각층으로 연결되는 통로, 예배당, 학교, 침실, 부엌, 우물 등이 있다. 또 지하 교회 앞 기둥에는 죄지은 자를 벌하여 매어 두었던 돌구멍도 보인다. 물세례를 주었던 성스러운 곳도, 외부의 침입을 막는 둥근 맷돌의 돌덩이도 모두가 이곳에서 살다간 이들의 지혜와 아이디어들이다. 그러나 그 모두가 살아 남기위한 기독교인들의 애절한 소망의 흔적들이어서 보는 이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한다. 가장 큰 지하도시 ‘데린쿠유’에는 4만 명도 살았으며, 이곳 ‘카이마크르’에는 2만여 명의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지하에서 생활을 할 수가 있었을까?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준 것은 바로 ‘믿음의 힘’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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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파묵칼레 - 세계적 온천 휴양지 ‘목화솜의 성’

터키 파묵칼레 - 세계적 온천 휴양지 ‘목화솜의 성’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05 16:29

터키 파묵칼레 - 세계적 온천 휴양지 ‘목화솜의 성’  



 
 

             [파묵칼레의 노천온천 ]

세계적 관광지이며 온천 휴양지로 유명한 파묵칼레는 ‘솜(綿)의 성’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이곳이 목화솜의 성이라 불리는 이유는 하얀 석회붕으로 장대하고 화려한 백색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어서 그런 듯싶다.

파묵칼레로 들어서면서 민가의 지붕 위에 빈 병이 하나, 혹은 두 개가 올려있는 이채로운 풍경을 발견한다. 빈병의 사연이 파묵칼레 마을의 아름다운 결혼 풍습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는 결혼을 하지 않은 딸의 숫자만큼 지붕 위에 병을 올려놓아 과년한 딸이 결혼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외부에 알려 결혼 대상자를 찾고 있다는 광고의 역할을 한다. 병을 보고 혼인 말이 오가게 되면 신랑 신부가 될 사람들이 가족과 함께 상견례를 갖는데, 이때 아버지는 상견례에 절대 참석하지 않는 풍습이 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마지막 가문의 자존심을 지키는 가장의 자세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상견례는 남자가 여인의 집을 방문하여 여인으로부터 차(茶) 대접을 받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여인이 준비한 차에 설탕이 듬뿍 담겨 있으면 결혼을 수락한다는 좋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고, 아직 결정할 수 없는 단계라면 아무것도 타지 않고 차를 대접한다. 또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는 소금을 탄 차를 대접하여 처녀의 심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예를 갖춘다.

세계적인 휴양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파묵칼레는 예로부터 노인들이 심장병이나 고혈압 등의 질병으로 건강에 크게 문제가 있는 경우 모든 가산을 정리하여 이곳으로 이주해 온천욕으로 치료를 했다고 한다. 병을 고치고 나서는 파묵칼레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곳이 너무 좋아 그대로 눌러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한국에서 한때 터키탕이라는 목욕문화가 음란성의 논란이 된 적이 있다. 터키인들은 청결과 목욕을 중시하여 목욕 문화를 발전시켰다. 한국인들이 잘못 이해한 터키탕의 문화에 대해 터키인들은 불쾌한 감정을 갖고 있다. 터키의 목욕탕에는 우리나라와 같이 물을 담아놓은 냉탕, 온탕 등의 물탕이 없다. 그 대신 목욕탕 가운데에 대리석으로 되어있는 커다란 찜질대가 있다. 그 바닥의 온도가 매우 높아 마치 뜨거운 온돌방을 생각나게 한다. 신경통 계통의 치유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젊은이가 올리브유를 사용하여 단조로운 맛사지를 해주는 체험 속에서 터키의 색다른 목욕 문화의 묘미를 느낀다.

파묵칼레의 온천수는 히에라포리스로 올라가는 입구의 원 탕에서 출발한다. 이곳은 크레오파트라와 안토니오가 목욕을 즐긴 곳이다. 그들이 목욕을 즐겼던 원 탕 부근은 상업을 위한 건물이 들어서 있지만 아직도 온천수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 샘솟고 있다. 그곳으로부터 매우 긴 거리를 수로를 통하여 온천수는 이동된다. 온천수에는 석회 성분이 함유되어 하단부로 이동하면서 시간의 경과에 따라 엉켜 굳어져 거대하고 하얀 석회 붕을 형성하면서 대지 전체를 뒤덮어 커다란 백색의 산을 만든다. 온천수의 온도는 흘러 내려갈수록 낮아지지만 수로를 통해 흐른 물은 곳곳에 붕을 만들고, 거대한 노천탕을 계단식으로 만들어 낸다. 우리들의 상상력으로는 짐작하기 어려운 절경이 연출된다. 또 그 스케일이 거대하여 직접 보지 않고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파묵칼레의 언덕 위에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히에라포리스는 B.C 190년에 건조된 석조 건축형 도시로서 마치 에페스를 재현한 듯한 분위기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적들은 내륙에서 발견된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 아름답고 웅장한 것은 1만2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원형극장이다. 원형극장은 거대한 석조의 아름다운 문양과 독특한 기둥양식으로 장식돼있다. 바로 이 곳에서 공연이 이루어지고 또 검투사들의 싸움이 있었던 곳이다. 아직도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둥근 관객석 중앙에 자리 잡은 황제의 자리에 앉아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의 얼굴표정이 마치 로마제국의 귀족을 보는 듯하다. 그러나 원형극장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재건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손되어 있다. 증기목욕탕이나 돌을 쌓아 만든 벽들과 기둥들이 지진으로 파괴되어 여기저기 뒹굴고 있다. 이곳에서 발굴된 출토품들은 히에라포리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파묵칼레의 전망이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다.

파묵칼레의 하얀 산을 뒤로하고 내려오는 중턱에서 돌들의 유적들이 뒹구는 거대한 고분군을 만난다. 고대 귀족들의 석관묘지의 잔해들이다. 고대 로마시대에는 이곳이 화려하고 거대한 도시국가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거대한 무덤의 군락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권세를 누렸던 귀족들이 이곳에서 많이 살았었다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아무리 당당한 권세를 갖고 세상을 호령하였다 하여도 그들은 모두가 한줌의 흙이 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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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에페스(Efes) - 성모 마리아 여생 보낸 ‘잠자는 고대도시’

터키 에페스(Efes) - 성모 마리아 여생 보낸 ‘잠자는 고대도시’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05 16:26

터키 에페스(Efes) - 성모 마리아 여생 보낸 ‘잠자는 고대도시’  
 

 




피온산 야외극장’ ‘세루시우스 도서관’등 에게해 최대 유적지 로마 계획도시 한눈에

에페스로 가기 위해서 에게해 해변을 달린다. 터키의 제3도시이며 최대 공업도시인 이즈미르를 지나간다. 무역도시로 인구가 250만 명 정도가 되는 이곳은 고층건물과 함께 현대도시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언뜻 주변들이 비좁은 서울의 산동네를 생각나게 할 정도로 야산의 덩어리가 온통 작은 집들로 뒤엉켜 넓은 땅을 가진 터키와는 어울리지 않는 풍경을 보여준다.

녹음과 잘 어우러진 이즈미르를 통과하면서 남쪽으로 한 시간쯤 달려 조그마한 마을, 설축에 도착한다. 동로마 시대의 성터가 웅장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한 사도 요한이 노년기를 보낸 곳으로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성당이 세워졌으나 6세기에 동로마의 황제 유스티아누스가 교회로 변모시켜 지금은 성 요한의 교회로 남아 있다. 교회의 한 쪽 곁에는 흰 대리석으로 세워진 요한의 묘소가 있고, 곁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그리스 신화의 아르테미스 여신을 위한 신전이 있다. 이 신전은 기원전 7세기에 건립하기 시작하여 알렉산더 대왕 이후 재건될 당시까지 수많은 조각가들의 작품으로 그 화려함이 극에 달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파손된 조각들만 여기저기 뒹굴고 있다. 세월의 흐름 속에 역사의 허무함을 느낀다. 셀축에서 3㎞ 쯤 들어간 곳에 에게해 최대의 유적지 에페수스가 있다. 잠자는 고대 도시 에페수스를 현재는 에페스라 부른다.

터키는 오랜 역사 속에 종교를 통한 민족의 변화가 심했던 나라다. 때문에 많은 고대 유적이 파괴되거나 약탈당하였다. 그러나 에페스만은 예외적으로 많은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여전히 발굴 작업이 한창이다. 에페스로 들어서는 길가에 동굴유적지로 알려진 ‘잠자는 7인의 교회’가 있다.

250년 로마 황제 테시우스가 군림하고 있던 당시 에페스에서 산 제물을 신에게 바치던 의식에 항의하던 7인의 젊은 그리스도 신도가 도시에서 추방당하여 동굴에서 지내다가 지진으로 동굴이 소멸되는 불행한 일이 있었다. 그 후 309년이 지나 그들이 동굴에서 잠자던 모습 그대로 발견됨으로써 그 당시 로마제국의 구석구석까지 기독교가 전파되는 기폭제가 되었다. 7인의 신도들은 성인으로 받들어져 동굴에 안치되었고 후에 ‘잠자는 7인의 교회’가 이곳에 세워졌다.

에페스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피온산을 따라서 돌로 만들어진 야외극장이다. 바다를 바라보며 부채꼴 모양으로 넓게 만들어져 2만5000명을 수용할 수가 있다. 원형극장은 헬레니즘시대에 짖기 시작하여 로마시대까지 시설을 확장해 나갔다. 객석은 154m의 직경과 34m의 높이로 반원형으로 만들어졌으며, 연극 상연이나 시민의회를 여는데 사용하였다. 또한 사도 바울은 이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에페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은 세루시우스 도서관이다. 로마 제국시대에 아시아 지역을 관할하고 집행하던 케루소스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이 아버지를 기리며 117일 동안 세워 올린 것으로 이후에 목조 부분은 화재로 소실되거나 지진에 의하여 크게 파손되었다. 정면에는 지혜, 운명, 학문, 미덕을 각각 상징하는 여신상이 있다. 오리지널은 윈 박물관에 있고, 이곳에 있는 것은 모조품이라고 하지만 그 웅장함이 대단하다. 전체 벽을 지탱하고 있는 웅장한 기둥양식은 코린트 양식과 이오니아 양식의 혼합형식인 컨퍼지트식을 선택하고 있다. 이곳에는 대략 1만2000여 권의 책이 소장됐었다고 한다.

도서관 길 건너편에는 ‘여자의 집’이라고 불리는 창녀촌이 있다. 그 입구에는 이 세상 최초의 광고판이 있다. 대리석 바닥 위에 새겨져 있는 광고문에는 이곳에 들어 올 수 있는 사람은 첫째 마음의 상처가 있는 자, 둘째 약간의 돈이 있는 자, 그리고 셋째로 발이 큰 사람이어야 한다는 내용과 함께 옆에는 발바닥의 모양이 새겨져 있다. 발이 작은 미성년자의 출입을 통제하는 광고다.

남쪽 입구로 나와 항구로 이어지는 아루카디안 도로의 북쪽에 성모 마리아의 집이 있다. 에페스는 성모마리아가 그리스도가 죽은 후 여생을 보낸 곳이라 알려져 있다. 성모가 살고 있었다는 성모마리아의 집은 성모마리아 교회에서 7㎞ 쯤 떨어진 부르부르 산속에 있다. 성모는 64세에 죽었다고 전해지며, 1967년 교황 바울 6세가 이곳에서 미사를 하여 그 존재를 세계적으로 알렸다.

에페스는 로마시대에 형성된 계획도시의 면모를 가장 잘 알아 볼 수 있는 곳이다. 예술적이고 화려한 조각 작품들의 정교함과 아름다움과 거대함을 보면서 영원한 예술 속에 영원할 수 없는 권세가 살다간 안타까운 역사의 비극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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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트로이(Troy) - 청동기 문명 발상지로 유명,전쟁기념 제작 거대한 목마

터키 트로이(Troy) - 청동기 문명 발상지로 유명,전쟁기념 제작 거대한 목마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05 16:23

터키 트로이(Troy) - 청동기 문명 발상지로 유명,전쟁기념 제작 거대한 목마 
 
 

 



‘역사의 지혜가 샘솟는 트로이 목마’

이스탄불을 떠나 마르마라해의 해안을 끼고 달리는 버스의 차창에 비치는 풍경이 아름답다. 해안선을 따라 그림 같은 별장들이 줄지어 서있고, 광활하고 한적한 농촌의 들녘은 넓다 못해 땅과 하늘이 맞닿아 지평선이 긋는다. 사막과 같은 광야가 계속되는 이곳에서 어떻게 농사를 지을까? 적은 인구로 어떻게 땅을 관리하고 있는 것일까? 걱정도 많다. 인적을 찾아보지만 사람이라곤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휴가철을 위해 준비된 별장들도 텅텅 비어있다. 해안선 따라 천년을 넘게 자라온 올리브 나무의 고목 군락들이 이국적이다. 달리는 버스가 ‘치킬다아’라는 조그마한 도시를 지난다. 찰랑이는 바다물이 별장의 울타리에 부딪힌다. 바다가 아니라 호수인 듯하다. 아름다운 해변의 풍경은 변함없이 다섯 시간이나 계속되고, 버스는 차나칼레 해협의 포구에 도착한다.

점심식사와 함께 ‘사자의 젖’이라 불리는 ‘락크’ 한잔이 터키의 문화를 맛보게 한다. 터키 사람들이 ‘대한민국, 대한민국’하면서 엇박자의 외침을 계속하면서 친절을 베푼다. 본래 이곳 사람들은 중국인과 일본인만 알아주고 한국인에 대해서는 소홀한 감이 있었는데 월드컵이후 한국을 많이 알아줘 이곳의 한국인들은 긍지심을 느낀다고 한다.

차가운 바람이 볼을 때리며 차나칼레 해협을 횡단한다. 선상에서 멀어져 가는 유럽의 풍경을 스케치한다. 바쁜 손놀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과 눈이 스케치북위에서 마주친다. 그들이 보내는 미소 속에 나의 가슴은 뜨거워진다. 일본인도, 터키인도, 이태리인도 모두가 한국인의 스케치북 위에서 하나가 된다.

해협을 횡단하여 버스로 30분쯤 달려 도착한 곳이 트로이다. 트로이전쟁과 목마의 이야기로 정감이 어린 곳이다. 트로이의 현재 마을 이름은 트루바(Truva)다. 트로이 지방에 촌락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0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곳은 청동기 문명의 발상지로 유명하다. 기원전 2500-2000년경에는 에게해 교역의 중심지로 번영했고, 그 이후에 몇 번의 멸망을 거듭하면서 층층의 도시 유적을 형성한 곳이다.

트로이에 도착하자마자 거대한 목마가 기다리고 있다. 트로이 전쟁을 기념하는 이 목마는 관광용으로 제작되어 이곳의 분위기를 더해주고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목마 안으로 오르는 나무계단이 삐걱거린다. 트로이 목마의 주인공이 되어 목마 속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마냥 즐거운 웃음이 번진다.

BC 800년경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가 쓴 최고의 영웅서사시는 ‘일리아스’(Ilias)다. 일리아스는 전 24권으로 완성된 대작으로 여신 아프로디테의 도움으로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의 왕비였던 절세 미녀 헤레네를 빼앗은 것으로부터 시작된 트로이 전쟁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그리스군은 헤레네의 아버지 메네라오스와 트로이전쟁에서 죽을 운명이었던 발목의 약점을 가진 불사신 아킬레스장군과 냉정하고 침착한 영웅 오디세이아가 중심을 이루어 아가멤논의 인솔하에 활약을 한다. 트로이군은 파리스의 형 헤쿠토르의 분투로 시종 우위에 서서 아킬레스를 대신해 싸웠던 친구 파트로쿠로스를 죽인다. 아킬레스도 파리우스가 쏜 화살에 발뒤꿈치를 맞아 쓰러지고 만다. 전투력을 상실한 그리스군은 아킬레스의 아들에 의해 새롭게 사기를 되찾기 시작하고 트로이의 파리스는 독화살로 운명을 달리한다. 그러나 그리스군의 오디세이아는 어떻게 해도 함락되지 않는 트로이를 쳐부수기 위해서 뭔가 뛰어난 책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병사 전원이 거대한 목마를 타고 숨을 죽인 채 트로이 성안으로 들어간다. 물론 트로이군들은 목마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그 목마가 그리스군의 항복의 상징으로 생각한 트로이군은 목마를 끌어다 놓고 전쟁의 종결을 기뻐하며 대향연을 열었다. 축제가 끝나고 고요해진 틈을 타 그리스 병사들은 목마에서 나와 성에 불을 지르고, 난공불락의 트로이는 어이없게 함락되고 만다. 전쟁의 불씨 헤레네 왕비는 다시 메네라오스 왕의 곁으로 되돌아가고 10년에 걸친 트로이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된다.

금세기에 이르러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아에 그려진 아름답고 용감했던 트로이의 목마가 단지 신화나 전설이 아닌 사실이었다고 믿었던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독일의 슐리만(1822-1890)이었다. 그는 1873년 일리아스의 시를 기초로 히살르크 언덕을 발견하고 이곳을 바로 트로이라 믿고 발굴을 시작했다. 슐리만은 본래 상인으로 부를 쌓았으나 고고학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여 42세에 고고학자가 되었으며, 18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하는 능력을 겸비한 자였다. 그러나 슐리만은 유적지에 유적이 겹겹이 층을 이루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에 많은 유적을 파손해 가며 수직으로 파내려 감으로써 발굴 작업을 어렵게 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였다. 트로이의 발굴을 중단하기 전날 프리아모스 왕의 재물을 발견한 그는 그 재물을 가지고 그리스로 돌아가게 된다. 물론 훗날 유물을 독일에 기증했지만 전쟁 중에 모두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그 후 유물이 러시아에 있을 것이라는 설도 있었지만 아무도 알 수가 없다. 트로이 전쟁의 신화에 얽힌 비밀을 알고 있을지 모를 트로이의 목마는 그저 묵묵히 바라만 보고 있다. 역사 속 베일에 싸인 트로이의 비밀을 풀기 위한 슐리만의 노력과 그의 인생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가 역사 속에서 얼마만큼 큰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평가는 접어두고라도 미래를 내다보는 탁월한 시각을 가졌다는 것만은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전체를 볼 수 있는 감각과 미래를 예지하는 식견이 필요하다.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행복한 곳으로 그리고 아름다운 곳으로 안내하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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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송김석기의 터키 스케치 여행기 - 이스탄불

우송김석기의 터키 스케치 여행기 - 이스탄불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05 16:20

우송김석기의 터키 스케치 여행기 - 이스탄불 






유럽과 아시아 잇는‘축복받은 땅’  
 
한국의 혈맹국가로 한국전쟁 당시 1만5000명의 토이기 병사를 파병하여 우리나라를 도왔던 형제의 나라 터키로 향한다. 모스크바행 비행기의 창에 비친 망망대해와 같은 하얀 설원이 광활하게 전개된다. 시베리아의 상공을 따라 서 쪽으로 서 쪽으로 비행을 한다. 태양을 낚는 어부가 되어 떨어지지 않는 낙조의 아름다운 노을을 즐긴다. 모스크바를 경유하여 열 세 시간 만에 아시아의 서쪽 끝이며 유럽의 문턱인 터키의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에 도착한다.

터키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최초로 아담과 하와를 살게 하신 ‘에덴동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땅이다. 또한 노아의 방주가 머물렀고, 그 잔해가 남아있는 아라랏산(해발 5185m)이 있는 축복 받은 땅이다.

터키의 이스탄불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의 도시이다. 이곳은 초기에 그리스 미케네인에 의하여 비잔티움으로 불렸고, AD 305년에는 동로마제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플로 재건되었으며, 그 이후 오스만제국이 점령하여 이스탄불을 형성하였다. 1923년 아타튀르크 초대 대통령에 의하여 터키는 공화국으로 출범하면서 수도도 현재 터키의 제2도시인 앙카라로 옮겼다.

이스탄불에는 오늘날까지 세계 최대의 걸작으로 불리는 성 소피아 성당이 있다.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로마양식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성 소피아의 자리에는 본래 비잔틴 황제 콘스탄틴에 의하여 최초 목조교회가 건축되었으나 화재로 인하여 완전 소실되었고, 그 후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하여 건축된 두 번째 교회도 반란군에 의하여 완전 파괴되었다. 537년에 이르러 현재의 성 소피아가 건설되어 916년간 교회로 사용되었다. 그 후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하던 것을 터키 공화국의 창시자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박물관으로 일반에게 공개하도록 함으로써 회벽 속에 가려졌던 비잔틴시대의 모자이크가 복원되기 시작하였다. 돔의 높이가 55.6m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성당이며, 입구 복도의 길이만도 60m나 되는 장대한 규모다. 건축당시 5년 간 100명의 기술자와 1만 명의 노동자를 투입하였고, 가장 좋은 건축석재를 나라 전역에서 수집하여 건축했다.

성 소피아 사원 곁에는 술탄 마호멧트 사원이 있다. 1616년에 건축된 이슬람사원으로 모든 면을 타일로 장식하여 꾸며놓은 것이 유명하여 ‘블루모스크’라는 애칭을 갖고 있다. 여섯 개의 첨탑과 여러 개의 돔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사원의 모든 바닥에는 아름다운 양탄자가 깔려 있어 신을 벗고 들어가야 한다. 중앙의 돔 높이는 43m이고, 2만1043개의 타일과 260개의 창문들이 조화를 이루어 환상적인 화려함과 아름다움으로 시선을 고정시키기에 충분하다.

이곳의 보물관에는 스픈 제조업자가 발견하였다하여 이름 붙여진 86캐럿짜리 스픈메이커스 다이아몬드가 있다. 주위에는 49개의 조그마한 다이아몬드가 장식되어 그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선지자 모하메드의 무덤에 사용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촛대에는 6666개의 다이아몬드가 있다. 종교관에는 모세의 지팡이를 비롯한 이슬람 지도자들이었던 칼리프들의 칼과 모하메드의 망토, 칼, 깃발, 활, 발자국, 이빨, 수염, 그리고 편지 등이 전시되어 있다.

바로 곁에 있는 히포드럼 술탄 마흐멧 광장에는 서릿발같이 차가운 위엄이 느껴지는 기둥들이 서있다. BC 15세기경 이집트의 파라오가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오벨리스크를 BC 390년에 비잔틴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이집트 룩소에 있는 카르낙의 아몬 신전에서 이곳으로 가져와 현재 위치에 세웠다. 100년마다 한 번씩 강진이 이 도시를 강타했어도 이 오벨리스크는 어떤 피해도 입지 않고 1600여 년의 긴 세월을 이곳에 굳건히 서있다. 그 곁에는 목 잘린 뱀 기둥과 콘스탄틴 기둥도 있다. 기둥을 돌며 달리던 기마병들의 함성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유럽과 아시아 지역을 잇는 이스탄불의 호수와 같은 잔잔한 보스포러스 해협의 길이는 31.7㎞이다. 마르마라 해에서 흑해 쪽으로 흐르는 물은 바다 표면으로 흐르고, 흑해에서 마르마라 쪽으로 흐르는 물은 40m 깊은 바다 속에서 흐른다. 이 때문에 흑해와 마르마라 해의 염도와 높이가 다르다. 해협을 따라 작은 숲, 카페, 찻집, 술집 식당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곳에 관광객들이 엉켜 화려함을 더한다. 별장 앞에는 넘실대는 물결 따라 요트들이 출렁이고, 멀리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보스포러스 대교가 보인다. 대교와 훼리를 이용하여 아시아와 유럽이 서로 만나며 교류하는 곳이다. 아름답고 여유 있는 이국적인 풍경을 출렁이는 유람선에 기대어 흥겨운 콧노래를 부르며 스케치를 시작하니 이것이 행복이고 이곳이 낙원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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