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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이와미 은광'

[세계문화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이와미 은광' 국내외 여행정보 2008.11.03 20:22

TRONG>[세계문화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이와미 은광'




 

세계문화유산 '이와미 은광'



영어 명칭 Iwami Ginzan Silver Mine and its Cultural Landscape
프랑스어 명칭 Mine d'argent de Iwami Ginzan et son paysage culturel
등록 구분 문화유산
등록 연도 2007년


시미즈다니의 정련소 터이와미 은광 (일본어: 石見銀山 이와미긴잔[*])은 예부터 은을 채굴하였던 광산으로 센고쿠 시대 후기부터 에도 시대 전기에는 대규모의 은광이었다. 광맥은 이와미 국 동부로 현재 시마네 현의 오다 시 오모리를 중심으로 니마 정과 유노쓰 정 지역까지 분포되어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광산유적으로 1969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200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같은해 일본의 지질백선에 선정되었다.


이와미 은광의 역사




개발
《긴잔규키(銀山旧記)》 등에는 가마쿠라 시대 말기 엔쿄년간 (1308년 ~ 1310년)에 스오의 오우치 히로유키가 이와미를 방문했을 때 은을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있다. 오늘날의 이와미 은광을 본격적으로 개발한 사람은 하카타의 상인 가미야 히사사다라고 한다. [1]《石見銀峯山清水寺天地院縁起》에 따르면, 바다로부터 산이 빛나고 있는 것을 본 히사사다는 영주 오우치 요시오키의 지원과 이즈모의 동광산을 운영하는 미시마 세이에몬의 협력을 얻어 1526년 3월 긴푸 산의 산허리에서 지하의 은을 채굴했다. 요시오키 사후, 오우치 요시타카가 규슈 공략에 눈을 돌린 1530년 지방의 소영주 오가사와라 나가타카가 은광을 탈취하였지만, 3년후 다시금 오우치 가문에 귀속되었다. 주변에 야마부키 성을 쌓아 광산 경영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 해 8월 중국의 은 제련기술인 회취법[2] 을 가미야 히사사다가 오모리에서 처음 성공하였다.[3] 그 결과 효율적 은의 채취이 가능하였고, 전국으로 퍼져 일본에 있어 은 채취에 크게 공헌하였다. 회취법이 확립되기 전에는 니마 정, 유노쓰 정에서 광석을 채굴하여 은을 채취하였다.

은광 쟁탈
1537년 이즈모의 아마고 쓰네히사가 이와미를 공격하여 은광을 빼아았다. 2년후 오우치 가문이 탈환했지만, 그 2년후 아마고 가문이 오가사와라 가문을 이용해 다시금 은광을 점령했다. 은광을 둘러싼 양가문의 쟁탈전이 계속되었다. 오우치 요시타카 사후, 모리 모토나리가 오우치 가문의 뒤를 이어 아마고 가문간의 은광 쟁탈전이 전개되었고, 1562년 최종적으로 모리 가문이 승리해 은광을 완전히 손안에 넣었다. 1584년 모리 가문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복속해 은광은 모리 가문과 도요토미 가문이 공동으로 관리하게 되었으며, 임진왜란때의 군자금은 여기서 충당되었다.[4]


상업에서의 영향

이와미 은광이 개발되었을 시기는 일본 경제의 상업적 발전을 이룬 시기와 겹친다. 이 때문에, 정련가공된 은《조긴》은 기본적으로 통화로써 유통되었다. 16세기 후반부터 마카오를 거점으로 활동을 한 포르투갈과 17세기 초 네델란드 동인도회사를 거점으로 활동을 한 네델란드와의 교역에도 사용되었다. 당시 여기서 산출된 은의 양은 전세계의 1/3에 달해[5],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현재 볼리비아 포토시의 세로 니코 은광과 더불어 은 산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조긴은 칭량화폐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원형이 남아있는 것은 드물다.

번성하였을 시기에는 당시 지도에도 기재되어 있다. 항해술의 발전과 더불어 서유럽의 왕들, 특히 스페인 국왕은 이슬람권으로부터 입수한 지도가 많았고, 이들 토대로 독자적인 지도를 만들었다. 이 지도를 가진 함선들이 인도, 말레이 반도, 중국, 일본으로 무역장을 넓혀 이와미 은광에서 산출된 은을 요구하였다.

은광을 손에 넣은 무장 가문인 오우치 가문, 아마고 가문, 모리 가문, 도요토미 가문은 적극적으로 이들 해외 여라나라와 무역을 하였으며, 그 수입품 안에는 당시 귀중품이였던 화승총도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덧붙여, 영국 함선과 네델란드 함선은 이와미에서 산출된 은을 《소마 은》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지지만, 이것은 은광이 있는 오모리 지구의 옛 이름이 사마(佐摩)에서 유래된 것이다.

막부 직활령
세키가하라 전투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와미의 에노 강의 동쪽 지역을 막부직활령으로 삼았고, 초대 은광 관리인으로 오쿠보 나가야스를 임명했다.[6] 나가야스는 광산경영자로 야스하라 덴베를 두어 이와미 은광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이에야스는 막대한 은을 토대로 해외무역을 하였다. 은광개발의 비용, 자재를 충당하기 위해 주변의 마을을 직활령으로 삼아 오모리에 행정집행소인 부교쇼를 설치했다.[7] 야스하라 덴베가 가마야 갱도를 발견함에 따라 17세기초의 은 산출량은 최고조에 다달으게 되었다. 《当代記》(당대기)에 따르면, 1602년 상납된 은는 4 ~ 5천관에 달했다고 적고있다.[8] 그 후, 은산출량은 점차 감소하였고, 1675년 은광 집행소의 관직인 오모리 다이칸의 지위를 낮추었다.

당초 산출된 은은 현재 오타 시의 니마 정과 유노쓰 정으로부터 배로 반출되었다. 겨울이면 동해쪽의 계절풍이 강해 항해에 어려움이 많았기때문에 오쿠보 나가야스는 오모리로부터 오노미치까지 가기위해 주고쿠 산지를 넘어 세토 내해에 다달으는 육로를 정비하였고, 오노미치로부터 교토 후시미의 긴자(銀座)로 운송하였다. 이들 육로가 지나는 길의 각 마을의 주민들은 노역을 제공하여야 했기때문에 큰 부담이 되었다. 경우에따라서 소송와 쟁의가 일어났지만, 이 수송은 막부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1731년 오오카 다다스케의 천거에 따란 임명된 제19대 다이칸 이도 마사아키라는 60세의 고령과 임기 2년과 상관없이 영민으로부터 "이모 다이칸"로서 공경받았으며, 현재 시마네 현뿐만아니라, 돗토리 현, 히로시마 현에서도 그의 공덕을 기리는 많은 공덕비가 건립되어 있다. 그 공적은 교호 대기근으로 고통받는 영민을 위해 사쓰마 번으로부터 고구마를 도입하여 보급하였고, 기근이 있을 때는 자신의 재산과 유복한 농민으로부터 쌀을 샀고, 막부의 허락을 받지 않은채 다이칸의 미곡창고를 열어 곡식을 풀었고, 영민들의 연공을 면제 감면해 주었다.

이와미 은광은 에도 시대 전기에도 일본의 팽대한 은수요를 지탱하였고, 동도 산출했지만, 17세기말이 되자 점차 산출량이 줄어들어 에도 말기에는 깊게 파지않으면 은이 산출되지 않을 정도로 되었으며, 지하수 누수문제도 있어 채산성이 떨어졌다.

1866년 음력 6월 제2차 조슈 전쟁에서 막부는 이와미 국에 기슈 번, 빈고 후쿠야마 번, 하마다 번, 마쓰에 번의 병사를 보냈지만, 조슈 군의 무라다 조로쿠(후의 오무라 마스지로) 부대를 저지하지 못했고, 음력 7월 하마다 성이 함락되었다. 이렇게 되자, 조슈 군의 이와미 은광 영지로의 진격을 예상한 이와미 은광의 오모리 다이칸 나베타 세이켄은 음력 7월 20일 밤, 빗추 국 구라시키로 도주하였다. 이로써 이와미 은광의 막부지배는 막을 내리게 된었다.[9]

이후, 옛 이와미 은광 영지는 조슈 번에서 관리하였고, 1868년 음력 1월 이와미 은광의 영지가 막부로 부터 조슈 번의 위탁된 후 , 1869년 음력 2월 오모리 현이 설치되어 조슈 번에 의한 관리는 막을 내렸다.[10]



메이지 시대 이후

이와미 은광 경영은 1868년 다조칸(太政官)[11]에서 공포한 법령에 따라 민간에 매각되어 다나카 요시타로가 경영권을 취득하였다. 하지만, 1872년 하마다 지진의 피해로 휴광하였다.[12] 그 후, 1887년부터 오사카 시의 후지타구미(현 DOWA 홀링스 주식회사)에 의해 재개발을 시도하여, 채광시설, 사무소 등을 오모리로부터 고지 계곡으로 이전하였지만, 1923년 휴광하였다.[13] 그 후,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 중, 군수물자로 필요한 구리의 국산화 요구에 따라 1941년 구리 채광을 시도해오지만, 1943년 수해로 갱도가 수몰되는 큰 피해를 입어 폐광되었다. 광업권은 DOWA 홀링스 주식회사가 보유하고 있다.

현재 은광 채굴을 위해 판 “마부(間歩)”라고 불리는 갱도 500여개가 남아있고, 류젠지 마부(龍源寺間歩)의 일부가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이와미 은광의 부산물
이와미 은광에서 은이 채굴될 때 비소가 함유된 비석이 채석되지 않았지만, 같은 이와미 국에 위치해 있는 사사가다니 은광에서 구리가 채굴될 때 비석도 함께 채석되었다. 비석은 맹독성 비소화합물인 삼산화 비소를 다량 함유하고 있어 잘게 갈아 살서제로 사용하였다. 이 살서제 판매상들은 전국적으로 인지도가 있는 이와미 은광의 이름을 사용해 판매하였다.
금은의 정련공정에는 회취법 기술이 사용되었고, 정련공정에서 나오는 납 증기를 흡입한 광부들은 급성 또는 만성 납중독에 걸렸다. 또, 갱도내의 출수, 고온다습, 슬래그와 분진 등의 열악한 환경도 한몫하여 당시 광부의 평균 연령은 30세 정도였다. 광부들의 가족구성은 대개 독신이거나 부부뿐이였다고 전해진다.
1977년 작가 스기모토 소노코가 집필한 소설 《종언》은 이와미 은광의 다이칸이였던 이도 마사아키라라는 인물을 재재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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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기이 산지의 영지와 참예도'

[세계문화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기이 산지의 영지와 참예도' 국내외 여행정보 2008.11.03 20:14

[세계문화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기이 산지의 영지와 참예도'







세계문화유산 '기이 산지의 영지와 참예도'



영문명 Sacred Sites and Pilgrimage Routes in the Kii Mountain Range
프랑스명 Sites sacrés et chemins de pèlerinage dans les monts Kii
등록구분 문화유산
등록년 2004년


기이 산지의 영지와 참예도 (일본어: 紀伊山地の霊場と参詣道 기이산치노 레이조토 산케이미치[*])는 와카야마 현, 나라 현, 미에 현에 있는 사원과 참예도 등을 말한다. 200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등록 유산
※부분은 유산 이외의 명소 등


요시노 산・오미네 산
면적 44.8ha

요시노 산 (吉野山)
긴부센지 (金峯山寺)
뇨이린지 (如意輪寺)
사쿠라모토보 (桜本坊)
요시노미쿠마리 신사 (吉野水分神社)
긴부 신사 (金峯神社)
요시미즈 신사 (吉水神社)
오미네 산 (大峰山)
오미네산지 (大峯山寺)
류센지 (龍泉寺)

구마노
구마노산잔 (熊野三山)
구마노하야타마 신사 (熊野速玉大社)
구마노혼구 신사 (熊野本宮大社)
구마노나치 신사 (熊野那智大社)
나치 폭포 (那智大滝)
세이칸도지 (青岸渡寺)
후타라쿠산지 (補陀洛山寺)
나치 원생림 (那智原生林)

고야 산
고야 산 (高野山)
곤고부지 (金剛峯寺)
곤고산마이인 (金剛三昧院)
지손인 (慈尊院)
니우칸쇼부 신사 (丹生官省符神社)
니우쓰히메 신사 (丹生都比売神社)

참예도 (구마노 옛길)
오미네오쿠가케미치 (大峯奥駈道)《요시노 산・오미네 산 - 구마노산잔, 약140km》
미센 산 (弥山)※
다마키 신사 (玉置神社)
고헤치 (小辺路)《고야 산 - 구마노산잔, 약70km》
나카헤치 (中辺路)《다나베 - 구마노산잔》
다이몬자카 (大門坂)※
구마노 강 (熊野川)
구모토리고에 (雲取越え)
오헤치 (大辺路)《다나베 - 구시모토 - 구마노산잔, 약120km》
이세치 (伊勢路)《이세 신궁 - 구마노산잔, 약160km》
이세 신궁(일본어: 伊勢神宮, いせじんぐう)은 미에 현 이세 시에 있는 신사이고, 신토의 중심적인 시설이자 조직이다. 법적으로는 종교 법인이며, 일반 사무소에 해당되는 조직은 진구 지청으로 불린다.
정식으로는 신궁라고 칭하며 내궁, 외궁을 시작해 별궁, 섭사, 말사, 소관사 등 총수 125개의 사의 총칭이다. 이 경우에 소재지는 이세 시가 아니라 4시 2군에 걸치게 된다.
가장 주요한 시설은 황대 신궁과 이세 신궁의 2궁중 하나이다.
관련된 시설으로는 신궁 미술관, 신궁 농업관, 신궁 문서 등이 있다.

하나노이와야 신사 (花窟神社)
오니가 성 (鬼ヶ城)※
사자암 (獅子岩)※
시치리 해변 (七里御浜)《미에 현 구마노 시 - 미에 현 미나미무로 군 기호 정》
고야산초이시미치 (高野山町石道)《곤고부지 - 지손인》
기이치 (紀伊路)《오사카 - 다나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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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구스쿠 유적 및 류큐왕국 유적'

[세계문화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구스쿠 유적 및 류큐왕국 유적' 국내외 여행정보 2008.11.03 20:07

[세계문화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구스쿠 유적 및 류큐왕국 유적'






세계문화유산 '구스쿠 유적 및 류큐왕국 유적'

영문명 Gusuku Sites and Related Properties of the Kingdom of Ryukyu
프랑스명 Sites Gusuku et biens associés du royaume des Ryukyu
등록구분 문화유산
등록년 2000년


구스쿠 유적 및 류큐왕국 유적 (일본어: 琉球王国のグスク及び関連遺産群 류큐오코쿠노구스쿠 오요비 간렌이산군[*])는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구스쿠 등과 류큐 왕국의 사적지이다. 구스쿠는 류큐어로 성(城)을 의미한다. 사적지 대부분은 오키나와 섬 남부에 있다.


등록 유산



나키진 성터 (今帰仁城跡)

 

자키미 성터 (座喜味城跡)

 

가쓰렌 성터 (勝連城跡)

 

나카구스쿠 성터 (中城城跡)

 

슈리 성터 (首里城跡)



슈리 성(일본어: 首里城/しゅりじょう 슈리 죠[*], 오키나와어: sui ugusiku)은 오키나와 현 슈리(현재의 나하 시의 일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예전에는 해외무역의 거점인 나하 항을 내려보는 언덕에 있던 성이다.

류큐 왕국의 왕성으로, 오키나와 현 내 최대 규모의 성(구스쿠)이다. 전쟁 전에는 세이덴등이 국보였지만, 1945년의 오키나와 전투과 전쟁 후의 류큐 대학 건설에 의해 완벽하게 파괴되어, 얼마 안되는 성벽이나 건물의 기초등의 일부가 남아있다. 1980년대 전말의 류큐대학의 니시하라 정으로 이전과 함께, 본격적인 복원은 1980년대 말부터 행해져, 1992년에, 세이덴 등 옛 유적을 묻어서 되돌리는 형태로 복원되었다. 1993년에 방송된 NHK 대하 드라마 《류큐의 바람》의 무대가 되었다. 2000년 12월, “구스쿠 유적 및 류큐왕국 유적”으로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지만, 등록은 “슈리성 터”(しゅりじょうあと)로, 복원된 건물이나 성벽은 세계유산이 아니다.

주위에는 같은 세계유산에 등록된 타마우돈, 소노햔우다키 석문 외, 제2쇼씨의 보다이 절인 엔카쿠 절 터, 국학 공자 묘적, 뱃놀이가 행해진 연못인 류후치, 베자이덴도 등의 문화재가 있다.

 
소노햔우타키 석문 (園比屋武御嶽石門)

 

다마우돈 (玉陵)

 

시키나엔 (識名園)

 

세이화우타키 (斎場御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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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닛코의 사원'

[세계문화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닛코의 사원' 국내외 여행정보 2008.11.03 19:07

[세계문화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닛코의 사원'






세계문화유산 '닛코의 사원'


영문명 Shrines and Temples of Nikko
프랑스명 Sanctuaires et temples de Nikko
등록구분 문화유산
등록년 1999년


닛코의 사원 (일본어: 日光の社寺 닛코노 샤지[*])는 도치기 현 닛코 시에 있는 사원을 말한다. 199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닛코의 사원이 있는 지역에서는 니샤이치지(일본어: 二社一寺)라고 부르고 있다.
이들 건조물 103동은 국보 9개동, 중요문화재 94개동이 있다. 그 밖에 이들을 둘러싼 주변 경관이 있다.


 

등록 유산

닛코 도쇼궁 (日光東照宮)


닛코 동조궁(日光東照宮)은 일본 도치기 현 닛코 시에 있는 동조궁(도쿠가와 사당)이다.
1617년 건립되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유골이 안장되었다. 이후 막부의 중요한 행사가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닛코 후타라산 신사 (日光二荒山神社)



닛코 린노지 (日光輪王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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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고도 나라의 문화재'

[세계문화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고도 나라의 문화재' 국내외 여행정보 2008.11.03 18:56

[세계문화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고도 나라의 문화재'





 

세계문화유산 '고도 나라의 문화재'




영문명 Historic Monuments of Ancient Nara
프랑스명 Monuments historiques de l'ancienne Nara
등록구분 문화유산
등록년 1998년


고도 나라의 문화재 (일본어: 古都奈良の文化財 고도 나라노 분카자이[*])는 나라 현 나라 시 지역에 있는 사찰을 말한다. 199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등록 유산

도다이지 (東大寺)



쇼소인 (正倉院)



고후쿠지 (興福寺)



가스가 신사 (春日大社)



간고지 (元興寺)



야쿠시지 (薬師寺)



도쇼다이지 (唐招提寺)



헤이조 궁 (平城宮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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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이쓰쿠시마 신사'

[세계문화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이쓰쿠시마 신사' 국내외 여행정보 2008.11.03 18:45

[세계문화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이쓰쿠시마 신사'

 



세계문화유산 '이쓰쿠시마 신사'




영 문 명 Itsukushima Shinto Shrine
프랑스명 Sanctuaire shinto d'Itsukushima
등록구분 문화유산
등록년도 1996년

 


이쓰쿠시마 신사(일본어: 厳島神社 이쓰쿠시마 진자[*])는 히로시마 현 하쓰카이치 시의 이쓰쿠시마 섬(미야지마 섬)에 있는 신사이다.

헤이안 시대 말에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가 세운 1400년의 역사를 갖는 신사로 1996년에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신사가 있는 이쓰쿠시마 섬은 "아키노 미야지마"(安芸の宮島)라고 불리며 일본 삼경(日本三景)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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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히로시마 원폭 돔'

[세계문화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히로시마 원폭 돔' 국내외 여행정보 2008.11.03 18:28

[세계문화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히로시마 원폭 돔'






세계문화유산 '히로시마 원폭 돔'

영어 명칭 Hiroshima Peace Memorial (Genbaku Dome)
프랑스어 명칭 Mémorial de la paix d'Hiroshima (Dôme de Genbaku)
등록 구분 문화유산
등록 연도 1996년


원폭 돔(일본어: 原爆ドーム)은 본래 1915년 건설된 히로시마 시의 상업전시관으로, 1945년 8월 6일 제2차 세계 대전중 미국이 히로시마에 투하한 원자폭탄의 피해로 반파되고 남아있는 전쟁유적 중 하나이며, 1996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


원폭 돔 위치

주소는 히로시마 현 히로시마 시 나카 구 오테 정 1정목 10이다. 서쪽에는 원자폭탄투하의 목표였다는 아이오이 다리가 놓여있다. 남쪽으로는 모토야스 강에 인접해있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이 펼쳐져 있다. 북쪽으로는 히로시마 시민구장이 인접해있다. 동쪽으로 약 200m 쯤 떨어진 곳에 폭심지인 시마 병원이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시내 노선전철을 타고 원폭 돔앞 역에서 내리면 되고, 버스인 경우, 시민구장 앞 정류장에서 내리면 된다.


원폭 돔 연혁

준공에서 전시까지

히로시마 현 상품진열소 (1921 ~ 33년경)현재 원폭 돔의 명칭으로 알려진 폐건물은 원래 지상 3층, 지하 1층의 벽돌로 지어졌으며, 건물 중앙에는 돔 지붕을 둔 지상 25m 높이의 건물이다. 1915년 4월 5일 준공하여 같은 해 8월 5일 히로시마 현 물산진열관으로 개관하였다. 건물은 체코인 건축가 얀 렛트르가 설계한 바로크 양식의 건물로 빈 분리파 풍으로 세부 장식을 했다. 1919년 개최된 독일 작품 전시회에서는 제과업자 캄 유하임[1] 이 일본에서 처음 바움쿠헨을 제조판매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 후 1921년 히로시마 현 상품진열소로 되었고, 같은 해에는 제4회 전국 과자 대박람회의 회장으로 사용되었다. 1933년 히로시마 현 산업장려관으로 개칭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활발히 미술전을 개최하여 히로시마에 있어 미술 보급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1944년 이후, 산업장려관의 업무는 중지되었고, 내무성 주고쿠 시코쿠 토목사무소, 히로시마 현 지방 목재주식회사, 일본 목재 히로시마 지사등, 행정 기관 및 통제조합 사무소로 사용되었다.

피폭시 상황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이었고, 투하는 15분 이후 16분에 폭발했다고도 전해진다. 원폭 돔 남동쪽 상공 약 600m 지점에서 원자폭탄 리틀 보이가 작렬했다.

원폭 작렬후, 건물은 0.2초 동안 열선에 둘려싸였고, 0.8초후 충격파에 따른 폭풍을 맞이하였다. 그로부터 1초도 안되어 순식간에 붕괴했다고 사료된다. 3층 건물의 본체부분은 대부분 전파되었지만, 중앙의 돔부분은 전파를 면했고, 외벽을 중심으로 건물일부가 잔존해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충격파를 받은 방향이 대부분 건물과 일직선이었기 때문에 충격을 덜 받았다.[2]
건물에 창이 많았기 때문에 후폭풍의 위력이 반감되었다.
본체부분의 지붕은 충격에 의해 형태가 찌그러졌지만, 돔 부분의 지붕은 철보다도 녹는점이 낮은 동판이였고, 후폭풍이 도달하기 직전 열선에 녹았기 때문에 바람의 영향을 덜 받았다.
건물내에 있던 직원등 약 30명은 열선과 폭풍으로 전원 즉사했다고 추정하고 있다.[3] 또한 전날 밤 숙직을 했던 현지방 목제회사의 직원 4명중 한명은 피폭직전인 8시를 전후하여 자택으로 귀가하였기 때문에 숙직자중 유일한 생존자였다.

그 후, 잠시 동안 창틀 등이 불타지 않고 남아있었지만, 곧 가연물에 불이 붙어 산업장려관은 전소하였고, 벽돌과 철골 등만 남게되었다.

원폭 돔의 보존

원폭 돔은 원자폭탄의 참상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편으로는 비참한 전쟁을 떠오르게 한다며 철거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어 존폐의 여부가 논의되어 왔었다. 히로시마 시는 경제적 부담 등을 이유로 원폭 돔의 보존에는 소극적이였다. 그러나, 1960년 평화운동가 가와모토 이치로를 중심으로 원폭 돔의 보존을 요구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의 주동자인 가와모토 이치로는 피폭 휴유증의 일종인 급성백혈병으로 죽은 여고생의 일기를 읽고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1966년 히로시마 시의회가 영구보존을 결의하였고, 그 후 풍화을 막기위해 정기적으로 보수공사를 하게되었다. 1995년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더욱이 다음해인 1996년 12월 5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의 등록이 결정되었다. 최근에는 출입금지 구역에 들어가 낙서를 하는 등 문제가 되고 있다.

또, 2004년 이후, 원폭 돔의 보존방침을 검토하기 위해 《평화기념시설 유지를 위한 간담회》를 개최하였고, 박물관으로 이설하거나, 지붕을 단다거나 하는 방법 등이 의논 되었지만, 2006년에 앞으로도 원상태 그대로 보존하는 방침으로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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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시라카와고·고카 산의 갓쇼즈쿠리 마을'

[세계문화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시라카와고·고카 산의 갓쇼즈쿠리 마을' 국내외 여행정보 2008.11.03 18:20

[세계문화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시라카와고·고카 산의 갓쇼즈쿠리 마을'




 

세계문화유산 '시라카와고·고카 산의 갓쇼즈쿠리 마을'





영어 명칭 Historic Villages of Shirakawa-go and Gokayama
프랑스어 명칭 Villages historiques de Shirakawa-go et Gokayama
등록 구분 문화유산
등록 연도 1995년


시라카와고・고카 산의 갓쇼즈쿠리 마을 (일본어: 白川郷・五箇山の合掌造り集落 시라카와고・고카야마노 갓쇼즈쿠리슈라쿠[*])은 히다 지방의 시라카와고(白川郷:기후 현 오노 군 시라카와 촌)와 고카 산(五箇山:도야마 현 난토 시)에 있는 갓쇼즈쿠리로된 지붕을 가진 마을로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

갓쇼즈쿠리는 에도 시대부터 시작된 양잠을 위해 지붕 안에 선반을 설치한 것이 시초라고 전해진다. 폭설로 인한 눈치우기 작업의 경감과 지붕안의 공간 확대를 위해 지붕을 크게 경사지게 지어, 지금의 독특한 세로지붕으로 되었다고 생각된다.

또, 갓쇼즈쿠리 지붕은 어느 가옥도 동서로 향해 있다. 이것은 지붕에 빛이 잘 들게 하기 위한 것이고, 마을은 남북으로 길쭉한 골짜기에 있다. 그래서 남과 북으로는 강한 바람이 불기 때문에 바람을 맞는 면적을 작게 하기 위함도 있다고 한다.

갓쇼즈쿠리로 된 집을 사수하기 위한 지역주민의 연대형식인 《유이(結)》에 의해 지붕의 보수와 교체가 30년 ~ 40년에 한 번 이루어지고 있다. 지붕의 띠 교체에는 많은 일손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전체의 지붕의 띠를 교체하는 데에는 이틀이 걸린다.

시라카와고와 고카 산의 지역은 폭설지역으로 인해 주변 도로정비가 늦어져 갓쇼즈쿠리로 된 주거구조가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지역인구의 감소와 주민의 고령화 때문에 유이(結)의 활동에 의한 갓쇼즈쿠리의 유지활동에도 제동이 걸린 실정이다.

세계유산 등록후, 급격히 관광객이 증가하였다. 근처에 놓여있는 고속도로의 전면개통 예정인 2008년도 앞두고 있다. 지역사회의 생활과 관광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생하고 있다. 가령 현주거지와 상관없이 관광객이 멋대로 문을 여는 등, 주민들의 사생활를 존중하지 않는 몰상식한 행동 등이 있었다.

시라카와고와 고카 산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엄격히 말하자면 시라카와고의 오기 정(荻町)과 고카 산의 아이노쿠라(相倉), 스가누마(菅沼) 세 마을이다. 오기 정은 1976년, 아이노쿠라와 스가누마는 1994년에 중요 전통적 건조물군 보존지구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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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자연유산 '야쿠 섬'

[세계문화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자연유산 '야쿠 섬' 국내외 여행정보 2008.11.03 17:30

[세계자연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자연유산 '야쿠 섬'


 



세계자연유산 '야쿠 섬'



영어 명칭 Yakushima
프랑스어 명칭 Yakushima
등록 구분 자연유산
등록 연도 1993년


야쿠 섬(일본어: 屋久島, やくしま)은 규슈 오스미 반도에서 남남서쪽으로 약 60 km 떨어져 있는 가고시마 현의 섬이다. 다네가 섬, 구치노에라부 섬 등과 함께 오스미 제도를 이룬다. 면적은 504.88 km²로 오각형에 가깝다. 아마미 제도에선 2번째, 일본 전체에선 9번째로 큰 섬이다. 199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선정되었다.


고층습원 《고하나노에고》섬의 둘레는 132km이며 대부분은 화강암으로 이루어 져있다. 중앙부에는 일본 100명산 중하나인 미야노우라 산이 위치해 있다. 그 외에도 다수의 1,000m급 산들로 이루어 져 바다위의 알프스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고 있다. 이런 연유로 바다로부터 습한 공기가 산을 타고와 많은 비를 뿌린다. 연강수량은 평지에서 약 4,000mm, 산지에서 약 8,000mm에 달한다. 아열대 지역에 위치하지만, 높이 2,000m 가까운 산들로 인해 아열대에서 아한대에 이르는 다양한 식물군이 자라고 있다. 섬 중심부에는 일본 최남단의 고층습원인 하나노에고, 고하나노에고 외에도 산 정상부근은 연평균기온 약 5도로 저온이기 때문에 적설을 관측할수 있다. 일본에서 적설을 관측할 수 있는 최남단 지역이다.

야생동물로는 원숭이, 사슴이 다수 살고 있다. 또, 외래종 너구리가 살고 있어 민가의 농작물에 피해를 주고 있다.

야쿠 삼나무, 대만고무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섬 북부 연안의 모래톱은 붉은바다거북의 산란지이며, 람사르 협약에 등록된 습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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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히메지 성'

[세계문화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히메지 성' 국내외 여행정보 2008.11.03 17:23

[세계문화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히메지 성'







세계문화유산 '히메지 성'



[ 히메지 성, 사진 출처 : http://jssel.egloos.com ]
영어 명칭 Himeji-jo
프랑스어 명칭 Himeji-jo
등록 연도 1993년




히메지 성(일본어: 姫路城, ひめじじょう 히메지조[*]은 효고 현 히메지 시에 있는 제곽식 평산성이다. 성벽이 백색의 회벽으로 되어 있어 하쿠로 성(白鷺城: 백로 성)이라고 불리고 있다. 《白鷺城》를 잘못 읽어 시로사키 성으로 불리는 경우도 많이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근세 성곽이다. 성 전체는 세계유산이며 국가 사적이다. 천수를 포함하여 여러 건물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현존하는 천수각을 가진 12곳의 성 가운데 한 곳이며, 에도 시대 이전에 건조된 천수를 가진 성곽 중 하나이다. 천수각이 국보인 성은 히메지 성을 포함하여 마쓰모토 성, 이누야마 성, 히코네 성 이 네 곳뿐이다. 이들 성 중에서도 가장 성이 온전히 보존되어, 천하의 명성, 일본 제일의 명성이라고 불리고 있다.

성이 축성된 이래 폐성과 전화의 위기를 모두 면해, 천수를 비롯 많은 건물이 현존해 있고, 그 중에서 대천수, 소천수, 와타리 망루 등 8개동이 국보, 74동의 각종 건조물(망루 27동, 문 15동, 담 32동)이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또, 199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있다.

히메지 성의 주소인 《히메지 시 혼 정 68번지》는 일본의 주소 중 천황의 거처인 고쿄에 이어 2번째의 면적을 자랑한다. 근대에는 육군 보병 제10연대가 주둔했었다.

시대극이나 영화 등의 현지 촬영지로 유명하다.

 

히메지 성의 역사

산요도의 교통이 요지에 히메지 성이있다. 에도 시대에는 도자마 다이묘인 이케다 가문과 신판 다이묘인 마쓰다이라 가문 그리고, 후다이 다이묘가 성주로 역임하였다. 더욱이 서국[1] 도자마 다이묘의 감시를 위해 사이고쿠 단다이(西国探題)가 설치되었다.

무로마치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축성은 1346년 아카마쓰 사다노리가 남북조 시대에 그의 아버지 아카마쓰 노리무라가 히메야마 산에 세웠던 사찰 쇼묘지를 토대로 성을 축성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1441년 가키쓰의 난에서 아카마쓰 가문이 몰락하자 야마나 가문의 세력하에 있게되었다. 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오닌의 난이 일어났고, 이런 혼란한 상황속에 다시 아카마쓰 가문이 이 지역을 탈환하였다.

16세기 전반 고차쿠 성를 중심으로 아카마쓰 가문의 일족인 고데라 가문이 하리마 평야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고데라 가문의 사관이였던 구로다 시게타카가 조다이[2]로 하리마 성에 입성한다. (이 시기 축성설도 있다.) 시게타카에의해 소규모 성채정도에 불과하던 히메지 성을 개축한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고 히메야마 산의 지형을 잘 살린 중세성곽이라고 생각된다. 1573년까지 구로다 가문 대대로 조다이에 역임되었지만, 1576년 오다 노부나가의 명을 받은 하시바 히데요시가 하리마에 주둔하자, 하리마 국내에서는 오다 가문을 지지하는 세력과 모리 가문을 지지하는 세력이 대립하게 되었고, 결국엔 오다 가문을 지지하는 세력이 승리하게 되었다. 모리 가문을 지지했던 고데라 가문은 몰락하자, 사관으로 있던 구로다 요시타카는 재빨리 하시바 히데요시 슬하로 들어가게된다.

1580년 구로다 요시타카는 히데요시에게 히메지 성을 본성으로 삼도록 성을 헌상한다. 히데요시는 같은 해 음력 4월부터 다음해 음력 3월에 걸쳐 성을 대폭 개수하였고, 히메지 성은 근세성곽으로 재탄생되었다. 당시 유행했던 석벽으로 성을 둘렀으며, 더욱이 성에 천수를 세운다. 이 천수는 3층이였다고 전해진다. 성의 남부에는 대규모 성하 마을이 생겼으며, 히메지를 하리마 국의 중심지가 되도록 정비하였다. 이 시기 히메지 북쪽으로 지나던 산요도를 끌어들여 히메지의 성하 마을을 관통하게 정비하였다.

1582년 음력 6월 히데요시는 주군 오다 노부나가를 죽인 아케치 미쓰히데를 야마자키에서 격파하고 단숨에 천하 폐자의 자리에 올랐다. 다음해인 1583년 자신의 거처를 오사카 성으로 옮기고, 히메지 성은 동생 하시바 히데나가에게 주었지만, 히데나가도 1585년 야마토 고리야마 산성으로 이봉되었기 때문에 이를 대신하여 사돈 관계인 기노시타 이에사다가 히메지 성에 입성 이 지역을 다스린다.

1601년 이에사다는 빗추 아시모리 번으로 이봉되었고, 그를 대신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이케다 데루마사가 하리마 일국 52만석을 영지로 받아 히메지 성에 입성한다. 이 시기 히메지 성은 8년에 걸쳐 대폭 개수되었어며, 성의 면적도 전보다 훨씬 넓어졌다.

에도 시대

히메지 성의 조감도1617년 3대 번주 이케다 미쓰마사가 아직 유아였기 때문에 중요 거점을 맡기기에는 불안하다고 판단, 이나바 돗토리 번으로 전봉 조치한다. 그 후임으로 이세 구와나 번에서 혼다 다다마사가 15만석에 입봉되어 입성한다. 1618년 제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인 센히메와 혼다 다다마사의 아들 혼다 다다토키와의 결혼을 계기로 니시노마루를 정비해, 성의 대부분이 완성되었다.

그 후에도 히메지 번주는 신판 및 후다이 다이묘가 역임되었으며, 1749년 고즈케 마에바시 번에서 사카이 다다즈미가 입봉되어 메이지 유신때까지 대대로 사카이 가문이 성주로 역임했다. 그러나, 고쿠다카 15만석의 히메지 번의 경제력으로는 유지하기에는 너무 벅찬 성이였고, 게다가 번주가 막부의 요직에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번의 경제를 압박했다.

히메지 성은 에도 시대에도 몇 번의 수리가 있었지만, 당시 기술로는 천수의 무게를 못 이겨 지반이 침하되는 것을 보고만 있었고, 게다가 기둥과 들보등의 변형도 심했다. 민요에서도 엿볼수 있는데 《동쪽으로 기운 히메지의 성은 꽃 같은 에도가 그리운가》라고 노래하고 있다.

막부 말기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히메지 번주 사카이 다다토는 로주로써 막부측에 속해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같이 있었기 때문에 히메지 번도 조정의 적으로 인식되어 오카야마 번과 다쓰노 번의 병사 1,500명에 포위되었다. 이 때 이케다 데루마사의 자손인 이케다 모치마사가 이끄는 오카야마 번의 부대가 히메지 성을 향해 수발의 공포탄을 쏘아 위협사격을 하는 중에 실탄도 발사되어 한발이 남서쪽의 福中門에 명중되었다. 신정부군의 히메지 성 총공격이 불가피해 보였지만, 셋쓰의 호상 기타가제 쇼조가 15만량을 신정부군에 헌상해 무력충돌을 막았다. 그 간에 번주를 대신하여 성을 관리하던 가신들이 개성을 결정하였고, 신정부군과 화친하였다. 이렇게 해서 히메지 성에서 일어난 무력충돌은 일단락되었다.


메이지 시대 이후

1871년 (메이지 4년) 폐번치현과 1873년 (메이지 6년)에 공포한 폐성령에 따라 일본의 많은 성들이 해체 매각되었다. 히메지 성도 경매에 붙여져 요네다 정에 사는 한 개인에게 23엔 50전에 낙찰되었다. 성의 기와를 팔 목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해체 비용이 너무 던다는 이유로 지지부진하자 성에 대한 권리가 소멸되었다. 그 후 1927년 (쇼와 2년) 그의 아들이 히메지 성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다는 기사가 났지만, 별개의 신문이 후일 취재한 결과 사실무근이란 기사를 실었다.

성터에는 진지로서 최적의 장소라 생각한 군은 부대를 성터에 배치하였다. 그 예로 1874년 (메이지 7년) 히메지 성내에 보병 제10연대가 주둔하였고, 그 때 본성(本城) 등의 산노마루에 있는 건물과 무사시노 어전 등 다수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더욱이 1882년에 일어난 화재로 비젠마루가 소실되었다.

한편 메이지 시대 초기에 실행된 개혁이 일단락된 1877년 (메이지 10년)무렵에는 일본의 성곽 보존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있었고, 그에 따라 1878년 육군의 건축담당부서의 나카무라 시게토 대좌[3]가 육군성 장관인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나고야 성 및 히메지 성의 보존을 다조칸(太政官)[4]에 제출하도록 요구해, 일말의 성과를 얻었다. 히메지 성의 히시노 문 안쪽에는 나카무라 대좌를 기리는 현창비가 남아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예산의 문제가 남아있었고, 육군의 예산으로는 성의 보존비의 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긴급한 수리만 한 채 방치되고 있어, 지역 유지들이 중의원에 진정서를 제출하여 1910년 (메이지 43년) 국고 보조금 9만3천 엔이 지급되어 성이 대대적으로 수리되었다. 이를 〈메이지 대수리〉라고 한다. 그래도 기울어진 천수를 수리하는 데에는 비용이 부족했고, 천수가 기울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1919년 (다이쇼 8년) 육군성이 니시노마루를 수리하였고, 그 후, 제10연대는 오카야마로 이전되었다.


부전의 성

〈쇼와 대수리〉를 논하기 앞서 히메지 성은 부전의 성(不戦の城)으로 불린다. 이 것은 막부 말기와 태평양 전쟁 때 전화를 모면했기 때문이다. 막부 말기 전화의 위기는 앞서 서술했기 때문에 이제 태평양 전쟁에 대해서 서술하고자 한다.

히메지 성의 성벽은 백색으로 매우 눈에 잘 띌 뿐더러, 육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의 폭격대상이었다. 그래서, 히메지 성의 주요부분에는 검게 칠해진 망이 씌워졌다. 1945년(쇼와 20년) 7월 3일의 히메지 대공습으로 히메지 성 주변은 불길에 휩싸였다. 다행히도 본성 터에 있던 중학교 교사만 소실되었을 뿐이고, 니시노마루의 폭탄 2발은 불발 혹은 곧 소화(消火)되었다. 또, 대천수에도 소이탄이 떨어졌지만 불발로 그쳐, 성 전체는 기적적으로 소실을 면했다. (히메지 성은 중요 문화재로 폭격의 대상이 아니라는 속설이 있지만, 일본의 나고야 성과 독일에 대한 무차별 폭격 등으로 볼 때 신빙성은 없다.) 다음날 아침, 성이 무사한 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쇼와 대수리

히메지 성 대천수의 구조 모형1928년 (쇼와 3년) 히메지 성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문부성의 소관으로 되었다. 실제는 히메지 시가 관리를 맡고 있다. 1931년 (쇼와 6년) 천수각은 국보로 지정되었고, 후에 와타리 망루 등도 국보로 지정된다. 단 이 시점에서 국보는 구(舊) 국보를 뜻하는 것이다. 현재의 중요문화재에 상응한다.

쇼와 대수리는 1934년 (쇼와 9년) 니시노마루의 와타리 망루가 호우에 석벽 등이 붕괴된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건물을 한번 해체한 다음 다시 조립하는 방식이였다. 먼저 천수 이외의 건물을 손받지만, 1944년 (쇼와 19년) 태평양 전쟁의 전국 악화로 중단되었고, 다행이도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이 성이 소실되는 것은 면했다. 1950년 (쇼와 25년) 대수리는 재개되었고, 1955년 (쇼와 30년) 천수를 제외한 모든 건물의 수리가 완료되었다.

1956년 (쇼와 31년)부터 천수의 수리에 착수했으며 특히 천수 전체의 거대한 지붕을 해체 수리하였다. 이에 따라 구조물에 써여있는 여러 문장이 발견되었고, 히메지 성의 연구에도 큰 기폭제가 되었다. 한편 성을 받치고 있던 주춧돌은 철거되였고, 철근콘크리트로된 새로운 주춧돌이 놓이게 되었다. 기존의 주춧돌은 산노마루 북쪽 광장에 그대로 배열되어있다.

천수가 해체될 때 , 이를 지지하던 동쪽 기둥과 서쪽 기둥 중, 서쪽 기둥은 썩어 재사용이 불가능하였고, 이를 대신할 목재를 찾게된다. 효고 현 간자키 군 이치카와 정의 가사가타 신사 경내의 전나무가 검토되었지만, 상부가 휘어있고, 뿌리 부분이 썩었다는 의문이 들어 보류되었다. 1959년 (쇼와 34년)이 되어서야 기후 현 에나 군 쓰케치 정 (현 나카쓰가와 시)의 산에서 적당한 전나무를 찾았다. 하지만, 벌목하는 과정에서 나무가 꺾겨 버렸고, 하는 수없이 그 옆에 나무를 벌목해 운반했지만, 이마저도 나무가 너무 커서 꺾어졌다. 궁여지책으로 두 나무를 잇는 방식으로 가사가타 신사의 전나무와 이어 사용되었다. 실제 예전에 사용되었던 서쪽의 심주도 두 나무를 이어 만든 것이다. 서쪽 기둥은 구조적으로 중앙부부분이 분활되지 않으면 기둥을 세울때 먼저 세워진 동쪽 기둥의 간섭을 받아, 좁은 공간에서 작업을 해야되고, 제대로 조립을 할 수 없었기때문이다.

천수의 수리에 맞추어 기와의 중량을 경감시켰으며, 내진성을 강화시키기 위해 금속제를 새롭게 사용하였다. 한편으로는 석벽 등은 천수에 별 지장을 두지 않는다고 판단되어 대부분 손을 보지 않았다. 천수의 수리는 1964년 (쇼와 39년) 완료되었다.

천수각의 공사비는 약 5억 3,000엔으로, 태평양 전쟁전의 수리비를 물가로 환산해 합산하면 약 10억엔 (1964년 당시 가격)에 해당된다고 사료된다.

1993년 (헤세 5년)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2006년 (헤세 18년) 4월 6일 일본 100대 명성에 선정되었다.


헤이세이 대수리 (예정)

2009년도 착공 ~ 2011년도 마칠 예정이다. 공사비는 10억엔 이상으로 보인다. 목재의 부식이 진행됨에따라 대천수의 옷칠과 기와의 교체, 내진성 보강에 중점을 둘 예정이다. 보수작업중에도 견학할 수 있도록 사항을 검토하고 있다.

 

히메지 성의 구조

기본 배치


[히메지 성의 고지도]

북쪽에서 본 히메지 성과 원시림전형적으로 제곽식 평산성이다. 천수는 히메야마 산 중심에 있으며, 그 주위를 여러 건물과 성벽으로 둘러쳐있다. 전체적으로 볼때 히메야마 산의 북쪽을 기점으로 좌측선회하는 구조로 되어있다. 선회반경은 다시 내 구역, 중간 구역, 외 구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현재 내 구역의 범위가 히메지 성의 범위로 인식하고 있다. 중간 구역, 외 구역에는 성하 마을이 입지해 있기 때문에 이 구역이 히메지 성의 소가마에(総構え)에 해당된다.

내 구역의 내부는 혼마루, 니노마루, 산노마루, 니시노마루, 데마루의 5중 구조로 되어있다. 내 구역 밖에도 미즈쿠루와, 고시쿠루와, 오비쿠루와 등이 있다. 또, 이들 성문은 이로하 순[5]으로 명명되어 좀더 세밀하게 구역을 나누고 있다. 현재 산노마루는 광장으로 사용되고 있고, 데마루의 일부는 히메지 동물원에 속해있다.

이케다 데루마사가 축성한 연도는 정확히 세키가하라 전투와 오사카 전투의 중간 시점이었고, 그런 이유로 실전위주의 방어라인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화려하고 웅장하여 서국 쇼군으로 불리는 이케다 데루마사의 위엄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1615년 에도 막부에 의한 일국일성령에 따라 새로운 성을 축성하거나 성을 개축할수 없게 되어 쇼군의 명령으로 지어진 에도 성과 나고야 성 등을 제외하고는 히메지 성과 같은 규모에 성은 지어지지 않았다.

히메야마 산 북부에는 축성 이전부터 원시림이 존재해, 예전부터 혼마루로부터 원시림으로 통하는 비밀통로가 존재한다는 소문이 있지만, 현시점에서 통로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았다. 산노마루부터 니시노마루의 석벽 밑에는 사기야마구치 문이 내측해자로 연결되어 있다.

히메야마 산의 서쪽에 있는 센바 강(船場川)은 내측해자 가까이에서 흐르고 있어 해자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강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예부터 여기를 수운으로 이용했었다.

통로와 문

통로는 미로와 같이 구불구불하거나 넓어졌다 좁아졌다하여 천수가 위치한 쪽으로 곧바로 전진할 수 없게 되어있다. 본래의 지형과 하시바 히데요시가 성주로 재임한 시절의 성의 방어라인이 살아있다고 생각된다. 문도 한사람만 드나들 정도로 좁거나, 용도를 모르는 장소와 구조를 가지고 있는 점으로 볼 때 여하튼 앞으로 나가기 어려운 구조를 하고 있다. 이것은 방어를 위한 것이고 적을 분산시켜 좁은 길에서 각개격파를 하기 위한 고안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현재 성의 출입구인 히시노 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앞에 보이는 이노 문, 로노 문, 하노 문의 순으로 가는 길이 천수에 빨리 도착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 히시노 문으로부터 오른쪽에 있는 루노 문으로 가는 쪽이 빠르다. 루노 문은 토사로 묻어 숨길 수 있는 우즈미 문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적에게 불의의 타격을 입히려고 만들어 진 문이라 사료된다. 하노 문부터 니노 문에 이르는 통로는 적병이 성을 방어하는 측에 등을 보이지않으면 전진하기 어렵다. 그리고, 호노 문은 좁은 쇠문이다. 그 후에도 대천수에 도달하려면 천수군 주위를 돌지 않으면 안된다.

천수

연립식인 대천수와 소천수히메지 성의 천수는 현존해있는 12곳의 천수 중 하나이다.

히메지 성의 천수는 히메야마 산 정상에 놓여진 천수대 위에 건립된 것으로 1580년 봄 하시바 히데요시가 삼층천수를 건립한 것이 그 시초이다. 그 후 이케다 데루마사에 의해 해체 되어 이누이 소천수가 세워질때 그 부재로 사용되어 현재 모습을 띄고 있다.

천수의 구조는 동서에 두 심주로 지탱되는 5층6계 지하1층인 7층의 대천수와 3층인 소천수 3개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천수와 천수 사이에는 2층인 와타리 망루로 연결되어 있다. 이런 양식을 연립식이라고 한다. 건축시기와 구성으로 볼때 후기 망루형에 속한다. 전체는 백색의 회벽으로 되어 있어 방화, 내화, 총탄의 방어와 미관상의 이유도 있다고 본다.

천수의 외관은 다른 성의 천수와 비교해도 매우 다채롭다. 다양한 하후를 볼수 있으며 소천수에는 가토마도를 볼수 있다. 가토마도는 후기 망루형 천수인 히코네 성등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누이 소천수의 가토마도는 미완성을 강조하기 위해 격자가 없다.

히메지 성의 천수는 히메야마 산 (표고 45.6m) 정상에 건립되었고, 히메지 성 자체 높이는 석벽이 14.85m, 건물이 31.5m로 도합하자면 해발 92m가 된다. 천수의 총중량은 대략 5,700t이다. 예전에는 6,200t이였지만, 《쇼와 대수리》때 기와 등을 경량화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천수각 안에는 히메지 성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니시노마루

니시노마루(西の丸)에는 와타리 망루인 나가쓰보네(長局), 그리고, 그 북단에 위치한 게쇼 망루(化粧櫓)가 있다.나가쓰보네는 시녀인 지조(侍女)들의 방이다. 게쇼 망루는 혼다 다다마사가 이세 구와나 번에서 하리마 히메지 번으로 이봉되었을 때, 며느리인 센히메의 게쇼료(化粧料)[6] 10만석으로 1618년에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센히메는 니시노마루 안에 있는 주쇼마루(中書丸)와 산노마루(三の丸)의 무사시노 어전(武蔵野御殿)을 거처로 삼았다. 현재 두 건물은 소실되었다. 게쇼 망루(化粧櫓)에는 이름 그대로 화장품(化粧品)의 흔적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고시쿠루와, 미즈쿠루와

기름 벽으로 불리는 토담천수 북쪽에 있는 고시쿠루와(腰曲輪)에는 농성을 위한 우물과 곡물 창고인 고메구라(米蔵)와 소금 창고인 시오구라(塩蔵)가 있었다. 덧붙여 평상시에 사용되던 창고는 히메야마 산 주위에 있었다.

천수의 밑은 암반으로 우물을 팔 수 없었고, 그 때문에 천수와 고시쿠루와 사이에는 미즈쿠루와(水曲輪)를 두어, 미즈 일문(水一門)부터 미즈 오문(水五門)까지 문을 설치하였다.

고시쿠루와 안에는 호노 문 내측에 기름 벽(油壁)이라고 불리는 토담이 있다. 백색 회벽인 다른 담과 달리 차색(茶色)인 것이 특징이다. 만드는 방법과 그 이유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하고 그중 히데요시가 성주 였을 때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도 있다.

하라키리마루

본래 성의 방어와 사격 등으로 사용되던 장소였지만, 어스레한 분위기 탓에 이러한 이름이 생겼다고 사료된다. 실제 할복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고, 애당초 성안에서 죄인 등을 할복시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방어시설

이시오토시가 설치된 망루와 사마가 있는 담성벽의 담에는 수많은 구멍이 있다. 이것을 사마(狹間)라고 하는데 일종의 사격용 구멍이다. 대체로 사각형으로 된 것은 야사마(矢狹間)이며 그 외의 것은 뎃포사마(鉄砲狭間)이다. 야사마는 활을 사용해 적을 공격하는 구멍이며, 뎃포사마는 조총을 사용하여 적을 공격하는 구멍이다. 또, 천수의 벽에도 사마를 볼수 있다. 그리고, 각각의 건물에는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병에게 돌과 끓은 물로 공격할 수 있도록 이시오토시(石落し)가 설치되어 있다.

그 밖의 특징적인 구조물

건물과 담의 지붕에 있는 기와 등에서 역대 성주로 역임했던 가문의 문장들을 볼 수 있다. 이케다 가문의 호랑나비 문양, 도요토미 가문의 오동나무 문양, 혼다 가문의 아욱 문양 등이다. 그중에서 열십자 문양의 기와도 있다.

성주의 거관

애당초 성주의 거관은 천수대 아래에 있는 혼마루로 비젠마루(備前丸)로 불리고 있다. 이는 이케다 데루마사의 소령과 연관된 이름이다. 그러나, 비젠마루는 산 정상에 있는 탓에 불편하였고, 혼다 다다마사가 히메지 번으로 이봉되었을 때 산노마루에 혼조(本城)라는 거관을 지어 그곳에서 생활하였다. 제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 시대의 성주 사카키바라 마사미네가 요시와라 유곽으로부터 다카오다유[7]를 낙적(落籍)[8]시켜 살계한 니시야시키(西屋敷)가 있었다. 현재 니시야시키 터는 히메지 성의 정원인 고코엔(好古園)으로 정비되었다.

현재 산노마루의 본조(本城)가 있었던 자리는 정원인 센히메보탄엔(千姫ぼたん園)으로 정비되었고, 무카이야시키(向屋敷)가 있던 자리는 산노마루 광장으로 정비되었다. 이 산노마루 광장은 시민들의 휴식처 및 이벤트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중간 구역, 외 구역

중간 구역에는 무가 저택이 있었고, 외 구역에는 하급무사와 마을 주민들이 거주하였다. 현재 히메지 시 중심부에 남아 있는 마을 이름에서 그 마을의 성격을 알수 있다. 일례를 들자면 가누치 정(鍛冶町:대장장이 마을), 고야 정(紺屋町:직물을 염색하는 사람들의 마을) 등의 장인 마을과, 고메야 정(米屋町:미곡상 마을), 시오 정(塩町:소금상 마을) 등의 상인 마을, 고쇼 정 (小姓町:신분이 높은 사람을 보좌하는 사람의 마을) 다카조 정(鷹匠町:매를 키우는 사람의 마을) 등의 신분과 관련있는 마을, 가미데라 정(上寺町), 시모데라 정(下寺町) 등의 사찰 관련 마을 등이 있다. 에도 시대에 이렇게 성곽 안에 많은 마을이 입지해 있는 경우는 드물다. 이와 같이 도시을 둘러싼 성곽이 있는 경우를 소가마에(総構え)라고 한다. 그 밖에 소가마에가 유명한 성으로는 에도 성과 오다와라 성이 있다. 오늘날 중간 구역과 외 구역에는 해자와 석벽의 일부가 남아있고, 국도 372호(国道372号) 주변에는 다케노몬 교차로(竹の門交差点), 노자토 길(野里街道) 인근에는 노자토몬 우체국(野里門郵便局)라는 형태로 문의 이름이 남아있다. 외 구역 남쪽에는 산요 본선 히메지 역 부근에까지 달하고 있다.

그 외에도 히메지 성 주소지인 히메지 시 혼 정 68번지(本町68番地)는 주위에 경찰서, 고등학교, 미술관등이 있다. 번지로는 고쿄의 도쿄 도 지요다 구 지요다 1번지 다음으로 면적이 넓다. 혼 정 68번지(本町68番地)는 내 구역 및 중간 구역에 해당되며 메이지・다이쇼 시대에는 육군 보병 제10연대가 주둔했었다. 1980년대 이후 이 일대는 정비되거나 재개발되어 다채로운 문화시설과 관광명소가 자리잡고 있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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