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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요리의 등장

중화요리의 등장 요리 맛집 정보 2008.09.06 13:27

중화요리의 등장

'불의 예술' 음식 먹는 순간에도 식재료는 계속 익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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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화 시기 중국을 떠난 화교들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화교, 이제는 한국인과 윈-윈 행보

1992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행되기 전만 해도 우린 '우짜짬(우동·자장면·짬뽕)'이 중화요리의 전부인 줄로만 알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중화요리집에 가도 메뉴판의 앞줄 근처에서만 맴돌았다. 뒤로 갈수록 음식명이 너무 어려워 주눅들어 못시켜 먹은 것도 사실이다.

중국 본토에는 없던 자장면(중국엔 간짜장만 유통된다), 그게 한국에서 맨처음 태어난 곳은 인천시 중구 북성동 공화춘(共和春)이다. 현재 인천시가 이 건물을 사들여 자장면 박물관으로 개조할 계획이란다. 올해는 자장면이 한국에 들어온 지 100년이 되는 해라서 화교들은 요즘 화상 100주년 기념행사를 벌이고 있다.

중국과 한국 사이에서 방황했던 화교들, 요즘 한국인과 눈높이로 만나 '윈-윈(Win-Win)전략'을 짜고 있다. 오랫동안 공화춘은 전국 화교들의 자존심이었다.

그런데 2003년 2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사건이 벌어진다. 강원도 출신의 프랜차이즈 전문가 최완배씨(41)가 화교들의 맘을 움직인 것이다. 그들의 묵인하에 공화춘 브랜드를 소유한 데 이어 전국에선 처음으로 중화요리 체인망을 구축한 것이다. 그는 주방 멤버도 한국인 대신 화교를 채용했다.

70년대만 해도 대구 동성로 교동시장 근처에 공화춘이 있었는데 그 무렵 지역의 유명 중화요리집을 전전하며 요리술을 배웠고 90년대 후반 전국에선 처음으로 '전가복(全家福) 붐'을 일으킨 연경반점 대표 손보충(47). 그는 '화교는 한국인들에게 좀 인색하다'는 고정관념을 불식시켰다. 그래서 '맘좋은 손보충'이란 말까지 생겨났다. 그는 공화춘의 최 대표와 달리 주방 멤버를 모두 한국인으로만 뽑았다. 심지어 자기 아이들까지 화교학교에 보내지 않고 한국인 학교에 보내고 있다.

#어떤 재료로도 음식을 만들어낸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중화요리는 빙산의 일각이다. 중국에는 지구상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음식이 다 모여있다. 쓰고, 짜고, 달고, 시고, 매운 '오미(五味)'가 지역별로 잘 분화돼 있다. 황하유역의 북경요리, 서부의 사천요리, 남부의 광동요리, 양자강 유역의 상해요리가 균형을 잘 이루고 있다. 개발된 음식을 하루에 한 가지씩 먹는다 해도 살아 생전 다 먹기 어렵다

.화교 조리사들은 종종 "중화요리는 들어가는 문만 있고 나오는 문은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지상에 존재하는 뭘 갖고도 요리를 만들 수 있다"고 장담한다. 원하면 모기눈으로도 요리를 만들 수 있다.

특히 수타면(手打麵) 달인들의 손놀림은 신기에 가깝다. 용의 수염처럼 가늘게 빼낸 '용수면(龍鬚麵)'은 실처럼 바늘 귀를 통과한다.

벌겋게 달궈진 프라이팬에 고급 식용유를 두르고, 그 위에 각종 식재료를 올려 화염 속에 휩싸이게 한다. 순간적으로 손목 힘을 이용, 식재료를 공중으로 튀기면서 '반생반숙(半生半熟)' 상태로 쟁반에 올려준다. 신선한 음식재료는 불판에 닿는 순간 '기절(진공상태)'하기 때문에 구조가 거의 변형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중화요리는 '불의 예술'로 불린다. 중화요리의 본요리는 순식간에 끝내야 된다. 절대로 음식을 다 익히지 않는다. 음식을 먹는 순간에도 식재료가 계속 익어가도록 배려한 것이다.

#일제시대 때만해도 청요리로 불렸다

일제 때만해도 중국 요리는 '청요리(淸料理)'로 불렸다. '청나라 요리'란 뜻이다. 그것이 49년 중국대륙이 마오쩌둥 치하가 된 뒤부터는 중화요리로 자릴 잡게 된다.

예전 화교들은 워낙 가난해 별도로 식당을 차릴 수 없었다. 거의 살림집에서 음식을 팔았다. 한국인들은 화교들의 식당을 두고 적당한 명칭이 생각나지 않아 그냥 '중국인이 사는 곳'이란 의미로 '중국집'이라고 했다. 물론 '중국집' '자장면집' '짱꿰집' 등은 화교들을 하대하는 말이기 때문에 삼가는 게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칼국수, 라면, 우동, 짬뽕, 만두, 울면, 쫄면 등 세상 모든 면의 고향인 중국. 거기서 태어난 중화요리(中華料理). 그것이 한국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소개된 건 1882년 임오군란 때였다. 1883년 인천이 원산(1881년)에 이어 개항된다. 흥선 대원군이 정권을 되찾자 민비가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했고 이때 4천500여명의 청나라 군졸들이 인천을 통해 한국으로 들어온다. 물론 그들 속에 화상들이 섞여 들어와 한국에 눌러 앉는다. 1885년만 해도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서울의 상점은 300여집. 하지만 이때만 해도 중화요리집 시대는 아니었다. 그들 대다수는 중계무역상들이었다.

#19세기말 중화요리집은 만두·호떡집

혈혈단신 한국으로 온 화교들은 먹고 살기 위해 분식점 같은 조그마한 식당을 열었다. 하지만 중국 본토도 아편전쟁, 대기근 등으로 인해 살기 어려워지자 남은 가족들도 한국으로 이주하게 된다. 19세기말 화교들의 상점은 구멍가게 수준이었다.

이때 유행한 중국음식은 쟈오쯔(餃子)와 젠빙(煎餠). 쟈오쯔는 원나라 지배를 받던 고려 때 들어왔는데 그때 고려인들은 만두(饅頭)라고 불렀다. 젠빙은 '북방오랑캐 호(胡)가 먹는 떡(餠)'이란 뜻의 호떡을 의미한다. 다시말해 임오군란 시절 중화요리집은 자장면집 스타일이 아니었고 만두·호떡집이었다. 만두 종류도 다양했다. 물만두인 쉬짜오쯔, 찐만두인 정쟈오쯔, 군만두인 젠쟈오쯔, 냄비교자인 궈테(鍋貼) 등이 주종을 이룬다. 19세기말 화교 부자들은 자장면이 아니라 만두와 호떡을 팔아서 돈을 번 것이다.

1900년도로 접어들면서 소규모 만두·호떡집과 함께 대규모 중화요리집 시대가 열린다. 화교들은 1905년 공화춘을 비롯하며 인천 자유공원 남측 일본인 거리에 있던 대불호텔을 매입해 북경요리 전문점 중화루를 오픈한다. 이 중화루가 최초의 매머드 중화요리집으로 불리고 이때부터 청요리 전성시대가 시작된다.

#만두 요리법 6·25때 대구에 본격 유입

화교들의 만두 요리법은 6·25때 대구로 본격적으로 유입된다. 현재 대구의 태산만두, 선미만두, 영생덕 등이 만두 전문 중화요리집으로 유명하다. 화교의 만두 기술은 한국인들이 절묘하게 활용한다. 61년 생겨난 중구 동성로 미성당, 63년 오픈한 남산초등학교 맞은편 미성당은 대구를 '납작만두 도시'로 급부상시킨다. 납작만두는 중국 만두가 가진 특유의 느끼함을 없애기 위해 돼지고기 대신 부추 등 각종 나물을 많이 넣은 '다이어트 만두'였다.

90년대 들어 중화요리 인식 새로워져…풀코스 요리 인기

한국에선 중식 요리사 자격증에 합격하려면 20∼30가지 요리만 만들 줄 알면 된다.
그러나 그 자격증도 현장에선 무용지물. 아직 한국엔 제대로 된 중화요리 전문 기관이 없다. 고수가 되기 위해선 머릴 숙이고 베테랑 스승 밑으로 들어가야 된다. 그게 너무 힘들어 한국 중화요리사들은 정면 돌파하지 않고 독자노선을 걷는다. 결과는 비참하다. 분식집 수준의 중화요리집으로 주저앉고 만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건 고급 요리를 찾는 한국 VIP 단골이 전무한 탓도 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대다수 한국인 손님들은 중화요리집에서 돈나가는 별스러운 메뉴를 주문할 줄 몰랐다. 코스 요리는커녕, 양장피·유산슬 수준도 못넘었다.

그런데 92년부터 중화요리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는 전기를 맞게 된다. 해외여행 자유화 바람이 불어 중국 관광에 나선 사람들이 자장면·짬뽕·우동이 중화요리의 대표격이 아니란 걸 절감한다. 그 덕분에 한국에서도 풀코스 요리가 인기를 얻는다. 한국인들도 매머드 중화요리집을 잇따라 오픈한다. 대구의 경우 만리장성이 한국인 중화요리집 1호로 자릴 잡고 뒤이어 80∼90년대 아서원, 자금성, 금룡, 동보성 등이 가세한다. 이춘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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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자장면-짬뽕

우동-자장면-짬뽕 요리 맛집 정보 2008.09.06 13:24

우동-자장면-짬뽕

자장면 없는 中 간자장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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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엔 자장면이 없다

중국엔 자장면은 없고 간자장만 있다.

간자장은 중국말로 '자장미엔(炸醬麵)'. 이게 한국인들에겐 자장면으로 들렸던 것이다. '작(炸)'은 '볶는다'는 뜻. 그렇다면 자장면은 '간자장'을 의미하는데, 실제 한국의 자장면은 볶지 않고 끓여 익힌 것이다.

한국으로 건너온 중화요리의 고향은 베이징(北京)과 산둥(山東)이다. 일제 때 한국으로 온 화교들은 대다수 산둥성 출신이고 이들은 베이징 요리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 베이징 사람들은 여름엔 자장미엔, 겨울엔 한국의 우동과 같은 스타일의 '따루미엔'을 즐긴다.

한국으로 온 화교들이 처음부터 자장면을 판 건 아니다. 만두와 호떡부터 먼저 팔았다. 초기엔 화교 자본이 축적되지 않았기 때문에 구멍가게형이 먼저 등장한 것이다. 1905년 산둥성 뭐핑(牟平)현 출신의 조리사 위시광(于希光)이 개업한 공화춘이 맨 먼저 자장면을 팔았다고 하지만 이 대목은 아직 학설적으로 정리된 건 아니다.

화교들은 한국인이 김치와 고추·된장을 좋아하는 것만큼 춘장에 국수 비벼먹는 걸 좋아했다. 공화춘이 생기기 전 인천항 부두의 화교 인부들은 점심 때면 삼삼오오 모여앉아 춘장을 볶아 국수에 얹어 한끼 요기를 해결했다. 그게 훗날 식당으로 흘러들어갔다고 봐야 될 것 같다.


# 춘장 원래 불그스름

화교들은 한국으로 건너올 때 우리의 고추·된장같은 춘장을 갖고 왔다. 입맛이 없을 땐 춘장만 찍어 먹어도 속이 편했다. 우린 춘장이라고 하는데 중국에선 '충장'이라고 한다. 충은 '파 총(蔥)'의 중국식 발음. 원래 춘장에 어울리는 건 대파였다. 파와 춘장이 합쳐져서 충장이 된 것이다. 우린 춘장, 자장, 면장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 자장은 기름에 볶은 장이고 면장은 파를 찍어 먹는 장을 의미한다. 따라서 중화요리집 주인한테 춘장을 달라고 해선 안되고 "면장을 달라"고 해야 맞다. 중국 춘장은 현재 한국에서 개발된 것보다 더 짜다. 원래 춘장은 좀 불그스름한데, 장 속 밀가루가 산화되면서 시간이 갈수록 검게 변한다. 대파와 양파, 어느 쪽을 사용해도 자장면 맛에는 별로 영향을 안주지만 어느 한쪽 가격이 오르면 싼 걸 사용할 수밖에 없다. 일본의 다쿠앙 선사가 개발해 낸 반찬인 단무지도 일제 때 자장면 옆에 붙게 된다.


# 한국식 자장면 개발

한국인들도 인천항 '부두 자장면' 맛에 반하게 된다. 하지만 한국인에겐 너무 짰다. 화교 조리사에게 "물을 좀 섞고 제철 채소를 더 넣으면 맛있을 것"이라고 조언한다. 자장면에 중독된 한국인들이 급증하자 공화춘 등 매머드급 중화요리집들이 화상 기질을 발휘해 한국식 자장면을 재빨리 개발한 것이다. 화교들보다는 한국인을 상대해야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물론 일본인들도 자장면을 좋아해 자기 스타일로 바꾸는데 그 과정에 캐러멜, 다쿠앙, 식초 등을 등장시킨다. 일부 화교 조리사들은 "현재 한국 자장면도 일본 요리사들이 개발한 것이고, 그 조리법이 훗날 한국인 조리사들에게 전해졌다"고 주장한다.

춘장은 밀가루 60%에 콩 40%가 들어간다. 소금으로 간해서 1년간 숙성시켜 만든다.


# 한국 자장면도 중국으로 수출된다

1999년 한국 자장면이 중국 베이징으로 역수출된다. 베이징에서 한국인이 많이 모여사는 '왕징(望京) '아파트 단지에 자금성(대표 박광자)이 들어온 것이다. 자장면은 800년 역사를 가진 베이징의 서민요리였다. 쌀보다 밀가루가 많이 생산되는 중국 허베이(河北) 지방에선 밀가루 요리가 유난히 많았다. 자장면이 활성화된 것도 그 때문이다. 지금도 베이징엔 전통 베이징 자장면으로 불리는 '라오베이징 자장미엔(老北京炸醬麵)'이 곳곳에 진을 치고 있다. 하지만 한국 것과 달리, 중국 자장면엔 고기와 채소가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인들에겐 맛있다는 느낌이 안든다. 중국의 남·북방 지역에선 자장면을 잘 먹지 않는다. 현재 베이징 자장면 한 그릇 값은 5∼8위안(600∼960원)선.


# 짬뽕·우동, 개발은 일본…본적은 중국

중국인들은 짬뽕을 '소마미엔(炒碼麵)'이라고 부른다. 소마미엔 육수는 돼지뼈로 빚으며, 네댓가지 채소도 함께 넣는데 우리처럼 맵지 않다. 한국의 우동과 비슷한 게 다루미엔이다. 이는 중국식 국물면으로 '칭탕미엔(淸湯麵)'으로도 불리는데 환자용으로 널리 사용된다. 요즘엔 면을 기계로 뽑지만 예전엔 면발에 더 탄력을 주기 위해 손수 밀가루를 반죽해 수타면을 뽑았다.

짬뽕의 주민등록지는 일본이지만 본적은 중국이다. 1571년 일본 최초로 개항한 나가사키가 짬뽕이 태어난 곳이다. 나가사키는 짬뽕과 함께 카스테라로도 유명한 고장이다. 나가사키 짬뽕은 우리와 달리 색깔도 흰색이며 맵지도 않다.

일본 짬뽕의 최초 개발자는 중국 푸젠(福建)성 출신의 징헤준(陳平順). 그는 일본 내 중국 유학생들을 배려해 1899년 나가사키에 오픈한 중국 음식점 시카이로에서 싸고 맛있는 음식을 개발한다. 해물, 양파 등 쓰고 남은 재료를 넣고 볶은 뒤 국수에 얹고 쓸모없는 돼지뼈, 닭뼈 등을 고아 만든 육수를 부었다. 그 음식 이름은 '밥 먹었느냐'는 의미의 중국말 '츠판(吃飯)'. 그게 일본에서 짬뽕으로 변해 한국으로 들어온다. 현재 시카이로는 5층짜리 식당으로 성장했고, 1층은 짬뽕 박물관으로 꾸몄다. 일본 짬뽕 가격은 우리보다 비싸 1만원선. 대구에도 최근 나가사키 짬뽕집이 대구백화점 맞은편에 들어왔다.

우동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옛날 중국인들은 끼니를 잇기 어려울 때 감자나 밀가루로 반죽을 해서 과자를 만들어 기름에 잘 튀겨먹었다. 이걸 '혼돈'이라고 하는데 나중엔 기름 대신 끓는 물에 삶아 먹는 형식으로 변하면서 반죽 길이도 점차 늘어난다. 이게 '온돈'이라 불리며 후에 일본 우동의 전신이 된다. 1천300년전 일본의 홍법대사가 중국에 불교를 공부하러 왔다가 온돈 조리법을 배워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식 우동을 개발한다.

중국 우동은 오징어, 새우, 홍합 등 각종 해산물과 갖은 야채를 넣고 끓여내어 맑고 깔끔한 데 비해, 일본 우동은 가다랭이 육수 맛이 강해 훨씬 감칠 맛이 있다. 도쿄를 비롯한 간토(關東) 지방에선 소바(메밀국수)를 면류의 좌장으로 치지만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간사이(關西)에서는 밀가루 국수인 우동을 최고로 친다. '가케루(끼얹다)'의 명사형 '가케'가 붙은 가케우동은 한국에선 '가끼우동'으로 불리고, 이게 한국인 사이에 인기를 얻어 나중엔 홍익매점 가락국수, 북성로 돼지 불고기 우동 등으로 변형된다. 가끼우동에 유부를 얹어주면 '기쓰네(여우) 우동', 튀김 부스러기가 올라가면 '다누키(너구리) 우동', 찹쌀떡이 들어가면 '치카라(힘) 우동'이 된다. 가히 일본은 '우동 나라'라 할 만하다.

사누키(일본 서남부 시코쿠섬의 가가와현) 우동은 일본을 대표한다. 현재도 가가와현에는 무려 2천500여개의 우동 전문점이 있으며, 조리법을 가르치는 우동학교도 10여 군데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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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종로와 군방각

대구 종로와 군방각 요리 맛집 정보 2008.09.06 13:21

대구 종로와 군방각



종로, 대구 화교들의 세거지
군방각, 대구 유지들의 사랑방



# 한·중·일인들 섞여 살았던 종로

'China high restaurant 群芳閣 '
"저게 뭐라 쓴 기고?"
"내가 우째 알겠노."

60년대초 대구시 중구 종로 대로를 걷던 두 한국인이 나눈 대화다. 그때 종로 거리에서 행인들의 이목을 끌었던 것 중 하나가 종로 2가 23 대구 첫 중화요리집이인 군방각(群芳閣) 간판이었다. 군방각은 '봄철 백초 향기가 물씬 피어나듯 많은 손님들이 모이는 공간'이란 뜻을 담고 있다.

종로는 동인동, 향촌동, 북성로와 달리 한국·중국·일본인들이 뒤섞여 살아간 곳으로 특히 대구 화교들의 세거지였다. 종로 중심부엔 군방각, 화교를 상대로 하는 잡화상 화상공회(華商公會·현 쎈추럴호텔 주차장 자리), 인화당 한약방(현재 경미반점 자리), 대구화교소학교에 이어 복해반점, 경미반점, 영생덕, 천안성 등 중화요릿집이 가세를 한다. 특히 임진왜란 때 대구로 귀화한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도 종로 바로 서편 지역 계산동에서 뽕나무를 기르며 두릉 두씨 가문을 키워나갔다.

# 佛 개선문 같았던 군방각 출입구

타계한 영화배우 율 브린너처럼 늘 삭발하고 다녔던 군방각 주인 모문금(慕文錦)은 중국 산둥(山東) 출신으로 스케일이 호방했다. 사업 수완도 남다른 사업가였다. 그는 대구화교 1세대 좌장격으로 60년대초 한국에도 관광호텔 특수가 일 것을 예감한 듯 6·25 직후 건물을 개조할 때 간판에 한자와 영어를 병기했다.

1963년 2월 영남일보에 소개된 식당 입구는 '개선문' 같았다. 대지 250평 크기의 군방각은 공중에서 보면 T자형이었다. 입구는 웅장했다. 1m 남짓한 장방형 대리석을 정·좌·우, 세 방향으로 세워올리고 거기에 상호를 해서체로 새겨넣었다. 붉은색 톤의 중국 전통 대문인 '패루(牌樓)'를 연상시켰다.

군방각 입구 통로는 현재 쎈추럴호텔(옛 종로호텔) 주차장 입구와 일치한다. 입구를 지나 본관으로 가기 위해선 회랑 같은 좁다란 골목을 걸어가야 한다. 1905년 한국에서 가장 먼저 자장면을 판 것으로 알려진 인천 첫 중화요릿집 공화춘(共和春)보다 더 화려하고 규모도 컸다.

# 화교 대부 모문금, 원래 건축업자

모문금은 1903년쯤 한국에 온다. 하지만 곧바로 대구로 오진 않았다. 대구로 오기 전 충청도에서 요릿집을 먼저 연다. 무슨 생각이 들어서인지 그는 서울의 몇몇 화교 건축가들과 합세, 건축업에 뛰어들어 거금을 거머쥐게 된다. 모문금은 1913년쯤 대구 대교구장 드망드 주교의 부름을 받고 동향 출신 건축 기술자 강의관(姜義寬) 등과 함께 대구로 온다. 모문금에 앞서 1901년 산둥성 건축 기술자 26명과 요리사 2명도 계산성당을 짓기 위해 선발대로 대구로 왔다. 이때부터 대구 화교의 역사가 본격화되고 중화요리도 점차 뿌리를 내리게 된다. 화교 건축기술자들은 남산초등학교 근처에 벽돌공장을 짓는다. 그들이 만든 적벽돌은 지금의 남산동, 계산동, 진골목의 담은 물론 종교건물, 일본 관공서 건축 재료로도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모문금이 군방각을 맨처음 세운 걸로 알고 있는데 그건 아니다. 그 전에 같은 이름으로 장사를 하고 있던 화교가 있었는데 모문금이 장사가 잘 안되던 군방각을 매입해 크게 키운 것이다. 초창기 군방각은 푸른 빛의 목조건축물이었다.

일제 때 한국인과 일본인은 자기 나라 음식점만 찾길 좋아했다. 특히 일본인들은 더 그랬다. 그렇지만 군방각만은 예외였다. 이국인들이 국적을 초월해 출입했고, 특히 근처 진골목에 포진하고 있던 부자 서병국이 자주 이용했다. 진골목 서부자로 불린 그는 46년 콜레라에 걸려 타계했다.

그때 한국 유지들에게 군방각은 단순한 요릿집이 아니라 사랑방 구실까지 했다. 2층 별실에서 코스요리를 시키고 근처 교동 시장 내에 있던 대동권번 등에 전화를 걸어 기생도 부를 수 있었다. 한창 때 군방각은 '군방각 요정'으로도 둔갑했다.

# 모문금, 비즈니스 마인드 탁월

모문금은 비즈니스 마인드도 탁월했다. 파격적으로 한국 유지들이 애인과 밀애를 나눌 수 있도록 별실까지 만들어 줬다. 1층에선 자장면, 만두, 탕수육 등 값싼 단일 메뉴, 2층(의자 180개) 룸은 코스 요리 전문 공간이었다. 3층은 대형홀이라서 결혼식, 환갑 잔치, 연말연시 각종 리셉션, 특히 60년대초엔 2군사령부 회식 자리로도 애용됐다.

60년대초만 해도 대구에선 이렇다할만한 예식장이 없었다. 고려예식장만 해도 67년에 생겨났다. 따라서 많은 식탁과 각종 요리가 즉석에서 해결되는 군방각이 결혼식장으론 적격이었다. 실제 모문금은 3층에 군방각 예식장을 만들어 화교들이 결혼식과 환갑 잔치를 벌일 수 있도록 구조를 조금씩 개조해나갔다.

# 6·25 때는 잠시 대만으로 피란도

모문금은 6·25 때 막강한 재력을 이용, 고위층을 통해 대만으로 피란갈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화교들은 언감생심이었다. 모문금은 믿을만한 사람에게 자기 식당을 위탁관리시킨다. 종전 직후 모문금이 대구로 돌아왔지만 군방각 건물은 모문금의 허락없이 신식으로 개조돼 있었다. 모문금은 분통을 터트리면서 건물을 중화요릿집에 걸맞게 리모델링한다.

# 항일운동 군자금 지원 고초 겪어

모문금은 항일 마인드가 남달랐다. 일제 땐 독립군들에게 군자금을 지원해 이런저런 고초를 겪기까지 한다. 건축업자 출신이기 때문에 그는 요리에 통달한 사람은 아니었다. 주방은 왕모씨에게 맡겨두고 자신은 굵직한 단골 확보에 치중했다.

일부 한국인들은 모문금의 항일정신을 폄훼하기도 했다. 한국인들한테 환심을 사기 위해 그가 꾸민 일이라고 보기도 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일제 말기 모문금은 일경의 요시찰 대상이 된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했을 무렵, 일제는 유흥업소들을 통제했다. 전시 총동원 정국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극장 상영도 제한됐고 호화로운 식당도 거의 문을 닫을 판국이었다. 일경은 툭하면 모문금을 대구경찰서로 연행해갔다. 그 바람에 한 달간 영업정지처분은 물론 업종 변경압력까지 받는다.

60년대로 접어들면서 군방각의 영업은 극도로 저조해진다. 대구엔 자장면·우동 말고도 먹을 게 지천으로 깔리게 된다. 무엇보다 다양한 한식이 등장한 것이다. 57년쯤 계산동 땅집이 불고기 붐을 일으키고, 뒤이어 동산동 실골목 특수를 노린 진갈비 등이 숯불갈비 붐을 일으킨다.

또한 '납작만두의 대명사' 미성당도 분식문화에 불을 댕긴다. 또 수형당, 만미당, 고려당, 런던제과, 삼송빵집, 뉴욕뉴욕 등 숱한 제과점이 봇물터지듯 등장한다. 6·25 직후 먹을 것 없던 때의 대구가 아니었다. 자연 중화요리 마니아들의 발걸음이 뜸해질 수밖에 없었다.

# 군방각 팔고 대만 건너 가 사망

모문금은 예지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60년대 후반 군방각을 종로호텔 건립자인 진주 출신의 박종실(2003년 작고)에게 팔아버린다. 자식들이 군방각에 미련이 없었는지, 아니면 모문금이 중화요리의 미래가 어둡다는 걸 예감해서 자식에게 식당을 물려주지 않았는가는 분명치 않다.

모문금은 5남매 중 두 딸은 미국에 유학 보내 의학공부를 시켰고, 나머지 자식도 중국 본토 및 대만 등지로 외유시킨다. 모문금은 군방각을 팔고 얼마 안돼 대구를 떠나 대만으로 건너가 타계한다. 군방각은 67∼68년에 철거되고 그 위에 종로호텔이 들어선다. 종로호텔은 여러 번 증축된 뒤 70년에 비로소 현재 모습을 갖게 된다. 현재 신관 6층 천장 보에 '68년 8월19일'이라 적힌 상량문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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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대표적 중화요릿집

대구의 대표적 중화요릿집 요리 맛집 정보 2008.09.06 13:19

 대구의 대표적 중화요릿집

우중충한 날이면 박정희 소장이 들러 식사하던 곳 인화반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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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화반점-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중화요릿집

현재 대구에선 가장 오래된 중화요릿집이다.

아들 악영무(岳永武·53)에게 가업을 물려주고 대구시 남구 효성타운 자택에서 쉬고 있는 악적창(岳積昌·75). 그는 지금 종로 경미반점 대표 당빈백(唐賓伯·79)과 함께 지역 화상들 사이에선 좌장격으로 통한다.

인화반점의 역사는 현재 중구 종로 경미반점(1950년대엔 인화당 한약방 자리) 옆 운남관(雲南館)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자기 가게가 없어 여러 곳을 전전한다. 북성로에선 대루원, 다시 태평로 이통(利通)반점 시절을 거쳐 53년쯤 경북대 의대 동편에 인화반점을 오픈한다.

초창기 인화반점 근처는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개발이 안돼 비가 오면 장화를 신고 다녀야 했다. 60년 초 한일로가 뚫리기 전까지는 합승차도 다니지 않았다. 가게도 무척 옹색했다. 10여평 규모의 양철집에 테이블도 고작 4개밖에 없었다. 인화반점 자리엔 허베이성 출신의 곡전린(穀殿麟)이 경영하던 명려(明麗)반점이 있었다. 그때 가장 잘 팔린 건 자장면과 자장밥, 간자장, 볶음밥, 탕수육, 잡채 등이었다.

인화반점이 오늘까지 올 수 있었던 건 2군사령부, 경북대 의대, 경북도청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현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한 켠에 자리잡은 한국은행 대구경북본부 자리에는 55년 2월26일까지 육군본부가 있었다. 육본이 서울로 올라간 뒤 2군사령부가 그 자리에 들어와 13년 머물다 68년 12월3일 만촌동 무열대로 이전한다.

인화반점과 2군사령부 취사병은 한때 공생관계를 유지했다. 취사·보초병들은 툭하면 악적창을 불렀다. 자장면 한 그릇을 넘겨달라는 사인이다. 자장면을 좋아하는 일부 장교들은 부하더러 자장면을 사오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돈 없는 취사병들은 군납 식자재를 갖고 인화반점과 흥정을 했다. 그 때만 해도 고기가 귀했다. 군납 돼지고기가 나오면 신문지에 싸서 악적창에게 넘겨줬다. 악적창은 고기값만큼 자장면을 건네주었다. 요즘과 달리 당시 2군사령부 담은 아주 낮았고 철조망도 가설돼 있지 않아 그런 음성적 거래가 가능했다.

특히 비가 오고 날이 우중충하면 박정희 소장(당시 2군사령부 부사령관)도 부관들과 그곳에 와서 요릴 먹었다. 하지만 악적창은 박 소장이 훗날 5·16군사정변을 통해 대통령이 될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악적창은 한국인들한테 괄세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사전에 박 소장을 알아 챙겨주지 못한 걸 무척 후회한다고 회고했다.

경북도청이 60년대 후반 구 중앙공원 자리에서 산격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만 해도 도지사 관사는 구 대구여고 근처 관사촌에 있었다. 박경원·김인 도지사도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야참이 생각나면 자장면을 주문했다. 관사 방문객이 많으면 악적창이 직접 리어카에 식재료를 싣고 관사 부엌으로 가서 출장요리를 만들기도 했다.

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가벼운 철가방이 나오지 않아 엄청나게 무거웠던 3단짜리 나무가방을 들고 다녀야 했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팔 힘이 약해 짬뽕 국물을 쏟을 때도 비일비재했다. 인화는 65년부터 철가방을 사용한다.

장사가 잘 된 인화반점을 괴롭힌 한국인도 적잖았다. 갓 출소한 범죄자, 깡패, 유령단체 회원들까지 자장면과 배갈을 공짜로 시켜먹고 오리발을 내밀기 일쑤였다. 심지어 차비까지 뜯은 뒤 자랑스럽게 사라지기도 했다. 악적창은 억장이 무너졌지만 동인파출소에 신고를 하지 않았다.

인화반점은 2003년 11월쯤 문을 닫았다가 지난 7월 단골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구MBC 동편에 재개업했다.


#동해반점-50년대 대구에서 3번째 컸던 반점

인화반점과 비슷한 시기에 태동한 북성로의 대표적 중화요릿집이 동해반점이다. 대구역에서 중앙로 쪽으로 올라오다 보면 우측에 북성로 초입이 보인다. 왼편 동봉식당·손자장 간판이 보이는 상가가 바로 동해반점이 있던 곳이다.

동해반점 서편엔 일제 때 대구의 대표적 백화점 미나카이(三中井)가 자릴 잡았다. 50년대만 해도 대구역에서 가장 가까운 중국집이 바로 동해반점이었다. 그래서 호주머니 사정이 괜찮은 승객들은 동해반점으로 잘 갔다. 동해반점의 규모는 군방각과 기린원 다음으로 컸다. 2층 높이의 동해반점은 57년쯤 왕책겸(王策謙), 궁극례(宮克禮) 두 사람이 공동투자금 500만환으로 오픈했다. 원래 이 집은 바로 옆에 있던 아세아양행(대표 이상태·76) 소유였다. 아세아는 미성당, 황금당과 함께 중앙로 금은방 시대를 연 주역이다.

왕책겸과 궁극례는 돈을 벌기 위해 배갈 한 잔, 담배 한 개비 들지 않았다. 15개 룸을 가진 동해반점 종업원 수는 한국인 종업원(배달 담당)을 포함해 모두 15명이었다. 주문이 폭주, 전화도 3대를 설치했다. 궁씨는 14세 때 중국 산둥성에서 우리나라로 건너왔다. 그는 서울의 한 중화요릿집 보이로 있다가 개성으로 가서 독립을 하고, 6·25 때 대구로 피란와 동업자 왕씨를 만난다. 왕씨는 군방각의 종업원으로 12년간 일했다. 암기력도 비상해 일제 때 대구의 동명까지 모두 암기할 정도였다. 대구를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동해반점은 90년쯤 한국인의 손에 넘어갔다가 2년 전 명맥이 끊어지고 만다.

#기린원-군방각 이후 한때 최고로 군림

대구시 중구 수창동 옛 대구전매청 맞은편 기린원(麒麟園)도 동해반점과 비슷한 시기에 문을 연다. 99년쯤 대구은행 본점 맞은편에서 잡탕밥 붐을 일으킨 덕영대반점으로 넘어간다.

기린원은 60년대 기린원예식장으로 더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군방각이 68년쯤 문을 닫고 난 뒤 대구의 최고 중화요릿집으로 군림하다가 덕영대반점 시대로 넘어간다.

원래 기린원 자리엔 배갈 공장이 있었다. 동아쇼핑 옆 염매시장에서 잡화상으로 활동하던 이경문(李慶文)이 경영하던 만생(萬生·뒤에 수성구로 공장을 이전해 수성고량주로 변신했지만 80년대 폐업) 고량주 공장이었다. 이경문은 중식 특수를 예감하고 공장을 허문 뒤 2층 높이의 기린원을 세운다. 장사가 잘 되자 3·4층을 증축한다. 군방각처럼 기린원도 점차 요정화돼 간다. 지역 유지들은 이곳에서 기생을 불러 풍류를 즐기기도 했다.

나중에 산둥 사람인 구비소(邱丕昭), 강소춘(姜所春)이 동업관계를 형성하다가 후에 자기 몫을 챙긴 뒤 갈라진다. 이경문은 대만으로 갔고, 구비소도 미국으로 가 버렸다. 후에 필서만(畢序萬)과 현재 만촌동 이마트 근처 금란반점 장가금 사장이 다시 동업 관계를 형성했고, 현재는 서덕재(徐德財·60)·석수영(石秀英·56) 부부가 '기린원 제2 전성시대'를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연경반점-외환위기 이후 '全家福' 붐 일으켜

대구시 수성구 중동 현대병원 맞은편에 자리한 연경반점. 후발주자이면서도 IMF 외환위기 직후 전국에 걸쳐 '전가복(全家福) 붐'을 일으킨다.

올해 마흔일곱의 사장 손보충(孫寶忠). 그의 아버지 손진(孫珍)은 산둥성 치하현 출신으로 인천으로 들어와 부산을 거쳐 대구 종로에 정착했다. 손진은 동해반점과 기린원 주방장 등으로 일하다 나중에 북구 침산2동파출소 근처에 동화반점과 만경관 서편 원화반점을 끌고 왔고, 93년 가업을 이어받은 손보충이 남구 이천동 남도극장 앞에서 낡은 2층 건물을 빌려 연경반점 시대를 연다. 처음부터 전가복이 팔린 건 아니다. 여느 식당과 비슷한 중식 메뉴를 팔았다. 그런데 식도락가들 사이에 "집맛은 별로인 데도 전가복 맛은 죽인다"란 입소문이 나돈다. 시장·도지사, 판·검사도 그곳에 와선 비좁다거나 식당이 불결하다는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맛 때문이었다.

전가복은 손보충이 생각해낸 아이템이 아니다. 단골들이 손보충의 음식 솜씨가 만만치 않음을 간파하고 좀 더 고급메뉴를 내놓으라고 압력(?)을 가해 탄생한 것이다. 그런 배경을 안고 무려 35가지 신선한 재료가 총망라된 '연경반점 발(發) 전가복'이 탄생된다. 그는 최고의 요리법은 최고의 재료 확보란 걸 잘 안다. 그래서 매년 송이철이 되면 집을 비운다. 산지를 돌며 1등급 국내산 송이를 몇 t씩 다량 매입해 저온고에 넣어두고, 사철 싱싱한 식재료를 내놓는다. 서해안 태안반도에서 해삼, 여수에서 전복과 관자(조갯살), 부산과 울진에선 대게를 골라 온다. 단골과의 유대를 위해 즉석에서 배갈 한 잔을 주고받는 손보충의 도타운 정, 그게 아직 다른 화상들에겐 낯설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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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요리이야기 - 만리장성

중화요리이야기 - 만리장성 요리 맛집 정보 2008.09.06 13:13

중화요리이야기 - 만리장성



"여긴 대구이니 중국요리도 대구식으로…"
대구 첫 한국인 중식당 주방장 스카우트에 고급 아파트까지 제공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조리사는 중화요릿집(이하 중식당) 사장이 되기 힘들었다. 한국인과 화교들 사이에 가로놓인 해묵은 위화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화교들이 한국에 와서 이 눈치 저 눈치 보면서 터전을 다져왔듯 한국 조리사들도 중식당으로 치고 들어가기 위해 눈물겨운 세월을 보낸다.

따지고 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한인 중식당 시대를 앞당긴 측면도 있다. 박정희는 화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어 화교세력이 한국 경제를 어렵게 만드는 것으로 몰고 갔다. 일견 화교를 '정치적 희생양'으로 악용한 것 같다. 당시 청와대 경제팀들은 화교들이 수익금을 은행에 맡기지 않는 등 한국경제에 별로 도움을 주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경제적으로 압박한다. 그건 일종의 화교에 대한 '딴지 걸기'였다. 73년 3월5일 전국 중식당에만 '쌀밥 판매 금지령'을 내리고 다른 음식점은 예외로 했다. 화교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대우였다. 76년엔 가정의례준칙이 등장한다. 대형홀에서 각종 잔치가 금지된다. 대형 중식당이 직격탄을 맞는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화교에게는 1인당 평균 40평 이상의 부동산도 못 갖게 했다. 심지어 자장면 값도 맘대로 못 올렸다. 그래서 적잖은 화교들이 한국을 떠난다. 당연히 화교 조리사가 격감한다. 기회를 엿보던 한국 조리사들에겐 절호의 찬스, 이들이 대거 중식당으로 진출한다. 이 때문인지 70년대 후반 중식당 조리사의 반 이상이 한국인으로 포진한다. 자연 화교들이 한국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리 없었다.

대구의 한국 중식당 1호, 대봉동 만리장성도 이런 배경을 깔고 나타난다.


# 택시기사라면서 만리장성도 몰라?

중구 대봉파출소 네거리. 50년대만 해도 그곳에는 달성제사 공장이 서 있었다. 현재 청운맨션, 달성맨션 일대도 공장 부지에 포함돼 있었다. 공장 한 켠에는 자유당 시절 부통령을 지낸 이기붕의 별장도 있었다.

50여평 크기의 별장 옆 연당은 훗날 경북여고, 경북고, 대구상고, 경북대사대부설고 학생들의 기념 사진촬영터로도 각광받는다. 달성제사는 누에고치로 비단실을 짜던 곳인데 특히 거기서 나온 번데기가 잘 팔렸다. 번데기 특수로 아침이면 리어카 상인들이 공장 앞에 장사진을 쳤다. 그땐 번데기가 어린이와 어른 모두에게 사랑받은 대표적 간식거리였다.

"만리장성 갑시다."

"대구에도 만리장성이 있어요?"

"운전기사라면서 만리장성도 몰라요?"

당시 영업용 택시기사들은 대구 어느 곳에서 차를 타도 만리장성 이름만 대면 정확하게 거기로 데려가 주었다. 만리장성이 급부상하자 덩달아 대봉동까지 괜찮은 동네로 떠오른다. 대봉동은 만리장성에 앞서 72∼73년 생긴, 대구의 첫 맨션격인 대봉맨션 때문에 이미 부자동네로 등장하고 있었다.

# 여사장 서연주씨 남다른 사업 감각

만리장성 초대 사장은 2001년 작고한 오남수씨(3선 대구시의원)의 친구 김경동씨(작고). 그는 현 위치 맞은 편(현 도쿄하우스 자리)에서 지금보다 규모가 훨씬 작은 만리장성을 열었다. 장사는 예상보다 잘 됐다. 그런데 김 사장은 규모의 경제에는 둔감했다. 빚까지 지고 현재 자리에 3층 건물을 건립한 것이다. 그와 함께 맛나 간장 공장까지 세운다. 사업 다각화 1년도 채 안돼 백기를 든다.

김 사장이 오씨를 만나 만리장성을 맡아달라고 애원을 했다. 그때 만리장성은 한 달에 500여만원의 수익을 남길 만큼 장사가 잘 됐다. 명성예식장에 근무하고 있던 오씨는 아내 서연주씨(58) 한테 만리장성을 맡아 달라고 부탁한다. 신명여고, 계명대 음대 성악과를 나온 서씨는 명성예식장 사장 서선화의 딸, 그래서인지 사업에 대한 남다른 감각을 갖고 있었다.

# 초·중·고 졸업식날 손님들로 북새통

주방장, 조리장 등 8명의 주방 멤버를 갖추고 1979년 재 개점을 했다. 초창기 주방장은 화교였다. 서울의 한 중식당에서 스카우트했는데 선불금도 주고, 옆에 있던 달성맨션 아파트 한 채도 숙소로 안길 정도로 파격적으로 대우했다.

규모도 당시 대구 최고급이었던 중구 수창동의 기린원에 필적할만 했다. 1층 테이블은 14개, 2층은 소형 룸이 10개, 3층에는 100석 대형홀과 50석 중형홀이 있었다. 2군사령부 장교, 의사, 사장, 고위 공직자들의 각종 모임은 물론 결혼식, 회갑연 등까지 모두 감당해낸다. 그땐 룸살롱(70년 옛 런던제과 옆 골목 안에 생긴 멕시코가 대구 첫 룸살롱)이 큰 인기가 있었다. 만리장성도 그 흐름을 타고 지하에 '시몽'이란 룸살롱을 연다.

만리장성은 졸업식 시즌에 가장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그날은 '팬 서비스의 날'이나 마찬가지였다. 경북고, 경북여고, 대구상고, 경북대사대부설고, 삼덕·동인·중앙초등까지 근처에 있어 졸업식날은 완전 시장판이었다. 손님들은 거의 예외없이 탕수육과 자장면을 세트로 먹었다. 다른 걸 시키면 눈총받았다.

# 상호 특허…기름기 적은 음식 만들어

서 사장은 늘 "여긴 대구니 중식도 대구식으로 만들어야 된다"고 강조했다. 맵고, 짜고, 얼큰한 걸 좋아하는 대구사람들, 너무 느끼하면 즉시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그래서 모든 메뉴는 좀 담백해야 된다고 조리사들을 설득했다. 그래서 볶음밥에도 기름이 별로 흐르지 않았다.

식당의 격을 유지하기 위해 배달도 나가지 않았고 80년초엔 상호를 특허낸다. 이런 사실을 알 리 없는 타 지역 한인 중식당들은 선호도가 높은 만리장성 간판을 무심코 달곤했다. 어느 날 서 사장이 황실아파트 근처를 지나다가 같은 상호를 발견, 항의를 했다. 즉시 만리장성이 만리궁성으로 급조되는 해프닝도 일어났다.

지금도 그렇지만 아직도 상당수 손님들은 만리장성 주인이 화교인 줄 안다. 그도 그럴 것이 대구에서 잔뼈가 굵은 화교들은 두 나라 말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한다. 그래서 말투만으로는 중식당 주인의 국적을 분간키 힘들다. 상당수 화교들은 주방에서는 중국말, 손님을 맞을 땐 한국말을 사용한다.

초창기 서 사장은 늘 화교로 오인을 받아 그게 자존심 상했다. 즉시 만리장성 한 켠에 태극기까지 달아놓기도 했다. 90년대초 지역엔 중식 조리사 스카우트 전쟁이 벌어진다. 만리장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80년대까지 한국인과 동거했던 화교들이 그동안 번 돈을 갖고 독립을 한 것이다. 서 사장은 기존 화교와 결별하고 한국인들만으로 진용을 새로 짠다.

#부도 소문 등으로 한때 위기 맞기도

만리장성도 96년쯤 잠시 타인에게 임대된다.

그 이유는 서 사장의 남편 오씨 때문이었다. 90년대초 대구시의원 선거에서 고배를 마신 것이다. 나중엔 내리 세 번 당선되지만 그간 남모를 맘 고생이 엄청 심각했다. 선거유세가 시작되면 상대 후보측이 오씨의 금품선거를 감시한다면서 오·만찬 때 홀에 앉아 노골적으로 영업을 방해한 것이다.

그때 속앓이 때문에 서 사장은 한때 병져 눕기도 했다. 심신이 너무 지친 나머지 96~2000년 만리장성을 잠시 남에게 세놓는다. 그게 화근이었다. 배달을 가는 등 만리장성이 반점 수준으로 추락했다. 손님들도 끊어졌다. 만리장성이 부도났다는 소문도 들렸다. 자연 골목까지 어둑해졌다.

서 사장이 만리장성을 포기하고 싶던 차에 둘째 아들 주영씨가 가업을 잇겠다고 나섰다. 4억원 이상 들여 우중충한 만리장성을 리모델링했다. 퓨전 중식당으로 문을 열었지만 컨셉트가 빗나간다. 젊은이보다 나이 많은 단골들이 더 많이 찾은 것이다. 개업 며칠 만에 예전 버전으로 경영전략을 급선회한다.

여러 메뉴가 있지만 자그마한 백철솥에 담겨 나오는 해물누룽지탕이 눈길을 끈다. 2002년 개발됐는데 마치 '대구식 전가복'처럼 토속미가 느껴져 인기가 좋다.

지난 10월11일 대구은행 본점 맞은편 수성하이츠 상가 지하에 2호점을 냈다. 우여곡절을 겪은 만리장성, 이제 잠시 한숨을 돌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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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대표적 중식당 아서원

대구의 대표적 중식당 아서원 요리 맛집 정보 2008.09.06 12:52

대구의 대표적 중식당 아서원


1∼2명이 와도 코스요리 나와
80년대 지역 중식당 가운데 첫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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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식은 한식보다 요리 배우기가 훨씬 어렵다.

요리책이 거의 없고 제대로 가르쳐주는 학원도 없기 때문이다. 화교 조리사들은 노하우를 절대 독점하려 든다. 그래서 한국인은 눈물을 머금고 '호랑이 굴(중화요릿집)'로 들어간다. 체면 불구하고 철가방부터 든다. 성실성이 보이면 각종 재료를 일정한 크기로 써는 칼판 부서에 배치된다. 최소 5년 이상 버텨야 기본 기술을 넘볼 수 있다. 한국인이 아무리 야무지게 일을 잘 해도, 안방 장롱 열쇠까지 넘겨주진 않는다. 화교는 최소 10년 이상 내공을 쌓아야 접할 수 있는 꿈의 보직, '프라이팬'만은 절대 한국인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그런 난관을 뚫고 1970년대 만리장성이 한인 중식당 시대를 멋지게 열었던 것이다. 이로써 화교들의 중식당 독점시대도 막을 내리게 된다. 80년대 만리장성의 흐름을 이어받아 한인 중식당 문화를 더 발전시킨 아서원(雅敍園) 시대가 열린 것이다.

# 조선공산당의 결성 장소였던 서울 아서원

현재 전국엔 같은 이름의 아서원이 산재해 있다. 태생지는 일제 때 서울 명동이었다.

1907년 산동성 복산현 출신 서광빈(徐光賓)이 서울 반도호텔(1936년 일본인 노구치가 설립, 후에 롯데호텔이 됨) 옆에 4층 짜리 호화 중화요릿집, 아서원을 세운다. 국일관, 명월관 등 갑종 요정(요릿집)에 필적할만한 규모였다.

한때 중국의 석학 임어당, 손문의 아들 손과(孫科)도 들렀고, 박헌영(1900~1955)이 참여했던 조선공산당 결성식(1925년 4월17일) 결성식도 거기서 열린다. 하지만 아쉽게도 서광빈의 외동딸은 69년 6천만원만 받고 롯데측에 아서원을 매각해버린다. 서울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던 아서원 시대는 그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뒤 명동 아서원은 숱한 동명 중식당을 파생시킨다. 그 한 가닥이 13년쯤 뒤 대구에서도 나타난다.

# 행서체 간판글씨, 화교 서예가 이조룡 작품

밤에 보면 꼭 궁성 같은 수성구 황금동 아서원. 손님을 주눅들게 하는 건 예사롭지 않게 적은 행서체 한자 간판. 간판에 새겨진 붓글씨는 지역에선 꽤 유명한 화교 출신 서예가 자풍(子豊) 이조룡의 작품. 일흔 초반의 그는 현재 달서구에 거주하고 있으며 수성구 만촌동 동보성(東寶城) 간판에도 그의 손길이 담겨 있다.

화교들은 개업 직전 맘에 드는 서예가에게 먼저 찬조금을 거둬 보낸다. 그럼 작가도 찬조자 이름과 덕담까지 명기한 간판용 글을 보낸다. 분명 우리와 다른 '휘호 관례'이다.

아서원은 83년쯤 동인호텔 동편 광남장 여관 맞은편에서 개점된다. 사장은 부산 출신으로 경남고를 졸업한 한모씨. 그의 형은 삼성그룹 부회장을 역임하고 후에 (주)새한 부회장까지 역임했다. 형은 동생을 북구 제일모직에 소개했지만 워낙 괄괄하고 활달한 성격을 가졌던 동생은 봉급 생활을 거부한다. 한때 대구 국세청 근처에서 다방도 열었던 동생은 화교들과의 인맥이 두텁다. 그는 그 인맥을 활용, 아서원 시대를 열 수 있었다.

이무렵 동성로에 또 하나의 한인 중식당이 가세한다. 대구백화점 바로 북측 현재 (주)금강 전용 가야빌딩3∼4층에 있었던 아리산이다. 건물주 김태경의 아내 장현숙씨가 경영했는데 지하엔 레스토랑, 1층엔 밀탑, 2층에는 고래등이 있었다.

# 대다수 동성로 큰 식당들은 주차난에 시달려

동인동 시절, 아서원은 지역 중식당 계에선 처음으로 '1인분 코스요리 시스템'을 도입한다. 그 땐 한두 사람이 와서 코스 요리를 시키지 못했다. 한꺼번에 워낙 많은 음식이 나오기 때문에 몇 명만 보고 요리를 할 수 없었다. 최소한 6~8명이 모여야 코스 요리를 먹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한 사장은 발상을 전환한다. 1~2명이 와도 코스 요리를 줬다. 물론 양은 적었다. 그만큼 주방 조리사들의 일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서원은 '한명'이 파생시키는 위력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무렵 대다수 동성로 큰 식당들은 교통난에 봉착하게 된다. 전용 주차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회식 손님들이 도심으로 점점 나오기 힘들어진다. 아서원은 곧 탈도심을 결심한다.

아서원은 황금동으로 오기 전, 잠시 영업이 중단된다. 이 무렵 한 사장 앞에 뜻 밖의 인물이 나타난다. 바로 현재 자금성 사장 황 모씨였다. 계성고 출신으로 유도인인 황씨는 한씨와 의기투합한다. 당시 현 아서원 자리에는 숯불갈비 전문 한일가든이 있었다. 한일은 어린이 회관 북측 푸른동산과 함께 수성구에 숯불갈비 붐을 일으켰지만 푸른동산에 늘 밀렸다. 그래서 임자가 나타나면 집을 내놓을 심산이었다. 그 사실을 안 황씨는 한일 자리에 아서원을 세우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은 자금이 부족해서 선뜻 그 부지를 갖기 힘들었다. 결국 둘은 신사협정을 맺는다. 아서원은 그런 사연을 안고 88년 3월쯤 황금동 시대를 연다.

# 건평 300평…한때 대구서 가장 위용 있는 외관

아서원은 당시 위용 있는 외관을 유지했다. 건평 300평, 1층엔 테이블 10개·룸은 8개, 2층은 100석 대형룸과 소형 별실 4개로 구성돼 있다.

주방 멤버는 주방장, 부주방장, 조리실장, 식사·튀김, 칼판, 면판, 찬모 등 모두 19명. 프라이 팬도 모두 6개가 가동된다. '화력이 죽으면 중식당도 죽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식에선 화력 관리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겨울철엔 LPG가 잘 어는데 이를 방지하기 위해 가스동결방지 전용 기화기까지 설치한다.

황금동 아서원 시대도 대박으로 출발한다. 하지만 갈수록 경영진의 갈등이 숙지질 않았다. 한과 황도 갈등을 봉합하지 못하고 갈라선다. 황씨 뒤에 한씨의 처남 김 모씨가 나타난다. 한씨도 경영권을 처남에게 주고 서울로 올라간다. 그는 서울 강남에서 이런저런 일을 해보지만 고배를 못 면한다. 그럴 때마다 처남이 아서원 수익금 일부를 서울로 올려보냈다. 밑빠진 독에 물붓기였다. 아서원이 좌초 위기에 놓인다.

90년대 들어 자금성, 금룡, 동보성 등이 가세한다. 아서원의 입지가 더욱 좁아진다. 설상가상, 대구 중식계는 중식당 조리사 스카우트 전쟁에 휩싸인다. 비상총회를 열어 식당을 살릴 묘책을 강구한다. 그렇게 해서 전국 첫 종업원 지주제가 아서원에서 태어난다. 조리사들은 이 사실을 신문에 광고를 냈고 즉시 지역 식당가에 화제가 된다. 주방장은 "판매 금액의 일정 몫을 종업원에게 돌려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렇지만 모두 허사였다. 휘청거리던 경영권은 몇 손을 더 거친다.

# '돌판 삼선 송이 누룽지'등 퓨전메뉴 잇따라 개발

아서원이 기우뚱하던 2000년 무렵 대구 지역의 화교는 한국인 조리사와의 동거를 끝낸다. 대구 외식업계도 각종 체인점, 다국적 기업 브랜드 패스트 푸드의 난립으로 새로운 경영전략이 필요한 때였다. 그 와중에 의외의 여성이 침몰 직전의 아서원을 살리겠다고 나선 것이다. 대구 남산여고와 대구대를 졸업한 뒤 한때 LG그룹에 입사해 수입검사 업무, 인력 교육훈련 등 탄탄한 경영기법을 배운 오로사 대표였다. 2000년 3월 그녀는 13년 잔뼈가 굵은 직장을 미련없이 버렸다. 잠시 구미에서 종합학원을 경영하던 중 난생 처음 접하는 중식당 경영 제의를 받는다.

그녀는 기존 주방장 박종성(36)과 손을 잡았다. 새 메뉴를 개발할 땐 격론도 벌였다. 그렇게 해서 대구에서 최초로 2000년 사천굴짬뽕, 돌솥 짬뽕 등 퓨전 짬뽕 시대를 연다. 또한 2003년엔 왕새우, 해삼, 송이가 조화를 이룬 '돌판 삼선 송이 누룽지'를 개발했다. 또한 사슴힘줄, 전복, 동충하초, 녹용의 진국을 이용한 '단호박 불도장'도 기획했다. 물론 이런 메뉴들은 정통 중식과 거리가 멀었다. 변화된 대구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기 위한 퓨전 중식 메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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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요리 이야기 - 인터불고 호텔 내 동보성

중화요리 이야기 - 인터불고 호텔 내 동보성 요리 맛집 정보 2008.09.06 12:49

중화요리 이야기 - 인터불고 호텔 내 동보성


나훈아, 방에 요리 배달온 사장 보고 착각"
남진, 니가 무슨 볼일 있어 여기 들어왔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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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전 대통령도" 잘 먹었다" 인사

2001년 11월22일 대구시 수성구 만촌동 인터불고호텔 스위트룸.

이날 오전 경북 도청 강당에서 도정 현안을 청취한 뒤 일찍 호텔로 돌아와 쉬고 있던 김대중 대통령은 몸이 피곤하다면서 돌연 오후 일정을 취소해버렸다. 그 행사는 연두순시와 달리 정치적 성격이 강해 대구시청에 굳이 갈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비서실장, 오늘 무척 피곤하니 나머지 일정은 알아서 챙겨주세요. 만찬은 동보성 중식으로 준비해주시고…."

호텔 총지배인이 갈장동(葛長銅) 동보성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팔선 통 샥스핀, 라조기, 매운 짬뽕을 특별 주문했다. 하지만 그날따라 동보성은 눈코 뜰새없이 바빴다. 갈 사장은 내심 거절하고 싶었지만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각하용' 음식을 빚었다. 갈 사장은 그때까지 청와대 검식 절차가 얼마나 까다로운가를 전혀 몰랐다. 청와대 검식과장은 깐깐했다. 갈 사장은 특히 짬뽕 면발 때문에 진땀을 뺐다. 면 빼는 기계를 객실로 갖고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방에서 면을 빼내 쿠킹 랩에 씌워 부리나케 호텔로 갖고 갔지만 몇 분 사이 면이 퉁퉁 불어 무려 5번이나 퇴짜를 맞는다. 라조기도 두세 번 거부당했다. 갈 사장은 검식과장에게 볼멘소리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해프닝 속에 후닥닥 만들어진 음식을 맛있게 먹은 김 대통령은 갈 사장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 한때 파크호텔보다 유명했던 동보성

만촌동 고모령 언덕에 자리 잡은 파크호텔 서편에 있는 중식당 동보성(東寶城). 1986년 우여곡절 끝에 등장한 파크호텔만큼이나 어렵게 뿌리내렸다. 금호강과 팔공산 연봉이 그림처럼 바라보이는 그곳엔 원래 호텔이 들어설 수 없었다. 수성구 두산동에서 정통 패밀리 레스토랑을 경영하고 있는 박모 사장은 동보성 자리에 있던 숯불갈비 집 달맞이를 없애고 그곳에 한일호텔의 '화청궁', 금호호텔 '팔선'이 넘겨다 보지 못할 중식당을 만들 계획을 세운다.

그때만 해도 호텔 중식당은 중식전문점에 비해 경쟁력이 그렇게 높지 않았다. 한·일·양식 정도만 자리잡았다. 화교들은 임대료가 비싼 호텔로 들어가길 주저했다. 또한 당시 일반인들의 정서도 역시 중식은 좀 허름한 데서 먹어야 제 맛이 난다는 것이었다. 호텔 부설 중식당의 성공 여부는 불투명한 상태였다.

박모 사장이 잡은 사람은 바로 갈 사장이었다.

갈 사장은 화교이지만 누구보다 한국문화를 꿰뚫고 있었다. 그는 만리장성, 아서원, 한일호텔 내 화청궁 등을 거쳤을 정도로 지역에선 알아주는 실력파였다. 그의 아버지는 안동에서 안흥 주물공장을 경영했다. 누나는 현재 수성구 두산오거리에서 중식당 용루를 경영하고 있다.

그는 88년 수성구 황금동 아서원 개업을 도와준 뒤 '동보성 만들기'에 뛰어든다. 동보성 개점 날짜는 89년 10월10일. 그는 4개월 전 서울로 올라갔다. 거기서 국내에서 처음으로 누룽지 요리 등을 소개한 한국 중식계의 대부격인 신라호텔 내 중식당 팔선(八仙) 주방장 후덕준한테 한 달간 불도장과 누룽지탕 조리법을 배워 내려온다. 후덕준은 화교로선 처음으로 삼성그룹 이사가 됐을 정도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때만 해도 서울과 대구의 중식 수준은 무려 20년 이상 차이가 났다고 한다. 그래도 갈 사장은 맛은 노력만 하면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사업의 승부처는 '손님에 대한 서비스'라고 판단한다. 종업원 마인드 개조를 위해 별의별 아이디어를 다 강구한다. 역시 식당은 개업 바람을 타야 된다. 그래서 아는 지역 화교 어른 몇 분을 모셔와 1주일간 사자춤, 중국 전통악기 등을 선보였다.

영업은 성공적이었다. 이때 손님들은 파크호텔은 어디에 있는지 잘 몰라도 동보성 위치는 알 정도로 동보성의 브랜드가 파크보다 한수 위였다.

# 화교 조리사들 만만디 정신이 걸림돌

후덕준의 추천으로 화교 12명을 서울서 한꺼번에 데리고 온다. 하지만 갈 사장은 화교들을 맘대로 부릴 수 없었다. 화교들은 음식만 제대로 만들면 됐지 다른 건 필요없다고 믿었다. 원가관리 마인드도 전무했다. 재료도 물쓰듯 했다. 동보성에 대한 애착도 별로 없었다. 저마다 돈만 벌면 그만이란 이기심이 팽배해 있었다. 비록 같은 나라 사람들이지만 같은 배를 탈 수 없음을 알고 미련없이 자른다. 몇몇 화교들은 갈 사장에게 섭섭한 감정을 피력했고 심지어 "동족끼리 이럴 수 있냐"면서 협박도 했다.

그렇게 해서 앞산순환도로 변에 있던 중국성 주방장 조형제가 주방장, 만리장성에 있던 조주래가 부주방장으로 기용된다. 갈 사장은 그때 총관리부장이었다.

# 인테리어도 붉은색 위주 중국식 탈피

동보성은 2000년쯤 인테리어가 또 혁신된다. 그동안 3명의 사장이 지나갔지만 그들은 명실상부한 중식 전문가가 아니었다. 그래서 늘 경영 시스템이 덜컹거렸다. 그때 갈 사장의 능력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인터불고 회장 권영호였다. 권 회장은 동보성을 새롭게 만들기 위해 갈 사장에게 전권을 준다.

동보성 인테리어는 좀 파격적이었다. 기존 붉은색 위주의 중국식 인테리어 방식에서 과감하게 벗어났다. 간판만 한자로 달고 나머지는 일반 레스토랑 스타일로 갔다. 그해 10월부터 2개월간 리모렐링돼 테이블 300개 시대가 열린다.

# 나훈아 공연오면 동보성 음식만 고집

인터불고 호텔 때문에 동보성엔 스타급 단골들이 몰려든다.

그 중 한 사람이 가수 나훈아. 그는 대구에서 디너쇼를 할 때, 꼭 인터불고만 고집한다. 인기관리 차원에서 음식도 절대 밖에 나가서 먹지 않는다. 꼭 하루 숙박비 206만원짜리 스위트 룸에 머물며 동보성 음식을 시켜먹는다. 나훈아는 잡식성이다. 볶음밥, 짬뽕은 물론 돼지 비계가 많이 붙은 탕수육 등을 좋아한다.

갈 사장은 가수 남진과 비슷하게 생겼다. 그 때문에 나훈아에게 한 번 된통 당한다. 어느 날 주문한 요리를 직접 갖고 들어갔을 때 나훈아가 눈을 부라리며 "남진, 니가 무슨 볼일 있어 여기 들어왔노"라며 정색하며 소리를 버럭 지른 것. 당황한 갈 사장이 해명을 했고 오해를 푼 나훈아는 그때부터 갈 사장을 '갈 남진'으로 부르고 있다.

특히 갈 사장을 "갈군아"라고 부르며 살갑게 대해준 작고한 원로정치인 허주 김윤환도 유별나게 동보성 자장면과 해삼탕을 즐겼다. 허주는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경상도 표를 몰 때 동보성에서 기자회견을 자주했다. 갈 사장의 꿈은 청와대 주방에 입성하는 것. 허주 덕분에 꿈이 이뤄질 뻔도 했지만 청와대 신원조회 단계에서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갈 사장이 화교란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 음식엔 점도 높은 감자 전분만 사용

동보성 요리는 다른 중식당과 한 가지 다른 게 있다. 고구마보다 상대적으로 비싼 감자 전분만 사용한다는 점이다. 고구마 전분은 감자 전분에 비해 점도가 무척 낮다. 몇 분 안돼 물로 변하지만 감자 전분은 식재료를 식사가 끝날 때까지 따뜻하게 감싸준다.

특히 2001년 개발된 부추 생굴면 짬뽕도 맛이 독특하다. 얼큰한 맛이 전혀 없어 꼭 일본 나가사키 짬뽕같다. 육수도 돼지고기로 만들지 않고 닭고기 국물로 빚는다. 부추를 비롯해 양파, 당근, 배추, 생굴, 새우, 호박, 굴소스, 소금, 후추, 참기름이 잘 어울려 있다.

전가복에 대항해 만든 '위기삼정(圍其三丁)'도 매력적이다. 해삼, 큰새우, 전복, 브로콜리, 송이, 죽순 등을 담고 칠리 소스에 볶은 소고기 안심을 얹어 중식과 한식 기분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지난 7월 대구에 온 중국인 조리사 장욱파는 면 요리만 전문적으로 한다. 그가 만든 꽃빵, 딤섬(點心·만두 등 중국인들이 간단하게 먹을 수 있게 만든 온갖 새참), 춘권(春捲·갖은 속을 찹쌀 피로 말아 기름에 튀긴 간식) 등이 본식을 더욱 탄탄하게 치장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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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면 한그릇에도 특별한 맛이 있다

자장면 한그릇에도 특별한 맛이 있다 요리 맛집 정보 2008.09.05 21:28

자장면 한그릇에도 특별한 맛이 있다  -  정통중화요리 ‘육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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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중화요리의 가격 거품은 쏙 빼고 맛과 영양은 한단계 더 업그레이드, 자장면 하나에도 특별한 맛이 숨어있다.’
대전시 유성구 지족동에 위치한 ‘육각정’(노은2지구 반석마을 1단지 앞)이 중화요의 웰빙을 선언하고 나섰다.
가격은 더 낮추고 음식은 더 맛있고 풍성하게…, 그중에서도 이집만의 노하우로 특별한 맛을 자랑하는 메뉴가 바로 웰빙자장면과 웰빙한방탕수육, 유슬탕, 고추잡채, 깐소새우, 전가복, 사색냉채 등이다.
육각정의 웰빙자장면은 콜레스테롤과 지방을 대폭 낮춘 알칼리성 저칼로리 자장면. 쇼팅유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춘장도 색깔을 낼 정도로 약간만 사용하며, 센 불에서 한 번 볶아 기름기를 쪽 뺀 돼지고기와 감자, 야채, 다진 메주콩, 그리고 각종 한약재를 넣어 소스를 만들기 때문에 색다른 맛과 향 뿐만 아니라 기름기도 거의 없이 아주 담백하다. 자장면은 보통 면만 먹고 소스는 남기는 경우가 많은데 육각정의 자장면은 쫄깃한 면발은 둘째치더라도 오히려 소스가 더 맛있어 숟가락까지 사용해 그릇을 깨끗이 비우게 만든다.
웰빙한방탕수육 역시 계피, 로츠, 대추, 레몬 등 각종 한방재료를 12시간동안 다린 걸쭉한 국물에 다시 싱싱한 야채를 넣어 만든 소스가 특징. 토마토캐찹에서 나오는 시큼하고 단맛 대신 한방재료에서 나오는 향긋한 향과 달콤고소한 맛이 그동안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특별함을 선사한다. 입맛에 따라 고소하고 바삭하게 튀긴 돼지고기를 살짝 찍어 먹어도 맛있고, 그릇째 듬뿍 부어 간장소스에 찍어 먹어도 맛있다.
해삼과 팽이버섯, 죽순 등을 넣고 맑은 죽처럼 끓인 유슬탕은 나오자마자 뜨거울 때 먹어야 제맛. 다른 음식을 먹기 전 속을 부드럽고 따뜻하게 데워주고 입맛을 당기게 해 에피타이저로 추천할만한 메뉴다. 해삼, 자연송이, 전복, 새우, 죽순, 표고버섯 등 10여가지 해산물과 야채를 살짝 볶아 소스를 얹은 전가복은 중국음식중에서도 맛과 영양을 최고로 치는 음식. 큼직큼직 푸짐하게 넣은 귀한 식재료들이 한데 어울려 환상의 맛을 연출한다.
그밖에도 꽃빵에 싸 먹으면 별미인 고추잡채, 전복·관자·새우·해파리 사색냉채, 튀김새우에 각종 야채를 잘게 다져만든 소스를 얹은 새우따야도 맛깔스럽다.
또한 육각정에서는 중화요리의 다양한 맛을 소개하기 위해 요일별 체험요리 이벤트(월요일 전가복·유슬탕, 화요일 탕수도미·고추잡채, 수요일 해삼관자·깐풍기, 목요일 새우따야·깐소새우, 금요일 팔보채·유산슬)를 마련, 다양한 메뉴를 40% 정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고 있다. 또 2월중에 직접 가게를 찾는 손님들에겐 면과 밥종류 1000원, 탕수육 3000원, 잡채와 마파두부 2000원씩 할인행사도 곁들이고 있다.

▲웰빙자장면 3500원 ▲웰빙한방탕수육 大 1만8000원 ▲유슬탕 2000원 ▲전가복 3만5000원 ▲깐소새우 2만5000원 ▲고추잡채 2만5000원.

☎042(825)4447-8.

100석. 전용주차장.



우리집 자랑

‘육각정’은 말 그대로 육각형 건물모양에서 이름을 따왔다. 사방이 완만한 산으로 둘러싸여 주변 경치는 물론 공기부터 벌써 도심과 다르다. 특히 2층은 6면이 모두 유리로 돼있어 탁트인 공간에서 음식을 먹는 즐거움과 여유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곳. 문을 연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벌써부터 분위기 좋은 집으로도 소문이 자자하다.
“저희 육각정은 맛·청결·친절·가격, 이 네가지를 모두 갖추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편안하고 즐거운 분위기에서 맛있는 음식 부담없이 드시고 가세요.”
주인 이은희씨는 앞으로도 색다른 맛과 영양, 그리고 저렴한 가격으로 정통중화요리의 대중화에 나설 것임을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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