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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과'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8.09.06 수형당 빵
  2. 2008.09.06 망개떡과 호두과자
  3. 2008.09.06 50∼60년대 대구대표 빵집

수형당 빵

수형당 빵 요리 맛집 정보 2008.09.06 12:38

수형당 빵



한때 대구 최고 빵 브랜드 수형당을 기억하시나요 ?



# 추억이 돼버린 수형당 빵

수형당(秀亨堂).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때 대구 최고의 빵 브랜드였다. 1946년쯤 등장한 수형당, 50~60년대만 해도 해태·삼립과 어깨를 겨뤘고 점차 사업 다각화를 시도하면서 '수형 그룹'으로 웅비할 야심찬 프로젝트를 짰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수형당 편이 아니었다. 결국 방만한 경영으로 인해 82년쯤 소리소문도 없이 침몰하고 만다.

수형당은 대구 제빵산업의 기틀을 잡아준 기업이다. 훗날 뉴델제과 최종수 사장, 런던제과 조원길 사장, 지역의 첫 케이크 전문점 최가네의 최무갑 사장 등 대구의 메이저급 제과점 관계자들 상당수는 수형당에서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이젠 잊혀가고 있는 브랜드이다. 취재 중 동성로에서 만난 10여명의 20대에게 "수형당 빵을 아느냐"고 질문했지만 모두 "모른다"고 했다.

수형당의 등·퇴장 과정을 알기 위해 관계자를 찾아봤다. 일제 때 일본인한테 빵 기술을 배웠던 1세대 제빵인들은 지금은 거의 생존해 있지 않았다. 의성 출신 풍국당 주인 이을수옹(82)이 생존해 있지만 몸이 불편해 그 시절을 제대로 말해 주기 힘들었다. 어렵게 최가네 최 사장(63)과 중구 포정동 풍차 베이커리 권영오 사장(64)을 통해 수형당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 전성기때 직원 300명 넘어

수형당을 설립한 진병수(陳秉秀) 사장은 영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광복 직전 구 경북학원 자리에서 삼미제과사를 개점한 최팔용 사장과 친구사이로, 일제 때 북성로 미나카이 백화점 옆에 있던 이마사카(今阪) 제과점 종업원 출신이었다.

진 사장은 광복 전 이마사카에서 나와 중구 남산동에서 빵장사를 했다. 그곳에서 번 돈을 재투자해 광복 직후 중구 문화동 2번지에서 700여평 넓이의 수형당을 창업한다.

진 사장은 타고난 기업가였고 아이디어 맨이었다. 상호도 대충 만들지 않았다. 자기 이름 중에 '수'자, 동생(형수) 이름 중 '형'자를 합쳐 '수형당'을 만들 정도의 감각을 가졌다. 진 사장은 당시 경영자로선 드물게 신문광고도 적극 활용했다. 70년 5월 영남일보에 실린 수형당 광고, '등록상표 제12418호, 경상북도 및 대구시지정 분식 빵 제조공장, 빵의 생명은 신선미, 건강제일의 분식빵으로'란 문구가 눈길을 끈다.

수형당은 사업운이 있었다. 6·25 직후 대구로 피란 온 육본과 2군사령부 등 각급 군부대가 포진해 있어 식빵과 단팥빵, 건빵 등을 공급하기 쉬웠고 '독점군납' 덕분에 브랜드 파워를 키운다. 60년대까지만 해도 '군인 세상'이었다. 심지어 양질의 밀가루도 군이 독차지했다. 물론 그 밀가루는 미국과 UN의 원조품이었다.

군 뿐만 아니라 교도소에도 수형당 빵이 들어갔다. 예식장 답례품용 찹쌀떡과 카스텔라까지 개발한다. 사탕보다 더 맛있는 캐러멜(마산 캐러멜도 대구 브랜드임)도 만들었고 70년대초엔 동아백화점 식품코너에도 진출한다. 지역의 군소 브랜드들은 더 이상 수형당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달성공원·지역의 중·고교·극장 매점, 심지어 구멍가게 빵 코너까지 집어삼킨다.

수형당은 빵만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건설·전자산업에도 진출한다. 육군본부가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갈 때 육본을 따라서 상경, 서울 삼각지로터리에 서울공장을 짓는다.

68년 9월엔 국내 최고급 식빵 공급 업체로 발돋움한다.  
 
대구시 서구 평리동에 2천여평 넓이의 수형당 제3공장도 설립한다. 매일 20여만개의 식빵을 만들어 지역 공무원과 회사원, 학생 등에게 공급했다. 불길처럼 치솟는 수형당의 사세를 보면서 수형당의 침몰을 예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금복주도 초창기엔 수형당 수하의 매장에 소주를 납품하기 위해 끈질긴 로비전을 펼쳤다. 수형당 빵은 '영남의 빵'이었다. 정부는 분식을 강요했고, 그럴수록 수형당의 사세는 '땅 짚고 헤엄치기'로 확장됐다.

수형당의 식구는 한창 때 300여명이 넘었다. 그럴듯한 직장이 별로 없던 시절, 수형당은 대구상고 졸업생들이 가장 입사하고 싶어하던 선망의 대상이었다.


# 연탄으로 굽고, 자전거로 배달

50년대, 최고의 배달수단은 짐자전거였다. 이 때만 해도 비닐이 없었다. 그래서 낱개 포장은 생각할 수 없었다. 빵은 나무 케이스에 넣어 배달됐다. 총판도 없어 소상인들은 아침마다 수형당 앞으로 모여들었다. 돈을 주고 빵을 매입한 뒤 직접 자기 가게에서 팔았다. 가게가 없는 영세 상인들은 2개의 유리진열장에 망개떡과 빵 등을 넣은 뒤 찹쌀떡 장수처럼 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방부제가 없던 때였다. 그래서 유통기한도 무의미했다. 곰팡이가 필 때까지 두고 두고 팔았다. 이스트가 없어 막걸리에서 효모를 추출해 빵에 집어 넣었다.

빵 굽는 수단도 세월따라 많이 변화했다. 초기 장작불에서 시작, 숯→연탄→가스→전기 오븐으로 진화했다. 수형당은 오랫동안 가내수공업적 생산 시스템을 벗어나지 못했다. 초창기엔 연탄불로 빵을 구웠다. 그래서 일부 직원들은 늘 두통에 시달렸다. 멀리서 보면 빵을 굽는 게 아니라 가마에서 도자기를 굽는 것 같았다.

직원들은 매일 연탄가스와 전쟁을 벌였다. 대다수 가스에 길들여졌지만 신참이나 비위가 약한 직원들은 밖으로 뛰쳐나가 심호흡하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몇몇 직원들은 도시락을 한 개 더 갖고 왔다. 그 안에 물김치와 동치미가 담겨 있었다. 김치 국물이 연탄가스의 즉효약으로 통하던 시절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수형당은 지금…

수형당은 80년대로 진입하면서 치명타를 맞고 침몰한다.

왜 그랬을까? 관계자들은 주먹구구식 경영, 무리한 사업확장 등을 파산 이유로 꼽는다. 게다가 70년대 뉴욕, 런던, 뉴델 등 쟁쟁한 제과점들이 수형당을 뒤흔든다.

이들 제과점이 개발한 케이크가 수형당의 단팥·크림빵을 조금씩 밀어낸 것이다. 세상이 변했고 사람들의 입맛도 변했지만 수형당은 그걸 재빨리 읽지 못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편의방, 미도방 등 각종 분식점과 별의별 식당들이 등장했고, 패스트푸드까지 대구를 향해 진격 중이었다. 수형당은 설자리를 못 찾는다. 다각화를 시작한 수형당 계열사도 한 수 위인 기존 업체를 못 이긴다. 거함 '수형호'에 균열이 생긴다. 손댈 틈 없이 물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수형호는 82년쯤 침몰했고, '달구벌의 혀'를 즐겁게 해줬던 선장도 86년쯤 타계한다.

관계자들은 "수형당이 빵만 붙들고 있었어도 저렇게 맥없이 무너지진 않았을 텐데…"라며 수형당의 몰락을 안타까워했다. 수형당 공장은 82년 철거되고 현재 그 자리엔 갈색 타일조 4층 건물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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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개떡과 호두과자

망개떡과 호두과자 요리 맛집 정보 2008.09.06 12:37

망개떡과 호두과자



입안 가득 상큼한 '사-과-향' 망개떡
日人들도 생각못한 호두모양 호두과자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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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두과자와 망개떡]



망개떡은 찹쌀떡, 황남빵, 호두과자 등과 함께 일제 때 등장해 아직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음식이다.

경주 황남빵은 일본의 생과자, 나마카시와 맞물려 있고, 망개떡은 인절미와 송편을 퓨전한 작품이며, 호두과자는 붕어빵의 응용작품으로 보인다.

1950년대만 해도 설탕과 품질 좋은 강력분 밀가루가 일반 업자들에겐 거의 공급되지 않았다. 밀가루는 미국과 국제연합아동기구(UNICEF)가 앞장서 공급했다. 53년 유니세프가 학교에 빵과 과자를 나눠주었고, 55년엔 점심을 못먹는 초등학생들에게 우유와 식빵이 제공됐고, 그 흐름이 72년까지 무려 20여년간 지속된다. 식빵과 고급 밀가루 덕분에 시중엔 빵공장과 제과점이 우후죽순 생겨난다.

69년 분식장려정책은 대구의 제과점 양산과 직접적인 함수관계가 있다. 제분시설의 경우 광복 직후 4곳 있었지만 6·25 때 모두 파괴된다. 53년 대한제분 등이 생겨나 하루 110t급 생산체제를 유지한다. 하지만 이때 밀가루는 거의 면제품용으로 공급된다. 제과점용 밀가루는 늘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망개떡이 등장한다.

감나무 잎 위에 얹힌 망개떡에 대한 추억은 40대 이상의 사람에겐 특히 절절하다. 망개떡은 50~60년대 대구 시내 여러 골목에서 볼 수 있었다. 지역의 구일제과점(옛 관광센터 맞은편), 중부경찰서 근처에 있던 덕인당, 일성당 등에서 많이 팔았다. 특히 구일제과점은 망개떡 전문점으로 알려졌다.

망개떡은 찹살떡과 쌍벽을 이뤘다. 망개떡은 아주 시각적인 떡이었다. 특히 표면에 식물성 기름을 발라서 장사꾼들이 진열장에 넣고 다니면 햇살에 반들거려 판매를 더욱 촉진시켰다. 그런데 70년대 후반쯤 갑자기 망개떡이 사라졌다가 최근 경남 의령에서 히트 특산품으로 급부상했다.

망개떡은 '망개'라 불리는 청미래덩굴 잎 두 개로 감싸 찐 떡인데 옛날부터 경상도 사람들이 틈틈이 만들어 먹어왔다. 망개잎을 삶으면 거기서 독특한 향기가 피어난다. 신선한 망개잎은 상큼한 사과향을 지니고 있다. 이 향이 떡의 부패를 막아주며 향미를 더한다. 도시인들이 찹쌀떡이나 제과점 빵을 즐기는 동안 그곳 사람들은 수시로 망개떡을 만들어 심심한 입을 달랬다. 이 떡은 안동의 벙어리·버버리 찰떡과 비슷하다. 그 기술이 광복과 함께 도시로 대량 유입되면서 제과점으로 기술 이전된 것으로 보인다.

망개떡은 만들기가 아주 까다로운 떡이다. 멥쌀을 물에 불려 시루에 찐 다음 절구에서 차지게 친 뒤, 홍두깨로 얇게 밀어 손바닥만한 크기로 자르고, 그 위에 팥소를 얹어 보자기 모양으로 빚어 두장의 망개잎으로 살포시 감싸 만든다.

의령군농업기술센터는 지역이름을 알리는 데 있어 문화유적지 못지 않게 지역음식이 효과가 크다는 것을 알고 '의령=망개떡'이란 홍보 컨셉트를 정해 99년 망개떡을 '의령명품'으로 육성했다.

3대째 제조하고 있는 '남산가공사(대표 임영배)', 뽕잎 망개떡에 주력하고 있는 '설뫼식품(대표 안경란)', 망개잎 저장법과 팥소의 맛 개선 등 원조 망개떡에 새로운 기술을 접목시켜 자굴산 망개떡을 만들어 내는 '의령토속식품(대표 전연수)' 등이 대표 주자들이다.


천안의 부부가 일제시대 때 만들어 앙금에 후두를 넣고 모양도 호두 같이…

고속도로 휴게소의 히트상품

호두과자는 추억의 과자다. 예전엔 홍익회 아저씨들이 기찻간에서 많이 팔았는데 이젠 고속도로 휴게소의 히트상품이 돼버렸다. 호두과자의 맛은 뭐니 뭐니 해도 앙금에서 나온다. 그런데 그 앙금이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되는지 일반인은 잘 모른다.

대구 칠성시장에서 앙금 전문상을 하고 있는 도운기씨(53). 한국 제함식품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인 그는 대구 앙금산업의 산증인이다. 대구 앙금은 도영기씨로부터 옛 국제롤러스케이트 장 뒤편에 있던 칠성 앙금 도칠수씨(68)를 거쳐 그에게 전해진다. 현재 서울은  서림, 전라도는 대두, 부산은 유진식품이 대표 주자이고, 대구는 옥산과 대보 식품이 지역의 앙금 수요를 감당하고 있다.

옥산식품의 도운기 사장이 20여년 전쯤 동대구역 플랫폼에 홍익회 즉석 호두과자점이 등장할 때 팥 앙금을 대주었다. 12년 전쯤 대구의 앙금 제조업체는 7개가 있었는데 현재는 옥산과 대보 두 개만 살아남았다. 일본에선 앙꼬이지만 한국 업자들은 앙금이란 말을 더 선호한다. 앙꼬는 팥소로 풀이되고, 팥과 콩 두 종류로 만든다. 붕어빵엔 통팥앙금, 호두과자와 찹쌀떡엔 미세한 분말 형태의 팥앙금, 제과점엔 완두왕금, 팥껍질을 벗긴 백색앙금 등이 많이 팔린다.

일본은 앙꼬의 고향인데, 그렇게 단 걸 좋아하게 된 이유가 있다. 일본인은 생선류를 즐기다 보니 각기병 등에 취약해 메이지 유신 때부터 그 병에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해 나라에서 앙꼬를 권장하면서 활성화됐다고 한다.

호두과자의 메카는 천안이다. 천안 호두과자는 경주의 황남빵과 비슷한 배경을 갖고 있다.

황남빵과 천안 호두과자는 생긴 것도 비슷하고 일제 때 일본인 제빵인들과 경쟁하면서 성장해 왔다는 점이 그렇다. 그 기술은 34년 충남 천안시 대흥동 학화(鶴華) 호두과자에서 비롯된다. 조귀금·심복순씨 부부는 천안역에서 아산 방향으로 30여㎞쯤 가는 길 가에서 일본인들도 생각하지 못한 별난 과자를 만든다. 일본인들도 호두를 원료로 한 과자를 팔았지만 호두모양의 과자까지는 생각 못했다.

신혼 초 조귀금씨는 새로운 빵을 만들고 싶어했다. 부인이 먼저 아이디어를 냈다. 천안시 광덕산에서 대량 생산되는 호두에 껍질을 벗긴 흰팥을 이용해 색다른 버전을 만든 것이다. 부인 심씨는 호두 재료 과자를 만들려면 역시 호두처럼 생긴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기계틀은 서울 을지로의 한 철물공작소를 통해 호두모양으로 주문제작했다. 그 공작소는 유명 제과제빵 기계 제작업체로 성공한 서일기계공업사였다.

87년 조씨가 세상을 떠나자 학화는 가업승계 문제를 놓고 고심을 하게 된다. 큰아들은 주유소를 운영했고, 막내 아들은 대학교수로 있었다.

심씨는 90년 큰아들에게 고속버스터미널 근처에 첫 분점을 내준다.

80년대 천안에서 열손가락에 드는 부자였지만 심씨 할머니는 돈의 덧없음을 알고 10여개의 교회에 재산을 희사했다. 현재 천안엔 본점 2곳과 2·3호점 등 모두 4개의 학화 호두과자집이 있다. 5천원에 34알, 1만원엔 68알.

◇ '호두과자' 는 홍익회를 만나 전국적 명성 얻어

2005년 1월1일 재단법인 홍익회가 사라지고 대신 한국철도유통으로 법인명이 바뀐다. 홍익회의 히트 상품은 가락국수와 호두과자였다. 가락국수는 90년대 초 위생 문제 때문에 포장국수로 바뀌면서 명성을 잃어버렸다.

호두과자와 홍익회의 만남은 절묘했다. 학화 호두과자의 유명세는 홍익회를 만나기 전 천안권을 못 벗어난다. 그런데 광복 직후 홍익회를 만나면서 팔자가 달라진다. 홍익회는 36년 당시 철도청장이 각종 사고를 당한 철도유가족을 위한 원호사업 차원에서 만든 것으로, 67년 (재)홍익회로 발전하게 된다. 현재 본부는 서울 영등포역에 자릴 잡고 있다. 홍익회 열차영업사원은 350명에 달한다.

호두과자는 호남선과 경부선에서 주로 팔린다. 호남선의 경우 천안에 있는 대신제과가 납품업체로 선정됐다. 하지만 식은 호두과자에 대한 승객들의 반응이 별로 좋지 않아 대신제과가 2003년부터 천안과 대전역 플랫폼에서만 즉석 호두과자를 구워 팔고 있다. 경부선의 경우 한국철도유통의 자회사인 일양식품이 호두과자를 공급하고 있다. 물론 지역성이 강해 천안과 대전 역에서 가장 많이 팔리지만 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 이후 전국의 고속도로 휴게소에 호두과자가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철도 호두과자의 설자리가 좁아졌다. 황남빵도 경상도권 역에선 인기가 있는데 수도권에선 별로 팔리지 않는다.

학화호두과자는 이제 홍익회에 물건을 납품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일반 승객들은 천안호두과자를 학화 것인 줄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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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0년대 대구대표 빵집

50∼60년대 대구대표 빵집 요리 맛집 정보 2008.09.06 12:33

50∼60년대 대구대표 빵집




"냄새 끝내준다…꼴깍" 대구형무소 재소자 괴롭힌? 삼미제과


 
삼미(三美)제과사, 삼송(三松)빵집, 송영사는 광복 직후 대구의 '3인방 빵집'으로 불렸다. 누가 뭐래도 이들은 1970~80년대에 뉴욕·뉴델·런던제과를 등장시킨 '대구 빵의 산파'였다.

50년대 중부경찰서 네거리는 '빵거리'로 군림한다. 이들 3인방의 뒤를 이어 고려당, 중부 경찰서 바로 북측에 일성당(사장 김도권), 바로 옆에 동양당, 종로초등 정문 맞은편에 덕인당, 대구역 앞 대우센터 뒤편에 구일제과점(박태준), 동성로 미도방 맞은편에 풍년당, 종로초등 근처에 풍곡당(사장 이을수), 약전골목 동문 근처엔 백일당, 학원서림 부근에는 맘모스 등이 나타난다. 특히 구일제과는 건과자 전문점으로 유명했다. 60년대를 화려하게 물들인 맘모스의 기술은 뉴욕을 거쳐 뉴델로 이어져 70~80년대 대구를 빵의 도시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그만큼 기술이 출중했다. 맘모스 초기 직원인 김정환씨(수성구 지산동 뉴욕제과 사장)는 "맘모스는 대구에선 처음으로 즉석 도넛을 개발해 지역 제빵 문화를 한 단계 성숙시켰다"고 증언했다. 무궁화 백화점 근처에 있다가 나중에 학원서림 자리로 이전한 맘모스의 김모 사장은 북한 출신으로 대구에선 처음으로 즉석 도넛과 '고로케'(야채 도넛)를 유행시켰다.

이 무렵 잘 나가는 7개 제과점 주인들이 모여 '7인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일본 연수까지 다녀오면서 일본의 선진 제빵 기술을 가져왔고, 이 모임은 90년대 뉴델제과 사장 최종수씨가 주축이 된 '과우회(菓友會)'로 발전한다.

# 출소자는 삼미 빵 실? 먹고 직성 풀어

삼미제과사의 최팔용 사장, 삼송빵집의 서모 사장, 송영사 사장, 고려당의 하경봉 사장, 수형당의 진병수 사장, 이들은 모두 북성로 일본 빵집 이마사카 출신이었고 흥미롭게도 모두 유도 유단자였다.

삼미제과사는 경북대 사대부설초등 맞은편 골목에 있는 옛 경북학원 자리(현재 대구요리학원)에 있었다. 삼덕동 대구형무소(1910년 대구감옥으로 출발해 23년 대구형무소, 61년 대구교도소로 개칭한 뒤 71년 6월1일 화원으로 이전) 정문 바로 근처에 있어 수형자들에겐 잊지 못할 추억의 빵집이 된다. 바람불면 빵굽는 냄새가 형무소 담 안으로 들어갔다. 재소자들은 '냄새와의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건 또 다른 '고문'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면회인들은 삼미의 빵을 사들고 면회소로 갔고, 출소자들도 복수하듯 그곳 단팥빵 등을 배터지게 먹고 집으로 가야 직성이 풀렸다.

최 사장은 50년대 초 수형당보다 앞서 군에 빵을 납품하기도 했지만 친구인 진 사장의 사업 수완을 이겨내지 못하고 57년쯤 좌초되고 만다. 현재 아카데미 옆 골목 안에 자릴 잡고 있는 최가네 케이크 사장 최무갑씨(62)가 그의 아들이다.

# 대신동 삼송빵집은 여름철 빙설도 유명

중구 대신동. 일제 땐 깐깐한 동네였다. 서문시장·금은방 골목·동산약국과 함께 대신동 명물로 통했던 빵집이 있다. 바로 삼송빵집이다. 기자도 계성중 시절 그 앞을 지나 등·하교를 했다. 은행 정문처럼 생긴 가게 외관과 회색빛 간판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시절 여름철이면 삼송빵집 빙설이 유명했다. 유명한 게 또 있었다. 바로 섬유회관 근처의 백운당, 달성공원 초입의 영선당에서 나온 요즘 잘 팔리는 '비비빅'처럼 생긴 팥 아이스바였다. 판매원들은 성인이 아니고 코흘리개였다. 그들은 때로 앵벌이로 전락해 통을 메고 찹쌀·망개떡 장사처럼 도심 곳곳을 파고들어 적잖은 돈을 업자들에게 안겨줬다. '동정상술'의 극치였다.

현재 중구 동성로 3가 제일극장 맞은편 삼송 베이커리는 광복 직후 서모 사장이 세운 삼송빵집의 상호를 계승했다. 지금은 삼송 상호가 하나밖에 없지만 20년 전만 해도 서구 등 변두리에 몇 개 있었다. 삼송이 그만큼 유명한 탓이었다.

서모 사장은 4남매를 뒀지만 그 시절 부자 빵집이 다 그렇듯 자녀들은 빵 장사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빵집 사장들은 장남만은 판검사·의사·교수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삼송빵집 자녀들은 모두 미국으로 이민가버렸다. 이후 삼송의 주인은 여러번 바뀐다. 중구 공평동 스텔라 베이커리 김호상 사장, 옛 송죽극장 옆 뉴델제과 최종수 사장도 삼송 간판을 걸었다.

삼송은 60년대 중반 대형화재를 당한다. 그로 인해 동산약국과 삼송빵집이 동시에 피해를 입는다. 이 화재는 73년 6월6일 송죽극장 옆 뉴델제과 화재와 함께 대구의 대표적 빵집 화제로 기록된다. 삼송은 신축된 뒤 종업원이 한번 맡았다가 73년쯤 역시 삼송의 기술자였던 박명호·정옥희씨(62) 부부한테 넘어온다. 이들이 삼송의 마지막 사장이 된다.

70년대 초 삼송은 50여평 규모로, 홀엔 8개의 테이블이 있었다. 주로 단팥빵과 크림빵, 찹쌀떡이 많이 나갔다. 특히 계성·원화·신명여고 등 지역 각급 학교 매점에 많은 빵을 팔았다. 노동절, 운동회 땐 각종 빵 주문이 폭주했다. 옆에 있던 황태자 제과점(도질수 사장)과 산다방도 삼송 때문에 덩달아 장사가 잘 됐다. 등교 때는 근처 학생들이 단팥빵 등을 책가방 안에 몰래 쑤셔넣고 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규율부장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책을 다 빼낸 뒤 가방 밑바닥에 빵을 깔고 그 위에 책을 올려놓았다. 감쪽 같지만 그 빵은 과연 어떻게 됐을까.

바로 옆엔 동화사행 시외버스 정류소가 있었다. 후에 이 자린 동산약국에 팔린다. 물론 버스 정류소가 삼송 특수에 부채질을 해준다. 주말이면 그곳에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김밥 대신 빵이었던 시절이니 장사는 두 말할 필요가 없었다. 박 사장은 주문 물량을 다 충족할 수 없어 남산초등 근처에 공장을 세웠다. 한때 대구예식장 제과부도 맡았던 박 사장은 중구 도원동 금수세탁소 바로 길 건너 영화제과점도 함께 경영했다.

70년대까지 전성기를 구가했던 대신동 상권은 80년대로 접어들면서 급속도로 추락하게 된다. 바로 서문시장 상권이 쇠락한 것이다. 박 사장은 '탈(脫)대신동'을 결심하고 87년 2월 제일극장 맞은편으로 이전한다. 한때 옛 국제극장 골목에서 불고기 전문 용궁식당으로 외도, 뼈아픈 좌절을 맛본 뒤 본업으로 돌아왔다.

대신동 니베 의상실 사장이었던 부인, 그리고 장남과 함께 만든 추억의 고로케를 맛보라며 그가 기자에게 몇 개 내밀며 빙그레 웃었다. 비록 경기는 별로라지만 그 표정만은 '호황'이었 다.


고로케와 크로켓, 도넛과의 관계는?

크로켓(Croquette)은 일본말 '고로케'와 같은 말이다. 그렇지만 이 둘은 도넛(Doughnut)과는 좀 다르다. 물론 식물성 기름에 튀겼다는 점에선 같다. 단지 속과 겉을 어떻게 꾸몄는가가 좀 다르다.

여기서 도넛의 유래를 알아보자. 16세기쯤 네덜란드, 독일 등 북유럽권에서 탄생한 도넛은 원래 구멍이 없었다. 영국인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 올 때만 해도 도넛엔 구멍이 없었다. 도넛 구멍은 19세기 초 미국의 한슨 크로켓 그레고리 때문에 생겨난다. 그는 엄마가 주는 케이크의 중심부가 덜 익은 게 늘 불만이었다. 어느 날 그 케이크의 중심부를 포크로 떼어 내고 먹었는데 그게 훗날 도넛 구멍으로 발전한다. 한슨 크로켓은 선장이 된 뒤에도 도넛 구멍을 절묘하게 활용했다. 파도가 높을 땐 구멍난 도넛을 기관실 타륜 손잡이에 걸어놓았고, 그걸 본 선원들을 통해 도넛 구멍이 전세계로 확산된 것이다.

통상적으로 도넛은 팥앙금이 들어가는 빵 도넛과 초콜릿 시럽 등으로 표면을 코팅한 과자형 도넛이 있다. 반면 고로케 속엔 야채와 다진 고기가 들어간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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