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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식집'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8.10.14 19년 전통 일식집..'이즈미'
  2. 2008.09.06 50∼60년대 대구 유명 일식집
  3. 2008.09.06 대구 일식당 종가격 '미화'

19년 전통 일식집..'이즈미'

19년 전통 일식집..'이즈미' 요리 맛집 정보 2008.10.14 09:21

19년 전통 일식집..'이즈미'
 


신선함의 최고봉, 회 본연의 맛을 느끼려면
일본인에게도 인정받는 19년 전통의 일식집
'이즈미'는 성수대교 남단 샘(泉) 이라는 뜻


1989년 처음 이즈미를 오픈하여 19여년이 지난 지금은 국내뿐아니라 일식의 본고장인 일본인에게도 인정받는 곳이 되었다. 생선회와 초밥에 쓰이는 어종은 대부분이 자연산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양식이 이용되기도 한다. 같은 양식 재료를 가지고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생선 맛이 확 달라지기 때문에 자연산이 아니라고 맛이 없을 것이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조리부장의 설명이다.

이곳에서 자신 있게 내놓는 요리는 복회처럼 얇게 뜬 광어회와 아가미살이 담겨 나오는 참치회 20~30여 가지의 초밥을 준비하는 보통의 일식집에 비해 60여 종의 생선과 해산물로 만들어 내놓는 초밥도 빠뜨릴 수 없는 메뉴다.

주방장이 직접 갈아 회 위에 올려주는 고추냉이는 전혀 맵지 않으면서도 시원한 맛과 향을 느낄 수 있어 정통 일식집다운 면모를 엿볼 수 있게 한다...[쿠켄]

샘(泉) 이라는 뜻의 일식집 이즈미의 외관 모습. 대로변에 있어 찾기 쉽다.
 저녁은 5시반에 오픈하는데 첫손님으로 가서 룸으로 안내를 받았다.


사시미 세트!
이게 2인분인데 양이 무지 많다. 너무 신선해서 눈으로 보고있기만 해도 맛있어지는 순간이었다. 도로, 아까미, 광어, 도미, 전복,엔삐라, 개불이 나온다. 음식마다 민들레가 함께 나왔는데 색의 조화가 참 예뻐 눈도 즐거웠다.

  
도톰한 아까미
갠적으로 참치회를 먹을 땐 와사비간장도 거의 찍는둥 마는둥해야 참치회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는것 같다.

 
참치의 가마살 (도로 부위)
참치의 뱃살과 머리사이의 부위로 가장 적은 양이 나온다. 도로 부위 중에서도 최고의 육질을 자랑해 가격도 가장 비싸다고 한다. 마치 한우의 꽃등심을 보는듣함 주황색. 그리고 선명한 마블링 보고만 있어도 군침이 돈다아.

 
광어 지느러미살인 '엔삐라'
엔삐라는 공급량이 적어 비싸지만 적당한 기름기와 쫄깃한 씹힘, 그리고 입에 척 들러붙는 느낌 때문에 단골들이 즐겨 찾는다고 한다.

 
일본의 사케도 한잔.
시원하게 마실 수 있도록 준비해주셨다. 달달한듯 순해서 목넘김도 좋았던 사케와 사시미는 정말 잘어울렸다.

 
이어지는 모듬 해물 세트.
눈이 즐거울 만큼 예쁜 색깔의 해물이 모여있었던 만큼 신선한 맛의 조화도 너무도 훌륭했다.

 
도로무침
신선한 도로에 참기름과 단무지등을 넣어 고소하게 무쳤다. 도로무침은 김에 싸먹어야 제맛인데 일본식 빳빳한 김에 올려놓고 먹으면 말이 필요없다. 고소함과 신선한 도로무침이 사르르 넘어간다.

 
아나고(붕장어) 말이
아나고 말이는 특제소스에 찍어 먹는다. 요새 넘 먹고 싶었는데 잘됐다,,하며 즐겁게 먹음:)

 
청어
노란색이 전부 청어알인데 노락색도 넘 예쁘지만 씹을때마다 톡톡 터지능 :D 청어도 생와사비만 조금 올려서  살짝 와사비간장 찍어서 먹기.

 
고노와다와 해삼
아까는 고노와다와 갈은마가 나왔는데 고노와다와 해삼은 서비스로 나왔다. 역시 이것도 후루룩~~~ 
이날 홍삼을 먹으러 갔는데 홍삼이 나오는 시기가 아니라며 서비스로 주신해삼과 전복. 보기만해도 "싱싱"이 상상되시는지,,ㅋㅋㅋ 먹음직스럽게 참 큼지막하게 잘라서 주셨다.
 
도미머리 조림
도미머리와 함께 밤과 감자 고추등의 야채도 같이 졸여져 나온다. 도미머리가 정말 큰데 도미의 눈도 징~~짜 크다 ㅋㅋㅋ 그릇을 내려놓으시며 눈을 먼저 딱 빼주시는데 눈독을 들이다가 결국 눈은 내 차지가 되었다 ㅋㅋㅋ 눈 못먹는 사람 참 많을텐뎅~~표현이 참 글치만,,,도미살보다 눈이 더 맛있었다ㅋㅋㅋ

 
모듬 튀김
속살이 살아있는 새우, 단호박, 피망, 고구마가 튀김으로 나오는데 튀김옷 안에 신선한 재료의 맛이 고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평소 튀김은 잘 안먹는데 여기선 거의 다 내가 먹은듯~

 
시원한 국물 맛이 일품인 대구 지리
지리는 신선한 생선으로 밖에 못 끓인다. 그래서 선도가 조금 떨어지는 생선으로는 매운탕을 끓이고 신선한 생선으로는 지리를 끓인다.


서비스도 좋았고 조용한 룸에서 거의 4시간 동안 많은 얘기를 나누며 줄기차게 먹은 사시미 정찬이었다. ㅋㅋㅋㅋ넘 오래먹었어.
홀은 역시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기 점심 코스도 괜찮다고 하니 담에 스시 생각이 날 땐 점심코스로 가봐야겠다 :)


위치 : 성수대교 남단 사거리에서 도산공원 사거리 쪽으로 가다보면 삼원가든 못가서 우측에 위치
Tel : 02-542-7171
영업시간 : 런치 11~3시
디너 5시 반 이후부터, 발렛비 : 천원
가격 : 런치 코스  2만 5천원 / 3만원
디너 코스  4만원 / 5만원  (Hall)
사시미 코스 10만원 / 12만원  (Room)
부가세 10% 별도




 

Posted by 비회원

50∼60년대 대구 유명 일식집

50∼60년대 대구 유명 일식집 요리 맛집 정보 2008.09.06 11:55

50∼60년대 대구 유명 일식집



50∼60년대 풍미한 '삼거리'
영화 빨간마후라 신영균 최무룡씨도 촬영 끝나면 "삼거리로 가자"

사용자 삽입 이미지

 
 
대구 일식사는 중구 향촌동에서 발원한다. 일반인에게 향촌동은 서울 무교동·부산 남포동과 함께 전국 3대 주점가로 알려져 있지만 일제 때는 한강 이남 최고의 일식 타운. 향촌동 일식문화는 일제 때 절정기를 맞았고 1950~60년대도 여전히 호경기를 누린다. 하지만 70년대로 접어들면서 향촌동 일식 시대는 끝이난다. 점차 주점가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취재를 위해 향촌동을 둘러봤다. 실버들을 위한 카바레와 선술집이 흘러넘쳤다. 초밥집이 점점이 박혀 있었지만 예전 일식당은 아니었다. 인기 메뉴는 4천원짜리 실버형 초밥(우동과 구운 생선을 서비스로 제공). 돈없는 노인들을 상대하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단다. 그 시절 향촌동의 정통 일식당은 전멸이었다.


# 스모노 전문점 할매집…80살 주인 아직도 영업중

행히 한 곳만은 일제 때 발원한 초무침회의 일종인 '스모노(酢物)' 요리의 전통을 잘 지켜가고 있었다. 옛 상업은행 네거리에서 북측 골목 안에 있는 할매집이다. 70대 이상 노인들에겐 '곤도집'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곤도상이란 향촌동의 대표적 일식 조리사였던 권영수씨의 창씨개명한 이름. 80년 타계한 그는 일제 때 미화 등 향촌동 근처의 여러 일식당을 돌며 일식을 체계적으로 배운 괄괄한 성질의 조리사이다. 광복 후 사업 자금이 없어 한동안 다른 사람 밑에서 일을 했다. 독립한 곳은 향촌동 서편 골목 끝 왼편 모퉁이 지하실에 있던 녹향음악감상실 건물 2층 곤도집이었다.

곤도집은 정통 일식당은 아니었다. 초밥과 오뎅, 히레사케, 스모노 등 여러가지 일식 요리를 잘 만든 선술집이었다. 거기선 김치와 막걸리도 나왔다. 그는 주당 손님보다 술을 더 많이 마셨고 낭비벽도 심했다. 호인인 탓이다. 술이 거나해지고 기분이 좋지 않으면 식당 문을 닫아버렸다. 그가 타계하자 혼자 남은 아내 이월분 할머니(80)는 남편과 함께 주방 일을 해온 덕분에 가업을 계속 이을 수 있었다. '향촌동 스모노 할매'로 통하는 그녀는 요즘 청력이 너무 약해 보청기에 의존하고 있다. 관절염도 심해 제대로 걷기 힘들지만 그 시절 손님들이 찾는 게 너무 고마워 스모노 요리를 계속 붙들고 있다.

# 향촌동 일식집 출입한 한국인은 손에 꼽을 정도

일제 때 향촌동의 일식당에 출입할 수 있는 한국인은 손가락으로 꼽힐 정도였다. 일본인은 일본인 동네, 한국인은 한국인 동네의 식당을 주로 이용했다. 칠성동, 태평로, 북성로, 화전동, 서문로, 포정동 등 대구역전은 거의 일본인이 차지해버렸다. 향촌동은 일본인을 위한 유흥가였다.

일제 때 일본 여관은 식당업을 겸했다. 잠만 자는 여인숙도 있었지만 대다수 여관은 투숙객들이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일식의 역사는 여관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조리사가 없으면 여관업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간판을 달 때도 '식사도 한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여관 앞에 요리를 의미하는'할팽(割烹)'이란 단어를 붙였다. 할팽 여관보다 한 등급 높은 건 호텔이다. 일제 때 호텔은 철도청 부설이었다.

# 최고급 할팽 여관 가게츠…유명 정치인 많이 이용

일제 때 지역 최고급 할팽 여관은 옛 상업은행 대구지점 뒤편 골목 안에 있는 향촌동 가게츠(花月)였다. 이 가게츠는 60년대까지 화월 여관으로 존속했다. 50년대는 유명 정치인들이 이 여관을 잘 이용했다.

비록 외형은 예전 그대로지만 워낙 낙후돼 철거 직전의 음산한 표정이 안쓰럽기만 하다. 6·25 때 그 여관 한 쪽에 르네상스 음악감상실이 들어오기도 했다. 50년대초 작고한 구상 시인도 영남일보 편집국장 시절 그 여관을 본거지로 해서 '낭만의 향촌동 시절'을 구가했고 연작시 '초토의 시'도 건질 수 있었다. 가게츠는 70년대초 여관에서 성인 디스코장 '원투쓰리'로 바뀐다.  이후 판 코리아를 거쳐 현재는 실버 카바레로 변모했다.

# 일제 때 대구의 대표적인 향촌동 주변 일본 식당들

일제 때 대구의 대표적 일식당들은 거의 향촌동과 그 근처에 밀집해 있었다.

미자꾸(味樂·동성로 소재, 오뎅 전문), 비카(美華·향촌동, 고급 도시락의 일종인 마쿠노우치 전문), 쇼치쿠(松竹·향촌동 옛 상업은행 대구지점 뒤편, 복어전문), 고우미(香味·향촌동, 회·장어덮밥 전문), 가모가와(鴨川·화전동, 일·양식 전문), 도수이엔(刀水園·칠성동, 최고급 요정), 기쿠후지(菊富士·대구백화점 근처, 사시미·우동·소바 전문), 다마스시(玉壽司·서문로, 초밥·뎀뿌라·아게모노(튀김의 일종) 전문), 가게츠(花月·향촌동, 할팽 여관), 아카시(明石·향촌동, 할팽 여관), 오오에로(大江樓·중구 도원동, 시오아키(소금구이)·나베(냄비 요리) 전문), 야마토(大和·향촌동, 할팽 여관), 가이코(海光·향촌동, 오뎅·스모노 전문), 만세이앙(滿盛庵·중앙로, 단팥죽·소바 전문), 교지쿠(魚竹·북성로, 사시미 전문) 등이 대표격으로 꼽힌다.

이들 일식당은 광복 직후 적산으로 처분된다. 그곳의 한국인 조리사들 중 재력이 있던 사람들은 일제 때 예전 식당과 결별하고 새로운 식당을 개업했고, 또 일부는 일제 때 식당 주인으로부터 영업권을 건네받아 예전 일본 상호로 영업을 계속했으며 나머지는 가진 돈이 없어 다른 식당의 조리사로 들어갔다. 광복 직후 얼마까지 대구엔 일본식 상호가 적힌 간판이 적잖았지만 반감은 별로 없었다. 상당수 인사들이 일본풍에 젖어 있었던 탓이다.

# 향촌동 일식당, 포정동 은성 등장으로 대거 문닫아

복 직후 대구를 대표하는 일식당들은 향촌동을 거점으로 60년대까지 장사를 하다가 70년대초 혜성처럼 나타난 포정동의 은성 때문에 치명상을 입고 일제히 문을 닫는다.

50~60년대 대구를 대표하는 일식당은 향촌동을 거점으로 한 해광·미화·미향·향미·삼거리가 메이저급이다. 이밖에 향촌동의 미옥·송죽·와싱톤·안락·가보자·낙미를 비롯해 삼영(한일극장 맞은편), 삼락(아세아 극장 근처), 이학(만경관 옆), 낙락(아세아 극장 근처), 영락, 미림(대신동), 석백산(중앙파출소와 동아양봉원 사이) 등이 포진했다. 이들 중 삼락·삼영·영락·낙락·이학·석백산 등은 광복 직후 복어전문 식당으로 유명했다. 그 시절 일식당 상호용 한자는 미(味), 락(樂), 송(松), 해(海), 향(香), 학(鶴) 등이 인기였다.

# "삼거리에 와보지 않고 대구 왔다갔다는 말 하지 말라"

대구시 중구 남일동 중앙시네마 서편 골목 한주초밥. 그곳엔 현재 지역 최고령 일식 조리사 이우태 대표(70)가 일을 하고 있다. 그는 특히 삼거리에서 잔뼈가 굵은 조리사이다.

상주시 낙동면 출신인 그는 6·25와 함께 대구로 피란왔다. 그때 그가 제일 먼저 일을 배운 곳은 현재 미도백화점 자리에 있던 2층 목조 산가쿠(三角)였다. 이곳은 일제 때 일본인이 경영한 식당인데 광복 후 한국인한테 넘어간다. 일본인 주인이 종업원 박삼식씨(작고)의 성실함에 반해 식당을 물려준 것이다. 박씨는 산가쿠를 두 배로 키웠다. 향촌동의 미향 사장 조탁씨와 동업관계를 맺고 산가쿠를 삼거리로 상호변경해 신장개업한다. 테이블도 7개에서 30개로 늘어난다. 2층엔 회식용 다다미방이 무려 11개가 있었다.

삼거리의 위세는 64년 상영된 신상옥 감독의 영화 '빨간 마후라' 대구 현지 촬영 때도 여실하게 드러났다. 주연배우 신영균과 최무룡은 대구 동촌 비행장에서의 영화 촬영이 끝나면 스태프와 함께 부리나케 삼거리로 달려왔다. 초밥과 우동, 오뎅 맛이 워낙 좋아 "삼거리에 와보지 않고 대구에 왔다갔다 말하지 마라"란 말까지 스태프 사이에 유행하기도 했다.
 

 

Posted by 비회원

대구 일식당 종가격 '미화'

대구 일식당 종가격 '미화' 요리 맛집 정보 2008.09.06 11:53

대구 일식당 종가격 '미화'



한창때 종업원 100명, 조리사는 군대식 규율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
1960년대말까지 지역 일식촌의 종가격은 누가 뭐래도 미화(美華)였다.

인접한 해광, 미향, 미옥, 향미, 삼거리 등도 나름대로의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미화의 독주를 견제하긴 힘들었다. 음식도 음식이거니와 무엇보다 주인이 대외적 활동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게 가능한 것 같다. 충청도 출신의 이종화 사장(작고)은 훗날 대구상공회의소 상임위원, 음식업중앙회 대구지회장, 향촌동 상가번영회장, 무궁화백화점 사장 등을 거치면서 식당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다. 한때 대구일보 사장직까지 제의받을 정도로 명망가가 된다. 그 덕분에 '미화 문중'을 이룰 수 있었다.

물론 거기서 쟁쟁한 조리사들이 많이 배출됐다. 향촌동 주부센터의 김정식 사장(67), 종로의 미성초밥 정훈성 사장(67), 대봉맨션 상가에 있는 다미초밥의 이준석 사장(66), 정용암씨(56·대구역전 길조초밥 대표 역임, 현재 범어교회 맞은편의 한 일식당 주방장), 이용규씨(61·동아쇼핑 구미지점 랑데뷰 책임자 역임) 등이 바로 그들이다.

# 사미센 가락이 흘러나온 요정형 식당

화는 일제 때 오픈한 일본인들을 위한 요정형 식당이었다. 꽉 짜인 풀코스 메뉴라인, 정통 정원, 밤엔 일본 전통악기 사미센(三味絃) 가락이 흘러나왔고, 게이샤들까지 들락거렸다. 광복 직후엔 해광도 미화와 함께 요정형으로 크게 성공한다.

미화 입구엔 주렴처럼 생긴 '노렝'이 펄럭거렸다. 천으로 만든 노렝의 아랫단은 손님들이 자연스럽게 출입할 수 있게 두 곳이 트여져 있다. 노포(老鋪·일본의 오래된 업소)에는 반드시 노렝이 있다. 거기에 상호와 로고격인 문장(紋章)을 새겨놓는다. 그것은 그 식당의 자존심이었다. 그걸 달면 주인이 "절대로 음식 갖고 손님을 속이지 않겠다"는 걸 손님에게 약속한 것이다.

# 우키요에가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고

광복 직후 영업권을 인수한 이 사장은 정통 일식당 풍모를 갖추기 위해 18세기 때 절정기를 맞는 일본 민속판화인 '우키요에(浮歲繪)'를 여러 점 구해 걸어뒀다. 정통 일식당 주인이 우키요에 한 점 못 걸면 단골에게 눈총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키요에의 대가 중 한 명인 가츠시카 후쿠사이가 그린 '후지산 36경' 중 특히 해일 이는 바다 풍경은 가장 시각적 미학이 돋보여 한국 일식당 주인들이 선호했다.

이런 작품들이 정작 일본에선 푸대접을 받고 일부 브로커들을 통해 유럽에서 꽃을 피워 후에 일본으로 역수입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세잔, 고흐, 고갱, 모네, 마네, 로트렉 등 후기인상파 작가들이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유럽에서의 대박행진을 본 일본의 화상들이 미국 보스턴 등지를 돌며 우키요에 재매입에 나서게 된다. 우키요에 소재로는 가부키, 분라쿠(인형극), 노(能) 등 일본전통극에 출연한 배우, 스모 선수, 게이샤 등이 사랑을 받았다. 요즘 지역 일식당가엔 거의 컬러 프린팅 된 복제품들이 액자나 노렝 형태로 걸려있다. 이밖에 전통극 노의 여자 가면인 오다후쿠(御多福)·오까메, 금복주의 마스코트였던 복노인처럼 생긴 선동자 가면 등도 일식당 액세서리로 선호된다.

# 복어와 장어 요리도 일식집 대표메뉴

100여평 크기의 미화엔 다다미방이 10개, 조리대 앞엔 모두 15개의 등받이 탁자가 놓여 있었다. 한창 때는 총 종업원수가 100명이 넘었다. 미화엔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일식 요리가 다 구비돼 있었고 조리사들도 파트별로 조가 잘 짜여져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지금은 일식집에서 분리된 복어와 장어 요리도 반세기전엔 일식집의 대표메뉴였다. 사시미도 일반 생선보다 복사시미를 최고로 쳤다. 주요 재료는 염매시장에서 사왔다. 사시미용 생선은 수족관이 없어 포항 죽도시장에서 배송한 걸 얼음 위에 얹어놓고 사용했다.

요즘은 13~14℃를 유지해주는 첨단 수족관 덕분에 '즉석활어회'가 가능했다. 그러나 60년대만해도 활어를 넣어두는 수족관이 없었다. 당시 거의 
 
 
촬영 협조=서울 코리아나 호텔 일식부 사카에 출신인 경주대 외식조리학과 김현룡 교수가 카이세키 요리의 한 품목으로 만든 마구로 사시미. 얼음 항아리 아이디어가 빛난다.  
 
미화 출신 정훈성씨가 꾸려가고 있는 종로 미성초밥(위)과 미화에서 해광을 거친 김정식씨가 세운 주부센터. 현재는 보리밥 뷔페로 바뀌었다. 
 
 
나무 궤짝에 얼음을 채우고 그 위에 선어를 얹어 식당으로 갖고 왔다. 그것을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부패해 먹을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회보다는 초밥, 매운탕, 지리 등이 잘 팔릴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 대다수 일식당 주인들은 먼 포항 죽도시장 대신 염매시장의 선어를 사용했다. 서문시장과 칠성시장의 생선은 일식당에 그렇게 어필되지 못했다. 지역에선 대번초밥, 주부센터, 홍학(옛 코리아백화점 내) 등에 힘입어 70년대말~80년대초 수족관 활어시대가 열린다.

# 월급도 받지 못했던 올챙이 조리사들

때만 해도 올챙이 조리사들에겐 월급이 없었다. 조리사들은 단지 숙식만 해결하면 그것으로 족했다. 미화도 그랬다. 타지에서 온 가난한 농부의 자식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왔다. "그냥 밥만 먹여주면 열심히 일하겠다"면서 주방장 김말암씨 등에게 애원을 했다.

신참은 늘 잔심부름을 하고 청소만 전담했다. 식재료는 최소 1년이 경과하기 전엔 만지지 못한다. 요리를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땐 요리 정보가 몇몇 조리사에게 독점돼 있었고 그건 잘 공개하지 않았다. 요령껏 그 노하우를 훔쳐가야만 했다. 물론 일정 시간이 지나면 어깨 너머로 요리술을 터득하게 되지만.

흔히 식당 조리사들은 '이다바(板場) 출신'이라고 낮게 평가된다. 실제는 이다바 보다 '이다마에(板前)'가 정확한 표현이다. '이다'란 도마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도마 앞에 선 주방 팀장급 조리사에게 '이다마에상'이란 호칭이 붙여진다. 광복 직후부터 반일감정 때문에 일식 조리사를 일부러 이다바 출신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용어가 장인정신을 갖고 일하는 그들의 심사를 부담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것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 정통 일본 요리사는 모두 8계층으로 구분

아무나 도마 앞에서 '호죠(사시미용 일본 칼)'를 들지 못한다. 여러 단계의 견습시절을 거쳐야 가능하다.

맨 아래 단계 조리사를 '오이마와시'라고 부른다. 이들은 그릇씻기, 물품 구매, 청소 등 허드렛일을 한다. 이 시기를 적어도 2~3년 보내야 한다. 다음은 '핫슨바(八寸場)' 시기. 이때 견본을 보며 요리를 접시에 담는 일을 한다. 그 다음은 '와키이다(脇板)'. 이때는 생선을 물로 씻고 내장과 비늘을 제거하는 등 재료를 다듬는다. 이렇게 최소 5년간 세 단계를 보내야 된다. 그 다음 단계가 중견 조리사로 대접받는 5년간의 이다마에(板前) 시기. 이다마에 1기 때 비로소 칼을 잡을 수 있다. 냄비요리에 능한 팀장격인 와키나베(脇鍋), 구이요리를 잘 하는 야키카타(燒方) 등은 부조리장격인 '나카타(煮方)'를 도와준다. 도쿄에선 주방장을 '하나이다(花板)'로 받든다. 요리의 신 쯤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부하들을 이끄는 탁월한 리더십은 물론 식품과 가격의 본질까지 훤하게 간파해야 된다.

고교 졸업 후 일식 요정에 오면 스무 살까지 오이마와시로 일한다. 일본에선 식당 옮기는 걸 금기시한다. 그래서 말을 자주 갈아타면 경력이 거의 인정되지 않는다. 우리와는 좀 다른 풍토다. 사력을 다해 한 공간에서 목숨을 걸어야 나카타까지 올라갈 수 있다. 이다마에 정도가 되면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 나카타 이상은 천부적 재능이 있어야 된다. 하나이타는 아무나 못 올라간다. 골프로 말하면 타이거우즈급이랄까.

# 방만한 경영으로 미화도 최후의 길로 들어서

이 사장은 사업을 매우 방만하게 펼쳤다. 친척을 불러 옆에 미옥도 차리게 했고, 장어 도매상까지 경영한다. 하지만 향촌동 재개발이 일어날 때쯤인 70년대초 미화는 향촌동을 뜬다. 이 사장은 중부보건소 맞은편 자기 집으로 미화를 이전해 영업을 계속하지만 갓 등장한 중구 포정동 은성의 폭발적 파워에 밀려 단골을 많이 잃는다. 이 과정에 무궁화백화점도 공동투자해 짓고 모 페인트 대구경북 총판도 꾸려간다. 하지만 무궁화백화점 부도 여파에 휘말려 미화도 최후를 맞고 만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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