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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여행] 인도의 문, 인도 서남부의 케랄라 주

[인도여행] 인도의 문, 인도 서남부의 케랄라 주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28 15:48

[인도여행] 인도의 문, 인도 서남부의 케랄라 주




인도의 키워드, 깨달음 고행 향신료 배낭 요가…

갈수록 신비롭고 알수록 묘하기만 한 인도. 그런 인도에 ‘신도 예서는 짐을 벗고 쉬어 간다’는 절세의 휴양지가 있다. 팜트리 우거져 열대 정취가 물씬 나는 아라비아 해와 게서 조우하는 환상적인 노을. 내셔널지오그래픽이 ‘죽기 전 꼭 가봐야 할 50곳’에 추천한 인도 서남부의 케랄라 주다. 아름다운 뱃길이 숨어 있는 축복의 땅으로 여행을 떠난다. 》

 

인도 최고(最古)의 무역항 코치

오후 10시가 한참 지난 코치 국제공항. 싱가포르 경유 루트로 비행기에서만 꼬박 10시간을 보낸 뒤에 도착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한 인도가 아니다. ‘향신료의 나라’다운 자극적인 냄새, 길거리의 오물, 길을 막는 소가 보이지 않는다. 휴양지여서일까.

‘케랄라’는 ‘코코넛의 땅’을 뜻한다. 그러나 유럽 상인에게는 향신료와 상아를 얻을 수 있는 무역항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중심은 공항이 자리 잡은 이곳 코치다. 무역항이다 보니 중국과 아랍,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문화가 뒤섞여 있다. 오랜 교류의 결과다.

물가에서 보게 된 고기잡이도 그중 하나다. 거대한 뜰채 모양으로 큰 그물을 나무에 매달아 바다에 담갔다가 다시 끌어 올리는 식인데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 칸 시절에 전해진 중국 광둥지방의 전통어업 기법이란다. 많이 잡히지는 않아도 장정 대여섯이 펼치던 고기잡이는 보기에도 재미있었다.

포르투갈의 흔적으로는 1503년 건축된 성 프란시스 성당이 있다. 인도와 포르투갈의 관계는 특별하다.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켜 비잔틴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튀르크의 이슬람제국 등장이 그 계기다.

유럽의 동방무역 루트인 실크로드가 이스탄불에서 가로막히자 유럽제국은 뱃길 개척에 나선다. 이때 등장한 이가 포르투갈의 항해왕자 엔리케다. 그런 노력의 결과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희망봉을 돌아 아프리카 대륙 동편의 새로운 바다(인도양)를 발견한다.

이어 바스코 다가마가 1497년 인도양 개척 항해에 나서 이듬해 인도의 동방무역 거점항인 캘리컷에 입항한다. 그 다가마가 숨진 곳이 바로 여기 코치다. 그는 1524년 포르투갈의 인도 무역 책임자로 부임했다가 과로로 숨지고 성 프란시스 성당에 묻힌다. 유해는 12년 후 포르투갈의 고향에 안치됐다.

성당에서 멀지 않은 거리의 마탄체리 궁전도 이름난 유적이다. 이곳의 보물은 벽화인데 마치 불교의 탱화처럼 이야기와 신화를 잔뜩 늘어놓고 있다. 궁전은 외관보다 속이 더 알차니 꼭 관람하시기를 권한다.

코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카타칼리(민속무용극)다. ‘카타’는 이야기, ‘칼리’는 연극. 잔뜩 부풀린 치마를 입고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한 배우는 모두 남자다. 공연 시작 한 시간 전에 도착하면 분장 과정은 물론 리허설까지 본다. 배우의 표정과 수신호, 몸짓 등 감정 표현을 미리 알아두면 공연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도심에선 국산 자동차도 제법 많이 보인다. 또 빈터에선 예외 없이 크리켓을 하는 꼬마들을 만난다. 여기서 공중화장실을 이용할 때는 잔돈을 준비해야 한다. 작은 것은 1루피(25원), 큰 것은 3루피다.


인도의 베니스, 쿠마라콤

케랄라 주의 호수 뱀바나드는 바다처럼 넓다. 남북간 길이가 96.5km나 된다. 이 호수에서도 알라푸자는 수상으로 오가는 이곳 교통의 요지. 여기서 배를 타고 수로여행에 나섰다. 배 주변으로 푸른 하늘을 가린 코코넛트리가 스쳐 지나갔다.

15분쯤 지났을 즈음. 수문이 열리더니 신천지가 펼쳐진다. 코코넛 라군의 리조트다. 이곳은 호수 동쪽의 팜트리 호반으로 야자수 숲에 숨듯 자리 잡았다. 이 리조트호텔에서는 즐길 거리가 다양했다. 요가와 낚시는 물론 카누 타기에 선셋 크루즈까지. 세계 곳곳서 날아온 철새들이 쉬어가는 보호구역도 있다.

케랄라 원주민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빌리지 투어에 나섰다. 옷을 곱게 차려입은 꼬마들이 관광객을 쫓아와 뭐라고 얘기하며 손을 내민다. 사진을 찍어주니 마냥 좋아한다. 플레이 스테이션에 중독돼 사람보다 정보통신기기를 더 쫓는 우리 아이들과 너무도 다른 모습에 오히려 내가 더 얼떨떨해진다.

알라푸자의 명물은 관광객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하우스보트로 물의 도시 쿠마라콤의 명물이다. 대나무 틀에 야자나무 잎으로 바구니를 짜듯 이은 지붕을 얹은 목선인데 곡선의 조형미가 일품이다. 이 보트 안에는 없는 것이 없다. 에어컨은 물론이고 회의실에 침대가 딸린 객실도 있다. 요리사도 있어 음식을 맛보며 호반의 풍광을 즐긴다.

선상에 맛본 탈리 밀즈라는 전통요리는 그런대로 좋았다. 밀가루 빵을 기름에 튀긴 ‘푸리’도 맛보았다. 물길을 따르다 보면 물가에서 빨래하는 아낙네, 목욕하는 어린이, 낚시 중인 아저씨 모습 등 다양한 삶의 현장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마탄체리 궁전의 이야기가 있는 벽화처럼.


케랄라의 주도 트리반드룸

알라푸자에서 버스로 4시간. 인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코발람 비치 인근에 여장을 풀고 최남단의 대도시 트리반드룸을 찾았다. 거리는 사람들로 활기가 넘쳤다. 버스를 기다리고 손님을 호객하고…. 모두들 바빠 보인다. 스리 파드마나바스와미 사원은 200년 역사의 힌두교 유적이다. 그런데 외국인은 출입금지다. 힌두교인이라도 남자는 도티, 여자는 사리를 입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 사원은 외벽의 조각상부터 분위기를 압도한다. 검고 흰 것이 마구 뒤섞인 형국인데 그 이유가 재미있다. 복원 과정에서 희게 칠한 것이 몬순 계절에 내리는 비에 씻겨 다시 검어졌단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남녀의 성교 장면을 담은 조각상도 보인다.

사원 정면에는 케랄라 전통 양식의 궁전이 있다. 이 궁전은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케랄라의 역사를 소개하는 인형과 음악당, 빗물을 활용한 냉방시설 등이 시선을 끈다. 중국과 유럽의 향신료 무역과 관련된 것도 많다. 궁전의 외관은 122마리의 웃는 표정의 말(馬)머리 조각으로 장식됐다. 실내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며 촬영도 금지돼 있다.

시 외곽에서 빈민촌을 지나게 됐다. 하지만 주민들 표정에서는 일그러진 일상을 찾을 수가 없다. 오히려 고요와 평온이 흐른다. 사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삶의 색깔도 마찬가지다. 그 즈음에서 이런 의문에 휩싸인다. 내 삶은 어떤 빛깔일까. 인도에서 만나는 비일상성. 그것을 많은 여행자가 인도의 매력이라고 부른다. 더럽혀진 영혼을 씻고 걸어 온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것까지도. 물론 케랄라 같은 휴양지에서는 심신의 피로도 달랠 수 있고.

 

인도 여행정보

◇케랄라
△코치:싱가포르 항공(www.singaporeair.com/kr)이 싱가포르∼코치 매일 운항. 인천∼싱가포르 6시간, 싱가포르∼코치 4시간 소요.
△트리반드룸: 싱가포르항공이 싱가포르∼트리반드룸 주 4회(화목금토) 운항. ▽기후=여름(2∼5월) 24∼34도, 몬순철(6∼9월) 20∼30도, 겨울(10∼1월) 18∼28도. ▽홈페이지=www.keralatourism.org

◇여행상품
▽혜초여행사(www.hyecho.com)=아유르베다 체험마사지(3회)가 포함된 8일 일정 상품을 259만 원에 판매(수요일 출발). 02-733-3900

▼ 케랄라에도 아유르베다를 소개하는 휴양지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특히 아유르베다 리조트는 코발람 남쪽에 많은데 휴식 중에 치료를 겸할 수 있어 더없이 좋아보였다. 눈앞에 펼쳐지는 아라비아 해와 그늘 드리운 코코넛트리가 바다와 어우러진 멋진 풍광의 이곳. 풀과 요가, 각종 레저시설이 갖춰져 있다. 의사 처방에 따라 아유르베다 코스가 결정되는데 주로 7∼14일 코스의 패키지상품이 유럽 관광객의 인기를 끌고 있었다.

◇아유르베다 리조트=www.somatheera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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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여행] 인도를 여행해야 하는 몇 가지 이유

[인도 여행] 인도를 여행해야 하는 몇 가지 이유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28 14:26

[인도 여행] 인도를 여행해야 하는 몇 가지 이유

 

 

 

여행 내내 살펴본 결과 인도 여인들이 입는 사리는 같은 컬러, 같은 무늬가 하나도 없었다. 빛바랜 건물과 여인들의 옷 색깔이 어울린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다 
 
 
인도는 ‘여행의 막장·끝장’이라는 말이 있다. 왠지 인도에 대한 이미지는 이처럼 부정적이다. 더럽고 무질서하고 불결하고 사람들의 생활은 지지리도 궁핍하고, 그래서 ‘보고 즐겨야 할 것’보다 ‘조심해야 할 것’이 더 많은 나라로 여겨진다. 특히나 거대한 인도 대륙 중에서도 북인도의 ‘골든 트라이앵글(델리·바라나시·아그라)’은 그 자체로 악명이 높다. 다녀온 사람치고 설사병 안 걸린 사람이 없고, 가는 곳마다 돈 달라는 거지 떼가 줄을 서고, 손으로 밥도 먹고 화장실 뒤처리까지 해야 하며, 심지어 숨이 턱턱 막히는 공해 때문에 마스크를 준비해야 하는 나라. 여행자들이 써 놓은 후기도, 여행 책자를 봐도 궁상맞기 짝이 없다.

인도에 다녀온 경험자 입장에서 보면 이 모든 것이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는 멋진 곳이다. 적어도 내 여행의 경험들을 통틀어 가장 매력적인 곳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특히나 일상이 지루해 죽겠고, 뭘 해도 흥이 안 나고, 소심한 인생에 문득문득 짜증 나고, 내 자신이 한심해 열받는, 그래서 ‘왜 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쯤 가 봐야 할 곳임에 틀림없다.

‘범생이 라이프’에서 벗어나 일탈을 즐기다

도착하는 순간 코끝을 때리는 카레 냄새로 악명 높은 델리 공항. 선입견이 과했던 탓일까, 아님 피로로 무뎌진 나의 후각 때문일까. 다행스럽게도 인도의 첫인상은 평균 이상이었다. 그러나 배낭여행자들이 모인다는 ‘파하르간지’가 위치한 델리역 앞에 도착한 순간 말로만 듣던 소문은 현실로 나타났다.

유독 올드 델리가 그런데, 텁텁한 매연과 향료 냄새로 자욱한 새벽 공기를 뚫고 수많은 사이클릭샤(인력거)와 오토릭샤(삼륜차)들이 차선 없이 뒤엉켜 다니는가 하면, 그 사이사이를 가로지르는 사람들과 떠돌이 소들이 연출하는 실로 ‘어이없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러고 보니 사람이 다니는 인도도 없고 차선은 물론 횡단보도와 정류장은 더더욱 없었다.

심지어 사방에서 0.5초마다 울려대는 경적들은 혼을 쏙 빼놓을 지경이요, 티코의 동생쯤 되는 오토릭샤가 뿜어 대는 시커먼 매연은 단번에 여행자들의 기를 죽이고도 남았다. 그 와중에 새벽이슬을 맞고 잠에서 겨우 깬 퀭한 눈빛의 노숙자들까지…. 거리에는 떠돌이 소와 개들이 활보했고, 좁디 좁은 골목은 염소와 소가 버티고 있는(바라나시도 마찬가지다) 당황스러움과 맞닥뜨리게 되는 상황. 하지만 이보다 더 자연스러운 사파리가 또 있을까.

처음에 느꼈던 올드 델리에서의 이 황당무계함은 놀랍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해방감’으로 바뀌어 갔다. 그랬다. 그곳에서는 도둑질 빼고는 못할 것이 없어 보였다. 아무데서나 휴지 버리기, 되는 대로 무단횡단하기, 노상에서 취식하기…. 한국에서는 ‘몹쓸’ 짓들이지만 인도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문화라고 누군가 귀띔해 주었다.

떨어진 종이는 떠돌이 염소가 주워 먹고 버린 과일 껍질 역시 길거리 소의 간식이 된다니, 휴지 버리는 게 나쁠 리 없다고. 게다가 신호등도 없고 횡단보도도 없으니 아무데서나 길을 건넌들 누가 뭐라 할 것이며, 그 한가운데 철퍼덕 주저앉은들 나를 이상하게 볼 사람도 없으니 만사 고민될 게 없다. ‘하면 안 되는 것투성이’인 곳에서 평생을 소심한 범생이로 살았던 나는 델리에서의 ‘일탈(!)’이라는 새로운 경험이 반가웠다.

적은 돈으로도 지갑이 두툼해지는 호사

인도는 배고픈 나라지만, 많은 여행자는 이곳에서 의외의 ‘포만감’을 느끼고 돌아온다. 그 이유는 서울에서 늘 허기져 있던 지갑이 인도에 오면 신기하게도 빵빵해지기 때문이다. 이유는 너무나도 ‘착한’ 물가 덕분이다. 환전하는 순간 ‘이게 웬 횡재인가’ 싶고, 음식 가격을 보면서 눈을 의심하게 된다. 우리나라 돈으로 500원 정도면 한 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고, 250원만 내면 인도의 인기 음료인 라씨(요구르트)로 갈증을 달랠 수 있다.

오토릭샤를 타고 30분을 내리달아도 흥정만 잘하면 750원이 고작이다. 한 달 동안 30만원으로 자고 먹고 교통비를 충당하고도 몇 만원 남겨 왔다는 배낭객이 있을 만큼 인도의 물가는 착하다(500루피-우리 돈으로 7700원을 내면 주인은 충분한 잔돈이 없어 허둥지둥댈 정도다). 그러니 지갑을 열 때마다 소심해지고, ‘원 없이 질러 봤으면’ 하는 마음으로 돈벼락을 꿈꾸며 하루하루를 ‘쪼잔하게’ 살고 있는 당신이라면 인도만큼 반가운 나라도 없을 것이다. 당신의 얄팍한 주머니를 부풀려 주는, 그래서 잠시나마 당신을 통 큰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기특한 나라니까.

잡념이 상념이 되고, 상념은 철학이 되다

 
 2 여행자들로 하여금 ‘사색’과 ‘철학’의 의미에 잠기게 하는 갠지스강 풍경 3 오렌지색 터번을 두른 인도 남자의 오묘한 디테일의 수염과 편안한 미소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4, 5 처음에는 혼잡스럽게만 느껴지는 인도의 거리 풍경은 점차 여행자를 거대한 컬러의 향연 속으로 이끈다. 
 
바라나시를 빼놓고 인도를 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종교인에게는 더없이 성스러운 성지요, 일반인에게는 삶과 죽음의 터전이요, 여행객에게는 가장 ‘인도스러운’ 정취를 선사하는 갠지스강이 반겨 주기 때문이다.

내가 본 갠지스강은 하루 24시간, 어느 것 하나 같은 느낌이 없었다. 동 트기 전부터 어둠이 내릴 때까지 무수히 다른 색깔을 발산했고, 그 색깔들을 곱씹는 일은 조금도 싫증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실제로 바라나시에서는 이곳에 반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머물렀다 떠나는 여행자를 만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새벽녘 동이 틀 때쯤 갠지스강은 경건한 붉은 빛깔로 물든다. 동이 터 오는 하늘과 그 하늘을 한껏 머금은 강물, 그리고 힌두교 아낙들의 붉은색 빈디(이마에 찍는 장식)가 모든 빛깔을 잠재운다. 이 시간 인도인은 날씨와 상관없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강물에 기꺼이 몸을 담근다. 이때 그들의 표정은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보인다. 물론 TV에서 수도 없이 보아 온 장면이건만(심지어 CF에서도), 신기함을 넘어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현실과는 동떨어져 보이던 강가는 정오 무렵부터 또 다른 여러 가지 빛깔을 띤다. 관광객을 상대로 250원짜리 차이(인도의 밀크 티)를 파는 어린아이들, 구걸하는 노인들, 강가에서 빨래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 경건했던 강은 어느새 치열한 삶의 터전이 되어 있었다.

비슷한 시각, 이삼백m 떨어진 인근 가트가 내뿜는 빛깔은 검고 어둡다. 천에 둘러싸인 시신들이 하나 둘 도착하면 화장터는 조금씩 활기를 띤다. 몇 시간 만에 곱게 단장한 시신들이 장작과 함께 검붉은 연기가 되고 한 줌 재로 변해 사라져 가는 과정을 눈앞에서 목격하게 된다. 바라나시에서 삶과 죽음은 이렇게 일상적이다. 36년 넘게 한 번도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못했던 ‘죽음’을 난생 처음 진지하게 바라봤던 순간이고,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내 눈에 비친 죽음은 그렇게 평온했고, 삶은 그렇게 허무했다.

무념(無念)으로 떠난 갠지스강. 그러나 어느새 생긴 잡념이 상념이 되고, 상념이 비로소 철학이 되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바라나시를 떠나게 될 때쯤엔 내 인생의 작은 ‘철학’을 갖게 된다. 이것이 내가 바라나시에서 느낀 또 다른 행복이었다.

상점 주인 물건 팔며 “Are you happy?”

인도 사람이 가장 즐겨 쓰는 유행어 중 하나는 “Are you happy?”인 것 같다. 물건을 파는 가게에서도 식당에서도 그렇게 물어 오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바라나시 상점에 갔을 때의 일이다. 흥정한 끝에 파시미나를 내가 원하는 가격에 살 수 있었다. 그때 주인이 웃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Are you happy?” 아마도 자신이 가격을 깎아 줘서 행복하냐는 뜻일 게다. 뜬금없는 질문에 살짝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다시 한번 미소를 띠며 “You are happy? I’m happy!”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인도인에게 행복이란 이런 거였다. 결코 거창하지 않은, 일상생활에서 수시로 만나게 되는 작고 사소한 기쁨들.

가벼운 주머니로도 행복할 수 있는 곳, ‘느림’의 미덕이 여전히 살아 있는 곳, 상대방의 기쁨이 나의 행복이 되는 곳. 부디 나의 행복도 이런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오래지 않아 또 다른 인도를 만나러 갈 꿈에 부풀어 있다. 아이 러브 인디아(I Love India)!



인도 여행 정보



▶ 여행 가이드북에 따르면 설사나 복통을 조심하라는 경고가 많다. 게스트하우스 내에 있는 식당에서 약을 탄 음식을 줘 몇 날 며칠을 고생했다는 후기도 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예전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 열흘 정도 머무르면서 배탈 났다는 사람은 거의 못 봤다. 단, 가능하면 생수를 먹고, 입맛에 맞지 않는 것은 피하도록 한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 설사약과 소화제는 준비해 가도록 한다.

▶ 인도 사람을 모두 경계할 필요는 없다. 사실 소매치기나 도둑은 어디에나 다 있고, 오히려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같은 유럽 지역에 더 많다. 선입견을 버리고 그들 문화에 섞이는 것만이 여행을 즐기는 비결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혼자보다 둘이 나을 듯.

▶ 숙소의 청결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기 때문에 침낭을 갖고 가는 것이 좋다. 그리고 씻을 곳이 마땅치 않을 수 있으니 휴대용 물 티슈를 준비하고, 기관지가 약한 사람인 경우에는 (특히 델리에서) 마스크도 챙길 것.

▶ 잔돈은 필수다. 좋은 호텔을 제외하고는 신용카드가 안 되는 곳이 대부분이며, 500루피(약 7700원)를 내면 잔돈이 없다면서 물건을 못 팔겠다고 하는 곳도 있다. 그러니 늘 잔돈을 충분하게 만들어 다니는 것이 안전하다.

▶ 인도 여행의 경우 패키지보다는 배낭여행을 추천한다. 특히 직장인들을 위한 배낭여행의 경우 패키지가 지닌 안전성(편리성)과 배낭여행의 낭만을 모두 갖고 있어 추천할 만하다. 특히 골든 트라이앵글 코스(델리-바라나시-아그라)의 경우 9일 코스로 짜여 있어 직장인에게 안성맞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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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영혼 '갠지스 강'

인도의 영혼 '갠지스 강'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14 13:02

인도의 영혼 '갠지스 강' 
영혼이 숨쉬고 있는강힌두교 숭배대상… 하늘과 가까운 명상ㆍ해탈의 성지  


 
 


바라나시의 호텔에서 사이클 릭샤를 타고 20분 정도 간 곳에서 인도 사람들의 영혼을 깨끗하게 한다는 갠지스 강을 만난다. 강의 입구로 들어서는 길가에 어젯밤을 이곳에서 보낸 검은 피부의 인도인들이 회색으로 휘감은 천 속에서 반짝이는 하얀 눈동자를 들어내며 손을 내민다. 아직 넝마 속에서 잠을 자고 있는 이들도 있다.

어둠을 뚫고 아침 햇살이 갠지스 강을 깨운다. 인도의 여명이 아름답고 성스러운 빛으로 사람들의 가슴속으로 스며든다. 성스러운 이 강을 찾아 순례하는 사람들의 수가 연간 100만이 넘는다고 한다. 새벽하늘의 아름다운 태양 빛을 받으며 목욕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힌두교 인들은 갠지스강에서 몸과 마음을 씻는다. 그들은 갠지스강이 모든 죄를 사하여주고 그들의 영혼을 맑게 해준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힌두교 인들의 평생소원이 이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에서 목욕을 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인도인들의 목욕문화는 성스러운 종교 의식과도 같다 그것은 몸을 씻는 것이 아니고 영혼을 맑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목욕 시에는 항상 머리를 해가 떠오르는 동쪽을 향하고, 입으로는 석가의 깨달음이나 서원(誓願)을 나타내는 ‘만트라’를 외운다. 그래야 성스러운 물로 마음이 씻어진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죽은 뒤에도 이곳에서 뼛가루를 강에 흘려보내면 극락으로 간다고 믿고 있다.

강 어구에서 소년 두 명이 노를 젓는 나룻배를 빌려 타고, 갠지스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크고 작은 나룻배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엉키듯 미끄러지듯 갠지스 강을 저어간다. 강가에는 ‘가트’들이 많이 있다. 강가와 육지가 맞닿아 있는 곳에 계단을 만든 것을 ‘가트’라고 부르는데 이곳에는 약 100여개의 ‘가트’가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빤치강가 가트’ 위에 웅장한 이슬람 사원인 ‘알람기르 모스크’가 보인다. 16세기경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모두 인정했던 성자이며 종교 개혁자였던 ‘까비르’가 머물던 곳이다. ‘이슬람 모스크’를 안내하는 가이드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된 어조로 바뀐다. 아마 이는 힌두교인 인가보다. 가이드의 목소리가 바라나시의 종교 갈등을 말해주는 함성처럼 들린다. 빨래터로 유명한 ‘도비가트’도 보이고, 계단대신 맨땅과 연결된 ‘아시가트’도 있다. 저 멀리 화장터로 유명하다는 ‘마니까르니까 가트’가 있다. 화장터 가트에 몰려있는 사람들이 많다. 인도 사람들은 갠지스 강에서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한다. 그래서 부자들은 이 갠지스 강에서 죽을 수가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도 못한다. 마지막 육신의 재가 갠지스 강에 뿌려지고, 영혼의 강을 만드는 일도 돈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운구의 행렬이 줄지어 있고 끊이지 않는 화장의 의식이 여기저기서 거행된다. 화장장에 도착한 시신들이 마지막으로 갠지스강물에 적셔져 깨끗한 육신으로 바뀌고 상주는 시신을 위로하며 시신의 주위를 뱅뱅 돈다. 3단의 장작더미 위에 시신이 노여지고 그 위에 한단의 장작더미가 더 쌓여진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장작더미 위에서 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육신이 재가 되어 하늘로 나라간다. 타다 남은 잿 가루는 갠지스 강으로 밀어 넣어지고, 사라져간 연기는 맑은 영혼으로 변하여 갠지스 강을 맴돌며 안식을 얻는다. 삶이란 무엇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곳이다.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은 철학자들이 모여 철학을 논하는 곳이 아니고, 모인 사람들이 생각과 명상으로 철학자가 되어가는 곳이다. 무소유에서 해탈의 경지에 이르려는 이들의 노력을 조금은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화장터를 구경하는 것은 자유이나 사진을 찍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마스크에 안경을 쓰고 있는 아내가 멀리 갠지스 강을 나르는 갈매기를 향하여 시선을 고정 시킨 채 화장터를 등지고 서있다. 차마 볼 수 없는 안타까움이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나보다. 아내의 어깨에 손을 얹어 마음을 달래본다. 부유물과 지저분한 갠지스 강의 물을 마시며 목욕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더럽다 지저분하다 말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이곳에는 신앙이 있고, 우리가 모르는 득도의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피부는 검지만 마음이 새하얀 이들의 마음 색깔을 드려다 보고 있는 듯하다.

나룻배를 젖는 소년들 사이로 자주 가트가 나타나고, 소떼들이 여유롭게 노닌다. 어떤 이들은 양치질을 하고, 어떤 이들은 빨래를 한다. 여유롭고 아름다운 강인데도 즐거움 보다는 슬픔이 있는 강이다.

본래 섬이었다는 인도가 대륙과 충돌을 일으키면서 돌출된 히말라야를 만들고 그곳으로부터 흐르기 시작한 강줄기는 이곳 인도까지 이르는 갠지스 강을 만든다.

갠지스 강을 힌두어로 ‘강가’라고 하며, 강의 길이는 2,460km 이고, 유역의 면적은 약 173만㎢에 달한다. 이 강을 힌두교 인들은 ‘성스러운 강’이라 부르며 이 강은 히말라야에서 남쪽으로 흘러 델리 북쪽을 경유 힌두스탄 평야로 흘러 들어가 인도 북부의 곡창지대를 이루면서 힌두문화의 중심지를 만들었다.

갠지스 강의 본류는 남동으로 흘러 바라나시를 통과하면서 야무나 강 등과 합류하여 벵골만으로 흘러들어간다.

갠지스 강은 연중 수량이 풍부하고, 상부갠지스와 하부갠지스가 용수로로 유역의 중요한 관개수로를 이루어 높은 생산력을 유지하게 한다. 또한 갠지스 강은 중류부터 경사가 완만하여 바라나시에서 캘커타까지는 1km 당 6-7cm 정도의 경사를 보여 바라나시에서 보는 갠지스 강은 마치 호수와도 같다.

‘성스러운 강’ 갠지스를 떠나면서 명상으로 득도의 경지에 이르고, 무소유로 해탈의 경지에 이르려는 인도인들의 노력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철학자들과 같은 이들의 삶이 가난하든 풍부하든 그것이 행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맑은 정신으로 아름다운 갠지스 강에서 기도하고 있는 인도인들의 아름다운 모습 그 자체를 그들은 행복이라 말한다. 그들을 뒤로 한 채 이제 인도를 떠나야 하는 아쉬움이 가득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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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여행] 바라나시 ‘불교의 성지 사르나트’

[인도 여행] 바라나시 ‘불교의 성지 사르나트’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14 13:00

[인도 여행] 바라나시 ‘불교의 성지 사르나트’ 
‘전설의 도시’ 1300년전 종교사원 고스란히 남아 
 
 



 
바라나시로 가기 위해서 ‘사트나’라고 하는 도시로 이동을 한다. 카주라호를 출발한 버스가 오랜만에 고산을 끼고 산악으로 들어선다. 인도의 대지에 익숙해져버린 감각이 새로운 인도의 모습에 신선함을 느낀다. 제법 험악한 산악을 오르는 버스가 굽이굽이 산길을 돌면서 힘겨워한다. 아름다운 산에 우뚝우뚝 서있는 나무들 사이로 멀리 내려다보이는 시골 풍경이 여유롭다.

인도 여행에서 예정된 시간을 지킨다는 것은 어려운 것 같다. 우선 큰 땅덩어리 때문에 거리가 멀고, 도로사정이 좋지 않은데도 이유가 있지만, 여러 가지 정보가 정확하지 않고, 특히 버스나 기차를 운행하는 운전자들이 시간을 정확히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부족한 것 같다.

사트나 역에 도착하니 저녁때가 되었다. 저녁식사는 도시락으로 준비 되어 있다. 육식을 즐기지 않는 채식주의자들이 많은 이곳에서는 밥과 카레가 발달했다. 밥이 우리 것과는 너무 달라 밥 속의 쌀들이 바람에 나라갈 것만 같다. 그래서 인도인들이 쌀밥을 카레에 조물조물 손으로 뭉쳐 식사하는 식사법이 발달 한 것 같다.

사트나에서 바라나시 까지는 약 열 시간 정도의 기차여행을 해야 한다. 침대차에서 20시간을 견디며 뭄바이에서 델리까지 이동해본 나에게 10시간 정도는 별로 문제 될 것이 없다. 물론 침대차에서의 열 시간은 지루하다. 인내력이 요구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시간 계획을 잘 세운다면 효율적인 기차 여행을 즐길 수가 있다. 지나간 인도여행의 메모들을 정리하고, 스케치북을 마무리 하면서 피곤해진 몸으로 한참을 졸고 나니 시간이 많이 흘렀다.

바라나시에 도착하여 호텔로 향한다. 거리에 북적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복잡한 것을 보며 인도의 인구가 10억이 넘는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군데군데 보이는 사원의 지붕들이 불교 성지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바라나시를 보지 않고는 인도를 보았다고 말하지 마라. 바라나시를 보았다면 인도를 다 보았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말이 생각난다. 역사의 기록보다도 오래전에 만들어진 도시, 전통의 문화가 형성되기 이전에 전설의 이야기 속에서 만들어진 도시, 바로 바라나시에 내가 서있다. 1300년 전 고승 혜초가 서있던 모습으로 그 곳에 서서 꿈틀대는 인도인들의 삶을 바라본다.

호텔의 주차장에는 사이클 릭샤꾼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릭샤를 타고 바라나시의 시가지로 들어선다. 차선도 없고 질서도 없는 거리에서 차와 릭샤와 오토바이들이 교행과 회전을 마음대로 한다. 모든 것이 뒤엉켜 마음대로 돌아가는 순간순간들이 그저 아찔아찔하고 불안하기만 하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신기하게도 길들여진 곡예사들처럼 질서를 만들어가고 있다. 검은 피부들 속에 섞여있는 우리 부부는 외국인의 모습으로, 외화의 한 주인공이 된 기분으로, 바람을 가르며 릭샤 위에서 새로운 추억을 만든다.

바라나시의 시장골목은 활기에 넘친다. 어느 곳은 남대문 시장을 생각하게 하고 어느 곳은 반짝 시장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면서도 상상할 수 없는 시장풍경이 전개된다. 소들도, 개들도 인간들과 함께 거닐고 쓰레기통을 뒤지며 함께 살아간다. 많은 외래문화가 이곳 인도에 상륙하여 많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난으로 힘들어하는 도시임에 틀림이 없는 바라나시지만 종교와 철학으로 다듬어진 깊이 있는 도시임에 틀림이 없다.

바라나시는 B.C 600년경 바라문교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신흥사상가들이 이곳에 몰려들어 지식과 사상을 나누면서 만들어진 도시다. 오늘날에도 인도 제일의 교육도시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곳이며, 철학이나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기 위해 인도의 젊은이들은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다. 바라나시의 영원한 과제는 종교적 갈등을 어떻게 해소하느냐 하는 것이다. 극심한 종교적 갈등 문제로 인하여 바라나시는 항상 종교폭동의 위험을 간직하고 있는 도시다.

바라나시에서 12km 떨어진 곳에 붓다가 처음으로 깨달음을 설파한 ‘사르나트’가 있다. 불교의 4대성지로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은 뒤 처음으로 설법을 편 곳이다.

‘사르나트’의 유적 군으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거대한 탑, ‘다멕스투파’다. 사르나트의 상징이며 최초의 설법을 행한 기념으로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이탑은 ‘다르마 차크라 스투파’ 라고도 불리며, 지름이 28.5m이고, 높이가 33.5m로 거대한 원형 탑이다. 단조롭고 둔탁하면서도 무게감을 느끼게 하는 모양이 독특하다. 큰 돌과 벽돌로 만든 이탑의 하단은 ‘마우리아’ 양식으로 꾸며져 있고, 상단은 ‘굽타’양식으로 만들어졌다. 이 유적 군에는 ‘다멕 스투파’이외에도 ‘아쇼카 석주’ 등도 있다.

붓다의 최초 설법지 흔적들을 돌아보며 유적 군을 나와 고고학 박물관으로 들어선다. 출입과 촬영이 엄격히 통제된 가운데 가이드들이 열심히 설명을 해준다. ‘사르나트 사자상’ 을 비롯하여 다양한 불교 미술품과 불상들이 눈길을 끈다.

고고학 박물관 곁에는 ‘물라간다 꾸띠 비하르’라는 사원이 있다. 사르나트에서 가장 큰 사원으로 유명한 이 사원의 벽면에는 붓다의 생애를 현대적인 회화 기법으로 그린 우수한 벽화 작품이 있다. 일본인 화가 ‘고우세츠노시’의 작품이다. 사원의 정원에 있는 보리수가 시선을 끈다. B.C 6세기경 석가모니가 득도한 곳으로 비하르(Bihar)주 가야(Gaya)시의 남쪽에 위치한 곳 ‘보드가야’의 ‘마하보디 사원’에서 가져왔다는 보리수다.

사원을 돌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소망은 무엇일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항상 감사하고, 소망을 기원하며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는 문화가 바로 세계가 하나가 되는 삶의 공통분모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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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카주라호의 사원

인도 카주라호의 사원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14 12:58

인도 카주라호의 사원 
벽면ㆍ천장 온통 에로틱 조각상… 노골적인 性이야기  
 




 
숨겨진 도시 오르차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카주라호로 향한다. 도로사정이 좋지 않고 중간 중간 소떼들과 차량이 얽혀 시간이 많이 지체 되었다. 초라한 휴게소에 들려 화장실도 이용하고 뜨거운 물도 얻어 컵라면을 먹는다. 찬기를 느꼈던 몸이 뜨거운 국물로 풀린다. 인도의 한 모퉁이에서 컵라면을 즐기는 일이 한국인이 갖는 향수 인 듯싶다.

5시간 정도 걸려 어둠이 스며드는 카주라호에 도착한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이곳에서 민속 공연을 볼 수 있다는 말에 아내와 함께 공연장을 찾는다. 비교적 깨끗하게 만들어진 소공연장의 분위기가 한국의 소극장을 연상하게 한다. 무대 위에서 열정적으로 노래하고 춤을 추는 무희들의 아름다운 몸짓에 갈채를 보낸다. 나름대로 상상했던 정적이고 은근한 인도 여인의 곡선은 없지만 다이내믹한 춤 속에서 인도 여인의 강열하고 뜨거운 열정을 발견한다.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상쾌한 아침햇살을 받으며 카주라호의 서부 사원으로 들어선다. 카주라호의 사원은 서부, 동부, 남부에 걸쳐 산재해 있다. 에로틱 조각들로 불리워지는 ‘미투나(Mithuna)’들은 거의 서군의 흰두교 사원에 밀집되어 있다. 정문으로 들어서자 독특한 건축양식의 사원들이 녹색의 초원위에 아름답게 여기저기 서있다. 이 사원들은 천년 전 ‘찬델라’왕조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전성기에는 이곳에 85개의 사원이 있었는데 이슬람 세력에 의하여 많이 파괴되고, 지금은 22개의 사원이 남아 있다. 사원이 남을 수 있었던 요인은 종교적인 문제를 떠나 노골적으로 성 이야기를 표현한 ‘미투나’ 조각 작품들의 매력과 우수성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녹색 정원 따라 왼쪽 길로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바라하 사원’의 계단을 오른다. 중앙에 거대하게 만들어진 철조 멧돼지 상이 있다. 돼지띠인 우리 부부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는 이 상은 서기 900년경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그 앞에 ‘락쉬마나 사원’ 이 있다. 신을 벗고 맨발로 계단을 올라가 사원 안으로 들어간다. 사원 안은 좁은 통로로 사각 공간을 돌아 볼 수 가 있다. 벽면과 천정이 온통 조각 작품들로 빈틈이 없다. 수준 높은 조각 작품들이 사원의 내부와 외부 벽면까지 온통 일색이다. 춤추는 요정 ‘압사라’의 조각과 군악대와 말과 코끼리를 묘사한 조각상들도 있다. 상상하기도 어렵고 설명하기도 난처한 엽기적인 조각 작품들이 수줍음도 없이 태양 빛을 받으며 세상을 향해 손짓을 하고 있다.

작품들은 모두가 석조로 보존상태가 좋고, 정확한 형태의 표현이 부조와 환조의 기법을 사용하여 조화를 이루고 있다. 아름다운 조각품들이 너무 많고 예술성도 우수하여 감탄사만을 연발하게 한다.

카주라호를 인도에서 가장 에로틱한 유적지라 말한다. 그러나 마하트마 간디가 ‘모든 카주라호 사원을 부셔버리고 싶다’고 말을 했을 정도로 이곳의 작품들은 노골적인 성행위를 묘사하고 있다.

‘미투나’ 상들이 밀집되어 새겨진 사원은 ‘칸다리야 마하데브 사원’이다. 서부 사원을 대표하는 이 사원은 높이가 31m이며, 건립 시기는 1025년경 으로 내부에는 226개의 조각상이 있고, 외부에는 646개의 조각상이 있다. 카주라호의 대표적인 에로틱 사원답게 에로틱 조각 작품들이 벽면마다 가득하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유혹을 하고, 키스로 몸과 마음과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어 성행위로 쾌락을 즐기는 성교육의 자료가 단계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인간과 동물들이 엉켜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사원의 조각 작품들이 단순히 성적인 묘사만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종교적 바탕위에서 신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가고 있다. 왕조들이 믿고 살았던 신의 세계가 영원하였다면 사원의 몰락은 없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칸자리야 마하데브’ 사원 곁에 있는 ‘마하데바’ 사원 앞에는 이곳에서 최고 조각품이라고 찬사를 듣는 거대한 사자상이 있다. 뛰어난 조각술과 매력적인 예술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아내가 사자상에 올라가 사진을 찍는다. 아직도 소녀 같은 꿈 많은 아내의 모습이 사랑스럽게 보인다.

‘비쉬누’ 신을 모셨던 곳으로 현재는 ‘쉬바’의 부인인 ‘빠르바티’를 모시는 데비자가담바사원, 태양신 ‘수르야’를 모신 칫트라굽타 사원, 카주라호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측되는 죽음의 신 ‘깔리’를 모시고 있는 ‘차우사트 요기니’ 사원 등 그 아름다움과 섬세한 조각상들을 자랑하는 사원들이 즐비하다. 푸른 녹색의 잔디밭에 앉아 카주라호의 아름다움을 스케치북에 담는다. 85개의 사원이 동시에 화려했던 ‘찬델라’ 왕조 전성기 시대의 강권정치를 상상하게 한다. 인간이 사는 시대가 아니고 권력이 사는 시대가 아니었을까? 그 권력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사원을 조성하고 아름다운 예술품을 만들어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원을 뒤로하며 카주라호를 떠난다. 가난에 허덕이는 카주라호의 후손들이 달려와 옷소매를 잡는다. 선조가 만들어낸 예술작품을 저급한 상품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불쌍한 카주라호의 후예들이다. 아무쪼록 이렇게 아름다운 동네에 하루빨리 가난이 사라지고 풍요로운 행복이 찾아들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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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여행, 과거ㆍ미래가 공존하는 땅 '오르차'

인도여행, 과거ㆍ미래가 공존하는 땅 '오르차'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14 12:57

인도여행,  과거ㆍ미래가 공존하는 땅 '오르차'
고대제국 소리없는 아우성  
 
 

 
아그라에서 특급열차를 탔다. 차창을 스쳐가는 인도의 풍경이 이국에서의 낭만을 더한다. 풍요로운 전원 풍경이 계속되고 멀리 농촌의 여유가 평화스럽게 보인다. 녹색의 숲 속으로 간간이 보이는 소와 농부들이 한가롭기도 하다. 무엇을 하고 먹고 사는지 인도의 풍경 속에 나타나는 사람들은 항상 이야기 속에 한가롭기만 하다.

특급열차라 그런지 열차 안에서의 서비스도 다양하다. 우리나라의 무궁화호 정도지만 이곳에서는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열차다. 승무원이 생수병도 주고, 캔디, 과자와 함께 차도 제공한다. 물론 무료로 제공되지만 제공하는 승무원의 외모가 너무 한국의 문화와는 차이가 있다. 승무원이라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놀라운 젊은 청년의 모습이다. 비스듬이 모자를 쓴 승무원의 복장이 막 운동장에서 공놀이를 하다가 달려온 사람 같다. 남루한 차림이 청결하지 못한 느낌을 준다. 그의 옷차림과 손을 바라보면서 차를 마실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러나 열심히 근무하면서 성실하게 일하는 그의 모습에서 인도인의 고운 심성을 느낀다. 두 시간 반 동안 인도의 시골 풍경을 바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기차 여행이었다.

‘잔시’라는 시골 역에서 내려 오르차로 가기위해 버스로 이동을 한다. 역 주변이 어수선하고 혼란스럽다. 역겨운 냄새가 코를 진동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여기 저기 궁색한 모습으로 웅크리고 있다. 아이들은 관광객을 보자 달려들듯 손을 벌리며 따라 붙는다. 그러나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많다. 역 주변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강한 삶의 활력과 의지를 느낀다. 서둘러 버스에 오른다. 버스 역시 낡고 허술하여 친근감이 들지를 않는다. 잔시를 출발한 버스의 차창에도 한가로운 인도의 시골 풍경이 전개된다. 낮은 산과 마을을 둘러싼 나무들의 색채가 피곤해 보인다. 녹색도 아니고 단풍도 아닌 매력 없는 색채가 메말라 가는 대지 위에서 물을 기다리고 있다.

좁은 길을 달리는 버스가 덜컹거린다. 뒤뚱 거리는 버스 앞으로 마을 골목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버스가 멈춘다. 무엇인가 장대를 메고 달리는 사람들의 뒤를 따라가는 많은 사람들이 꽃가루 같은 것을 뿌린다. 장례행사다. 긴 막대기 두 개에 시신을 넓은 보로 둘둘 말아 어깨에 메고 달린다. 이 세상을 떠나는 인도 사람의 마지막 가는 모습이다. 이 세상을 열심히 살다가 마지막 떠나는 초라한 모습을 바라보며 삶과 죽음의 차이가 무엇인지 씁쓸해지는 마음을 다독이는 동안 어느새 덜컹거리던 버스가 오르차로 들어선다. 상가와 식당들이 줄지어 있다. 줄지어 있는 가게들 중간에 ‘맛있는 식당’이라는 한글 간판이 보인다. 세계 어느 곳을 가든지 한국어 간판이 있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렇게 깊은 인도의 산속에 숨겨진 마을에서 한국인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세계를 향한 한국인의 열정을 보는 것 같아 긍지심이 느껴진다. 콘크리트 벽면 위에 쓰여진 ‘라면’, ‘수제비’라는 글씨가 더욱 정겹기만 하다.

이곳은 한때 무굴제국의 제후국으로서 명성을 날리던 곳인데 지금은 조그마한 마을로 전락하였다. 오르차는 무굴제국 시대부터 형제간이나 부자간에 왕위를 놓고 쟁탈전을 벌이던 왕위계승 문제로 전쟁이 있을 때마다 그 전쟁터가 되곤 하였다.

아버지를 제거하면서 왕위를 탐했던 ‘살림’이라는 왕자가 있었다. 반란에 실패한 ‘살림’이 오르차로 도망을 해오자 이곳의 왕이었던 ‘비르싱데오’가 그를 맞아들여 궁전을 짓고 그가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대접을 하였다. 그 성이 바로 오르차의 유적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제항기르 마할’이다. 사각의 궁전 가운데에는 노천목욕탕이 있고 목욕탕을 내려다보며 즐겼던 난간관망대도 있다. 비밀방과 비밀 통로들이 많아 은밀한 옛 왕궁의 비밀을 찾아 미로를 헤맨다. 궁전의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오르차의 마을이 온통 유적군으로 옛 명성이 대단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옥탑에는 원숭이 떼들이 노닐고 있다. 살림왕자가 피신한지 3년이 무굴제국의 황제가 죽음으로써 살림왕자가 무굴제국의 황제로 등극하였다. 따라서 오르차는 살림왕자의 비호아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제항기르마할’의 곁에는 ‘쉬시마할’이 있다 지금은 숙소와 식당으로 개조되어 호텔로 사용하고 있으며, 인도에서 가장 저렴한 궁전 숙소로 인기가 있다고 한다. 오르차에 왕이 기거하던 궁전은 ‘라즈마할’이며, 그 곁에는 왕의 후처가 기거했던 ‘프라빈 마할’이 있다. 그 곳은 지하에 배수관을 설치하여 땅 밑으로 계속 물이 흐르게 하여 항상 푸른 정원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바르싱데오의 둘째아들이 형수에게 연정을 품었다는 누명을 쓰고 그 결백을 증명하기 위하여 투신자살을 하였던 ‘팔키마할’도 있고, 유럽의 고딕양식을 본뜬 것과 같은 ‘차투르부즈만디르’ 사원도 있다. ‘차투르부즈만디르’는 높은 지대에 위치한 거대한 사원이어서 이곳에서 오르차의 전망을 즐기는 데는 가장 좋은 곳이다. 오르차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찾은 ‘락쉬미 나라얀 만디르’에서는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 그려진 벽화를 감상 할 수가 있다. 잔시의 여왕이었던 ‘라니락쉬미바이’와 영국군의 접전 모습, 세포이항쟁 당시의 여왕의 모습,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스트로 된 대서사시 ‘라마야나’를 소재로 한 작품 등을 감상한다. 전성기를 누리던 오르차가 이제 인도에서 숨어있는 유적군으로 전락했다. 이곳에는 왕도 없고 권세도 없어진지 오래다. 그저 과거를 보며 화려했던 그들의 생활을 역사의 흔적으로 여기며 관광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가장 행복한 삶이란 무엇일까? 권세를 갖는 것일까? 부를 축적하는 것일까? 가장 행복한 삶이란 인생을 살면서 보람을 느끼고 열심히 살았다고 자기 자신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삶이 바로 가장 행복한 삶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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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 사랑의 타지마할

인도 - 사랑의 타지마할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14 12:56

인도 - 사랑의 타지마할
우윳빛 대리석ㆍ보석과 돌의 만남… ‘예술의 극치’ 
 
 



 
세계 불가사의라는 인도의 하얀 기적 ‘타지마할’을 보기 위하여 자이뿌르에서 아그라로 향한다. 달리는 길 양쪽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유채꽃 들판이 넓기도 하다. 대지의 중간 중간에 마을을 이루고, 그곳에서 정겨운 사람들의 진솔한 삶의 풍경을 만난다. 낡은 판자 집 비좁은 네모 상자 안에서 머리를 깎고 있는 이발사의 모습이 보이고, 과일을 파는 거리의 아낙도 있다. 손을 흔드는 어린이들도 있고, 차창을 두드리며 ‘볼펜’, ‘캔디’를 외치는 검은 소년들의 간절함도 있다. 자이뿌르에서 약 200km를 달려 아그라까지는 30km 쯤 남은 곳에서 무굴제국의 악바르 황제가 1571년에 건설하여 14년간 수도로 사용하였다는 ‘파테프르시크리’성을 만난다. 붉은 천연석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성이다. 황제는 물이 부족하여 ‘파테프르시크리’를 버리고 결국은 수도를 아그라로 옮겼다. 거대하게 만들어진 성과 도시는 버려져 숲속의 전설이 되었다. 석공들이 황토 빛 천연 붉은 자연석을 여기저기에서 다듬고 있다. 성을 보존하고 유지하려고 보수작업을 하고 있는 듯하다.

높이 54m의 이슬람 사원을 비롯하여 옛 시가지였던 올드시티, 무굴문화의 꽃이라 부르는 왕궁, 황제를 모셨던 100명의 시녀들이 머물렀던 판츠마할, 모든 문화와 종교를 포용했던 악바르 황제가 종교지도자들과 만났던 면담소 등 투박하고 아름다운 건물들이 비교적 상태가 양호하게 보존되어있다. 모두가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등록된 아름다운 유적들이다.

악바르 황제의 천도길 따라 ‘파테프르시크리’에서 아그라로 들어선다. 곧바로 타지마할로 향한다. 인도에서 가장 엄격한 검색대를 통과 하여 타지마할로 들어선다. 양 옆으로 가지런히 서있는 무굴정원의 상록수 뒤편으로 멀리 하얀 우유빛 대리석의 타지마할이 아름다운 곡선을 자랑하며 신비스러운 모습을 드러낸다. 타지마할의 양쪽에는 회교사원들이 붉은 돌로 지어져 있어 더욱 타지마할을 신비스럽게 만든다.

타지마할은 인도의 충격이며, 인도의 아름다움이다. 감히 타지마할로 다가서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서서 바라볼 뿐, ‘예술의 극치’란 언어를 이런 경우에 사용하는 것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건물’, ‘알라신의 왕좌’, ‘인도의 보석’등 다양한 표현을 했지만 예술의 극치앞에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타지마할로 접근을 한다. 넓은 공간 신비스러운 대리석의 우윳빛, 보석과 돌의 만남, 보석위에 부딪치는 태양 광선의 요술, 강가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 등이 조화를 이루며 최고의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타지마할은 인도의 대표적 이슬람 건축으로 1632년부터 22년간에 걸쳐 무굴황제 샤자한(Shah Janhan)이 건축한 건물이다. 17년간의 결혼생활 동안 14명의 아이를 낳았던 그의 사랑하는 아내 뭄타즈 마할(Mumtax Mahal)이 15번째의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다. 샤자한은 그의 부인 뭄타즈마할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를 위해 아름다운 묘를 만들었다. 타지마할은 아그라성에서 동쪽으로 2km 떨어져 야무나(Yamuna)강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세워진 궁전형식의 묘묘(墓廟)로 건축에 동원된 인부가 2만 명이고, 코끼리가 1000마리다. 이란 출신 우스타드이샤(Ustad Isa)가 설계를 하였으며, 프랑스, 터키, 이탈리아 중국 등에서 우수한 기술자들이 동원되었다. 건축방법은 하얀 대리석 위에 꽃문양을 그리고 그 문양을 파낸 다음 그 홈에 아름다운 색채의 돌이나 보석을 박아 넣는 일종의 모자이크 방법인 ‘피에트라두라 (Pietra Dura)’ 기법을 사용하였다.

중앙에는 황제부처의 묘관이 가묘로 모셔져 있다 아름다운 타지마할을 찾는 참배객들의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세계인을 놀라게 한 세계적인 불가사의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샤자한은 무리한 타지마할 조성과 수도를 옮기는 문제 등으로 국가가 심각한 경제적 위기를 맞게 하였다. 결국 국가는 흔들리고, 막내아들 아우랑제브(Aurangzeb)에 의하여 반란이 일어나고, 반란은 샤자한의 총애를 받던 모든 왕자들을 죽이게 되고, 1658년 샤자한은 왕권이 박탈되어 감금의 상태가 된다.

아름다움 속에 젖어들어 시간가는 줄을 모르고 타지마할의 대리석 바닥에 주저앉아 넋을 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스케치북을 펴고 옮겨 보지만 그 아름다운 곡선과 문양을 어떻게 옮길 수 있겠는가. 과연 ‘예술의 극치’를 만드는 정점은 존재하는 것일까? 떠나기 싫은 타지마할의 모습을 카메라에 아내와 함께 담아본다. 사랑으로 만들어진 타지마할에서 변하지 않는 사랑을 찾아보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든다.

샤자한이 멀리 성에서 이곳 타지마할을 바라보았다는 아그라 성으로 향한다. 아그라성은 1566년 무굴의 제3대 황제였던 악바르가 지은 것으로 높이 20m, 폭 2.5km에 달하는 거대한 성이다.

이곳은 아들 아우랑제브의 학대로 ‘포로의 탑’이라고 불리우는 ‘무삼만버즈(Musamman Burj)’에서 8년 동안의 감금생활을 한 샤자한의 아픔이 있는 곳이다. 무삼만 버즈는 아그라성의 붉은성 가운데에서도 하얀 대리석으로 독특하게 만들어져 있으며, 이곳에서 타지마할의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풍경을 바라다 볼 수가 있다. 샤자한은 무삼만 버즈에서 사랑하는 아내가 누워있는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애절한 사랑을 노래했다. 사랑을 위해 국가를 잊었던 그는 사랑을 멀리서 안타깝게 바라보며 쓸쓸히 생의 말로를 마감했다.

1666년 샤자한이 죽어 타지마할의 아내 곁에 나란히 묻혔다. 야무나강 건너편에 검은 대리석으로 자기의 묘를 타지마할과 똑같이 만들고 타지마할과 다리로 연결하여 영혼의 가교을 만들려고 했던 그의 사랑이야기는 영원한 미완성의 전설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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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핑크시티 ‘자이뿌르’

인도의 핑크시티 ‘자이뿌르’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14 12:54

인도의 핑크시티 ‘자이뿌르’ 
강렬한 원색의 성채 도시…고대왕국 위엄 물씬  
 




 
델리에서 아침 일찍 자이뿌르를 향해 떠났다. 날이 밝은지가 오래 되었는데 아직도 길가에서 누더기를 뒤집어쓰고 잠을 자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일찍 일어난 이는 길가 담장 밑에 불을 피우고 그 위에 깡통을 올려놓고 무엇인가를 끓이고 있다. 자연스럽게 길가에 텐트도 쳐 놓고 일상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한 두 명도 아니고 그런 풍경들이 줄을 지어 계속해서 나타난다. 인도가 경제적으로 성장을 하고 있다고는 하나 이런 빈곤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없는 한 인도 사람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에는 어려울 듯싶다.

자이뿌르는 델리, 아그라와 함께 북인도의 ‘골든트라이앵글’이라 부르는 3대 도시중의 하나다. 델리를 출발한지 여섯 시간 정도 되어 자이뿌르 시내로 들어선다. 자이뿌르는 라자스탄 주에 속하며 이곳은 크고 작은 왕조들이 난립해 있던 지역이다. 이곳의 왕조들은 무굴제국이 등장하면서 저항보다는 공물을 바치는 사대정책을 폄으로써 자신들의 왕조 유지에 최선을 다하였다. 무굴제국이 사라지고 영국의 지배를 받을 때에도 이들은 영국에 충성을 다 하면서 왕조를 유지 해 왔다. 그래서 지금도 왕조가 그 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시가지로 들어오면서 온통 핑크 빛으로 칠해진 벽과 건물들이 특이하게 보인다. 관광객들을 환영이라도 하는 듯 온 시가지가 핑크빛이다. 인도에서 환영의 의미를 표현하는 색채는 빨강이다. 자리뿌르가 온 도시를 핑크 색으로 단장을 한데에는 그 이유가 있다.

옛날 영국의 에드워드 7세가 왕자시절에 자이뿌르를 방문한 일이 있었는데 이곳의 왕은 온 도시를 핑크빛으로 칠하여 영국의 왕세자를 반기도록 하였다. 그래서 이 도시는 ‘핑크시티’라는 애칭을 얻게 되었다. 아직도 구 도심권은 핑크색만을 사용해야 하는 규정을 적용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는 영국의 왕자가 아닌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이곳 사람들은 열심히 핑크색을 칠하면서 ‘핑크시티’를 가꾸어 가고 있다. 관광을 중요과제로 하여 경제적 발전을 도모하고 있는 이들의 미래는 희망적이다.

천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왕 ‘자이싱 2세’가 세웠다는 천문대가 있다. ‘잔타르 만타르’라고 불리는 천문대며 이 같은 천문대가 인도에는 여러 곳에 만들어졌고, 이곳에 있는 것이 제일 크다고 한다. 20세기 초까지 실제로 천체관측을 실시하는데 활용할 정도로 정확하고 신뢰성이 있다는 18개의 천문대와 적도시계, 해시계 등이 커다란 조각공원에 들어온 느낌을 준다.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 해시계는 그 높이가 10m는 되는 듯 계단으로 까마득히 올라가도록 설계가 되어있다.

천문대에서 나와 ‘바람의 궁전’이라고 부르는 하와마할을 찾았다. 하와마할은 1799년에 건축된 것으로 외형적인 아름다움이 독특하다. 5층으로 설계된 인형의 집과도 같은 귀엽고 아름다운 건축물의 색채 또한 핑크 빛으로 칠해져 있다. 외출을 하지 못했던 왕가의 여인들이 창을 이용하여 밖의 풍경과 시가지를 구경하도록 설계된 건물답게 창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하와마할에서 조금 걸으면 중앙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은 진열된 물품들보다 오히려 빅토리아풍의 건축양식이 아름다워 찾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화려한 건축물을 배경으로 광장을 나르는 비둘기들이 한가롭고 평화스럽다.

자이뿌르 시내에서 북쪽으로 11km 떨어진 곳에 거대한 ‘암베르성’이 있다. 성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산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의 아름다움이 자연들과 어우러져 감탄사를 연발하게 한다. 공예품을 들고 물건을 팔아 보려는 인도의 젊은이들의 집요하고 적극적인 모습들이 귀찮게 느껴진다. 그러나 생동감 있는 인도인들의 활력을 보는 것이 인도의 희망을 보는 듯하다.

입구에서 코끼리를 타고 성을 향해 오르기 시작한다. 줄을 지어 뒤뚱거리며 성을 향해 산으로 오르는 코끼리들의 몸체에 예쁜 그림들이 그려져 있고, 오색 휘장으로 현란한 치장을 하고 있다. 행렬을 유지하며 장관을 이룬 코끼리의 행렬은 서서히 느릿느릿 그러나 강력한 힘을 과시하며 묵묵히 움직인다. 마치 인도인들의 생활을 보는 듯 한편으로는 답답하기만 하다. 출렁이는 코끼리의 등판에서 바라보는 암베르성이 아름답다. 10분쯤 뒤뚱거리는 코끼리 등에 매달린 긴장 끝에 드디어 암베르성의 성문이 나타나고, 안쪽으로 들어서니 거대한 정원이 펼쳐진다. 코끼리가 정원을 한 바퀴 돌아 계단 앞에 내려준다.

이 성은 무굴황제 ‘악바르’와 혼인동맹을 통해 왕국을 번성시킨 카츠츠와하 왕조(1037-1726), ‘만싱’이 1692년에 건설하였다. 처음에는 호화롭지 않았으나 ‘만싱’을 이은 ‘자이싱’에 의해서 현재와 같이 화려하고 호화스럽고, 아름다운 성으로 만들어졌다. 성의 둘레가 50Km정도로 거대하고, 성은 주로 대리석으로 장식되었으며, 왕비 12명이 거처하던 침실, 하늘정원, 바람 문, 왕비목욕탕, 왕 침실, 접견실 등이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섬세한 조각과 아름다운 색채와 현란하고 호화로운 장식들이 얼마나 그 당시의 왕조들이 화려한 생활을 하였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성으로 드나드는 사람들과 짐승들은 아름다운 유적들을 보존해야 한다는 의식이 없는 듯하다. 코끼리의 배설물 냄새가 진동하는 사이사이로 오토바이와 지프차들이 넘나들고 사람과 짐승들이 혼돈된 행렬은 계속된다. 비가 내리지 않아 물이 말라가는 이곳 호수 위에 촉촉이 비가 내리는 날, 아름다운 새싹들이 돋아나고 풍요로운 삶의 여유가 찾아오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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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델리 - 종교 갈등ㆍ분쟁 역사 묵묵히 지켜온 ‘전설의 도시’

뉴델리 - 종교 갈등ㆍ분쟁 역사 묵묵히 지켜온 ‘전설의 도시’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14 12:53

뉴델리 - 종교 갈등ㆍ분쟁 역사 묵묵히 지켜온 ‘전설의 도시’ 
 
 

 

아잔타 석굴의 프레스코화에서 받은 충격을 되새김 할 시간도 없이 아우랑가바드를 출발했다. 델리까지 가야하는 기차여행이 20시간 넘게 걸린다는 이야기가 긴장감과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창밖을 내다보며 기차여행을 생각하는 낭만이 없는 좁은 침대칸에서의 20시간은 대단한 인내심을 요구한다. 스케치북과 메모지를 정리하면서 시간을 잊어보려 하지만 지루함은 여전하고, 잠을 청해 보지만 흔들리는 기차의 방해는 말릴 수가 없었다.

하룻밤을 지새우고 한나절이 지나 오후가 되면서 델리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답답하여 난간으로 나가 대지를 향해 심호흡을 해본다. 지평선 위에 여기 저기 검은 회색의 텐트들이 나타났다. 얼기설기 지저분한 움막들이 집단을 이루고, 대지의 낮은 나무 밑에는 여기저기 많은 사람들이 외롭게 앉아있다. 문화시설을 갖추지 못한 가난한 삶의 현장이다. 땅은 넓고 문화는 없고, 생활은 있고 돈은 없다. 명상은 있고 행동은 없다. 무소유의 삶은 있고 해탈의 경지는 없다. 그저 수도사의 삶과 같은 삶을 인도인들이 인도에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들이 이들의 삶을 비참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생활을 만족하며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가난하지만 행복 지수도 높고, 평균 수명도 길다는 것이다.

B.C 3천년경 형성되었다는 전설의 도시 델리는 인도의 수도다. 대통령 궁을 비롯하여 정부요인들이 산다는 호화로운 저택을 지나 한참을 달리면 마하트마 간디를 모신 추모 공원, 라즈가트(Raj Ghat)가 나타난다. 사방에서 들어갈 수 있도록 같은 모양의 대칭형으로 설계되어 있다. 중앙에는 제단이 있고, 흑색 대리석 위에 헤이람(Hai Ram)이라고 쓰여 있다. 간디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 ‘오 신이여!’ 그 한마디 속에 모든 인도인을 걱정하는 마하트마 간디의 마음이 그의 영혼과 함께 살아있다.

라즈가트 북쪽에는 또 하나의 추모공원이 있다. 인도가 독립하여 초대 총리를 지낸 자와할랄 네루와 그의 외동딸 인디라 간디, 그리고 간디의 두 아들이 안장된 곳으로 ‘평화의 숲’이라는 뜻을 지닌 ‘샨티 바나(Shanti Vana)’라 부르는 곳이다.

영국은 1911년 붉은 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 올드델리를 벗어나 외곽에 신도시를 만드는 계획을 세웠다. 바로 ‘인디아 게이트’와 ‘코넛플레이스’를 두 개의 축으로 하는 방사형 도시 계획이었다. 지금의 뉴델리가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인디아 게이트에서 20분 정도 달리니 태양 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는 높은 탑 하나가 시야에 들어온다. 뉴델리에서 최고 볼거리로 꼽히는 ‘꾸뜹 미나르’다.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유적군은 12세기에 흰두 왕국을 무너뜨린 정복자이며 술탄국의 첫 군주인 ‘구뜹 웃딘 에어백’ 이 흰두교에 대한 이슬람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인도에서 가장 높다는 ‘꾸뜹 미나르’는 그 높이가 72.5m로 정상에서 델리를 감상하는 관망이 인상 적이라는데 1982년 이후 안전사고로 인하여 출입을 통제하여 지금은 탑을 오를 수가 없다.

도자기 벽돌을 구워 5층으로 쌓아 올리면서 중간 중간 코란경을 새겨 넣은 문양들이 아름답다. 거대한 곡선을 말아 만든 듯한 독특한 형태, 붉은 벽돌이 태양과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오묘한 색채감, 코란경을 새겨 넣은 기하학적 문양들의 추상성에서 오는 독특한 형상미 등 조화롭게 어우러져 아름다운 예술품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 곁에는 인도 최초의 이슬람 사원인 ‘쿠와트 알 이슬람 모스크’가 있다. 흰두교를 붕괴시킨 꾸뜹 왕조가 27개의 흰두 사원을 헐어내고 그곳에 이슬람 사원을 세운 것이다. 종교적인 갈등과 분쟁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온 사원의 기둥들이 말없이 침묵을 지키고 서 있다.

뉴델리에는 하얀 연꽃의 형상으로 세워진 거대한 ‘바하이 사원’이 있다. 옛 성현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위해 현신한 동등한 존재라고 믿는 바하이 종교는 이슬람교에서 분파된 신흥종교로 전 인류의 형제화, 종교의 통일, 모든 국가의 통합 등을 주장한다. 바하이 사원에서는 오직 침묵만을 지키면 된다.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믿음은 절대적이고 동일함으로 사원에서는 각자의 종교 의식에 따라 기도를 하면 되는 것이다.

종교의 갈등과 분쟁으로 시달린 인도의 종교를 통일해 보고자 하는 바하울라((Baha Ullah)의 생각이 바하이교를 창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끝도 없는 문제를 가지고 있는 인도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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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아잔타 석굴’

인도 ‘아잔타 석굴’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14 12:51

인도 ‘아잔타 석굴’ 
벽화 속 담겨진 찬란한 불교문화에 넋을 잃다  



 
 
한국화가 박생광 선생이 인도를 방문하고 그의 작품세계가 강력한 변신을 가져옴으로써 그가 우리나라 화단의 거목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학교 3학년 때였다. 선배들의 졸업작품전에 참여하기 위해 두 점의 작품을 준비했다. 작품 준비가 거의 끝이 난 상태에서 창운 이열모 선생은 나에게 인물 작품은 전시회에 출품을 하고, 산수 작품은 전시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산수 작품도 전시를 하고 싶었다. 선생님의 말씀을 어길 수가 없어 생각한 나머지 박생광 선생님께 지원을 얻고자하였다. 나는 산수 작품을 박생광 선생님께 보여 드리고 작품이 어떠냐고 여쭈워 보았다. 한동안을 말씀 없이 그림을 내려다보시던 박생광 선생은 ‘대가가 그렸으면 대작이라 하겠다.’하고 말씀 하셨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곳에는 대가도 없었고, 대작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창피스러운 우둔한 청년의 고집만 있었을 뿐이다. 한 장의 그림을 통하여 살아가는 진리와 겸손을 가르치신 박생광 선생의 인자하신 모습을 떠올리면서 나는 그가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는 아잔타 석굴의 프레스코화를 찾아 나섰다.

불교미술의 아름다움과 회화 발전의 핵심 요소라 말 할 수 있는 벽화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아잔타 석굴은 뭄바이에서 450km, 아우랑가바드에서 106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달리던 버스가 아잔타 석굴 관광단지 주차장에 멎는다. 주차장에서 석굴로 올라가는 전용 셔틀 버스를 타고 10분쯤 올라간다. 산행 입구에 손가마꾼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가마를 타라고 종용을 한다. 얼마나 멀기에 이런 사람들이 있나 하면서 긴장감도 생긴다. 그러나 10분쯤 계단을 오르니 아잔타의 모든 석굴이 한눈에 들어온다.

석굴은 지상으로부터 계단을 통하여 약 100m 오른 ‘인드야드리’ 언덕 중턱에 수평으로 1.5km에 걸쳐 전개된다. 모두 29개의 석굴이 데칸고원의 깊은 숲을 흐르고 있는 와고레강(Waghore River) 줄기를 따라 아름답게 이어져있다. 기암절벽의 단애를 흘러내리는 시원스런 폭포와 곡선을 그리며 유유히 흐르는 강물, 전망대로 오르는 아기자기한 계단들과 오솔길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아름답다.

이 석굴들은 B.C 2세기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으며 A.D 5-6세기에 완성을 한 인도 불교문화의 최고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석굴은 숲속에 감추어져 있던 것을 영국군 병사 ‘존 스미스’가 호랑이 사냥을 하기 위하여 이 계곡에 내려왔다가 1819년에 발견하였다. 1100년 동안의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벽면에 그려진 회화는 주로 불교의 전래 내용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인도 회화사상 유례없는 걸작으로 이 양식은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한국에 전해졌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 이 작품은 오히려 숲 속에서 인간의 손에 닿지 않는 오랜 세월을 보낸 것이 작품을 보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먼지를 제거하고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벌써 벽화의 색채가 변화되고 손상되기 시작했다.

동굴을 만들고 그 곳에 벽화를 그리기 위하여 황토 흙이나 소석회, 모래 등의 모르타르를 벽면에 바르고 수분이 마르기 전에 물감을 발라 그림을 그렸다는 ‘프레스코화(Fresco)기법’을 공부하던 학창시절이 기억난다. 왜 프레스코화 기법이 발달했었는지를 정확히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벽화를 아름답게 그리고, 오래 보존하고자 회화 기법을 개발하고 연구하여 프레스코화 기법으로 정착시켰던 그들의 작품에서 다양한 표현력, 구성력, 재치와 익살, 해학과 예술로 연결되는 무한한 작품성을 발견했다.

1번 굴은 6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아잔타 석굴 중에 최고의 벽화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입구에서 신을 벗고 맨발로 들어가도록 엄격히 통제를 하고 있다.

벽화 속에 나타난 부처의 모습이 일본의 법륭사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담징의 벽화를 다시 만나는 기분이다. 풍만한 육체의 관능미를 자랑하며 흑인공주가 유혹을 하고, 곡선미가 유연한 연꽃 든 보살들이 화려한 색채 속에서 아름다운 프레스코화의 위력을 보여준다. 왜 이곳에서 한국화가 박생광이 강한 충격을 받았었는지 그 이유를 이제 알 것만 같다. 붓다의 전생과 이생을 그린 2번 석굴의 벽화, 4번 석굴의 조각 작품들, 어느 하나 소홀이 볼 수 없는 감동적인 작품들이 연속된다. 생동감을 연결하는 석굴과 석굴 사이는 계단과 통로로 만들어져 그 연결 구성이 아름답고 자연스럽다.

미군 병사에 의하여 최초로 발견된 10번 석굴은 B.C 2세기경 만들어진 것으로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석굴이다. 이 석굴 앞에서 와고레강을 올려다보는 풍경이 장관이다. 보존상태가 가장 좋은 석굴은 17번 석굴이다. 불교의 설화, 무희들의 관능적인 춤, 붓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속세에서 인연을 맺었던 부인과 두 아들에게 탁발하는 장면들이 생생하게 벽화로 남아있다.

석굴을 드나들며 조금씩 드려다 본 짧은 시간이 벌써 한나절이다. 명상에 잠긴 승려들의 마음과 몸을 깨끗하게 씻어 주던 강물은 아무 말 이 없다. 해탈의 경지를 알려 주려는 듯 조용히, 서서히 그리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며 흐른다. 말없이 흐르는 와고레 강이 조용히 입을 연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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