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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시에나 - 시에나 캄포광장엔 노천카페 즐비

이탈리아 시에나 - 시에나 캄포광장엔 노천카페 즐비 국내외 여행정보 2008. 10. 14. 14:17

이탈리아 시에나 - 시에나 캄포광장엔 노천카페 즐비 




 
 
광장에 어둠이 내려앉으면 광장을 따라 들어선 노천카페(Bar)에 하나 둘씩 불이 켜진다. 이곳에 있는 카페들은 비싼 실내 장식과 소파가 따로 필요치 않아 보인다. 시청 앞 광장에 면해 있는 수백년이 넘는 건축물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시청의 종탑, 낭만적인 부채 꼴 광장이 모두 카페의 배경이다 보니 달리 인테리어가 필요치 않은 것이다.

이럴 때 바로 “조상 덕에 잘 사는 사람들”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우리는 뭐든지 새로 만들어야 하니 때로 지치고 진이 빠지지만 그들은 가지고 있는 것에 하나를 더 보태면 되니 실패도 덜 겪고, 시행착오도 줄일 수 있을 것 같다. 대신에 그들의 삶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다이내믹함이 부족하다. 이탈리아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평생 큰 변화 없이 고향에서 부모의 직업을 물려받으며 어제와 별 다름 없는 오늘을 살아간다는 것은 장점이자 단점이다. 안정된 삶을 치르는 대가라고 해야 할까? 물론 우리는 그 반대이지만 말이다.

이미 하루 종일 관광객들을 맞느라 몸살을 앓았지만 카페의 종업원들은 저녁이 되면서 새로이 찾아온 손님들을 여전히 기운차고 기분 좋게 맞아 준다. 손님 중에는 관광객들이 많지만 시에나 시민들도 적잖아 보인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한잔 하는 곳, 그곳이 바로 카페이다. 카페가 있는 곳에 사람이 모이고, 담론이 이루어지면서 문학이 탄생하며, 문화와 역사가 만들어진다. 그러니 유서 깊은 도시마다 수세기의 역사를 자랑하는 카페가 있기 마련이고, 카페는 한 도시의 역사를 증언하는 역사의 산실이 된다.

이탈리아를 방문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도시로 시에나를 꼽는 이들이 많다. 시에나는 피렌체와 쌍벽을 이루며 토스카나 주의 문화와 예술을 만들어 갔던 중세 최대이자 최고의 도시였으며 그 모습을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시에나가 전성기를 누린 때는 13, 14세기 이며 이 때 도시의 상징인 대성당(Duomo)과 시청(Palazzo Pubblico)이 세워졌다. 두 곳 모두 높은 탑이 있으나 대성당의 것이 조금 더 높다. 탑 자체가 높아서가 아니라 성당을 언덕 위에 짓고 시청을 그 아래에 위치시킴으로써 세속이 종교를 넘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탈리아의 중세도시는 늘 종교와 시민생활이 공존한다. 도시가 형성되면서 가장 먼저 만들어지는 곳이 바로 대성당과 광장인데 시에나에서는 대성당 대신에 시의 청사 건물 앞에 드넓은 메인 광장이 들어섰다. 이곳 광장에서 시민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일상의 삶을 즐겼는가 하면, 축제를 벌였다.

캄포 광장이라고 불리는 부채 모양의 이 아름다운 광장 바닥에는 9개의 부채 살 모양이 돌로 새겨져 있다. 시에나가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시에나 공화국을 통치했던 ‘9인의 정부’를 상징하기 위해 9개의 구획 모양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여름이 되면 두 차례에 걸쳐 그 유명한 팔리오 축제, 즉 시에나의 17구역 대표들이 안장 없는 말을 타고 질주하는 말 경기가 벌어진다. 1000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축제로서 전 세계 관광객들이 이를 보기 위해 찾아오며, 우리나라에서도 TV를 통해 여러 번 소개된 바로 그 축제이다.
 

‘14세기 걸작’ 시에나시청 벽화
마르티니 작품 등 당시의 국력·자부심 상징

 
가끔 뉴스에서 고흐나 피카소와 같은 거장들의 그림 한점이 수십 혹은 수백억원에 팔렸다는 소식을 접할 때가 있다. 현대 대가들의 소형 그림 한점이 그러하다면 초대형 실내 벽면을 온통 벽화로 장식한 수백년 전 거장들의 그림들은 도대체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우매한 생각이지만 가끔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탈리아 대부분의 도시들은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의 걸작들을 보유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시에나 시청 안에 그려진 벽화들은 단연 으뜸이라 할 만 하다. 14세기 서양 미술사는 시에나 화가들의 미술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뻘 되는 두치오를 시작으로 기라성 같은 시모네 마르티니가 탄생했으며, 그와 동시대 사람들인 암부로조와 피에트로 로렌체티 형제가 배출되었다. 그 중에서 두치오를 제외한 세 화가들의 대형 벽화들이 모두 시에나의 시청 안에 있다. 14세기 서양 회화사가 바로 이 건물에서 시작된 것이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이 시청에 들어가면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시모네 마르티니의 ‘마에스타’와 ‘구이도 리치 다 폴리아노 장군’이다. 벽면을 가득 메운 이 두 대형 프레스코화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습은 엄숙함 그 자체이다. ‘장엄’이라는 의미의 ‘마에스타’는 성모자와 성인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그린 종교화이고, ‘구이도리초 다 폴리아노 장군’은 시에나가 전성기를 누렸던 시절, 시에나에 반기를 들었던 나라들을 제압한 한 장군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자신이 타고 있는 말과 동일한 의상을 입고 전지를 둘러보고 있는 장군의 모습을 통해 시에나 공화국의 국력과 자부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전자가 시에나의 종교적 상징이라면 후자는 군사적 상징이다.

이 방의 옆방인 9인 정부의 방에는 암부로조 로렌체티의 ‘좋은 정부의 알레고리’와 ‘나쁜 정부 알레고리’가 있다. 9인의 정부란 한때 시에나 공화국을 통치했던 정부의 이름이다. 그래서인지 정치적 주제를 채택했다. 여기서 좋은 정부를 상징하고 있는 것은 한 늙은 왕이다. 그의 왼쪽 옆에는 심판, 절제, 관대가 오른쪽 옆에는 신중, 강인, 평화가 사람의 모습으로 의인화되어 있다.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으로 좋은 정부가 되기 위한 덕목들이다. 반대편에는 나쁜 정부의 알레고리를 그리고 있는데 뿔 달린 독재자의 모습이 중앙에 있고 양쪽에 나쁜 습관, 잘못된 심판 등으로 고통받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

또 다른 벽면에는 ‘좋은 정부의 효과’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도심과 농촌의 모습으로서 각종 가게와 상인들로 북적거리는 활기찬 시에나의 모습이다. 거리에서 강강술래를 하며 춤을 추는 소녀들, 양떼를 몰고 가는 목동, 말을 타고 길을 가는 사람들, 가게에서 흥정하는 상인과 손님들의 모습이 보인다. 평화롭고 한가한 이들 장면은 모두 좋은 정부의 효과를 시각화한 것이다.

이들 그림은 환경을 아름답게 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올바른 정치를 바라는 백성들의 염원과 정치인들의 다짐을 드러내는 도구다.
 

‘시에나 성당’ 고딕양식 최고봉
장엄하고 독창적인 기둥·조각 수두룩

 
고대부터 19세기 이전까지 2000년의 서양미술사에서 이탈리아가 타 유럽 국가에 주도권을 넘겨준 양식이 딱 하나 있는데 바로 고딕 양식이 그것이다. 고딕은 뭐니 뭐니 해도 프랑스의 산물이며, 이탈리아는 고딕에 관한 한 별로 내 놓을 만한 예술 상품이 없다. 밀라노 대성당만이 거의 유일하게 화려함과 규모면에서 프랑스의 고딕 건축물에 비교될 뿐이다.

그 와중에 시에나 대성당은 이탈리아 고딕의 자부심이라 할 만하다. 밀라노 대성당이 규모와 외적 화려함에서 압도한다면 시에나 대성당은 예술가들의 명성과 소장품들의 높은 질적 수준으로 인해 최고의 고딕 성당으로 꼽힌다.

시에나 대성당은 거대한 규모에 비해 아담하고, 정겨워 보인다. 정면에는 내부로 들어가는 세 개의 문이 있는데 기둥장식과 문 위의 반달형 장식이 전형적인 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임을 말해준다. 반면 문 위쪽부터는 모두 고딕 양식이다. 고딕 특유의 뾰족 첨탑들과 레이스 풍의 건축 장식들, 우뚝 서 있는 조각 작품들, 그리고 고딕 성당의 상징이라는 거대한 장미의 창도 보인다. 시에나 대성당은 이렇듯 건축의 구조와 양식적 측면에서 볼 때 유럽의 여타 고딕 성당들과 다를 바 없으나 그 느낌은 사뭇 다르다. 이탈리아 특유의 섬세함과 정겨움이 배어있는 까닭일 것이다.

건축물 외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면 곳곳에 놓인 조각들이다. 이것들은 고딕 조각의 선구자로 알려진 조반니 피사노(13세기 중 후반기에 활동)의 작품이다. 이들 조각 외에도 정면의 상단부 건축 디자인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고딕이 프랑스의 산물이라고 하나 이름 석자만 대면 알만한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고딕 건축가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반면, 이탈리아는 제대로 된 고딕 성당이라고는 시에나에서 딱 하나 만들어냈으면서도 대표적인 예술가를 배출했으니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면 약이 오를 노릇이다. 현재 보이는 정면의 조각들은 모두 복제품들이고 원작은 대성당 부속 미술관인 오페라 델 두오모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성당 안에 들어가는 순간 방문객들 사이에서 한숨인 듯 탄성인 듯, 신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흰색과 초록색이 얼룩말의 띠처럼 교차하여 만들어 낸 거대한 기둥 숲과 그것들이 만든 장엄함과 조화로움 때문이다. 기둥이 이토록 독창적이며 아름답게 만들어진 건축물은 많지 않으며, 아랍의 영향에 이탈리아 적 감각을 곁들어 만든 전형적인 시에나 풍의 기둥이다. 기둥 위쪽에는 172명의 역대 교황들의 초상 조각과(1400~1500년에 제작), 36명의 황제들의 초상 조각이 설치되어 있다. 세속과 종교의 최고 지도자들의 모습을 집대성하였다.

눈을 아래로 돌리면 바닥에 방문객들의 발걸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빨간 줄이 둘러져 있다. 그것은 인타르시아라 불리는 돌 상감 모자이크 기법으로 그려낸 56개의 돌 그림들로서 1300년대부터 1500년대까지 2세기에 걸쳐 제작되었다. 물론 그것을 디자인 한 사람 중에 당대 최고의 화가의 작품도 있다.

액자에 끼워 고이 간직해도 모자랄 판에 어찌하며 이 소중한 그림들을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바닥에 그려놓았단 말인가? 바닥부터 천장까지, 한 마디로 예술이 아닌 것이 없다.
 

고딕조각 새지평 피사노의 ‘설교대’
예수의 생애 8개 부조로 다뤄… 미켈란젤로 압도

 
미켈란젤로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피사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에나 대성당에서만큼은 피사노가 미켈란젤로를 압도한다. 이곳에는 미켈란젤로의 조각이 네 점이나 소장되어 있으나 성당을 대표하는 작품은 피사노의 설교대다. 소개 책자를 보아도 피사노의 설교대에는 무려 8쪽을 할애한 반면 미켈란젤로의 조각들은 겨우 한쪽에 소개했을 뿐이다.

시에나 대성당 건립에 큰 공을 세운 이들은 피사노라고 불리는 부자(父子) 조각가들이다. 아버지 니콜라 피사노가 대형 설교대(1265~1268년 제작)를 만듦으로써 고딕 조각의 지평을 열었다면, 아버지 밑에서 미술을 배운 아들 조반니는 성당 정면의 건축과 조각을 맡아서 이탈리아 고딕 조각과 건축의 자부심이 되게 했다.

성당의 앞쪽에 놓인 8각형 모양의 대리석 설교대는 8개의 부조로 장식되어 있는데 내용은 아기 예수의 탄생부터 최후의 심판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생애를 다루고 있다.

이들 작품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서 이탈리아 고딕 조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얼굴 표정은 실제 사람인 것처럼 생생하고, 육체의 움직임은 중세의 딱딱함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묘사되었다.

이후 서양 미술의 특징이 될 자연주의의 시작이다. 특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죽은 아들 앞에서 기절해버린 성모님의 모습은 이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인간적인 장면이다. 작업은 아버지 니콜라 피사노가 여러 명의 조수들을 데리고 했으며 제자들 중에 아들도 있었다.

유럽의 교회는 당대 최고의 미술가들을 초대하여 미술품을 의뢰했다. 이는 예술에 대한 안목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동시에 미술품이 그들의 종교인 그리스도교를 표현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이었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림이나 조각은 성서의 이야기나 성인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당시로서는 가장 효과적인 시각매체였다.

미술품은 때로 실존 인물을 선전하는 매체로 둔갑하기도 한다. 대성당 내부 왼쪽 편에 있는 피콜로미니 도서관이 바로 그 예다. 도서관을 짓게 한 사람은 추기경 프란체스코 피콜로미니 토데스키니로서 후에 교황 비오 3세가 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삼촌이자 교황 비오 2세(1458~1464년)였던 당대 최고의 인문주의 학자 에네아 실비오 피콜로미니의 장서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 이 도서관 장식을 발주했다.

도서관의 벽은 15세기 프레스코 벽화로 가득한데 그림의 내용인즉슨 삼촌인 선임 교황 비오 2세의 일대기이고 보면 자랑스러운 가족사이자, 미술을 통해 현존하는 인물을 예찬한 전형적인 예다. 다만 핀투리키오가 그린 이들 벽화 역시 미술사 교과서에 빠짐없이 실리는 걸작이다 보니 세월이 흐른 지금 그 누구도 당시의 정치적인 목적에 대해 이의를 달지 않는 것이다.

서울시에서 건립하려는 오페라하우스에 대해 한 시민단체의 사람이 비용을 문제 삼으며 이의를 제기하는 뉴스를 보았다. “그래도 지어야 한다!” 정치도 돈도 순간이지만 예술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역사에 남을 기념비적인 작품을 만들어내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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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털리아 여행 ‘세계 7대 불가사의’ 피사 사탑

이털리아 여행 ‘세계 7대 불가사의’ 피사 사탑 국내외 여행정보 2008. 10. 14. 14:14

이털리아 여행 ‘세계 7대 불가사의’ 피사 사탑 
 





 
사탑으로 유명한 피사는 지금은 인구 10만의 소도시지만 한 때는 베네치아, 제노바, 아말피와 더불어 이탈리아에게 가장 번성했던 4대 공화국의 하나였다. 국력이 절정에 다다랐던 12세기, 피사는 멀리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를 식민지로 만들었는가 하면, 아랍의 함대를 대파했으며, 동방과의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고 있었다. 이 화려한 역사가 남아 있는 곳이 바로 사탑이 있는 대성당 광장이다.

대성당 광장은 일종의 복합 종교 공간이다. 그곳에는 대성당 외에도 세례당, 캄포산토라는 공동묘지, 그리고 종탑이 수 백 년의 세월에도 위축되지 않고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세례당이란 세례 전용 공간으로서 대성당과 세례당이 독립적으로 각각 지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교회의 규모가 컸고, 세례 의식이 성대했음을 말해준다. 보통은 성당 안에서 세례의식을 행하기 때문이다. 종탑 역시 일반적으로는 교회건물의 일부로 존재하지만 피사에서는 독립된 건축물로 지어졌으며, 그것이 바로 사탑이다.

이들 건축물들은 피사가 가장 번영했던 12세기 중엽에 지어지기 시작하여 2세기의 작업 끝에 완성되었다. 건축 중에 전쟁이 일어나면 잠시 중단했다가 평화가 찾아오면 다시 짓기를 반복하다보니 오랜 세월이 소요되었다. 물론 쉬지 않고 지었더라도 3,40년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사탑은 50m가 넘는 석조건물로서 각 층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작은 아치와 기둥들이 레이스처럼 섬세하고 아름답다. 1173년에 건축을 시작했는데 3층 쯤 지었을 때 이미 기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반이 약하여 땅이 내려 앉으면서 건축물도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기울어진 상태에서 작업은 계속되었고, 결과적으로 세계 7대 불가사의 건축물이 되었다. 그러나 사실 기울어지는 건축물 공사를 무사히 완성했다는 것은, 게다가 그것이 수 백 년 넘도록 무너지지 않고 지탱하고 있다는 것은 엄청난 인간 노력의 결과이다. 사탑은 매년 1㎜씩 기울고 있다고 하며 현재는 철 줄로 기울어진 부분을 반대편에서 당기는 식으로 임시 보강작업을 해놓은 상태다.

대성당과 세례당 안에는 국보급에 해당하는 석조 설교대가 각각 있다. 설교대란 성직자가 미사 중에 설교를 했던 곳인데 세례당의 설교대는 니콜라 피사노의 작품이고 대성당의 것은 아들 조반니 피사노의 작품이다. 이들 부자(父子)는 이탈리아에 고딕 조각을 도입한 선구자들로서 이들의 명성은 삽시간에 알려져서 많은 도시에서 초청을 받아 걸작들을 남겼다. 이들은 고대 이래 이탈리아 조각사를 연 첫 주인공들이자, 후대의 조각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을 제공한 거장들이다.

피사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단지 사탑 때문만은 아니며, 거대한 대성당 때문만도 아니다. 오래된 건축물들은 도처에 얼마든지 있으니 단지 존재 자체만 가지고서는 명함을 내밀기 힘들다. 한 도시가 정작 역사적 가치를 갖추려면 위대한 거장들의 걸작을 필요로 한다. 물건으로 치면 명품이다. 적어도 이탈리아에서는 그렇다.
 

古書향기 그득한 피사대학
 
 
고서(古書)가 가득 꽂혀 있는 유서 깊은 도서관에서는 퀴퀴한 곰팡이 냄새 같은 것이 나는데 그것이 때로는 향기 이상으로 사람을 기분 좋게 한다. 내가 공부한 피사대학 도서관에서도 늘 퀴퀴한 냄새가 났는데 나는 그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피사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사탑 다음으로 대학이다. 피사대학은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대학 중의 하나로서 움베르토 에코 교수로 유명한 볼로냐대학, 파리대학과 함께 12세기에 세워졌다. 13세기에 이미 의대가 설립되었고, 1343년 교황 클레멘스 6세가 축성했으며, 이에 질세라 1350년에는 황제 카를 4세도 이 대학을 축성했다.

피사대학은 피사 시내 곳곳에 단과대별로 혹은 학과별로 흩어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학이 수세기에 걸쳐 필요에 따라 세워지다 보니 사방에 분산돼 있을 수밖에 없다. 현재의 대학 본관 건물은 1493년에 지어졌으며,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이 곳에서 공부를 했고, 교수를 지냈다.

역사가 오래이다 보니 단과대별로 설치되어 있는 도서관에는 수백년씩 된 희귀본에서부터 최근 발간된 책에 이르기까지 풍요로운 장서로 가득하다. 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은 기사의 광장(Piazza Cavagliere)이라 불리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 피사고등사범학교(Scuola Normale Superiore di Pisa)의 도서관이다.

노르말레, 즉 보통학교라고 불리는 이 학교는 이름과는 달리 가장 천재적인 학생들만이 입학할 수 있는 특수 대학이다. 유럽의 대학들이 대학입학 자격시험을 통과한 학생이라면 누구나 대학 혹은 학과에 관계없이 입학이 가능한 반면 피사고등사범은 학과별로 서너 명 이내의 학생만을 선발하기 때문에 수재만이 입학이 가능하다.

이 학교는 1810년 나폴레옹이 설립했으며 유럽에서 파리와 피사 단 두 곳에만 있다. 파리고등사범에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가 있었다면 피사고등사범에는 이탈리아 사상 첫 노벨상 수상자인 시인 조수에 카르두치가 있다.

피사고등사범의 본관은 정기 도서관의 간행물 실로 쓰이고 있다. 거대한 건물이 잡지로 가득 차 있으니 전세계 학술지의 대부분을 비치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에서 보이는 두 건물은 지하 통로를 통해 연결되어 있으며 왼쪽 건물 역시 도서관이다. 오래된 통나무 책상에 책을 펼쳐 놓고, 짚으로 엮은 낡은 의자에 앉아 연구에 몰두할 수 있음은 학자만이 누리는 소박한 사치다.

피사대학은 학과별로 도서관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성 마태오 국립박물관 안에 있는 미술사학과가 그렇다. 미술사학과의 심장부 역시 건물 2층에 위치한 도서관이다. 도서관에는 늘 사람들로 붐비며 학생과 교수가 같은 책상에서 공부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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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아름다운 수상도시’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아름다운 수상도시’ 국내외 여행정보 2008. 10. 14. 14:11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아름다운 수상도시’ 
 
 




베네치아를 방문하고 돌아올 때마다 늘 마음이 아팠다. “내가 이곳에 또 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나는 한 도시와 작별을 하곤 했다. 이별은 늘 슬픈 것이며, 사람하고만 하는 것도 아닌가 보다. 한 도시를 떠나면서도 이별을 떠올렸으니 말이다. 그만큼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베네치아를 떠난다는 것은 나에게는 매번 고통이요, 아픔이었다.

베네치아는 수백 개의 섬 위에 세워진 수상도시다. 배가 다니는 운하는 대로이고, 수로는 작은 골목길이다. 자동차 대신 배가 다니는 것만 다를 뿐 그곳에도 버스, 택시, 자가용이 있다. 오히려 육지에 없는 낭만적인 곤돌라라는 배도 있다.

베네치아에 가는 법은 자동차, 기차, 비행기 편이 있다. 차와 기차는 물론이려니와 공항에 내려도 한번만 배를 타면 곧바로 시내 중심가로 연결되는 배편이 있다. 관광객들이여, 지체하지 말고 가서 돈주머니를 풀라는 거다. 그들은 모두 베네치아 상인의 후손들이었다.

기차로 도착했을 경우에도 역사를 빠져나오면 바로 출렁거리는 바다와 만나게 된다. 역 광장에서 버스 티켓을 사서 배에 몸을 실으면 그때부터 대운하(Canale Grande)를 통과하는 베네치아 관광의 시작이다. 배는 정거장마다 멈추어서니 시가지 구경하기에 더없이 적절하다. 굽이 굽이 배가 가는 곳마다 좌우로 눈을 돌려보라. 아름다운 건축물을 발견했다면 마음껏 탄성을 질러도 무방하다. 돌아다니는 사람의 90%는 관광객이니 그들도 모두 나와 같은 맘이다.

세상에 아름다운 도시가 많다지만 베네치아는 특별하다. 육지에서도 석조 건물 하나를 세우려면 온갖 고생을 해야 하는데 하물며 물속에 기초 공사를 하고 필요한 석재는 육지에서 배로 실어 날라 건축물을 완성해야 했으니 그 어려움이 어련했을까?

베네치아의 건축물은 대략 13세기 고딕시대부터 르네상스, 바로크를 거쳐 17세기의 로코코 시대로 이어지는데, 건축의 역사가 바로 도시의 역사이기도 하다. 밖에서 보면 건축물의 층마다 작은 발코니 앞에 화분들이 놓여 있어서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베네치아 사람들의 마음을 보는 듯하다.

베네치아는 지리적 위치로 인해 동방과 비잔틴을 연결하는 유럽의 창과 같은 곳이었다. 중세에는 동방에서 물건을 수입하여 유럽에 파는 무역업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그 부를 토대로 그들은 문화, 예술, 문학, 낭만, 그리고 자유를 꽃피웠다.

베네치아는 철저하게 상업을 추구한 도시였으며, 상업적 성공을 위해서라면 종교와도 거리를 두었다. 베네치아 정부가 혼신의 힘을 다해 지켜내고자 한 것은 자국민의 상업 활동이었다. 경제가 모든 정책의 우선이었던 셈이다. 베네치아에서는 신조차도 그들의 상업을 지켜주지 않는다면 공경받지 못하는 듯했다.

장사로 벌어들인 돈을 그들은 잘 먹고 잘 사는 데 썼다. 그러니 음식과 건축이 발달했으며, 위대한 예술가들이 줄줄이 탄생되었음을 물론, 낭만적인 바람둥이 카사노바와 같은 사람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카페 ‘플로리안’ 베네치아의 명물
 
 
“베네치아의 카페 플로리안으로 가자.”

듣기만 해도 설레는 이 문장은 이광주 선생이 쓴 책 제목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카페 플로리안의 탄생부터 카페가 지나온 역사적 발자취를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베네치아의 심장부는 산 마르코 광장이다. 그곳에는 늘 수많은 비둘기 떼가 모여 있고, 비둘기 떼만큼의 관광객들로 사시사철 북새통이다. 베네치아를 찾은 관광객들은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즐거워한다. 인간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린 비둘기들은 관광객이 주는 먹이를 끝도 없이 탐욕스럽게 먹어댄다. 비둘기들이 도망을 가지 않으니 손바닥이나 머리 위에 올려놓고 멋진 기념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밥값을 제대로 하는 산마르코 광장의 비둘기들은 이제 어엿한 베네치아의 관광 상품으로 자리잡았다.

아름다운 기둥 숲으로 둘러싸인 넓고 긴 직사각형의 산마르코 광장에는 또 다른 명물이 있는데 바로 음악 카페다. 이들 카페 중에 카페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카페 플로리안이 있다. 카페 플로리안은 단순한 카페를 뛰어넘어 베네치아 역사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1683년 처음 생긴 이래 그곳은 외세의 침략 때에는 전략의 요충지였고, 지식인들의 담론의 장이었으며, 베네치아를 찾은 명사들이 가장 먼저 찾는 곳이었다.

이곳을 찾은 역사적인 인물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괴테, 카사노바, 스탕달, 바그너, 러스킨, 릴케, 마네 모네, 하이네, 니체…. 플로리안은 때로 매춘의 소굴이기도 했다. 카사노바가 작업을 벌인 곳도 바로 이곳이었단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카페를 보통 바(Bar)라고 부르는데 바는 그들의 일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다. 잘 먹기로 유명한 이탈리아 사람들이지만 아침만큼은 간단하게 한다. 집에서 할 경우 카페라테라 불리는 커피 우유에 비스킷 몇 개면 끝이다. 그나마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아침 식사를 출근길에 카페에 들러서 한다. 보통 카푸치노 한잔에 패스트리 한 점을 먹는데 우리 돈으로 2000원 정도면 해결된다.

이탈리아의 카페는 우리와 다른 점이 있는데 서서 커피를 마시면 천원 남짓이면 되지만 일단 자리에 앉으면 값이 두 배 혹은 그 이상으로 올라간다. 카페 플로리안 역시 마찬가지다. 카페 안에 들어가서 마시면 싼 값에 커피를 마실 수 있지만 일단 노천의 테이블에 앉으면 커피 한잔 값이 1만5000원 정도 한다. 하지만 그 정도는 이 카페가 지나온 역사에 바치는 나그네의 헌정이라 생각하자.

카페 플로리안에 앉아 서비스를 받는 순간 우리는 역사적인 카페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카페에 앉아서 적당히 자리를 잡고 느긋하게 음악을 감상하다 보면 재미있는 광경도 목격할 수 있다. 연주보다는 아름다운 여자 손님, 혹은 팁 좀 뿌릴 만한 일본 여인을 유혹하느라 눈길을 보내는데 여념 없는 연주자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음악, 자유, 낭만, 역사, 인생이 있는 곳, 그곳이 바로 4세기 가까이 영업을 계속 하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유서 깊은 카페 플로리안이다.
 

‘베네치아 수호성’ 성 마르코 대성당
 
 
베네치아의 심장부가 성 마르코 광장이라면 이 광장의 심장부는 성 마르코 대성당이다. 베네치아 역에서 배를 타고 성 마르코 광장 정거장에서 내리면 레이스처럼 섬세하게 장식된 아름다운 석조 건물인 베네치아 공작 궁과 만나면서 그 화려함에 한번 놀라고, 공작 궁에서 이어지는 넓디넓은 사각의 성 마르코 광장에 두번 놀라며, 광장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웅장한 성 마르코 대성당 앞에서 세번째로 놀랄 것이다.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인 성 마르코는 보통 날개 달린 사자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 유래는 4대 복음 저자를 각기 마르코는 사자, 마태오는 천사, 요한은 독수리, 루카는 황소로 그린 데에서 유래했다. 이들 4대 복음 저자 중 그 누구도 성 마르코처럼 한 도시 전체의 상징이 되어서 지극한 영광을 누린 이는 없는 듯하다. 성 마르코 덕분에 날개 달린 사자상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상징이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베네치아의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성 마르코 성당은 바실리카라 불린다. 바실리카란 원래 로마제국시대의 공회당이었는데 이후 그것을 본떠 초창기인 10세기 이전의 교회를 가리키게 되었으며, 따라서 유서 깊은 교회일수록 바실리카란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바실리카가 처음으로 지어진 것은 9세기 경이다. 그 무렵 베네치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수호성인인 성 마르코의 유해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한 교회에서 훔쳐 온 후 자신들을 지켜주리라 굳게 믿었던 성인의 유해를 모시기 위해 교회를 지었다. 오늘날 성당의 모습은 1063년 이후 건축된 것이다.

1000~1200년을 서양에서는 로마네스크 양식 시대라 하는데 이 시기에 지어진 성 마르코 성당은 대표적인 로마네스크 건축물이자 특별히 비잔틴 양식으로 불린다. 교회의 일반적인 형태가 라틴 십자가로 불리는 길쭉한 사각형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반해 비잔틴식 성당은 그리스 십자가로 불리는 정사각형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돔으로 장식된 것이 특징이다. 비잔틴 양식의 또 다른 특징은 모자이크 장식인데 성 마르코 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모자이크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모자이크 예술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우선 성당의 정면부는 다섯개의 출입문 위에 반원형의 아치가 2층으로 장식되어 있어 화려함을 더해준다. 이 반원형의 아치는 모두 모자이크로 장식되었는데 원래는 12세기에 만들어졌으나 오리지널은 왼쪽 문 위에 하나만 남아 있으며, 나머지는 후대에 다시 제작했다. 그 중 2층에 있는 아치의 모자이크는 역사가 가장 짧으며, 17세기에 제작되었다.

성당 안에 들어가면 거대한 공간에서 빚어지는 안정감과 조화에 놀라게 될 것이다. 공간이 넓으나 자신이 왜소하게 느껴지지 않으니 참으로 편안하다. 거대한 기둥들이 만들어내는 아치의 부드러운 선들, 하늘로 가는 길목처럼 느껴지는 황금빛 돔, 실내의 모든 공간을 가득 채운 찬란한 모자이크화들. 이들 모자이크는 800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비잔틴 모자이크의 결정판이자 중세 회화의 교과서라 할 수 있다.

지상에서 맛볼 수 있는 천상의 세계가 한 곳 있다면 그곳은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대성당이리라.
 

거장들 그림 가득한 공작궁
 
 
베네치아의 심장부가 성 마르코 대성당과 광장이라면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해야 할 곳이 대성당 바로 옆에 자리 잡은 팔라초 두칼레, 즉 공작궁이다. 공작궁은 도제(Doge)라 불리는 베네치아 공화국 대통령의 아파트요 집무실이자 여러 관공서가 모여 있는 곳으로서, 이를테면 오늘날 우리의 청와대·종합청사·국회·검찰청·교도소를 합친 곳으로 볼 수 있다. 대성당이 종교의 중심지였다면 공작궁은 세속적인 정치·행정의 중심지였다.

바닷가 바로 앞에 세워진 베네치아의 공작궁은 태양을 받아 출렁이는 바다 물결을 건물에 옮겨 놓은 듯 화려한 기둥 장식들이 눈길을 끄는데 그 섬세함은 돌로 만든 레이스를 연상시킬 정도다.

그러나 이 정도의 화려함은 건물 안에 장식된 이 도시 최고 거장들의 작품에 비하면 그다지 자랑거리도 되지 못한다.

베네치아가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화려했던 시기는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였다. 이때의 베네치아 회화를 이끈 예술가들은 티치아노, 틴토레토, 베로네세라는 세 거장으로서 이들은 강렬한 색채와 빛을 내세우는 베네치아 학파의 기원을 이루게 되었으며, 특별히 티치아노는 당대의 미켈란젤로와 겨룰 수 있는 유일한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베네치아의 공작궁은 바로 이들 세 거장의 개인 미술관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방마다 이들의 그림으로 가득 차 있다.

대통령의 아파트, 접견실, 대기실 곳곳에서 티치아노의 그림을 볼 수 있는가 하면, 2000명의 시민들이 동시에 입장하여 법을 승인하고 정부의 행정관들을 임명했던 대회의실에는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틴토레토의 대형 벽화가 설치되어 있다.

이 방에는 특히 16세기까지의 역대 베네치아 대통령의 초상화가 벽면에 빼곡히 걸려 있는데 그 중 한 곳에는 그림 대신에 검은 색만 칠해져 있다. 그곳은 바로 마린 팔리에로라는 대통령의 초상화가 있어야 할 자리였으나 그가 권력을 탐해 모반을 꾀하는 바람에 참수형에 처해졌고, 이 불행한 정치인을 경고로 삼고자 그 자리를 영원히 검게 칠해놨다는 것이다.

베네치아 대통령은 사사로운 권력을 추구하다가는 이렇게 비극적인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이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평화로운 베네치아를 만드는 것이었다. 평화가 보장되어야만 베네치아 시민들이 바다를 오가며 맘 놓고 무역을 하면서 부를 축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권력은 특정인에게 집중되지 않도록 철저히 분산되었고, 정치가들의 임기는 철저히 지켜졌으며, 그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경제 부흥이었다. 이것이 바로 베네치아 번영의 밑거름이 된 것이다.

공작궁에는 감옥도 있는데 이 감옥에 가려면 ‘한숨의 다리’를 건너야 한다. 한번 건너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한때 이 감옥에 카사노바도 갇힌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세기의 바람둥이답게 그는 자신을 사모했던 여인들의 도움으로 이 철통같은 감옥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으며 그 생생한 모험담을 책으로 출판하기까지 했다.
 

베니치아, 낭만과 자유의 도시
 
 
#풍경 하나

해가 저물어 석양이 바다를 붉게 물들이자 베네치아의 기차역 광장에 모여 있던 젊은이들이 하나 둘씩 침낭을 펴서 잘 준비를 했다. 그들은 베네치아를 방문한 전 세계의 관광객들이다. 해가 바다 속으로 완전히 잠수하자 여행객들은 광장이 침실인양 하나 둘씩 침낭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들은 그날 밤을 거기서 그렇게 보내는가 보다. 하늘에는 별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고, 10m도 안 떨어진 곳에서는 바닷물이 철썩거렸다. 가로수처럼 빼곡히 들어선 오래된 건물들이 쏟아내는 불빛은 베네치아의 밤을 더욱 화려하게 장식했다.

어느 해이던가, 한여름의 저녁 무렵, 나는 베네치아의 역 광장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수많은 여행객들을 목격했다. 비록 돈을 절약하기 위하여 호텔에 들어가지 못하고 노숙을 해야 하는 젊은이들이었지만 나는 그들이 정녕 자유를 만끽하고 있음을 그들의 표정에서 느낄 수 있었다. 때론 하늘 아래 맨땅이 일류 호텔보다 아늑할 수도, 또한 화려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 때 베네치아에서 보았다.

#풍경 둘

베네치아를 여행하다 보면 곤돌라를 타고 즐거워하는 여행객들을 흔히 보게 된다. 배의 앞 뒤가 아름답게 장식된 검은 색의 곤돌라는 손님이 앉는 선체에 붉은 융단을 깔아서 고급스러움을 더해준다. 타는 순간 귀족이 된 듯 착각하게 만든 배라는 생각이 든다. 곤돌라는 베네치아가 자랑하는 가장 전통적인 관광 상품이다.

나는 베네치아를 거의 매년 방문했지만 정작 곤돌라를 타본 것은 내가 인솔해서 갔던 2년 전의 단체 여행에서였다. 그동안 곤돌라를 타고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우리 팀은 세 대의 곤돌라에 나누어 탔고 그 중 배 한대에는 가수를 초대했다. 곤돌라를 타면서 베네치아 가수가 뽑아 대는 노래를 감상하는 일이야말로 꿈에 그리던 장면이었다.

가수의 목소리는 우렁찼고 아름다웠지만 그가 관광객을 상대로 평생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왠지 맘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무척 감탄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사공의 노 젓는 솜씨였다. 곤돌라는 큰 물길만 다니는 것이 아니라 좁은 골목길도 다녀야 하고, 또 심하게 방향을 틀기도 해야 한다. 내가 탄 곤돌라의 사공은 그 좁은 길을 제집 드나들듯 빠르게 가르지를 뿐만 아니라 코너를 돌 때에는 발로 힘차게 건물을 차면서 방향을 트는 모습이 달인의 행위 그 자체요, 무척 아름다워 보였다.

“언제부터 곤돌라 사공을 했나요?”

“400년 전부터입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또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우리 집안은 곤돌라를 젓는 사공의 집안이었답니다.”

바닷바람과 태양에 까맣게 그을린 그는 잘 생긴 이탈리아 젊은이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도 여생의 대부분을 사공으로 살겠지. 베네치아의 예술도 전통도 이런 대물림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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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작은 예술도시’ 만토바

이탈리아의 ‘작은 예술도시’ 만토바 국내외 여행정보 2008. 10. 14. 14:10

이탈리아의 ‘작은 예술도시’ 만토바 
 




 
만토바를 아느냐고 물으면 고개를 갸웃하겠지만,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를 아느냐고 물으면 많은 분들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렇다.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를 보면 궁정의 넓은 홀에서 화려한 무도회가 펼쳐지는데 그곳이 바로 천하의 바람둥이 만토바 공작이 살던 공작궁이자, 이번주부터 소개할 예술산책의 무대다.

만토바의 공작궁은 방만 500개가 넘는 거대한 궁정이지만 정작 이곳이 중요한 이유는 규모 때문이 아니라 그곳을 장식하고 있는 예술품 때문이다. 이곳에는 많은 예술품이 산재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르네상스 시대 안드레아 만테냐가 그린 벽화가 유명하다. 공작궁에 그려진 이 화가의 작품들은 서양미술사 교과서에서 빠짐없이 다뤄지고 있는 것이자, 15세기를 대표하는 최고의 걸작이다. 인구 5만명도 채 안되는 소도시에 불과한 만토바가 오늘날 세계적인 예술도시로 주목받을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만테냐와 같은 예술가 덕이다.

만토바는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디아 평원에 위치한 작은 도시다. 주변에 페라라, 베로나를 비롯한 도시들이 있는데 모두 역사 여행의 필수코스이지만 아직은 우리나라에 자세히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다.

이탈리아 여행의 진수는 이들 소도시에서 만끽할 수 있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소장 예술품의 수준은 피렌체, 로마, 밀라노와 같은 대도시에 못지않으며, 한때 그 지역을 통치했던 영주들의 화려한 궁정을 볼 수 있다.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작은 도시가 세계적인 예술품으로 가득한 것, 이것이 이탈리아의 저력이다.

이탈리아가 통일을 이루어 단일 국가로 탄생한 것은 불과 1870년의 일이었으며, 그 이전에는 각 지역을 특정 가문의 군주가 통치하는 철저한 지방분권 군주 체제였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다 보면 도시마다 독창적인 느낌과 색채가 강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오랜 지방분권의 전통에 기인한다.

이들 중 소도시들이 오늘날의 모습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세속 군주들이 통치를 시작한 시기와 때를 같이하며 대략 14세기부터 시작하여 15~16세기, 즉 르네상스 시대에 전성기를 누렸다. 군주들은 앞 다투어 궁정을 지었고, 궁정이 완공되면 당대 최고의 미술가들을 초빙하여 장식케 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밀라노의 궁정에 초대되어 그곳에서 18년이나 살면서 한 일도 알고 보면 군주를 위해 봉사하는 일이었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틴 성당에서 불후의 명작을 남긴 것도 결국 당대 최고의 권력자였던 교황의 예술적 야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권력자의 야망과 예술가의 천재성이 만나서 폭발하면서 당대 최고의 걸작들이 줄줄이 탄생한 것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군주들의 예술정책은 동시대 프랑스, 영국, 스페인으로 전해져 유럽 전역에 예술 후원 정책의 전통을 세우게 되었다. 이탈리아는 이 분야에 있어 유럽에서 가장 앞서간 선구자였다. 기왕에 군주, 정치가들이 권력을 잡고, 통치할 바에야 예술에 눈을 떠서 예술가들을 발굴하고 그들로 하여금 걸작들을 남기게 한다면 후손들에게는 그보다 더한 선물은 없으리.
 

르네상스 미술의 보석 ‘신혼의 방’
 
 
회화란 화가에게는 개인의 창작물이요, 관람자에게는 감상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 같은 개념이 탄생된 것은 19세기 이후의 일이고, 고대 이래 수천년 동안 그림은 기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무엇보다도 전달 기능이었다. 시대가 달라지면서 그림의 역할도 달라졌다.

고대 로마시대에 그림은 황제를 신성화하고, 황제의 권력을 백성들에게 알리는 선전 도구였다. 중세로 접어들면서 미술을 가장 잘 활용한 곳은 교회였다. 교회의 벽은 벽화나 모자이크로 가득 채워졌는데 그 내용은 성서 혹은 성인들의 일화였다. 그림은 글을 모르는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전달하는 가장 중요한 매체였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미술은 그것을 활용하는 주체가 달라지면서 기능도 달라진다.

만토바의 공작궁(Palazzo Ducale)에서는 르네상스 시대 미술의 기능을 볼 수 있다. 그곳에는 수백 개의 크고 작은 방들이 있는데 곳곳에 미술품이 없는 곳이 없다. 그러나 이들 방 중에서 단연 빛나는 보석과 같은 곳이 있으니 일명 ‘신혼의 방’이 그곳이다.

이 방은 작품 보호를 위해 입장객의 수와 관람시간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을 만큼 작품 보존에 신경을 쓰는 곳이다.

신혼의 방이란 이름은 후대에 붙여진 별명이고 이 방은 원래 공작의 접견실이었다고 한다. 벽과 천장이 프레스코 벽화로 장식되었는데 르네상스 최고의 거장 안드레아 만테냐의 작품이다.

벽화는 곤자가 가문 사람들과 궁정의 신하들을 그리고 있다. 한쪽 벽에는 루도비코 곤자가와 그의 부인 바르바라, 딸, 시녀, 그리고 신하들(사진)이 있다. 공작 내외는 의자에 앉아 있고 주변 인물들은 서 있는 모습인데, 얼굴 생김새가 각자 다른 것으로 보아 실존 인물들을 그린 것이 분명하다.

이들 중에서 눈에 띄는 사람이 있는데 손에 편지를 쥐고 앉아서 한 참모로부터 귀엣말을 듣고 있는 이 사람이 바로 이 성의 주인 루도비코 곤자가 공작이다.

옆 벽에는 공작이 여행을 떠나던 중 갓 추기경이 된 아들 프란체스코와 길에서 만나고 있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그러니까 한쪽 벽에는 공작과 그의 주변 인물들을, 그 옆 벽에는 통치자와 후계자를 그려 놓음으로써 가문의 주요 인물들과 향후 후계자까지 모두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림의 배경 역시 의도적으로 연출한 것으로서 평화로운 풍경은 공작의 통치 지역이 그림에서처럼 평화로움을 보여주려 함이다.

접견실에서 이 그림을 본 방문객들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라 할 놀라운 인물 묘사 기법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며, 자랑스럽게 작품 앞에 서서 사람들에게 친히 그림을 설명해주었을 공작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르네상스 시대의 군주들은 화가의 손을 빌려서 자신과 가문의 영광을 세상에 알렸다. 당시의 그림은 오늘날의 신문이나 TV와 흡사한 전달매체였다.

매체란 잘 활용하는 사람이 이익을 보게 마련이다. 오늘날에는 대중매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정치인의 이미지 메이킹이 과거에는 미술을 통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니 미술은 전략이자 투자였다.
 

줄리오 로마노, 스승 라파엘 넘어서
 
 
만토바가 미술사에서 또 한번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은 1500년대 초반이다.

당시 만토바를 통치한 사람은 페데리코 곤자가(Federico Gonzaga) 백작이었다. 페데리코의 어머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티치아노가 초상화를 그려주었던 그 유명한 이사벨라 데스테로서 예술에 대한 후원과 안목으로 인해 르네상스 여인을 이야기 할 때 빠짐없이 등장한다. 이런 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들 이었으니 예술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음은 당연지사다.

페데리코는 열 살이 되던 1510년부터 3년 동안 정치적 이유로 인해 교황청에서 인질생활을 하게 되는데 말이 인질이지 실상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손님으로 지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이 시기는 로마 교황청 역사상 전대미문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한쪽에서는 미켈란젤로가 시스틴 예배당에 천장화를 그리고 있었고, 다른 쪽 방에서는 라파엘로가 벽화를 그리고 있었다. 타지의 어린 소년은 거장들의 손으로 예술이 탄생되는 현장을 똑똑히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10년 후 페데리코는 자신이 로마에서 체류하던 중 인연을 맺었던 라파엘로의 수제자 줄리오 로마노(Giulio Romano)를 만토바로 초대한다. 당시 라파엘로는 이미 사망했고 그의 제자들은 유럽각지로 흩어졌다. 로마노를 초대해놓고 페데리코 백작은 10년 전 교황청의 상황을 재현하고자 하는 야망에 밤잠을 설쳤다.

줄리오 로마노는 만토바 궁의 예술 총감독이 되었고, 대표적인 작품으로 테궁(Palazzo del Te), 일명 ‘차궁’을 설계하여 지었다. 원래 이 궁이 있던 곳은 곤자가 가문이 자랑하는 혈통있는 준마들의 마구간이 있었던 곳이었다.

‘차궁’은 곤자가 사람들이 쉬러 오거나 식사와 향연을 즐기던 일종의 별장이었는데 ‘말의 방’, ‘아모르와 프시케의 방’, ‘바람의 방’, ‘거인의 방’(사진·줄리오 로마노 작, 부분·1530~1533년) 등 방의 벽화에 따라 이름을 붙인 여러 개의 방들이 있다. 그 중에서 ‘아모르와 프시케의 방’은 포르노를 연상시킬 정도로 남녀 신들이 진한 애정행각을 벌이는 장면으로 가득 차 있다.

보는 이에게 시각적 충격을 주는 또 하나의 방이 있는데 ‘거인의 방’이 그곳이다. 그림의 주제는 노한 제우스가 하늘에서 벼락을 치는 바람에 거역한 지상의 거인들이 무너진 하늘의 건축더미에 깔리는 아우성 장면을 그린 것인데 해괴한 모습의 거인들이 서로 뒤섞여서 아수라장이 된 모습은 가히 종말을 연상케 한다.

이 그림을 통해 줄리오 로마노는 더 이상 라파엘로의 제자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 낸 선구자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여기서 로마노는 스승이 지존의 경지로 올려놓은 비례, 균형, 절제, 고요, 아름다움으로 대변되는 르네상스 회화의 개념을 파괴하고 새로운 회화를 탄생시켰다.

피카소는 회화를 파괴의 연속이라 했다. 당대 최고의 화가를 스승으로 두었지만 그 안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 냈으니 줄리오 로마노는 진정 대가가 아닌가?

예술의 도시 로마를 재현하고자 했던 페데리코 백작의 꿈은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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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의 마지막 수도 라벤나

로마제국의 마지막 수도 라벤나 국내외 여행정보 2008. 10. 14. 14:06
 로마제국의 마지막 수도 라벤나 




 
 
라벤나는 가히 운명의 도시라 부를 만 하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는 생소한 이 도시가 로마 제국의 마지막 수도라는 운명을 타고 났기 때문이다. 부자가 망해도 3년을 먹고 산다고 했는데, 라벤나는 한때 지구의 절반을 지배했던 로마 제국의 수도였으니, 비록 추락의 일로에 놓이기는 했으나 제국이 남긴 문명의 흔적은 찬란했다.

서양사에서는 보통 서로마 제국의 멸망(서기 476년)과 함께 고대가 막을 내리고 중세가 시작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라벤나는 로마제국이 남긴 고대문명의 마지막 흔적과 중세의 시작을 알리는 유적을 볼 수 있는 곳이기에 역사의 경계 도시라 할 수 있다.

라벤나라는 작은 마을이 시골티를 벗고 로마제국 수도로서의 위용을 뽐낼 수 있게 된 것은 갈라 플라치디아라는 여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여인은 오노리우스 황제의 누이였는데 423년 오노리우스가 사망하자 대를 이은 그녀의 어린 아들 발렌티니아누스를 대신하여 섭정을 했으며 통치 기간에 문학과 예술을 전폭적으로 지지함으로써 이탈리아의 보물 목록을 풍요롭게 하는데 일조했다.

그녀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으로 갈라 플라치디아 무덤이 있다. 이 무덤은 내부가 온통 모자이크로 장식되었으며 라벤나가 자랑하는 모자이크 건축물 제1호이다. 모자이크란 엄지 손톱만한 크기의 다양한 색상의 유리나 돌을 벽에 일일이 붙여서 장식하는 회화 기법을 가리키며, 기원전 3세기 정도 로마제국시대에 사용되기 시작했으나 그것을 최고의 예술 경지로 끌어올린 곳은 바로 이곳 라벤나에서였다. 현재 라벤나에는 아름답고, 보존상태가 완벽하며, 가장 역사적 가치가 높은 모자이크 작품들이 남아 있다.

그 중의 백미가 갈라 플라치디아 무덤이다. 나는 이 무덤을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이라 부르고 싶다. 그것은 가로 세로의 길이가 같은 십자가 모양으로서 외부는 붉은 벽돌로 아담하게 지어졌으나 내부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탄성이 절로 나온다. 고흐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별들 가득한 청색으로 빚어진 모자이크는 천상의 세계를 보여주려는 듯 무덤의 천장을 덮고 있는데, 제작 된 지 1500년이 넘도록 손상 없이 완벽하게 보존이 되어 있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로마제국은 그리스도 탄생 이후 300년 넘게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했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것은 380년 이었으며 이 때부터 서구의 정치, 사회, 문화를 비롯한 모든 영역은 그리스도교 없이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지어진 갈라 플라치디아의 무덤은 로마제국의 통치자의 무덤이 그리스도교를 상징하는 십자가 모양으로 설계되었으며, 그 내부가 그리스도교를 표현한 그림들로 장식되었다는 점에서 로마제국의 그리스도교 수용상황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다.

갈라 플라치디아의 무덤은 멸망의 기로에서도 예술적이기를 포기하지 않은 로마인들의 모습을 증언해준다. 

 ‘중세미술의 뿌리’ 라벤나 교회들
세계 最古모자이크 등 ‘성서 그림으로 보는 듯’

 
이탈리아의 동쪽에 위치한 바다를 아드리아해라 부른다. 아드리아 해안에 위치한 대표적인 도시로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베네치아가 있지만 그보다 앞서 형성된 도시가 있으니 라벤나가 그곳이다. 라벤나는 지리적 위치로 인해 로마제국의 마지막 수도가 되었고, 이어서 중세를 여는 운명에 놓였다.

로마제국은 이탈리아인들이 그토록 우습게 여기며 야만인이라 비하했던 이민족에 의해 멸망당했다. 로마제국을 멸망시킨 이민족의 왕은 고트족의 테오도리코였는데 이들과 함께 고대(古代)는 막을 내리고 중세(中世)가 열렸다. 그들은 비록 이민족이긴 했으나 앞선 로마제국으로부터 위대한 건축법을 이어받았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를 계승했다. 과거 청산이 아니라 과거 계승인 셈이다.

서구의 고대 세계를 로마제국이라는 거대한 세력이 통치했다면 그에 버금가는 통치권을 이어받은 곳이 바로 중세의 교회였다. 로마제국의 계급에 의한 피라미드식 통치 방식은 고스란히 교회로 옮아갔다. 실제로 가톨릭 교회는 오늘날까지 로마 교황청 아래 각 나라별로 교구, 본당 등이 세포 조직처럼 뻗어 있어서 작은 지역에까지 교황청의 개입이 가능하게 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로마제국의 통치제도와 유사하다.

중세 최초의 왕이라 할 수 있는 고트족의 왕 테오도리크가 세운 성 아폴리나레 누오보 교회가 있다. 라벤나에는 성 아폴리나레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가 두 곳이 있다. 하나는 성 아폴리나레 인 클라세이고 다른 하나는 성 아폴리나레 누오보 교회다. 두 곳 모두 6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중세의 교회다. 이 두 교회는 구조와 분위기가 마치 쌍둥이 건물을 보는 듯 흡사하며, 6세기에 제작된 모자이크가 온전히 남아있어서 중세가 첫 발을 내딛던 시절의 예술 수준을 짐작케 한다. 두 곳 모두 소박하고 간결한 가운데 1500년 전 건축물이 주는 기품을 느낄 수 있고, 무엇보다도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모자이크 작품의 원조를 볼 수 있다.

아폴리나레 누오보 성당에 들어가면 기둥이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데 기둥 위의 벽면이 온통 모자이크로 덮인 화려한 색채와 조우하게 된다. 한 쪽 벽에는 성인들의 모습이 일렬로 줄을 서 있고, 마주 보는 쪽에는 순결한 처녀들의 모습이 보이는데 마치 복제 인간처럼 비슷한 모습의 사람들이 열을 지어 서 있어서 인물 개개인이 주는 아름다움 보다는 전체가 주는 조화와 율동미를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 끝에는 아기 예수에게 예물을 바치는 동방박사의 모습도 보이는데 이들이 입은 의상은 당시의 패션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이들 모자이크 위쪽에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수난을 담은 모자이크 그림들이 있다. 가장 오래된 중세미술의 보석이자 후대의 그리스도교 미술의 뿌리이기에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이들 작품은 문맹자가 대부분이었던 당시 민중에게 그리스도교를 설교하는 훌륭한 시각매체이자 그림으로 읽는 성서나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고단한 삶을 위안받고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들도 저세상에서 구원받기를 열망했다. 서구의 중세 사회가 시작된 것이다.

정치는 순간, 예술은 영원
‘통치용’이었던 황제 모자이크 ‘명작’으로 남아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기억나는 것 중의 하나는 칠판 위 벽에 늘 태극기와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이 같이 걸려 있었다는 거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렸을 때 우리나라의 대통령과 박정희를 동의어로 생각했던 것 같다. 박정희가 아닌 다른 이름의 대통령이란 내겐 너무 생소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3학년 때인가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슬피 울던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함께 슬퍼했으며, 그 와중에도 그분이 아닌 다른 분이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어느새 나는 세뇌되어 있었던 것이다.

통치자의 사진을 학교에 걸어놓는 것은 사실은 계산된 정치적 선전이다. 이미지를 통한 통치자의 선전은 그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으며 대표적인 사례는 로마제국의 황제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재위기간 BC 30~AD 14년)는 이미지를 통한 정치적 선전 효과를 꿰뚫고 있었는지 자신의 모습을 청동조각으로 만들어서 로마 시내에만 80점 이상을 설치해놓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앞에서 숭배토록 했다.

이미지를 통한 통치술은 이후 정석처럼 되었으며 동로마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527~565년)도 예외가 아니었다. 운명의 땅 라벤나가 또 한번 새로운 운명을 맞은 것은 이 황제의 통치시절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잃었던 로마제국의 땅을 회복하는 정책을 썼는데 라벤나는 되찾아야 할 땅 제 1호였다.

그는 라벤나를 제국의 영토로 만든 후 그곳에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를 짓도록 명했다. 바로 성 비탈레 성당이다. 현재 이스탄불의 상징처럼 되어있는 성 소피아 사원 역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절에 건축된 것인데 그는 성 소피아 사원보다 규모는 작지만 거의 같은 구조로 성 비탈레 성당을 짓게 했다. 두 성당 모두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장식되었으나 소피아 사원은 16세기부터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면서 형상을 거부했던 이슬람교의 정책에 의해 그림이 대부분 파손된 반면, 라벤나의 교회에는 모자이크가 고스란히 남아있어서 6세기 동로마제국의 미술품을 감상할 수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교회의 제대 위쪽에 자신과 황후 테오도라가 각각 참모들을 동행하여 그리스도께 예물을 바치는 모습을 모자이크(사진)로 제작하게 했다. 자신은 빵이 담긴 바구니를 든 모습으로, 그리고 부인은 포도주잔을 들고 있는 모습인데 신이나 성인에게만 표시하는 후광까지 그려 넣게 했다.

이들 부부는 한번도 라벤나에 와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교회에서 가장 잘 보이는 부분에 자신의 모습을 보이게 함으로써 미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자신을 우러러보게 했다. 백성들에게 통치자의 이미지를 각인시킨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어렸을 때 교실에서 대통령의 사진을 보면서 받았던 것과 비슷한 효과가 아니었을까. 다만 그는 비록 정치적 선전이긴 했지만 너무도 아름다운 예술품을 통해 목적을 달성했다. 그래서 1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곳의 모자이크는 진귀한 비잔틴 양식의 대표적인 예술품으로서 전세계의 관광객을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는 순간이지만 예술은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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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희교수의 이탈리아 예술산책 - 우르비노 ‘공작궁 예술’ 탄성절로

고종희교수의 이탈리아 예술산책 - 우르비노 ‘공작궁 예술’ 탄성절로 국내외 여행정보 2008. 10. 14. 14:05

고종희교수의 이탈리아 예술산책 - 우르비노 ‘공작궁 예술’ 탄성절로 
 
 




이탈리아의 저력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은 도시로 인해 더욱 빛난다. 우리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소도시라도, 막상 가보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은 경우가 허다하다. 이탈리아는 전세계에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가장 많은 나라다.

그러나 정작 이탈리아 사람들은 세계문화유산이라는 것에 대해 별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듯하다. 나는 10년 넘게 이탈리아에서 살면서 교수님이나 동료들로부터 단 한번도 세계문화유산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우르비노라는 도시가 있다. 아주 작은 도시지만 역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우르비노가 유명한 이유는 그곳이 라파엘로와 브라만테의 고향이기 때문이지만 더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공작궁(사진) 때문이다.

나는 아시시에서 출발하여 굽이굽이 험한 산길을 마치 곡예하듯 조심스럽게 운전해서야 우르비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에는 우리나라의 태백산맥처럼 동서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산맥이 있는데 아펜니노 산맥이 그것이다. 우르비노에 가려면 이 험한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야 하는 것이다.

산의 정상을 지나 조금 달리자 꿈의 도시 우르비노의 공작궁이 그림처럼 눈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진으로 수없이 보아온 건축물이었다. 나는 궁을 직접 보는 순간 비로소 이 궁이 왜 깊은 산 속에 위치하고 있는지, 또한 왜 화려한 궁정의 모습보다는 방어적인 성채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렇게 예술은 때로 직접 가보고 나서야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공작궁을 짓게 한 사람은 르네상스 시대의 용병대장 페데리코 다 몬테 펠트로이다. 이 사람은 자신에게 돈을 지불하는 곳이 있다면 마다하지 않고 가서 대신 싸워주었던 용병대장이었다. 20년 동안 목숨을 담보로 해서 번 돈으로 그는 자신의 궁을 지었는데 용병대장답게 성채의 모양을 띄게 했다. 아름다우면서도 군사적 용도를 강조한 것인데 이 궁은 깊은 산속에 위치하고 있어 자연히 천연 요새가 됐다. 누가 이 작은 도시국가를 정복하기 위해 그 험한 산을 넘으려 들겠는가? 그야말로 용병대장 출신의 군주다운 발상이었다.

페데리코는 전형적인 르네상스 시대의 군주였다.

그는 이 작은 도시의 궁을 장식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미술가들을 초청했다.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멀리 네델란드의 화가도 초청되었다. 화가, 건축가, 공예가, 조각가를 비롯해 각 장르의 미술가들이 이곳에서 자신들의 재능을 발휘했다. 궁 안에 있는 스투디올로라 불리는 서재는 르네상스 군주의 지적, 예술적 수준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책 수집광이었던 군주가 애써 수집한 귀한 필사본이 1000권이 넘게 소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예술을 모르는 군주는 이탈리아 군주가 아니요, 더구나 르네상스 시대의 군주는 될 수 없었다. 이탈리아가 세계문화유산을 최다 보유한 나라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렇듯 군인조차도 예술 없이 인생을 생각할 수 없었던 조상덕이다.
 

르네상스문명은 ‘군주-화가’ 합작품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명은 군주와 예술가가 만나서 만들어냈다. 오늘날 관광객들이 산 속의 작은 도시 우르비노를 찾는 이유도 그곳에 예술이 있기 때문이다. 한 때 궁을 호령했던 군주는 겨우 몇 십 년을 살다 갔지만 예술은 남아서 수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군주의 명성을 빛내주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는 통일된 국가가 아니라 특정 가문에서 크고 작은 도시를 통치하던 군주제였다. 밀라노 공국처럼 규모가 큰 지역을 통치한 스포르차 가문이 있었는가 하면 우르비노의 페데리코 다 몬테 펠트로처럼 작은 도시를 통치한 군주도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바로 이 같은 정치적 상황에서 탄생되었다. 이들 군주들이 살던 궁은 오늘날 이탈리아의 주요 관광지가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군주들은 예술의 효능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훌륭한 예술품으로 궁을 장식하고는, 중요한 손님이 왔을 때 그것을 자랑하는 것은 군주가 누리는 기쁨 중의 하나였다. 물론 그것은 단순한 자랑거리를 넘어서 외교적 효과도 발생시켰다. 비록 작은 나라라 하더라도 훌륭한 예술품은 무기 이상으로 군주의 위엄과 품위를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우르비노의 군주 페데리코 다 몬테 펠트로는 총 재산을 쏟아 부어 궁을 짓고 예술가들을 초대하여 장식토록 했는데,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1420~1492년)라는 당대 최고의 화가도 초대되었다. 오늘날 우르비노 궁이 미술사에서 언급되고 있고, 몬테 펠트로라는 사람이 전형적인 예술 후원자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이 화가 덕이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이 궁에 머물면서 한 일은 몬테 펠트로와 그의 아내 그리고 가족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일이었다.

오늘날 많은 정치가 대중매체를 통해 이미지를 관리하듯이 당시의 초상화는 군주의 이미지를 홍보할 수 있는 효과적인 시각매체였다. 이 때 군주의 위용이 느껴지도록 실물을 이상화하는 것은 화가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오늘날 포토숍으로 실물보다 멋진 모습의 사진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이치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그린 페데리코의 초상화는 빨간 모자에 빨간 옷을 입고 있으며 옆면을 보고 있는 모습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모델의 매부리 코다. 말 그대로 매의 부리를 닮은 매부리 코는 강인한 군주의 이미지에 제격이었다. 이 그림은 너무나 정교하여 모델의 점, 사마귀, 눈가의 잔주름까지 놓치지 않고 있다. 사진기로 찍더라도 이처럼 인상 깊은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란 쉽지 않을 듯하다. 이 작품은 유화로 그려졌으며 이탈리아의 유화 작품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에 속한다. 유화는 이처럼 사실적인 표현을 가능케 한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발명품이었다.

이 한점의 그림으로 인하여, 화가는 오늘날까지 당대 최고의 화가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모델인 군주는 자신의 모습을 수세기가 지나서까지 생생하게 남기게 되었다. 화가도 군주도 모두 떠나고 없지만 예술이 남아서 그들의 이름을 빛내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술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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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희교수의 이탈리아 예술산책 - 밀라노 여인들의 패션은 예술

고종희교수의 이탈리아 예술산책 - 밀라노 여인들의 패션은 예술 국내외 여행정보 2008. 10. 14. 14:04
고종희교수의 이탈리아 예술산책 - 밀라노 여인들의 패션은 예술 
 




 
저녁 7시20분, 로마에서 밀라노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는데 손님 대부분이 남자였다. 아마도 로마에서 비즈니스를 마치고 밀라노로 돌아가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데 그들 대부분이 정장을 하고 있었다. 한여름에 재킷까지 갖춰 입다니, 복장에 대한 정성이 대단하다. 그러나 정작 관심이 가는 이유는 그들의 옷맵시가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자르르 흘러내리는 천에 색상 또한 자연스러우면서도 조금씩 다 다르다. 패션의 도시 밀라노 신사들의 모습은 이렇게 밀라노 행 비행기 안에서부터 만날 수 있다.

하늘을 찌를 듯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두오모 성당은 밀라노 여인들의 화려한 모습과 참으로 잘 어울린다. 두오모 근처 카페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밀라노 여인들을 보고 있노라면 쇼윈도의 마네킹 못지않은 구경거리다.

그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여름에는 대부분 어깨를 드러내는 노출이 많은 옷을 입고 다닌다. 그래도 뭐라는 사람이 없나보다. 색상은 베네통과 같은 현란한 색상부터 자연스러운 색상에 이르기까지 어떤 스타일도 소화해 내는 멋쟁이들이다. 걸음걸이는 어떠한가? 나를 제발 봐달라는 듯, 패션쇼의 모델들처럼 그녀들은 거만하고 우아하게 걷는다. 그렇다고 ‘이탈리아산(made in italy)’ 옷이 비싸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우리나라 백화점의 절반 가격이면 웬만큼 좋은 옷을 살 수 있다.

이탈리아의 거리를 걷다 보면 쇼핑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사고 싶은 게 너무 많아질 것이다. 옷가게, 구두가게는 물론 심지어 과일가게조차 그들의 디스플레이 기술은 예술이다. 물건의 질과 디자인도 좋지만 그것을 진열해놓는 솜씨가 여간 좋은 것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상품들을 최고의 가치로 올려놓을 줄 안다. 삶의 모든 부분에 디자인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패션만 중요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홈패션 또한 옷만큼이나 정성을 들인다. 주부들은 가정 일을 마치 시간제 파출부처럼 열심히 한다. 손이 고운 주부를 만나기가 쉽지 않을 정도다. 특히 이탈리아의 가정집에서는 더러운 유리창을 보기가 쉽지 않다. 유리창은 먼지는커녕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반들반들하다.

그들은 식탁을 몹시 사랑한다. 음식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식탁 그 자체를 사랑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식사를 할 때마다 늘 식탁보를 깔 수 있겠는가. 매끼 깨끗한 식탁보를 깐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정성이 있어야 가능한가? 아니 그것은 정성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삶의 일부로 자리잡았을 때에만 가능할 것 같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은 아니다. 그들의 조상들은 이미 500년 전에 유럽에서 처음으로 식탁보를 까는 식사 매너를 도입했다.

또한 15세기 만토바의 여걸 이사벨라 데스테는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다이어트를 했으며, 옷감 살 돈이 떨어지자 커튼을 떼어서 옷을 만들어 입었다고 한다. 당시 프랑스의 왕비는 이 여인이 새 옷을 만들 때마다 자신의 옷도 똑같이 만들어서 보내도록 했다고 하니 그 때도 지금처럼 이탈리아 패션은 알아줬나 보다. 이탈리아인들의 패션에 대한 감각과 열정에도 그들의 조상은 한몫을 하고 있는 듯하다.
 

도시와 역사를 바꾼 ‘최후의 만찬’
 
 
명작 한점이 도시를 바꾸고 역사를 바꾼다. ‘최후의 만찬’이 그렇다.

밀라노의 예술품 중에 으뜸은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일 것이다. 이 작품은 22년간의 복원을 마치고 99년도부터 일반인에게 다시 공개되고 있는데 작품의 손상을 막기 위해 입장객 수를 극도로 제한하고 있으며 관람시간도 15분이다. 입장하기 위해서는 예약을 필히 해야 한다. 당연히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갔다가 허탈하게 돌아와야 하는 불상사를 막자.

이 그림이 그려진 곳은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지에 수도원의 부속 식당이다. 이 수도원은 로마의 베드로 성당을 설계한 르네상스 최고의 건축가 브라만테가 설계했다. 하지만 그림에 가려져 건축에 대한 언급은 희미하기만 하니 그림 한 점이 대건축가의 건축을 압도한 셈이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왜 그토록 유명해졌는가?

안내원의 안내를 받아 작품이 있는 방에 들어가면 한쪽 벽을 메우고 있는 ‘최후의 만찬’과 만나게 될 것이다. 너무나 많이 보아왔기에 익숙한 그림이지만 눈앞에서 넘실대는 생동감 앞에서 관람자는 신선함과 장중함을 느낄 것이다.

그림의 구도를 보면 중앙에 예수님이 있고 양쪽으로 3명씩 그룹을 지은 12명의 제자가 있다.

“너희들 중에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

“오, 선생님이시여, 어찌 그리 두려운 말씀을 하시나이까?”

“설마 그게 저는 아니겠지요?” “그게 누굴까?”

다빈치는 이렇듯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성찬을 하면서 죽음을 예언하자 제자들이 놀라는 반응을 그렸다.

당시 수도원의 식당에는 최후의 만찬이 흔히 그려졌다. 수도사들이 식사 중에 벽에 그려진 그림을 보면서 성찬의 의미를 묵상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주제 면에서는 다빈치 작품이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하지만 양식적 측면에서는 혁신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우선 원근법에 대한 완벽한 표현이 그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수학적인 원근법을 통해 12명의 제자들이 벽 저쪽 편에서 진짜로 식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이들 열두 제자의 모습은 또한 각자의 성격에 맞는 관상으로 그려졌다고 한다. 성미가 급한 베드로의 얼굴은 그 부류 사람의 두개골을 연구하여 그렸다는 식이다. 이를 위해 그는 시체를 30구 이상이나 해부했다고 하니 과학으로 그린 회화인 셈이다.

다빈치는 구상이 떠오르지 않으면 몇날 며칠을 비계 위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이를 보다 못한 수도원장이 주문자이자 밀라노의 군주였던 루도비토 일 모로에게 이 사실을 일러바쳤다. 그러자 레오나르도 왈, “12제자의 얼굴 중 아직 떠오르지 않은 것이 스승을 팔아먹은 유다의 얼굴이다. 너무나 사악하여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았는데 수도원장 당신의 얼굴을 유다로 그릴까 생각중이다.” 기겁을 한 수도원장은 이후로는 참견을 삼가하고 수도원 텃밭 가꾸는 일에만 몰두했다고 한다.

이 일화가 말해주듯이 ‘최후의 만찬’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의미는 ‘회화란 정신의 산물’이라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역사상 처음으로 작가 스스로 주장하고 증명해 보였다는 데에 있다.
 

밀라노 ‘두오모 성당’ 길이 158m 장관
5세기 걸쳐 공사··· 세계최대 고딕성당 명성

 
밀라노를 방문한 이들이 가장 먼저 찾는 곳은 두오모 성당이다. 두오모(duomo)란 말 자체가 대성당을 의미하기 때문에 밀라노의 두오모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밀라노의 두오모는 처음 보는 순간 그 높이와 화려함에 아찔함을 느낀다. 수백 개의 뾰족 석탑들이 레이스로 수놓은 것보다 더 정교하게 장식되어 성당의 외벽을 뒤덮고 있는데 고딕성당으로서는 세계 최대요, 이탈리아에서는 로마의 베드로 성당 다음가는 규모란다. “역시 밀라노” 라는 찬사를 받아내는 밀라노의 명물 제 1호다.

내부는 거대한 기둥 숲이라 할 만한데 기둥들의 높이와 굵기로 인해 보는 이를 두 번 놀라게 한다. 길이 158m, 너비 93m, 높이 60m의 공간을 대형 기둥들이 가득 메우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이와는 대조적으로 벽은 얇은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되었다. 천상을 재현한 듯한 신비스러운 색상이 빛과 함께 교회 내부를 비추는 광경은 감동적이다. 육중한 건축물 무게를 스테인드글라스라는 색유리로 대신할 수 있게 된 것은 건축 공법 역사상 가장 기록에 남을 혁명이었으며, 고딕 건축의 승리였다.

이 성당은 그 규모 외에도 건설 기간에 있어서 세계 최고를 기록한다. 1387년 시공에 들어가 19세기까지 공사를 계속했으니 5세기 간의 공사요, 밀라노의 근대사와 역사를 같이 한 셈이다. 성당 건축에 참여한 건축가, 조각가, 화가, 유리화가, 공예가들의 이름을 일일이 나열할 수는 없다. 그들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서 초청된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었다. 밀라노 역사에 등장하는 정치인, 종교인, 예술인 또한 성당의 건축사에서 각기 한몫을 했다. 1380년대에 대성당을 짓도록 첫 주문을 내린 당시 밀라노의 군주 장 갈레오초 비스콘티, 레오나르도의 후원자이기도 했던 루도비코 일 모로 공작, 건축가 브라만테, 추기경이자 성인(聖人)에 오른 카를로 보로메오, 나폴레옹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다.

밀라노 두오모는 대표적인 고딕 양식이다. 사실 이탈리아에는 이 성당 외에는 고딕성당이라고 내놓을 만한 것이 별로 없다. 시에나와 피렌체의 대성당이 그나마 체면을 살리는 정도다. 서양의 건축사에서 고대 로마 이래 주도권을 잃지 않았던 이탈리아지만 고딕건축만큼은 프랑스에서 탄생하여 발전한 것으로 역사적 명성을 프랑스에 넘겨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대 규모의 고딕 성당은 밀라노에 있으니 규모로 오리지널리티를 압도한 경우라 하겠다.

두오모 앞에는 거대한 광장이 있고 그 옆에는 ‘갈레리아’라 불리는 명소가 있다. 개선문을 연상시키는 아치 정문과 함께 19세기 중반경에 만들어진 곳으로 거대한 유리 지붕으로 덮인 실내 거리다. 이곳에는 유서 깊은 카페, 서점, 음식점, 상점이 있는데 고급스럽고 격조 높은 밀라노의 쇼핑거리다. 아이쇼핑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는 곳이며, made in Italy 상품과 그들의 예술적인 디스플레이 수준을 볼 수 있다. 그 중에 내가 즐겨 찾는 서점도 있다. 미술사 전문 서점으로서 수십년 전에 출간된 서적도 보유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최고의 고급상가가 즐비한 명소 거리에 미술사 전문 서점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밀라노의 예술 수준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옛것을 지킨다” 보존정신에 감탄
 
 
이탈리아 밀라노의 중심가에 위치한 암브로시아나 미술관 앞, 때마침 벼룩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각종 우표, 버스표, 그림엽서, 동전, 포스터, 영화 티켓, 빛바랜 50년 전의 편지, 월트디즈니사에서 만든 각종 인형…. 옛 물건치고 없는 게 없는 듯했다. 내 눈에는 그저 곰팡내 나는 잡동사니로 보이건만, 뭐 그리 대단한지 사람들은 흥정을 하고 원하는 물건을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마니아들은 자신만의 특정 수집 품목이 있는 듯했는데 이를테면 특정 시기의 트럼프 혹은 동전을 집중적으로 모은다는 식이었다.

나도 관심을 보이며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한 상인이 흥미로운 것을 보여주겠다며 깊숙이 파묻혀 있던 화첩에서 뭔가를 꺼냈는데 그것은 1900년 초에 찍어낸 한국의 풍속도를 그린 카드였다. 모 식품회사에서 광고용으로 각 나라의 풍속도를 삽화로 그려 인쇄한 시리즈물이었는데, 상인이 내게 보여준 것은 초가를 배경으로 한 1900년 초 서울의 모습과 상투를 튼 어른들, 그리고 한복 입고 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 등을 담고 있었다.

우리의 조상과 서울의 옛 모습을 밀라노 한복판에서 만나게 되다니 감격스러웠다. 상인은 나를 ‘영양가 있는’ 손님으로 보았는지 기왕이면 일본 것과 중국 것도 보라며 또 다른 화첩을 꺼냈는데 역시 비슷한 시기에 발행된 카드였다.

나는 그때까지 골동품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살아왔으나 우리나라를 주제로 한 100년 전의 서양 카드를 차마 그대로 놓고 올 수 없어 큰 맘 먹고 그것들을 구입했다. 물론 가격도 일반인들이 큰 무리 없이 취미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액수였다.

이제 그것들은 나의 애장품이 되었다. ‘언젠가 너희들도 나잇값 할 날이 오겠지?’

유럽 사람들은 오래된 물건들을 버리지 않고 보관하는 습관이 있다. 많은 가정에서 자식이 갓 태어나 입었던 배냇저고리, 고조할머니 적부터 대를 물려 입었다는 유아 세례 옷, 아이들이 갖고 놀던 장난감 등을 보존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유서 깊은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예술품들도 결국은 보존 미학의 덕이다.

유학시절에 내 두 아이들을 친손자처럼 사랑해주며 키워주었던 한 이탈리아 할머니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외아들(1954년생)이 갖고 놀던 장난감을 보관하고 있다가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주었는데 정작 나는 그것들을 하나도 보관하지 못하고 모두 분실했다.

그것은 내가 저지른 중대한 실수 중의 하나다. 지금부터 20여년전, 철없는 동양의 젊은 새댁은 이탈리아 할머니의 소중한 애장품들을 아무 생각 없이 없애버린 것이다. 나는 그때 보존의 개념이 전혀 없었다.
 

‘암브로시아나 미술관’ 걸작들
 
 
세상에서 그림을 가장 잘 그린 화가는 누구일까? 나의 답은 라파엘로이다.

어쩌면 그리 우매한 질문이 있을 수 있을까? 세상에 그림을 잘 그린 화가가 어디 한두명이며, 또한 잘 그린다는 기준이 뭐냐고 물을 것이다. 당연한 말씀이다. 렘브란트도 있고, 반 고흐도 있고, 미켈란젤로도 있지만 화가로서의 최고봉은 단연 라파엘로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니 너무 탓하지 말기를 바란다.

어쨌든 객관적으로 볼 때 라파엘로만큼 회화에 있어서 수세기가 넘도록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 화가는 없었다. 라파엘로의 붓이 가는 곳에서 사물은 생명을 얻었다. 그저 평범한 여인네도 라파엘로의 붓을 빌리면 성모님으로 변신했다. 그의 작품을 도판으로 보면 그게 그것인 것 같고 별 매력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직접 미술관에 가서 그의 작품 앞에 서보라. 그의 작품은 캔버스라는 물체를 살아 숨쉬는 생명체로 변화시키며, 인간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깨우쳐준다.

로마의 바티칸에 가면 모든 관광객은 두개의 안내판을 따라 이동한다. 하나는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장화’이고 다른 하나는 ‘라파엘로의 방’이다. 라파엘로의 방은 모두 4개인데 그 중에서 가장 먼저 그린 방이 일명 서명의 방이라 불리는 그 유명한 ‘아테네의 학당’이 있는 곳이다.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벽화 ‘아테네 학당’이 아니라 그것의 밑그림, 즉 스케치이다.

나는 이 밑그림을 그동안 도판으로만 보아왔다. 그래서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것에 대해서 특별한 인상을 받지 못했다. 신문에 실린 사진을 보는 독자들도 같은 생각일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밀라노의 암브로시아나 미술관을 방문하여 이 스케치 앞에 서는 순간 충격에 휩싸였다. 그것은 한장의 종이 위에 그린 평범한 스케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티칸 벽화의 실제 크기와 똑같이 그린, 그러니까 수십장의 종이를 서로 연결하여 그 위에 스케치를 한, 원작보다 더 값진 밑그림이었다. 밑그림이라 하여 대충 그린 것이 아니고 인물 하나하나의 묘사가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아름답게 표현된 소묘작품이었다.

오, 라파엘로여 당신의 그림이 주는 편안함 뒤에는 뼈를 깎는 노력이 숨어있었군요. 라파엘로의 이 작품 외에도 암브로시아나 미술관에는 걸작이 많다. 그 중에서 카라바조의 ‘과일 바구니’, 레오나르도의 ‘음악가의 초상’은 놓쳐서는 안 될 명작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암브로시아나 미술관이 자랑하는 최고의 소장품은 일명 ‘아틀란틱 코덱스’라 불리는 수백점에 이르는 다빈치의 원작 스케치들이다.

물론 이 스케치들은 미술관 금고에 소중하게 보관돼 있으며 일반인이 볼 수 있는 것은 팩시밀리라 불리는 복제품이다. 이들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이름조차 잘 알지 못하는 이탈리아의 미술관들은 역사상 최고의 걸작들을 소장하고 있다. 이것이 이탈리아의 힘이다. 물론 암브로시아나 미술관은 이름없는 미술관이 아니다. 그것은 브레라 미술관과 더불어 밀라노가 자랑하는 유서 깊은 미술관이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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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희교수의 이탈리아 예술산책 - ‘붉은색 지붕으로 뒤덮인 도시’피렌체

고종희교수의 이탈리아 예술산책 - ‘붉은색 지붕으로 뒤덮인 도시’피렌체 국내외 여행정보 2008. 10. 14. 14:02
고종희교수의 이탈리아 예술산책 - ‘붉은색 지붕으로 뒤덮인 도시’피렌체
고딕양식 대성당은 돔 지름이 40m 달해 

 




피렌체의 중앙역에서 밖으로 나오자마자 대형 교회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역시 피렌체답게 대성당도 크군.” 내가 맨 처음 피렌체를 방문했을 때 했던 생각이다. 그러나 그곳은 대성당이 아니라 시내에 있는 많은 교회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피렌체에는 대성당을 중심으로 걸어서 20분 이내에 수많은 성당과 미술관들이 즐비해있다. 이탈리아 어느 도시를 가도 발에 채는 것이 미술관과 교회라지만 피렌체가 특별한 이유는 이들 교회와 미술관 대부분이 미술사상 가장 중요한 작품들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이 교회에서 5분쯤 걸으면 진짜 대성당이 나온다. 토스카나 최대의 웅장한 고딕 건축물이다. 대성당은 특히 거대한 돔 때문에 유명한데 그것은 피렌체의 상징이자 르네상스 건축을 새로 쓰게 한 브루넬레스키의 작품이다.

고딕 시대에 만들기 시작한 이 성당은 돔의 지름이 40m나 되는 바람에 기술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뻥 뚫린 상태로 남아 있었는데 브루넬레스키라는 건축가가 공법상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거대한 돔을 마침내 덮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성당 못지않게 중요한 곳이 있으니 바로 대성당의 부속 세례당과 종탑이다. 모두 대가들의 작품으로 만들어진 곳이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자.

그 유명한 우피치 미술관은 르네상스 회화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지만 1년 365일 언제 가더라도 티켓을 사는 데만 2시간 이상 줄을 서야 하는 단점이 있다. 시간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면 두 시간을 기다리는 대신에 우피치보다는 덜 알려졌으나 질에 있어서는 그에 못지않은 강 건너편의 피티 궁(Palazzo Pitti)으로 향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이 궁은 한 때 메디치가의 궁으로 쓰였는데 메디치가 사람들은 궁과 사무실이었던 우피치(영어의 office)를 연결하기 위해 그들만의 밀폐된 통로를 만들었다. 노출을 꺼린 메디치가 사람들이 신변 보호를 위해 생각해냈다는데 화려한 예술 뒤에 감추어진 정치적 잔혹함의 흔적이라 하겠다.

피티궁은 지금은 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는데 티치아노와 라파엘로의 대표적인 초상화들을 비롯하여 많은 회화 작품들과 공예품들이 있으니 우피치를 못 본 섭섭함 정도는 이곳에서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다. 이 궁의 내부는 당시 군주들이 살았던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볼 수 있도록 모든 방들을 공개하고 있다.

한때 피렌체를 호령했던 사람들의 내밀한 침실을 직접 볼 수 있으니 세월의 무상함은 여기서도 느껴진다. 각 방들은 지금은 비록 빛이 바랬지만 방주인에 걸맞은 색상의 벽지와 가구, 커튼으로 장식되어 있어서 실내 디자인에 대한 그들의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이 궁이 자랑하는 광활한 정원은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으로 대표되는 근대 유럽 정원의 원조라 한다.

피렌체 여행의 백미를 만끽하려거든 근처의 피에솔레라는 산골 마을을 방문하자. 이곳은 피렌체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드라이브를 하기 위해 즐겨 찾는 곳인데 특히 맛 좋은 피자집들이 있어서 값싸고 맛있는 피자를 즐길 수 있다. 이 산동네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붉은색 테라코타 지붕으로 뒤덮인 피렌체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해가 질 무렵 여기서 피렌체를 내려다보면 도시 전체가 노을에 물들며 거대한 붉은 꽃밭을 만들어내는 장관 앞에서 여행의 행복감에 빠질 것이다.
 

금기에 도전한 ‘르네상스의 도시’ 피렌체
 
 
피렌체에는 폰테 베키오라는 다리가 있다. 오래된 다리라는 뜻이다. 수백년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는 듯 그야말로 낡고 오래된 모습인데 이 다리의 양쪽 가에는 의외로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값비싼 보석을 파는 고급 금은방들이 즐비해있다. 옛것과 새것, 낡음과 귀함이 혼재해 있는 곳이다.

이 다리를 뒤로 하고 강을 따라 5분 쯤 걷다 보면 카르미네 성당이 나온다. 겉보기에 화려하지도 인상적이지도 않은 평범해 보이는 교회지만 바로 이 안에서 르네상스 회화가 시작되었다. 교회에 입장하는 것은 무료지만 예배당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입장료를 내야하며 관람하는 시간도 10분 이내로 제한되어 있다.

서양의 교회 내부에는 보통 카펠라라 불리는 작은 예배당(chapel)들이 있다. 무반주 합창을 아카펠라라고 부르는데 바로 교회 안에서 불렀던 성가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카펠라는 보통 교회에 기부를 많이 하는 가문의 소유가 되었다. 일단 카펠라를 소유하게 되면 그들은 앞다투어 화가와 조각가들을 초청하여 장식하게 했다. 교황 선출의 장소인 시스티나 예배당도 당시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미켈란젤로에게 천장화와 벽화를 주문해서 더욱 유명해졌다.

카르미네 성당 안에는 브랑카치라는 가문의 가족 예배당이 있었다. 가문의 수장인 필립포 브랑카치는 피렌체의 상인이자 정치인이었다. 그는 예배당의 벽화를 장식하기 위해 마솔리노라는 화가를 초빙했다. 당시 화가들은 혼자서 일을 다 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조수들을 거느리며 작업을 했는데 이 화가는 자신의 고향 후배인 마사초라는 어린 화가에게 일거리를 준다고 불렀다. 두 사람이 각각 그린 ‘아담과 하와’가 있는데 후배가 그린 그림이 바로 르네상스 회화의 탄생을 알리는 작품이 되었다.

선배의 그림은 중세의 전통을 고수한 전형적인 스타일이었지만, 후배의 작품은 지금까지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과감한 형태였다. 마사초는 태고적 인류의 첫 조상에게 일어난 비극을 마치 방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처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남자가 이렇게 엉엉 우는 모습을 보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신성한 교회 안에 외설에 가까운 남녀의 누드 그림을 허락한 것이 인상적이다.

나는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이런 누드가 우리나라의 교회 안에도 그려질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곤 하지만 아무래도 그건 불가능할 것 같다. 아무리 예술의 자유를 인정하는 현대라지만 교회는 여전히 장소에 합당한 그림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424년 피렌체의 한 교회에서 이 별로 합당하지 않은 그림을 허락한 덕에 르네상스 회화가 탄생했다.

르네상스는 금지된 것에 도전한 끼 많은 예술가들이 만들어 냈다. 이 작품을 그린 마사초를 시작으로 피렌체에서는 천재 예술가들이 봇물처럼 탄생했다. 보티첼리, 다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는 많은 예술가들 중의 일부일 뿐이다. 어떻게 한 도시에서 그 많은 예술가들이 동시대에 탄생할 수 있었을까?

그 이유야 여러가지겠지만 나는 그 공로를 예술후원자들에게 돌리고 싶다. 그들은 재능있는 예술가들을 발굴하고, 예술작품을 유치하는 것을 최고의 자부심으로 여겼으며, 작품 값을 지불하기 위해 아낌없이 지갑을 열었던 사람들이다.
 

피렌체 대성당의 명물 ‘청동문’ 반세기에 걸쳐 완성 ‘예술 극치’
 
 
피렌체 방문의 첫 코스는 단연 대성당이다. 대성당의 이름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즉 꽃의 성모 마리아라는 뜻이다. 이 성당은 예술의 도시 피렌체의 상징답게 규모는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과 밀라노의 대성당에 이어 이탈리아에서 세번째지만 소장 예술품의 중요도는 베드로 성당에 견줄 만하다.

피렌체 대성당은 조토의 종탑, 세례당 그리고 대성당 부속 박물관이 함께 어우러진 복합공간이다. 어느 곳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역사의 흔적들이다.

그 중 대성당 부속 박물관에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비롯하여 한 때 이 성당을 장식했던 르네상스 거장들의 조각, 회화, 금은 세공품들로 가득하다. 궂은 날씨와 공해로부터 작품을 보호하기 위해 원래 성당에 있던 작품들을 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 대성당을 비롯하여 건물 외벽에 보이는 조각들은 모두 모조품이며 진품은 이곳 박물관에서 감상할 수 있으니 평범한 여행을 거부하는 여행객이라면 방문을 권한다.

대성당과 마주한 곳에 성 요한 세례당이 있다. 흰색 대리석과 초록색 화강석이 어우러진 팔각의 얼룩무늬 건물이다. 과거 그리스도교 국가들은 세례의식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세례당을 독립 건물로 짓는 경우가 있었다. 대성당 입장은 무료이나 세례당 입장은 유료다. 걸작을 보려면 지갑을 열라는 그들만의 상술이다. 세례당에 들어가면 천장이 온통 ‘최후의 심판’을 그린 모자이크로 덮여 있는데 그것은 현존하는 중세 모자이크 중에서 단연 으뜸이다. 천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어도 원래의 찬란한 색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세례당 앞에 서 있노라면 관광 가이드들이 청동문 앞에서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이야기를 간추리면 이렇다. 1401년, 피렌체 시는 세례당의 청동문을 제작할 조각가를 뽑기 위해 공모전을 공포했다. 내로라하던 조각가들이 다 응모했는데 최종적으로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가 선정되었다.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던 심사위원들은 두 사람이 공동 작업을 하라고 지시했으나 브루넬레스키가 사양하는 바람에 기베르티 혼자서 청동문을 제작하게 되었다. 작품 제작을 포기한 브루넬레스키는 원근법이라 불리는 수학적 투시도법을 발명한 건축가로서 이후 대성당 돔을 완성하는 공모전에서 선정되어 지름 40m가 넘는 거대한 대성당 돔을 완성한 천재 건축가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 사람들은 좋은 작가를 선정하기 위해 공모전이라는 제도를 적절하게 운영했던 것이다.

기베르티가 청동문을 완성한 것은 작품제작에 착수한 지 23년이 지난 1424년이었다. 문 한 쌍을 만들기 위해 20년 이상이 소요되었다. 그로부터 1년 후 그는 이 세례당의 또 다른 청동문을 제작해달라는 주문을 맡았는데 그것이 바로 미켈란젤로가 그 아름다움에 반하여 별명을 붙여줬다는 ‘천국의 문’이다. 이 문을 만드느라 그는 또 다시 22년을 바쳤다. 기베르티는 천재 예술가의 반열에 서지는 못하였으나 청동문 2개를 완성하는 데 50년 가까운 세월을 바친 진정한 예술가였다. 그 느림의 미학 덕분에 오늘날까지 이 청동문은 관광 가이드들의 목청을 돋우게 하는 피렌체 대성당의 명물이 되고 있다.
 

‘피렌체 예술’ 뒤에는 메디치가문이…
 
 
메디치가(家) 없는 피렌체란 생각하기 어렵다. 피렌체가 역사상 빛나는 주역이 되었던 시기는 1400년쯤부터 1600년쯤까지 약 2세기 동안이다. 이 시기는 또한 메디치 가문의 영광의 시기와도 일치한다.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 역사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초였으며 은행업을 했던 이 가문이 교황청의 재정후원을 담당하게 되면서 일약 유럽의 갑부로 도약하게 되었다. 메디치가 은행은 이탈리아의 주요 도시는 물론이려니와 멀리 네델란드에까지 지점이 있었다고 한다.

메디치 가문 사람들 중에서 역사적 조명을 받은 첫 인물은 코시모 일 베키오이다. 그는 ‘피렌체의 국부(國父)’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로 당시 피렌체 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코시모는 무엇보다도 건축물 건립에 신경을 썼다. 성 로렌초 교회, 성 마르코 수도원, 메디치 궁(Palazzo Medici)이 대표작이다. 세 건물 모두 초기 르네상스 건축 양식을 대표하며 오늘날에는 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 중에서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한 성 로렌초 교회는 최초의 르네상스 식 교회다. 이 교회는 특히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데 이유는 교회의 광장을 중심으로 피렌체에서 가장 큰 시장이 서기 때문이다. 피렌체의 특산품이라 할 수 있는 각종 가죽제품과 실크 제품을 여기서는 비교적 싼 값으로 살 수 있으며, 수다스러운 이탈리아 상인들과 흥정을 하는 재미를 맛볼 수도 있다. 성 로렌초 교회는 메디치가의 가족 교회이다. 한 가문의 교회라 하기엔 그 규모가 대단히 크지만 무엇보다도 소장 예술품의 질을 보면 메디치가 왜 예술 후원자의 대명사처럼 불리는지 그 이유를 말해준다.

많은 미술품들 가운데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 구 제의실(Old Sacrestia)이라 불리는 곳이다. 제의실은 사제가 미사 전후 옷을 갈아입거나 제의를 보관하는 방이다. 성 로렌초 교회의 구 제의실이 특별한 이유는 그곳이 바로 도나텔로와 브루넬레스키가 공동작업을 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의 장식을 위해 르네상스의 두 거장이 머리를 맞대고 일을 했다니 이 작은 방에서 역사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도나텔로는 채색한 테라코타로 벽면을 장식했다. 테라코타란 흙을 구워서 만드는 기법이다. 이전까지교회의 장식품은 대부분 돌로 만들어졌는데 도나텔로는 제작기법이 용이하고 제작 기간도 단축할 수 있는 테라코타로 조각을 만들었고 이를 대중화 했다.

중세에는 일반 시민들이 미술품을 소장하거나 장식하는 것이 거의 허락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상업으로 부를 축적한 시민들이 자신들의 주택을 미술작품으로 장식하길 원했는데 이 때 값이 싸고 제작이 용이한 테라코타가 크게 인기가 있었다. 이 교회에는 또한 도나텔로가 만든 청동 설교대가 있다. 작가가 죽기 직전까지 매달렸던 것으로 노 대가의 예술 혼과 청동 부조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피렌체 예술가들의 뒤에는 늘 이렇게 메디치가문이 있었다.
 

메디치 가문 ‘소년 미켈란젤로’ 발탁
 
 
메디치 가문이 배출한 최고의 예술가는 미켈란젤로(1475∼1564)이다. 미켈란젤로는 열다섯 살이 되기 전에 메디치 가문에 발탁되어서 그들과 한 지붕 아래서 살기 시작했다. ‘위대한 자 로렌초’라는 칭호를 얻은 메디치 가문 최고의 군주이자 예술후원자였던 로렌초 일 마니피코는 미켈란젤로를 특별히 사랑하여 일찍부터 밥상머리 교육을 시켰다.

메디치궁에는 늘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과 철학자들이 드나들었고 그들은 함께 모여서 예술과 철학, 그리고 문학을 논하였다. 이 모임이 바로 철학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신플라톤주의의 모태가 되었으니 멤버들의 지적 수준을 짐작할 만하다. 이 환상적인 모임에 어린 미켈란젤로도 참석하여 교육을 받았다. ‘위대한 자 로렌초’는 미켈란젤로를 가족처럼 생각하여 식사도 함께 했다고 하니 어린 예술가에 대한 총애를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시작된 미켈란젤로와 메디치가의 인연은 작가가 사망하기 전까지 수십년간 지속되었다.

메디치 가문을 위해 일한 미켈란젤로의 가장 중요한 작품이 있는 곳은 피렌체의 구 제의실(Sacrestia Vecchia)이다. 이곳은 지난주에 소개했던 성 로렌초 교회를 미켈란젤로가 손수 증축한 곳이다. 그래서 이름도 신 제의실에 이어 구 제의실이라 붙였다. 이곳은 ‘위대한 자 로렌초’의 아들인 교황 레오 10세의 주문에 의해 미켈란젤로가 건축과 조각을 맡았으며 1520년 착수하여 1534년 마무리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단 한 점만 소장하고 있어도 해당 미술관의 보물이 될 판에 이곳은 건축과 조각 전체가 이 거장의 작품이다.

미켈란젤로는 이곳에 두 메디치가 젊은이의 무덤과 고인들의 초상 조각을 만들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줄리아노인데 그는 교황 레오 10세의 동생으로서 우리가 흔히 줄리앙이라 부르는 석고상의 원작이다. 미남의 전형처럼 알려진 이 대리석 조각이 완성되자 사람들은 작품이 실물과 닮지 않았다고 수군댔다. 그러자 미켈란젤로가 말했다.

“100년 후 줄리아노의 실제 모습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네.”

구 제의실을 감상한 후 나오면 메디치 예배당(capella medicea)이라는 넓은 홀이 나오는데 그곳에는 메디치가문의 역대 인물들의 무덤과 각종 가문에서 수집한 소장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많은 소장품 가운데 메디치 가문의 예술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돌 테이블이 있다. 이들 돌 테이블은 얼핏 보면 정교하게 그려진 그림으로 착각할 정도다. 각종 문양, 정물, 풍경 등이 새겨져 있는데 그것은 그림이 아니라 돌 상감기법으로 만든 것으로서 그 화려함과 정교함이 사람의 손으로 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메디치가문은 당시 유럽의 프랑스나 스페인과 같은 대국의 왕가에 비하면 일개 가문에 불과했지만 유럽의 주요 군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결혼 관계를 맺기도 했다. 메디치가문 사람들은 타국 왕가의 결혼 선물로 돌 테이블을 자주 보냈다고 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꿈도 못 꿀 최고의 예술품을 선물로 보냄으로써 가문의 존재를 각인시켰던 것이다. 메디치 가문에 있어서 예술은 곧 정치이자 생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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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희교수의 이탈리아 예술산책 - 아시시, 성프란치스코 성당

고종희교수의 이탈리아 예술산책 - 아시시, 성프란치스코 성당 국내외 여행정보 2008. 10. 14. 14:00
고종희교수의 이탈리아 예술산책 - 아시시, 성프란치스코 성당
소장품 ‘와~’ … 박물관온듯 착각 






 
성 프란체스코의 고향 아시시는 로마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 가량의 거리에 있다. 아시시로 향하는 길 주변은 옛 이탈리아 거장들의 풍경화에서나 봤을 법한 그림 같은 경치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나지막한 푸른 구릉, 가끔씩 보이는 초원 위의 집들, 그곳은 움브리아 지방이다.

로마에 성 베드로 성당이 있다면 아시시에는 성 프란체스코 성당(사진)이 있다. 규모 면에서는 베드로 성당에 비교할 수 없겠지만 소장품의 질 면에서 본다면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아시시는 또한 전형적인 중세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고도로서 좁은 골목들을 걷다 보면 마치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 놓은 듯하다.

이 성당은 성 프란체스코의 유해를 안장하고,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 프란체스코 성인이 선종한 2년 후인 1228년에 짓기 시작하여 1280년쯤 대부분의 공사가 마무리되었으며 그 후에는 거장들을 초대하여 벽화를 장식케 했다. 성당은 2층으로 이루어졌는데 1층은 낮고 육중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2층은 수십년간 지속된 건축과정에서 새로운 양식이 유행하자 그것을 받아들여 경쾌한 고딕양식으로 완성되었다.

성 프란체스코는 1181년 아시시에서 부유한 포목상 아들로 태어났다. 젊어서는 부잣집 아들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놀고 즐기는 생활에 몰두했으나 스폴레토라는 곳에서 환시를 본 후 새 삶을 시작했다. 이후 부친의 재산을 포함하여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최소한의 동냥으로 살았고, 그리스도를 따라 청빈한 참신앙의 삶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또한 자신의 뜻을 군중에게 설교하여 당시로서는 엄청난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그가 설교를 시작하면 나는 새도 멈춰서 이야기를 들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생전에 프란체스코 교단을 설립하여 교황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역설적이게도 그가 추구한 것은 가난한 삶이었으나 이미 그의 생애 동안에 그가 설립한 교단은 교세가 불어났고, 사후에는 더욱 커져 오늘날에 이르렀다. 아시시에는 또한 프란체스코 성인을 평생 보필하며 뜻을 따르고 실천한 11세 연하의 여인 글라라(1194∼1253)가 있었는데 그녀 역시 성녀로 모셔졌다. 성녀 글라라 성당도 바로 인근에 있으니 방문을 권유한다.

이 성당에 들어서면 발 디딜 틈이 없이 관광객으로 가득차 있다. 이 어찌 가능한 일일까? 사람들은 두 가지 이유로 이곳을 찾는다. 하나는 주로 신자들로서 프란체스코 성인의 유해를 직접보고 성인의 뜻을 기리기 위함이다. 다른 하나는 미술사의 보석상자인 이 성당의 미술품들을 감상하기 위함이다. 이곳에는 중세 절정기의 대표적인 화가들, 그야말로 서양미술사를 새로 쓰게 한 주인공들의 벽화로 온통 도배가 되어 있으니 웬만한 미술관은 저리가라다.

성당 내에서는 원칙적으로 침묵을 지키게 돼 있다. 하지만 수많은 관광객이 운집하다 보니 그게 쉽지 않다. 그래서 떠드는 사람이 있으면 갈색 수도사 복을 입은 수사님들이 “실렌지오”라며 주의를 준다. 침묵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정작 그들에게 뭔가를 물어보면 신이 나서 설명에 열을 올린다. 이것이 바로 이탈리아 사람들이다.

서양 미술사를 읽다보면 자주 스승을 능가한 천재 제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같은 미술가들은 당대 최고 거장들의 제자였으나 곧 스승을 능가한 제자가 되었다. 역사상 스승을 뛰어넘은 제자로 기록될 첫 주인공은 단테가 위의 ‘신곡’에서 언급한 조토가 될 것 같다. 반면에 제자의 명성에 빛이 가려진 첫 화가는 조토의 스승 치마부에다. 이 두 역사적인 화가의 대표작들이 있는 곳이 바로 아시시 성 프란체스코 성당이다.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치마부에는 1280년경 성 프란체스코 성당의 미술감독으로 임명되어서 아무도 손대지 않은 빈 벽을 프레스코화로 장식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가장 중요한 위치인 1층 제대 주변의 벽화를 그리는 일부터 시작했는데 불행하게도 오늘날 그의 작품은 손상이 심해서 그 규모만을 짐작할 수 있다. 반면에 지하층에 그린 ‘성모자와 함께 있는 성 프란체스코’는 다행히 보존 상태가 좋아서 생생하게 표현된 성 프란체스코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 프란체스코의 형상이 바로 이 작품에서 나왔다.

치마부에가 일을 시작한 지 한 10년 쯤 지나서 어린 제자 조토가 벽화 작업에 투입되었다. 그가 그린 첫 작품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1층 위쪽이었는데 작품이 완성되자 선생을 비롯하여 그곳에서 작업하던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벽 속의 인물들이 살아서 걸어나올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사실적인 그림에 익숙해져 있는 오늘날의 관람객 입장에서 본다면 뭐 그리 대단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당시로서는 대단히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데뷔작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조토는 이 성당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1층 성당의 벽 전체를 장식할 기회를 얻는다. 그는 벽을 28개의 사각 구획으로 나눈 뒤 각각의 장면에 성 프란체스코의 일화를 프레스코 벽화로 생생하게 담아냈다. 프레스코란 영어의 ‘프레시(fresh)’에 해당하는 말로 벽에 회칠을 하여 젖은 상태에서 그린 그림을 가리킨다. 성인이 세속의 옷을 벗는 장면에서부터 교황으로부터 프란체스코 교단을 승인받는 장면, 그리고 장례식 장면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은 가히 그림으로 읽는 성 프란체스코의 전기라 할 수 있다.

조토의 이 작품들을 기점으로 서양에서는 작가 중심의 미술사가 시작된다. 조토 이전의 미술사는 보통 시대나 양식으로 분류한다. 고대, 중세, 고딕, 로마네스크와 같은 분류가 그것이다. 하지만 조토 이후에는 작가 개인의 생애와 작품이 미술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작가 한 사람의 위력이 역사의 연구 방법까지 바꿔놓은 것이다.

아시시에서 명성을 떨치자 조토에게는 전국에서 작품 주문이 쇄도했다. 그의 고향인 피렌체 사람들은 고향이 배출한 이 화가를 자랑으로 여겼고, 그의 행적은 사람들 사이에서 화젯거리가 되었다. 오늘날의 연예인들이 누릴 법한 인기를 당시에는 화가 조토가 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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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희교수의 이탈리아 예술산책, 다빈치의 고향, 빈치

고종희교수의 이탈리아 예술산책, 다빈치의 고향, 빈치 국내외 여행정보 2008. 10. 14. 13:58

고종희교수의 이탈리아 예술산책, 다빈치의 고향, 빈치
천재과학자의 스케치 6000장 보관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라는 이름은 ‘빈치 출신의 레오나르도’를 의미한다. 다빈치의 고향인 빈치를 가려면 피렌체에서 피사행 열차를 타고 30분 거리에 있는 엠폴리(Empoli) 역에서 내리면 된다. 그곳에서 택시를 타고 다시 15분 정도 가면 빈치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곳곳에 백년 이상 된 올리브 밭들이 있는 전형적인 토스카나 지방의 산촌 마을이다.

다빈치가 아니었던들 이 작은 마을이 세상에 알려질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인구는 겨우 2만명이지만 연간 이 마을을 찾는 방문객은 30만명이 넘는다고 하니 하루 평균 800명이 넘는 방문객들이 이 산골짜기를 찾는 셈이다. 이탈리아 정부는 과학자로서의 다빈치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다빈치 국립 과학박물관’을 설립했다. 이 박물관은 중세시대 영주가 살았던 성을 개조한 것으로서 마을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한다. 박물관 앞마당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면 연초록 올리브 산이 내 집 정원인 양 펼쳐져 있다.

박물관 안에 들어가면 다양한 기계들과 함께 여기저기 컴퓨터 모니터들이 눈에 띈다. 다빈치의 아이디어에 따라 후대인들이 만든 기계의 원리와 작동과정을 컴퓨터로 보여주기 위해 설치된 것들이다. 이들 발명품의 공통점은 인간의 노동력을 절감하기 위한 기계화와 자동화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휴머니즘 시대의 레오나르도답다. 또한 컴퓨터를 이용한 전시 방식은 다빈치의 아이디어가 현대의 문명과 만나 그가 꿈꾸었던 과학적인 세상을 마침내 실현한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보통 다빈치 하면 ‘모나리자’나 ‘최후의 만찬’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를 화가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가 화가로서 보낸 시간은 다른 활동에 비한다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6000장이 넘는 방대한 양의 스케치와 메모를 남겼다. 그것은 다빈치의 사상, 그가 고안한 각종 기계에 대한 설명과 모형도, 다양한 인체 해부도, 물의 흐름을 비롯한 자연현상에 대한 관찰을 기록한 글과 스케치들이다. 빈치에 있는 박물관의 소장품들은 바로 이 같은 다빈치의 스케치와 메모를 토대로 후대인들이 인내를 가지고 제작한 발명품들이다. 자전거, 수상스키, 비행기, 잠수복 심지어는 플라스틱 제조법에 이르기까지 그의 아이디어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놀라운 것은 이들 대부분이 현대에 상용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박물관 옆에는 다빈치 도서관이 있는데 그곳에서는 이 예술가가 그린 모든 스케치의 가장 오래된 복사본을 비롯하여 전 세계 다빈치 관련 출판물과 자료들을 모두 수집하고 있다고 한다. 다빈치의 오리지널 스케치 한 장 소장하고 있지 않은 곳이지만 오늘도 이 마을에는 수많은 방문객들이 한 천재의 상상력을 보고자 몰려들고 있으니 놀랍지 않은가.

“나는 다빈치가 20초에 걸쳐 작성한 메모를 평생 연구한다”고 말한 사람은 세계적인 다빈치 연구의 권위자이자 이 마을 사립 다빈치 박물관의 관장인 베초시(Vezzosi)다. 그날도 그는 다빈치의 처방에 따라 플라스틱 제조법을 실험하고 오는 중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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