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시에나 - 시에나 캄포광장엔 노천카페 즐비
광장에 어둠이 내려앉으면 광장을 따라 들어선 노천카페(Bar)에 하나 둘씩 불이 켜진다. 이곳에 있는 카페들은 비싼 실내 장식과 소파가 따로 필요치 않아 보인다. 시청 앞 광장에 면해 있는 수백년이 넘는 건축물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시청의 종탑, 낭만적인 부채 꼴 광장이 모두 카페의 배경이다 보니 달리 인테리어가 필요치 않은 것이다.
이럴 때 바로 “조상 덕에 잘 사는 사람들”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우리는 뭐든지 새로 만들어야 하니 때로 지치고 진이 빠지지만 그들은 가지고 있는 것에 하나를 더 보태면 되니 실패도 덜 겪고, 시행착오도 줄일 수 있을 것 같다. 대신에 그들의 삶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다이내믹함이 부족하다. 이탈리아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평생 큰 변화 없이 고향에서 부모의 직업을 물려받으며 어제와 별 다름 없는 오늘을 살아간다는 것은 장점이자 단점이다. 안정된 삶을 치르는 대가라고 해야 할까? 물론 우리는 그 반대이지만 말이다.
이미 하루 종일 관광객들을 맞느라 몸살을 앓았지만 카페의 종업원들은 저녁이 되면서 새로이 찾아온 손님들을 여전히 기운차고 기분 좋게 맞아 준다. 손님 중에는 관광객들이 많지만 시에나 시민들도 적잖아 보인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한잔 하는 곳, 그곳이 바로 카페이다. 카페가 있는 곳에 사람이 모이고, 담론이 이루어지면서 문학이 탄생하며, 문화와 역사가 만들어진다. 그러니 유서 깊은 도시마다 수세기의 역사를 자랑하는 카페가 있기 마련이고, 카페는 한 도시의 역사를 증언하는 역사의 산실이 된다.
이탈리아를 방문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도시로 시에나를 꼽는 이들이 많다. 시에나는 피렌체와 쌍벽을 이루며 토스카나 주의 문화와 예술을 만들어 갔던 중세 최대이자 최고의 도시였으며 그 모습을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시에나가 전성기를 누린 때는 13, 14세기 이며 이 때 도시의 상징인 대성당(Duomo)과 시청(Palazzo Pubblico)이 세워졌다. 두 곳 모두 높은 탑이 있으나 대성당의 것이 조금 더 높다. 탑 자체가 높아서가 아니라 성당을 언덕 위에 짓고 시청을 그 아래에 위치시킴으로써 세속이 종교를 넘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탈리아의 중세도시는 늘 종교와 시민생활이 공존한다. 도시가 형성되면서 가장 먼저 만들어지는 곳이 바로 대성당과 광장인데 시에나에서는 대성당 대신에 시의 청사 건물 앞에 드넓은 메인 광장이 들어섰다. 이곳 광장에서 시민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일상의 삶을 즐겼는가 하면, 축제를 벌였다.
캄포 광장이라고 불리는 부채 모양의 이 아름다운 광장 바닥에는 9개의 부채 살 모양이 돌로 새겨져 있다. 시에나가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시에나 공화국을 통치했던 ‘9인의 정부’를 상징하기 위해 9개의 구획 모양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여름이 되면 두 차례에 걸쳐 그 유명한 팔리오 축제, 즉 시에나의 17구역 대표들이 안장 없는 말을 타고 질주하는 말 경기가 벌어진다. 1000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축제로서 전 세계 관광객들이 이를 보기 위해 찾아오며, 우리나라에서도 TV를 통해 여러 번 소개된 바로 그 축제이다.
‘14세기 걸작’ 시에나시청 벽화
마르티니 작품 등 당시의 국력·자부심 상징
가끔 뉴스에서 고흐나 피카소와 같은 거장들의 그림 한점이 수십 혹은 수백억원에 팔렸다는 소식을 접할 때가 있다. 현대 대가들의 소형 그림 한점이 그러하다면 초대형 실내 벽면을 온통 벽화로 장식한 수백년 전 거장들의 그림들은 도대체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우매한 생각이지만 가끔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탈리아 대부분의 도시들은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의 걸작들을 보유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시에나 시청 안에 그려진 벽화들은 단연 으뜸이라 할 만 하다. 14세기 서양 미술사는 시에나 화가들의 미술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뻘 되는 두치오를 시작으로 기라성 같은 시모네 마르티니가 탄생했으며, 그와 동시대 사람들인 암부로조와 피에트로 로렌체티 형제가 배출되었다. 그 중에서 두치오를 제외한 세 화가들의 대형 벽화들이 모두 시에나의 시청 안에 있다. 14세기 서양 회화사가 바로 이 건물에서 시작된 것이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이 시청에 들어가면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시모네 마르티니의 ‘마에스타’와 ‘구이도 리치 다 폴리아노 장군’이다. 벽면을 가득 메운 이 두 대형 프레스코화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습은 엄숙함 그 자체이다. ‘장엄’이라는 의미의 ‘마에스타’는 성모자와 성인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그린 종교화이고, ‘구이도리초 다 폴리아노 장군’은 시에나가 전성기를 누렸던 시절, 시에나에 반기를 들었던 나라들을 제압한 한 장군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자신이 타고 있는 말과 동일한 의상을 입고 전지를 둘러보고 있는 장군의 모습을 통해 시에나 공화국의 국력과 자부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전자가 시에나의 종교적 상징이라면 후자는 군사적 상징이다.
이 방의 옆방인 9인 정부의 방에는 암부로조 로렌체티의 ‘좋은 정부의 알레고리’와 ‘나쁜 정부 알레고리’가 있다. 9인의 정부란 한때 시에나 공화국을 통치했던 정부의 이름이다. 그래서인지 정치적 주제를 채택했다. 여기서 좋은 정부를 상징하고 있는 것은 한 늙은 왕이다. 그의 왼쪽 옆에는 심판, 절제, 관대가 오른쪽 옆에는 신중, 강인, 평화가 사람의 모습으로 의인화되어 있다.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으로 좋은 정부가 되기 위한 덕목들이다. 반대편에는 나쁜 정부의 알레고리를 그리고 있는데 뿔 달린 독재자의 모습이 중앙에 있고 양쪽에 나쁜 습관, 잘못된 심판 등으로 고통받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
또 다른 벽면에는 ‘좋은 정부의 효과’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도심과 농촌의 모습으로서 각종 가게와 상인들로 북적거리는 활기찬 시에나의 모습이다. 거리에서 강강술래를 하며 춤을 추는 소녀들, 양떼를 몰고 가는 목동, 말을 타고 길을 가는 사람들, 가게에서 흥정하는 상인과 손님들의 모습이 보인다. 평화롭고 한가한 이들 장면은 모두 좋은 정부의 효과를 시각화한 것이다.
이들 그림은 환경을 아름답게 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올바른 정치를 바라는 백성들의 염원과 정치인들의 다짐을 드러내는 도구다.
‘시에나 성당’ 고딕양식 최고봉
장엄하고 독창적인 기둥·조각 수두룩
고대부터 19세기 이전까지 2000년의 서양미술사에서 이탈리아가 타 유럽 국가에 주도권을 넘겨준 양식이 딱 하나 있는데 바로 고딕 양식이 그것이다. 고딕은 뭐니 뭐니 해도 프랑스의 산물이며, 이탈리아는 고딕에 관한 한 별로 내 놓을 만한 예술 상품이 없다. 밀라노 대성당만이 거의 유일하게 화려함과 규모면에서 프랑스의 고딕 건축물에 비교될 뿐이다.
그 와중에 시에나 대성당은 이탈리아 고딕의 자부심이라 할 만하다. 밀라노 대성당이 규모와 외적 화려함에서 압도한다면 시에나 대성당은 예술가들의 명성과 소장품들의 높은 질적 수준으로 인해 최고의 고딕 성당으로 꼽힌다.
시에나 대성당은 거대한 규모에 비해 아담하고, 정겨워 보인다. 정면에는 내부로 들어가는 세 개의 문이 있는데 기둥장식과 문 위의 반달형 장식이 전형적인 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임을 말해준다. 반면 문 위쪽부터는 모두 고딕 양식이다. 고딕 특유의 뾰족 첨탑들과 레이스 풍의 건축 장식들, 우뚝 서 있는 조각 작품들, 그리고 고딕 성당의 상징이라는 거대한 장미의 창도 보인다. 시에나 대성당은 이렇듯 건축의 구조와 양식적 측면에서 볼 때 유럽의 여타 고딕 성당들과 다를 바 없으나 그 느낌은 사뭇 다르다. 이탈리아 특유의 섬세함과 정겨움이 배어있는 까닭일 것이다.
건축물 외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면 곳곳에 놓인 조각들이다. 이것들은 고딕 조각의 선구자로 알려진 조반니 피사노(13세기 중 후반기에 활동)의 작품이다. 이들 조각 외에도 정면의 상단부 건축 디자인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고딕이 프랑스의 산물이라고 하나 이름 석자만 대면 알만한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고딕 건축가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반면, 이탈리아는 제대로 된 고딕 성당이라고는 시에나에서 딱 하나 만들어냈으면서도 대표적인 예술가를 배출했으니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면 약이 오를 노릇이다. 현재 보이는 정면의 조각들은 모두 복제품들이고 원작은 대성당 부속 미술관인 오페라 델 두오모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성당 안에 들어가는 순간 방문객들 사이에서 한숨인 듯 탄성인 듯, 신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흰색과 초록색이 얼룩말의 띠처럼 교차하여 만들어 낸 거대한 기둥 숲과 그것들이 만든 장엄함과 조화로움 때문이다. 기둥이 이토록 독창적이며 아름답게 만들어진 건축물은 많지 않으며, 아랍의 영향에 이탈리아 적 감각을 곁들어 만든 전형적인 시에나 풍의 기둥이다. 기둥 위쪽에는 172명의 역대 교황들의 초상 조각과(1400~1500년에 제작), 36명의 황제들의 초상 조각이 설치되어 있다. 세속과 종교의 최고 지도자들의 모습을 집대성하였다.
눈을 아래로 돌리면 바닥에 방문객들의 발걸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빨간 줄이 둘러져 있다. 그것은 인타르시아라 불리는 돌 상감 모자이크 기법으로 그려낸 56개의 돌 그림들로서 1300년대부터 1500년대까지 2세기에 걸쳐 제작되었다. 물론 그것을 디자인 한 사람 중에 당대 최고의 화가의 작품도 있다.
액자에 끼워 고이 간직해도 모자랄 판에 어찌하며 이 소중한 그림들을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바닥에 그려놓았단 말인가? 바닥부터 천장까지, 한 마디로 예술이 아닌 것이 없다.
고딕조각 새지평 피사노의 ‘설교대’
예수의 생애 8개 부조로 다뤄… 미켈란젤로 압도
미켈란젤로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피사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에나 대성당에서만큼은 피사노가 미켈란젤로를 압도한다. 이곳에는 미켈란젤로의 조각이 네 점이나 소장되어 있으나 성당을 대표하는 작품은 피사노의 설교대다. 소개 책자를 보아도 피사노의 설교대에는 무려 8쪽을 할애한 반면 미켈란젤로의 조각들은 겨우 한쪽에 소개했을 뿐이다.
시에나 대성당 건립에 큰 공을 세운 이들은 피사노라고 불리는 부자(父子) 조각가들이다. 아버지 니콜라 피사노가 대형 설교대(1265~1268년 제작)를 만듦으로써 고딕 조각의 지평을 열었다면, 아버지 밑에서 미술을 배운 아들 조반니는 성당 정면의 건축과 조각을 맡아서 이탈리아 고딕 조각과 건축의 자부심이 되게 했다.
성당의 앞쪽에 놓인 8각형 모양의 대리석 설교대는 8개의 부조로 장식되어 있는데 내용은 아기 예수의 탄생부터 최후의 심판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생애를 다루고 있다.
이들 작품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서 이탈리아 고딕 조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얼굴 표정은 실제 사람인 것처럼 생생하고, 육체의 움직임은 중세의 딱딱함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묘사되었다.
이후 서양 미술의 특징이 될 자연주의의 시작이다. 특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죽은 아들 앞에서 기절해버린 성모님의 모습은 이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인간적인 장면이다. 작업은 아버지 니콜라 피사노가 여러 명의 조수들을 데리고 했으며 제자들 중에 아들도 있었다.
유럽의 교회는 당대 최고의 미술가들을 초대하여 미술품을 의뢰했다. 이는 예술에 대한 안목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동시에 미술품이 그들의 종교인 그리스도교를 표현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이었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림이나 조각은 성서의 이야기나 성인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당시로서는 가장 효과적인 시각매체였다.
미술품은 때로 실존 인물을 선전하는 매체로 둔갑하기도 한다. 대성당 내부 왼쪽 편에 있는 피콜로미니 도서관이 바로 그 예다. 도서관을 짓게 한 사람은 추기경 프란체스코 피콜로미니 토데스키니로서 후에 교황 비오 3세가 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삼촌이자 교황 비오 2세(1458~1464년)였던 당대 최고의 인문주의 학자 에네아 실비오 피콜로미니의 장서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 이 도서관 장식을 발주했다.
도서관의 벽은 15세기 프레스코 벽화로 가득한데 그림의 내용인즉슨 삼촌인 선임 교황 비오 2세의 일대기이고 보면 자랑스러운 가족사이자, 미술을 통해 현존하는 인물을 예찬한 전형적인 예다. 다만 핀투리키오가 그린 이들 벽화 역시 미술사 교과서에 빠짐없이 실리는 걸작이다 보니 세월이 흐른 지금 그 누구도 당시의 정치적인 목적에 대해 이의를 달지 않는 것이다.
서울시에서 건립하려는 오페라하우스에 대해 한 시민단체의 사람이 비용을 문제 삼으며 이의를 제기하는 뉴스를 보았다. “그래도 지어야 한다!” 정치도 돈도 순간이지만 예술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역사에 남을 기념비적인 작품을 만들어내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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