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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이와미 은광'

[세계문화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이와미 은광' 국내외 여행정보 2008.11.03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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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이와미 은광'



영어 명칭 Iwami Ginzan Silver Mine and its Cultural Landscape
프랑스어 명칭 Mine d'argent de Iwami Ginzan et son paysage culturel
등록 구분 문화유산
등록 연도 2007년


시미즈다니의 정련소 터이와미 은광 (일본어: 石見銀山 이와미긴잔[*])은 예부터 은을 채굴하였던 광산으로 센고쿠 시대 후기부터 에도 시대 전기에는 대규모의 은광이었다. 광맥은 이와미 국 동부로 현재 시마네 현의 오다 시 오모리를 중심으로 니마 정과 유노쓰 정 지역까지 분포되어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광산유적으로 1969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200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같은해 일본의 지질백선에 선정되었다.


이와미 은광의 역사




개발
《긴잔규키(銀山旧記)》 등에는 가마쿠라 시대 말기 엔쿄년간 (1308년 ~ 1310년)에 스오의 오우치 히로유키가 이와미를 방문했을 때 은을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있다. 오늘날의 이와미 은광을 본격적으로 개발한 사람은 하카타의 상인 가미야 히사사다라고 한다. [1]《石見銀峯山清水寺天地院縁起》에 따르면, 바다로부터 산이 빛나고 있는 것을 본 히사사다는 영주 오우치 요시오키의 지원과 이즈모의 동광산을 운영하는 미시마 세이에몬의 협력을 얻어 1526년 3월 긴푸 산의 산허리에서 지하의 은을 채굴했다. 요시오키 사후, 오우치 요시타카가 규슈 공략에 눈을 돌린 1530년 지방의 소영주 오가사와라 나가타카가 은광을 탈취하였지만, 3년후 다시금 오우치 가문에 귀속되었다. 주변에 야마부키 성을 쌓아 광산 경영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 해 8월 중국의 은 제련기술인 회취법[2] 을 가미야 히사사다가 오모리에서 처음 성공하였다.[3] 그 결과 효율적 은의 채취이 가능하였고, 전국으로 퍼져 일본에 있어 은 채취에 크게 공헌하였다. 회취법이 확립되기 전에는 니마 정, 유노쓰 정에서 광석을 채굴하여 은을 채취하였다.

은광 쟁탈
1537년 이즈모의 아마고 쓰네히사가 이와미를 공격하여 은광을 빼아았다. 2년후 오우치 가문이 탈환했지만, 그 2년후 아마고 가문이 오가사와라 가문을 이용해 다시금 은광을 점령했다. 은광을 둘러싼 양가문의 쟁탈전이 계속되었다. 오우치 요시타카 사후, 모리 모토나리가 오우치 가문의 뒤를 이어 아마고 가문간의 은광 쟁탈전이 전개되었고, 1562년 최종적으로 모리 가문이 승리해 은광을 완전히 손안에 넣었다. 1584년 모리 가문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복속해 은광은 모리 가문과 도요토미 가문이 공동으로 관리하게 되었으며, 임진왜란때의 군자금은 여기서 충당되었다.[4]


상업에서의 영향

이와미 은광이 개발되었을 시기는 일본 경제의 상업적 발전을 이룬 시기와 겹친다. 이 때문에, 정련가공된 은《조긴》은 기본적으로 통화로써 유통되었다. 16세기 후반부터 마카오를 거점으로 활동을 한 포르투갈과 17세기 초 네델란드 동인도회사를 거점으로 활동을 한 네델란드와의 교역에도 사용되었다. 당시 여기서 산출된 은의 양은 전세계의 1/3에 달해[5],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현재 볼리비아 포토시의 세로 니코 은광과 더불어 은 산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조긴은 칭량화폐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원형이 남아있는 것은 드물다.

번성하였을 시기에는 당시 지도에도 기재되어 있다. 항해술의 발전과 더불어 서유럽의 왕들, 특히 스페인 국왕은 이슬람권으로부터 입수한 지도가 많았고, 이들 토대로 독자적인 지도를 만들었다. 이 지도를 가진 함선들이 인도, 말레이 반도, 중국, 일본으로 무역장을 넓혀 이와미 은광에서 산출된 은을 요구하였다.

은광을 손에 넣은 무장 가문인 오우치 가문, 아마고 가문, 모리 가문, 도요토미 가문은 적극적으로 이들 해외 여라나라와 무역을 하였으며, 그 수입품 안에는 당시 귀중품이였던 화승총도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덧붙여, 영국 함선과 네델란드 함선은 이와미에서 산출된 은을 《소마 은》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지지만, 이것은 은광이 있는 오모리 지구의 옛 이름이 사마(佐摩)에서 유래된 것이다.

막부 직활령
세키가하라 전투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와미의 에노 강의 동쪽 지역을 막부직활령으로 삼았고, 초대 은광 관리인으로 오쿠보 나가야스를 임명했다.[6] 나가야스는 광산경영자로 야스하라 덴베를 두어 이와미 은광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이에야스는 막대한 은을 토대로 해외무역을 하였다. 은광개발의 비용, 자재를 충당하기 위해 주변의 마을을 직활령으로 삼아 오모리에 행정집행소인 부교쇼를 설치했다.[7] 야스하라 덴베가 가마야 갱도를 발견함에 따라 17세기초의 은 산출량은 최고조에 다달으게 되었다. 《当代記》(당대기)에 따르면, 1602년 상납된 은는 4 ~ 5천관에 달했다고 적고있다.[8] 그 후, 은산출량은 점차 감소하였고, 1675년 은광 집행소의 관직인 오모리 다이칸의 지위를 낮추었다.

당초 산출된 은은 현재 오타 시의 니마 정과 유노쓰 정으로부터 배로 반출되었다. 겨울이면 동해쪽의 계절풍이 강해 항해에 어려움이 많았기때문에 오쿠보 나가야스는 오모리로부터 오노미치까지 가기위해 주고쿠 산지를 넘어 세토 내해에 다달으는 육로를 정비하였고, 오노미치로부터 교토 후시미의 긴자(銀座)로 운송하였다. 이들 육로가 지나는 길의 각 마을의 주민들은 노역을 제공하여야 했기때문에 큰 부담이 되었다. 경우에따라서 소송와 쟁의가 일어났지만, 이 수송은 막부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1731년 오오카 다다스케의 천거에 따란 임명된 제19대 다이칸 이도 마사아키라는 60세의 고령과 임기 2년과 상관없이 영민으로부터 "이모 다이칸"로서 공경받았으며, 현재 시마네 현뿐만아니라, 돗토리 현, 히로시마 현에서도 그의 공덕을 기리는 많은 공덕비가 건립되어 있다. 그 공적은 교호 대기근으로 고통받는 영민을 위해 사쓰마 번으로부터 고구마를 도입하여 보급하였고, 기근이 있을 때는 자신의 재산과 유복한 농민으로부터 쌀을 샀고, 막부의 허락을 받지 않은채 다이칸의 미곡창고를 열어 곡식을 풀었고, 영민들의 연공을 면제 감면해 주었다.

이와미 은광은 에도 시대 전기에도 일본의 팽대한 은수요를 지탱하였고, 동도 산출했지만, 17세기말이 되자 점차 산출량이 줄어들어 에도 말기에는 깊게 파지않으면 은이 산출되지 않을 정도로 되었으며, 지하수 누수문제도 있어 채산성이 떨어졌다.

1866년 음력 6월 제2차 조슈 전쟁에서 막부는 이와미 국에 기슈 번, 빈고 후쿠야마 번, 하마다 번, 마쓰에 번의 병사를 보냈지만, 조슈 군의 무라다 조로쿠(후의 오무라 마스지로) 부대를 저지하지 못했고, 음력 7월 하마다 성이 함락되었다. 이렇게 되자, 조슈 군의 이와미 은광 영지로의 진격을 예상한 이와미 은광의 오모리 다이칸 나베타 세이켄은 음력 7월 20일 밤, 빗추 국 구라시키로 도주하였다. 이로써 이와미 은광의 막부지배는 막을 내리게 된었다.[9]

이후, 옛 이와미 은광 영지는 조슈 번에서 관리하였고, 1868년 음력 1월 이와미 은광의 영지가 막부로 부터 조슈 번의 위탁된 후 , 1869년 음력 2월 오모리 현이 설치되어 조슈 번에 의한 관리는 막을 내렸다.[10]



메이지 시대 이후

이와미 은광 경영은 1868년 다조칸(太政官)[11]에서 공포한 법령에 따라 민간에 매각되어 다나카 요시타로가 경영권을 취득하였다. 하지만, 1872년 하마다 지진의 피해로 휴광하였다.[12] 그 후, 1887년부터 오사카 시의 후지타구미(현 DOWA 홀링스 주식회사)에 의해 재개발을 시도하여, 채광시설, 사무소 등을 오모리로부터 고지 계곡으로 이전하였지만, 1923년 휴광하였다.[13] 그 후,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 중, 군수물자로 필요한 구리의 국산화 요구에 따라 1941년 구리 채광을 시도해오지만, 1943년 수해로 갱도가 수몰되는 큰 피해를 입어 폐광되었다. 광업권은 DOWA 홀링스 주식회사가 보유하고 있다.

현재 은광 채굴을 위해 판 “마부(間歩)”라고 불리는 갱도 500여개가 남아있고, 류젠지 마부(龍源寺間歩)의 일부가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이와미 은광의 부산물
이와미 은광에서 은이 채굴될 때 비소가 함유된 비석이 채석되지 않았지만, 같은 이와미 국에 위치해 있는 사사가다니 은광에서 구리가 채굴될 때 비석도 함께 채석되었다. 비석은 맹독성 비소화합물인 삼산화 비소를 다량 함유하고 있어 잘게 갈아 살서제로 사용하였다. 이 살서제 판매상들은 전국적으로 인지도가 있는 이와미 은광의 이름을 사용해 판매하였다.
금은의 정련공정에는 회취법 기술이 사용되었고, 정련공정에서 나오는 납 증기를 흡입한 광부들은 급성 또는 만성 납중독에 걸렸다. 또, 갱도내의 출수, 고온다습, 슬래그와 분진 등의 열악한 환경도 한몫하여 당시 광부의 평균 연령은 30세 정도였다. 광부들의 가족구성은 대개 독신이거나 부부뿐이였다고 전해진다.
1977년 작가 스기모토 소노코가 집필한 소설 《종언》은 이와미 은광의 다이칸이였던 이도 마사아키라라는 인물을 재재로 사용하였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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