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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구스쿠 유적 및 류큐왕국 유적'

[세계문화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구스쿠 유적 및 류큐왕국 유적' 국내외 여행정보 2008.11.03 20:07

[세계문화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구스쿠 유적 및 류큐왕국 유적'






세계문화유산 '구스쿠 유적 및 류큐왕국 유적'

영문명 Gusuku Sites and Related Properties of the Kingdom of Ryukyu
프랑스명 Sites Gusuku et biens associés du royaume des Ryukyu
등록구분 문화유산
등록년 2000년


구스쿠 유적 및 류큐왕국 유적 (일본어: 琉球王国のグスク及び関連遺産群 류큐오코쿠노구스쿠 오요비 간렌이산군[*])는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구스쿠 등과 류큐 왕국의 사적지이다. 구스쿠는 류큐어로 성(城)을 의미한다. 사적지 대부분은 오키나와 섬 남부에 있다.


등록 유산



나키진 성터 (今帰仁城跡)

 

자키미 성터 (座喜味城跡)

 

가쓰렌 성터 (勝連城跡)

 

나카구스쿠 성터 (中城城跡)

 

슈리 성터 (首里城跡)



슈리 성(일본어: 首里城/しゅりじょう 슈리 죠[*], 오키나와어: sui ugusiku)은 오키나와 현 슈리(현재의 나하 시의 일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예전에는 해외무역의 거점인 나하 항을 내려보는 언덕에 있던 성이다.

류큐 왕국의 왕성으로, 오키나와 현 내 최대 규모의 성(구스쿠)이다. 전쟁 전에는 세이덴등이 국보였지만, 1945년의 오키나와 전투과 전쟁 후의 류큐 대학 건설에 의해 완벽하게 파괴되어, 얼마 안되는 성벽이나 건물의 기초등의 일부가 남아있다. 1980년대 전말의 류큐대학의 니시하라 정으로 이전과 함께, 본격적인 복원은 1980년대 말부터 행해져, 1992년에, 세이덴 등 옛 유적을 묻어서 되돌리는 형태로 복원되었다. 1993년에 방송된 NHK 대하 드라마 《류큐의 바람》의 무대가 되었다. 2000년 12월, “구스쿠 유적 및 류큐왕국 유적”으로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지만, 등록은 “슈리성 터”(しゅりじょうあと)로, 복원된 건물이나 성벽은 세계유산이 아니다.

주위에는 같은 세계유산에 등록된 타마우돈, 소노햔우다키 석문 외, 제2쇼씨의 보다이 절인 엔카쿠 절 터, 국학 공자 묘적, 뱃놀이가 행해진 연못인 류후치, 베자이덴도 등의 문화재가 있다.

 
소노햔우타키 석문 (園比屋武御嶽石門)

 

다마우돈 (玉陵)

 

시키나엔 (識名園)

 

세이화우타키 (斎場御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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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우리나라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유적'

[세계문화유산] 우리나라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유적' 국내외 여행정보 2008.11.03 15:27

[세계문화유산] 우리나라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유적'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유적'



 

강화도 고인돌 유적지

  •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유적 (2000)

    Gochang, Hwasun and Ganghwa Dolmen Sites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대한민국의 세계문화유산이다. 전북 고창. 전남 화순, 경기 강화에 나뉘어 위치해 있는 고인돌군()이다.


     


    고창 고인돌유적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죽림리와 도산리 일대에 동서로 1,764m 범위에 442기가 분포해 있다.


    고창지석묘군(사적 391)

    도산리지석묘(전라북도기념물 49)


     

    화순 고인돌유적


    도곡면효산리와 춘양면 대신리 일대의 계곡을 따라 10㎞에 걸쳐 500여기의 고인돌이 분포해 있으며 고인돌에 쓰이는 돌을 캐기 위한 채석장도 발견되었다.


     
    화순 효산리 대신리 지석묘군(사적 410)

     

    강화
    고인돌유적

  • 부근리 삼거리, 오상리 등의 지역에 고려산 기슭을따라 120 기의 고인돌들이 분포해 있다

    강화지석묘(사적137

    내가지석묘(인천광역시기념물 16

    강화대산리고인돌(인천광역시기념물 31)

    강화 부근리점골지석묘(인천광역시기념물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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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곳곳에 고대문명 흔적

    로마 곳곳에 고대문명 흔적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14 14:27

    로마 곳곳에 고대문명 흔적
    콜로세움·개선문·베드로 성당 등 볼거리 빼곡 


     




    지상에서 가장 예술적인 도시를 꼽으라면? 나는 서슴지 않고 파리, 피렌체, 로마를 꼽고 싶다. 베를린에도, 바르셀로나에도, 그리고 뉴욕에도 많은 미술관과 유적지가 있지만 그 어느 곳도 위의 세 도시를 능가하지는 못한다. 대부분의 도시들이 몇 군데 보고 나면 쇼핑으로 눈을 돌려야 하는 형편이지만 이들 세 도시에서는 몇날 며칠을 발이 부르트도록 다녀도 볼거리가 끝이 없다.

    이제 ‘이탈리아 예술 산책’의 마지막 여행지로 로마를 남겨두었다. 가봐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닌 까닭에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19세기에 파리, 20세기에 뉴욕이 있었다면 로마는 기원전부터 18세기까지 무려 2000년 이상 유럽 예술의 중심지였다. 규모로 보나 역사로 보나 여타의 도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수준이다. 이 방대한 역사의 도시, 로마를 소개하려니 교과서적이긴 하지만 시대적 흐름에 따라 정리를 해보는 것도 효과적일 것 같다.

    ◈고대 로마(기원전 8세기~기원후 5세기)

    오늘날 남아 있는 로마의 유적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들은 고대 로마의 모습, 특히 로마 제국의 모습이다. 공회당이라 불리는 포럼, 콜로세움, 개선문, 판테온, 도무스 아우레아…. 로마에는 2000년 전 문명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중세 로마(기원후 5~14세기)

    로마에는 교황청이 있다. 12 제자 중에서 그리스도로부터 천국의 열쇠를 받은 베드로가 초대 교황이 되었고, 순교를 했다. 순교 장소에 교회를 세운 것이 4세기 경에 건립한 성 베드로 성당이다. 이후 신앙의 시대였던 중세 천년동안 로마는 서구 사회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을 비롯하여 많은 중세 초기 교회들이 남아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로마(15~16세기)

    로마가 가장 화려했던 시대였다. 베드로 성당의 재건축이 이때 이루어졌고, 라파엘로, 미켈란젤로와 같은 천재 예술가들이 바로 로마의 교황청과 베드로 성당에서 그들의 재능을 뿜어냈다. 이들 외에도 당대 한 가락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로마에서 활동을 했다.

    ◈바로크 시대의 로마(17세기)

    17세기 바로크 시대에 로마는 다시 한번 미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바로크 양식이 탄생된 곳이 바로 로마였으며 그것이 전 유럽으로 확산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로마는 예수회 교회를 비롯하여 화려함이 극에 달하는 오리지널 바로크 교회들의 집산지다.

    ◈신고전주의 시대(18세기말~19세기초)

    한번도 고전, 고대를 망각한 적이 없었던 유럽의 미술계에 다시 한번 본격적인 고전 붐이 일어난 것이 신고전주의 양식이었고, 그 중심에 로마가 있었다. 예술가뿐만 아니라 유럽의 지성인들에게 로마 여행은 필수코스이자 지성의 완결 편이었다. 로마에 가보지 않고 지성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건축미의 극치 ‘베드로 성당’
    웅장·정교… 인간의 한계는 어디인가… 


     
    세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술가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교회, 교황이 대주교인 성당….

    바티칸의 베드로성당을 수식하는 말은 이 밖에도 많이 있을 것이다. 베드로성당에 갈 때마다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를 생각하곤 했다. 인간의 건축술은 얼마만큼 장엄하고 웅장하며, 인간이 만들어낸 조각과 회화는 얼마나 정교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지.

    베드로성당은 몸체와 광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광장 양쪽에는 거대한 기둥 숲으로 이루어진 두 개의 회랑이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두 팔을 벌리고 있는 것과 흡사하다. 그곳을 찾은 이들을 교회가 따듯하게 안아주고 있다는 의미로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 회랑과 광장은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거장 베르니니의 작품이다. 지난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거했을 때 우리는 수백만의 인파가 베드로성당 광장에 운집한 광경을 보았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 그것이야말로 광장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광장을 통과하여 교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대한 청동문을 통과해야 한다. 청동문 안쪽에는 나르텍스라는 공간이 있는데 교회의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공간이다. 여기서 내부로 들어가려면 다시 한번 청동문을 통과해야 한다.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는 동안 이런 여과 과정을 거치면서 정화된 마음을 가지도록 유도한 것이다. 베드로성당의 미술품들은 대부분이 수백년 이상 된 것들이지만 청동문 중에는 만추와 민구치를 비롯하여 20세기 초 이탈리아 최고의 조각가들의 작품이 있다. 그들은 피사노, 도나텔로, 미켈란젤로 그리고 베르니니의 계보를 잇는 세계적인 구상조각의 대가들이다.

    성당 내부로 들어가면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되며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한동안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거대한 기둥들과 각양각색의 화려한 돌들로 만들어진 벽, 천장, 곳곳에 설치된 셀 수 없이 많은 조각작품들….

    성당 안에 있는 수많은 조각 작품들은 대부분이 역대 교황들의 장례 기념비, 즉 무덤이다. 교황 한 분이 서거하실 때마다 당대 최고의 조각가에게 의뢰하여 장례 기념비를 제작케 하는 것이 교회의 오랜 전통이었다. 물론 이들 장례 조각은 교황 생전에 준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베드로성당이 처음 지어진 것은 324년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으로부터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은 밀라노 칙령(313년)이 발표된 직후이다. 그동안 금지됐던 그리스도교를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믿을 수 있게 되자 무엇보다도 절실했던 것이 종교예식을 치를 수 있는 장소였고,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교회였다.

    베드로성당이 오늘날의 모습을 띠게 된 것은 15세기말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밀라노의 건축가 브라만테에게 재건축을 의뢰하면서부터이다. 이 거대한 성당을 다시 짓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했고, 교황은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를 팔기 시작했으며, 그것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에 결정적인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리하여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가 탄생하게 되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예수 시신 안고 있는 마리아 모습 조각미의 극치

     
    베드로 성당은 뭐니 뭐니 해도 미켈란젤로와 베르니니가 주인공이다. 미켈란젤로는 16세기 르네상스를, 베르니니는 17세기 바로크 양식을 절정에 올려놓은, 두 사람 모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조각가들이다.

    먼저 미켈란젤로의 작품으로는 그 유명한 ‘피에타’(사진)가 있다. 성당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피에타가 있는 곳이다. 피에타란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말인데, 미술에서는 성모님이 죽은 아들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을 그리거나 조각한 것을 가리킨다.

    베드로 성당에 있는 ‘피에타’는 미켈란젤로가 24세 때 제작한 것이다. 아들의 시신을 안고 슬픔에 잠겨 있으나 결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성모님의 모습은 너무도 젊고 아름다워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죽은 예수님의 몸은 축 늘어져 있으나 인체의 골격은 물론 손등의 핏줄까지 정교하게 묘사되었다. 어쩌면 서 있는 형태보다 훨씬 더 만들기 어려웠을 죽은 인간의 모습을 스물 네 살의 미켈란젤로는 완벽하게 만들어냈다. 작품 전체를 감싸고 있는 성모님의 옷 주름은 부드러운 찰떡으로 빚어놓은 듯 감미롭다.

    ‘피에타’는 사실적 묘사 측면에서 본다면 미켈란젤로의 예술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그는 이 작품 이후 사실적 조각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였다. 향후 그의 예술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세계의 아름다움과 완벽함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형태를 통해 작가의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쪽으로 향했다. 그것은 4세기 후에나 등장한 현대 미술의 개념이기도 하다.

    성당 중앙으로 발걸음을 향하면 거대한 돔 아래에 서게 된다. 이 돔 역시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것으로 높이는 무려 120m에 이른다. 베드로 성당을 하늘에서 보면 이 돔을 중심으로 정사각형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 같은 단순한 구조를 설계한 것이 바로 미켈란젤로이다.

    돔 아래에는 제대가 있는데 이 제대를 둘러싼 구불 구불한 기둥 모양의 거대한 청동 덮개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베르니니의 작품으로 덮개를 받치는 기둥의 높이만도 29m가 된다. 베르니니의 작품 중에 대주교좌(大主敎座)도 있다. 주교좌가 있는 성당을 주교좌 성당이라 부른다. 세속이든 종교든 의자는 권위의 상징인 모양이다. 베르니니가 만든 성 베드로 주교좌는 너무도 화려하고 커서 정작 어디에 앉아야 할지 모를 정도이다. 역시 청동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네 명의 교부(敎父)가 의자를 받치고 있고, 하늘에서는 성령이 내려오고 있으며, 성령을 감싸고 있는 한 무리의 천사들이 구름떼에 둘러싸여 있는 형태로서 바로크 예술의 화려함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보여주려는 듯 하다.

    베르니니는 교황님의 장례 묘비도 두점 제작했다. 하나는 우르바노 8세의 무덤이고 다른 하나는 알렉산데르 7세의 무덤이다. 사자(死者)가 중앙에 앉아 있고 그 아래에 의인화된 인물들이 서 있는 형식인데 이후 미국이나 유럽의 광장에 세워진 수많은 기념비들이 바로 이 작품을 응용한 것이다. 모방은 어렵지 않으나 창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켈란젤로와 베르니니가 위대한 이유는 그들이 창조자들이기 때문이다.
     

    로마의 핵심은 바티칸이다. 바티칸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 나서도 최소한 1시간 정도는 줄을 서서 기다려야 입장표를 살 수 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표사느라고 2시간 이상을 길에 허비해야 하니 서두르는 것이 좋다.

    바티칸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스탄자 디 라파엘로라 불리는 라파엘로의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진 방들과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와 벽화가 있는 시스티나 예배당이다. 바티칸의 모든 푯말은 방문객들을 이 두 곳으로 안내하고 있다.

    시스티나 예배당은 교황의 전용 예배당(chapel)이자 신임 교황을 선출하는 곳으로서 교황청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데 바로 이곳에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와 벽화가 있다. 시스티나라는 말은 예배당을 건축토록 한 교황 식스투스 4세(1471~1484)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는 초기 르네상스의 대가들이었던 보티첼리, 핀투리키오, 페루지노, 기를란다요를 불러 그곳을 장식하도록 명했다. 페루지노는 라파엘로의 스승이고, 기를란다요는 미켈란젤로의 스승이다.

    시스티나 예배당에 들어서는 순간 그러나, 이들 15세기 대가의 벽화는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대신 한 눈에 관람객을 압도하는 것은 미켈란젤로의 거대한 천장화와 벽화이다. 미켈란젤로는 1408년부터 1512년까지 4년에 걸쳐 이곳에 천장화를 그렸다. 고개를 위로 들어 천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한 인간이 그토록 거대한 공간을, 일찍이 유래가 없던 방식으로 채웠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 의문을 갖게 된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예술가들 중에서 미켈란젤로를 가장 위대한 예술가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미켈란젤로에게 이 일을 주문한 사람은 베드로 대성당 재건축을 추진했던 교황 율리우스 2세였다. 그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직접 군대를 지휘하는 전투적인 교황이었지만 예술을 사랑했고, 그것의 가치를 알았던 전형적인 르네상스 시대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알고 썩힐 리 없었다. 요즘 문화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문화마케팅, 문화전쟁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지만 이미 500년 전에 그는 문화의 위력을 알고 있었다.

    율리우스 2세는 처음에는 미켈란젤로에게 자신의 영묘를 제작하도록 명령했었다. 조각가로서 이름을 날리던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대규모 영묘를 주문받게 되자 신바람이 나서 작품을 계획했다. 그것은 등신대 크기의 조각상이 40점이나 들어가는 그야말로 거대한 영묘였다. 미켈란젤로는 직접 카라라 대리석 산에 가서 돌을 채석했다.

    그가 선택한 대리석이 지중해에서 뗏목을 타고 로마의 테베르 강에 도착하여 막상 돌 값을 지불해야 하는 순간 비정한 교황은 작가를 만나주지도 않으며 홀대했다. 이에 분개한 미켈란젤로는 더 이상 교황님이 시키는 일은 하지 않겠다며 가지고 있던 짐들을 처분하고 고향 피렌체로 내려와 버렸다. 교황은 뒤늦게 외교 서신을 보내고, 사람을 보내는 등 공을 들인 끝에 어렵사리 작가를 만날 수 있었는데 장소는 로마가 아니라 볼로냐였다. 미켈란젤로가 교황이 거주하던 로마로 가지 않고 제3의 장소를 택했다는 것은 권력 앞에서 굽히지 않았던 작가의 자존심이었다.


    38세 요절 라파엘로 ‘전설’ 로 남아
    교황 집무실에 프레스코화 그린뒤 ‘3대 거장’ 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그리고 라파엘로 이 세 사람을 르네상스 시대의 3대 거장으로 꼽는다. 이들 중 라파엘로(1483~1520)는 막내였다.

    움브리아 지방의 작은 도시 우르비노에서 태어난 라파엘로는 스무살이 갓 넘은 1504년 넓은 세계에서 놀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피렌체에 왔다. 당시 피렌체에는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시청에서 벽화를 제작하고 있었다.

    이 두 거장이 감히 접근조차 쉽지 않았던 괴팍한 천재들이었다면, 라파엘로는 상냥하고, 겸손하며, 붙임성 있는 젊은이였다. 그런 그에게 당대 최고의 무대에 설 기회가 주어졌다. 동향(同鄕) 사람이자 로마 베드로 성당의 건축가였던 브라만테의 추천으로 바티칸에 입성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자신의 집무실이었던 ‘서명의 방’이라 불리던 스탄자 디 세냐투라의 장식을 주문했고, 화가는 이 방의 천장과 벽을 신학, 철학, 시를 주제로 한 그림으로 장식했다. 동 시기, 동일 장소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두 거장이 동시에 작업을 한 전대미문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라파엘로가 그린 그림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등장하는 그 유명한 ‘아테네의 학당’(사진)을 비롯한 프레스코화다. ‘아테네의 학당’은 전성기 르네상스 회화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웅장한 건축물을 배경으로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의 명망 있는 철학자들의 모습을 그린 것인데 다빈치는 플라톤의 모습으로, 자신을 추천해준 건축가 브라만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습으로 그렸다. 인물 각자의 표현은 마치 실제 인물들을 사진으로 찍어놓은 듯 정교하고, 자연스러우며, 배경과 인물들의 공간적 조화는 뛰어났다. 비례, 조화, 균형으로 대표되는 르네상스 고전주의 회화가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라파엘로는 바티칸에서 모두 4개의 방에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첫 번째 방이 고전주의 회화의 절정을 보여주었다면, 두 번째 방에서는 자신이 애써 달성한 회화적 성과를 스스로 깨고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역시 창조의 세계를 추구했던 진정한 예술가였던 것이다.

    라파엘로는 일약 스타가 되었고, 사람들은 이 젊은이의 그림을 칭송했다. 그의 사근사근한 성격은 과격한 미켈란젤로에게 혼쭐 났던 후원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이 쇄도했고, 심지어는 그를 추기경으로 선출하자는 의견까지 나왔다고 하니 그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의 질투를 샀던 것일까. 그는 한창 나이인 38세에 요절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사랑하는 애인 빵집 딸에게 유산으로 남겼다. 라파엘로의 작품으로 알려진 바티칸에 있는 나머지 두 개의 방은 그의 사후에 제자들이 그린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홀로 외로움 속에서 작업을 했다면, 라파엘로는 제자들을 고용하여 방대한 작업을 진행시켰다. 어찌 보면 세속적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당시에는 이런 공동작업이 오히려 일반적인 것이었다. 이후 19세기 초 신고전주의 양식이 유행하기까지 3세기 이상 라파엘로는 서구 회화의 지존의 자리를 지켰으며, 예술가들의 전설이 되었다.
     

    인간탐구의 절정 ‘천지창조’
    미켈란젤로, 시스티나 예배당에 4년간 그려 


     

    그림은 그리기 싫다는 미켈란젤로에게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그리라고 명령했다. 당시 미켈란젤로는 ‘피에타’ , ‘다비드’ 와 같은 걸작을 통해 조각가로서는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었지만 화가로서의 경력은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다. 그 자신이 ‘조각가 미켈란젤로’ 라고 서명을 할 정도로 조각을 예술 중의 으뜸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는 일을 아예 내키지 않아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교황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미켈란젤로가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운 것은 피렌체의 기를란다요 공방에서였고, 그것도 겨우 1년여에 지나지 않았었다. 스승 역시 30년 전 교황의 부름을 받고 시스티나 예배당에 벽화를 그린 거장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조수를 몇 명 채용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물감을 준비하는 조수 한명만을 남겨두고 모두 돌려 보내고 혼자 작업에 착수했다. 1508년부터 1512년까지 만 4년 동안 그는 외로움 속에서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말이 쉽지 혼자서 그 높은 천장에 그림을 그리자면 엄청난 육체적 고통이 수반된다. 잠시 고개를 올려서 그림을 보려해도 고개가 아플 정도인데 4년간 누운 자세 혹은 머리를 쳐든 자세로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해보라. 그는 결국 그 일을 해냈고, 작업이 끝나고 난 후 몸이 굳어져서 몇 달 동안을 그림 그리던 자세로 지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림의 큰 뼈대를 보자면 중앙의 사각형들 안에는 천지창조를 그렸다. 하느님이 빛과 어둠을 가르는 장면, 바다와 육지의 동물들을 창조하는 장면, 아담의 창조, 이브의 창조, 뱀으로부터 유혹받은 아담과 하와, 낙원으로부터의 추방 그리고 노아의 홍수 등이 그려져 있다. 천장의 가장 자리에는 육중한 인물들이 앉아 있는 모습이 있는데 예수의 재림을 예언한 구약성서의 예언자들과 무녀들이다. 마지막으로 예언자와 예언자 사이 그리고 벽의 가장 위쪽 반달 모양에는 예수의 조상들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이들 장면 사이사이에 각양각색의 자세를 취하고 앉아 있는 젊은 남성들의 나체와 역시 나체의 아이들 등이 그려져 있다.

    초기에 그린 그림들은 약간의 부자연스러움과 색채의 부조화가 발견되나 미켈란젤로는 곧 회화의 최고 경지에 도달했다. 그는 인간의 가장 어려운 자세를 총 망라하여 그리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이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자세를 다 그려 놓았다. 그것은 중세 이후 서양의 화가들이 3세기에 걸쳐 추구해온 인간에 대한 탐구의 절정이었다. 그가 그린 인체들은 에너지가 넘치고 아름다워서 인간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사랑의 표현으로 보인다. 흔히 르네상스 시대를 인간 중심의 시대, 혹은 휴머니즘의 시대라고 표현하는데 미켈란젤로의 이 천장화는 르네상스 정신의 결정판이었던 것이다.

    이 그림이 탄생된 이후 서구 회화의 판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이들은 이 시스티나 예배당을 모르고서는 그림을 그릴 수가 없게 되었다. 당대의 미술사가 바사리는 미켈란젤로를 신에 비유했다. 천재의 개념도 바로 미켈란젤로에게서 나왔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동경했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들보다 동시대인 미켈란젤로를 더 위대한 인물로 여겼다. 고대를 능가한 근대인의 탄생을 지켜보았던 것이다.
     

    외설이유로 ‘덧칠 수모’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제자가 나체에 가리개 그려

     
    천장화를 그리고 난 지 30년이 지난 1536년쯤 새로 교황이 된 바오로 3세는 또 다시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예배당의 벽화를 그릴 것을 주문했다. 그 때 미켈란젤로의 나이 60이었다. 이제 늙어서 몸도 말을 듣지 않고,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못하겠다는 미켈란젤로에게 교황이 말했다.

    “나는 당신의 그림을 갖기 위해 30년을 기다렸소. 이제 교황이 되었으니 내 명령을 따라야 하오!”

    그렇게 해서 미켈란젤로는 늙은 몸을 이끌고 또 다시 이 거대한 벽을 혼자서 그리는 일에 착수했다.

    주제는 최후의 심판이다. 최후의 심판이란 인류 종말의 날, 심판자인 예수님이 지상에 내려와서 인간의 생전의 행업에 따라 심판을 하여 선행한 자는 천국으로, 악행한 자는 지옥으로 보낸다는 주제다.

    그림을 살펴보면 그림 중앙에 심판자 예수님이 내려오고 있다. 한 손을 위로 올린 근엄한 모습이다. 그 옆에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를 비롯하여 성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스도의 바로 아래에는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천사들이 나팔을 불고 있고, 그 양 옆에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사람들과 천국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가장 아랫부분을 보면 왼쪽에는 심판을 받기 위해 죽음에서 깨어나는 사람들 그리고 오른쪽은 지옥 장면이다.

    원래는 예수님과 성모님을 제외하고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였다. 하루는 비아지오 다 체세나라는 추기경이 교황과 함께 한창 그림에 열중하고 있는 미켈란젤로를 방문했다.

    “신성한 교황 성하의 예배당에 이런 벌거벗은 나체들은 어울리지 않는구려.”

    이 말을 들은 미켈란젤로는 그 추기경의 얼굴을 지옥의 사자 미노스의 얼굴로 그려놨다. 말 한마디 잘못한 덕분에 그는 지금까지도 지옥의 사자 모습을 하며 관객을 맞고 있다.

    이 그림이 공개되자 사람들 사이에서는 놀람과 찬사 그리고 비난이 가득했다. 놀라운 그림이라며 칭찬한 이들이 있었는가 하면, 이건 완전히 벌거벗은 이들로 가득한 목욕탕이라고 비난한 사람들도 있었다. 심지어는 그림을 모두 파괴해버리자는 과격한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맞서는 반종교개혁이라는 가톨릭 내부의 정화운동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 작품은 1563년 트렌트 공의회에서 본격적으로 토론의 대상이 되었고 이듬해에 외설적이란 이유로 ‘수정’ 이라는 형벌을 받게 된다. 결국 미켈란젤로가 사망하던 바로 그 해에 교황청은 그의 제자였던 다니엘라 다 볼테라라는 사람을 시켜서 나체의 중요한 부분을 각양각색의 가리개로 덧칠하여 가리게 한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말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전통적 형식을 초월하여 모든 형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작가의 정신세계를 보여준다. 그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를 성서와 문학 사이를, 그리고 전통과 혁신 사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제도권이 권위를 내세울 때, 예술적 직관을 교훈적 규범으로 대신하려 할 때, 권위의 이름으로 예술가를 억압하려 할 때, 그는 교회를 비롯한 모든 제도권과 맞서 싸웠다. 최후의 심판은 미켈란젤로의 이 같은 사상이 함축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걸작이다.
     

    ‘바로크 조각 寶庫’ 보르게세 미술관
    베르니니 작품 가득… ‘예수회 성당’은 대표적 건축

     
    사람들은 로마를 ‘영원의 도시’라 부른다. 로마인들로부터 시작된 이 도시의 영광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의미일까?

    로마는 서구 역사의 살아있는 무대이자 역사적인 예술품들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도시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로마에 대한 믿음과 전설은 유효한 듯하다.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가 절정에 올려놓은 르네상스 이후 로마 예술이 다시 한번 번영한 것은 바로크 시대인 17세기였다. 바로크 예술은 한마디로 화려함의 절정이다. 대표적인 곳이 아마도 베르사유 궁전일 것이다. 하지만 그 바로크 예술이 처음선을 보인 곳은 로마였다. 당시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 교회는 종교개혁 이후 뼈를 깎는 내적 개혁을 거쳐 거듭났다. 그것이 예술로 표현된 것이 바로크 양식이다.

    바로크 예술이 보여준 화려함은 승리한 가톨릭 교회의 자신감의 표현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예수회 성당은 바로크 예술이 첫 선을 보인 곳이다. 겉에서 보면 평범한 교회처럼 보이나 일단 안에 들어가면 화려함이 극에 달한다. 모든 건축 자재는 각양각색의 진귀한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천장을 올려다보면 천상이 그곳인 듯 구름 위에서 성인들과 예수,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수많은 천사들과 함께 보인다.

    예수회 성당이 바로크 건축의 극치라면 바로크 조각의 진면목은 보르게세 미술관에서 즐길 수 있다. 이 미술관은 가히 조반니 베르니니의 미술관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이 조각가의 대표작들이 여러 점 소장되어 있다.

    바람둥이 아폴로가 요정 다프네의 몸에 손을 대는 순간 다프네의 몸이 나무로 변해 버렸다는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한 ‘아폴로와 다프네’는 대리석 조각의 또 다른 지평을 연 걸작이다. 조각이 더 이상 땅을 굳게 디디고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공간을 날 듯 운동감이 가득하며, 손과 몸통이 나무줄기와 잎으로 변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한 이 작품은 이후 어떤 조각가도 다시는 재현하지 못한 정교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보르게세 미술관은 베르니니가 생존했던 17세기 최고의 예술 후원 가문이었던 추기경 시피오네 보르게세의 공원이자 별장이었다. 그곳은 티치아노, 카라바조, 라파엘로를 비롯하여 명성있는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가득 차 있다. 한 가문의 진귀한 소장품들이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으니 당시 예술에 대한 그들의 열정과 후원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후원 없이 예술은 탄생할 수 없다. 결점이 많은 이탈리아 사람들이지만 예술에 대한 안목과 열정만큼은 칭송받아 마땅할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인 바로크 시대의 불멸의 거장 카라바조의 작품은 산 루이지 프란체시 성당에서 볼 수 있다. 단 한점의 작품으로도 유럽의 미술관에서 특별전을 여는 이 작가의 작품이 이 교회에는 여러 점 있다. 그 밖에도 로마에는 수많은 미술관과 건축물들이 있다.

    칼럼을 시작한지 일년이 지났다. 문화일보에 고정 지면을 할애받을 수 있었던 것이 무척 영광이었고, 글을 쓰는 매순간 행복했다. 이제 나의 부족한 칼럼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미술사를 전공한 필자에게 미술사가 아름다운 학문임을 다시금 느끼게 해준 소중한 기회였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독자께 감사드린다. 기꺼이 사진을 촬영해준 나의 친구이자 남편인 조각가 한진섭씨에게도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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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1’ 능가한 폼페이 최후의 날 - 폼페이

    ‘9·11’ 능가한 폼페이 최후의 날 - 폼페이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14 14:21

    ‘9·11’ 능가한 폼페이 최후의 날 - 폼페이
    플리니우스 편지에 생생하게 기록돼 





     
    기원 후 79년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했다. 화산 아래의 도시 폼페이가 순식간에 용암 속에 묻혔다. 언젠가 이탈리아의 TV에서 폼페이 최후의 순간을 다룬 다큐를 본 적이 있다. 이라크 전쟁 현장, 혹은 9·11 뉴욕 쌍둥이 빌딩의 폭발 현장을 보여주듯 생생하게 재현한 프로그램이었다.

    폼페이에 관한 자료가 여럿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한 리포터가 참사 현장에서 생생하게 현장을 중계하듯 묘사해 나간 한 장의 편지가 남아 있다.

    편지를 쓴 주인공은 로마의 대 역사가 노(老) 플리니우스의 조카로 당시의 대 문호이자 역사가였던 타치투스에게 보낸 것이다.

    노 플리니우스는 ‘박물지, Historia Naturalis’라는 전 37권으로 이루어진 대 백과사전을 쓴 로마의 역사가인데 그는 화산이 폭발하던 당시 나폴리 만의 해군 제독으로 재임 중이었고, 화산 폭발 때 현장에서 사망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로마에 관한 지식의 대부분은 바로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 의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함대의 함장이었던 그는 충분히 피신할 시간과 기회, 도구가 있었지만 스스로 참혹한 죽음의 현장에 몸을 던졌다. 군인으로서, 학자로서, 또한 인간으로서 참으로 위대한 인물이었지만 그가 선택한 생애 마지막 순간은 그가 남긴 모든 업적 이상으로 위대했다. 여기에 플리니우스의 최후를 지켜본 그의 조카의 편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삼촌은 당시 나폴리 만에서 함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9월 9일 나의 모친은 삼촌에게 이상한 구름이 생겼다고 알렸다. 삼촌은 그것이 잘 보이는 곳으로 가기 위해 신발을 신고 나갔다. 큰 구름떼가 보였는데 그것은 흡사 가지가 위로 둥글게 뻗은 잣나무와 같았다. 과학자였던 삼촌이 더 가까이에서 관찰하고자 작은 배를 준비시켜서 집에서 나가려 할 때 카스코의 아내가 달려와서 산 아래 있는 자신의 별장이 위험에 처했다며 배로 피신시켜 달라고 애원했다. 과학자적 호기심은 인명을 구출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바뀌었고 삼촌은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구출하려고 외출의 목적을 바꿨다. 많은 이들이 탈출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이미 잿더미가 배를 덮치고 가까이 갈수록 재의 농도는 짙었다. 배를 사타비아 쪽으로 몰았다. 삼촌의 친구 폼포니아누스가 보였기 때문에 그를 구출하기 위해 배를 몰았다. 공포에 떨고 있는 친구를 배에 오르게 하고 그가 가지고 있던 물건들도 싣게 했다. 그리고 서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함을 가장하며 저녁식사를 했다.

    한편 베수비오 화산에서 용암의 불덩이가 더 넓게 퍼졌다. 밤이 어두우니 불빛이 더욱 빛나 보였다. 삼촌은 사람들을 위로하였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 사이 용암재가 집을 덮쳐 더 이상 지체하다가는 빠져나올 수가 없다고 판단하자 삼촌은 일어나서 폼페이아노에게 갔다. 그들은 의논 후 밖으로 나오기로 결정했다. 화산재가 비 오듯 쏟아졌고 점점 집을 덮쳐 갔다. 해변에 나가서 배를 탈 수 있는지 살펴보았다. 용암이 다시 덮쳤다. 두 노예의 부축을 받고 삼촌이 피신을 시도했다. 그러나 기관지에 염증이 있었던 삼촌은 먼지와 가스로 인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불을 덮은 채 누워 있었는데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 그는 죽어 있었다.”
     

    폼페이 건축물의 美와 견고함
    ‘신비의 별장 ‘ 벽화 등은 르네상스 작품 능가

     
    폼페이는 서기 63년 대지진으로 도시 전체가 파괴되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힘을 모아 재건에 앞장섰으나 그로부터 16년 후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이번에는 도시 전체가 용암에 묻혀 버렸다. 그 후 1700년 동안 도시는 그 존재 자체가 잊혔다가 18세기 초 사람들이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지하 도시의 잔재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후 18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인 발굴 작업이 시작되어 195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18세기 유럽에서는 고전, 고대 문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빙켈만과 같은 유명한 고고학자가 출현하여 고대 그리스 미술에 대한 연구를 본격화했다. 빙켈만은 독일인으로서 로마에서 연구하면서 근대 미술사의 체계를 확립한 중요한 학자이다. 빙켈만으로부터 시작된 그리스 연구가 고대 로마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이루어진 폼페이의 발견과 발굴은 당시 서구 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꿔 놓는 대사건이었다. 폼페이의 회화, 조각, 공예품이 당시 미술계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고, 의상, 가구, 공예, 실내 디자인 심지어는 여인의 헤어스타일에 이르기까지 생활 곳곳에 영향을 미쳤다. 폼페이가 되살아난 것이다.

    18세기 중·후반 유럽에 신고전주의라는 미술양식이 탄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현재 폼페이에 남아 있는 유적들은 당시 이 도시가 얼마나 화려했으며 예술적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폼페이는 당시 로마제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그곳의 건축물과 유물을 통해 고대 로마제국 시대의 생활과 문화 수준도 추측할 수 있다.

    폼페이의 건축물은 2000년 전에 지어졌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고, 견고하며, 예술적이다. 대부분의 벽은 수준 높은 벽화로 장식이 되었으니 오늘날의 우리들보다 그들이 오히려 예술과 더 친숙했다.

    현재 많은 저택과 별장이 남아 있지만 그 중에서 ‘신비의 별장’이라는 곳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별장은 아트리움이라 불리는 집 중앙에 사각형의 중정이 있고 중정 주변은 회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회랑을 비롯하여 집 곳곳을 벽화로 장식했다. 그 중에서도 ‘매질하는 여인’이라는 광경이 있는 벽화는 당시 여인들의 모습과 생활상을 그리고 있어서 흥미롭다. 춤추는 여인, 매질하는 여인, 매를 맞고 동료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위로받고 있는 여인의 모습 등 여인들의 일상이 그려져 있는데 이들의 모습은 1500년 후 르네상스 시대에서나 볼 수 있는 조화, 절제, 우아미를 보여주고 있다. 인체의 비례는 이상적인 비례인 8등신으로 표현되었고, 움직임이 자연스러우며, 공간의 표현 역시 탁월하다. 이후의 미술이 이에 미치지 못함을 보노라면 미술이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교가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음을 이들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폼페이 근처에는 우리나라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폼페이와 같은 운명을 맞이한 에라콜라노라는 마을이 있다. 폼페이를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그곳도 방문하길 권한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폼페이보다 온전하게 유적이 남아 있는가 하면, 폼페이에서는 볼 수 없는 독창적인 건축 장식들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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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희교수의 이탈리아 예술산책 - ‘붉은색 지붕으로 뒤덮인 도시’피렌체

    고종희교수의 이탈리아 예술산책 - ‘붉은색 지붕으로 뒤덮인 도시’피렌체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14 14:02
    고종희교수의 이탈리아 예술산책 - ‘붉은색 지붕으로 뒤덮인 도시’피렌체
    고딕양식 대성당은 돔 지름이 40m 달해 

     




    피렌체의 중앙역에서 밖으로 나오자마자 대형 교회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역시 피렌체답게 대성당도 크군.” 내가 맨 처음 피렌체를 방문했을 때 했던 생각이다. 그러나 그곳은 대성당이 아니라 시내에 있는 많은 교회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피렌체에는 대성당을 중심으로 걸어서 20분 이내에 수많은 성당과 미술관들이 즐비해있다. 이탈리아 어느 도시를 가도 발에 채는 것이 미술관과 교회라지만 피렌체가 특별한 이유는 이들 교회와 미술관 대부분이 미술사상 가장 중요한 작품들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이 교회에서 5분쯤 걸으면 진짜 대성당이 나온다. 토스카나 최대의 웅장한 고딕 건축물이다. 대성당은 특히 거대한 돔 때문에 유명한데 그것은 피렌체의 상징이자 르네상스 건축을 새로 쓰게 한 브루넬레스키의 작품이다.

    고딕 시대에 만들기 시작한 이 성당은 돔의 지름이 40m나 되는 바람에 기술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뻥 뚫린 상태로 남아 있었는데 브루넬레스키라는 건축가가 공법상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거대한 돔을 마침내 덮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성당 못지않게 중요한 곳이 있으니 바로 대성당의 부속 세례당과 종탑이다. 모두 대가들의 작품으로 만들어진 곳이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자.

    그 유명한 우피치 미술관은 르네상스 회화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지만 1년 365일 언제 가더라도 티켓을 사는 데만 2시간 이상 줄을 서야 하는 단점이 있다. 시간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면 두 시간을 기다리는 대신에 우피치보다는 덜 알려졌으나 질에 있어서는 그에 못지않은 강 건너편의 피티 궁(Palazzo Pitti)으로 향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이 궁은 한 때 메디치가의 궁으로 쓰였는데 메디치가 사람들은 궁과 사무실이었던 우피치(영어의 office)를 연결하기 위해 그들만의 밀폐된 통로를 만들었다. 노출을 꺼린 메디치가 사람들이 신변 보호를 위해 생각해냈다는데 화려한 예술 뒤에 감추어진 정치적 잔혹함의 흔적이라 하겠다.

    피티궁은 지금은 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는데 티치아노와 라파엘로의 대표적인 초상화들을 비롯하여 많은 회화 작품들과 공예품들이 있으니 우피치를 못 본 섭섭함 정도는 이곳에서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다. 이 궁의 내부는 당시 군주들이 살았던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볼 수 있도록 모든 방들을 공개하고 있다.

    한때 피렌체를 호령했던 사람들의 내밀한 침실을 직접 볼 수 있으니 세월의 무상함은 여기서도 느껴진다. 각 방들은 지금은 비록 빛이 바랬지만 방주인에 걸맞은 색상의 벽지와 가구, 커튼으로 장식되어 있어서 실내 디자인에 대한 그들의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이 궁이 자랑하는 광활한 정원은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으로 대표되는 근대 유럽 정원의 원조라 한다.

    피렌체 여행의 백미를 만끽하려거든 근처의 피에솔레라는 산골 마을을 방문하자. 이곳은 피렌체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드라이브를 하기 위해 즐겨 찾는 곳인데 특히 맛 좋은 피자집들이 있어서 값싸고 맛있는 피자를 즐길 수 있다. 이 산동네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붉은색 테라코타 지붕으로 뒤덮인 피렌체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해가 질 무렵 여기서 피렌체를 내려다보면 도시 전체가 노을에 물들며 거대한 붉은 꽃밭을 만들어내는 장관 앞에서 여행의 행복감에 빠질 것이다.
     

    금기에 도전한 ‘르네상스의 도시’ 피렌체
     
     
    피렌체에는 폰테 베키오라는 다리가 있다. 오래된 다리라는 뜻이다. 수백년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는 듯 그야말로 낡고 오래된 모습인데 이 다리의 양쪽 가에는 의외로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값비싼 보석을 파는 고급 금은방들이 즐비해있다. 옛것과 새것, 낡음과 귀함이 혼재해 있는 곳이다.

    이 다리를 뒤로 하고 강을 따라 5분 쯤 걷다 보면 카르미네 성당이 나온다. 겉보기에 화려하지도 인상적이지도 않은 평범해 보이는 교회지만 바로 이 안에서 르네상스 회화가 시작되었다. 교회에 입장하는 것은 무료지만 예배당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입장료를 내야하며 관람하는 시간도 10분 이내로 제한되어 있다.

    서양의 교회 내부에는 보통 카펠라라 불리는 작은 예배당(chapel)들이 있다. 무반주 합창을 아카펠라라고 부르는데 바로 교회 안에서 불렀던 성가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카펠라는 보통 교회에 기부를 많이 하는 가문의 소유가 되었다. 일단 카펠라를 소유하게 되면 그들은 앞다투어 화가와 조각가들을 초청하여 장식하게 했다. 교황 선출의 장소인 시스티나 예배당도 당시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미켈란젤로에게 천장화와 벽화를 주문해서 더욱 유명해졌다.

    카르미네 성당 안에는 브랑카치라는 가문의 가족 예배당이 있었다. 가문의 수장인 필립포 브랑카치는 피렌체의 상인이자 정치인이었다. 그는 예배당의 벽화를 장식하기 위해 마솔리노라는 화가를 초빙했다. 당시 화가들은 혼자서 일을 다 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조수들을 거느리며 작업을 했는데 이 화가는 자신의 고향 후배인 마사초라는 어린 화가에게 일거리를 준다고 불렀다. 두 사람이 각각 그린 ‘아담과 하와’가 있는데 후배가 그린 그림이 바로 르네상스 회화의 탄생을 알리는 작품이 되었다.

    선배의 그림은 중세의 전통을 고수한 전형적인 스타일이었지만, 후배의 작품은 지금까지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과감한 형태였다. 마사초는 태고적 인류의 첫 조상에게 일어난 비극을 마치 방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처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남자가 이렇게 엉엉 우는 모습을 보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신성한 교회 안에 외설에 가까운 남녀의 누드 그림을 허락한 것이 인상적이다.

    나는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이런 누드가 우리나라의 교회 안에도 그려질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곤 하지만 아무래도 그건 불가능할 것 같다. 아무리 예술의 자유를 인정하는 현대라지만 교회는 여전히 장소에 합당한 그림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424년 피렌체의 한 교회에서 이 별로 합당하지 않은 그림을 허락한 덕에 르네상스 회화가 탄생했다.

    르네상스는 금지된 것에 도전한 끼 많은 예술가들이 만들어 냈다. 이 작품을 그린 마사초를 시작으로 피렌체에서는 천재 예술가들이 봇물처럼 탄생했다. 보티첼리, 다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는 많은 예술가들 중의 일부일 뿐이다. 어떻게 한 도시에서 그 많은 예술가들이 동시대에 탄생할 수 있었을까?

    그 이유야 여러가지겠지만 나는 그 공로를 예술후원자들에게 돌리고 싶다. 그들은 재능있는 예술가들을 발굴하고, 예술작품을 유치하는 것을 최고의 자부심으로 여겼으며, 작품 값을 지불하기 위해 아낌없이 지갑을 열었던 사람들이다.
     

    피렌체 대성당의 명물 ‘청동문’ 반세기에 걸쳐 완성 ‘예술 극치’
     
     
    피렌체 방문의 첫 코스는 단연 대성당이다. 대성당의 이름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즉 꽃의 성모 마리아라는 뜻이다. 이 성당은 예술의 도시 피렌체의 상징답게 규모는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과 밀라노의 대성당에 이어 이탈리아에서 세번째지만 소장 예술품의 중요도는 베드로 성당에 견줄 만하다.

    피렌체 대성당은 조토의 종탑, 세례당 그리고 대성당 부속 박물관이 함께 어우러진 복합공간이다. 어느 곳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역사의 흔적들이다.

    그 중 대성당 부속 박물관에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비롯하여 한 때 이 성당을 장식했던 르네상스 거장들의 조각, 회화, 금은 세공품들로 가득하다. 궂은 날씨와 공해로부터 작품을 보호하기 위해 원래 성당에 있던 작품들을 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 대성당을 비롯하여 건물 외벽에 보이는 조각들은 모두 모조품이며 진품은 이곳 박물관에서 감상할 수 있으니 평범한 여행을 거부하는 여행객이라면 방문을 권한다.

    대성당과 마주한 곳에 성 요한 세례당이 있다. 흰색 대리석과 초록색 화강석이 어우러진 팔각의 얼룩무늬 건물이다. 과거 그리스도교 국가들은 세례의식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세례당을 독립 건물로 짓는 경우가 있었다. 대성당 입장은 무료이나 세례당 입장은 유료다. 걸작을 보려면 지갑을 열라는 그들만의 상술이다. 세례당에 들어가면 천장이 온통 ‘최후의 심판’을 그린 모자이크로 덮여 있는데 그것은 현존하는 중세 모자이크 중에서 단연 으뜸이다. 천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어도 원래의 찬란한 색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세례당 앞에 서 있노라면 관광 가이드들이 청동문 앞에서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이야기를 간추리면 이렇다. 1401년, 피렌체 시는 세례당의 청동문을 제작할 조각가를 뽑기 위해 공모전을 공포했다. 내로라하던 조각가들이 다 응모했는데 최종적으로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가 선정되었다.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던 심사위원들은 두 사람이 공동 작업을 하라고 지시했으나 브루넬레스키가 사양하는 바람에 기베르티 혼자서 청동문을 제작하게 되었다. 작품 제작을 포기한 브루넬레스키는 원근법이라 불리는 수학적 투시도법을 발명한 건축가로서 이후 대성당 돔을 완성하는 공모전에서 선정되어 지름 40m가 넘는 거대한 대성당 돔을 완성한 천재 건축가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 사람들은 좋은 작가를 선정하기 위해 공모전이라는 제도를 적절하게 운영했던 것이다.

    기베르티가 청동문을 완성한 것은 작품제작에 착수한 지 23년이 지난 1424년이었다. 문 한 쌍을 만들기 위해 20년 이상이 소요되었다. 그로부터 1년 후 그는 이 세례당의 또 다른 청동문을 제작해달라는 주문을 맡았는데 그것이 바로 미켈란젤로가 그 아름다움에 반하여 별명을 붙여줬다는 ‘천국의 문’이다. 이 문을 만드느라 그는 또 다시 22년을 바쳤다. 기베르티는 천재 예술가의 반열에 서지는 못하였으나 청동문 2개를 완성하는 데 50년 가까운 세월을 바친 진정한 예술가였다. 그 느림의 미학 덕분에 오늘날까지 이 청동문은 관광 가이드들의 목청을 돋우게 하는 피렌체 대성당의 명물이 되고 있다.
     

    ‘피렌체 예술’ 뒤에는 메디치가문이…
     
     
    메디치가(家) 없는 피렌체란 생각하기 어렵다. 피렌체가 역사상 빛나는 주역이 되었던 시기는 1400년쯤부터 1600년쯤까지 약 2세기 동안이다. 이 시기는 또한 메디치 가문의 영광의 시기와도 일치한다.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 역사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초였으며 은행업을 했던 이 가문이 교황청의 재정후원을 담당하게 되면서 일약 유럽의 갑부로 도약하게 되었다. 메디치가 은행은 이탈리아의 주요 도시는 물론이려니와 멀리 네델란드에까지 지점이 있었다고 한다.

    메디치 가문 사람들 중에서 역사적 조명을 받은 첫 인물은 코시모 일 베키오이다. 그는 ‘피렌체의 국부(國父)’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로 당시 피렌체 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코시모는 무엇보다도 건축물 건립에 신경을 썼다. 성 로렌초 교회, 성 마르코 수도원, 메디치 궁(Palazzo Medici)이 대표작이다. 세 건물 모두 초기 르네상스 건축 양식을 대표하며 오늘날에는 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 중에서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한 성 로렌초 교회는 최초의 르네상스 식 교회다. 이 교회는 특히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데 이유는 교회의 광장을 중심으로 피렌체에서 가장 큰 시장이 서기 때문이다. 피렌체의 특산품이라 할 수 있는 각종 가죽제품과 실크 제품을 여기서는 비교적 싼 값으로 살 수 있으며, 수다스러운 이탈리아 상인들과 흥정을 하는 재미를 맛볼 수도 있다. 성 로렌초 교회는 메디치가의 가족 교회이다. 한 가문의 교회라 하기엔 그 규모가 대단히 크지만 무엇보다도 소장 예술품의 질을 보면 메디치가 왜 예술 후원자의 대명사처럼 불리는지 그 이유를 말해준다.

    많은 미술품들 가운데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 구 제의실(Old Sacrestia)이라 불리는 곳이다. 제의실은 사제가 미사 전후 옷을 갈아입거나 제의를 보관하는 방이다. 성 로렌초 교회의 구 제의실이 특별한 이유는 그곳이 바로 도나텔로와 브루넬레스키가 공동작업을 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의 장식을 위해 르네상스의 두 거장이 머리를 맞대고 일을 했다니 이 작은 방에서 역사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도나텔로는 채색한 테라코타로 벽면을 장식했다. 테라코타란 흙을 구워서 만드는 기법이다. 이전까지교회의 장식품은 대부분 돌로 만들어졌는데 도나텔로는 제작기법이 용이하고 제작 기간도 단축할 수 있는 테라코타로 조각을 만들었고 이를 대중화 했다.

    중세에는 일반 시민들이 미술품을 소장하거나 장식하는 것이 거의 허락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상업으로 부를 축적한 시민들이 자신들의 주택을 미술작품으로 장식하길 원했는데 이 때 값이 싸고 제작이 용이한 테라코타가 크게 인기가 있었다. 이 교회에는 또한 도나텔로가 만든 청동 설교대가 있다. 작가가 죽기 직전까지 매달렸던 것으로 노 대가의 예술 혼과 청동 부조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피렌체 예술가들의 뒤에는 늘 이렇게 메디치가문이 있었다.
     

    메디치 가문 ‘소년 미켈란젤로’ 발탁
     
     
    메디치 가문이 배출한 최고의 예술가는 미켈란젤로(1475∼1564)이다. 미켈란젤로는 열다섯 살이 되기 전에 메디치 가문에 발탁되어서 그들과 한 지붕 아래서 살기 시작했다. ‘위대한 자 로렌초’라는 칭호를 얻은 메디치 가문 최고의 군주이자 예술후원자였던 로렌초 일 마니피코는 미켈란젤로를 특별히 사랑하여 일찍부터 밥상머리 교육을 시켰다.

    메디치궁에는 늘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과 철학자들이 드나들었고 그들은 함께 모여서 예술과 철학, 그리고 문학을 논하였다. 이 모임이 바로 철학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신플라톤주의의 모태가 되었으니 멤버들의 지적 수준을 짐작할 만하다. 이 환상적인 모임에 어린 미켈란젤로도 참석하여 교육을 받았다. ‘위대한 자 로렌초’는 미켈란젤로를 가족처럼 생각하여 식사도 함께 했다고 하니 어린 예술가에 대한 총애를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시작된 미켈란젤로와 메디치가의 인연은 작가가 사망하기 전까지 수십년간 지속되었다.

    메디치 가문을 위해 일한 미켈란젤로의 가장 중요한 작품이 있는 곳은 피렌체의 구 제의실(Sacrestia Vecchia)이다. 이곳은 지난주에 소개했던 성 로렌초 교회를 미켈란젤로가 손수 증축한 곳이다. 그래서 이름도 신 제의실에 이어 구 제의실이라 붙였다. 이곳은 ‘위대한 자 로렌초’의 아들인 교황 레오 10세의 주문에 의해 미켈란젤로가 건축과 조각을 맡았으며 1520년 착수하여 1534년 마무리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단 한 점만 소장하고 있어도 해당 미술관의 보물이 될 판에 이곳은 건축과 조각 전체가 이 거장의 작품이다.

    미켈란젤로는 이곳에 두 메디치가 젊은이의 무덤과 고인들의 초상 조각을 만들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줄리아노인데 그는 교황 레오 10세의 동생으로서 우리가 흔히 줄리앙이라 부르는 석고상의 원작이다. 미남의 전형처럼 알려진 이 대리석 조각이 완성되자 사람들은 작품이 실물과 닮지 않았다고 수군댔다. 그러자 미켈란젤로가 말했다.

    “100년 후 줄리아노의 실제 모습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네.”

    구 제의실을 감상한 후 나오면 메디치 예배당(capella medicea)이라는 넓은 홀이 나오는데 그곳에는 메디치가문의 역대 인물들의 무덤과 각종 가문에서 수집한 소장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많은 소장품 가운데 메디치 가문의 예술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돌 테이블이 있다. 이들 돌 테이블은 얼핏 보면 정교하게 그려진 그림으로 착각할 정도다. 각종 문양, 정물, 풍경 등이 새겨져 있는데 그것은 그림이 아니라 돌 상감기법으로 만든 것으로서 그 화려함과 정교함이 사람의 손으로 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메디치가문은 당시 유럽의 프랑스나 스페인과 같은 대국의 왕가에 비하면 일개 가문에 불과했지만 유럽의 주요 군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결혼 관계를 맺기도 했다. 메디치가문 사람들은 타국 왕가의 결혼 선물로 돌 테이블을 자주 보냈다고 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꿈도 못 꿀 최고의 예술품을 선물로 보냄으로써 가문의 존재를 각인시켰던 것이다. 메디치 가문에 있어서 예술은 곧 정치이자 생존이기도 했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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