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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곳곳에 고대문명 흔적

로마 곳곳에 고대문명 흔적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14 14:27

로마 곳곳에 고대문명 흔적
콜로세움·개선문·베드로 성당 등 볼거리 빼곡 


 




지상에서 가장 예술적인 도시를 꼽으라면? 나는 서슴지 않고 파리, 피렌체, 로마를 꼽고 싶다. 베를린에도, 바르셀로나에도, 그리고 뉴욕에도 많은 미술관과 유적지가 있지만 그 어느 곳도 위의 세 도시를 능가하지는 못한다. 대부분의 도시들이 몇 군데 보고 나면 쇼핑으로 눈을 돌려야 하는 형편이지만 이들 세 도시에서는 몇날 며칠을 발이 부르트도록 다녀도 볼거리가 끝이 없다.

이제 ‘이탈리아 예술 산책’의 마지막 여행지로 로마를 남겨두었다. 가봐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닌 까닭에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19세기에 파리, 20세기에 뉴욕이 있었다면 로마는 기원전부터 18세기까지 무려 2000년 이상 유럽 예술의 중심지였다. 규모로 보나 역사로 보나 여타의 도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수준이다. 이 방대한 역사의 도시, 로마를 소개하려니 교과서적이긴 하지만 시대적 흐름에 따라 정리를 해보는 것도 효과적일 것 같다.

◈고대 로마(기원전 8세기~기원후 5세기)

오늘날 남아 있는 로마의 유적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들은 고대 로마의 모습, 특히 로마 제국의 모습이다. 공회당이라 불리는 포럼, 콜로세움, 개선문, 판테온, 도무스 아우레아…. 로마에는 2000년 전 문명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중세 로마(기원후 5~14세기)

로마에는 교황청이 있다. 12 제자 중에서 그리스도로부터 천국의 열쇠를 받은 베드로가 초대 교황이 되었고, 순교를 했다. 순교 장소에 교회를 세운 것이 4세기 경에 건립한 성 베드로 성당이다. 이후 신앙의 시대였던 중세 천년동안 로마는 서구 사회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을 비롯하여 많은 중세 초기 교회들이 남아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로마(15~16세기)

로마가 가장 화려했던 시대였다. 베드로 성당의 재건축이 이때 이루어졌고, 라파엘로, 미켈란젤로와 같은 천재 예술가들이 바로 로마의 교황청과 베드로 성당에서 그들의 재능을 뿜어냈다. 이들 외에도 당대 한 가락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로마에서 활동을 했다.

◈바로크 시대의 로마(17세기)

17세기 바로크 시대에 로마는 다시 한번 미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바로크 양식이 탄생된 곳이 바로 로마였으며 그것이 전 유럽으로 확산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로마는 예수회 교회를 비롯하여 화려함이 극에 달하는 오리지널 바로크 교회들의 집산지다.

◈신고전주의 시대(18세기말~19세기초)

한번도 고전, 고대를 망각한 적이 없었던 유럽의 미술계에 다시 한번 본격적인 고전 붐이 일어난 것이 신고전주의 양식이었고, 그 중심에 로마가 있었다. 예술가뿐만 아니라 유럽의 지성인들에게 로마 여행은 필수코스이자 지성의 완결 편이었다. 로마에 가보지 않고 지성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건축미의 극치 ‘베드로 성당’
웅장·정교… 인간의 한계는 어디인가… 


 
세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술가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교회, 교황이 대주교인 성당….

바티칸의 베드로성당을 수식하는 말은 이 밖에도 많이 있을 것이다. 베드로성당에 갈 때마다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를 생각하곤 했다. 인간의 건축술은 얼마만큼 장엄하고 웅장하며, 인간이 만들어낸 조각과 회화는 얼마나 정교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지.

베드로성당은 몸체와 광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광장 양쪽에는 거대한 기둥 숲으로 이루어진 두 개의 회랑이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두 팔을 벌리고 있는 것과 흡사하다. 그곳을 찾은 이들을 교회가 따듯하게 안아주고 있다는 의미로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 회랑과 광장은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거장 베르니니의 작품이다. 지난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거했을 때 우리는 수백만의 인파가 베드로성당 광장에 운집한 광경을 보았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 그것이야말로 광장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광장을 통과하여 교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대한 청동문을 통과해야 한다. 청동문 안쪽에는 나르텍스라는 공간이 있는데 교회의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공간이다. 여기서 내부로 들어가려면 다시 한번 청동문을 통과해야 한다.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는 동안 이런 여과 과정을 거치면서 정화된 마음을 가지도록 유도한 것이다. 베드로성당의 미술품들은 대부분이 수백년 이상 된 것들이지만 청동문 중에는 만추와 민구치를 비롯하여 20세기 초 이탈리아 최고의 조각가들의 작품이 있다. 그들은 피사노, 도나텔로, 미켈란젤로 그리고 베르니니의 계보를 잇는 세계적인 구상조각의 대가들이다.

성당 내부로 들어가면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되며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한동안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거대한 기둥들과 각양각색의 화려한 돌들로 만들어진 벽, 천장, 곳곳에 설치된 셀 수 없이 많은 조각작품들….

성당 안에 있는 수많은 조각 작품들은 대부분이 역대 교황들의 장례 기념비, 즉 무덤이다. 교황 한 분이 서거하실 때마다 당대 최고의 조각가에게 의뢰하여 장례 기념비를 제작케 하는 것이 교회의 오랜 전통이었다. 물론 이들 장례 조각은 교황 생전에 준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베드로성당이 처음 지어진 것은 324년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으로부터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은 밀라노 칙령(313년)이 발표된 직후이다. 그동안 금지됐던 그리스도교를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믿을 수 있게 되자 무엇보다도 절실했던 것이 종교예식을 치를 수 있는 장소였고,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교회였다.

베드로성당이 오늘날의 모습을 띠게 된 것은 15세기말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밀라노의 건축가 브라만테에게 재건축을 의뢰하면서부터이다. 이 거대한 성당을 다시 짓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했고, 교황은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를 팔기 시작했으며, 그것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에 결정적인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리하여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가 탄생하게 되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예수 시신 안고 있는 마리아 모습 조각미의 극치

 
베드로 성당은 뭐니 뭐니 해도 미켈란젤로와 베르니니가 주인공이다. 미켈란젤로는 16세기 르네상스를, 베르니니는 17세기 바로크 양식을 절정에 올려놓은, 두 사람 모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조각가들이다.

먼저 미켈란젤로의 작품으로는 그 유명한 ‘피에타’(사진)가 있다. 성당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피에타가 있는 곳이다. 피에타란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말인데, 미술에서는 성모님이 죽은 아들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을 그리거나 조각한 것을 가리킨다.

베드로 성당에 있는 ‘피에타’는 미켈란젤로가 24세 때 제작한 것이다. 아들의 시신을 안고 슬픔에 잠겨 있으나 결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성모님의 모습은 너무도 젊고 아름다워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죽은 예수님의 몸은 축 늘어져 있으나 인체의 골격은 물론 손등의 핏줄까지 정교하게 묘사되었다. 어쩌면 서 있는 형태보다 훨씬 더 만들기 어려웠을 죽은 인간의 모습을 스물 네 살의 미켈란젤로는 완벽하게 만들어냈다. 작품 전체를 감싸고 있는 성모님의 옷 주름은 부드러운 찰떡으로 빚어놓은 듯 감미롭다.

‘피에타’는 사실적 묘사 측면에서 본다면 미켈란젤로의 예술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그는 이 작품 이후 사실적 조각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였다. 향후 그의 예술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세계의 아름다움과 완벽함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형태를 통해 작가의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쪽으로 향했다. 그것은 4세기 후에나 등장한 현대 미술의 개념이기도 하다.

성당 중앙으로 발걸음을 향하면 거대한 돔 아래에 서게 된다. 이 돔 역시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것으로 높이는 무려 120m에 이른다. 베드로 성당을 하늘에서 보면 이 돔을 중심으로 정사각형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 같은 단순한 구조를 설계한 것이 바로 미켈란젤로이다.

돔 아래에는 제대가 있는데 이 제대를 둘러싼 구불 구불한 기둥 모양의 거대한 청동 덮개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베르니니의 작품으로 덮개를 받치는 기둥의 높이만도 29m가 된다. 베르니니의 작품 중에 대주교좌(大主敎座)도 있다. 주교좌가 있는 성당을 주교좌 성당이라 부른다. 세속이든 종교든 의자는 권위의 상징인 모양이다. 베르니니가 만든 성 베드로 주교좌는 너무도 화려하고 커서 정작 어디에 앉아야 할지 모를 정도이다. 역시 청동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네 명의 교부(敎父)가 의자를 받치고 있고, 하늘에서는 성령이 내려오고 있으며, 성령을 감싸고 있는 한 무리의 천사들이 구름떼에 둘러싸여 있는 형태로서 바로크 예술의 화려함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보여주려는 듯 하다.

베르니니는 교황님의 장례 묘비도 두점 제작했다. 하나는 우르바노 8세의 무덤이고 다른 하나는 알렉산데르 7세의 무덤이다. 사자(死者)가 중앙에 앉아 있고 그 아래에 의인화된 인물들이 서 있는 형식인데 이후 미국이나 유럽의 광장에 세워진 수많은 기념비들이 바로 이 작품을 응용한 것이다. 모방은 어렵지 않으나 창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켈란젤로와 베르니니가 위대한 이유는 그들이 창조자들이기 때문이다.
 

로마의 핵심은 바티칸이다. 바티칸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 나서도 최소한 1시간 정도는 줄을 서서 기다려야 입장표를 살 수 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표사느라고 2시간 이상을 길에 허비해야 하니 서두르는 것이 좋다.

바티칸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스탄자 디 라파엘로라 불리는 라파엘로의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진 방들과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와 벽화가 있는 시스티나 예배당이다. 바티칸의 모든 푯말은 방문객들을 이 두 곳으로 안내하고 있다.

시스티나 예배당은 교황의 전용 예배당(chapel)이자 신임 교황을 선출하는 곳으로서 교황청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데 바로 이곳에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와 벽화가 있다. 시스티나라는 말은 예배당을 건축토록 한 교황 식스투스 4세(1471~1484)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는 초기 르네상스의 대가들이었던 보티첼리, 핀투리키오, 페루지노, 기를란다요를 불러 그곳을 장식하도록 명했다. 페루지노는 라파엘로의 스승이고, 기를란다요는 미켈란젤로의 스승이다.

시스티나 예배당에 들어서는 순간 그러나, 이들 15세기 대가의 벽화는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대신 한 눈에 관람객을 압도하는 것은 미켈란젤로의 거대한 천장화와 벽화이다. 미켈란젤로는 1408년부터 1512년까지 4년에 걸쳐 이곳에 천장화를 그렸다. 고개를 위로 들어 천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한 인간이 그토록 거대한 공간을, 일찍이 유래가 없던 방식으로 채웠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 의문을 갖게 된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예술가들 중에서 미켈란젤로를 가장 위대한 예술가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미켈란젤로에게 이 일을 주문한 사람은 베드로 대성당 재건축을 추진했던 교황 율리우스 2세였다. 그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직접 군대를 지휘하는 전투적인 교황이었지만 예술을 사랑했고, 그것의 가치를 알았던 전형적인 르네상스 시대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알고 썩힐 리 없었다. 요즘 문화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문화마케팅, 문화전쟁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지만 이미 500년 전에 그는 문화의 위력을 알고 있었다.

율리우스 2세는 처음에는 미켈란젤로에게 자신의 영묘를 제작하도록 명령했었다. 조각가로서 이름을 날리던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대규모 영묘를 주문받게 되자 신바람이 나서 작품을 계획했다. 그것은 등신대 크기의 조각상이 40점이나 들어가는 그야말로 거대한 영묘였다. 미켈란젤로는 직접 카라라 대리석 산에 가서 돌을 채석했다.

그가 선택한 대리석이 지중해에서 뗏목을 타고 로마의 테베르 강에 도착하여 막상 돌 값을 지불해야 하는 순간 비정한 교황은 작가를 만나주지도 않으며 홀대했다. 이에 분개한 미켈란젤로는 더 이상 교황님이 시키는 일은 하지 않겠다며 가지고 있던 짐들을 처분하고 고향 피렌체로 내려와 버렸다. 교황은 뒤늦게 외교 서신을 보내고, 사람을 보내는 등 공을 들인 끝에 어렵사리 작가를 만날 수 있었는데 장소는 로마가 아니라 볼로냐였다. 미켈란젤로가 교황이 거주하던 로마로 가지 않고 제3의 장소를 택했다는 것은 권력 앞에서 굽히지 않았던 작가의 자존심이었다.


38세 요절 라파엘로 ‘전설’ 로 남아
교황 집무실에 프레스코화 그린뒤 ‘3대 거장’ 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그리고 라파엘로 이 세 사람을 르네상스 시대의 3대 거장으로 꼽는다. 이들 중 라파엘로(1483~1520)는 막내였다.

움브리아 지방의 작은 도시 우르비노에서 태어난 라파엘로는 스무살이 갓 넘은 1504년 넓은 세계에서 놀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피렌체에 왔다. 당시 피렌체에는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시청에서 벽화를 제작하고 있었다.

이 두 거장이 감히 접근조차 쉽지 않았던 괴팍한 천재들이었다면, 라파엘로는 상냥하고, 겸손하며, 붙임성 있는 젊은이였다. 그런 그에게 당대 최고의 무대에 설 기회가 주어졌다. 동향(同鄕) 사람이자 로마 베드로 성당의 건축가였던 브라만테의 추천으로 바티칸에 입성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자신의 집무실이었던 ‘서명의 방’이라 불리던 스탄자 디 세냐투라의 장식을 주문했고, 화가는 이 방의 천장과 벽을 신학, 철학, 시를 주제로 한 그림으로 장식했다. 동 시기, 동일 장소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두 거장이 동시에 작업을 한 전대미문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라파엘로가 그린 그림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등장하는 그 유명한 ‘아테네의 학당’(사진)을 비롯한 프레스코화다. ‘아테네의 학당’은 전성기 르네상스 회화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웅장한 건축물을 배경으로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의 명망 있는 철학자들의 모습을 그린 것인데 다빈치는 플라톤의 모습으로, 자신을 추천해준 건축가 브라만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습으로 그렸다. 인물 각자의 표현은 마치 실제 인물들을 사진으로 찍어놓은 듯 정교하고, 자연스러우며, 배경과 인물들의 공간적 조화는 뛰어났다. 비례, 조화, 균형으로 대표되는 르네상스 고전주의 회화가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라파엘로는 바티칸에서 모두 4개의 방에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첫 번째 방이 고전주의 회화의 절정을 보여주었다면, 두 번째 방에서는 자신이 애써 달성한 회화적 성과를 스스로 깨고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역시 창조의 세계를 추구했던 진정한 예술가였던 것이다.

라파엘로는 일약 스타가 되었고, 사람들은 이 젊은이의 그림을 칭송했다. 그의 사근사근한 성격은 과격한 미켈란젤로에게 혼쭐 났던 후원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이 쇄도했고, 심지어는 그를 추기경으로 선출하자는 의견까지 나왔다고 하니 그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의 질투를 샀던 것일까. 그는 한창 나이인 38세에 요절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사랑하는 애인 빵집 딸에게 유산으로 남겼다. 라파엘로의 작품으로 알려진 바티칸에 있는 나머지 두 개의 방은 그의 사후에 제자들이 그린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홀로 외로움 속에서 작업을 했다면, 라파엘로는 제자들을 고용하여 방대한 작업을 진행시켰다. 어찌 보면 세속적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당시에는 이런 공동작업이 오히려 일반적인 것이었다. 이후 19세기 초 신고전주의 양식이 유행하기까지 3세기 이상 라파엘로는 서구 회화의 지존의 자리를 지켰으며, 예술가들의 전설이 되었다.
 

인간탐구의 절정 ‘천지창조’
미켈란젤로, 시스티나 예배당에 4년간 그려 


 

그림은 그리기 싫다는 미켈란젤로에게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그리라고 명령했다. 당시 미켈란젤로는 ‘피에타’ , ‘다비드’ 와 같은 걸작을 통해 조각가로서는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었지만 화가로서의 경력은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다. 그 자신이 ‘조각가 미켈란젤로’ 라고 서명을 할 정도로 조각을 예술 중의 으뜸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는 일을 아예 내키지 않아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교황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미켈란젤로가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운 것은 피렌체의 기를란다요 공방에서였고, 그것도 겨우 1년여에 지나지 않았었다. 스승 역시 30년 전 교황의 부름을 받고 시스티나 예배당에 벽화를 그린 거장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조수를 몇 명 채용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물감을 준비하는 조수 한명만을 남겨두고 모두 돌려 보내고 혼자 작업에 착수했다. 1508년부터 1512년까지 만 4년 동안 그는 외로움 속에서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말이 쉽지 혼자서 그 높은 천장에 그림을 그리자면 엄청난 육체적 고통이 수반된다. 잠시 고개를 올려서 그림을 보려해도 고개가 아플 정도인데 4년간 누운 자세 혹은 머리를 쳐든 자세로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해보라. 그는 결국 그 일을 해냈고, 작업이 끝나고 난 후 몸이 굳어져서 몇 달 동안을 그림 그리던 자세로 지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림의 큰 뼈대를 보자면 중앙의 사각형들 안에는 천지창조를 그렸다. 하느님이 빛과 어둠을 가르는 장면, 바다와 육지의 동물들을 창조하는 장면, 아담의 창조, 이브의 창조, 뱀으로부터 유혹받은 아담과 하와, 낙원으로부터의 추방 그리고 노아의 홍수 등이 그려져 있다. 천장의 가장 자리에는 육중한 인물들이 앉아 있는 모습이 있는데 예수의 재림을 예언한 구약성서의 예언자들과 무녀들이다. 마지막으로 예언자와 예언자 사이 그리고 벽의 가장 위쪽 반달 모양에는 예수의 조상들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이들 장면 사이사이에 각양각색의 자세를 취하고 앉아 있는 젊은 남성들의 나체와 역시 나체의 아이들 등이 그려져 있다.

초기에 그린 그림들은 약간의 부자연스러움과 색채의 부조화가 발견되나 미켈란젤로는 곧 회화의 최고 경지에 도달했다. 그는 인간의 가장 어려운 자세를 총 망라하여 그리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이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자세를 다 그려 놓았다. 그것은 중세 이후 서양의 화가들이 3세기에 걸쳐 추구해온 인간에 대한 탐구의 절정이었다. 그가 그린 인체들은 에너지가 넘치고 아름다워서 인간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사랑의 표현으로 보인다. 흔히 르네상스 시대를 인간 중심의 시대, 혹은 휴머니즘의 시대라고 표현하는데 미켈란젤로의 이 천장화는 르네상스 정신의 결정판이었던 것이다.

이 그림이 탄생된 이후 서구 회화의 판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이들은 이 시스티나 예배당을 모르고서는 그림을 그릴 수가 없게 되었다. 당대의 미술사가 바사리는 미켈란젤로를 신에 비유했다. 천재의 개념도 바로 미켈란젤로에게서 나왔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동경했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들보다 동시대인 미켈란젤로를 더 위대한 인물로 여겼다. 고대를 능가한 근대인의 탄생을 지켜보았던 것이다.
 

외설이유로 ‘덧칠 수모’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제자가 나체에 가리개 그려

 
천장화를 그리고 난 지 30년이 지난 1536년쯤 새로 교황이 된 바오로 3세는 또 다시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예배당의 벽화를 그릴 것을 주문했다. 그 때 미켈란젤로의 나이 60이었다. 이제 늙어서 몸도 말을 듣지 않고,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못하겠다는 미켈란젤로에게 교황이 말했다.

“나는 당신의 그림을 갖기 위해 30년을 기다렸소. 이제 교황이 되었으니 내 명령을 따라야 하오!”

그렇게 해서 미켈란젤로는 늙은 몸을 이끌고 또 다시 이 거대한 벽을 혼자서 그리는 일에 착수했다.

주제는 최후의 심판이다. 최후의 심판이란 인류 종말의 날, 심판자인 예수님이 지상에 내려와서 인간의 생전의 행업에 따라 심판을 하여 선행한 자는 천국으로, 악행한 자는 지옥으로 보낸다는 주제다.

그림을 살펴보면 그림 중앙에 심판자 예수님이 내려오고 있다. 한 손을 위로 올린 근엄한 모습이다. 그 옆에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를 비롯하여 성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스도의 바로 아래에는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천사들이 나팔을 불고 있고, 그 양 옆에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사람들과 천국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가장 아랫부분을 보면 왼쪽에는 심판을 받기 위해 죽음에서 깨어나는 사람들 그리고 오른쪽은 지옥 장면이다.

원래는 예수님과 성모님을 제외하고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였다. 하루는 비아지오 다 체세나라는 추기경이 교황과 함께 한창 그림에 열중하고 있는 미켈란젤로를 방문했다.

“신성한 교황 성하의 예배당에 이런 벌거벗은 나체들은 어울리지 않는구려.”

이 말을 들은 미켈란젤로는 그 추기경의 얼굴을 지옥의 사자 미노스의 얼굴로 그려놨다. 말 한마디 잘못한 덕분에 그는 지금까지도 지옥의 사자 모습을 하며 관객을 맞고 있다.

이 그림이 공개되자 사람들 사이에서는 놀람과 찬사 그리고 비난이 가득했다. 놀라운 그림이라며 칭찬한 이들이 있었는가 하면, 이건 완전히 벌거벗은 이들로 가득한 목욕탕이라고 비난한 사람들도 있었다. 심지어는 그림을 모두 파괴해버리자는 과격한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맞서는 반종교개혁이라는 가톨릭 내부의 정화운동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 작품은 1563년 트렌트 공의회에서 본격적으로 토론의 대상이 되었고 이듬해에 외설적이란 이유로 ‘수정’ 이라는 형벌을 받게 된다. 결국 미켈란젤로가 사망하던 바로 그 해에 교황청은 그의 제자였던 다니엘라 다 볼테라라는 사람을 시켜서 나체의 중요한 부분을 각양각색의 가리개로 덧칠하여 가리게 한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말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전통적 형식을 초월하여 모든 형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작가의 정신세계를 보여준다. 그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를 성서와 문학 사이를, 그리고 전통과 혁신 사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제도권이 권위를 내세울 때, 예술적 직관을 교훈적 규범으로 대신하려 할 때, 권위의 이름으로 예술가를 억압하려 할 때, 그는 교회를 비롯한 모든 제도권과 맞서 싸웠다. 최후의 심판은 미켈란젤로의 이 같은 사상이 함축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걸작이다.
 

‘바로크 조각 寶庫’ 보르게세 미술관
베르니니 작품 가득… ‘예수회 성당’은 대표적 건축

 
사람들은 로마를 ‘영원의 도시’라 부른다. 로마인들로부터 시작된 이 도시의 영광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의미일까?

로마는 서구 역사의 살아있는 무대이자 역사적인 예술품들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도시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로마에 대한 믿음과 전설은 유효한 듯하다.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가 절정에 올려놓은 르네상스 이후 로마 예술이 다시 한번 번영한 것은 바로크 시대인 17세기였다. 바로크 예술은 한마디로 화려함의 절정이다. 대표적인 곳이 아마도 베르사유 궁전일 것이다. 하지만 그 바로크 예술이 처음선을 보인 곳은 로마였다. 당시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 교회는 종교개혁 이후 뼈를 깎는 내적 개혁을 거쳐 거듭났다. 그것이 예술로 표현된 것이 바로크 양식이다.

바로크 예술이 보여준 화려함은 승리한 가톨릭 교회의 자신감의 표현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예수회 성당은 바로크 예술이 첫 선을 보인 곳이다. 겉에서 보면 평범한 교회처럼 보이나 일단 안에 들어가면 화려함이 극에 달한다. 모든 건축 자재는 각양각색의 진귀한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천장을 올려다보면 천상이 그곳인 듯 구름 위에서 성인들과 예수,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수많은 천사들과 함께 보인다.

예수회 성당이 바로크 건축의 극치라면 바로크 조각의 진면목은 보르게세 미술관에서 즐길 수 있다. 이 미술관은 가히 조반니 베르니니의 미술관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이 조각가의 대표작들이 여러 점 소장되어 있다.

바람둥이 아폴로가 요정 다프네의 몸에 손을 대는 순간 다프네의 몸이 나무로 변해 버렸다는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한 ‘아폴로와 다프네’는 대리석 조각의 또 다른 지평을 연 걸작이다. 조각이 더 이상 땅을 굳게 디디고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공간을 날 듯 운동감이 가득하며, 손과 몸통이 나무줄기와 잎으로 변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한 이 작품은 이후 어떤 조각가도 다시는 재현하지 못한 정교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보르게세 미술관은 베르니니가 생존했던 17세기 최고의 예술 후원 가문이었던 추기경 시피오네 보르게세의 공원이자 별장이었다. 그곳은 티치아노, 카라바조, 라파엘로를 비롯하여 명성있는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가득 차 있다. 한 가문의 진귀한 소장품들이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으니 당시 예술에 대한 그들의 열정과 후원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후원 없이 예술은 탄생할 수 없다. 결점이 많은 이탈리아 사람들이지만 예술에 대한 안목과 열정만큼은 칭송받아 마땅할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인 바로크 시대의 불멸의 거장 카라바조의 작품은 산 루이지 프란체시 성당에서 볼 수 있다. 단 한점의 작품으로도 유럽의 미술관에서 특별전을 여는 이 작가의 작품이 이 교회에는 여러 점 있다. 그 밖에도 로마에는 수많은 미술관과 건축물들이 있다.

칼럼을 시작한지 일년이 지났다. 문화일보에 고정 지면을 할애받을 수 있었던 것이 무척 영광이었고, 글을 쓰는 매순간 행복했다. 이제 나의 부족한 칼럼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미술사를 전공한 필자에게 미술사가 아름다운 학문임을 다시금 느끼게 해준 소중한 기회였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독자께 감사드린다. 기꺼이 사진을 촬영해준 나의 친구이자 남편인 조각가 한진섭씨에게도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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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능가한 폼페이 최후의 날 - 폼페이

‘9·11’ 능가한 폼페이 최후의 날 - 폼페이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14 14:21

‘9·11’ 능가한 폼페이 최후의 날 - 폼페이
플리니우스 편지에 생생하게 기록돼 





 
기원 후 79년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했다. 화산 아래의 도시 폼페이가 순식간에 용암 속에 묻혔다. 언젠가 이탈리아의 TV에서 폼페이 최후의 순간을 다룬 다큐를 본 적이 있다. 이라크 전쟁 현장, 혹은 9·11 뉴욕 쌍둥이 빌딩의 폭발 현장을 보여주듯 생생하게 재현한 프로그램이었다.

폼페이에 관한 자료가 여럿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한 리포터가 참사 현장에서 생생하게 현장을 중계하듯 묘사해 나간 한 장의 편지가 남아 있다.

편지를 쓴 주인공은 로마의 대 역사가 노(老) 플리니우스의 조카로 당시의 대 문호이자 역사가였던 타치투스에게 보낸 것이다.

노 플리니우스는 ‘박물지, Historia Naturalis’라는 전 37권으로 이루어진 대 백과사전을 쓴 로마의 역사가인데 그는 화산이 폭발하던 당시 나폴리 만의 해군 제독으로 재임 중이었고, 화산 폭발 때 현장에서 사망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로마에 관한 지식의 대부분은 바로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 의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함대의 함장이었던 그는 충분히 피신할 시간과 기회, 도구가 있었지만 스스로 참혹한 죽음의 현장에 몸을 던졌다. 군인으로서, 학자로서, 또한 인간으로서 참으로 위대한 인물이었지만 그가 선택한 생애 마지막 순간은 그가 남긴 모든 업적 이상으로 위대했다. 여기에 플리니우스의 최후를 지켜본 그의 조카의 편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삼촌은 당시 나폴리 만에서 함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9월 9일 나의 모친은 삼촌에게 이상한 구름이 생겼다고 알렸다. 삼촌은 그것이 잘 보이는 곳으로 가기 위해 신발을 신고 나갔다. 큰 구름떼가 보였는데 그것은 흡사 가지가 위로 둥글게 뻗은 잣나무와 같았다. 과학자였던 삼촌이 더 가까이에서 관찰하고자 작은 배를 준비시켜서 집에서 나가려 할 때 카스코의 아내가 달려와서 산 아래 있는 자신의 별장이 위험에 처했다며 배로 피신시켜 달라고 애원했다. 과학자적 호기심은 인명을 구출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바뀌었고 삼촌은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구출하려고 외출의 목적을 바꿨다. 많은 이들이 탈출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이미 잿더미가 배를 덮치고 가까이 갈수록 재의 농도는 짙었다. 배를 사타비아 쪽으로 몰았다. 삼촌의 친구 폼포니아누스가 보였기 때문에 그를 구출하기 위해 배를 몰았다. 공포에 떨고 있는 친구를 배에 오르게 하고 그가 가지고 있던 물건들도 싣게 했다. 그리고 서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함을 가장하며 저녁식사를 했다.

한편 베수비오 화산에서 용암의 불덩이가 더 넓게 퍼졌다. 밤이 어두우니 불빛이 더욱 빛나 보였다. 삼촌은 사람들을 위로하였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 사이 용암재가 집을 덮쳐 더 이상 지체하다가는 빠져나올 수가 없다고 판단하자 삼촌은 일어나서 폼페이아노에게 갔다. 그들은 의논 후 밖으로 나오기로 결정했다. 화산재가 비 오듯 쏟아졌고 점점 집을 덮쳐 갔다. 해변에 나가서 배를 탈 수 있는지 살펴보았다. 용암이 다시 덮쳤다. 두 노예의 부축을 받고 삼촌이 피신을 시도했다. 그러나 기관지에 염증이 있었던 삼촌은 먼지와 가스로 인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불을 덮은 채 누워 있었는데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 그는 죽어 있었다.”
 

폼페이 건축물의 美와 견고함
‘신비의 별장 ‘ 벽화 등은 르네상스 작품 능가

 
폼페이는 서기 63년 대지진으로 도시 전체가 파괴되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힘을 모아 재건에 앞장섰으나 그로부터 16년 후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이번에는 도시 전체가 용암에 묻혀 버렸다. 그 후 1700년 동안 도시는 그 존재 자체가 잊혔다가 18세기 초 사람들이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지하 도시의 잔재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후 18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인 발굴 작업이 시작되어 195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18세기 유럽에서는 고전, 고대 문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빙켈만과 같은 유명한 고고학자가 출현하여 고대 그리스 미술에 대한 연구를 본격화했다. 빙켈만은 독일인으로서 로마에서 연구하면서 근대 미술사의 체계를 확립한 중요한 학자이다. 빙켈만으로부터 시작된 그리스 연구가 고대 로마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이루어진 폼페이의 발견과 발굴은 당시 서구 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꿔 놓는 대사건이었다. 폼페이의 회화, 조각, 공예품이 당시 미술계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고, 의상, 가구, 공예, 실내 디자인 심지어는 여인의 헤어스타일에 이르기까지 생활 곳곳에 영향을 미쳤다. 폼페이가 되살아난 것이다.

18세기 중·후반 유럽에 신고전주의라는 미술양식이 탄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현재 폼페이에 남아 있는 유적들은 당시 이 도시가 얼마나 화려했으며 예술적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폼페이는 당시 로마제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그곳의 건축물과 유물을 통해 고대 로마제국 시대의 생활과 문화 수준도 추측할 수 있다.

폼페이의 건축물은 2000년 전에 지어졌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고, 견고하며, 예술적이다. 대부분의 벽은 수준 높은 벽화로 장식이 되었으니 오늘날의 우리들보다 그들이 오히려 예술과 더 친숙했다.

현재 많은 저택과 별장이 남아 있지만 그 중에서 ‘신비의 별장’이라는 곳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별장은 아트리움이라 불리는 집 중앙에 사각형의 중정이 있고 중정 주변은 회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회랑을 비롯하여 집 곳곳을 벽화로 장식했다. 그 중에서도 ‘매질하는 여인’이라는 광경이 있는 벽화는 당시 여인들의 모습과 생활상을 그리고 있어서 흥미롭다. 춤추는 여인, 매질하는 여인, 매를 맞고 동료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위로받고 있는 여인의 모습 등 여인들의 일상이 그려져 있는데 이들의 모습은 1500년 후 르네상스 시대에서나 볼 수 있는 조화, 절제, 우아미를 보여주고 있다. 인체의 비례는 이상적인 비례인 8등신으로 표현되었고, 움직임이 자연스러우며, 공간의 표현 역시 탁월하다. 이후의 미술이 이에 미치지 못함을 보노라면 미술이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교가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음을 이들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폼페이 근처에는 우리나라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폼페이와 같은 운명을 맞이한 에라콜라노라는 마을이 있다. 폼페이를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그곳도 방문하길 권한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폼페이보다 온전하게 유적이 남아 있는가 하면, 폼페이에서는 볼 수 없는 독창적인 건축 장식들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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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릉위의 도시’ 이탈리아 파르마

‘구릉위의 도시’ 이탈리아 파르마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14 14:20

‘구릉위의 도시’ 이탈리아 파르마
치즈로 유명… 대성당 부조 등 예술품도 많아 






 
나는 지금 앙코르 와트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앙코르가 맞다. 앙코르 와트는 앙코르의 여러 유적지 중의 한 군데 일 뿐이라는 것을 이곳에 와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거대한 사원들을 둘러보았는데 ‘동양의 자존심’이라는 말에 걸맞게 건축의 규모가 거대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안의 미술의 내용과 질이 높은 듯 하였다. 이곳의 신전 건축물의 벽들은 대부분이 부조로 가득히 메워졌는데 그 내용은 이 지역의 신화, 전설, 종교, 그리고 이웃나라와 벌여서 승리한 전투 장면 들을 새겨놓았다. 결국 이곳의 미술품도 세속의 가장 권력자인 왕의 신격화를 추구하고 있으며 미술품이 왕의 권력을 지속시키고 홍보하려는 매체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여행객 중에는 한국인들이 많이 눈에 뜨이지만 서양 사람들도 꽤 많이 보인다. 인솔자의 설명에 따르면 서양 사람들은 이곳의 유적지를 보면서 절대로 떠들지 않고 숙연해진다고 한다. 그들이 우습게만 보았던 동양에 이토록 휼륭한 문명의 흔적이 있음을 보고는 놀란 것이라고 한다.

오늘은 구릉 위의 도시 파르마를 소개하려 한다 . 파르마는 피렌체에서 밀라노로 가는 중간 쯤에 위치한 도시이다. 파르마 시내를 들어가려면 고속도로를 거치게 되는데 아래를 보면 천길 낭떠러지이다. 고속도로가 깊은 골짜기와 골짜기를 연결해 놓은 때문이다. 그러나 경치는 비경이어서 우리나라의 설악산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우유회사 이름이 파르말라트(PARMALAT)이다. 파르마의 우유라는 뜻이다. 이곳이 구릉지대이다 보니 목장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파르마를 세계적인 도시로 만든 또하나의 생산품이 있는데 바로 팔마산이라 불리는 치즈이다. 팔마산은 영어식 표기이고 원어는 파르미지아노라고 부르는데 바로 파르마에서 만나는 제품이라는 뜻이다. 초콜릿 하나로 유명해 질 수 있듯이 치즈 하나로도 세계적으로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도시이다.

파르마는 대성당과 세례당이 있어서 예술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도시에 속한다. 파르마 대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인데 실내는 고딕양식이어서 장엄함을 뽐내고 있다. 이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세 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주교좌이다. 말 그대로 대주교의 의자 인데 이 주교좌가 있는 성당이 바로 대성당이다. 이 의자는 그 권위와는 달리 의자를 받치고 있는 사람들의 끙끙거리는 모습이 있는 유머러스한 내용이다. 두번째는 로마네스크 시대의 걸작품으로 알려진 부조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가 있고, 마지막으로 높디 높은 돔의 천장화가 있다. 이 천장화는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작가인 코레조가 그린 것인데 그의 이 돔 천장화는 1세기 후 유럽의 대부분 교회에서 돔 천장화가 유행한 것을 고려한다면 거의 효시에 속한다는 점에서 역사적 중요성이 있다.

대성당 밖으로 나오면 바로 세례당이 있는데 현대 건축물의 7,8층 정도의 높이의 석조 건축물이다. 대성당과 세례당이 독립적인 건축물로 지어진 것으로 보아 이 도시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특별히 동양 최대의 유적지인 앙코르 와트에서 글을 쓰면서 문명의 탄생과 스러짐을 생각케 한다. 또한 오늘날 우리가 대한 민국에서 태어난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 일인지를 생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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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바 ‘조토 명작의 산실’

파도바 ‘조토 명작의 산실’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14 14:19

파도바 ‘조토 명작의 산실’
아레나 예배당은 종교·세속 덕목 총망라한 우주 






 
파도바는 베네치아에서 기차로 약 30분 떨어져 있다. 파도바의 명성은 예술과 대학에 있다. 파도바대학은 볼로냐대학과 파리대학 다음으로 유럽에 세워진 대학으로 코페르니쿠스, 에라스무스를 비롯한 역사적 인물들이 이곳에서 수학했으며, 이 대학에서 교수를 지낸 인물로는 갈릴레이와 병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모르가니 등이 있다.

파도바가 자랑하는 또 하나의 보석은 아레나예배당이다. 이 예배당은 한 개인의 가족 예배당인데 규모로 보자면 지난주에 소개했던 성 안토니오 대성당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작다. 이 예배당의 그림은 엔리코 스크로베니 라는 사람이 주문하여 조토가 1303년에서 1305년 사이에 완성했다. 엔리코의 아버지는 무척 구두쇠였는데 사망한 부친이 연옥에서 고통받고 있을 것을 걱정하여 아버지의 죄를 덜기 위해 이 예배당을 지어 성모에게 봉헌했다고 한다. 그림은 4면의 벽과 천장이 모두 프레스코로 그려졌는데 내용은 그리스도와 성모의 일생에 관한 일화가 양쪽 벽을 차지하고 있고, 입구 안쪽 벽에 ‘최후의 심판’이 그려져 있다.

보는 이의 흥미를 자극하는 것은 ‘최후의 심판’이다. 그 중에서도 지옥에서 형벌을 받고 있는 지옥 편을 보면 각양각색의 죄인들이 그려져 있는데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오히려 유머러스해 보인다.

입에 기구가 끼워진 채 바비큐처럼 돌려지는 사람, 성기가 거세되는 남자, 모욕을 당하는 젊은 여자 등 각자의 죄목에 따른 형벌이 가해지고 있다.

‘최후의 심판’ 중앙 부분에는 주문자인 엔리코가 예배당의 모형을 성모에게 봉헌하는 모습이 보인다. 중세시대에는 그리스도나 성인들에 비해 인간은 훨씬 작게 그려졌는데 화가는 여기서 엔리코를 성모와 같은 크기로 그려놓았다. 미술품의 주문자가 그림 속에 직접 등장한 것도 바로 여기서이다.

조토 이후 미술품을 주문한 귀족이나 상인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그림 속에 넣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관행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중세의 신 중심의 세계에서 르네상스의 인간 중심의 세계로 옮아가고 있는 증거들이다. 미술은 학문보다 앞서서 근대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벽화 중에서 덕과 악덕을 의인화한 그림들도 흥미롭다. 덕으로는 신중, 강인함, 절제, 정의, 믿음, 자비, 희망이 있고, 악덕으로는 실망, 질투, 노여움, 변덕, 어리석음 등이 있다. 이들 각자의 이미지는 의인화하여 그려졌는데 덕목의 특징에 따라 남녀노소가 주인공이 되고 있다.

이를테면 절망은 젊은 여인이 목을 매어 자살하는 모습인데, 악마가 그녀의 영혼을 지옥으로 데려가기 위해 끌어내고 있다. 자살은 곧 지옥행임을 보여주고 있다. 법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저울을 들고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은 정의를 표현한 것으로서 왕관을 쓴 여왕이 양손에 저울을 들고 재는 모습이다. 변덕은 젊은 여인이 바퀴 위에 앉아서 뒤로 넘어지려는 모습이다. 장면 하나 하나에 모두 고개가 끄덕여진다. 조토는 일개 가문의 예배당에 종교와 세속의 덕목들이 총망라된 작은 우주를 그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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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오와 줄리엣의 도시’ 이탈리아 베로나

‘로미오와 줄리엣의 도시’ 이탈리아 베로나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14 14:18

‘로미오와 줄리엣의 도시’ 이탈리아 베로나
진짜 볼거리는 검투사들이 싸웠던 원형극장 




 
건물의 벽 전체가 갖가지 색상의 메모지 혹은 포스트잇으로 뒤덮인 곳이 있다. 베로나의 줄리엣의 집이 그곳이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사연을 써서 이 집의 벽에 붙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설로 인해 줄리엣의 집은 온통 사랑의 사연으로 뒤덮이고 있다.

이 집이 실제로 카푸레티가의 줄리엣이 살던 집이었다는 증거는 물론 없다. 15세기 풍의 이탈리아 귀족의 저택을 재현한 것으로서 뜰에서 보면 로미오가 줄리엣을 만나기 위해 담을 타고 올라왔다던 테라스도 보인다. 뜰에는 한 조각가가 만든 줄리엣의 동상도 세워져 있다. 그녀를 배경으로 사진을 한 장 찍으려고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모두 재미있는 풍경이다.

줄리엣의 집이 심심풀이 관광이라면 진짜 볼거리는 로마시대에 세워진 원형극장과 중세기인 12세기에 세워진 성 제노 교회에 있다. 베로나의 원형극장은 지금부터 2000년 전인 서기 30년경 완공된 건축물로서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는 세계에서 몇 안되는 유적지다.

그곳은 로마시대에는 검투사들이 싸우는 곳이었고, 중세에는 법원 겸 형 집행소로 사용되었으며, 르네상스 시대에는 마상경기와 창 경기를 벌이는 축제의 장소였다. 그 후 18세기인 로코코 시대에는 코미디를 상연하는 극장으로 사용되다가 마지막으로 19세기 중반부터는 이곳에서 오페라를 공연하기 시작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여름철이 되면 이곳 원형극장에서는 오페라가 상연된다. 오페라는 베로나 시가 자랑하는 최고의 관광상품으로서 관람하려면 표를 예매해야 한다. 나도 언젠가 이곳에서 푸치니의 ‘나비부인’을 본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그 넓은 야외 극장의 전 좌석이 매진되는 것을 보고 놀랐으며, 한여름 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연 내내 추위에 떨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무더위를 피하기 위한 2000년 전 건축가들의 지혜 덕이었을 것이다.

베로나에는 오래된 교회들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 성 제노 성당이 유명하다. 이 성당은 전형적인 북부 이탈리아의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지만 정령 이 성당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입구의 청동 문이다. 이것은 12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것으로서 이탈리아 로마네스크 조각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작은 청동 부조 패널 수십 개를 연결하여 만든 이 문은 구약, 신약과 같은 종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성당 안에 들어가면 대형 제단화가 눈에 띈다. 15세기 최고의 화가 만테냐의 대표작으로서 성 모자와 성인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만테냐는 미술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만 들어도 귀가 번쩍 뜨이는 대가 중의 대가다.

축구를 좋아하는 이탈리아인들답게 베로나에는 축구 전용구장이 있는데 축구장 입구에 한국의 조각가 한진섭이 만든 조각 작품 ‘승리자’가 이 경기장의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기념하여 조각의 본고장 카라라 시에서 한국선수들이 경기를 했던 베로나 시에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타국에서 한국작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도나텔로 ‘르네상스 조각 선구자’
성 안토니오 대성당에 최초 청동 기마상 세워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광장에 세워진 청동 기마상을 흔히 볼 수 있다. 기마상은 한 인간을 영웅화시키고 찬미하는 최고의 표현방식이다. 개인에 대한 찬미의 방식으로 흔히 초상화가 동원된다. 오늘날 우리가 미술관에서 만나는 초상화들은 대부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왕족, 귀족, 부유한 상인들 자신들의 모습이다. 그것은 당대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널리 알리고, 가문의 명성을 기리고 후손에게도 남기고자 제작한 일종의 홍보매체다.

초상화가 처음으로 탄생한 것은 르네상스 시대였다. 돈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화가에게 부탁하여 자신이나 가족의 초상화를 그리게 할 수 있었지만 청동 기마상은 상황이 달랐다.

그것은 개인의 저택에 설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광장에 설치하는 것으로서 공공 기념비의 성격이 강했다. 따라서 기마상의 주인공은 국가의 상징인 왕이나 국가적 영웅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기마상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세속 최고의 영예를 누린 것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고대 이래 최초의 청동 기마상이 바로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대성당 광장에 세워졌다. 그것은 르네상스 조각의 선구자인 도나텔로의 작품이다. 잘 알다시피 도나텔로는 피렌체 메디치가의 코시모가 가장 아꼈던 조각가로서 르네상스 조각의 개념을 만들어낸 위대한 조각가이다. 도나텔로의 기마상은 높이가 4m에 이른다. 당시 사방이 다 보이는 입체적인 조각을 만드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시절 이 같은 대형 조각상을, 그것도 말이 힘차게 걷고 있는 모습으로 조각한다는 것은 고도의 기법을 요하는 일이었다.

기마상의 주인공은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을 위해 일했던 가타멜라타 장군이었다. 장군이 사망하자(1443) 그의 가족들이 도나텔로에게 조각상을 주문하였고 작가는 1545년부터 5년간에 걸쳐 이를 제작했다. 이 작품은 고대 이래 광장에 세워진 유럽 최초의 청동 기마상이 되었고 이후 수많은 기마상들의 효시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여기서 작가가 주인공의 모습을 미화하지 않고 고집불통의 표정 그대로 표현한 것이 흥미롭다. 결코 아부하지 않았던 작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도나텔로는 파도바 대성당 안의 제대 조각도 만들었다. 보통 제대 앞에는 그림이 세워지는데 파도바에서는 조각을 제단화로 택했다. 피렌체 최고의 거장을 초대한 파도바 사람들은 이 위대한 조각가를 최대한 예우하기 위하여 대성당의 제단 조각을 맡긴 것으로 추정된다. 제단조각은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그리고 성인들의 모습을 담은 청동 조각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파도바의 수호 성인인 성 안토니오의 일화를 담은 부조도 만들어졌다. 이들 부조는 원근법을 부조에 적응시킨 최초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는 우리도 백남준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도나텔로의 손끝을 거친 것은 뭐든지 최초가 되었으니 그의 위대함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도나텔로의 파도바 여행으로 이탈리아 북부에도 르네상스의 불이 붙기 시작했다. 한 작가의 여행이 한 도시와 지역의 예술 운명을 바꿔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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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시에나 - 시에나 캄포광장엔 노천카페 즐비

이탈리아 시에나 - 시에나 캄포광장엔 노천카페 즐비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14 14:17

이탈리아 시에나 - 시에나 캄포광장엔 노천카페 즐비 




 
 
광장에 어둠이 내려앉으면 광장을 따라 들어선 노천카페(Bar)에 하나 둘씩 불이 켜진다. 이곳에 있는 카페들은 비싼 실내 장식과 소파가 따로 필요치 않아 보인다. 시청 앞 광장에 면해 있는 수백년이 넘는 건축물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시청의 종탑, 낭만적인 부채 꼴 광장이 모두 카페의 배경이다 보니 달리 인테리어가 필요치 않은 것이다.

이럴 때 바로 “조상 덕에 잘 사는 사람들”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우리는 뭐든지 새로 만들어야 하니 때로 지치고 진이 빠지지만 그들은 가지고 있는 것에 하나를 더 보태면 되니 실패도 덜 겪고, 시행착오도 줄일 수 있을 것 같다. 대신에 그들의 삶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다이내믹함이 부족하다. 이탈리아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평생 큰 변화 없이 고향에서 부모의 직업을 물려받으며 어제와 별 다름 없는 오늘을 살아간다는 것은 장점이자 단점이다. 안정된 삶을 치르는 대가라고 해야 할까? 물론 우리는 그 반대이지만 말이다.

이미 하루 종일 관광객들을 맞느라 몸살을 앓았지만 카페의 종업원들은 저녁이 되면서 새로이 찾아온 손님들을 여전히 기운차고 기분 좋게 맞아 준다. 손님 중에는 관광객들이 많지만 시에나 시민들도 적잖아 보인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한잔 하는 곳, 그곳이 바로 카페이다. 카페가 있는 곳에 사람이 모이고, 담론이 이루어지면서 문학이 탄생하며, 문화와 역사가 만들어진다. 그러니 유서 깊은 도시마다 수세기의 역사를 자랑하는 카페가 있기 마련이고, 카페는 한 도시의 역사를 증언하는 역사의 산실이 된다.

이탈리아를 방문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도시로 시에나를 꼽는 이들이 많다. 시에나는 피렌체와 쌍벽을 이루며 토스카나 주의 문화와 예술을 만들어 갔던 중세 최대이자 최고의 도시였으며 그 모습을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시에나가 전성기를 누린 때는 13, 14세기 이며 이 때 도시의 상징인 대성당(Duomo)과 시청(Palazzo Pubblico)이 세워졌다. 두 곳 모두 높은 탑이 있으나 대성당의 것이 조금 더 높다. 탑 자체가 높아서가 아니라 성당을 언덕 위에 짓고 시청을 그 아래에 위치시킴으로써 세속이 종교를 넘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탈리아의 중세도시는 늘 종교와 시민생활이 공존한다. 도시가 형성되면서 가장 먼저 만들어지는 곳이 바로 대성당과 광장인데 시에나에서는 대성당 대신에 시의 청사 건물 앞에 드넓은 메인 광장이 들어섰다. 이곳 광장에서 시민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일상의 삶을 즐겼는가 하면, 축제를 벌였다.

캄포 광장이라고 불리는 부채 모양의 이 아름다운 광장 바닥에는 9개의 부채 살 모양이 돌로 새겨져 있다. 시에나가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시에나 공화국을 통치했던 ‘9인의 정부’를 상징하기 위해 9개의 구획 모양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여름이 되면 두 차례에 걸쳐 그 유명한 팔리오 축제, 즉 시에나의 17구역 대표들이 안장 없는 말을 타고 질주하는 말 경기가 벌어진다. 1000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축제로서 전 세계 관광객들이 이를 보기 위해 찾아오며, 우리나라에서도 TV를 통해 여러 번 소개된 바로 그 축제이다.
 

‘14세기 걸작’ 시에나시청 벽화
마르티니 작품 등 당시의 국력·자부심 상징

 
가끔 뉴스에서 고흐나 피카소와 같은 거장들의 그림 한점이 수십 혹은 수백억원에 팔렸다는 소식을 접할 때가 있다. 현대 대가들의 소형 그림 한점이 그러하다면 초대형 실내 벽면을 온통 벽화로 장식한 수백년 전 거장들의 그림들은 도대체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우매한 생각이지만 가끔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탈리아 대부분의 도시들은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의 걸작들을 보유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시에나 시청 안에 그려진 벽화들은 단연 으뜸이라 할 만 하다. 14세기 서양 미술사는 시에나 화가들의 미술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뻘 되는 두치오를 시작으로 기라성 같은 시모네 마르티니가 탄생했으며, 그와 동시대 사람들인 암부로조와 피에트로 로렌체티 형제가 배출되었다. 그 중에서 두치오를 제외한 세 화가들의 대형 벽화들이 모두 시에나의 시청 안에 있다. 14세기 서양 회화사가 바로 이 건물에서 시작된 것이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이 시청에 들어가면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시모네 마르티니의 ‘마에스타’와 ‘구이도 리치 다 폴리아노 장군’이다. 벽면을 가득 메운 이 두 대형 프레스코화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습은 엄숙함 그 자체이다. ‘장엄’이라는 의미의 ‘마에스타’는 성모자와 성인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그린 종교화이고, ‘구이도리초 다 폴리아노 장군’은 시에나가 전성기를 누렸던 시절, 시에나에 반기를 들었던 나라들을 제압한 한 장군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자신이 타고 있는 말과 동일한 의상을 입고 전지를 둘러보고 있는 장군의 모습을 통해 시에나 공화국의 국력과 자부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전자가 시에나의 종교적 상징이라면 후자는 군사적 상징이다.

이 방의 옆방인 9인 정부의 방에는 암부로조 로렌체티의 ‘좋은 정부의 알레고리’와 ‘나쁜 정부 알레고리’가 있다. 9인의 정부란 한때 시에나 공화국을 통치했던 정부의 이름이다. 그래서인지 정치적 주제를 채택했다. 여기서 좋은 정부를 상징하고 있는 것은 한 늙은 왕이다. 그의 왼쪽 옆에는 심판, 절제, 관대가 오른쪽 옆에는 신중, 강인, 평화가 사람의 모습으로 의인화되어 있다.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으로 좋은 정부가 되기 위한 덕목들이다. 반대편에는 나쁜 정부의 알레고리를 그리고 있는데 뿔 달린 독재자의 모습이 중앙에 있고 양쪽에 나쁜 습관, 잘못된 심판 등으로 고통받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

또 다른 벽면에는 ‘좋은 정부의 효과’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도심과 농촌의 모습으로서 각종 가게와 상인들로 북적거리는 활기찬 시에나의 모습이다. 거리에서 강강술래를 하며 춤을 추는 소녀들, 양떼를 몰고 가는 목동, 말을 타고 길을 가는 사람들, 가게에서 흥정하는 상인과 손님들의 모습이 보인다. 평화롭고 한가한 이들 장면은 모두 좋은 정부의 효과를 시각화한 것이다.

이들 그림은 환경을 아름답게 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올바른 정치를 바라는 백성들의 염원과 정치인들의 다짐을 드러내는 도구다.
 

‘시에나 성당’ 고딕양식 최고봉
장엄하고 독창적인 기둥·조각 수두룩

 
고대부터 19세기 이전까지 2000년의 서양미술사에서 이탈리아가 타 유럽 국가에 주도권을 넘겨준 양식이 딱 하나 있는데 바로 고딕 양식이 그것이다. 고딕은 뭐니 뭐니 해도 프랑스의 산물이며, 이탈리아는 고딕에 관한 한 별로 내 놓을 만한 예술 상품이 없다. 밀라노 대성당만이 거의 유일하게 화려함과 규모면에서 프랑스의 고딕 건축물에 비교될 뿐이다.

그 와중에 시에나 대성당은 이탈리아 고딕의 자부심이라 할 만하다. 밀라노 대성당이 규모와 외적 화려함에서 압도한다면 시에나 대성당은 예술가들의 명성과 소장품들의 높은 질적 수준으로 인해 최고의 고딕 성당으로 꼽힌다.

시에나 대성당은 거대한 규모에 비해 아담하고, 정겨워 보인다. 정면에는 내부로 들어가는 세 개의 문이 있는데 기둥장식과 문 위의 반달형 장식이 전형적인 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임을 말해준다. 반면 문 위쪽부터는 모두 고딕 양식이다. 고딕 특유의 뾰족 첨탑들과 레이스 풍의 건축 장식들, 우뚝 서 있는 조각 작품들, 그리고 고딕 성당의 상징이라는 거대한 장미의 창도 보인다. 시에나 대성당은 이렇듯 건축의 구조와 양식적 측면에서 볼 때 유럽의 여타 고딕 성당들과 다를 바 없으나 그 느낌은 사뭇 다르다. 이탈리아 특유의 섬세함과 정겨움이 배어있는 까닭일 것이다.

건축물 외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면 곳곳에 놓인 조각들이다. 이것들은 고딕 조각의 선구자로 알려진 조반니 피사노(13세기 중 후반기에 활동)의 작품이다. 이들 조각 외에도 정면의 상단부 건축 디자인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고딕이 프랑스의 산물이라고 하나 이름 석자만 대면 알만한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고딕 건축가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반면, 이탈리아는 제대로 된 고딕 성당이라고는 시에나에서 딱 하나 만들어냈으면서도 대표적인 예술가를 배출했으니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면 약이 오를 노릇이다. 현재 보이는 정면의 조각들은 모두 복제품들이고 원작은 대성당 부속 미술관인 오페라 델 두오모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성당 안에 들어가는 순간 방문객들 사이에서 한숨인 듯 탄성인 듯, 신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흰색과 초록색이 얼룩말의 띠처럼 교차하여 만들어 낸 거대한 기둥 숲과 그것들이 만든 장엄함과 조화로움 때문이다. 기둥이 이토록 독창적이며 아름답게 만들어진 건축물은 많지 않으며, 아랍의 영향에 이탈리아 적 감각을 곁들어 만든 전형적인 시에나 풍의 기둥이다. 기둥 위쪽에는 172명의 역대 교황들의 초상 조각과(1400~1500년에 제작), 36명의 황제들의 초상 조각이 설치되어 있다. 세속과 종교의 최고 지도자들의 모습을 집대성하였다.

눈을 아래로 돌리면 바닥에 방문객들의 발걸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빨간 줄이 둘러져 있다. 그것은 인타르시아라 불리는 돌 상감 모자이크 기법으로 그려낸 56개의 돌 그림들로서 1300년대부터 1500년대까지 2세기에 걸쳐 제작되었다. 물론 그것을 디자인 한 사람 중에 당대 최고의 화가의 작품도 있다.

액자에 끼워 고이 간직해도 모자랄 판에 어찌하며 이 소중한 그림들을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바닥에 그려놓았단 말인가? 바닥부터 천장까지, 한 마디로 예술이 아닌 것이 없다.
 

고딕조각 새지평 피사노의 ‘설교대’
예수의 생애 8개 부조로 다뤄… 미켈란젤로 압도

 
미켈란젤로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피사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에나 대성당에서만큼은 피사노가 미켈란젤로를 압도한다. 이곳에는 미켈란젤로의 조각이 네 점이나 소장되어 있으나 성당을 대표하는 작품은 피사노의 설교대다. 소개 책자를 보아도 피사노의 설교대에는 무려 8쪽을 할애한 반면 미켈란젤로의 조각들은 겨우 한쪽에 소개했을 뿐이다.

시에나 대성당 건립에 큰 공을 세운 이들은 피사노라고 불리는 부자(父子) 조각가들이다. 아버지 니콜라 피사노가 대형 설교대(1265~1268년 제작)를 만듦으로써 고딕 조각의 지평을 열었다면, 아버지 밑에서 미술을 배운 아들 조반니는 성당 정면의 건축과 조각을 맡아서 이탈리아 고딕 조각과 건축의 자부심이 되게 했다.

성당의 앞쪽에 놓인 8각형 모양의 대리석 설교대는 8개의 부조로 장식되어 있는데 내용은 아기 예수의 탄생부터 최후의 심판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생애를 다루고 있다.

이들 작품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서 이탈리아 고딕 조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얼굴 표정은 실제 사람인 것처럼 생생하고, 육체의 움직임은 중세의 딱딱함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묘사되었다.

이후 서양 미술의 특징이 될 자연주의의 시작이다. 특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죽은 아들 앞에서 기절해버린 성모님의 모습은 이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인간적인 장면이다. 작업은 아버지 니콜라 피사노가 여러 명의 조수들을 데리고 했으며 제자들 중에 아들도 있었다.

유럽의 교회는 당대 최고의 미술가들을 초대하여 미술품을 의뢰했다. 이는 예술에 대한 안목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동시에 미술품이 그들의 종교인 그리스도교를 표현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이었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림이나 조각은 성서의 이야기나 성인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당시로서는 가장 효과적인 시각매체였다.

미술품은 때로 실존 인물을 선전하는 매체로 둔갑하기도 한다. 대성당 내부 왼쪽 편에 있는 피콜로미니 도서관이 바로 그 예다. 도서관을 짓게 한 사람은 추기경 프란체스코 피콜로미니 토데스키니로서 후에 교황 비오 3세가 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삼촌이자 교황 비오 2세(1458~1464년)였던 당대 최고의 인문주의 학자 에네아 실비오 피콜로미니의 장서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 이 도서관 장식을 발주했다.

도서관의 벽은 15세기 프레스코 벽화로 가득한데 그림의 내용인즉슨 삼촌인 선임 교황 비오 2세의 일대기이고 보면 자랑스러운 가족사이자, 미술을 통해 현존하는 인물을 예찬한 전형적인 예다. 다만 핀투리키오가 그린 이들 벽화 역시 미술사 교과서에 빠짐없이 실리는 걸작이다 보니 세월이 흐른 지금 그 누구도 당시의 정치적인 목적에 대해 이의를 달지 않는 것이다.

서울시에서 건립하려는 오페라하우스에 대해 한 시민단체의 사람이 비용을 문제 삼으며 이의를 제기하는 뉴스를 보았다. “그래도 지어야 한다!” 정치도 돈도 순간이지만 예술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역사에 남을 기념비적인 작품을 만들어내는가이다.
 

Posted by 비회원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아름다운 수상도시’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아름다운 수상도시’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14 14:11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아름다운 수상도시’ 
 
 




베네치아를 방문하고 돌아올 때마다 늘 마음이 아팠다. “내가 이곳에 또 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나는 한 도시와 작별을 하곤 했다. 이별은 늘 슬픈 것이며, 사람하고만 하는 것도 아닌가 보다. 한 도시를 떠나면서도 이별을 떠올렸으니 말이다. 그만큼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베네치아를 떠난다는 것은 나에게는 매번 고통이요, 아픔이었다.

베네치아는 수백 개의 섬 위에 세워진 수상도시다. 배가 다니는 운하는 대로이고, 수로는 작은 골목길이다. 자동차 대신 배가 다니는 것만 다를 뿐 그곳에도 버스, 택시, 자가용이 있다. 오히려 육지에 없는 낭만적인 곤돌라라는 배도 있다.

베네치아에 가는 법은 자동차, 기차, 비행기 편이 있다. 차와 기차는 물론이려니와 공항에 내려도 한번만 배를 타면 곧바로 시내 중심가로 연결되는 배편이 있다. 관광객들이여, 지체하지 말고 가서 돈주머니를 풀라는 거다. 그들은 모두 베네치아 상인의 후손들이었다.

기차로 도착했을 경우에도 역사를 빠져나오면 바로 출렁거리는 바다와 만나게 된다. 역 광장에서 버스 티켓을 사서 배에 몸을 실으면 그때부터 대운하(Canale Grande)를 통과하는 베네치아 관광의 시작이다. 배는 정거장마다 멈추어서니 시가지 구경하기에 더없이 적절하다. 굽이 굽이 배가 가는 곳마다 좌우로 눈을 돌려보라. 아름다운 건축물을 발견했다면 마음껏 탄성을 질러도 무방하다. 돌아다니는 사람의 90%는 관광객이니 그들도 모두 나와 같은 맘이다.

세상에 아름다운 도시가 많다지만 베네치아는 특별하다. 육지에서도 석조 건물 하나를 세우려면 온갖 고생을 해야 하는데 하물며 물속에 기초 공사를 하고 필요한 석재는 육지에서 배로 실어 날라 건축물을 완성해야 했으니 그 어려움이 어련했을까?

베네치아의 건축물은 대략 13세기 고딕시대부터 르네상스, 바로크를 거쳐 17세기의 로코코 시대로 이어지는데, 건축의 역사가 바로 도시의 역사이기도 하다. 밖에서 보면 건축물의 층마다 작은 발코니 앞에 화분들이 놓여 있어서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베네치아 사람들의 마음을 보는 듯하다.

베네치아는 지리적 위치로 인해 동방과 비잔틴을 연결하는 유럽의 창과 같은 곳이었다. 중세에는 동방에서 물건을 수입하여 유럽에 파는 무역업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그 부를 토대로 그들은 문화, 예술, 문학, 낭만, 그리고 자유를 꽃피웠다.

베네치아는 철저하게 상업을 추구한 도시였으며, 상업적 성공을 위해서라면 종교와도 거리를 두었다. 베네치아 정부가 혼신의 힘을 다해 지켜내고자 한 것은 자국민의 상업 활동이었다. 경제가 모든 정책의 우선이었던 셈이다. 베네치아에서는 신조차도 그들의 상업을 지켜주지 않는다면 공경받지 못하는 듯했다.

장사로 벌어들인 돈을 그들은 잘 먹고 잘 사는 데 썼다. 그러니 음식과 건축이 발달했으며, 위대한 예술가들이 줄줄이 탄생되었음을 물론, 낭만적인 바람둥이 카사노바와 같은 사람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카페 ‘플로리안’ 베네치아의 명물
 
 
“베네치아의 카페 플로리안으로 가자.”

듣기만 해도 설레는 이 문장은 이광주 선생이 쓴 책 제목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카페 플로리안의 탄생부터 카페가 지나온 역사적 발자취를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베네치아의 심장부는 산 마르코 광장이다. 그곳에는 늘 수많은 비둘기 떼가 모여 있고, 비둘기 떼만큼의 관광객들로 사시사철 북새통이다. 베네치아를 찾은 관광객들은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즐거워한다. 인간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린 비둘기들은 관광객이 주는 먹이를 끝도 없이 탐욕스럽게 먹어댄다. 비둘기들이 도망을 가지 않으니 손바닥이나 머리 위에 올려놓고 멋진 기념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밥값을 제대로 하는 산마르코 광장의 비둘기들은 이제 어엿한 베네치아의 관광 상품으로 자리잡았다.

아름다운 기둥 숲으로 둘러싸인 넓고 긴 직사각형의 산마르코 광장에는 또 다른 명물이 있는데 바로 음악 카페다. 이들 카페 중에 카페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카페 플로리안이 있다. 카페 플로리안은 단순한 카페를 뛰어넘어 베네치아 역사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1683년 처음 생긴 이래 그곳은 외세의 침략 때에는 전략의 요충지였고, 지식인들의 담론의 장이었으며, 베네치아를 찾은 명사들이 가장 먼저 찾는 곳이었다.

이곳을 찾은 역사적인 인물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괴테, 카사노바, 스탕달, 바그너, 러스킨, 릴케, 마네 모네, 하이네, 니체…. 플로리안은 때로 매춘의 소굴이기도 했다. 카사노바가 작업을 벌인 곳도 바로 이곳이었단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카페를 보통 바(Bar)라고 부르는데 바는 그들의 일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다. 잘 먹기로 유명한 이탈리아 사람들이지만 아침만큼은 간단하게 한다. 집에서 할 경우 카페라테라 불리는 커피 우유에 비스킷 몇 개면 끝이다. 그나마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아침 식사를 출근길에 카페에 들러서 한다. 보통 카푸치노 한잔에 패스트리 한 점을 먹는데 우리 돈으로 2000원 정도면 해결된다.

이탈리아의 카페는 우리와 다른 점이 있는데 서서 커피를 마시면 천원 남짓이면 되지만 일단 자리에 앉으면 값이 두 배 혹은 그 이상으로 올라간다. 카페 플로리안 역시 마찬가지다. 카페 안에 들어가서 마시면 싼 값에 커피를 마실 수 있지만 일단 노천의 테이블에 앉으면 커피 한잔 값이 1만5000원 정도 한다. 하지만 그 정도는 이 카페가 지나온 역사에 바치는 나그네의 헌정이라 생각하자.

카페 플로리안에 앉아 서비스를 받는 순간 우리는 역사적인 카페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카페에 앉아서 적당히 자리를 잡고 느긋하게 음악을 감상하다 보면 재미있는 광경도 목격할 수 있다. 연주보다는 아름다운 여자 손님, 혹은 팁 좀 뿌릴 만한 일본 여인을 유혹하느라 눈길을 보내는데 여념 없는 연주자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음악, 자유, 낭만, 역사, 인생이 있는 곳, 그곳이 바로 4세기 가까이 영업을 계속 하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유서 깊은 카페 플로리안이다.
 

‘베네치아 수호성’ 성 마르코 대성당
 
 
베네치아의 심장부가 성 마르코 광장이라면 이 광장의 심장부는 성 마르코 대성당이다. 베네치아 역에서 배를 타고 성 마르코 광장 정거장에서 내리면 레이스처럼 섬세하게 장식된 아름다운 석조 건물인 베네치아 공작 궁과 만나면서 그 화려함에 한번 놀라고, 공작 궁에서 이어지는 넓디넓은 사각의 성 마르코 광장에 두번 놀라며, 광장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웅장한 성 마르코 대성당 앞에서 세번째로 놀랄 것이다.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인 성 마르코는 보통 날개 달린 사자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 유래는 4대 복음 저자를 각기 마르코는 사자, 마태오는 천사, 요한은 독수리, 루카는 황소로 그린 데에서 유래했다. 이들 4대 복음 저자 중 그 누구도 성 마르코처럼 한 도시 전체의 상징이 되어서 지극한 영광을 누린 이는 없는 듯하다. 성 마르코 덕분에 날개 달린 사자상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상징이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베네치아의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성 마르코 성당은 바실리카라 불린다. 바실리카란 원래 로마제국시대의 공회당이었는데 이후 그것을 본떠 초창기인 10세기 이전의 교회를 가리키게 되었으며, 따라서 유서 깊은 교회일수록 바실리카란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바실리카가 처음으로 지어진 것은 9세기 경이다. 그 무렵 베네치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수호성인인 성 마르코의 유해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한 교회에서 훔쳐 온 후 자신들을 지켜주리라 굳게 믿었던 성인의 유해를 모시기 위해 교회를 지었다. 오늘날 성당의 모습은 1063년 이후 건축된 것이다.

1000~1200년을 서양에서는 로마네스크 양식 시대라 하는데 이 시기에 지어진 성 마르코 성당은 대표적인 로마네스크 건축물이자 특별히 비잔틴 양식으로 불린다. 교회의 일반적인 형태가 라틴 십자가로 불리는 길쭉한 사각형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반해 비잔틴식 성당은 그리스 십자가로 불리는 정사각형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돔으로 장식된 것이 특징이다. 비잔틴 양식의 또 다른 특징은 모자이크 장식인데 성 마르코 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모자이크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모자이크 예술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우선 성당의 정면부는 다섯개의 출입문 위에 반원형의 아치가 2층으로 장식되어 있어 화려함을 더해준다. 이 반원형의 아치는 모두 모자이크로 장식되었는데 원래는 12세기에 만들어졌으나 오리지널은 왼쪽 문 위에 하나만 남아 있으며, 나머지는 후대에 다시 제작했다. 그 중 2층에 있는 아치의 모자이크는 역사가 가장 짧으며, 17세기에 제작되었다.

성당 안에 들어가면 거대한 공간에서 빚어지는 안정감과 조화에 놀라게 될 것이다. 공간이 넓으나 자신이 왜소하게 느껴지지 않으니 참으로 편안하다. 거대한 기둥들이 만들어내는 아치의 부드러운 선들, 하늘로 가는 길목처럼 느껴지는 황금빛 돔, 실내의 모든 공간을 가득 채운 찬란한 모자이크화들. 이들 모자이크는 800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비잔틴 모자이크의 결정판이자 중세 회화의 교과서라 할 수 있다.

지상에서 맛볼 수 있는 천상의 세계가 한 곳 있다면 그곳은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대성당이리라.
 

거장들 그림 가득한 공작궁
 
 
베네치아의 심장부가 성 마르코 대성당과 광장이라면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해야 할 곳이 대성당 바로 옆에 자리 잡은 팔라초 두칼레, 즉 공작궁이다. 공작궁은 도제(Doge)라 불리는 베네치아 공화국 대통령의 아파트요 집무실이자 여러 관공서가 모여 있는 곳으로서, 이를테면 오늘날 우리의 청와대·종합청사·국회·검찰청·교도소를 합친 곳으로 볼 수 있다. 대성당이 종교의 중심지였다면 공작궁은 세속적인 정치·행정의 중심지였다.

바닷가 바로 앞에 세워진 베네치아의 공작궁은 태양을 받아 출렁이는 바다 물결을 건물에 옮겨 놓은 듯 화려한 기둥 장식들이 눈길을 끄는데 그 섬세함은 돌로 만든 레이스를 연상시킬 정도다.

그러나 이 정도의 화려함은 건물 안에 장식된 이 도시 최고 거장들의 작품에 비하면 그다지 자랑거리도 되지 못한다.

베네치아가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화려했던 시기는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였다. 이때의 베네치아 회화를 이끈 예술가들은 티치아노, 틴토레토, 베로네세라는 세 거장으로서 이들은 강렬한 색채와 빛을 내세우는 베네치아 학파의 기원을 이루게 되었으며, 특별히 티치아노는 당대의 미켈란젤로와 겨룰 수 있는 유일한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베네치아의 공작궁은 바로 이들 세 거장의 개인 미술관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방마다 이들의 그림으로 가득 차 있다.

대통령의 아파트, 접견실, 대기실 곳곳에서 티치아노의 그림을 볼 수 있는가 하면, 2000명의 시민들이 동시에 입장하여 법을 승인하고 정부의 행정관들을 임명했던 대회의실에는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틴토레토의 대형 벽화가 설치되어 있다.

이 방에는 특히 16세기까지의 역대 베네치아 대통령의 초상화가 벽면에 빼곡히 걸려 있는데 그 중 한 곳에는 그림 대신에 검은 색만 칠해져 있다. 그곳은 바로 마린 팔리에로라는 대통령의 초상화가 있어야 할 자리였으나 그가 권력을 탐해 모반을 꾀하는 바람에 참수형에 처해졌고, 이 불행한 정치인을 경고로 삼고자 그 자리를 영원히 검게 칠해놨다는 것이다.

베네치아 대통령은 사사로운 권력을 추구하다가는 이렇게 비극적인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이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평화로운 베네치아를 만드는 것이었다. 평화가 보장되어야만 베네치아 시민들이 바다를 오가며 맘 놓고 무역을 하면서 부를 축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권력은 특정인에게 집중되지 않도록 철저히 분산되었고, 정치가들의 임기는 철저히 지켜졌으며, 그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경제 부흥이었다. 이것이 바로 베네치아 번영의 밑거름이 된 것이다.

공작궁에는 감옥도 있는데 이 감옥에 가려면 ‘한숨의 다리’를 건너야 한다. 한번 건너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한때 이 감옥에 카사노바도 갇힌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세기의 바람둥이답게 그는 자신을 사모했던 여인들의 도움으로 이 철통같은 감옥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으며 그 생생한 모험담을 책으로 출판하기까지 했다.
 

베니치아, 낭만과 자유의 도시
 
 
#풍경 하나

해가 저물어 석양이 바다를 붉게 물들이자 베네치아의 기차역 광장에 모여 있던 젊은이들이 하나 둘씩 침낭을 펴서 잘 준비를 했다. 그들은 베네치아를 방문한 전 세계의 관광객들이다. 해가 바다 속으로 완전히 잠수하자 여행객들은 광장이 침실인양 하나 둘씩 침낭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들은 그날 밤을 거기서 그렇게 보내는가 보다. 하늘에는 별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고, 10m도 안 떨어진 곳에서는 바닷물이 철썩거렸다. 가로수처럼 빼곡히 들어선 오래된 건물들이 쏟아내는 불빛은 베네치아의 밤을 더욱 화려하게 장식했다.

어느 해이던가, 한여름의 저녁 무렵, 나는 베네치아의 역 광장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수많은 여행객들을 목격했다. 비록 돈을 절약하기 위하여 호텔에 들어가지 못하고 노숙을 해야 하는 젊은이들이었지만 나는 그들이 정녕 자유를 만끽하고 있음을 그들의 표정에서 느낄 수 있었다. 때론 하늘 아래 맨땅이 일류 호텔보다 아늑할 수도, 또한 화려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 때 베네치아에서 보았다.

#풍경 둘

베네치아를 여행하다 보면 곤돌라를 타고 즐거워하는 여행객들을 흔히 보게 된다. 배의 앞 뒤가 아름답게 장식된 검은 색의 곤돌라는 손님이 앉는 선체에 붉은 융단을 깔아서 고급스러움을 더해준다. 타는 순간 귀족이 된 듯 착각하게 만든 배라는 생각이 든다. 곤돌라는 베네치아가 자랑하는 가장 전통적인 관광 상품이다.

나는 베네치아를 거의 매년 방문했지만 정작 곤돌라를 타본 것은 내가 인솔해서 갔던 2년 전의 단체 여행에서였다. 그동안 곤돌라를 타고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우리 팀은 세 대의 곤돌라에 나누어 탔고 그 중 배 한대에는 가수를 초대했다. 곤돌라를 타면서 베네치아 가수가 뽑아 대는 노래를 감상하는 일이야말로 꿈에 그리던 장면이었다.

가수의 목소리는 우렁찼고 아름다웠지만 그가 관광객을 상대로 평생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왠지 맘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무척 감탄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사공의 노 젓는 솜씨였다. 곤돌라는 큰 물길만 다니는 것이 아니라 좁은 골목길도 다녀야 하고, 또 심하게 방향을 틀기도 해야 한다. 내가 탄 곤돌라의 사공은 그 좁은 길을 제집 드나들듯 빠르게 가르지를 뿐만 아니라 코너를 돌 때에는 발로 힘차게 건물을 차면서 방향을 트는 모습이 달인의 행위 그 자체요, 무척 아름다워 보였다.

“언제부터 곤돌라 사공을 했나요?”

“400년 전부터입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또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우리 집안은 곤돌라를 젓는 사공의 집안이었답니다.”

바닷바람과 태양에 까맣게 그을린 그는 잘 생긴 이탈리아 젊은이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도 여생의 대부분을 사공으로 살겠지. 베네치아의 예술도 전통도 이런 대물림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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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작은 예술도시’ 만토바

이탈리아의 ‘작은 예술도시’ 만토바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14 14:10

이탈리아의 ‘작은 예술도시’ 만토바 
 




 
만토바를 아느냐고 물으면 고개를 갸웃하겠지만,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를 아느냐고 물으면 많은 분들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렇다.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를 보면 궁정의 넓은 홀에서 화려한 무도회가 펼쳐지는데 그곳이 바로 천하의 바람둥이 만토바 공작이 살던 공작궁이자, 이번주부터 소개할 예술산책의 무대다.

만토바의 공작궁은 방만 500개가 넘는 거대한 궁정이지만 정작 이곳이 중요한 이유는 규모 때문이 아니라 그곳을 장식하고 있는 예술품 때문이다. 이곳에는 많은 예술품이 산재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르네상스 시대 안드레아 만테냐가 그린 벽화가 유명하다. 공작궁에 그려진 이 화가의 작품들은 서양미술사 교과서에서 빠짐없이 다뤄지고 있는 것이자, 15세기를 대표하는 최고의 걸작이다. 인구 5만명도 채 안되는 소도시에 불과한 만토바가 오늘날 세계적인 예술도시로 주목받을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만테냐와 같은 예술가 덕이다.

만토바는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디아 평원에 위치한 작은 도시다. 주변에 페라라, 베로나를 비롯한 도시들이 있는데 모두 역사 여행의 필수코스이지만 아직은 우리나라에 자세히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다.

이탈리아 여행의 진수는 이들 소도시에서 만끽할 수 있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소장 예술품의 수준은 피렌체, 로마, 밀라노와 같은 대도시에 못지않으며, 한때 그 지역을 통치했던 영주들의 화려한 궁정을 볼 수 있다.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작은 도시가 세계적인 예술품으로 가득한 것, 이것이 이탈리아의 저력이다.

이탈리아가 통일을 이루어 단일 국가로 탄생한 것은 불과 1870년의 일이었으며, 그 이전에는 각 지역을 특정 가문의 군주가 통치하는 철저한 지방분권 군주 체제였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다 보면 도시마다 독창적인 느낌과 색채가 강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오랜 지방분권의 전통에 기인한다.

이들 중 소도시들이 오늘날의 모습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세속 군주들이 통치를 시작한 시기와 때를 같이하며 대략 14세기부터 시작하여 15~16세기, 즉 르네상스 시대에 전성기를 누렸다. 군주들은 앞 다투어 궁정을 지었고, 궁정이 완공되면 당대 최고의 미술가들을 초빙하여 장식케 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밀라노의 궁정에 초대되어 그곳에서 18년이나 살면서 한 일도 알고 보면 군주를 위해 봉사하는 일이었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틴 성당에서 불후의 명작을 남긴 것도 결국 당대 최고의 권력자였던 교황의 예술적 야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권력자의 야망과 예술가의 천재성이 만나서 폭발하면서 당대 최고의 걸작들이 줄줄이 탄생한 것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군주들의 예술정책은 동시대 프랑스, 영국, 스페인으로 전해져 유럽 전역에 예술 후원 정책의 전통을 세우게 되었다. 이탈리아는 이 분야에 있어 유럽에서 가장 앞서간 선구자였다. 기왕에 군주, 정치가들이 권력을 잡고, 통치할 바에야 예술에 눈을 떠서 예술가들을 발굴하고 그들로 하여금 걸작들을 남기게 한다면 후손들에게는 그보다 더한 선물은 없으리.
 

르네상스 미술의 보석 ‘신혼의 방’
 
 
회화란 화가에게는 개인의 창작물이요, 관람자에게는 감상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 같은 개념이 탄생된 것은 19세기 이후의 일이고, 고대 이래 수천년 동안 그림은 기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무엇보다도 전달 기능이었다. 시대가 달라지면서 그림의 역할도 달라졌다.

고대 로마시대에 그림은 황제를 신성화하고, 황제의 권력을 백성들에게 알리는 선전 도구였다. 중세로 접어들면서 미술을 가장 잘 활용한 곳은 교회였다. 교회의 벽은 벽화나 모자이크로 가득 채워졌는데 그 내용은 성서 혹은 성인들의 일화였다. 그림은 글을 모르는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전달하는 가장 중요한 매체였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미술은 그것을 활용하는 주체가 달라지면서 기능도 달라진다.

만토바의 공작궁(Palazzo Ducale)에서는 르네상스 시대 미술의 기능을 볼 수 있다. 그곳에는 수백 개의 크고 작은 방들이 있는데 곳곳에 미술품이 없는 곳이 없다. 그러나 이들 방 중에서 단연 빛나는 보석과 같은 곳이 있으니 일명 ‘신혼의 방’이 그곳이다.

이 방은 작품 보호를 위해 입장객의 수와 관람시간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을 만큼 작품 보존에 신경을 쓰는 곳이다.

신혼의 방이란 이름은 후대에 붙여진 별명이고 이 방은 원래 공작의 접견실이었다고 한다. 벽과 천장이 프레스코 벽화로 장식되었는데 르네상스 최고의 거장 안드레아 만테냐의 작품이다.

벽화는 곤자가 가문 사람들과 궁정의 신하들을 그리고 있다. 한쪽 벽에는 루도비코 곤자가와 그의 부인 바르바라, 딸, 시녀, 그리고 신하들(사진)이 있다. 공작 내외는 의자에 앉아 있고 주변 인물들은 서 있는 모습인데, 얼굴 생김새가 각자 다른 것으로 보아 실존 인물들을 그린 것이 분명하다.

이들 중에서 눈에 띄는 사람이 있는데 손에 편지를 쥐고 앉아서 한 참모로부터 귀엣말을 듣고 있는 이 사람이 바로 이 성의 주인 루도비코 곤자가 공작이다.

옆 벽에는 공작이 여행을 떠나던 중 갓 추기경이 된 아들 프란체스코와 길에서 만나고 있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그러니까 한쪽 벽에는 공작과 그의 주변 인물들을, 그 옆 벽에는 통치자와 후계자를 그려 놓음으로써 가문의 주요 인물들과 향후 후계자까지 모두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림의 배경 역시 의도적으로 연출한 것으로서 평화로운 풍경은 공작의 통치 지역이 그림에서처럼 평화로움을 보여주려 함이다.

접견실에서 이 그림을 본 방문객들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라 할 놀라운 인물 묘사 기법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며, 자랑스럽게 작품 앞에 서서 사람들에게 친히 그림을 설명해주었을 공작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르네상스 시대의 군주들은 화가의 손을 빌려서 자신과 가문의 영광을 세상에 알렸다. 당시의 그림은 오늘날의 신문이나 TV와 흡사한 전달매체였다.

매체란 잘 활용하는 사람이 이익을 보게 마련이다. 오늘날에는 대중매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정치인의 이미지 메이킹이 과거에는 미술을 통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니 미술은 전략이자 투자였다.
 

줄리오 로마노, 스승 라파엘 넘어서
 
 
만토바가 미술사에서 또 한번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은 1500년대 초반이다.

당시 만토바를 통치한 사람은 페데리코 곤자가(Federico Gonzaga) 백작이었다. 페데리코의 어머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티치아노가 초상화를 그려주었던 그 유명한 이사벨라 데스테로서 예술에 대한 후원과 안목으로 인해 르네상스 여인을 이야기 할 때 빠짐없이 등장한다. 이런 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들 이었으니 예술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음은 당연지사다.

페데리코는 열 살이 되던 1510년부터 3년 동안 정치적 이유로 인해 교황청에서 인질생활을 하게 되는데 말이 인질이지 실상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손님으로 지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이 시기는 로마 교황청 역사상 전대미문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한쪽에서는 미켈란젤로가 시스틴 예배당에 천장화를 그리고 있었고, 다른 쪽 방에서는 라파엘로가 벽화를 그리고 있었다. 타지의 어린 소년은 거장들의 손으로 예술이 탄생되는 현장을 똑똑히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10년 후 페데리코는 자신이 로마에서 체류하던 중 인연을 맺었던 라파엘로의 수제자 줄리오 로마노(Giulio Romano)를 만토바로 초대한다. 당시 라파엘로는 이미 사망했고 그의 제자들은 유럽각지로 흩어졌다. 로마노를 초대해놓고 페데리코 백작은 10년 전 교황청의 상황을 재현하고자 하는 야망에 밤잠을 설쳤다.

줄리오 로마노는 만토바 궁의 예술 총감독이 되었고, 대표적인 작품으로 테궁(Palazzo del Te), 일명 ‘차궁’을 설계하여 지었다. 원래 이 궁이 있던 곳은 곤자가 가문이 자랑하는 혈통있는 준마들의 마구간이 있었던 곳이었다.

‘차궁’은 곤자가 사람들이 쉬러 오거나 식사와 향연을 즐기던 일종의 별장이었는데 ‘말의 방’, ‘아모르와 프시케의 방’, ‘바람의 방’, ‘거인의 방’(사진·줄리오 로마노 작, 부분·1530~1533년) 등 방의 벽화에 따라 이름을 붙인 여러 개의 방들이 있다. 그 중에서 ‘아모르와 프시케의 방’은 포르노를 연상시킬 정도로 남녀 신들이 진한 애정행각을 벌이는 장면으로 가득 차 있다.

보는 이에게 시각적 충격을 주는 또 하나의 방이 있는데 ‘거인의 방’이 그곳이다. 그림의 주제는 노한 제우스가 하늘에서 벼락을 치는 바람에 거역한 지상의 거인들이 무너진 하늘의 건축더미에 깔리는 아우성 장면을 그린 것인데 해괴한 모습의 거인들이 서로 뒤섞여서 아수라장이 된 모습은 가히 종말을 연상케 한다.

이 그림을 통해 줄리오 로마노는 더 이상 라파엘로의 제자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 낸 선구자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여기서 로마노는 스승이 지존의 경지로 올려놓은 비례, 균형, 절제, 고요, 아름다움으로 대변되는 르네상스 회화의 개념을 파괴하고 새로운 회화를 탄생시켰다.

피카소는 회화를 파괴의 연속이라 했다. 당대 최고의 화가를 스승으로 두었지만 그 안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 냈으니 줄리오 로마노는 진정 대가가 아닌가?

예술의 도시 로마를 재현하고자 했던 페데리코 백작의 꿈은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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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의 마지막 수도 라벤나

로마제국의 마지막 수도 라벤나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14 14:06
 로마제국의 마지막 수도 라벤나 




 
 
라벤나는 가히 운명의 도시라 부를 만 하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는 생소한 이 도시가 로마 제국의 마지막 수도라는 운명을 타고 났기 때문이다. 부자가 망해도 3년을 먹고 산다고 했는데, 라벤나는 한때 지구의 절반을 지배했던 로마 제국의 수도였으니, 비록 추락의 일로에 놓이기는 했으나 제국이 남긴 문명의 흔적은 찬란했다.

서양사에서는 보통 서로마 제국의 멸망(서기 476년)과 함께 고대가 막을 내리고 중세가 시작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라벤나는 로마제국이 남긴 고대문명의 마지막 흔적과 중세의 시작을 알리는 유적을 볼 수 있는 곳이기에 역사의 경계 도시라 할 수 있다.

라벤나라는 작은 마을이 시골티를 벗고 로마제국 수도로서의 위용을 뽐낼 수 있게 된 것은 갈라 플라치디아라는 여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여인은 오노리우스 황제의 누이였는데 423년 오노리우스가 사망하자 대를 이은 그녀의 어린 아들 발렌티니아누스를 대신하여 섭정을 했으며 통치 기간에 문학과 예술을 전폭적으로 지지함으로써 이탈리아의 보물 목록을 풍요롭게 하는데 일조했다.

그녀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으로 갈라 플라치디아 무덤이 있다. 이 무덤은 내부가 온통 모자이크로 장식되었으며 라벤나가 자랑하는 모자이크 건축물 제1호이다. 모자이크란 엄지 손톱만한 크기의 다양한 색상의 유리나 돌을 벽에 일일이 붙여서 장식하는 회화 기법을 가리키며, 기원전 3세기 정도 로마제국시대에 사용되기 시작했으나 그것을 최고의 예술 경지로 끌어올린 곳은 바로 이곳 라벤나에서였다. 현재 라벤나에는 아름답고, 보존상태가 완벽하며, 가장 역사적 가치가 높은 모자이크 작품들이 남아 있다.

그 중의 백미가 갈라 플라치디아 무덤이다. 나는 이 무덤을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이라 부르고 싶다. 그것은 가로 세로의 길이가 같은 십자가 모양으로서 외부는 붉은 벽돌로 아담하게 지어졌으나 내부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탄성이 절로 나온다. 고흐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별들 가득한 청색으로 빚어진 모자이크는 천상의 세계를 보여주려는 듯 무덤의 천장을 덮고 있는데, 제작 된 지 1500년이 넘도록 손상 없이 완벽하게 보존이 되어 있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로마제국은 그리스도 탄생 이후 300년 넘게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했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것은 380년 이었으며 이 때부터 서구의 정치, 사회, 문화를 비롯한 모든 영역은 그리스도교 없이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지어진 갈라 플라치디아의 무덤은 로마제국의 통치자의 무덤이 그리스도교를 상징하는 십자가 모양으로 설계되었으며, 그 내부가 그리스도교를 표현한 그림들로 장식되었다는 점에서 로마제국의 그리스도교 수용상황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다.

갈라 플라치디아의 무덤은 멸망의 기로에서도 예술적이기를 포기하지 않은 로마인들의 모습을 증언해준다. 

 ‘중세미술의 뿌리’ 라벤나 교회들
세계 最古모자이크 등 ‘성서 그림으로 보는 듯’

 
이탈리아의 동쪽에 위치한 바다를 아드리아해라 부른다. 아드리아 해안에 위치한 대표적인 도시로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베네치아가 있지만 그보다 앞서 형성된 도시가 있으니 라벤나가 그곳이다. 라벤나는 지리적 위치로 인해 로마제국의 마지막 수도가 되었고, 이어서 중세를 여는 운명에 놓였다.

로마제국은 이탈리아인들이 그토록 우습게 여기며 야만인이라 비하했던 이민족에 의해 멸망당했다. 로마제국을 멸망시킨 이민족의 왕은 고트족의 테오도리코였는데 이들과 함께 고대(古代)는 막을 내리고 중세(中世)가 열렸다. 그들은 비록 이민족이긴 했으나 앞선 로마제국으로부터 위대한 건축법을 이어받았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를 계승했다. 과거 청산이 아니라 과거 계승인 셈이다.

서구의 고대 세계를 로마제국이라는 거대한 세력이 통치했다면 그에 버금가는 통치권을 이어받은 곳이 바로 중세의 교회였다. 로마제국의 계급에 의한 피라미드식 통치 방식은 고스란히 교회로 옮아갔다. 실제로 가톨릭 교회는 오늘날까지 로마 교황청 아래 각 나라별로 교구, 본당 등이 세포 조직처럼 뻗어 있어서 작은 지역에까지 교황청의 개입이 가능하게 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로마제국의 통치제도와 유사하다.

중세 최초의 왕이라 할 수 있는 고트족의 왕 테오도리크가 세운 성 아폴리나레 누오보 교회가 있다. 라벤나에는 성 아폴리나레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가 두 곳이 있다. 하나는 성 아폴리나레 인 클라세이고 다른 하나는 성 아폴리나레 누오보 교회다. 두 곳 모두 6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중세의 교회다. 이 두 교회는 구조와 분위기가 마치 쌍둥이 건물을 보는 듯 흡사하며, 6세기에 제작된 모자이크가 온전히 남아있어서 중세가 첫 발을 내딛던 시절의 예술 수준을 짐작케 한다. 두 곳 모두 소박하고 간결한 가운데 1500년 전 건축물이 주는 기품을 느낄 수 있고, 무엇보다도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모자이크 작품의 원조를 볼 수 있다.

아폴리나레 누오보 성당에 들어가면 기둥이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데 기둥 위의 벽면이 온통 모자이크로 덮인 화려한 색채와 조우하게 된다. 한 쪽 벽에는 성인들의 모습이 일렬로 줄을 서 있고, 마주 보는 쪽에는 순결한 처녀들의 모습이 보이는데 마치 복제 인간처럼 비슷한 모습의 사람들이 열을 지어 서 있어서 인물 개개인이 주는 아름다움 보다는 전체가 주는 조화와 율동미를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 끝에는 아기 예수에게 예물을 바치는 동방박사의 모습도 보이는데 이들이 입은 의상은 당시의 패션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이들 모자이크 위쪽에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수난을 담은 모자이크 그림들이 있다. 가장 오래된 중세미술의 보석이자 후대의 그리스도교 미술의 뿌리이기에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이들 작품은 문맹자가 대부분이었던 당시 민중에게 그리스도교를 설교하는 훌륭한 시각매체이자 그림으로 읽는 성서나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고단한 삶을 위안받고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들도 저세상에서 구원받기를 열망했다. 서구의 중세 사회가 시작된 것이다.

정치는 순간, 예술은 영원
‘통치용’이었던 황제 모자이크 ‘명작’으로 남아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기억나는 것 중의 하나는 칠판 위 벽에 늘 태극기와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이 같이 걸려 있었다는 거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렸을 때 우리나라의 대통령과 박정희를 동의어로 생각했던 것 같다. 박정희가 아닌 다른 이름의 대통령이란 내겐 너무 생소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3학년 때인가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슬피 울던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함께 슬퍼했으며, 그 와중에도 그분이 아닌 다른 분이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어느새 나는 세뇌되어 있었던 것이다.

통치자의 사진을 학교에 걸어놓는 것은 사실은 계산된 정치적 선전이다. 이미지를 통한 통치자의 선전은 그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으며 대표적인 사례는 로마제국의 황제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재위기간 BC 30~AD 14년)는 이미지를 통한 정치적 선전 효과를 꿰뚫고 있었는지 자신의 모습을 청동조각으로 만들어서 로마 시내에만 80점 이상을 설치해놓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앞에서 숭배토록 했다.

이미지를 통한 통치술은 이후 정석처럼 되었으며 동로마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527~565년)도 예외가 아니었다. 운명의 땅 라벤나가 또 한번 새로운 운명을 맞은 것은 이 황제의 통치시절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잃었던 로마제국의 땅을 회복하는 정책을 썼는데 라벤나는 되찾아야 할 땅 제 1호였다.

그는 라벤나를 제국의 영토로 만든 후 그곳에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를 짓도록 명했다. 바로 성 비탈레 성당이다. 현재 이스탄불의 상징처럼 되어있는 성 소피아 사원 역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절에 건축된 것인데 그는 성 소피아 사원보다 규모는 작지만 거의 같은 구조로 성 비탈레 성당을 짓게 했다. 두 성당 모두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장식되었으나 소피아 사원은 16세기부터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면서 형상을 거부했던 이슬람교의 정책에 의해 그림이 대부분 파손된 반면, 라벤나의 교회에는 모자이크가 고스란히 남아있어서 6세기 동로마제국의 미술품을 감상할 수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교회의 제대 위쪽에 자신과 황후 테오도라가 각각 참모들을 동행하여 그리스도께 예물을 바치는 모습을 모자이크(사진)로 제작하게 했다. 자신은 빵이 담긴 바구니를 든 모습으로, 그리고 부인은 포도주잔을 들고 있는 모습인데 신이나 성인에게만 표시하는 후광까지 그려 넣게 했다.

이들 부부는 한번도 라벤나에 와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교회에서 가장 잘 보이는 부분에 자신의 모습을 보이게 함으로써 미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자신을 우러러보게 했다. 백성들에게 통치자의 이미지를 각인시킨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어렸을 때 교실에서 대통령의 사진을 보면서 받았던 것과 비슷한 효과가 아니었을까. 다만 그는 비록 정치적 선전이긴 했지만 너무도 아름다운 예술품을 통해 목적을 달성했다. 그래서 1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곳의 모자이크는 진귀한 비잔틴 양식의 대표적인 예술품으로서 전세계의 관광객을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는 순간이지만 예술은 영원하다. 
 




 

Posted by 비회원

고종희교수의 이탈리아 예술산책 - 우르비노 ‘공작궁 예술’ 탄성절로

고종희교수의 이탈리아 예술산책 - 우르비노 ‘공작궁 예술’ 탄성절로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14 14:05

고종희교수의 이탈리아 예술산책 - 우르비노 ‘공작궁 예술’ 탄성절로 
 
 




이탈리아의 저력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은 도시로 인해 더욱 빛난다. 우리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소도시라도, 막상 가보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은 경우가 허다하다. 이탈리아는 전세계에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가장 많은 나라다.

그러나 정작 이탈리아 사람들은 세계문화유산이라는 것에 대해 별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듯하다. 나는 10년 넘게 이탈리아에서 살면서 교수님이나 동료들로부터 단 한번도 세계문화유산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우르비노라는 도시가 있다. 아주 작은 도시지만 역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우르비노가 유명한 이유는 그곳이 라파엘로와 브라만테의 고향이기 때문이지만 더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공작궁(사진) 때문이다.

나는 아시시에서 출발하여 굽이굽이 험한 산길을 마치 곡예하듯 조심스럽게 운전해서야 우르비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에는 우리나라의 태백산맥처럼 동서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산맥이 있는데 아펜니노 산맥이 그것이다. 우르비노에 가려면 이 험한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야 하는 것이다.

산의 정상을 지나 조금 달리자 꿈의 도시 우르비노의 공작궁이 그림처럼 눈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진으로 수없이 보아온 건축물이었다. 나는 궁을 직접 보는 순간 비로소 이 궁이 왜 깊은 산 속에 위치하고 있는지, 또한 왜 화려한 궁정의 모습보다는 방어적인 성채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렇게 예술은 때로 직접 가보고 나서야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공작궁을 짓게 한 사람은 르네상스 시대의 용병대장 페데리코 다 몬테 펠트로이다. 이 사람은 자신에게 돈을 지불하는 곳이 있다면 마다하지 않고 가서 대신 싸워주었던 용병대장이었다. 20년 동안 목숨을 담보로 해서 번 돈으로 그는 자신의 궁을 지었는데 용병대장답게 성채의 모양을 띄게 했다. 아름다우면서도 군사적 용도를 강조한 것인데 이 궁은 깊은 산속에 위치하고 있어 자연히 천연 요새가 됐다. 누가 이 작은 도시국가를 정복하기 위해 그 험한 산을 넘으려 들겠는가? 그야말로 용병대장 출신의 군주다운 발상이었다.

페데리코는 전형적인 르네상스 시대의 군주였다.

그는 이 작은 도시의 궁을 장식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미술가들을 초청했다.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멀리 네델란드의 화가도 초청되었다. 화가, 건축가, 공예가, 조각가를 비롯해 각 장르의 미술가들이 이곳에서 자신들의 재능을 발휘했다. 궁 안에 있는 스투디올로라 불리는 서재는 르네상스 군주의 지적, 예술적 수준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책 수집광이었던 군주가 애써 수집한 귀한 필사본이 1000권이 넘게 소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예술을 모르는 군주는 이탈리아 군주가 아니요, 더구나 르네상스 시대의 군주는 될 수 없었다. 이탈리아가 세계문화유산을 최다 보유한 나라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렇듯 군인조차도 예술 없이 인생을 생각할 수 없었던 조상덕이다.
 

르네상스문명은 ‘군주-화가’ 합작품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명은 군주와 예술가가 만나서 만들어냈다. 오늘날 관광객들이 산 속의 작은 도시 우르비노를 찾는 이유도 그곳에 예술이 있기 때문이다. 한 때 궁을 호령했던 군주는 겨우 몇 십 년을 살다 갔지만 예술은 남아서 수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군주의 명성을 빛내주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는 통일된 국가가 아니라 특정 가문에서 크고 작은 도시를 통치하던 군주제였다. 밀라노 공국처럼 규모가 큰 지역을 통치한 스포르차 가문이 있었는가 하면 우르비노의 페데리코 다 몬테 펠트로처럼 작은 도시를 통치한 군주도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바로 이 같은 정치적 상황에서 탄생되었다. 이들 군주들이 살던 궁은 오늘날 이탈리아의 주요 관광지가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군주들은 예술의 효능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훌륭한 예술품으로 궁을 장식하고는, 중요한 손님이 왔을 때 그것을 자랑하는 것은 군주가 누리는 기쁨 중의 하나였다. 물론 그것은 단순한 자랑거리를 넘어서 외교적 효과도 발생시켰다. 비록 작은 나라라 하더라도 훌륭한 예술품은 무기 이상으로 군주의 위엄과 품위를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우르비노의 군주 페데리코 다 몬테 펠트로는 총 재산을 쏟아 부어 궁을 짓고 예술가들을 초대하여 장식토록 했는데,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1420~1492년)라는 당대 최고의 화가도 초대되었다. 오늘날 우르비노 궁이 미술사에서 언급되고 있고, 몬테 펠트로라는 사람이 전형적인 예술 후원자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이 화가 덕이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이 궁에 머물면서 한 일은 몬테 펠트로와 그의 아내 그리고 가족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일이었다.

오늘날 많은 정치가 대중매체를 통해 이미지를 관리하듯이 당시의 초상화는 군주의 이미지를 홍보할 수 있는 효과적인 시각매체였다. 이 때 군주의 위용이 느껴지도록 실물을 이상화하는 것은 화가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오늘날 포토숍으로 실물보다 멋진 모습의 사진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이치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그린 페데리코의 초상화는 빨간 모자에 빨간 옷을 입고 있으며 옆면을 보고 있는 모습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모델의 매부리 코다. 말 그대로 매의 부리를 닮은 매부리 코는 강인한 군주의 이미지에 제격이었다. 이 그림은 너무나 정교하여 모델의 점, 사마귀, 눈가의 잔주름까지 놓치지 않고 있다. 사진기로 찍더라도 이처럼 인상 깊은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란 쉽지 않을 듯하다. 이 작품은 유화로 그려졌으며 이탈리아의 유화 작품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에 속한다. 유화는 이처럼 사실적인 표현을 가능케 한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발명품이었다.

이 한점의 그림으로 인하여, 화가는 오늘날까지 당대 최고의 화가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모델인 군주는 자신의 모습을 수세기가 지나서까지 생생하게 남기게 되었다. 화가도 군주도 모두 떠나고 없지만 예술이 남아서 그들의 이름을 빛내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술의 힘이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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