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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9.06 수형당 빵

수형당 빵

수형당 빵 요리 맛집 정보 2008. 9. 6. 12:38

수형당 빵



한때 대구 최고 빵 브랜드 수형당을 기억하시나요 ?



# 추억이 돼버린 수형당 빵

수형당(秀亨堂).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때 대구 최고의 빵 브랜드였다. 1946년쯤 등장한 수형당, 50~60년대만 해도 해태·삼립과 어깨를 겨뤘고 점차 사업 다각화를 시도하면서 '수형 그룹'으로 웅비할 야심찬 프로젝트를 짰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수형당 편이 아니었다. 결국 방만한 경영으로 인해 82년쯤 소리소문도 없이 침몰하고 만다.

수형당은 대구 제빵산업의 기틀을 잡아준 기업이다. 훗날 뉴델제과 최종수 사장, 런던제과 조원길 사장, 지역의 첫 케이크 전문점 최가네의 최무갑 사장 등 대구의 메이저급 제과점 관계자들 상당수는 수형당에서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이젠 잊혀가고 있는 브랜드이다. 취재 중 동성로에서 만난 10여명의 20대에게 "수형당 빵을 아느냐"고 질문했지만 모두 "모른다"고 했다.

수형당의 등·퇴장 과정을 알기 위해 관계자를 찾아봤다. 일제 때 일본인한테 빵 기술을 배웠던 1세대 제빵인들은 지금은 거의 생존해 있지 않았다. 의성 출신 풍국당 주인 이을수옹(82)이 생존해 있지만 몸이 불편해 그 시절을 제대로 말해 주기 힘들었다. 어렵게 최가네 최 사장(63)과 중구 포정동 풍차 베이커리 권영오 사장(64)을 통해 수형당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 전성기때 직원 300명 넘어

수형당을 설립한 진병수(陳秉秀) 사장은 영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광복 직전 구 경북학원 자리에서 삼미제과사를 개점한 최팔용 사장과 친구사이로, 일제 때 북성로 미나카이 백화점 옆에 있던 이마사카(今阪) 제과점 종업원 출신이었다.

진 사장은 광복 전 이마사카에서 나와 중구 남산동에서 빵장사를 했다. 그곳에서 번 돈을 재투자해 광복 직후 중구 문화동 2번지에서 700여평 넓이의 수형당을 창업한다.

진 사장은 타고난 기업가였고 아이디어 맨이었다. 상호도 대충 만들지 않았다. 자기 이름 중에 '수'자, 동생(형수) 이름 중 '형'자를 합쳐 '수형당'을 만들 정도의 감각을 가졌다. 진 사장은 당시 경영자로선 드물게 신문광고도 적극 활용했다. 70년 5월 영남일보에 실린 수형당 광고, '등록상표 제12418호, 경상북도 및 대구시지정 분식 빵 제조공장, 빵의 생명은 신선미, 건강제일의 분식빵으로'란 문구가 눈길을 끈다.

수형당은 사업운이 있었다. 6·25 직후 대구로 피란 온 육본과 2군사령부 등 각급 군부대가 포진해 있어 식빵과 단팥빵, 건빵 등을 공급하기 쉬웠고 '독점군납' 덕분에 브랜드 파워를 키운다. 60년대까지만 해도 '군인 세상'이었다. 심지어 양질의 밀가루도 군이 독차지했다. 물론 그 밀가루는 미국과 UN의 원조품이었다.

군 뿐만 아니라 교도소에도 수형당 빵이 들어갔다. 예식장 답례품용 찹쌀떡과 카스텔라까지 개발한다. 사탕보다 더 맛있는 캐러멜(마산 캐러멜도 대구 브랜드임)도 만들었고 70년대초엔 동아백화점 식품코너에도 진출한다. 지역의 군소 브랜드들은 더 이상 수형당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달성공원·지역의 중·고교·극장 매점, 심지어 구멍가게 빵 코너까지 집어삼킨다.

수형당은 빵만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건설·전자산업에도 진출한다. 육군본부가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갈 때 육본을 따라서 상경, 서울 삼각지로터리에 서울공장을 짓는다.

68년 9월엔 국내 최고급 식빵 공급 업체로 발돋움한다.  
 
대구시 서구 평리동에 2천여평 넓이의 수형당 제3공장도 설립한다. 매일 20여만개의 식빵을 만들어 지역 공무원과 회사원, 학생 등에게 공급했다. 불길처럼 치솟는 수형당의 사세를 보면서 수형당의 침몰을 예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금복주도 초창기엔 수형당 수하의 매장에 소주를 납품하기 위해 끈질긴 로비전을 펼쳤다. 수형당 빵은 '영남의 빵'이었다. 정부는 분식을 강요했고, 그럴수록 수형당의 사세는 '땅 짚고 헤엄치기'로 확장됐다.

수형당의 식구는 한창 때 300여명이 넘었다. 그럴듯한 직장이 별로 없던 시절, 수형당은 대구상고 졸업생들이 가장 입사하고 싶어하던 선망의 대상이었다.


# 연탄으로 굽고, 자전거로 배달

50년대, 최고의 배달수단은 짐자전거였다. 이 때만 해도 비닐이 없었다. 그래서 낱개 포장은 생각할 수 없었다. 빵은 나무 케이스에 넣어 배달됐다. 총판도 없어 소상인들은 아침마다 수형당 앞으로 모여들었다. 돈을 주고 빵을 매입한 뒤 직접 자기 가게에서 팔았다. 가게가 없는 영세 상인들은 2개의 유리진열장에 망개떡과 빵 등을 넣은 뒤 찹쌀떡 장수처럼 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방부제가 없던 때였다. 그래서 유통기한도 무의미했다. 곰팡이가 필 때까지 두고 두고 팔았다. 이스트가 없어 막걸리에서 효모를 추출해 빵에 집어 넣었다.

빵 굽는 수단도 세월따라 많이 변화했다. 초기 장작불에서 시작, 숯→연탄→가스→전기 오븐으로 진화했다. 수형당은 오랫동안 가내수공업적 생산 시스템을 벗어나지 못했다. 초창기엔 연탄불로 빵을 구웠다. 그래서 일부 직원들은 늘 두통에 시달렸다. 멀리서 보면 빵을 굽는 게 아니라 가마에서 도자기를 굽는 것 같았다.

직원들은 매일 연탄가스와 전쟁을 벌였다. 대다수 가스에 길들여졌지만 신참이나 비위가 약한 직원들은 밖으로 뛰쳐나가 심호흡하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몇몇 직원들은 도시락을 한 개 더 갖고 왔다. 그 안에 물김치와 동치미가 담겨 있었다. 김치 국물이 연탄가스의 즉효약으로 통하던 시절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수형당은 지금…

수형당은 80년대로 진입하면서 치명타를 맞고 침몰한다.

왜 그랬을까? 관계자들은 주먹구구식 경영, 무리한 사업확장 등을 파산 이유로 꼽는다. 게다가 70년대 뉴욕, 런던, 뉴델 등 쟁쟁한 제과점들이 수형당을 뒤흔든다.

이들 제과점이 개발한 케이크가 수형당의 단팥·크림빵을 조금씩 밀어낸 것이다. 세상이 변했고 사람들의 입맛도 변했지만 수형당은 그걸 재빨리 읽지 못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편의방, 미도방 등 각종 분식점과 별의별 식당들이 등장했고, 패스트푸드까지 대구를 향해 진격 중이었다. 수형당은 설자리를 못 찾는다. 다각화를 시작한 수형당 계열사도 한 수 위인 기존 업체를 못 이긴다. 거함 '수형호'에 균열이 생긴다. 손댈 틈 없이 물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수형호는 82년쯤 침몰했고, '달구벌의 혀'를 즐겁게 해줬던 선장도 86년쯤 타계한다.

관계자들은 "수형당이 빵만 붙들고 있었어도 저렇게 맥없이 무너지진 않았을 텐데…"라며 수형당의 몰락을 안타까워했다. 수형당 공장은 82년 철거되고 현재 그 자리엔 갈색 타일조 4층 건물이 서있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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