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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집'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8.09.06 수형당 빵
  2. 2008.09.06 50∼60년대 대구대표 빵집
  3. 2008.09.06 뉴욕·뉴델·런던 제과점

수형당 빵

수형당 빵 요리 맛집 정보 2008.09.06 12:38

수형당 빵



한때 대구 최고 빵 브랜드 수형당을 기억하시나요 ?



# 추억이 돼버린 수형당 빵

수형당(秀亨堂).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때 대구 최고의 빵 브랜드였다. 1946년쯤 등장한 수형당, 50~60년대만 해도 해태·삼립과 어깨를 겨뤘고 점차 사업 다각화를 시도하면서 '수형 그룹'으로 웅비할 야심찬 프로젝트를 짰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수형당 편이 아니었다. 결국 방만한 경영으로 인해 82년쯤 소리소문도 없이 침몰하고 만다.

수형당은 대구 제빵산업의 기틀을 잡아준 기업이다. 훗날 뉴델제과 최종수 사장, 런던제과 조원길 사장, 지역의 첫 케이크 전문점 최가네의 최무갑 사장 등 대구의 메이저급 제과점 관계자들 상당수는 수형당에서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이젠 잊혀가고 있는 브랜드이다. 취재 중 동성로에서 만난 10여명의 20대에게 "수형당 빵을 아느냐"고 질문했지만 모두 "모른다"고 했다.

수형당의 등·퇴장 과정을 알기 위해 관계자를 찾아봤다. 일제 때 일본인한테 빵 기술을 배웠던 1세대 제빵인들은 지금은 거의 생존해 있지 않았다. 의성 출신 풍국당 주인 이을수옹(82)이 생존해 있지만 몸이 불편해 그 시절을 제대로 말해 주기 힘들었다. 어렵게 최가네 최 사장(63)과 중구 포정동 풍차 베이커리 권영오 사장(64)을 통해 수형당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 전성기때 직원 300명 넘어

수형당을 설립한 진병수(陳秉秀) 사장은 영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광복 직전 구 경북학원 자리에서 삼미제과사를 개점한 최팔용 사장과 친구사이로, 일제 때 북성로 미나카이 백화점 옆에 있던 이마사카(今阪) 제과점 종업원 출신이었다.

진 사장은 광복 전 이마사카에서 나와 중구 남산동에서 빵장사를 했다. 그곳에서 번 돈을 재투자해 광복 직후 중구 문화동 2번지에서 700여평 넓이의 수형당을 창업한다.

진 사장은 타고난 기업가였고 아이디어 맨이었다. 상호도 대충 만들지 않았다. 자기 이름 중에 '수'자, 동생(형수) 이름 중 '형'자를 합쳐 '수형당'을 만들 정도의 감각을 가졌다. 진 사장은 당시 경영자로선 드물게 신문광고도 적극 활용했다. 70년 5월 영남일보에 실린 수형당 광고, '등록상표 제12418호, 경상북도 및 대구시지정 분식 빵 제조공장, 빵의 생명은 신선미, 건강제일의 분식빵으로'란 문구가 눈길을 끈다.

수형당은 사업운이 있었다. 6·25 직후 대구로 피란 온 육본과 2군사령부 등 각급 군부대가 포진해 있어 식빵과 단팥빵, 건빵 등을 공급하기 쉬웠고 '독점군납' 덕분에 브랜드 파워를 키운다. 60년대까지만 해도 '군인 세상'이었다. 심지어 양질의 밀가루도 군이 독차지했다. 물론 그 밀가루는 미국과 UN의 원조품이었다.

군 뿐만 아니라 교도소에도 수형당 빵이 들어갔다. 예식장 답례품용 찹쌀떡과 카스텔라까지 개발한다. 사탕보다 더 맛있는 캐러멜(마산 캐러멜도 대구 브랜드임)도 만들었고 70년대초엔 동아백화점 식품코너에도 진출한다. 지역의 군소 브랜드들은 더 이상 수형당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달성공원·지역의 중·고교·극장 매점, 심지어 구멍가게 빵 코너까지 집어삼킨다.

수형당은 빵만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건설·전자산업에도 진출한다. 육군본부가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갈 때 육본을 따라서 상경, 서울 삼각지로터리에 서울공장을 짓는다.

68년 9월엔 국내 최고급 식빵 공급 업체로 발돋움한다.  
 
대구시 서구 평리동에 2천여평 넓이의 수형당 제3공장도 설립한다. 매일 20여만개의 식빵을 만들어 지역 공무원과 회사원, 학생 등에게 공급했다. 불길처럼 치솟는 수형당의 사세를 보면서 수형당의 침몰을 예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금복주도 초창기엔 수형당 수하의 매장에 소주를 납품하기 위해 끈질긴 로비전을 펼쳤다. 수형당 빵은 '영남의 빵'이었다. 정부는 분식을 강요했고, 그럴수록 수형당의 사세는 '땅 짚고 헤엄치기'로 확장됐다.

수형당의 식구는 한창 때 300여명이 넘었다. 그럴듯한 직장이 별로 없던 시절, 수형당은 대구상고 졸업생들이 가장 입사하고 싶어하던 선망의 대상이었다.


# 연탄으로 굽고, 자전거로 배달

50년대, 최고의 배달수단은 짐자전거였다. 이 때만 해도 비닐이 없었다. 그래서 낱개 포장은 생각할 수 없었다. 빵은 나무 케이스에 넣어 배달됐다. 총판도 없어 소상인들은 아침마다 수형당 앞으로 모여들었다. 돈을 주고 빵을 매입한 뒤 직접 자기 가게에서 팔았다. 가게가 없는 영세 상인들은 2개의 유리진열장에 망개떡과 빵 등을 넣은 뒤 찹쌀떡 장수처럼 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방부제가 없던 때였다. 그래서 유통기한도 무의미했다. 곰팡이가 필 때까지 두고 두고 팔았다. 이스트가 없어 막걸리에서 효모를 추출해 빵에 집어 넣었다.

빵 굽는 수단도 세월따라 많이 변화했다. 초기 장작불에서 시작, 숯→연탄→가스→전기 오븐으로 진화했다. 수형당은 오랫동안 가내수공업적 생산 시스템을 벗어나지 못했다. 초창기엔 연탄불로 빵을 구웠다. 그래서 일부 직원들은 늘 두통에 시달렸다. 멀리서 보면 빵을 굽는 게 아니라 가마에서 도자기를 굽는 것 같았다.

직원들은 매일 연탄가스와 전쟁을 벌였다. 대다수 가스에 길들여졌지만 신참이나 비위가 약한 직원들은 밖으로 뛰쳐나가 심호흡하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몇몇 직원들은 도시락을 한 개 더 갖고 왔다. 그 안에 물김치와 동치미가 담겨 있었다. 김치 국물이 연탄가스의 즉효약으로 통하던 시절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수형당은 지금…

수형당은 80년대로 진입하면서 치명타를 맞고 침몰한다.

왜 그랬을까? 관계자들은 주먹구구식 경영, 무리한 사업확장 등을 파산 이유로 꼽는다. 게다가 70년대 뉴욕, 런던, 뉴델 등 쟁쟁한 제과점들이 수형당을 뒤흔든다.

이들 제과점이 개발한 케이크가 수형당의 단팥·크림빵을 조금씩 밀어낸 것이다. 세상이 변했고 사람들의 입맛도 변했지만 수형당은 그걸 재빨리 읽지 못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편의방, 미도방 등 각종 분식점과 별의별 식당들이 등장했고, 패스트푸드까지 대구를 향해 진격 중이었다. 수형당은 설자리를 못 찾는다. 다각화를 시작한 수형당 계열사도 한 수 위인 기존 업체를 못 이긴다. 거함 '수형호'에 균열이 생긴다. 손댈 틈 없이 물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수형호는 82년쯤 침몰했고, '달구벌의 혀'를 즐겁게 해줬던 선장도 86년쯤 타계한다.

관계자들은 "수형당이 빵만 붙들고 있었어도 저렇게 맥없이 무너지진 않았을 텐데…"라며 수형당의 몰락을 안타까워했다. 수형당 공장은 82년 철거되고 현재 그 자리엔 갈색 타일조 4층 건물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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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0년대 대구대표 빵집

50∼60년대 대구대표 빵집 요리 맛집 정보 2008.09.06 12:33

50∼60년대 대구대표 빵집




"냄새 끝내준다…꼴깍" 대구형무소 재소자 괴롭힌? 삼미제과


 
삼미(三美)제과사, 삼송(三松)빵집, 송영사는 광복 직후 대구의 '3인방 빵집'으로 불렸다. 누가 뭐래도 이들은 1970~80년대에 뉴욕·뉴델·런던제과를 등장시킨 '대구 빵의 산파'였다.

50년대 중부경찰서 네거리는 '빵거리'로 군림한다. 이들 3인방의 뒤를 이어 고려당, 중부 경찰서 바로 북측에 일성당(사장 김도권), 바로 옆에 동양당, 종로초등 정문 맞은편에 덕인당, 대구역 앞 대우센터 뒤편에 구일제과점(박태준), 동성로 미도방 맞은편에 풍년당, 종로초등 근처에 풍곡당(사장 이을수), 약전골목 동문 근처엔 백일당, 학원서림 부근에는 맘모스 등이 나타난다. 특히 구일제과는 건과자 전문점으로 유명했다. 60년대를 화려하게 물들인 맘모스의 기술은 뉴욕을 거쳐 뉴델로 이어져 70~80년대 대구를 빵의 도시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그만큼 기술이 출중했다. 맘모스 초기 직원인 김정환씨(수성구 지산동 뉴욕제과 사장)는 "맘모스는 대구에선 처음으로 즉석 도넛을 개발해 지역 제빵 문화를 한 단계 성숙시켰다"고 증언했다. 무궁화 백화점 근처에 있다가 나중에 학원서림 자리로 이전한 맘모스의 김모 사장은 북한 출신으로 대구에선 처음으로 즉석 도넛과 '고로케'(야채 도넛)를 유행시켰다.

이 무렵 잘 나가는 7개 제과점 주인들이 모여 '7인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일본 연수까지 다녀오면서 일본의 선진 제빵 기술을 가져왔고, 이 모임은 90년대 뉴델제과 사장 최종수씨가 주축이 된 '과우회(菓友會)'로 발전한다.

# 출소자는 삼미 빵 실? 먹고 직성 풀어

삼미제과사의 최팔용 사장, 삼송빵집의 서모 사장, 송영사 사장, 고려당의 하경봉 사장, 수형당의 진병수 사장, 이들은 모두 북성로 일본 빵집 이마사카 출신이었고 흥미롭게도 모두 유도 유단자였다.

삼미제과사는 경북대 사대부설초등 맞은편 골목에 있는 옛 경북학원 자리(현재 대구요리학원)에 있었다. 삼덕동 대구형무소(1910년 대구감옥으로 출발해 23년 대구형무소, 61년 대구교도소로 개칭한 뒤 71년 6월1일 화원으로 이전) 정문 바로 근처에 있어 수형자들에겐 잊지 못할 추억의 빵집이 된다. 바람불면 빵굽는 냄새가 형무소 담 안으로 들어갔다. 재소자들은 '냄새와의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건 또 다른 '고문'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면회인들은 삼미의 빵을 사들고 면회소로 갔고, 출소자들도 복수하듯 그곳 단팥빵 등을 배터지게 먹고 집으로 가야 직성이 풀렸다.

최 사장은 50년대 초 수형당보다 앞서 군에 빵을 납품하기도 했지만 친구인 진 사장의 사업 수완을 이겨내지 못하고 57년쯤 좌초되고 만다. 현재 아카데미 옆 골목 안에 자릴 잡고 있는 최가네 케이크 사장 최무갑씨(62)가 그의 아들이다.

# 대신동 삼송빵집은 여름철 빙설도 유명

중구 대신동. 일제 땐 깐깐한 동네였다. 서문시장·금은방 골목·동산약국과 함께 대신동 명물로 통했던 빵집이 있다. 바로 삼송빵집이다. 기자도 계성중 시절 그 앞을 지나 등·하교를 했다. 은행 정문처럼 생긴 가게 외관과 회색빛 간판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시절 여름철이면 삼송빵집 빙설이 유명했다. 유명한 게 또 있었다. 바로 섬유회관 근처의 백운당, 달성공원 초입의 영선당에서 나온 요즘 잘 팔리는 '비비빅'처럼 생긴 팥 아이스바였다. 판매원들은 성인이 아니고 코흘리개였다. 그들은 때로 앵벌이로 전락해 통을 메고 찹쌀·망개떡 장사처럼 도심 곳곳을 파고들어 적잖은 돈을 업자들에게 안겨줬다. '동정상술'의 극치였다.

현재 중구 동성로 3가 제일극장 맞은편 삼송 베이커리는 광복 직후 서모 사장이 세운 삼송빵집의 상호를 계승했다. 지금은 삼송 상호가 하나밖에 없지만 20년 전만 해도 서구 등 변두리에 몇 개 있었다. 삼송이 그만큼 유명한 탓이었다.

서모 사장은 4남매를 뒀지만 그 시절 부자 빵집이 다 그렇듯 자녀들은 빵 장사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빵집 사장들은 장남만은 판검사·의사·교수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삼송빵집 자녀들은 모두 미국으로 이민가버렸다. 이후 삼송의 주인은 여러번 바뀐다. 중구 공평동 스텔라 베이커리 김호상 사장, 옛 송죽극장 옆 뉴델제과 최종수 사장도 삼송 간판을 걸었다.

삼송은 60년대 중반 대형화재를 당한다. 그로 인해 동산약국과 삼송빵집이 동시에 피해를 입는다. 이 화재는 73년 6월6일 송죽극장 옆 뉴델제과 화재와 함께 대구의 대표적 빵집 화제로 기록된다. 삼송은 신축된 뒤 종업원이 한번 맡았다가 73년쯤 역시 삼송의 기술자였던 박명호·정옥희씨(62) 부부한테 넘어온다. 이들이 삼송의 마지막 사장이 된다.

70년대 초 삼송은 50여평 규모로, 홀엔 8개의 테이블이 있었다. 주로 단팥빵과 크림빵, 찹쌀떡이 많이 나갔다. 특히 계성·원화·신명여고 등 지역 각급 학교 매점에 많은 빵을 팔았다. 노동절, 운동회 땐 각종 빵 주문이 폭주했다. 옆에 있던 황태자 제과점(도질수 사장)과 산다방도 삼송 때문에 덩달아 장사가 잘 됐다. 등교 때는 근처 학생들이 단팥빵 등을 책가방 안에 몰래 쑤셔넣고 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규율부장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책을 다 빼낸 뒤 가방 밑바닥에 빵을 깔고 그 위에 책을 올려놓았다. 감쪽 같지만 그 빵은 과연 어떻게 됐을까.

바로 옆엔 동화사행 시외버스 정류소가 있었다. 후에 이 자린 동산약국에 팔린다. 물론 버스 정류소가 삼송 특수에 부채질을 해준다. 주말이면 그곳에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김밥 대신 빵이었던 시절이니 장사는 두 말할 필요가 없었다. 박 사장은 주문 물량을 다 충족할 수 없어 남산초등 근처에 공장을 세웠다. 한때 대구예식장 제과부도 맡았던 박 사장은 중구 도원동 금수세탁소 바로 길 건너 영화제과점도 함께 경영했다.

70년대까지 전성기를 구가했던 대신동 상권은 80년대로 접어들면서 급속도로 추락하게 된다. 바로 서문시장 상권이 쇠락한 것이다. 박 사장은 '탈(脫)대신동'을 결심하고 87년 2월 제일극장 맞은편으로 이전한다. 한때 옛 국제극장 골목에서 불고기 전문 용궁식당으로 외도, 뼈아픈 좌절을 맛본 뒤 본업으로 돌아왔다.

대신동 니베 의상실 사장이었던 부인, 그리고 장남과 함께 만든 추억의 고로케를 맛보라며 그가 기자에게 몇 개 내밀며 빙그레 웃었다. 비록 경기는 별로라지만 그 표정만은 '호황'이었 다.


고로케와 크로켓, 도넛과의 관계는?

크로켓(Croquette)은 일본말 '고로케'와 같은 말이다. 그렇지만 이 둘은 도넛(Doughnut)과는 좀 다르다. 물론 식물성 기름에 튀겼다는 점에선 같다. 단지 속과 겉을 어떻게 꾸몄는가가 좀 다르다.

여기서 도넛의 유래를 알아보자. 16세기쯤 네덜란드, 독일 등 북유럽권에서 탄생한 도넛은 원래 구멍이 없었다. 영국인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 올 때만 해도 도넛엔 구멍이 없었다. 도넛 구멍은 19세기 초 미국의 한슨 크로켓 그레고리 때문에 생겨난다. 그는 엄마가 주는 케이크의 중심부가 덜 익은 게 늘 불만이었다. 어느 날 그 케이크의 중심부를 포크로 떼어 내고 먹었는데 그게 훗날 도넛 구멍으로 발전한다. 한슨 크로켓은 선장이 된 뒤에도 도넛 구멍을 절묘하게 활용했다. 파도가 높을 땐 구멍난 도넛을 기관실 타륜 손잡이에 걸어놓았고, 그걸 본 선원들을 통해 도넛 구멍이 전세계로 확산된 것이다.

통상적으로 도넛은 팥앙금이 들어가는 빵 도넛과 초콜릿 시럽 등으로 표면을 코팅한 과자형 도넛이 있다. 반면 고로케 속엔 야채와 다진 고기가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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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뉴델·런던 제과점

뉴욕·뉴델·런던 제과점 요리 맛집 정보 2008.09.06 12:31

뉴욕·뉴델·런던 제과점



대구를 제빵도시 면모 갖추게 한 '3인방'



 
업의 본질은 성공이라기보다는 실패인 것 같다. 흥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모두 될 것 같아 사업을 시작했고, 그래서 대박을 터트리지만 결국은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해, 더러는 내분으로 인해 폐업하게 된다. 대구의 제빵사도 그랬다.

그렇게 잘 나가던 일성당, 덕인당, 동양당, 구일제과였지만 즉석 야채도넛(일명 고로케) 흐름을 등장시킨 맘모스한테 무릎을 꿇고 만다. 하지만 맘모스의 신기술을 눈여겨 본 사람이 있었다. 바로 뉴욕과 뉴델 사장이었다. 50년대 3인방 제빵인이 있었듯 70년대에도 대구 제빵계를 주름잡던 3인방이 있었다. 바로 뉴욕의 강신영·이점석 사장, 뉴델의 최종수 사장, 런던의 조원길 사장이다. 이들은 현재 일흔을 바라보고 있는 제빵계 원로로 강 사장을 제외하곤 모두 생존해 있지만 현업에선 손을 뗐다. 특히 이들로 인해 대구가 비로소 제빵도시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물론 그들이 전성기를 구가할 때 제과점은 문만 열면 장사가 됐고 모두 적잖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역시 그땐 여건이 좋았다. 섬유경기가 호황이었고, 패스트푸드가 대구에 본격 상륙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과점은 호황을 누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80년대 중반 거의 동시에 폐업을 하면서 대구의 제빵 시장도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하게 된다.

# 뉴욕제과…한창 땐 한강 이남서 가장 돈 많이 벌어

교동시장 초입 오른쪽 모퉁이에 생겼다. 보래옥으로 있다가 북한 출신의 강신영씨가 60년대 인수해 뉴욕제과로 상호를 바꿨고 훗날 한일극장 근처로 이전해 대구 최고의 제과점으로 성공한다.

보래옥 시절의 뉴욕은 장소 덕을 톡톡히 본다. 보래옥을 인수한 강 사장은 70년대 대구 상권이 남동진한다는 사실을 알고 한일극장 근처로 자릴 옮긴다. 강 사장은 직원 복이 많았다. 대구에선 처음으로 모닝식빵을 개발한 중구 포정동 풍차베이커리 사장 권영오씨, 수성구 시지에서 뉴욕제과를 경영하고 있는 김정환씨, 고려당 베이커리 사장 강대건씨 등이 그곳을 거쳤고, 그때마다 신제품을 개발해줬다. 그런 연유로 뉴욕의 사라다빵이 불티나게 팔린다. 일반 집과는 달리 뉴욕은 감자를 깍두기처럼 썰어 찬물에 4~5시간 담가둔 뒤 삶아 아린맛을 없앴다. 포장 빵이 귀했는데 뉴욕은 낱개 포장 시스템을 도입한다. 강 사장은 스텔라 베이커리의 고 김호상 사장처럼 기술 아웃소싱의 귀재였다. 초창기부터 빵 기술을 외부에서 배워왔다. 그는 보래옥에서 일을 하면서 주인의 신임을 받아 가게를 인수한 것이다. 장사가 잘 되니 홀이 좁아졌다. 대구지방국세청(현재 밀리오레 자리) 뒤편 공장과 교동시장 근처 자택에서 빵을 만들어 가져왔다. 한일극장 맞은편으로 왔을 때 대구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점포가 임대가 아니라 자기 소유라서 더욱 경쟁력이 있었다. 한창 때는 한강 이남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번 제과점이 된다.

하지만 집안 사정으로 뉴욕은 도중 하차하고 옛 동원예식장 지하 동원제과점을 운영한 상주 출신의 이점석씨(전 대구경북제과협회 지회장)가 뉴욕을 인수해 더욱 발전시킨다.

# 뉴델제과…현대식 백화점 제빵코너 스타일 도입

뉴욕의 아성에 도전한 게 바로 옛 송죽극장 동편에 있었던 뉴델제과다. 교동시장 입구 맞은편 동성로변에 자리잡고 있어 초창기 뉴욕처럼 장사가 잘 됐다. 뉴델의 최종수 사장은 처음엔 과자 도매점도 하면서 기반을 다진다. 하지만 뉴델은 예상도 하지 못한 악재를 만나 치명상을 입게 된다. 바로 1973년 현충일 오후 2시50분이었다.

대구시 동성로 1가 5, 뉴델제과점에서 대형 화재가 난 것이다. 근처 송죽극장 등을 포함해 500여평 건물이 전소됐다. 2층 작업장 프로판가스  취급 부주의로 불이 나 60평 크기의 뉴델과 바로 옆 송죽극장, 만보당, 시대완구, 에펠양화점, 새한편물점 등까지 모두 태웠다. 하루 전에 고용된 경남 합천 출신의 박모군이 도넛을 만들다가 프로판가스 호스를 갈아끼우는 순간 흘러나온 가스가 빵굽는 화덕에 퍼진 것이다. 그날 뉴델의 제빵 기술 책임자 최무갑씨는 아직 현장을 떠나지 않고 시내에서 최가네 케이크점을 운영하고 있다.

최 사장은 원래 수형당 기술자 출신으로 처음엔 대신동 삼송빵집을 운영하다가 뉴델제과를 만들어 성공한다. 그는 최무갑씨에게 킹뉴델을 건네주기도 한다. 이땐 백화점에선 빵을 팔지 않았다. 상품권 개념도 생겨나지 않았다. 가장 인기있는 건 버터로 만든 케이크와 롤케이크류가 선물용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뉴델은 무려 1만여 개를 철야작업을 통해 만들어냈다. 크리스마스 한 달 전부터 작업을 시작해야 했다. 지금은 아무도 안 먹지만 그땐 버터로 만든 꽃잎을 만들어 꽂아놓기도 했다.

하지만 최 사장은 백전노장이었다. 무시무시한 기술과 아이디어를 가진 한 기술자를 만나게 된다. 바로 지역에서 음식 컨설팅 사업가로 변신한 윤문식씨(58)였다. 윤씨는 서울 롯데 백화점 판매시스템에서 반짝 하는 아이디어를 얻는다. 마치 요즘 김밥집처럼 빵집 한 코너에 바텐 비슷한 오픈형 가판대를 마련하고 그 옆에 기름솥을 놓고 각종 도넛과 핫도그 등을 즉석에서 만들었다. 요즘 백화점 제빵 코너 판매 스타일이 이때 등장한 것이다. 최 사장은 런던제과와 뉴욕제과 사이에서 고사 직전이던 킹뉴델을 황제당으로 상호를 바꾸어 런던과 팽팽한 접전을 펼친다. 황제당 '즉석 제빵 시스템'은 이후 전국적으로 선풍을 일으켰고 후에 지역 제빵사들은 너도 나도 그 모델을 도입하게 된다.

# 런던제과…한때 미도백화점 연매출 버금가는 고수익

70년대 초 옛 원호청, 현재 LG 마에스트로 매장에 또 하나의 무시무시한 저력을 가진 제과점이 들어온다. 바로 런던제과였다. 규모도 뉴욕보다 더 컸다. 특히 하절기엔 얼음 빙설이 강했다. 삶은 팥, 프루츠와 수박을 얹었다.

뉴델 최 사장은 비록 친구간이긴 하지만 런던의 등장에 초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엔 제과점 허가가 무척 까다로웠다. 그만큼 진입장벽이 높았던 것이다. 런던은 번번이 시설 미비로 중구청 위생과로부터 영업허가를 받지 못한다. 어렵게 개점한 조원길 사장에게 호재가 안겨진다. 런던이 개업하고 1년 남짓 지난 뒤 바로 경쟁업소 뉴델이 전소된 것이다. 그 덕분에 런던은 한때 미도백화점 1년 매출에 버금갈 정도로 고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 3인방은 전두환 정권 말기쯤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

하지만 뉴욕·뉴델·런던은 전두환 정권 말기쯤 소리소문없이 사라진다. 그건 지역 제빵인들에겐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취재를 하는 과정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감이 들었다. 3인방은 나름대로 부동산 자본을 확보하고 있었고, 또한 제빵 영업이 갈수록 마진율이 줄어든다는 걸 알고 있었다. 부가가치세(77년 도입)로 인해 수익률까지 날로 감소하고 있었다. 8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각종 패스트푸드가 대구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제빵산업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걸 안 것이다. 또한 지역자본가로 성장한 그들을 겨냥한 정부 당국의 정치적 압력도 달갑지 않았다. 돈을 벌어도 그렇게 맘이 편하지 못했다. 제빵 사업다각화를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이들은 지쳐 있었다. 설상가상 장남들도 하나 같이 공부에만 열중했고, 사장들도 장남에게 빵집을 물려줄 맘이 없었다

3인방은 그런 연유로 86아시안게임·88서울올림픽 특수를 누려보지도 못하고 한꺼번에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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