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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로 만든 맛난 빵 -‘ 쌀 빵 베이커리’

쌀로 만든 맛난 빵 -‘ 쌀 빵 베이커리’ 요리 맛집 정보 2008.10.14 10:12

쌀로 만든 맛난 빵 -‘ 쌀 빵 베이커리’
 


 
‘쌀로 빵을 만든다고? 밀가루가 아니고…!’


서울 양재역 인근 한 베이커리. 주민들은 물론 행인들도 수시로 들러 빵을 고르고 있는 모습이 유리창 밖으로도 내비친다.

그런데 외부인들은 미처 눈치채지 못하지만 손님들이 공통적으로 알 고 있는 한 가지 사실. 바로 모든 빵이 쌀로 만든 것이라는 점이다. 지난 해 가을 문을 열었는데 벌써 1년째 단골들이 넘쳐날 정도로 반응도 뜨겁다. 그래서 간판에 적힌 이름이 ‘쌀마루’였구나!

이 곳은 이름하여 ‘쌀 빵 베이커리’. 말 그대로 밀가루가 아닌 쌀가루로 만든 빵과 과자들만을 파는 제과제빵점이다. 식빵이나 바게트부터 패스트리 롤케이크 카스텔라는 물론 쿠키와 비스켓 화과자까지 모두 쌀을 반죽해 만들었다. 종류를 어림잡아 세어 봐도 무려 100여가지는 넘을 듯.

‘쌀이 어떻게 빵이 될 수 있지? 밥이라면 모르겠는데.’ 비결은 ‘특별한 쌀가루’에 있다. 다름아닌 ‘골드 강력 쌀가루’. 쌀을 용도에 따라 입자를 다르게 빻아 놓은 가루인데 여기에는 특별한 공정과 노하우가 들어가 있다. 그리고 약간의 글루텐과 전분류가 첨가된다. 밀가루에는 원래부터 함유돼 있는 글루텐은 쌀가루에는 없지만 빵처럼 부풀어 오르고 모양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쌀가루로 만든 빵의 질감은 과연 어떨까? 무엇 보다 식빵을 하나 집어 먹어 보면 금세 확인할 수 있다. 한 조각을 잡아 찢어 버리듯이 늘여 뜨려 보면 ‘찰지다’는 것이 느껴진다. 마치 공기 속에 담아 놓은 밥의 ‘찰기’ 그대로다. 밀가루처럼 가볍게, ‘확’ 뜯어진다기 보다 길게 늘어지는 것이 ‘당겨지는 힘’을 품고 있는 듯 하다.

한 입 베어 먹어 볼 때도 마찬가지. 밀가루 빵에서 처럼 어딘가 푸석푸석하다기 보다는 쌀밥이나 떡처럼 쫀득쫀득 ‘실한’ 감촉이 전해진다. 한국 사람은 역시 ‘밥심이야’라고도 할 만 하다. 또 촉촉한 감이 느껴지는데 이는 밀가루 빵 보다 더 많은 수분을 품고 있어서다.

쌀 식빵이라고 그외 다른 차이점은 별로 없다. 모양도 늘상 보던 빵 그대로다. 건조한 밀가루 빵에 비해 수분 함량이 더 높은 편이라 상온에서 건조해지기 쉽다는 정도만이 유의점이다. 하지만 포장 상태에서 보관하면 보습성이 좋아 일반 밀가루 빵 보다 맛 보존기간이 2배는 더 길다고 한다.

앙금이 들어가는 단팥빵이나 슈크림빵, 버터, 소시지 등을 함께 넣는 패스트리, 케이크 등은 쌀로 만들었지만 밀가루 빵과 거의 차이가 없다. 맛이건 향이건 구분하기 힘들 정도. 버터나 앙금 등의 맛이 더 강하게 다가오는 탓도 크다. 하지만 쌀로 만든 쿠키나 과자류는 밀가루 보다 더 바삭바삭하다는 것이 정평이다.

쌀 빵을 만드는 과정은 옆에서도 지켜볼 수 있다. 오픈된 주방에서 옥대모 공장장이 수시로 반죽을 하고 빵을 구워낸다. 빵 종류는 당일 생산 판매가 원칙. 반죽 과정에서 온도와 시간 조절이 관건이지만 밀가루 보다는 발효 숙성시간이 더 짧다는 것이 그의 귀띔이다.


■ 찾아가는 길

지하철 양재역 인근 한전아트센터 정문 건너편. (02)582-9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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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의 출현

빵의 출현 요리 맛집 정보 2008.09.06 12:46

빵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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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팔리는 밤빵. 
 
# 국화빵을 찾아서

이젠 폐가(廢家)로 전락해버린 대구시 중구 향촌동 옛 상업은행 대구지점 모퉁이. 겨울 해는 벌써 동아빌딩 뒤로 넘어가버렸다. 오후 2시, 그러나 여긴 벌써 응달이다. 저탄장 주택가처럼 중구 향촌동과 화전동 상가들은 하나같이 우중충하다. 침체된 경기 때문일까. 상당수 금은방·양복점도 이 바닥을 떴고, 일부 가게는 보세 전문점으로 바뀌었다. 행인들도 거의 노인이고 젊은이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냉랭하고 활기 없는 이 거리건만 국화빵 파는 노점상엔 그래도 온기가 감돌고 있다. 일제 때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는 유별나게 생명력이 긴 이 국화빵은 한국 제과제빵사의 산 증인이다.

바람막이 비닐천막이 팔락거린다. 우측엔 호떡, 좌측엔 어묵(오뎅)이 자리잡고 중앙에 국화빵 틀이 앉아있다. 향촌동 초입에서 30여년째 국화빵을 굽고 있는 은귀애씨(64). 이 바닥에선 '향촌동 국화빵 아줌마'로 통하는 그녀의 손길은 추위를 잊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은씨는 취재하러 온 기자에게 '대구가 빵의 도시'임을 무척 강조한다.

"수형당, 삼미당, 고려당, 덕일당, 일성당, 뉴욕·런던제과, 만미당, 삼송빵집, 뉴델, 황제당, 스텔라 ….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대구는 자타가 공인하는 빵의 도시였어요. 뉴욕·런던, 뉴델, 만미당 시절엔 빵집 매출액이 백화점보다 더 많았다고 합디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그 많던 유명 빵집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두 사라져버렸어요. 그래도 아직 국화빵만은 꿋꿋하게 살아있지만 …."

# 한국 빵문화는 일제가 퍼트려

한말, 한국엔 빵과 과자, 사탕이 없었다. 오직 떡밖에 없었다. 한국 빵과 과자는 일제에서 왔다. 그 시절 아이들 간식이라고 해봐야 막걸리로 발효시킨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술빵과 보리개떡이 전부였다. 그 술빵이 굵은 콩이 박힌 세모난 옥수수빵으로 되돌아와 거리를 누비고 있다.

1910년 일본의 파티시에(Pattissier·제빵사)가 한국에 들어온다. 20년 한국 최초 양과자점인 '메이지야(明治屋)'가 서울 충무로에 등장한다. 물론 중국도 호떡바람을 일으켰다. 하지만 일본의 '찹쌀모찌'는 당해낼 수 없었다. 일본말로 떡(餠)은 '모찌'. 팥소(앙꼬)가 들어간 우리의 둥근 송편과 흡사하다. 일제 때 한국인들은 찹쌀로 빚은 그 떡을 '찹쌀모찌'로 불렀던 것이다. 이때 일본 군인들의 비상식이 구멍 두 개 뚫린 건빵인데 후에 단팥빵과 함께 한국 군인들이 가장 즐긴 간식이 된다.

과자는 국가별로 달리 불리는데 우리의 전통과자는 '한과(漢菓)', 일본 전통과자는 '화과자(和菓子)', 중국 과자는 '중화과자(中華菓子)', 그밖의 서양과자는 '양과자(洋菓子)'로 불린다. 물론 과자와 빵은 레시피가 다르다. 이스트가 들어가면 빵이고, 그렇지 않으면 과자로 이해하면 쉽다.

찹쌀모찌 붐은 광복 후에 더 거세진다. 수형당, 덕인당, 일성당 등 대구의 대표적 제과점 주인들은 '한국형 찹쌀떡'을 개발했다. 찹쌀떡은 일제 때보다 더 커졌다. 한때 예식당 답례품으로도 사랑받은 '컬러 찹쌀떡'은 왕만두만 했으며 흰색, 파란색, 분홍색 3개가 한 세트로 팔렸다.

# 국화빵은 어디서 유래했나

국화빵은 '풀빵' '거지빵'으로도 불렸다. 그때도 있는 집 아이들은 제과점의 화과자를 먹었다. 하지만 서민들은 '거리의 빵'에 만족해야만 했다.
 일본엔 붕어빵이 없고 도미빵이 있다. 붕어는 일본어로 '후나(ふな)'. 그런데 일본인들은 후나야끼는 없고 '타이야끼'만 있다. '타이(たい)'는 도미의 일본말. 왜 일본인들은 붕어빵이라고 하지 않고, 도미빵이라고 했을까. '썩어도 준치'란 우리 속담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이것과 같은 일본말이 있다. 일본에선 '썩어도 도미(腐っても たい)'라고 한다. 도미의 훌륭한 맛 때문인지 도미빵이 유행한 것. 이에 반해 한국에선 '붕어'가 인기다. 한국인 노점상들이 광복 직후 도미빵에서 착안, 한국인에게 어필할 수 있는 붕어빵을 개발한 것이다. 물론 국화빵이 붕어빵보다는 먼저 등장한다.

전체적인 느낌은 붕어빵은 굳어 있는 모습인데 반해, 도미빵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듯하다. 크기도 도미빵이 조금 더 크다. 한국의 붕어빵엔 단팥만 소로 사용되지만, 일본에는 단팥 이외에도 초콜릿, 크림, 흰팥앙금, 강낭콩, 심지어는 카레, 소시지, 베이컨, 양배추 등도 사용된다. 도미빵을 가장 처음 만든 사람은 양화가(浪花家)란 가게를 연 칸베(神戶 淸次郞)로 알려져 있다. 현재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손자가 60대라고 하니 도미빵의 역사는 19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국화빵은 한때 '왜놈빵'으로 멸시받기도 했다. 일본의 국화(國花)가 국화였기 때문이다. 일부 민속학자들은 한국 민족정기 말살 수단으로 국화 문양이 새겨진 빵틀을 갖고 들어왔다고 주장한다.

붕어빵은 후에 호두·계란·바나나·땅콩빵 등을 파생시킨다. 90년대에는 치즈나 야채를 넣은 신종 붕어빵까지 나타난다. 가장 성공을 거둔 것은 역시 대구산 '황금잉어빵'. 대구 출신의 김승수씨가 발명, 특허출원한 후 이 제품은 '노점상 체인점 시대'의 주역이 된다. 붕어빵과 달리 팥소가 머리부터 꼬리 끝까지 골고루 들어있어 여성에게 특히 잘 팔린다.

# 추억의 빵, 크림빵과 산도

국내 최초의 샌드 비스킷인 '크라운 산도'의 판매량은 지난해 7월 100억개를 넘겼다. 산도는 74년 4월 등장한 동양제과의 초코파이와 함께 청소년에게 가장 사랑받은 스낵류로 성장해왔다.

61년 8월 탄생한 산도는 누계 매출을 현재 화폐단위로 환산할 경우 약 1조원. 판매된 걸 이어놓으면 지구 둘레를 12바퀴반 돌릴 수 있는 양이다. 산도는 99년 크라운제과를 모델로 한 기업드라마 '국희'의 방영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는다.

64년 첫 출시된 뒤 공전의 히트제품으로 등극해 삼립식품의 효자빵이 된 '삼립 크림빵'도 추억의 빵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80년대 초 생산이 중단됐던 이 크림빵이 다시 등장한 건 고 허창성 명예회장이 병상에서 남긴 지시 때문. 허 명예회장은 둘째아들 허영인 회장(58)에게 "옛날 그대로의 크림빵을 다시 만들어 봤으면 한다"고 말했다. 허 회장은 72년 형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려는 아버지의 결정에 반발해 퇴사, 빵 전문업체인 '샤니'를 설립했다. 이 샤니가 한국 제빵시장을 평정할 줄 아무도 몰랐다. 샤니는 프랜차이즈 '파리바게트' '베스킨 라빈스' 등으로 정상에 올랐고 97년 법정관리 중이던 삼립식품을 인수한다. 재출시된 크림빵은 현재 하루 7만2천개가 판매되며 대구 유니버시아드 때 북한 선수단에도 제공돼 화제가 됐다.

다음회에는 대구 제과점 태동기, 수형당의 망개떡 등의 얘기가 이어진다.

◇도움말=(사)대한제과협회 대구경북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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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개떡과 호두과자

망개떡과 호두과자 요리 맛집 정보 2008.09.06 12:37

망개떡과 호두과자



입안 가득 상큼한 '사-과-향' 망개떡
日人들도 생각못한 호두모양 호두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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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두과자와 망개떡]



망개떡은 찹쌀떡, 황남빵, 호두과자 등과 함께 일제 때 등장해 아직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음식이다.

경주 황남빵은 일본의 생과자, 나마카시와 맞물려 있고, 망개떡은 인절미와 송편을 퓨전한 작품이며, 호두과자는 붕어빵의 응용작품으로 보인다.

1950년대만 해도 설탕과 품질 좋은 강력분 밀가루가 일반 업자들에겐 거의 공급되지 않았다. 밀가루는 미국과 국제연합아동기구(UNICEF)가 앞장서 공급했다. 53년 유니세프가 학교에 빵과 과자를 나눠주었고, 55년엔 점심을 못먹는 초등학생들에게 우유와 식빵이 제공됐고, 그 흐름이 72년까지 무려 20여년간 지속된다. 식빵과 고급 밀가루 덕분에 시중엔 빵공장과 제과점이 우후죽순 생겨난다.

69년 분식장려정책은 대구의 제과점 양산과 직접적인 함수관계가 있다. 제분시설의 경우 광복 직후 4곳 있었지만 6·25 때 모두 파괴된다. 53년 대한제분 등이 생겨나 하루 110t급 생산체제를 유지한다. 하지만 이때 밀가루는 거의 면제품용으로 공급된다. 제과점용 밀가루는 늘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망개떡이 등장한다.

감나무 잎 위에 얹힌 망개떡에 대한 추억은 40대 이상의 사람에겐 특히 절절하다. 망개떡은 50~60년대 대구 시내 여러 골목에서 볼 수 있었다. 지역의 구일제과점(옛 관광센터 맞은편), 중부경찰서 근처에 있던 덕인당, 일성당 등에서 많이 팔았다. 특히 구일제과점은 망개떡 전문점으로 알려졌다.

망개떡은 찹살떡과 쌍벽을 이뤘다. 망개떡은 아주 시각적인 떡이었다. 특히 표면에 식물성 기름을 발라서 장사꾼들이 진열장에 넣고 다니면 햇살에 반들거려 판매를 더욱 촉진시켰다. 그런데 70년대 후반쯤 갑자기 망개떡이 사라졌다가 최근 경남 의령에서 히트 특산품으로 급부상했다.

망개떡은 '망개'라 불리는 청미래덩굴 잎 두 개로 감싸 찐 떡인데 옛날부터 경상도 사람들이 틈틈이 만들어 먹어왔다. 망개잎을 삶으면 거기서 독특한 향기가 피어난다. 신선한 망개잎은 상큼한 사과향을 지니고 있다. 이 향이 떡의 부패를 막아주며 향미를 더한다. 도시인들이 찹쌀떡이나 제과점 빵을 즐기는 동안 그곳 사람들은 수시로 망개떡을 만들어 심심한 입을 달랬다. 이 떡은 안동의 벙어리·버버리 찰떡과 비슷하다. 그 기술이 광복과 함께 도시로 대량 유입되면서 제과점으로 기술 이전된 것으로 보인다.

망개떡은 만들기가 아주 까다로운 떡이다. 멥쌀을 물에 불려 시루에 찐 다음 절구에서 차지게 친 뒤, 홍두깨로 얇게 밀어 손바닥만한 크기로 자르고, 그 위에 팥소를 얹어 보자기 모양으로 빚어 두장의 망개잎으로 살포시 감싸 만든다.

의령군농업기술센터는 지역이름을 알리는 데 있어 문화유적지 못지 않게 지역음식이 효과가 크다는 것을 알고 '의령=망개떡'이란 홍보 컨셉트를 정해 99년 망개떡을 '의령명품'으로 육성했다.

3대째 제조하고 있는 '남산가공사(대표 임영배)', 뽕잎 망개떡에 주력하고 있는 '설뫼식품(대표 안경란)', 망개잎 저장법과 팥소의 맛 개선 등 원조 망개떡에 새로운 기술을 접목시켜 자굴산 망개떡을 만들어 내는 '의령토속식품(대표 전연수)' 등이 대표 주자들이다.


천안의 부부가 일제시대 때 만들어 앙금에 후두를 넣고 모양도 호두 같이…

고속도로 휴게소의 히트상품

호두과자는 추억의 과자다. 예전엔 홍익회 아저씨들이 기찻간에서 많이 팔았는데 이젠 고속도로 휴게소의 히트상품이 돼버렸다. 호두과자의 맛은 뭐니 뭐니 해도 앙금에서 나온다. 그런데 그 앙금이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되는지 일반인은 잘 모른다.

대구 칠성시장에서 앙금 전문상을 하고 있는 도운기씨(53). 한국 제함식품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인 그는 대구 앙금산업의 산증인이다. 대구 앙금은 도영기씨로부터 옛 국제롤러스케이트 장 뒤편에 있던 칠성 앙금 도칠수씨(68)를 거쳐 그에게 전해진다. 현재 서울은  서림, 전라도는 대두, 부산은 유진식품이 대표 주자이고, 대구는 옥산과 대보 식품이 지역의 앙금 수요를 감당하고 있다.

옥산식품의 도운기 사장이 20여년 전쯤 동대구역 플랫폼에 홍익회 즉석 호두과자점이 등장할 때 팥 앙금을 대주었다. 12년 전쯤 대구의 앙금 제조업체는 7개가 있었는데 현재는 옥산과 대보 두 개만 살아남았다. 일본에선 앙꼬이지만 한국 업자들은 앙금이란 말을 더 선호한다. 앙꼬는 팥소로 풀이되고, 팥과 콩 두 종류로 만든다. 붕어빵엔 통팥앙금, 호두과자와 찹쌀떡엔 미세한 분말 형태의 팥앙금, 제과점엔 완두왕금, 팥껍질을 벗긴 백색앙금 등이 많이 팔린다.

일본은 앙꼬의 고향인데, 그렇게 단 걸 좋아하게 된 이유가 있다. 일본인은 생선류를 즐기다 보니 각기병 등에 취약해 메이지 유신 때부터 그 병에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해 나라에서 앙꼬를 권장하면서 활성화됐다고 한다.

호두과자의 메카는 천안이다. 천안 호두과자는 경주의 황남빵과 비슷한 배경을 갖고 있다.

황남빵과 천안 호두과자는 생긴 것도 비슷하고 일제 때 일본인 제빵인들과 경쟁하면서 성장해 왔다는 점이 그렇다. 그 기술은 34년 충남 천안시 대흥동 학화(鶴華) 호두과자에서 비롯된다. 조귀금·심복순씨 부부는 천안역에서 아산 방향으로 30여㎞쯤 가는 길 가에서 일본인들도 생각하지 못한 별난 과자를 만든다. 일본인들도 호두를 원료로 한 과자를 팔았지만 호두모양의 과자까지는 생각 못했다.

신혼 초 조귀금씨는 새로운 빵을 만들고 싶어했다. 부인이 먼저 아이디어를 냈다. 천안시 광덕산에서 대량 생산되는 호두에 껍질을 벗긴 흰팥을 이용해 색다른 버전을 만든 것이다. 부인 심씨는 호두 재료 과자를 만들려면 역시 호두처럼 생긴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기계틀은 서울 을지로의 한 철물공작소를 통해 호두모양으로 주문제작했다. 그 공작소는 유명 제과제빵 기계 제작업체로 성공한 서일기계공업사였다.

87년 조씨가 세상을 떠나자 학화는 가업승계 문제를 놓고 고심을 하게 된다. 큰아들은 주유소를 운영했고, 막내 아들은 대학교수로 있었다.

심씨는 90년 큰아들에게 고속버스터미널 근처에 첫 분점을 내준다.

80년대 천안에서 열손가락에 드는 부자였지만 심씨 할머니는 돈의 덧없음을 알고 10여개의 교회에 재산을 희사했다. 현재 천안엔 본점 2곳과 2·3호점 등 모두 4개의 학화 호두과자집이 있다. 5천원에 34알, 1만원엔 68알.

◇ '호두과자' 는 홍익회를 만나 전국적 명성 얻어

2005년 1월1일 재단법인 홍익회가 사라지고 대신 한국철도유통으로 법인명이 바뀐다. 홍익회의 히트 상품은 가락국수와 호두과자였다. 가락국수는 90년대 초 위생 문제 때문에 포장국수로 바뀌면서 명성을 잃어버렸다.

호두과자와 홍익회의 만남은 절묘했다. 학화 호두과자의 유명세는 홍익회를 만나기 전 천안권을 못 벗어난다. 그런데 광복 직후 홍익회를 만나면서 팔자가 달라진다. 홍익회는 36년 당시 철도청장이 각종 사고를 당한 철도유가족을 위한 원호사업 차원에서 만든 것으로, 67년 (재)홍익회로 발전하게 된다. 현재 본부는 서울 영등포역에 자릴 잡고 있다. 홍익회 열차영업사원은 350명에 달한다.

호두과자는 호남선과 경부선에서 주로 팔린다. 호남선의 경우 천안에 있는 대신제과가 납품업체로 선정됐다. 하지만 식은 호두과자에 대한 승객들의 반응이 별로 좋지 않아 대신제과가 2003년부터 천안과 대전역 플랫폼에서만 즉석 호두과자를 구워 팔고 있다. 경부선의 경우 한국철도유통의 자회사인 일양식품이 호두과자를 공급하고 있다. 물론 지역성이 강해 천안과 대전 역에서 가장 많이 팔리지만 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 이후 전국의 고속도로 휴게소에 호두과자가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철도 호두과자의 설자리가 좁아졌다. 황남빵도 경상도권 역에선 인기가 있는데 수도권에선 별로 팔리지 않는다.

학화호두과자는 이제 홍익회에 물건을 납품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일반 승객들은 천안호두과자를 학화 것인 줄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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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라 · 공주당 제과점

스텔라 · 공주당 제과점 요리 맛집 정보 2008.09.06 12:30

스텔라 · 공주당 제과점

90년대 '스텔라 빵'은 젊은 층 자기과시 수단
도넛전문'공주당' 꽈배기 등 히트
 

 
 
# 스텔라 신화 만든 김호상씨

1980~90년대 초 대구에서 젊은시절을 보낸 사람치고 대구시 중구 공평동 스텔라 제과점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광복 직후 형성된 일본식 제과 제빵 문화를 대구 정서에 맞게 발전시킨 제과점 중 하나가 바로 스텔라였다. 김호상 사장(본명 김태성)은 아직 대구 제빵인들에겐 입지전적 인물로 추앙받는다. 그는 빵밖에 몰랐고 그래서 제빵 장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현재 대한제과협회장 김영모씨도 그의 밑에서 기술을 배워 훗날 상경해 국내 최고의 제빵인으로 성공한다. 다시말해 대구에서 기술을 배워 서울에서 성공한 것이다. 특히 김영모 베이커리 강남점은 162명의 직원을 거느린 명실상부한 한국 최고의 빵집으로 평가된다.

호사다마랄까, 김호상 사장의 사업은 '희극'이었지만 그의 삶은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90년대 말 어느 날 밤, 김 사장 내외가 자신의 아파트에 침입한 괴한에게 피살된 것이다. 청천벽력 같은 사건을 접한 지역 제빵인들은 한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뉴욕·뉴델·런던의 침몰 이후 상심하고 있던 제빵인들의 자존심을 지켜준 선배 제빵인을 잃은 슬픔은 너무나도 컸다. 휴대폰 추적에 의해 범인은 잡혔지만, 설상가상 스텔라의 아성은 그날 이후 빙산과 충돌한 타이타닉호 신세로 전락해버렸다.

안동 출신의 김 사장은 '빵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그의 기술은 대구에 머물지 않았다. 국제적이었다. 서울로 가서 기술을 배우려고 하자 서울은 처음엔 그를 밀어냈다. 그는 월급을 포기하면서까지 서울의 앞선 기술을 배워 내려왔다. 그는 돈을 조금 벌면 재빨리 최첨단 제빵기기를 구입했다. 신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 현지로도 날아갔다.

그래서 스텔라 가게는 화려해도 그의 가계는 초라했다. 김 사장은 3억원짜리 고가의 제빵기기를 들여놓아도 부인에겐 좋은 옷 한벌 사주지 않을 정도로 가정엔 인색했다.

그는 60년대 대신동 삼송 빵집을 잠시 경영하다가 곧이어 대구백화점 앞으로 이전해 4년간 실력을 발휘했지만 돈은 안됐다. 재차 한일극장 동편 현재 밀밭제과 근처로 자릴 옮겨 2년간 버텼지만 역시 고전한다. 그때 김 사장 앞에 새로운 점포가 나타났다. 지금은 2·28기념중앙공원에 편입돼 사라진 스텔라 본점 건물이었다. 거기서 대운이 터졌고 88서울 올림픽 직후부터 스텔라는 대박행진을 한다.

김 사장은 지역에선 처음으로 셀프시스템을 도입한다. 손님이 맘에 드는 빵을 집어와 카운터에서 계산할 수 있도록 홀 구조를 확 바꾼 것이다. 당시 대전 최고의 빵집 성심당의 서비스 기법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새하얀 집, 스텔라는 '영 베이커리(Young bakery)'였다. 예전엔 기성세대를 겨냥했는데 스텔라부터 주고객이 젊은 층으로 바뀐다. 젊은이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인테리어·서비스 라인을 제시한 것이다.

90년대 초, 스텔라 글자가 보이는 케이스에 빵을 넣고 가는 것도 젊은이들의 '자기과시 수단'이었다. 그들 덕분에 한창 때 하루 500만∼600만원을 벌었다.

김 사장 내외가 피살됐지만 자녀들은 돈방석에 앉은 스텔라를 포기할 수 없었다. 장녀 지수, 차남 창하씨가 공동경영자로 뛰어들었다. 자릴 잡자 창하씨는 독립해 중앙파출소 근처에 제2스텔라를 개업했다. 제빵계 어른들은 그곳이 영업사각지대라면서 만류했다. 하지만 고집 센 창하씨는 남의 말을 듣지 않았다. 개업 2년만에 항복하고만다. 'IMF 파고'는 너무 높았다. 스텔라 본점도 경영위기에 봉착한다. 각종 재료 값도 제대로 못 챙길 정도로 장사는 바닥이었다. 결국 부채를 감당하지 못한 지수씨도 스텔라 본점을 포기하고 잠적해버린다.

현재 스텔라 부지는 멀티플렉스 영화관 부지로 편입돼 골조 해체 작업이 거의 완료된 상태이다. 기자가 찾은 날 쇼윈도에 적힌 황량한 스텔라 베이커리란 영문자만이 이곳이 스텔라 제과점이란 사실을 알려줬다.


# 동아백화점이 탄생시킨 공주당
 
성주군 월항면 출신으로 맨손으로 대구로 와 공주당 브랜드를 만든 박건서 사장. 그는 70년대 초 동아백화점(72년 개점) 맞은편 석탑베이커리 옆 골목에서 허름한 간판의 도넛 전문점을 차렸다. 이 집 단골은 동아백화점 여직원들이었다. 여직원들이 안보이면 십중팔구 도넛을 사먹으러 간 것이었다. 그녀들 때문에 돈을 많이 번 박 사장은 81년 2·28기념중앙공원 맞은편 한일로변에 제대로 간판을 단 공주당 빵집을 연다. 공주당이란 상호는 동아백화점 여직원들의 성원에 대한 답례의 표시였다. 물론 공주란 '백화점 여직원'들을 의미한다.

공주당의 히트작은 꽈배기 등 각종 도넛이었다. 초창기 하루 매출이 20만∼30만원대였으나 700만원대까지 급신장됐다. 공주당은 다른 집과 달리 '빵 가격 다각화'를 시도한다. 좀 더 많이 사가는 사람은 좀더 많이 가져 갈 수 있도록 판매전략을 짠 것이다.

# 제빵 아이디어맨 윤문식씨

공주당의 성공 신화 뒤엔 또 한 명의 제빵 기술자가 숨어 있다. 상주 출신의 윤문식씨(58)다. 그는 스텔라 베이커리 김 사장과 함께 지역의 대표적 제빵 아이디어맨으로 불린다.

그는 평리중 시절 빵을 만나 40여년간 외길을 걷고 있다. 그의 외가도 제빵가문이었다. 계란 총판을 하는 대봉동 외가에 머물던 시절 역시 한 외가 친척이 꾸려가던 만미당(옛 코리아 백화점 1층에 있었으며 현재 보세의류 전문점으로 바뀜), 대구 첫 윈도 베이커리격인 고려당(기술책임자 박세관)에서 기술을 많이 배운다. 2년 정도 있다가 그의 팔자를 고쳐놓는 막강한 제과점을 만난다. 향촌동 무궁화 백화점 근처에 있던 맘모스였다. 북한 출신의 김영식 내외는 즉석 크로켓(고로케)·도넛류를 잘 만들었다. 이곳의 도넛기술이 훗날 윤씨를 통해 공주당으로 전해진다. 60년대 초 그때는 식용유가 본격적으로 개발되지 않았다. 오리지널 쇼팅을 사용해 지금보다 더 맛이 좋았다. 그때 빵 책임자는 윤 씨였고 공장장은 배우열씨(작고)였다. 맘모스가 3년 정도 히트를 칠 때쯤 인물 스카우트에 귀재인 뉴욕제과의 강신영 사장이 두 명을 함께 뉴욕으로 스카우트한다.

그는 아직도 한일로가 갓 뚫리고 난 뒤 등장한 뉴욕 제과점 '개업 마케팅'에 얽힌 추억을 잊지 못한다.

"강 사장과 저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짜냈습니다. 당시 갓 등장한 영남일보 전용 경비행기를 동원해 시가 전역에 전단지를 뿌렸습니다. 그 뿐만 아니었습니다. 강 사장은 개점일과 생일이 일치하는 손님에게 케이크를 무료로 제공한다는 문구까지 삽입했습니다. 홍보감각이 대단했죠."

윤씨는 뉴욕 케이크를 좀 색다르게 만들기 위해 프루츠를 다른 제과점보다 듬뿍 담았다. 제철이 아닌 과일을 먹을 수 있어 더 많은 케이크가 팔릴 수밖에 없었다. 도넛도 맘모스와 다른 버전으로 만들었다. 기름에 뛰긴 야채 대신 샐러드 버전을 도입했고 지역에선 처음으로 통조림 소고기가 들어간 샌드위치까지 개발해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킨다. 지역에선 처음으로 제과점에 레스토랑 컨셉트를 가미한 것이다. 80년 킹뉴델 후신의 황제당 기술책임자로 들어가 대구에선 처음으로 즉석코너시스템을 개발한다.

신암육교 근처에서 케이크 타운, 84년엔 영주 중심가에서 황제당 제과, 경주시 태극당, 경주조선호텔 제과점을 거친뒤 85년 공주당의 박 사장과 손을 잡고 '공주당 전성시대'를 열어주고 떠난다. 하지만 박 사장은 경영합리화를 명분으로 다가온 전문 브로커에게 속아 재산을 날린다. 현재 박 사장은 대구를 떠나 서울에서 만두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도산한 공주당은 97년 박 사장의 조카 찬홍씨(40)가 인수해 명맥을 이었다. 한편 윤씨는 영천시 임고면 3사관학교 뒤편에 전국 최대 찹쌀떡 전문업체인 태정식품을 열었지만 화재로 타격을 받았고, 우여곡절을 거쳐 2004년 달성군 논공읍에서 도매용 제빵전문업체인 에이스 식품을 창업했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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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제빵업계 지금은…

대구 제빵업계 지금은… 요리 맛집 정보 2008.09.06 12:25

대구 제빵업계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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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대구는 '빵 도시'였다. 현재 서울에서 가장 잘 팔리는 케이크를 만들고 있는 김영모 베이커리의 기술력도 실은 대구에서 잉태됐다. 그 유명한 서울의 고려당이 넘보지 못한 곳이 바로 대구였다. 1970년대 대구의 메이저급 제과점의 연매출액은 시시한 백화점보다 나았다.

'빵 권하던 시절', 빵집은 문만 열면 돈을 벌었다. 한동안 빵집의 생존을 위협하는 경쟁자는 거의 없었다. 그 때문에 제빵인도 점점 구태의연해진다. 새로운 기술 개발에 매달리지도 않았다. 매너리즘에 빠져 미래의 빵에 대해서 고민할 열정을 뺏긴 것이다.

하지만 80년대 후반 들면서 대한민국 제과업계의 지형도는 이전과 판이하게 돌아갔다. 다국적 패스트푸드 브랜드의 습격이 시작됐다. 빵 말고도 다양한 간식거리가 쏟아져나왔다. 온갖 스타일의 다방과 레스토랑으로 인해 다과점 구실을 한 지역 제과점의 매력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그래도 대다수 제과점은 "설마 제과점이 어떻게 될까"라며 안이하게 대처했다. 80년초 밀탑제과, 89년 파리바게뜨의 공세를 그들은 제대로 받아내지 못했다.

세상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건너가듯 빵 시장도 많이 달라졌다. 케이크만 해도 이전의 딱딱한 버터케이크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다. 솜사탕 같은 '생크림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판이 달라지면 주인의 마인드도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대구는 '2%'가 부족했다. 지역 제빵인은 근시안적이었다. 돈을 좀 벌면 재투자해야 하는데 그걸 재빨리 하지 못했다. 90년대말 1천여 개에 육박하던 대구 제과점 수는 이제 420개로 줄어들었다.

시장은 냉엄하고 냉정하다. 남보다 앞선 '제빵 라인'을 선보여야 한다. 자기를 알릴 수 있는 마케팅도 벌여야 한다. 그런 견지에서 아직도 대구엔 괜찮은 실력파가 모여있다. 대한제과협회 대구경북 관계자 5명이 이번 취재를 위해 얼마전 반월당의 한 식당에 모였다. 그들은 스스로를 성찰하고 또 자책했다. 또한 80년대초 느닷없이 동반폐업한 런던·뉴욕·황제당에 대해서도 안타까운 감정을 내비치기도 했다. 지금의 어려움이 발전의 도약대가 될 것임을 확인했다.

스텔라 베이커리 고 김호상 사장, 또한 고려당베이커리 강대건 사장, 삼송베이커리의 박명호 사장 뿐만 아니라 중구 포정동 풍차베이커리 권영오 사장(65), 중구 동성로 아카데미 극장 옆 골목 최가네 케이크의 최무갑 사장(64) 등 원로 제빵인도 특히 대구 제빵의 영광을 재현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영원한 승자는 없다. 사업도 그렇다. 방심하면 퇴장되고, 시대를 읽고 경영을 업그레이드시키면 '명가(名家)'가 된다. 대구 제빵의 시련기, 발상의 전환을 하면 그건 어쩜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일 수도 있다.

# 포정동 풍차베이커리-모닝빵 개발 직장인에 대인기

의성군 비안면 출신인 권영오씨. 그는 옛 런던제과에서 몇 걸음되지 않는 포정동 길가에 있는 풍차베이커리를 꾸려가고 있다. 아직도 새벽같이 일어나 밀가루 반죽에 자신의 손을 집어넣는다. 권씨는 요즘 빵이 너무 겉만 번지르르하다면서 푸념을 늘어놓는다.

기자를 작업장으로 데리고 갔다. 봄이 왔건만 아직 그곳은 찬바람이 일렁거렸다. 자신의 손때가 묻어 있는 수십년된 거무튀튀한 빵굽는 철제 용기를 자랑스럽게 만져본다. 그는 시대를 너무 앞서가는 게 영 마뜩찮은 모양이다. 도공같은 그는 정석 그대로의 빵만을 고집한다. 그래서 주위에선 좀 우직하다는 지적도 받지만, 그는 여생을 계속 그렇게 걸을 것이다.

18세 때 중부경찰서 옆 일성당에서 6년간 제빵 기술을 배운 뒤, 90여평 규모의 만미당(옛 코리아백화점 1층), 뉴욕제과, 마지막엔 런던제과에서 절정기를 맞고 뒤엔 독립한다. 그는 대구 제과점의 영광과 좌절을 골고루 맛봤다.  
 
빵집을 갖게 된다. 놀랍게도 그때도 가스 대신 연탄가마를 사용했다. 32공탄을 사용해 빵을 구웠다. 홀은 좀 산뜻했지만 작업장은 정반대였다. 40×50㎝ 철제 빵판에 이스트로 반죽한 밀가루를 붓고 6개 빵판을 순차적으로 밀어넣어 구워냈다.

풍차는 명물 빵을 개발했다. 바로 '모닝빵'이었다. 이 빵은 식빵과 조금 달랐다. 식빵은 보통 강력분·설탕·소금·버터를 섞어 만드는데, 모닝빵은 물 대신 우유와 계란 노른자를 첨가한다. 물론 더 부드러워 식빵처럼 굽지 않고 그냥 먹어도 좋았다.

모닝빵은 시대의 산물이었다. 특히 80년대로 접어들자 도심에 적잖은 봉급생활자들이 이 빵에 반하게 된다.

모닝빵은 아침 먹을 겨를이 없던 동성로 직장인에겐 더없이 고마운 아침거리였다. 오전 7시가 되면 남녀 직장인들이 풍차 앞에 줄을 섰다. 이 소문은 인근 다방과 레스토랑으로 퍼졌다. 덕산레스토랑, 경일투자, 대구은행 본점 지하 레스토랑가도 에피타이저 빵을 풍차에서 대량 매입해갔다. 현재 정통 레스토랑에서 즐기는 감귤만한 크기의 빵은 바로 모닝빵의 후신으로 보면 된다. 일반 다방에서도 손님을 잡기 위해 커피 옆에 모닝빵을 내놓기 시작한다. 풍차는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속에 아무것도 없는 모닝빵, 자칫 물리기 쉬워 풍차는 오뚜기 식품에서 출시한 버터와 딸기잼도 팔았다. 모닝빵은 보통 한 봉지에 20개, 그 옆엔 늘 우유 한 병이 따라붙는다.

풍차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위력을 가진 런던제과가 바로 근처에 있는데도 풍차의 영업이 잘 된 건 무슨 이유일까. 바로 런던제과가 일찍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런던은 보통 밤 10시30분에 문을 닫는다. 그때부터 약 1시간은 풍차세상. 심야 손님들이 귀가하면서 이곳에서 갖가지 빵을 사가는 것이다. 처음엔 큰 골판지 케이스에 이런저런 빵을 담아갔는데, 80년대 후반부터 낱개 포장이 선호된다. 하지만 풍차의 호시절은 90년대초 지하철 1호선 공사로 인해 끝나게 된다. 물론 지금 경기는 바닥권이다. 그래도 가끔 그 시절 모닝빵이 생각나 찾는 단골이 풍차의 '원군'이다.

# 최가네 케이크-다른 빵은 접고 오직 케이크만 만들어

교동시장 수형당과 함께 광복 직후 대구의 대표적 제빵 브랜드인 삼미제과사 최팔용 대표의 아들인 무갑씨. 현재 아카데미극장 옆 골목 안 대구 젊은이에게 가장 어필하는 케이크 전문점 최가네 사장인 그는 지역 제빵계에선 풍운아로 통한다. 한때 사업실패로 은둔의 세월을 보냈지만 한국 최초의 케이크 브랜드를 개발해 화제가 되고 있다.

최씨는 수형당 빵공장 기술자, 뉴델제과점 총기술자로 활동하다가 76년 킹뉴델, 79년엔 로마제과점도 경영했지만 파산의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이어 경주 코오롱·도쿄호텔 제과부를 거쳐 다시 대구로 입성했다. 와신상담의 각오로 2001년 중구 동성로 2가에 전국 첫 케이크 전문점을 열었다. 다른 빵은 접고 오직 케이크만 만든 게 적중한 것이다. 최씨는 젊은이들이 무엇을 원하는 지 알고 있었다.

최가네의 특화된 케이크는 즉시 동성로 젊은이의 혀를 사로잡는다. 그는 뉴 밀레니엄 시작과 함께 한국 제빵업계 판도를 분석했다. 역시 특화시키지 않고 소품종 다량 생산을 해선 승산이 없다고 분석했다. 그래서 90년대 가장 폭발적 인기를 끈 생케이크를 사업 컨셉트로 정한 것. 젊은이의 호주머니 사정을 감안해 조각 낸 낱개 케이크도 팔았다.

최가네는 제빵 가문이다. 가족 모두 직원으로 뛴다. 장남 재호씨(31), 큰 며느리 조소영씨, 둘째아들 재익씨(27)가 함께 일한다. 2층 공방에선 무스·딸기·치즈·초콜릿·샤워체리·고구마·녹차·호박 등 무려 20여 종의 케이크를 만든다. 냉동 진열장에 담긴 케이크가 흡사 '무지개 궁전'속으로 들어온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오는 6월쯤 근처로 확장 이전한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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