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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9.10 불고기 만드는 방법
  2. 2008.09.10 계산 땅집

불고기 만드는 방법

불고기 만드는 방법 요리 맛집 정보 2008.09.10 14:08

불고기 만드는 방법

 

재료 : 소고기(등심, 안심, 목살 등) 300g, 깻잎 100g, 상추 10장, 통마늘 5쪽, 맛술

양념장 : 간장 3큰술, 설탕 1+1/2큰술, 깨소금, 후추, 다진 파, 다진 마늘, 참기름, 배, 양파

방법
1. 소고기에서 핏물제거한다.
(키친타올을 아래 한장깔고 그 위에 고기를 올려놓고, 다시 그 위에 키친타올로 고기를 살짝 눌러주면서 핏물을 제거한다.)
2. 핏물 제거한 고기에 맛술을 조금씩 뿌려준다(누린내 없애는 과정 - 5분정도 놔둔다)
3. 고기를 먹기좋은 크기로 자른다.
4. 고기를 잘 편다음 양념장을 골고루 붓고 30분정도 재운다
5.  고기를 재우는 동안 상추와 깻잎을 지저분한 곳을 제거후 접시에 놓는다.
6. 통마늘은 얇게 썰어준다.
7. 후라이팬이 달궈졌으면 식용유를 두르고, 고기를 굽는다.
8. 양파 1/2개를 1cm굵기 정도로 한쪽으로만 썰어서 후라이팬에 넣고 같이 익혀준다.
   (양파 써는 것은 고기를 굽기전에 준비해두면 좋을 것이다.)
9. 고기를 익힐 때는 센불에서 단번에 익히는 것이 고기 맛이 더 좋다.
10. 고기를 너무 많이 익히면 고기가 질겨져서 맛이 없으므로 한쪽이 왠만큼 익었다 싶으면
   반대쪽으로 뒤집어준다.


불고기 양념장 만들기

(큰술, 작은술 단위 - 계량숟가락(양쪽에 스푼이 있다)
1. 소고기 100g에 간장 1큰술, 설탕 1/2큰술 들어감
    (따라서 소고기 300g이기 때문에 간장 3큰술, 설탕 1+1/2큰술)
2. 다진마늘 1/2작은술, 깨소금 1/2작은술, 참기름 1작은술, 다진파 1큰술,
   후추 조금을 양념장 그릇에 넣는다.
3. 배 한쪽을 강판에 갈아서 양념장에 섞어준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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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 땅집

계산 땅집 요리 맛집 정보 2008.09.10 14:03

계산 땅집

대구에 불고기 '첫 불'을 지피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출처 : 인터넷 ]


# 불고기와 한평생

1957년 어느 날 대구시 중구 계산동1가 봉래장 여관 동편 한 초가(草家). 일본 오사카의 한 학원에서 요리를 배우고 광복 직후 귀국한 대구시 중구 달성동 출신의 박복윤(80). 대구에선 처음으로 '계산 땅집'이란 식당을 통해 불고기 문화를 퍼트린 주인공이다.

계산 땅집의 첫 출발은 너무나 궁색하고 초라했다. 북측보다 평균 1m 이상 푹 꺼져 있고 장마철엔 상습침수돼 '흉지(凶地)'로 불렸다. 기와집에 살던 동네 사람들은 그 움집이 늘 눈에 거슬렸다. 계산동, 그때만 해도 대구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부촌이 아니던가. 그 밥집이 훗날 대구 1호 불고기 식당 '계산 땅집'으로 성공할 줄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성공의 비결은 야무지고 깔끔 치밀하기로 이름난 박복윤의 손에 있었다.

국밥 문화를 갈비 문화로 이어준 계산 땅집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그녀를 수소문했다. 모두들 그녀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그 시절 식당 주인들은 여주인이 타계했을 거라고 말했다. 어렵게 박복윤이 지금 경산의 한 아파트에서 남편 주석환(84)과 오순도순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박복윤은 여든 고개에 들어섰지만 아직 또렷한 기억력을 갖고 있었다. 경상도 불고기의 시발점이 바로 반세기 전 자신의 식당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비교적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땅집, 요즘 젊은 양반들은 잘 모를 겁니다. 잘 나갈 땐 하루 40관(貫: 1근의 10배, 3.75㎏)을 팔아도 계속 손님이 들어왔습니다. 자고 일어나니 부자가 됐다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16년 전 계산 땅집을 다른 사람한테 넘겼어요. 이젠 동네 사람들도 내가 땅집 주인이란 사실을 전혀 몰라요. 나도 그런 얘기는 안하고 …."

기자가 "계산 땅집을 찾아가보니 건물은 그대로인데 주인이 3번 정도 바뀌다가 지금은 미가해물찜 간판만 덩그러니 남아있고 홀도 폐지 보관창고로 전락해 있더라"고 귀띔해주자, "세상에 영원한 게 뭐 있느냐"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지만 말 끝에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그녀는 전화 인터뷰는 허락했지만 직접 사진 촬영에는 응하지 않았다.

# 흥망성쇠

1980년대 초까지 대구의 식당은 솔직히 문만 열면 돈을 벌었다. '물 반 고기 반' 경기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대구 식당 경기는 섬유경기와 직결돼 있었다. 섬유경기가 좋으면 식당 경기도 덩달아 좋았다는 말이다. 53년말 대구엔 무려 1천197개소의 각종 공장이 있었다. 하지만 40년대엔 봉급 생활자도, 사장도 드물었다. 자연히 식당이 잘될 리 없었다. 50년대 들면서 공장은 물론 은행, 상점 주인들이 급증했고 결국 이들이 대구 식당가를 살린 셈이다. 하지만 80년대 전까지만 해도 고기 먹으려고 외식하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계산 땅집은 이런 사회경제적 흐름을 타고 나타난 것이다.

계산 땅집이 처음부터 불고기에 손댄 건 아니다. 근처 회사원들에게 백반 정식부터 팔았다. 일부에선 계산 땅집이 국내 첫 불고기 개발자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아니다. 불고기 시발지는 황해도 사리원 등지다. 물론 조선시대 때 궁중요리에선 불고기가 '너비아니'로 통용되는 등 수도권 사대부들이 즐기던 요리였지만, 역시 불고기는 황해도가 강세였다. 훗날 수원, 태릉, 해운대, 마포와 포천 등지가 전국적인 갈비 명소가 된다. 대구 불고기 문화는 부산 해운대 조리사들이 퍼트렸고 부산 불고기는 6·25 때 북한 조리사들에게 전수(傳受)한 것이다. 50년대 초만 해도 대구에선 불고기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대구 사람들은 생선은 굽지만 소·돼지 고기를 구워 먹는 걸 상상 못했다. 고작 소고기는 국, 돼지는 수육으로 애용됐다. 불고기는 냉면과 궁합이 잘 맞았다. '갈비집=냉면집=불고기집'. 60년대엔 그런 등식이 성립됐다. 물론 대구는 냉면 문화부터 먼저 자릴 잡는다. 50년대초 강산면옥(처음엔 서문시장에서 출발, 동산병원 초입으로 이전했다가 60년대초 교동시장 내로 이전), 대동면옥(현재 계산동 송월타월 맞은편 골목 안에 위치), 부산안면옥(쇼핑몰 밀리오레 동편), 황해집(서문시장에서 60년대 동산동 실 골목 안으로 이전), 남포집(서문시장에서 교동시장 강산면옥 맞은편으로 이전. 홍모 여사장이 훗날 돈을 모아 수성관광호텔을 인수하기도 한다), 사리원(서문교회 근처) 등 이북 출신 주인들이 포진해 있었다. 이들이 50년대 냉면 하나로 '북한 천하'를 구가할 때 여기에 도전장을 낸 게 바로 계산 땅집이었다. 계산 땅집 불고기가 돌풍을 일으키자 떡 골목에서 돼지수육 골목으로 발전한 서성로 등 계산 땅집 반경 수백m 이내 식당들이 된서리를 맞고 땅집 벤치마킹에 나섰고, 이로 인해 제2·제3의 땅집이 등장한다. 처음 불고기에 무심하던 북한파들도 냉면에 이어 부랴부랴 불고기를 주메뉴로 올린다. 계산 땅집에 뺏긴 손님을 되찾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졸지에 대신동 네거리, 서문교회, 만경관 근처는 불고기타운으로 급성장한다.

계산 땅집 주방장 하창수가 동인동에 제2 땅집을 낸다. 뒤이어 종로 땅집도 가세한다. 일종의 체인점이었지만 박복윤은 커미션을 원하지 않았다. 현재 경기도 과천에 살고 있는 김천 출신의 김종열(여·84)도 북성로 대안사 근처에 북성로 땅집을 오픈한다. 북성로 땅집은 동성로로 이전했다가 20년 전 효목시장 근처에서 양념돼지갈비 전문식당으로 변신했지만, 결국 문을 닫는다. 대구 첫 소갈비점 진갈비는 동산동 실골목을 갈비골목으로 둔갑시켰고, 이밖에 삼성갈비(대구은행 대신점 근처), 향촌동 향미, 대구시청 근처 한전 옆 골목에 합승면옥, 대구호텔 맞은편 오륙도 등이 불고기 붐에 편승한다. 현재 밀리오레 서편 골목 안 원도매불고기(대표 홍영록)가 25년간 한 자릴 지키고 있다. 84년 남부정류장 맞은편에서 미정식당이란 대구 첫 양념돼지갈비집을 낸 김태근 대구조리사협회 대구지회장도 불고기 문화의 산 증인이다.

밥집이 불고기집으로 변한 건 한일은행 대구서지점 때문이었다. 당시 서지점 당직자들은 계산 땅집을 '함바'처럼 애용했다. 자신들이 돈을 추렴해 염매시장에 가서 소고기를 사들고 와 박복윤에게 요리를 부탁했다. 우연히 불고기 요리를 내놓았는데 그 맛에 반한 직원들이 사람들을 몰고 왔다. 처음엔 간판도 없었다. 금복주가 계산 땅집이란 간판을 달아준다. 불고기 식당이 된 지 5년 만에 서대구세무소로부터 식당 허가를 받기 위해 초가 개량 작업에 들어간다. 당시 초가는 식당으로 허가나지 않았다.

한창 땐 종업원이 20여명 있었다. 주방엔 주방장을 비롯, 밥하고 반찬만들고 그릇씻는 종업원 4명이 있었다. 땅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종업원만 7명이었고, 초창기 월급은 1천원선. 당시 식당으로선 드물게 구정(설)과 추석에 보너스까지 안겨주자 경산, 성주, 현풍, 군산에서 온 가난한 남녀 종업원들은 박복윤을 어머니처럼 떠받들며 땅집 신화를 엮어나갔다.

# 맛의 원천

계산 땅집은 계산동 제일식육점과 염매시장, 동아쇼핑 지하 동아식육점의 등심을 사용했다. 고기를 잴 때 연육수를 사용하지 않고 간장에 양파와 배즙, 마늘과 설탕을 넣고 반드시 말미에 참기름을 충분히 붓는다. 다들 그 참기름이 맛의 원천이라고 했다. 간장도 다른 식당에선 샘표를 사용했는데 계산 땅집은 마산몽고간장에서 직접 차로 실어 온 걸 사용했다. 1인분은 200g. 추가 밥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돈을 받지 않았다. 파는 피했다. 쓴맛이 나고 고기 빛깔이 가기 때문이란다. 양파는 단맛, 배는 육질을 연하게 만들었다.

불고기용 소스도 인기였다. 계란 흰자는 불판 가장자리 육수 담긴 홈에 풀어주고 노른자는 진간장과 섞어내는데, 그걸 찍어먹는 불고기 맛은 지금과 다를 수밖에. 찹쌀과 노란 차조가 섞인 공기밥도 인기여서 단골들은 "밥만 먹어도 배부르겠다"고 평가했다.

계산 땅집은 계량 밥그릇을 갖고 있었다. 가령 소고기 한 관을 잴 때 그것에 알맞은 양의 간장을 밥 그릇으로 환산해 잡아 넣었지만 청주는 넣지 않았다. 불판도 발전을 거듭해 석쇠에서 나중엔 깡통 불판, 뒤이어 신주로 만든 동판스타일로 가다가 80년대 들면서 스테인리스스틸 버전으로 바뀐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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