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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곳곳에 고대문명 흔적

로마 곳곳에 고대문명 흔적 국내외 여행정보 2008. 10. 14. 14:27

로마 곳곳에 고대문명 흔적
콜로세움·개선문·베드로 성당 등 볼거리 빼곡 


 




지상에서 가장 예술적인 도시를 꼽으라면? 나는 서슴지 않고 파리, 피렌체, 로마를 꼽고 싶다. 베를린에도, 바르셀로나에도, 그리고 뉴욕에도 많은 미술관과 유적지가 있지만 그 어느 곳도 위의 세 도시를 능가하지는 못한다. 대부분의 도시들이 몇 군데 보고 나면 쇼핑으로 눈을 돌려야 하는 형편이지만 이들 세 도시에서는 몇날 며칠을 발이 부르트도록 다녀도 볼거리가 끝이 없다.

이제 ‘이탈리아 예술 산책’의 마지막 여행지로 로마를 남겨두었다. 가봐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닌 까닭에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19세기에 파리, 20세기에 뉴욕이 있었다면 로마는 기원전부터 18세기까지 무려 2000년 이상 유럽 예술의 중심지였다. 규모로 보나 역사로 보나 여타의 도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수준이다. 이 방대한 역사의 도시, 로마를 소개하려니 교과서적이긴 하지만 시대적 흐름에 따라 정리를 해보는 것도 효과적일 것 같다.

◈고대 로마(기원전 8세기~기원후 5세기)

오늘날 남아 있는 로마의 유적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들은 고대 로마의 모습, 특히 로마 제국의 모습이다. 공회당이라 불리는 포럼, 콜로세움, 개선문, 판테온, 도무스 아우레아…. 로마에는 2000년 전 문명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중세 로마(기원후 5~14세기)

로마에는 교황청이 있다. 12 제자 중에서 그리스도로부터 천국의 열쇠를 받은 베드로가 초대 교황이 되었고, 순교를 했다. 순교 장소에 교회를 세운 것이 4세기 경에 건립한 성 베드로 성당이다. 이후 신앙의 시대였던 중세 천년동안 로마는 서구 사회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을 비롯하여 많은 중세 초기 교회들이 남아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로마(15~16세기)

로마가 가장 화려했던 시대였다. 베드로 성당의 재건축이 이때 이루어졌고, 라파엘로, 미켈란젤로와 같은 천재 예술가들이 바로 로마의 교황청과 베드로 성당에서 그들의 재능을 뿜어냈다. 이들 외에도 당대 한 가락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로마에서 활동을 했다.

◈바로크 시대의 로마(17세기)

17세기 바로크 시대에 로마는 다시 한번 미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바로크 양식이 탄생된 곳이 바로 로마였으며 그것이 전 유럽으로 확산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로마는 예수회 교회를 비롯하여 화려함이 극에 달하는 오리지널 바로크 교회들의 집산지다.

◈신고전주의 시대(18세기말~19세기초)

한번도 고전, 고대를 망각한 적이 없었던 유럽의 미술계에 다시 한번 본격적인 고전 붐이 일어난 것이 신고전주의 양식이었고, 그 중심에 로마가 있었다. 예술가뿐만 아니라 유럽의 지성인들에게 로마 여행은 필수코스이자 지성의 완결 편이었다. 로마에 가보지 않고 지성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건축미의 극치 ‘베드로 성당’
웅장·정교… 인간의 한계는 어디인가… 


 
세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술가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교회, 교황이 대주교인 성당….

바티칸의 베드로성당을 수식하는 말은 이 밖에도 많이 있을 것이다. 베드로성당에 갈 때마다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를 생각하곤 했다. 인간의 건축술은 얼마만큼 장엄하고 웅장하며, 인간이 만들어낸 조각과 회화는 얼마나 정교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지.

베드로성당은 몸체와 광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광장 양쪽에는 거대한 기둥 숲으로 이루어진 두 개의 회랑이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두 팔을 벌리고 있는 것과 흡사하다. 그곳을 찾은 이들을 교회가 따듯하게 안아주고 있다는 의미로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 회랑과 광장은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거장 베르니니의 작품이다. 지난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거했을 때 우리는 수백만의 인파가 베드로성당 광장에 운집한 광경을 보았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 그것이야말로 광장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광장을 통과하여 교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대한 청동문을 통과해야 한다. 청동문 안쪽에는 나르텍스라는 공간이 있는데 교회의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공간이다. 여기서 내부로 들어가려면 다시 한번 청동문을 통과해야 한다.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는 동안 이런 여과 과정을 거치면서 정화된 마음을 가지도록 유도한 것이다. 베드로성당의 미술품들은 대부분이 수백년 이상 된 것들이지만 청동문 중에는 만추와 민구치를 비롯하여 20세기 초 이탈리아 최고의 조각가들의 작품이 있다. 그들은 피사노, 도나텔로, 미켈란젤로 그리고 베르니니의 계보를 잇는 세계적인 구상조각의 대가들이다.

성당 내부로 들어가면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되며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한동안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거대한 기둥들과 각양각색의 화려한 돌들로 만들어진 벽, 천장, 곳곳에 설치된 셀 수 없이 많은 조각작품들….

성당 안에 있는 수많은 조각 작품들은 대부분이 역대 교황들의 장례 기념비, 즉 무덤이다. 교황 한 분이 서거하실 때마다 당대 최고의 조각가에게 의뢰하여 장례 기념비를 제작케 하는 것이 교회의 오랜 전통이었다. 물론 이들 장례 조각은 교황 생전에 준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베드로성당이 처음 지어진 것은 324년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으로부터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은 밀라노 칙령(313년)이 발표된 직후이다. 그동안 금지됐던 그리스도교를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믿을 수 있게 되자 무엇보다도 절실했던 것이 종교예식을 치를 수 있는 장소였고,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교회였다.

베드로성당이 오늘날의 모습을 띠게 된 것은 15세기말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밀라노의 건축가 브라만테에게 재건축을 의뢰하면서부터이다. 이 거대한 성당을 다시 짓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했고, 교황은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를 팔기 시작했으며, 그것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에 결정적인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리하여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가 탄생하게 되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예수 시신 안고 있는 마리아 모습 조각미의 극치

 
베드로 성당은 뭐니 뭐니 해도 미켈란젤로와 베르니니가 주인공이다. 미켈란젤로는 16세기 르네상스를, 베르니니는 17세기 바로크 양식을 절정에 올려놓은, 두 사람 모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조각가들이다.

먼저 미켈란젤로의 작품으로는 그 유명한 ‘피에타’(사진)가 있다. 성당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피에타가 있는 곳이다. 피에타란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말인데, 미술에서는 성모님이 죽은 아들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을 그리거나 조각한 것을 가리킨다.

베드로 성당에 있는 ‘피에타’는 미켈란젤로가 24세 때 제작한 것이다. 아들의 시신을 안고 슬픔에 잠겨 있으나 결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성모님의 모습은 너무도 젊고 아름다워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죽은 예수님의 몸은 축 늘어져 있으나 인체의 골격은 물론 손등의 핏줄까지 정교하게 묘사되었다. 어쩌면 서 있는 형태보다 훨씬 더 만들기 어려웠을 죽은 인간의 모습을 스물 네 살의 미켈란젤로는 완벽하게 만들어냈다. 작품 전체를 감싸고 있는 성모님의 옷 주름은 부드러운 찰떡으로 빚어놓은 듯 감미롭다.

‘피에타’는 사실적 묘사 측면에서 본다면 미켈란젤로의 예술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그는 이 작품 이후 사실적 조각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였다. 향후 그의 예술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세계의 아름다움과 완벽함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형태를 통해 작가의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쪽으로 향했다. 그것은 4세기 후에나 등장한 현대 미술의 개념이기도 하다.

성당 중앙으로 발걸음을 향하면 거대한 돔 아래에 서게 된다. 이 돔 역시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것으로 높이는 무려 120m에 이른다. 베드로 성당을 하늘에서 보면 이 돔을 중심으로 정사각형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 같은 단순한 구조를 설계한 것이 바로 미켈란젤로이다.

돔 아래에는 제대가 있는데 이 제대를 둘러싼 구불 구불한 기둥 모양의 거대한 청동 덮개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베르니니의 작품으로 덮개를 받치는 기둥의 높이만도 29m가 된다. 베르니니의 작품 중에 대주교좌(大主敎座)도 있다. 주교좌가 있는 성당을 주교좌 성당이라 부른다. 세속이든 종교든 의자는 권위의 상징인 모양이다. 베르니니가 만든 성 베드로 주교좌는 너무도 화려하고 커서 정작 어디에 앉아야 할지 모를 정도이다. 역시 청동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네 명의 교부(敎父)가 의자를 받치고 있고, 하늘에서는 성령이 내려오고 있으며, 성령을 감싸고 있는 한 무리의 천사들이 구름떼에 둘러싸여 있는 형태로서 바로크 예술의 화려함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보여주려는 듯 하다.

베르니니는 교황님의 장례 묘비도 두점 제작했다. 하나는 우르바노 8세의 무덤이고 다른 하나는 알렉산데르 7세의 무덤이다. 사자(死者)가 중앙에 앉아 있고 그 아래에 의인화된 인물들이 서 있는 형식인데 이후 미국이나 유럽의 광장에 세워진 수많은 기념비들이 바로 이 작품을 응용한 것이다. 모방은 어렵지 않으나 창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켈란젤로와 베르니니가 위대한 이유는 그들이 창조자들이기 때문이다.
 

로마의 핵심은 바티칸이다. 바티칸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 나서도 최소한 1시간 정도는 줄을 서서 기다려야 입장표를 살 수 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표사느라고 2시간 이상을 길에 허비해야 하니 서두르는 것이 좋다.

바티칸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스탄자 디 라파엘로라 불리는 라파엘로의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진 방들과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와 벽화가 있는 시스티나 예배당이다. 바티칸의 모든 푯말은 방문객들을 이 두 곳으로 안내하고 있다.

시스티나 예배당은 교황의 전용 예배당(chapel)이자 신임 교황을 선출하는 곳으로서 교황청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데 바로 이곳에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와 벽화가 있다. 시스티나라는 말은 예배당을 건축토록 한 교황 식스투스 4세(1471~1484)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는 초기 르네상스의 대가들이었던 보티첼리, 핀투리키오, 페루지노, 기를란다요를 불러 그곳을 장식하도록 명했다. 페루지노는 라파엘로의 스승이고, 기를란다요는 미켈란젤로의 스승이다.

시스티나 예배당에 들어서는 순간 그러나, 이들 15세기 대가의 벽화는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대신 한 눈에 관람객을 압도하는 것은 미켈란젤로의 거대한 천장화와 벽화이다. 미켈란젤로는 1408년부터 1512년까지 4년에 걸쳐 이곳에 천장화를 그렸다. 고개를 위로 들어 천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한 인간이 그토록 거대한 공간을, 일찍이 유래가 없던 방식으로 채웠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 의문을 갖게 된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예술가들 중에서 미켈란젤로를 가장 위대한 예술가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미켈란젤로에게 이 일을 주문한 사람은 베드로 대성당 재건축을 추진했던 교황 율리우스 2세였다. 그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직접 군대를 지휘하는 전투적인 교황이었지만 예술을 사랑했고, 그것의 가치를 알았던 전형적인 르네상스 시대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알고 썩힐 리 없었다. 요즘 문화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문화마케팅, 문화전쟁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지만 이미 500년 전에 그는 문화의 위력을 알고 있었다.

율리우스 2세는 처음에는 미켈란젤로에게 자신의 영묘를 제작하도록 명령했었다. 조각가로서 이름을 날리던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대규모 영묘를 주문받게 되자 신바람이 나서 작품을 계획했다. 그것은 등신대 크기의 조각상이 40점이나 들어가는 그야말로 거대한 영묘였다. 미켈란젤로는 직접 카라라 대리석 산에 가서 돌을 채석했다.

그가 선택한 대리석이 지중해에서 뗏목을 타고 로마의 테베르 강에 도착하여 막상 돌 값을 지불해야 하는 순간 비정한 교황은 작가를 만나주지도 않으며 홀대했다. 이에 분개한 미켈란젤로는 더 이상 교황님이 시키는 일은 하지 않겠다며 가지고 있던 짐들을 처분하고 고향 피렌체로 내려와 버렸다. 교황은 뒤늦게 외교 서신을 보내고, 사람을 보내는 등 공을 들인 끝에 어렵사리 작가를 만날 수 있었는데 장소는 로마가 아니라 볼로냐였다. 미켈란젤로가 교황이 거주하던 로마로 가지 않고 제3의 장소를 택했다는 것은 권력 앞에서 굽히지 않았던 작가의 자존심이었다.


38세 요절 라파엘로 ‘전설’ 로 남아
교황 집무실에 프레스코화 그린뒤 ‘3대 거장’ 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그리고 라파엘로 이 세 사람을 르네상스 시대의 3대 거장으로 꼽는다. 이들 중 라파엘로(1483~1520)는 막내였다.

움브리아 지방의 작은 도시 우르비노에서 태어난 라파엘로는 스무살이 갓 넘은 1504년 넓은 세계에서 놀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피렌체에 왔다. 당시 피렌체에는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시청에서 벽화를 제작하고 있었다.

이 두 거장이 감히 접근조차 쉽지 않았던 괴팍한 천재들이었다면, 라파엘로는 상냥하고, 겸손하며, 붙임성 있는 젊은이였다. 그런 그에게 당대 최고의 무대에 설 기회가 주어졌다. 동향(同鄕) 사람이자 로마 베드로 성당의 건축가였던 브라만테의 추천으로 바티칸에 입성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자신의 집무실이었던 ‘서명의 방’이라 불리던 스탄자 디 세냐투라의 장식을 주문했고, 화가는 이 방의 천장과 벽을 신학, 철학, 시를 주제로 한 그림으로 장식했다. 동 시기, 동일 장소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두 거장이 동시에 작업을 한 전대미문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라파엘로가 그린 그림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등장하는 그 유명한 ‘아테네의 학당’(사진)을 비롯한 프레스코화다. ‘아테네의 학당’은 전성기 르네상스 회화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웅장한 건축물을 배경으로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의 명망 있는 철학자들의 모습을 그린 것인데 다빈치는 플라톤의 모습으로, 자신을 추천해준 건축가 브라만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습으로 그렸다. 인물 각자의 표현은 마치 실제 인물들을 사진으로 찍어놓은 듯 정교하고, 자연스러우며, 배경과 인물들의 공간적 조화는 뛰어났다. 비례, 조화, 균형으로 대표되는 르네상스 고전주의 회화가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라파엘로는 바티칸에서 모두 4개의 방에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첫 번째 방이 고전주의 회화의 절정을 보여주었다면, 두 번째 방에서는 자신이 애써 달성한 회화적 성과를 스스로 깨고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역시 창조의 세계를 추구했던 진정한 예술가였던 것이다.

라파엘로는 일약 스타가 되었고, 사람들은 이 젊은이의 그림을 칭송했다. 그의 사근사근한 성격은 과격한 미켈란젤로에게 혼쭐 났던 후원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이 쇄도했고, 심지어는 그를 추기경으로 선출하자는 의견까지 나왔다고 하니 그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의 질투를 샀던 것일까. 그는 한창 나이인 38세에 요절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사랑하는 애인 빵집 딸에게 유산으로 남겼다. 라파엘로의 작품으로 알려진 바티칸에 있는 나머지 두 개의 방은 그의 사후에 제자들이 그린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홀로 외로움 속에서 작업을 했다면, 라파엘로는 제자들을 고용하여 방대한 작업을 진행시켰다. 어찌 보면 세속적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당시에는 이런 공동작업이 오히려 일반적인 것이었다. 이후 19세기 초 신고전주의 양식이 유행하기까지 3세기 이상 라파엘로는 서구 회화의 지존의 자리를 지켰으며, 예술가들의 전설이 되었다.
 

인간탐구의 절정 ‘천지창조’
미켈란젤로, 시스티나 예배당에 4년간 그려 


 

그림은 그리기 싫다는 미켈란젤로에게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그리라고 명령했다. 당시 미켈란젤로는 ‘피에타’ , ‘다비드’ 와 같은 걸작을 통해 조각가로서는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었지만 화가로서의 경력은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다. 그 자신이 ‘조각가 미켈란젤로’ 라고 서명을 할 정도로 조각을 예술 중의 으뜸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는 일을 아예 내키지 않아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교황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미켈란젤로가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운 것은 피렌체의 기를란다요 공방에서였고, 그것도 겨우 1년여에 지나지 않았었다. 스승 역시 30년 전 교황의 부름을 받고 시스티나 예배당에 벽화를 그린 거장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조수를 몇 명 채용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물감을 준비하는 조수 한명만을 남겨두고 모두 돌려 보내고 혼자 작업에 착수했다. 1508년부터 1512년까지 만 4년 동안 그는 외로움 속에서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말이 쉽지 혼자서 그 높은 천장에 그림을 그리자면 엄청난 육체적 고통이 수반된다. 잠시 고개를 올려서 그림을 보려해도 고개가 아플 정도인데 4년간 누운 자세 혹은 머리를 쳐든 자세로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해보라. 그는 결국 그 일을 해냈고, 작업이 끝나고 난 후 몸이 굳어져서 몇 달 동안을 그림 그리던 자세로 지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림의 큰 뼈대를 보자면 중앙의 사각형들 안에는 천지창조를 그렸다. 하느님이 빛과 어둠을 가르는 장면, 바다와 육지의 동물들을 창조하는 장면, 아담의 창조, 이브의 창조, 뱀으로부터 유혹받은 아담과 하와, 낙원으로부터의 추방 그리고 노아의 홍수 등이 그려져 있다. 천장의 가장 자리에는 육중한 인물들이 앉아 있는 모습이 있는데 예수의 재림을 예언한 구약성서의 예언자들과 무녀들이다. 마지막으로 예언자와 예언자 사이 그리고 벽의 가장 위쪽 반달 모양에는 예수의 조상들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이들 장면 사이사이에 각양각색의 자세를 취하고 앉아 있는 젊은 남성들의 나체와 역시 나체의 아이들 등이 그려져 있다.

초기에 그린 그림들은 약간의 부자연스러움과 색채의 부조화가 발견되나 미켈란젤로는 곧 회화의 최고 경지에 도달했다. 그는 인간의 가장 어려운 자세를 총 망라하여 그리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이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자세를 다 그려 놓았다. 그것은 중세 이후 서양의 화가들이 3세기에 걸쳐 추구해온 인간에 대한 탐구의 절정이었다. 그가 그린 인체들은 에너지가 넘치고 아름다워서 인간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사랑의 표현으로 보인다. 흔히 르네상스 시대를 인간 중심의 시대, 혹은 휴머니즘의 시대라고 표현하는데 미켈란젤로의 이 천장화는 르네상스 정신의 결정판이었던 것이다.

이 그림이 탄생된 이후 서구 회화의 판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이들은 이 시스티나 예배당을 모르고서는 그림을 그릴 수가 없게 되었다. 당대의 미술사가 바사리는 미켈란젤로를 신에 비유했다. 천재의 개념도 바로 미켈란젤로에게서 나왔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동경했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들보다 동시대인 미켈란젤로를 더 위대한 인물로 여겼다. 고대를 능가한 근대인의 탄생을 지켜보았던 것이다.
 

외설이유로 ‘덧칠 수모’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제자가 나체에 가리개 그려

 
천장화를 그리고 난 지 30년이 지난 1536년쯤 새로 교황이 된 바오로 3세는 또 다시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예배당의 벽화를 그릴 것을 주문했다. 그 때 미켈란젤로의 나이 60이었다. 이제 늙어서 몸도 말을 듣지 않고,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못하겠다는 미켈란젤로에게 교황이 말했다.

“나는 당신의 그림을 갖기 위해 30년을 기다렸소. 이제 교황이 되었으니 내 명령을 따라야 하오!”

그렇게 해서 미켈란젤로는 늙은 몸을 이끌고 또 다시 이 거대한 벽을 혼자서 그리는 일에 착수했다.

주제는 최후의 심판이다. 최후의 심판이란 인류 종말의 날, 심판자인 예수님이 지상에 내려와서 인간의 생전의 행업에 따라 심판을 하여 선행한 자는 천국으로, 악행한 자는 지옥으로 보낸다는 주제다.

그림을 살펴보면 그림 중앙에 심판자 예수님이 내려오고 있다. 한 손을 위로 올린 근엄한 모습이다. 그 옆에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를 비롯하여 성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스도의 바로 아래에는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천사들이 나팔을 불고 있고, 그 양 옆에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사람들과 천국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가장 아랫부분을 보면 왼쪽에는 심판을 받기 위해 죽음에서 깨어나는 사람들 그리고 오른쪽은 지옥 장면이다.

원래는 예수님과 성모님을 제외하고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였다. 하루는 비아지오 다 체세나라는 추기경이 교황과 함께 한창 그림에 열중하고 있는 미켈란젤로를 방문했다.

“신성한 교황 성하의 예배당에 이런 벌거벗은 나체들은 어울리지 않는구려.”

이 말을 들은 미켈란젤로는 그 추기경의 얼굴을 지옥의 사자 미노스의 얼굴로 그려놨다. 말 한마디 잘못한 덕분에 그는 지금까지도 지옥의 사자 모습을 하며 관객을 맞고 있다.

이 그림이 공개되자 사람들 사이에서는 놀람과 찬사 그리고 비난이 가득했다. 놀라운 그림이라며 칭찬한 이들이 있었는가 하면, 이건 완전히 벌거벗은 이들로 가득한 목욕탕이라고 비난한 사람들도 있었다. 심지어는 그림을 모두 파괴해버리자는 과격한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맞서는 반종교개혁이라는 가톨릭 내부의 정화운동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 작품은 1563년 트렌트 공의회에서 본격적으로 토론의 대상이 되었고 이듬해에 외설적이란 이유로 ‘수정’ 이라는 형벌을 받게 된다. 결국 미켈란젤로가 사망하던 바로 그 해에 교황청은 그의 제자였던 다니엘라 다 볼테라라는 사람을 시켜서 나체의 중요한 부분을 각양각색의 가리개로 덧칠하여 가리게 한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말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전통적 형식을 초월하여 모든 형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작가의 정신세계를 보여준다. 그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를 성서와 문학 사이를, 그리고 전통과 혁신 사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제도권이 권위를 내세울 때, 예술적 직관을 교훈적 규범으로 대신하려 할 때, 권위의 이름으로 예술가를 억압하려 할 때, 그는 교회를 비롯한 모든 제도권과 맞서 싸웠다. 최후의 심판은 미켈란젤로의 이 같은 사상이 함축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걸작이다.
 

‘바로크 조각 寶庫’ 보르게세 미술관
베르니니 작품 가득… ‘예수회 성당’은 대표적 건축

 
사람들은 로마를 ‘영원의 도시’라 부른다. 로마인들로부터 시작된 이 도시의 영광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의미일까?

로마는 서구 역사의 살아있는 무대이자 역사적인 예술품들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도시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로마에 대한 믿음과 전설은 유효한 듯하다.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가 절정에 올려놓은 르네상스 이후 로마 예술이 다시 한번 번영한 것은 바로크 시대인 17세기였다. 바로크 예술은 한마디로 화려함의 절정이다. 대표적인 곳이 아마도 베르사유 궁전일 것이다. 하지만 그 바로크 예술이 처음선을 보인 곳은 로마였다. 당시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 교회는 종교개혁 이후 뼈를 깎는 내적 개혁을 거쳐 거듭났다. 그것이 예술로 표현된 것이 바로크 양식이다.

바로크 예술이 보여준 화려함은 승리한 가톨릭 교회의 자신감의 표현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예수회 성당은 바로크 예술이 첫 선을 보인 곳이다. 겉에서 보면 평범한 교회처럼 보이나 일단 안에 들어가면 화려함이 극에 달한다. 모든 건축 자재는 각양각색의 진귀한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천장을 올려다보면 천상이 그곳인 듯 구름 위에서 성인들과 예수,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수많은 천사들과 함께 보인다.

예수회 성당이 바로크 건축의 극치라면 바로크 조각의 진면목은 보르게세 미술관에서 즐길 수 있다. 이 미술관은 가히 조반니 베르니니의 미술관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이 조각가의 대표작들이 여러 점 소장되어 있다.

바람둥이 아폴로가 요정 다프네의 몸에 손을 대는 순간 다프네의 몸이 나무로 변해 버렸다는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한 ‘아폴로와 다프네’는 대리석 조각의 또 다른 지평을 연 걸작이다. 조각이 더 이상 땅을 굳게 디디고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공간을 날 듯 운동감이 가득하며, 손과 몸통이 나무줄기와 잎으로 변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한 이 작품은 이후 어떤 조각가도 다시는 재현하지 못한 정교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보르게세 미술관은 베르니니가 생존했던 17세기 최고의 예술 후원 가문이었던 추기경 시피오네 보르게세의 공원이자 별장이었다. 그곳은 티치아노, 카라바조, 라파엘로를 비롯하여 명성있는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가득 차 있다. 한 가문의 진귀한 소장품들이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으니 당시 예술에 대한 그들의 열정과 후원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후원 없이 예술은 탄생할 수 없다. 결점이 많은 이탈리아 사람들이지만 예술에 대한 안목과 열정만큼은 칭송받아 마땅할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인 바로크 시대의 불멸의 거장 카라바조의 작품은 산 루이지 프란체시 성당에서 볼 수 있다. 단 한점의 작품으로도 유럽의 미술관에서 특별전을 여는 이 작가의 작품이 이 교회에는 여러 점 있다. 그 밖에도 로마에는 수많은 미술관과 건축물들이 있다.

칼럼을 시작한지 일년이 지났다. 문화일보에 고정 지면을 할애받을 수 있었던 것이 무척 영광이었고, 글을 쓰는 매순간 행복했다. 이제 나의 부족한 칼럼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미술사를 전공한 필자에게 미술사가 아름다운 학문임을 다시금 느끼게 해준 소중한 기회였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독자께 감사드린다. 기꺼이 사진을 촬영해준 나의 친구이자 남편인 조각가 한진섭씨에게도 감사드린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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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 생사의 갈림길에 선 검투사들의 숨소리가…

로마 - 생사의 갈림길에 선 검투사들의 숨소리가… 국내외 여행정보 2008. 10. 5. 16:00

로마 - 생사의 갈림길에 선 검투사들의 숨소리가…  
 





 
서기 72년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네로의 궁전 터였던 늪지대에 세운 ‘콜로세움’은 로마에서 가장 큰 원형극장이다. 거대한 네로의 동상이 이곳에 있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현재는 그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콜로세움의 공식 명칭은 ‘플라비오 원형극장(Flavio Amphithetre)’이고, 둘레의 길이가 527m, 높이가 48m이며, 8년간의 건축기간을 통하여 아름다운 원형극장을 완성하였다는 것은 당시의 건축 기술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콜로세움의 1층 기둥양식은 전형적인 도리아식이고,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으로 그 아름다움이 다양하다. 4층으로 지어진 콜로세움에는 아치로 장식된 80여개가 넘는 문이 있어 5만 명이 동시에 입장 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황제가 드나드는 입구가 따로 있으며, 신분에 따라 자리도 구분되어 있다. 이곳에서 싸워야 했던 검투사들은 노예, 전쟁포로, 죄수 등이었고, 검투사들은 죽는 순간까지 오로지 싸움에 충실해야 했다. 검투사끼리의 싸움만이 아니라 다양한 맹수들과도 싸워야하는 검투사들의 피비린내 나는 잔인한 게임은 그것을 즐기려는 황제와 귀족들의 오락거리에 불과한 것이었다. 경기가 시작되고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는 순간에 승자는 멀리 중앙에 앉아있는 황제를 올려다본다. 황제의 엄지손가락이 내려가면 (It's thumb down) 죽이는 것이고, 황제의 엄지손가락이 올라가면(It's thumb up) 상대 검투사를 살리는 것이다. 검투사들의 목숨이 황제의 손가락 끝에 달려 있었다.

현재의 콜로세움은 지진으로 붕괴되어 그 당시의 모습을 완전하게 상상할 수는 없지만 당시에는 미로처럼 분할된 방들과 그 위에 지붕이 있었으며, 지하에는 검투사들의 대기실과 무기창고, 그리고 동물들의 우리가 있었다. 폐허가 되어 상상하기 힘든 콜로세움을 바라보며 영화 ‘글래디에이터’ 속으로 들어간다. 할리우드 골든 글로브 최우수 수상작이며, 영국 오렌지 브리티시 아카데미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작품이다.

경기장의 문이 열리고 용감한 검투사가 등장을 한다. 맹수가 달려들고 창과 칼이 부딪치는 콜로세움 중앙에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던 막시무스 장군이 검투사로 변신하여 황제에게 도전을 한다. 정의와 용기가 있고, 사랑과 슬픔이 분노와 복수로 연결되는 전율과 감동이 있는 작품이다.

콜로세움에서 나와 로마의 중심부로 들어서는 길목에 베네치아 광장이 있다. 베네치아 광장을 지나 그리스의 수학과 로마의 공학이 결합하여 건축의 기적을 이루었다는 ‘판테온 신전’을 찾았다. 어린 시절 미술책에서 보았던 사진 그대로 수수한 모습이다. 이집트 산 대리석으로 만든 거대한 통돌 기둥 사이를 지나 신전 안으로 들어가 둥근 아치형으로 된 내부를 보는 순간 판테온을 보고 건축의 기적이라 말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단조로운 둥근 원통 구조 위에 직경이 같은 반구를 뒤집어씌운 모양으로 신전은 가로와 높이가 똑같이 43.2m이고, 벽의 두께가 6.2m나 된다. 그만큼 튼튼하게 기초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 많은 세월을 지나면서 모든 풍파를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 달팽이 계단을 따라 꼭대기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밑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까마득하게 보인다.

베드로 성당을 설계하던 교황들은 성당의 둥근 지붕을 판테온 신전보다는 크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려고 온갖 건축가와 기술을 동원했지만 결국 판테온 신전보다 1.3m 짧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판테온 신전은 그만큼 수학적으로나 공학적으로 신비의 비밀을 지니고 있고 또 로마 건축 가운데 그 오랜 세월을 오로지 종교적 신전으로 변함없는 세월을 지켜왔다. 초기에는 모든 신을 섬기는 곳이었으나 나중에는 기독교 유일신만을 섬긴 신전이었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이 아이스크림을 먹던 장면으로 유명해진 ‘스페인 광장’에서 어린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있다. 그러나 이곳 ‘스페인 광장’에서는 원칙적으로 음식물을 먹지 못하게 금지되어 있어 경찰관들의 제재를 받는 곳이다.

18세기에는 화가들이 이곳에서 그림을 많이 그렸다. 풍경화도 그렸지만 특히 선남선녀들을 대상으로 한 인물화를 그렸는데 그 당시 화가의 모델이 되기 위하여 이곳에 많은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던 곳이기도 하다. ‘스페인 광장’이라 부르는 이유는 과거 교황청의 스페인 대사관이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로크 양식의 137개 계단 위에는 교회가 있다. 그래서 이 계단의 본래 이름은 ‘언덕위의 삼위일체 교회로 오르는 계단’ 이다.

영화 로마의 휴일 덕분에 세계적인 명소가 된 스페인 광장의 한 복판에 서서 세계에서 몰려온 많은 젊은이들의 활기찬 모습을 지켜보며, 분명 밝고 아름다운 미래의 세계를 기대해도 된다는 확신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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