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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성문화전] 性을 보는 백 가지 생각, 천 가지 자유

[세계성문화전] 性을 보는 백 가지 생각, 천 가지 자유 건강한 성생활 2008.11.01 10:23

[세계성문화전] 性을 보는 백 가지 생각, 천 가지 자유






전세계 인류의 공통된 본능으로만 인식되어 왔던 성, 그러나 결코 같을 수 없는 다양한 성문화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가 이번 <세계성문화전>에서 시도된다. 세계 약 60여 개국에서 직접 수집해온 전세계 성과 성문화 관련 수집품 1,000여 점을 5월 26일부터 7월 6일까지 여의도 63빌딩에서 전시하는 이번 <세계성문화전>은 전세계 성문화에 대한 소개를 통해 인류 역사 속에서 성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천 되어 왔는지, 또한 각 지역별로 어떻게 다른 문화로 발전되어 왔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연인과 함께 은밀한 성 탐험을 떠나볼까?

널찍한 전시관에 가득 메워진 각종 신기한 전시물들이 입구에서부터 시선을 빼앗기 충분하다. 그 어느 박물관이나 전시회에서도 볼 수 없는 '올 어바웃 성'이 여기 다 모여 있다. 우리 조상들이 성을 얼마나 적나라하게 표현했는지, 또 그것을 어떻게 예술로 승화했는지를 보는 것도 솔솔한 재미가 될 듯. 이 곳에는 깜찍한 섹스 관련 일러스트부터 얼굴이 화끈거리는 다양한 성기 모형까지 다양한 전시품들을 갖추고 있다.

 
눈으로만? No! 직접 느껴 보세요

은근 슬쩍 조각상들의 은밀한 부분(?)을 만져 보는 것 외에도 이 곳에서는 러브체어와 같이 특이한 모양을 한 의자에서부터 야시시한 의상을 입혀놓은 사람형체의 모형까지 촉감(?)으로 즐길 수 있는 전시품도 다양하게 마련되어 있다.

특히 성체위를 묘사한 탄트라 요가관에는 검은 커튼으로 쳐진 비밀스런 방으로 유도되어 마음껏 은밀한 체위를 감상할 수 있으니 연인들에게는 베스트 코스(?)인 셈. 다분히 재미요소 뿐 아니라 교육적인 요소들도 갖추고 있으니 올바른 성 지식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일 듯 하다. 특히 연인들에게는 할인 혜택도 적용한다고 하니 이 기회도 놓치지 말자.

이번 전시는 유럽 전시관, 아프리카 전시관, 아메리카 전시관, 아시아 전시관, 청소년 대상의 성 체험관 그리고 성인전용관람구역으로 나뉘며 각 관마다 관련된 회화, 사진, 조형물, 영상물, 도자기 등이 다채롭게 소개된다.
*6월 5일(토)에는 과학 강사 장하나 씨가 특별 강의를 가질 예정이다

 
성문화전을 통해 본 세계 각국의 재미있는 性

다산의 상징, 아프리카 요루바 부족의 겔레데 마스크
아프리카 각지에는 임신한 젊은 여인의 몸체를 본떠 만든 가면을 만들어 착용하는 부족들이 있다. 나이지리아의 요루바 부족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성인식 행사시 남자가 여인의 얼굴을 한 가면과 함께 몸체가면(겔레데 마스크)을 착용하고 출산의 고통을 표현하는 강렬한 춤을 춘다. 이 가면의 배를 만지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현대보다도 더 진보적이었던 고대 그리스의 성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행복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육체적 쾌락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문화 역시 즐거운 삶의 향유와 사랑의 기쁨에 대한 예찬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의 성은 이성애에서 동성애, 양성애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놀라운 것은 3가지 모두가 사회로부터 인정되었다는 것.

 
여성 억압의 상징, 유럽의 정조대



11세기말에서 13세기말 사이,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은 성지 팔레스티나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8회에 걸쳐 원정을 떠났다. 원정을 떠나기 전 그들은 아내의 정조를 걱정하여 아내가 바람을 피우지 못하는 장치로 정조대를 고안했다. 정조대는 열쇠 장치가 달린 가리개 모양으로 열쇠는 가까운 친구나 친지에게 맡겼는데 믿는 도끼에게 발등을 찍히는 경우도 많이 발생했다고 한다. 가장 큰 문제는 위생이었다. 소변은 해결해도 대변의 경우 오물이 남을 수밖에 없어, 오물 쌓인 정조대 때문에 성벽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는 귀부인들이 속출하기도 했단다.

 
발길이 10Cm에 도전! 중국 여인의 전족



북송시대에 개발된 전족은 여자들의 도망 방지라는 목적보다는 성적인 쾌락에 더 큰 목적이 있었다. 전족의 꺾어진 발가락 사이나 발바닥 사이의 깊은 구멍 속에 건포도 등을 넣고 혀로 빼먹으며 성적흥분을 유발시키는 전희, 여성의 발을 가슴으로 강하게 껴안는 것, 여성의 발을 두 손으로 쥐는 것 등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다양한 규방비기가 전족에 의해서 48종이나 개발되었으며 새로운 성의 세계가 창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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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여행] 관광수입 위해 모든 자원 동원! - 관광객은 봉이다.

[중국여행] 관광수입 위해 모든 자원 동원! - 관광객은 봉이다.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28 15:39

[중국여행] 관광수입 위해 모든 자원 동원! - 관광객은 봉이다.

 

 


중국(장가계) 관광지를 구경하면서 가는 곳마다 보여 지는 풍경은 때로는 새롭고 때로는 친숙한 이미지로 재미있게 느껴진다. 관광객들을 상대로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돈을 쓰게 만든다는 것이다.

때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호객(현지 가이드들은 물건을 팔거나 말을 걸어오는 현지인들에게 가능하면 대꾸를 하지 않도록 미리 귀 뜸을 한다.)이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이런 것 또한 하나의 관광지 풍경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것은 바로 상술일 것이다.

어디서 배웠는지 한국어로 하는 ‘아줌마, 천원, 싸요‘ 등의 말은 관광지에서 쉽게 들을 수 있으며, 식당에서는 다정하게 ’안녕하세요‘하는 말에 무심코 말을 걸어보면 전혀 한국말을 하지 못 한다.

더욱이 관광지에서는 관광객들이 반드시 상가를 통해 들어가고 나가도록 출입구에는 상가가 배치되어 있으며, 등산로 주변마다 물건을 파는 상가나 노점이 길목을 지키고 있다. 또 사진 찍기에 좋은 장소는 아예 사진을 찍어주고 돈을 받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중국 전통의상을 입고 있는 아가씨가 슬며시 다가와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고는 천원을 요구한다.

더군다나 단체관광객에게는 아예 전속 사진사(?)가 한사람 따라붙어 사진과 비디오를 찍어가지고 돌아올 때쯤에 사가도록 요구한다.

이미 친숙해진 이미지 때문에 나중에 거절하기 어렵게 만드는 고도의 상술이다.

또한 놀라운 것은 관광지에서 바로 어디를 가든 한국 돈으로 물건을 구입하고 계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굳이 중국돈을 환전하지 않고서 우리 돈을 사용함으로서 더 많은 사용을 유도한다. 하다못해 호텔의 팁도 한국 돈을 놓아도 된단다. 이렇게 함으로서 사고 싶지 않았던 물건들도 쉽게 손을 뻗게 만드는 것이 바로 중국의 관광지다.

우리의 경우 어느 지역에 가서 외국인들이 달러나 엔화 등을 내놓는 다면 쉽게 돈을 받는 곳이 어디 있는가? 대부분이 안 된 다고 말한다.

우리도 외국돈을 귀찮고 무서워하지 말고 쉽게 받고 물건을 팔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어느 지역을 여행하던 가장 아쉬운 것이 긴 저녁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 하는 것인데, 중국에는 어느 지역에 가도 비슷하기는 하지만 무엇이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 있다.

낮 시간에 충분히 피로하게 여기저기를 관람하고 나서는 느긋하게 보낼 수 있게 하는 것이 대표적인 서커스와 마사지, 야경 관람 등이다. 대부분 선택사양의 단체관광코스로 활용되지만 저녁식사 후 남는 시간을 매우 알차게 보낼 수 있게(?)만든다.

위의 상술들이 서민들의 생활고 적인 현장에서의 상품판매라면, 여행사가 끼워 판매하는 서너개의 의무쇼핑 코스는 방문한 가게에 기본 30분은 머물러 주어야 하기에 그동안 판매원들의 화려한 말솜씨에 넘어가(?) 구입하는 물건만 해도 경제효과는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어찌 되었던 이 모든 것은 지역경제에 주변사람들의 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많이 버는 것이 남는 것이라는 말은 틀린 것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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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한국 전통문화에 가장 매력 느껴

외국인, 한국 전통문화에 가장 매력 느껴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28 14:28

외국인, 한국 전통문화에 가장 매력 느껴

 


 

외국인들은 한국을 방문하기 전에 우리의 '전통문화'를 가장 매력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연구원(CICI)은 3일부터 19일까지 한국에 체류 중이거나 방문한 경험이 있는 외국인 여론 주도층 139명을 대상으로 한국 이미지와 세계 지역별로 이를 효과적으로 알리는 방안에 대해 설문 조사한 결과 이같이 나타났다고 23일 밝혔다.

설문 결과를 보면, '한국에 오기 전 한국의 어떤 점이 제일 매력적일 것이라 생각했는가'를 묻는 질문에 44.5%가 '전통 문화'를 꼽았다. 이어 27%가 '한국인'이라고 답했으며 첨단산업(11.5%), 한류 대중문화(5.2%) 순이었다.


'자국에 한국의 이미지로 가장 강하게 각인된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를 묻는 질문에는 응답자의 48.5%가 삼성, LG 등 '기업 브랜드'라고 응답했으며 26.5%가 '북한 문제'를 들었다.

CICI 대표를 맡고 있는 최정화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5년 전인 2003년 6월에 '외국인들이 본 한국의 이미지' 설문 결과에서 한국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로 '남북 분단'(72%)이 1위를 차지했었는데 순서가 5년 사이 뒤바뀐 점은 특기할 만하다"고 설명했다.

이번 조사에는 또 오감을 활용하는 것이 한국을 알리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것으로 파악됐다.

'한국을 알리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묻는 질문에 응답자 38%가 '한국 음식, 음악, 한복 패션쇼가 어우러진 행사'를 선택했으며 20.7%가 '한류 공연'이라고 답했다.

이는 한국 이미지를 각인시키기 위해서는 직접 보고, 듣고, 먹는 등 오감을 통해 느낄 수 있는 행사를 개최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고 최 대표는 설명했다.

지역별로 차별화된 한국 홍보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는 분석도 나왔다.

인근 국가인 일본과 중국인들은 '한국을 알리기에 지역별로 가장 효과가 클 것이라고 생각되는 분야'를 묻자 '영화나 드라마'를 가장 많이 꼽았으며, 동남 아시아인들은 '한국 음식'을 선택했다.

북미를 비롯해 중남미와 아프리카에서는 '정보기술(IT)'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으며, 유럽과 오세아니아에서는 각각 '영화'와 '한국음식'이 1위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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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기생과는 또 다른 日 게이샤의 세계

조선 기생과는 또 다른 日 게이샤의 세계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14 18:44

조선 기생과는 또 다른 日 게이샤의 세계
 
 


게이샤
하얀 얼굴과  화려한 치장.
그리고 다재다능한 기예와 친절함.

이번 교토여행에서 빠뜻한 일정을 쪼개 기온을 찾은 이유는 "게이샤"를 더 알고자 함이였답니다.
교토를 남북으로 흐르며 시내를 양분하고 있는 가모가와강, 강이라기보다는 청계천처럼 시내를 흐르는 소담한 넓이의  개천이지요.
가모가와 옆, 위치상으로  교토의 한복판쯤에 기온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기온의 하나미코지
좁다란 이면도로 사이에  낡은 2층짜리 목조 가옥이 빽빽이 들어서 있습니다.
집집마다 비밀스러운 것을 감추고 있는 듯 창문이 꼭 잠긴채 유리창 마저 커텐으로 드리워져 있어 밖에서는 도저히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없습니다.

어둠이 깔릴 무렵 고급 승용차 몇 대가 골목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옵니다.
검정 정장 차림의 나이 지긋한 신사들이 차에서 내려 "오차야"라고 불리는  빨간 주렴이 걸린  오랜 목조 건물 내부로 총총히 들어갑니다.
이제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두터운 커튼 뒤로 숨어 버릴 것입니다.

1751년 교토의 어느 유곽에서 처음 선을 보인 게이샤는
수백 년에 걸쳐 여성으로서 포괄적인 접대로 남자들을 사로잡았답니다.

기예와 예술을 기반으로 하는 "게이샤"는 당초 매춘을 전문으로 하는 "오이랑"과 차별되어 존재하다가 19세기 후반 신분제도의 철폐와 함께  상당히 복잡한 상황이 되였지요.

접대를 하는 예술가로 평가받는 게이샤는 고객과 잠을 자는 것이 일반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그렇기에 고객과 잠을 잔다고 해도 절대 돈을 받지 않는답니다.
고객은 일본 재계와 정계의 내노라 하는 실력자들이 대부분이였답니다.
그래서 게이샤와의 교분은 일본 남자들의 출세의 한 상징이기도 하였지요.

일본의 경제 기적이 시작되기 전까지 여성들은 주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이 길을 택했답니다.
나이 많은 게이샤들이 살아온 이야기는 구구절절한 사연이 많지요.
가난한 부모를 만나 남에게 팔리거나, 남편에게 버림받거나, 게이샤나 창녀의 딸로 태어난 경우가 대다수를 차지하지요.

하지만 이들은 출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 새로운 삶을 개척하거나 스스로 살아 있는 문화재가 되기 위해 노력해 왔답니다.
게이샤가 되면 개인의 신상에 관한 것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집니다. 과거를 묻지 않지요.이것은 게이샤의 긍지이기도 하답니다.

게이샤의 세계는 무척이나 일본적입니다.
지극히 감각적인 모습이지요.
비단처럼 부드러운 피부, 쌀겨로 만든 돗자라, 그리고 뜨거운 곡주와 정갈하게 차려진  진수성찬. 애달픈 현악기 소리와 최면을 거는 듯 일정한 박자로 연주되는 북소리.

남자들이  게이샤가 있는 밤의 세계에 빠져드는 것은  엄격한 통제와 무자비할 정도로 긴장의 연속에서의 탈출입니다. 냉철한 이들의 이성을 유혹하는 것은 알코올 이구요.

그들은 이곳에서 만큼은 마음껏 웃고, 떠들고, 진정으로 생각하는 것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지요. 게이샤는 그들 옆에서 교태를 부리거나 시중을 들고 부드럽게 에무하며 낮 동안의 피로를 잊게 해줍니다. 그자리에선는  손님인 남자에게 해가 되거나  부담이 가게하는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는답니다.

게이샤는  남자들의 사치품이자 사회적·경제적 능력을 증명해 주는 상징이 되었지요.

밤의 모임은 매우 자유롭게 진행되는데, 고객이 들어오면 게이샤는  형식적이면서도 정중한 절을 한 후, 옆에 앉아 연신 미소를 보내면서  손님의 식사시중을  들면서 술을 따르지요.

게이샤 한 명이 일어나 춤추기 시작합니다. 술이 적당히 돌고나면  손님들은 취기가 오르기 시작하고 얼굴이 붉어지거나 혀가 꼬부라지는 등 분위기가 질펀해집니다. 이 때 게이샤 한 명이 선정적일 정도로 빨간 체리의 꼭지를 입에 물고 있으면 손님을 유혹하기도 합니다.

한쪽 구석에는 나이 많은 게이샤가 사미센을 뜯으며  게이샤 노래를 부르지오.
흥분한 손님이 거칠 게 게이샤를 끌어안기도 하구요. 
정성들여 다듬은  머리를 뭉개고 기모노 속으로 거칠 게 손을 집어 넣기도 하지요. 하지만 게이샤는  그저  손님의 요구에 적당히 부응하며 손님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합니다.

청주, 맥주, 위스키가 흘러 넘치고 남자들은 낮 동안의 일을 모두 잊은 채 만족에 젖어 술에 취하는 것이지요.

술자리가 다 끝나고 손님이 자리를 뜰 때 게이샤는 밖으로 나가 비틀거리는 손님에게 『오오끼니(고맙습니다)』를 연발하며 공손하게 머리를 숙입니다.
손님을 태운 리무진이 떠나면 미소를 지으며 잘 가라는 눈짓을 보내고요.
그리고 나면 그들의 하루가 끝나는 것이지요.

계산은 며칠 후 우편으로 이루어지는데, 손님이 5명일 경우 100만엔(900여 만원) 정도가 됩니다.

게이샤는 철저하게  남자의 기호품이 되고자 노력합니다.
백지장처럼 하얗게 분을 바른 게이샤의 얼굴은 손님들이 자신의 욕망과 환상을 마음대로 그려 넣을 수 있는 캔버스와 같지요.
매혹적인 눈과 입술은 정욕의 상징처럼 보입니다.

게이샤는 아름답지만 슬프게도 이름이 없습니다.
게이샤가 되면 개인 신상에 관한 모든 것은 모조리 지워집니다.
새하얀 화장은  촛불 아래에서는 아주 신비스러운 매력을 발산합니다.
금빛으로 빛나는 얼굴은 고혹적이기까지 하지요.

게이샤에서 「게이」란 일본어로 「예술로 먹고 사는 사람」을 뜻합니다.

요즈음에는 게이샤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고자 하는 소녀들이 무척 줄어 들었답니다. 요즘은 게이샤에 대한  낭만적인 상상을 하거나 일본 전통에 대한 애정을 가진 이들이 주로 입문을 한답니다.

새하얀 얼굴, 새빨간 입술, 그리고 펄럭거리는 넓은 소매의 기모노를 입은 어린 소녀들에게서는 뭐라 말할 수 없는 매력이 느껴지지요.
골짜기처럼 굽이치는 아름다운 머리모양을 만들기 위해 게이샤는 고통스러운 대가를 치러야 한답니다.
어린 게이샤가 이런 머리를 몇 년 하고 나면 정수리 일부가  벗겨지게 된답니다.
마이꼬 사이에서 이것은 「영광의 상처」로 부르지요.

게이샤는 신체적인 고통에 민감해서는 안 된답니다.
그들은 몇 시간씩 꼼짝 않고 무릎을 꿇고 앉아 고통스러워도 절대 얼굴을 찡그려서는 안되고요.
꿇어앉는 자세는 전통을 잘 지키는 일본 여인들에게도 상당히 힘든 일이지요.
게이샤는 잠을 잘 때에도 공들여 장식한 머리를 흐트러뜨리지 않기 위해 밀알을 잔뜩 채우고 천으로 겉을 감싼 높은 목침을 베고 잡니다.

나이 든 게이샤는  옛날에 비하면 요즘의 훈련은 하나도 혹독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과거에는 스승이 마이꼬를 훈련시킬 때, 한겨울에 문 밖으로 쫓아내 손가락에 피가 날 때까지 사미센을 연주하게 하고 목소리가 가라앉을 때까지 노래를 부르도록 했다고 합니다.

과거에 비해 요즘 상당히 수련과정이 쉽다고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10명의 마이꼬 가운데 9명은 수련 과정을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고 있답니다.
수련 과정을 잘 견뎌 내야만 마이꼬에서 진정한 게이샤로 변신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진정한 게이샤가 되면 더 화려하고 세련된 기모노를 입고 화장도 한층 품위있게 합니다. 이때부터 목에는 매듭을 달고, 머리에 있던 「영광의 상처」도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게이샤의 움직임은 완전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멋을 풍깁니다.
그들은 다도(茶道)뿐만 아니라 전통 무용, 사미센 연주, 일본의 전통 가요, 그리고 서예를 연습 합니다.

대개 일본 남성들은 대화를 통해 게이샤의 노련미를 판단한답니다. 게이샤는 춤과 연주는 기본이며 화술도 뛰어나야 한다.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 스모, 연극 등 최신 화제는 물론 음담패설까지도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또한 게이샤에게는 술자리에서 보고 들은 모든것에 대하여 죽을때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것과 자신의 삶과 생활마저  아무리 친한이에게도 절대 털어놓지 않는 비밀엄수의 불문률이 있답니다.

대부분의 게이샤는 재력이 든든한 사람이 자신의 후원자가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교육도 시켜주고, 값비싼 기모노도 사주며, 해외 여행도 함께 가고,
집이나 가게 하나 정도는 기꺼이 마련해 줄 수 있기를 원하지요.
어쩌다가 고객의 아기를 낳게 되면 자신의 아기로 인정하고 양육비를 받기도 한답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운이 좋아 고객이 독신이라면 결혼에 성공하는 경우도 있지요.
요즘 게이샤의 평균 나이는 40~50세 이상입니다. 나이가 많은 게이샤는 게이샤 집을 직접 운영하며 춤과 음악을 지도하고 시(市)에서 실시하는 연례 공연에 참석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고령에도 두꺼운 옷을 입고 무거운 가발을 쓴 채 뜨거운 조명 아래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전통 가부끼(歌無伎)를 공연합니다.

세월은 흐르고 세상은 변하여.
이제 일본 남자들은 자신의 경제적·사회적 능력을 과시할 때 게이샤를 찾기 보다는 골프 클럽에 참가하거나  호텔의 파티장을 찾고 있습니다.
과거 명성을 떨쳤던 게이샤 촌은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목조건물의 색갈처럼  그 빛이 바래고 있답니다.

오락실, 영화관, 상점, 러브 호텔이 엄청나게 증가했고, 텔레비젼에서 매주 공공현히 공연되는 포르노와 현란한 바와 나이트 클럽이 게이샤의 영역을 잠식하고 있구요.
20세기초만 해도 약 8만명의 여성이 게이샤에 종사했지만, 이제는  수천명 정도의 게이샤가 활동하고 있을 뿐 이랍니다.

더 이상 게이샤의  전통적인 자부심은 쇄락되고 있고.새로운 게이샤의 수련과정은 지극히 짧아지고  형식적이며, 예술보다 돈을 더 추구하게 되었지요.
700년에 걸친 게이샤의 전통이 급격히 무너져 가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일본인은 반달 모양의 둥근 눈썹 등에 대해 세심한 정성을 쏟고, 더 완벽한 아름다움을 구현하기 위해 전 생애를 바쳤던 정통 게이샤를 구식이라고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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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의 유랑에세이 알타이를 찾아서 - 몽골(2)

이윤기의 유랑에세이 알타이를 찾아서 - 몽골(2)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14 15:53

이윤기의 유랑에세이 알타이를 찾아서 - 몽골(2)



몽골어에 녹아있는 우리말
 
몽골 땅을 떠돌다 보면, 혹은 몽골인들을 만나거나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자주 있다. 그들의 행동거지나 하는 말이 우리와 너무 흡사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낯선 땅 몽골에 와 있다는 것을 깜박 잊어버리게 될 정도다. 몽골인들의 천막집 게르 안에서 휘파람을 불어서는 안 된다. 문지방을 밟아서도 안 된다. 나에게 한문을 가르쳐 준 나의 할머니는 막둥이 손자인 나를 가장 아껴 주었다. 하지만 휘파람 불기를 좋아하던 내가 문지방을 밟고 휘파람을 불었을 때는 용서하는 법이 없었다.

연하의 몽골인들에게 술잔을 권하면 그들은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두 손으로 받아, 술 한 방울을 손가락에 찍어 ‘고수레’를 한 다음에야 마신다. 예의 바른 젊은이라면 자세를 옆으로 약간 틀기까지 한다. 술이 한 순배 갑신하게 돌면 함께 노래하는 것도 비슷하다.

한 주일 전, 몽골인 세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몽골에서 길라잡이 노릇을 해준 신혼부부와 중년의 사업가였다. 함께 마시고, ‘아버지는 말치기’를 다섯 번쯤 함께 불렀다. 몽골인들은 산솜다리(에델바이스)를 ‘차간 오르’라고 부른다. ‘흰 산’이라는 뜻이란다. 나의 상상력은 근거 없이 튄다. ‘차간’은 우리말 ‘차갑다’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차가운 눈은 흰색이니까, ‘차갑다’와 ‘희다’를 동일시하는 것은 아닐까? ‘오르’는 산을 뜻하는 제주도 말 ‘오름’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몽골인들은 설날을 ‘차간 사르’라고 부른다. ‘흰날’(白日)이라는 뜻이란다. ‘설날’은 ‘낯선 날’이라는 해석이 있다. 아무 것도 기록되지 않은 ‘백지 같이 흰 날’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흰 날’과 무관할 수 없다. ‘모르’, ‘조금’, ‘바룬’같은 몽골말은 통역 없이도 ‘말’, ‘조금’, ‘바른’으로 새겨들을 수 있다. ‘몽골풍(風)’, ‘고려양(高麗樣)’이라는 개념으로 이것을 설명할 수도 있기는 하겠다.

고려와 몽골(원나라)은 고려 원종 때부터 약 100년 동안 꽤 우호적으로 교류했다. 당시 고려의 중상류층은 몽골풍습을 즐겨 받아들였는데 이것이 바로 몽골풍이다. 여자가 족두리 쓰고, 옷고름에 장도(粧刀) 매달고, 신부가 연지 찍고, 남자가 마고자 입는 것은 이 때 들어온 풍속이다. 왕의 진지를 ‘수라’라고 하는 것도, ‘장사치’, ‘시정아치’처럼 말끝에 ‘치’를 붙임으로써 대상을 비하하는 것도 몽골풍이라고 한다.

고려에서 몽골로 들어간 풍습도 있다. 몽골에서 쓰이는 ‘고려 만두’, ‘고려 떡’, 검은 빛이 도는, 푸른 기물(器物)에 붙어 있는 ‘고려 아청(鴉靑)’이라는 이름은 고려 풍습의 잔재, 즉 ‘고려양’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몽골에서 내가 체험한 ‘이상한 낯익음’은 몽골풍과 고려양, 이 두 개념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본의 역사 소설가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는 ‘국사(國師)’로 불리기까지 하던 인물이다. 그의 장편소설 ‘몽골의 초원’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검은’은 몽골어로 ‘카르(kar)’다. 몽골 고어와 같은 어족에 속하는 터키어에서도 ‘카라(kara)’는 ‘흑(黑)’을 뜻한다. 일본어 ‘쿠로(黑)’도 우연이 아닐 것이라고 나는 학생시절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도 ‘쿠로’라고 하는, 일본어로서는 너무 강렬한 발음을 몇 번이고 반복하면, 이윽고 콧구멍에 유라시아 냄새가 퍼져간다.―

대학시절 몽골어를 전공한 작가의 말 치고는 엄살이 심하다. 몽골어 ‘카르(하르)’가 터키어 ‘카라’, 일본어 ‘쿠로’와 같은 말이라는 것을 몽골어를 전공한 그가 몰랐을 리 없다. ‘가라말’은 ‘검은 말(黑馬)’을 지칭하는, 지금도 제주도에서 쓰이는, 좁게는 몽골말, 넓게는 알타이 말이다. ‘콧구멍에 유라시아 냄새가 퍼져나간다’는 대목도 조금 이상하다. ‘유라시아’는 지리개념 아닌가. 한국과 일본이 여기에 속하기는 한다. 하지만 한 마디 말이 불러일으키고 퍼져나가게 하는 것은 지리개념인 ‘유라시아’ 냄새가 아니라 언어개념인 ‘알타이’ 냄새여야 할 것 같다. 알타이말을 쓰는 몽골의 민담을 읽으면 정말 알타이 냄새가 콧구멍 속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다.

‘몽골 민간 신화’(체렌소드놈 지음, 이평래 역, 대원사)에 따르면, 태초에 이 세상에는 공기와 물, 이 두 가지밖에 없었다. 오치르바니 보르항(금강불)은 차강 슈헤르트(흰 일산을 가진 이)에게, 물밑으로 들어가 큰 거북이를 끌고 올라와 뒤집어 놓으라고 한다. 슈헤르트가 그렇게 하자 오치르바니 보르항은 거북이의 배 위에 앉는다. 그가 앉아 있을 동안 슈헤르트가 흙을 집어와 올려놓자 거북이의 배 위에 대지가 생겨난다. 대지가 무엇인가? 가장 튼튼한 바탕으로 불리는 반석(盤石)조차 대지 위에 놓인다. 신화의 진술은 진지한 가운데 우스꽝스럽다. 하지만 민담의 진술은 우스꽝스러운 가운데 진지하다.

몽골 민담 한 토막을 읽어 보자. ‘재미있는 몽골 민담’(이정희 역, 백산자료원)에 나오는 이야기를 줄였다. 내용은 이렇다. 수거북이가 산에서 원숭이 한 마리를 사귀어 함께 놀다가 집으로 돌아온다. 암거북이는 지아비 거북이가, 필시 암원숭이와 재미를 보고 왔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이런 말을 한다.

“내가 오늘 몸이 아파요.”

“왜? 어떻게 아파? 무얼 먹으면 나을까?”

“암원숭이의 염통을 먹으면 나을 거예요.”

수거북이는 암원숭이를 찾아가, 그 동안 친구가 된 만큼 저녁식사에 초대하고 싶다고 말한다. 암원숭이가, 가고 싶기는 하지만 헤엄을 칠 줄 모른다고 하자, 거북이는 자기가 헤엄을 잘 치는 만큼 등에 올라타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이윽고 거북이 집에 이르자 수거북이는 안면을 싹 바꾸고 실토한다.

“우리 집사람이 아픈데 너의 염통을 먹어야 낫는다고 하니 네 염통을 꺼내어야겠다.”

그러자 암원숭이가 정색을 하고 응수한다.

“어머, 그럼 진작 말하지 그랬니. 우리 원숭이들은 염통을 언제나 나무 꼭대기에 걸어둔단다. 빨리 돌아가서 내 염통을 가지고 오자.”

그래서 둘은 다시 뭍으로 돌아온다. 원숭이는 재빨리 나무 꼭대기로 톡 튀어 올라가, 똥 덩어리를 하나 거북이에게 던지면서 소리친다.

“네 마누라 보고 이 염통이나 먹으라고 해”

나는 암거북이가, 암원숭이의 염통을 먹으면 나을 거예요, 하는 대목에서 이야기의 결말을 짐작했다. 고전소설 ‘별주부전’을 읽고, 판소리 ‘별주부전’을 읽은 보람일 것이다. 옛이야기의 힘이다. 옛이야기는, 우리와 알타이 사이의, 오래 끊어져 있던 오솔길을 번번이, 한 순간에 이어놓고 만다.
 

영웅 칭기즈칸 메시아로 돌아오다
 
몽골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즐기는 농담이 하나 있다. 몽골의 수도 이름은, 다녀오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울란바토르’, 다녀온 사람들에게는 ‘울란바타르’라는 농담이 그것이다.

몽골인들 가운데 저희 나라 수도를 ‘울란바토르’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정확하게 ‘울란바타르(Ulaan Baatar)’다. ‘울란바타르’는 ‘붉은 전사(戰士)’라는 뜻이란다. 울란바타르의 정부 종합청사 앞에는, 몽골에 간 관광객이라면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거쳐 가는 유명한 광장이 있다. ‘수흐 바타르’ 광장이다. ‘도끼 전사’의 광장이라는 뜻이다. 이 광장에 기마 석상으로 서 있는 수흐 바타르는 1923년 겨우 서른살에 세상을 떠났는데도 몽골에서는 ‘혁명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1922년에 몽골 인민군 총사령관이 되어 인민정부를 수립하고 스스로 국방장관 자리에 올랐다가 꽃다운 서른살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불세출의 영웅이다. 이 영웅을 몽골인들은 반드시 ‘수흐 바타르’라고 부른다. 우리가 몽골의 수도를 ‘울란바토르’라고 부르는 것은 영어 표기 ‘울란바토르(Ulan Bator)’에 버릇 들어 있기 때문이다.

울란바타르는 ‘붉은전사’의미

참 이상한 일도 다 있다. 몽골에 대한 나의 간접 체험은 미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나는 미국이라는 나라, 영어라는 언어를 통해 몽골과 칭기즈칸을 여러 차례 간접 체험했다. 어린 시절에 테무진(칭기즈칸) 이야기를 읽었다.

테무진이 부족을 통일하고 ‘칭기즈칸’ 자리에 오르는 시점까지만 정리한 이야기였다. 청소년 시절에는 영어로 된 ‘칭기즈칸’을 읽었다. 테무진은 칭기즈칸 자리에 오르고부터 7년 동안이나 유럽을 휩쓸었는데도 그 책에는 그 이야기가 실려 있지 않았다. 칭기즈칸의 모습을 이미지로 처음 본 것은 미국 영화 ‘칭기즈칸’에서였다.

1956년 미국에서 제작된 ‘정복자(The conqueror)’였다. 90년대 초 폐암으로 사망한, 미국 카우보이의 상징 같은 배우 존 웨인이 테무진을, ‘삼손과 데릴라’에서 데릴라 역을 맡았을 정도로 요염한 ‘섹시 스타’ 스잔 헤이워드가 타타르 공주 보르테를 연기한 영화였다. 전형적인 미국 ‘수컷’ 존 웨인의 테무진 연기는 어린 눈에도 영 안 어울렸다. 이 영화 역시, 테무진이 칭기즈칸의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이야기만 다룰 뿐 칭기즈칸의 유럽 정복 이야기는 다루고 있지 않다.

1992년 미국의 동부지역을 여행했다. 워싱턴DC에 있는 스미스소니언 자연사박물관에서는 거대한 공룡의 화석 앞에 아들딸을 세우고 여러 장의 사진을 찍기도 했다. 복원된 공룡 화석 앞에서, 미국은 참 굉장한 나라로구나, 이렇게만 여겼을 뿐, 그 화석의 고향이 어디인지 의심해보지 않았으니 한심하다. 화석의 고향은 몽골이었다. 1924년 미국은 신생국 몽골을 꼬드겨 컨테이너 20개 분량의 공룡 화석을 헐값에 사들여갔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2002년 7월 몽골의 유서 깊은 ‘울란바타르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아침에는 조용했는데, 저녁에는 분위기가 그렇게 어수선할 수 없었다. 색안경 낀 검은 양복차림의 젊은 미국인들이 들락거리고 있어서 까닭을 물어보았다. 영화 ‘칭기즈칸’을 새로 찍기 위해 미국에서 온, 멋대가리 없는 배우 스티븐 시걸이 그 호텔에 들었다고 했다. 뒷날 그 영화 제작이 취소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나보다 더 반긴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1991년 몽골이 러시아와 결별하고 사회주의를 포기한다는 소식도 나는 미국에서 들었다. 사회주의 몽골에서 민족 영웅 칭기즈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은 체제에 대한 도전이나 다름 없는 금기였다. 상대적 강세를 보이기 마련인 민족 영웅 이미지가 상대적 열세일 수 있는 외래 영웅인 레닌 이미지를 약화시킬 터이기 때문이었다.

사회주의 몽골에서 칭기즈칸 정신의 부활을 암암리에 역설했다가 행방불명이 된 몽골인이 여럿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사회주의가 떠난 나라 몽골에서 신화와 중세 종교가 부활하고 칭기즈칸 이미지가 화산처럼 용출할 것임을 예감했다. 몽골인들에게 사회주의 신화를 대신할 메시아가 반드시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1995년 미국의 워싱턴포스트는 서기 1000년부터 당시인 1995년까지 세계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기념비적 인물을 선정한 적이 있다. 나폴레옹이 아니었다. 히틀러도 아니었다. 바로 칭기즈칸이었다. 유럽 문화와 역사가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유럽의 악몽 칭기즈칸이었다. 언젠가는 황인종이 또 한차례 백인종을 짓밟을 것이라는 유럽인들의 불길한 예감 ‘황화(黃禍·yellow peril)론’의 진원지였다.

‘유목민 이야기’(김종래 지음·자우출판)에 따르면, 나폴레옹이 정복한 땅의 넓이는 115만(한반도는 약 23만) ㎢, 히틀러가 지배한 면적은, 나폴레옹에 견주어 2배 가까이 되는 219만㎢다. 기원전 4세기에 이 두 사람이 차지했던 땅의 면적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땅을 차지한 정복자가 있으니 그가 바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다.

칭기즈칸이 정복한 땅의 넓이는 얼마나 될까? 나폴레옹과 히틀러와 알렉산드로스가 차지했던 땅을 모두 합친 것보다 훨씬 넓은 777만㎢다. 하지만 정복한 땅의 넓이는 정복자의 크기가 아니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한 민족의 무의식에서 그 민족의 영웅이 차지하는 자리다.

칭기즈칸 유럽등 777만㎢ 정복!

중국 여행이나 터키 여행은 긴장의 연속이다. 딱정벌레 같이 극성스럽게 따라붙는 장사치들과 터무니없는 바가지 요금 때문이다. 중국이나 터키가 그렇듯이 몽골 역시 잘 사는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몽골 여행에 그런 긴장은 없다. 몽골에도 장사치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강매하려 들지 않는다. 어찌나 의연한지 약간 무례해 보일 정도다. 바가지 씌우는 일은 전무하다고 보아도 좋다. 2002년 6월, 숙박시설이 있을 리 없는 초원 지대에서, 우리 일행 다섯 사람은 유목민의 게르를 빌려 하룻밤을 지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날 저녁과 다음날 아침까지 그 게르에서 먹었다. 사례비는 일금 5000투그릭, 우리 돈 5000원이다. 1만원을 주자고 내가 제안했다. 몽골인 안내자가 내게 말했다.

“그건 몽골인에 대한, 칭기즈칸에 대한 실례죠.”

〈잘못 쓴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바로잡는다. 9월30일자 이 지면에, 설날을 일컫는 몽골말 ‘차간 사르’는 ‘흰날(白日)’이라는 뜻이란다, 이렇게 잘못 썼다. ‘흰날(白日)’이 아니라 ‘흰달(白月)’이라고 이영산(출판사 꿈엔들 대표)씨가 지적해 주었다.
 

초원, 걸으면 길이 된다
 
나는 소설가다. 이야기를 짓는 사람이다. 업(業)을 짓는 사람이다. 업 짓기를 직업으로 가진 사람, 그것이 바로 소설가다. 나는 슬픈 이야기를 지음으로써 슬픈 업을 짓는 사람인 것 같다. 나는 노래 부르기를 즐긴다. 그러나 노래 부르기는 나의 직업이 아니다. 다만 즐길 뿐이다. 나는 어느 곳에서든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한다. 심지어 초상집에서도 슬픈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초상집에서의 노래 부르기는 우리의 통념이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대가수 조영남 앞에서도 겁 없이 노래를 부른다. 조영남으로부터 잘 부른다는 소리를 들은 적은 없다. 다만 나의 노래를 불렀을 뿐이다. 나는 큰 소리꾼 장사익 앞에서도 겁 없이 노래를 부른다. 장사익의 노래가 아닌, 나의 노래를 부른다. 장사익으로부터는 잘 부른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심지어, 언제 날 잡아 녹음 한번 하자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내가 대가수와 큰 소리꾼 앞에서 부르는 노래는 대개 슬픈 노래다. 내가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는 ‘세 동무’, ‘봄날은 간다’ 같은 슬픈 노래들이다. 소월(素月)의 시에다 곡을 붙인 ‘옛 이야기’는 내가 가장 즐겨 부르는, 슬픈 노래 중의 하나다.


고요하고 어두운 밤이 오며는

어스레한 등불에 밤이 되며는

외로움에 아픔에 다만 혼자서

하염없는 눈물에 저는 웁니다


제 한 몸도 예전에 눈물 모르고

조그마한 세상을 보냈습니다

그 때는 지난날의 옛이야기도

아무 설움 모르고 외웠습니다

 

그런데 우리 님이 가신 뒤에는

아주 저를 버리고 가신 뒤에는

전날에 제게 있던 모든 것들이

가지가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한때에 외워 두었던

옛이야기 뿐만은 남았습니다

나날이 짙어가는 옛이야기는

부질없이 제 몸을 울려줍니다

 

나는 2절의 노랫말을 가장 좋아한다. ‘눈물 모르고’ 살아낸 세상은 ‘조그만 세상’이었단다. 그렇다면 눈물 알고 사는 세상, 슬픔 알고 사는 세상은 큰 세상이겠다. 나는 4절의 노랫말도 좋아한다. ‘우리 님’ 가신 뒤로, ‘제게 있던 모든 것들이 없어지고 말았’단다. 그런데 ‘그 한때에 외워 두었던 옛이야기 뿐만은 남’아 ‘나날이 짙어’ 간단다. 그렇게 짙어가는 옛이야기들이 ‘제 몸을 울려’ 준단다. 옛이야기가 삶의 슬픈 동인(動因)이 되고 있단다.

슬픔없이 아름다운 노래는 빚어지지 않는다. 지극한 슬픔을 노래할 수 있도록, 소리꾼이 되려는 딸을 장님으로 만들어 버리는 저 ‘서편제’의 실패한 판소리꾼 유동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와 고은의 소설 ‘어린 나그네’에 나오는, 지극한 슬픔을 절창의 씨앗으로 삼는다는 이 모티프, 벌써 아득한 옛날의 힌두 설화에 나오는 슬픈 풍경화이기도 하다.

슬픈 노래를 잘 부르기 위해서는 심안(心眼)을 얻어야 한다. 심안을 얻자면 육안(肉眼)을 잃어야 하는가? 고대 그리스의 절창(絶唱) 호메로스도 육안을 잃은 뒤에야 심안을 얻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우스 이야기’에 등장하는 음유시인 데모도코스도 앞을 보지 못한다.

알타이 말을 쓰는 몽골인들에게 처음으로 슬픈 이야기, 슬픈 노래를 들려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이야기’의 탄생 설화가 참 놀랍다.

아득한 옛날 몽골에 몹쓸 전염병이 창궐했다. 많은 사람들이 겁에 질려, 목숨을 부지하고자, 병든 식구들을 버리고 살던 땅을 떠났다. 이렇게 버려진 병자 가운데 ‘타르바’라는 열 다섯살배기 소년이 있었다. 병세가 위중했던 타르바의 영혼은 자신이 죽은 것으로 여기고 육신을 떠났다.

그런데 저승의 염라대왕은 아직 저승에 올 때가 되지 않았는데 어째서 육신을 떠나왔느냐고 물었다. 타르바의 영혼은, 자신이 죽은 줄 알고 육신을 떠나왔노라고 대답했다. 염라대왕은, 저승을 떠나 이승의 육신으로 되돌아가되, 저승에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하나 골라서 가지고 가라고 했다. 재물, 행운, 기쁨, 만족, 슬픔, 걱정, 재미, 웃음, 놀이, 이야기, 춤 등등, 이승에는 없는 것들이 많이 있었다. 타르바의 영혼은 ‘이야기’를 가지고 돌아가기로 했다. 염라대왕이 기꺼이 그것을 허락했다.

타르바의 영혼이 ‘이야기’를 가지고 이승으로 돌아와, 잠시 버리고 떠났던 육신에 다시 깃들고자 했다./그런데 육신을 보니, 눈알이 없었다. 타르바가 저승 가느라고 떠나 있을 동안 까마귀가 육신의 눈알을 뽑아 먹어 버린 것이다. 타르바의 영혼은 망설였다. 제 육신에 다시 깃들자면 앞을 보지 못하는 채 여생을 살아야 한다./그렇다고 해서 염라대왕의 섭리를 거절할 수도 없는 일이다.

타르바는 결국 그 육신에 다시 깃들었다. 이렇게 육신에 다시 깃든 타르바는 예전의 타르바가 아니었다. ‘이야기’는 그가 육안 대신에 얻은 심안이었다./이 심안 덕분에 그는 세상의 이치를 두루 알 수 있었고, 이로써 장차 일어날 일을 미리 헤아릴 수도 있었다. 몽골인들이 이야기를 잘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타르바 덕분이란다. 몽골에는 이야기가 흔하다. 세계의 많은 학자는 오늘날에도 몽골의 소수민족을 찾아다니며 옛이야기를 모은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몽골인들이 이야기를 잘 하고 좋아하는 것은 타르바 덕분이 아닌 것 같다. 오랜 세월, 문자와 인연이 적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몽골인들에게, ‘문자와의 인연 없음’은 ‘심안을 얻기 위해 잃어야 하는 육안’ 같은 것인가?

몽골의 초원에는 길이 없다. 다르게 말하면 길 아닌 데가 없다. 무수한 길 가운데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길이 마침내 몽골의 길이 된다. 몽골 ‘이야기’의 운명도 그런 것 같다. 무수한 이야기 중에서 가장 많이, 사람들 입에 오르는 것만이 몽골 이야기로 남는 것 같다. 나는 신화나 전설을 그렇게 이해한다.
 

女根 산세에 男根石 성(性)스러운 풍경, 성(聖)스러운 풍속.
 

따르릉. 그 소리에 잠을 깼다. ‘전화가 왔구나, 모닝콜이구나’싶었다. 수화기를 들었다. 말이 아주 빨랐다. 퉁명스럽기가 언 코 쥐어박는 것 같았다.

“kebarakadeye.”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했다. 엄살이 아니다. 호들갑도 아니다.

나는 여행을 자주, 그리고 많이 다닌다. 여행지에서 잠자리에 들 때는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술을 마신다. 그래서 아침까지 취기가 남아 있는 것이 보통이다. 잠에서 깨어나면 나는 묻는다.

여기는 어디인가? 미국인가, 캐나다인가… 그리스인가, 이탈리아인가… 중국인가, 몽골인가… 내가 듣고 있는 이 말은 어느 나라 말인가? 그런데 내가 아침 잠에서 깨어난 곳은 우리나라다. 뿐만 아니다. 나의 고향 경상북도다. 그런데도 나는 “뭐라고요” 하고 되물었다.

“깨바라 카데예.”

그제서야 알아들을 수 있었다. ‘깨우라고 하던데요’이런 뜻이다. 누군가가 호텔 주인, 혹은 호텔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아침잠이 많은 나를 깨워주라고 했던 모양이다. 나는 낯선 것의 낯을 익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나는 낯익은 것을 낯설게 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나는 어느 나라를 여행하면, 이 나라는 우리나라와 얼마나 다른가, 이런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이 나라는 우리나라와 얼마나 같은가, 하고 묻기를 좋아한다.

그러다 내 고향 사투리 앞에서 이런 망신을 당한 것이다. 한반도의 꼬리에 해당하는 호미곶(虎尾岬)의 한 ‘파크’에서 당한 망신이다. 호미곶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설화 주인공 ‘연오랑과 세오녀’의 동상이 조성되어 있는 곳, 이육사의 시비(詩碑)가 서 있는 곳이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아차 하는 순간에 사람을 설화의 세계로, 시의 세계로 편입시켜 버리는 곳이다. 나는 그런 세계로 ‘자아서’발 들여놓기를 좋아한다. 나는 그런 세계에 편입되는 것을 좋아한다.

10월 11일, 경상북도 포항시 칠포리의 ‘칠포리 암각화’를 보러 가는 날이었다. 나는 호미곶에서 칠포리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버스를 탄 채 주위의 산세를 둘러보다가, ‘이제 거의 다 왔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산세가 심상치 않았다. 반듯하게 드러누운 여성의 사타구니 같았다. 경주 근방에 있는 여근곡(女根谷)보다 훨씬 더 그랬다. 산 이름이 ‘곤륜산’이라고 했다. ‘이름 한번 거창하구나’ 싶었다. ‘곤륜산(쿨론산)’이라면 중국 신화에 나오는, 마시면 영생불사하는 물이 흐르는 곳, 중국의 태모여신(太母女神)이라고 할 수 있는 서왕모(西王母)가 살고 있다는 산 아닌가?

나의 짐작은 빗나가지 않았다. 거의 다 온 것이 아니었다. 내가 쳐다보고 ‘거진 다 왔겠구나’ 하고 생각했던 산이 바로 곤륜산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한 300m 올라가니 암각화가 있었다. 길이 약 3m, 높이 약 2m 되는 바위에 새겨진 도형. 그 유명한 칠포리 암각화였다. 암각화를 설명해준 송재학 시인의 말을 바로 옮긴다.

“……여기의 이 그림이 여성신적인 지모신상(地母神像)입니다. 여기 이 계곡이 여성의 어느 부분과 유사하다고 봐야겠죠. 여기서 늘 물이 흘렀는데, 물이라는 것은 생명의 재생 및 탄생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한 부분에다 그림을 함께 새김으로써 여성 신에 대한 믿음을 드높이지 않았겠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암각화가 숨겨져 있는 곤륜산의 형태가 여성의 신체를 닮은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약 3000년 전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단다. 몽골 북부 호이트 쳉헤린 동굴 벽화를 보고 온 직후였다. 호이트 쳉헤린 동굴 벽화는 약 30만~50만년 전에 조성된 것이라고 했다. 나는 송재학 시인에게 “조성 연대가 그것밖에 안 되어요? 좀 더 올려 잡을 수 없나요”하고 물었다. 송시인은 웃으면서 “올려 잡아서 뭐 합니꺼”하고 반문했다.

나는 암각화 그 자체에 대해서는 쓸 것이 없다. 내가 잘 아는 분야도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는 쓸 수 있다. 곤륜산은 지금 보아도 ‘야하게’생긴 산이다. 암벽화 조성의 추정 연도가 옳다면 3000년 전에도 곤륜산은 야하게 생긴 산이었을 것 같다. 그 야하게 생긴 산, 성(性)스럽게 생긴 산 기슭의 암벽화는 고대인들의 ‘성소(聖所)’였던 것 같다.

암각화가 새겨진 자리는 고대인들이 풍요와 다산을 빌던 곳이었던 것 같다. 나는 성(性)스러운 풍경이 성(聖)스러운 풍속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성(聖)스러운 풍경을 고대 종교라고 바꿔 부르기를 좋아한다. 남근석(男根石) 앞에서 아들 낳기를 비는 여인을 상상해 보라. 힌두교에서 링감(男根)과 요니(女根)는 가장 성스러운 것들 중의 하나다. 칠포리 암각화는 노천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우리에게 3000년전 문화 유산이 어디 흔한가? 방치되어서는 안 될 것 같다.

2002년 7월 몽골 제국의 첫 수도가 있던 하라호룸에 다녀왔다. 하라호룸으로 들어가는데 산세가 심상치 않았다. 벌거벗고 누워 있는 여인의 사타구니 같았다. ‘산세가 저러면 반드시 저 산세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을 거라… 몽골제국이 이런 산 밑의 벌판을 첫 수도로 삼은 것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 이런 생각이 들어 몽골인 친구에게 물어 보았다. 과연 ‘이야기’가 있었다. 이야기는 나의 종교이기도 하다.

하라호룸의 옛 황궁 만안궁(萬安宮),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황궁 터에는 16세기에 세워진 라마 불교 사원 ‘에르덴 조’가 있다. 이 사원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옛 하라호룸 성벽의 석재로 세웠다는 100여개의 스투파(불탑)다.

100여개를 일일이 셀 필요는 없다. 108개다. 언필칭 백팔번뇌다. 108은 몽골인들이 좋아하는 수이기도 하다. 라마 사원 앞에서 앞산을 바라보는데 가슴이 뭉클해지는 기분이었다. 민둥산 모양이 영락없이, 반듯이 누워 있는 여인의 샅이었다. 몽골인 친구가 히죽히죽 웃으면서 설명했다.

“16세기 적 일이라던가요? 스님들이라면 도를 닦고 공부를 해야 하는데 이 에르덴 조의 젊은 라마교 스님들은 도통 마음잡고 공부할 생각을 하지 않더래요. 저 산세 좀 보세요. 가슴 두근거리죠? 저도 볼 때마나 가슴이 두근거려요. 스님들 중에 중국 풍수에 밝은 분이 있었나 봐요.

풍수에 밝은 분은 에르덴 조의 연세 많은 스님들에게 ‘저 산의 음기(陰氣)를 누르려면 강력한 양기(陽氣)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충고했나 봐요. 어떻게? ‘돌로써 굵은 남근(男根)을 깎아 저 산쪽으로 눕혀 놓으면 음기가 잡힌다’ 이렇게 대답했나 봐요. 실제로 저 산 밑에는 거대한 남근석이 누워 있어요. 남근석을 누인 뒤로는 스님들이 마음 잡고 도도 잘 닦더라지요. 아무래도 누가 만든 이야기 같아요. 그래서 저는 안 믿어요.”
 

제비 대신 황금매가 물어다준 박씨
 
나는 열 살 될 때까지 어머니보다는 할머니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잠도 할머니 방에서 잤다. 내가 일곱 남매 중 막내여서 그랬을 것이다. 할머니는 막내 손자를 돌보아줌으로써 홀어머니의 일손을 덜어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런데 할머니와 보낸 유년이 내게는 축복이었다. 할머니는 이야기꾼이었다.

할머니는 글에 밝았다. 그래서 할머니 거처하던 사랑방에는 마을 사람들이 자주 그리고 많이 모였다. 할머니는 글 모르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격식 따져가면서 써야 하는 편지를 대신 써주기도 했고, 옛 이야기 책을 송창(誦唱) 가락에 맞추어 읽어주기도 했다. 나는 턱을 괴고 엎드린 채 할머니의 이야기를 내 것으로 따 담았다.

할머니는 내게, ‘이야기’의 그릇이 될 한글과 천자문을 가르쳐준 분이기도 하다. 할머니는, “옛 이야기 너무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는데…”하면서도 내게 옛 이야기 들려주기를 좋아했다. ‘너도 장차 이런 사람이 되거라’ 이런 생각에서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던 것일까? 우리나라와 중국의 옛 영웅들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할머니 이야기를 중간에 자르고 들어가, “그 다음은 이렇게, 저렇게 되는 거 아니에요?” 이렇게 물음으로써, 말하자면 이야기 줄거리의 다음 마디를 미리 아는 척함으로써 할머니를 조금 놀라게 했던 것 같다.

가령 할머니가, “그런데 말이다, 어느 날 어머니 아버지가 아들에게 느닷없이 절을 하면서…” 이러면 내가, “할머니, 그 어머니 아버지는 아들의 친부모가 아니었던 거죠?” 이렇게 아는 척하는 식이었다. “하루는 제자를 불러…” 할머니가 이러면 나는, “이제 더 가르칠 게 없으니 산을 내려 가거라, 이랬죠?” 하는 식이었다.

할머니는 그러는 나를 퍽 신통하게 여겼다. 이렇게 쓴다고 해서, 내가 그 어리던 시절에 벌써 영웅담 전개 과정의 전형을 짐작하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다. 어린 내가 그렇게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그것도 상당히 정형화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뜻이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로 나는 어머니 품으로 돌아갔다. 어머니는 할머니 못지않게 책 읽기를 좋아했다. ‘이야기의 흐름에 깨어 있기’를 통해 ‘이야기 전개 방식 미리 짐작’하기는 이때부터 나의 쾌적한 취미 생활 중 하나였다.

그러던 아이가 그로부터 20여년 세월이 흐른 뒤 책 한권을 읽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어떤 지역, 어떤 문화권의 영웅이 되었든 이 세계의 영웅들 한살이 이야기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고 주장한 조지프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라는 책이다.

나는 세계 여러 나라의 영웅 신화, 전설, 민담을 30여년째 즐겨 읽고 있다. 나는 어느 나라 이야기가 되었든 약 3분의 2까지만 읽고는 가만히 책을 덮고 이야기라는 강(江)의 다음 흐름을 나 나름으로 유추해 본다. 다만 취미생활일 뿐, 정확하게 유추해내는 쾌거를 자주 올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깝게 유추해내는 일은 자주 있다. 특히, 알타이 어계(語系)에 속하는 나라의 신화나 민담을 읽을 때 자주 있다.

‘몽골 구비 설화’(주채혁 역주, 백산자료원)에 실린 ‘황금매 이야기’는, 이야기라는 것이 어떻게 흐르게 되어 있는지 잘 보여준다. 앞 대목은 이렇다.

옛날 하고도 한 옛날, 살기 좋던 땅에 큰 가뭄이 들었다. 그 땅에 살던 한 어머니는 두 아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다.

“황금매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으니 황금매를 찾아가거라.”

형과 아우는 길을 떠났다. 며칠을 걸었는데 갈림길이 나타났다. 형제는 큰 길과 작은 길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큰 길에는 ‘큰 부자가 되는 길’, 작은 길에는 ‘험난한 길’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다. 형은 큰 길을, 아우는 작은 길을 선택했다. 형은 오래지 않아 큰 부자가 되었다.

아우는 모진 고생 끝에 황금매를 찾아내었다. 큰 가뭄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말을 들은 황금매는 파란 구슬과 빨간 구슬을 주면서, 파란 구슬을 강에 던지면 강물이 다시 흐를 것이고, 빨간 구슬을 묻으면 땅이 다시 기름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우가 돌아서려는데, 황금매가 호리병박씨 한 알을 주면서, 어려운 일이 있거든 해뜰녘에 자기 이름을 부르라고 했다.

아우가 돌아 와서 보니, 형은 큰 부자가 되어, 가뭄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을 돌볼 생각은 않고 혼자 떵떵거리며 살고 있었다. 아우는, 파란 구슬은 메마른 강에 던지고, 빨간 구슬은 땅에 묻었다. 강물이 다시 흐르고 땅이 다시 옥토가 되었다.

부자가 된 형은 가정을 꾸려 호의호식을 일삼을 뿐, 홀어머니와 아우는 돌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우는 정성껏 어머니를 돌보면서 호리병박씨를 심고 정성스럽게 가꾸었다. 오래지 않아 박이 열렸다. 아우가 박을 가르자 황소 두 마리, 백마 한 마리, 30여마리의 산양이 나왔다. 박이 여러 개여서 아우는 큰 부자가 되었다.

형이 그 많던 재산을 탕진하고 알거지가 되는데는 그리 긴 세월이 필요하지 않았다. 알거지가 된 형은 아우를 찾아가, 부자가 된 연유를 물었다. 아우는 형에게, 황금매를 만나고, 호리병박씨 얻은 내력을 숨김없이 일러 주었다.

여기까지가 책에 씌어져 있는 내용이다. 나는 이쯤 읽으면 책을 덮는다. 여기서부터는 나도 쓸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흥부전’을 읽은 사람이면 누구든, 여기서부터는 혼자서 이야기를 끝맺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누구든 상상할 수 있는 흐름을 탄다.

형은 아우로부터 배운대로 황금매를 부른다. 황금매가 나타나 소원을 묻는다. 형은 파란 구슬도 빨간 구슬도 말고 다만 호리병박씨 하나만을 바란다고 말한다. 황금매는 호리병박씨를 토해준다. 형은 박씨를 심는다. 그러고는 물을 준다. 첫날만 물을 주었을 뿐이다. 호리병박은 근근이 자라 열매를 맺었다.

형이 박을 타자, 큰 뱀이 한 마리 나와 형을 목졸라 죽였다. 아우는 잘 먹고 잘 살았다… 알타이 구비 전승에는 별주부전 이야기, 흥부놀부 이야기도 있다.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는 몽골에서도, 만주에서도 들을 수 있다. 나에게, 알타이를 떠돌며 이야기를 듣는 일은 삶을 읽는 일이다. 옛 이야기를 좋아해서 가난을 면하지 못하지만 나는 오래 더 떠돌아야 한다. 삶이 무엇인지 아직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Posted by 비회원

‘러시아-유럽’의 다리 우크라이나

‘러시아-유럽’의 다리 우크라이나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14 15:31

‘러시아-유럽’의 다리 우크라이나
김석원 교수의 키예프 통신

 



위치 :  러시아 서부 흑해 연안
수도 :  키예프 (Kiev)
언어 :  우크라이나어
기후 :  대륙성기후...[현재날씨]
종교 :  우크라이나정교, 우크라이나카톨릭교
면적 :  60만 3700㎢


 
역사·예술 향기 물씬…고려인 2만여명 넘어
 
하느님께서 여러 민족에게 땅을 나누어주시려고 모일 모시 하느님의 뜰 안에 모이라고 분부하셨다. 모일 모시 하느님께서 모든 족속에게 땅을 나누어주시고 쉬고 있는데 술을 좋아하는 우크라이나 민족 대표가 헐레벌떡 뛰어 들었다. “하느님 술을 마시다가 늦었습니다. 저희 민족에게도 땅을 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 자비하신 하느님은 더 이상 줄 땅이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우크라이나 민족 대표는 계속 눈물을 흘리며 애걸복걸하였다.

이에 하느님은 한숨을 쉬며 “내가 쓰려고 남겨 논 땅이라도 주어야겠구나” 하고 주신 땅이 현재 우크라이나의 대평원이라는 농담이 있다.

우크라이나는 영토는 약 60만 평방㎞, 동서로 1300㎞ 남북으로 1000㎞이다. 크림 반도의 흑해, 동남쪽의 카르파트 산맥은 대평원 우크라이나 국토의 균형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국토의 95%가 흑토지대의 대평원이고, 접경국으로는 러시아, 체코, 헝가리, 폴란드, 루마니아 백러시아, 흑해 너머 터키와 바다로 국경을 이루고 있다.

지정학적으로도 러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위치에 있으며 러시아를 제외하면 유럽에서 가장 영토가 큰 나라이고 인구는 4800만명 정도이다.

1991년 대학원 논문지도 교수님이 우크라이나문학을 공부하라고 권유하실 때 내가 우크라이나에 관하여 아는 것이라고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 우크라이나 출신의 장대높이뛰기 선수 보브카, 중·고등학교 시절 지리시간에 배운 흑토지대, 1945년 얄타 회담의 장소였던 흑해의 얄타 정도가 내 상식의 전부였다. 1992년 대학원을 마치고 이곳으로 올 때는 여러 지인들이 우즈베키스탄과 우루과이로 혼돈하기도 했다. 학위를 끝내고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산지도 13년의 세월이 흘렀다.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고 부족하지만 우리나라에 우크라이나 및 동유럽을 소개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우크라이나는 경제적으로 인도나 중국, 브라질에 못지 않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우크라이나는 정치적으로 친서방과 친러시아의 경계에서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나라이다. 우크라이나는 우리나라와도 연간 10억달러 이상의 교역이 있는 나라이다. 우크라이나는 2만명이 넘는 고려인이 살고 있는 나라이다. 우크라이나는 오랜 역사와 전통 그리고 예술의 향기가 물신 나는 나라이다.

그리고 우크라이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많은 나라이다. 나는 그곳으로 여러분을 모시고 여행을 떠나고자 한다.

 

‘러시아의 어머니’ 같은 곳
박물관 300개…매일저녁 200곳서 예술공연

 
나의 아들 딸은 숙명적으로 아버지 때문에 우크라이나 키예프에 살고 있다. 이름 또한 운명적이다. 아들의 이름은 돌림자 ‘현’자에 우크라이나를 뜻하는 ‘우’자를 써서 김현우, 딸 이름은 키예프의 ‘예’자와 아름답다의 ‘름’자를 넣어 김예름이다. 우크라이나의 수도, 아름다운 키예프에 살고 있는 가족이라는 뜻이다.

‘키예프는 러시아의 어머니’라고 한다. 10∼12세기 동유럽의 문화 중심지는 드네프르 강을 끼고 우뚝 선 키예프의 페체르스카 수도원이었다. 고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문학의 앞 장을 장식하는 ‘흘러간 시대의 연대기’는 이 수도원의 우크라이나 최초 역사학자이고 문학가이자 서지학자이며 수도승이었던 네스토르의 작품이며, ‘이고르 원정기’는 키예프의 글솜씨 좋은 어느 음유시인의 서글픈 서사시다.

인구 300만의 키예프에는 약 300개의 크고 작은 박물관이 있으며 매일 저녁 7시부터 10시 사이 200여개의 공연장에서 발레, 연극, 음악회, 서커스, 무용, 오페라, 패션쇼 등의 각종 공연이 열린다. 도시 거리 거리의 건물에는 ‘문화재 지정 보존 건물’이라는 명패와 함께 건축 연도가 적혀 있다. 도심에 위치한 여러 사원이 세계각국의 관광객을 부른다.

1744년에 건축된 현란하고 정교한 안드렙스카야 사원을 지나면 여러 화랑이 있고 그 밑으로 ‘거장과 마르가리타’라는 작품으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이후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러시아 문학세계를 뒤흔든 불가고프의 생가 박물관이 있다.

그 박물관에서 걸어서 10여분 거리에 있는 11세기 동유럽 사원의 중심이었던 소피아 사원은 지금도 그 웅장한 자태가 찾는 이를 숙연하게 한다. 소피아 사원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황금의 문’은 1240년대 키예프를 유린한 몽골군이 지붕을 장식했던 황금을 모두 도적질하고 파괴했다는 성문으로 아직도 그 당시의 성벽 일부가 철장 속에 갇혀 있다. 황금의 문 맞은편에 위치한 한국 대사관을 지나 옛날 마차가 다녔던 돌길을 걷다보면 건물이 온통 빨간색인 키예프국립대학교가 우뚝 솟아 있다.

아직도 여름철이면 키예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드네프르 강가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우크라이나 불고기 ‘샤실릭’을 구워 먹을 수 있는 이 도시는 도시 전체가 큰 공원이고 박물관이며 식물원이다. 세상 어느 현대 도시에 범죄며 매춘이며 마약이 없으랴 마는 이 작은 도시에서는 시골 고향에 온 듯한 평온과 마음의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안톤 체호프가 말년 보냈던 얄타여행
2차대전 전후처리 둘러싼 ‘얄타회담’ 유명

 
우크라이나에서도 자동차를 생산한다. 차이름은 타부리아(Tavria)라고 부르는데 타부리아는 자국민으로부터 온갖 냉대와 업신여김을 당해 왔다. “타부리아보다 자전거가 낫다” “공장에서 사서 집에 오는 동안 고장났다” “타부리아는 차가 아니다” 등등의 말이 있다. 1995년 대우자동차가 인수하여 대우 신(新)타부리아 (ABTO-ZAZ DAEWOO HOBA TAVRIA) 라고 명명하여 재생산했지만 아직도 최악의 차로 통한다.

몇해 전 차가 필요하여 고르다 나는 우크라이나 사람도 싫어하는 차 타부리아를 사기로 결정했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싫어하니 한국인인 나라도 타보자는 오기가 발동했다. 흰색을 사서 이름도 거창하게 천마(千馬)라고 붙여서 애지중지 탓다.

3년전 여름 방학에 우리 가족은 대학의 휴가권을 얻어 크림반도의 휴양소로 떠났다. 1000㎞가 넘는 거리라 기차가 편하리라 생각했지만 우리의 천마를 타고 가기로 결정하여 새벽 4시에 출발했다. 키예프부터 드넓은 평지가 펼쳐지고 50㎞정도 벗어나자 군데 군데 해바라기 밭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어느 해바라기 밭은 4~5㎞ 계속 이어져 장관을 이루었다.

남부지방 헤르손에 이르자 많은 고려인이 거리 거리에서 수박과 참외을 팔았다. 우크라이나 전역에는 2만명 이상의 고려인 교포가 살고 있는데 똑같은 씨를 똑같은 땅에 심어도 고려인이 키운 수박이 훨씬 맛있다는 헤르손 수박을 고려인이 모인 곳이면 차를 세우고 샀다. 1㎏당 60원이니 10㎏짜리 수박이 600원이다.

1954년 흐루시초프는 우크라이나 러시아 형제동맹 300주년 기념으로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에 선물했다. 현재 얄타는 인구 8만의 작은 도시인데 1945년 2월 얄타회담이 열릴 당시에는 주변까지 포함해 2만명 정도가 살던 한적한 어촌 휴양지였다. 처칠과 루즈벨트, 스탈린이 모여 2차세계 대전 전후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회담을 한 장소는 리바디야 궁전으로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여름 휴양지로 사용했던 별장이다. 당시 니콜라이 일행은 마차로 모스크바에서 출발하여 1주일 넘게 걸려 이곳에 도착하여 1~2주 쉬고 돌아갔다고 한다. 1층 회담장에 들어서면 안내원이 3명의 좌석 배치가 영어 알파벳 순서라고 설명한다.

톨스토이도 감탄했다는 단편의 황제 안톤 체호프는 말년에 폐결핵을 앓고 이곳 얄타에서 휴양을 했는데 그가 살던 집이 현재 체호프 박물관이다. 얄타에서 서쪽으로 해변 도로를 따라 가다 보면 흑해 함대가 있는 세바스토폴 항이 나온다. 톨스토이가 젊은시절 세상에 환멸을 느끼고 이상향을 찾아 떠난 곳이 카프카즈 지방이였는데 결국 그는 크림반도 끝 세바스토폴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러시아와 터키 전쟁에 참전하여 ‘세바스토폴 이야기’ 라는 명작를 남겼다.

흑해의 검푸른 바닷가 물결은 얄타회담 전에도 출렁였고 우리의 찢어진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무심히 출렁일 것이다.
 

우리 가락 우리 춤에 ‘찬사’
800명수용 공연장 만원··· 문화교류 가능성 보여

 
매년 5월 마지막주 일요일은 키예프의 날이다. 키예프의 상징 나무인 밤나무 꽃이 만개하고 거리 거리 아카시아 향기가 날리는 키예프에는 세계 각국 축하 사절단의 예술 공연이 여러 공연장에서 펼쳐진다.

올해 키예프 사람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공연은 단연 ‘한국의 음악과 춤의 세계’라고 제목 붙인 우리나라 예술 공연이였다. 800명을 수용하는 키예프 오페라하우스는 공연 전부터 만원이었으며 관람객들은 숨을 죽이고 우리 가락에 심취했다.

이성주 우크라이나 주재 한국대사는 축사에서 “키예프 날을 축하하며 한국 예술의 향기를 맘껏 호흡하시기 바란다”고 했으며 우크라이나 문화부 차관은 “양국의 문화교류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화답했다. 올해 3번째인 한국전통예술단의 공연은 경제적인 면에 치우쳐 있는 양국의 교류를 한걸음 발전시켜 문화 교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무대의 불이 꺼지고 그윽한 가야금 소리가 끊어질듯 이어진다. 갑자기 장내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 속으로 빠지며 조명은 세 명의 가야금 연주자를 비춘다.

이어지는 가야금 소리는 우리 음악을 처음 듣는 교포나 우크라이나 사람이나 모두를 숙연하게 만든다. 키예프에 와서 공부하는 학생이나 사업가나 고려인들은 가야금 소리에 젖어 고국을 그리고 어머니의 모습을 그렸을 것이다.

이어지는 판소리 춘향가, 추천무, 신나는 북 소리, 가슴을 아련하게 하는 해금독주….

공연의 절정은 소리꾼 장사익의 노래였다. “도부리 베체르”(안녕하십니까?)로 인사를 한 그는 자신의 노래와 흘러간 옛가요를 불러 기립박수를 받았다. 무대 양쪽 화면에 우크라이나어와 영어 자막으로 노랫말을 내보내 우크라이나 사람과 외국인들도 한마음으로 호흡할 수 있게 한 기획은 좋은 배려였다.

마지막에 모든 출연자가 아리랑을 합창할 때 무대에서 멀리 떨어져 숨죽여 보던 교포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손수건을 꺼내는 모습이 보였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아리랑을 부르며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극동 지방으로 넘어 갔고, 아리랑을 부르며 춥고 거친 땅을 일구었고,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극동에서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허허벌판에 버려졌던 고려인 교포들은 스탈린 사후 멀리 발트해부터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약 50만명 이상이 흩어졌고, 그 중 일부가 우크라이나 땅으로 왔다.

가장 근면하고, 가장 교육열이 높으며, 가장 출세한 사람이 많고 대학 진학률이 높은 소수민족으로, 우크라이나에 있는 100여 소수민족 중 2만명 넘는 고려인 교포들은 여러면에서 경이의 대상이다. 비록 국적은 우크라이나이지만 그들의 마음 한구석에는 아리랑 같은 우리의 가락과 춤이 흐르고 있는 것 같다. 콘스탄틴 심 할아버지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세요.
 

‘우크라이나 민족시인’ 셰브첸코
 
 
우크라이나의 스포츠 영웅은 권투 WBC헤비급 챔피언 클리치코프와 AC 밀란에서 뛰고 있는 축구선수 안드레이 셰브첸코이다. 유럽 챔피언전 축구 준결승에서 우리나라의 박지성과 이영표가 소속한 에인트호벤과 AC의 밀란이 붙었을 때 우크라이나의 모든 사람이 AC 밀란을 응원했고 우리 집은 박지성이 있는 에인트호벤을 응원했다. 결국 셰브첸코가 첫 골을 터트렸고 AC 밀란이 결승에 진출했지만 준우승에 머물렀다.

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대학의 정식 명칭은 셰브첸코 T.G 키예프국립대학교이다. 축구 선수 셰브첸코의 이름이 아니고 우크라이나의 민족시인 셰브첸코 타라스 그리고리비치의 이름이다.

동유럽 사람들의 정식 이름은 성, 이름, 부칭(아버지 이름에 보통 ‘비치’를 붙인다)의 순서다. 예를 들어 푸슈킨 알렉산데르 세르게예비치 하면 푸슈킨이 성, 알렉산데르가 이름, 세르게예비치가 부칭이다. 그런데 보통 친한 사이에는 약칭 이름을 부른다.

예를들어 블라디미르는 발로자, 세르게이는 세료자, 알렉산데르는 사샤, 니콜라이는 콜랴 등이 약칭이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정식 이름은 유셴코 빅토르 안드레이비치이고 러시아 대통령의 이름은 푸틴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르비치이다. (푸틴 대통령의 아버지 이름도 블라디미르이다)

키예프에서 가장 멋지고 정감이 가는 거리는 셰브첸코 거리이다. 키예프의 많은 공원 중에서 도심에서 신문을 읽고 아침 점심 저녁 개와 산책하는 공원이 셰브첸코 공원이다.

셰브첸코 동상, 셰브첸코 지하철역 외에도 셰브첸코의 이름이 붙은 건물이 많고 우크라이나 전역의 크고 작은 도시에는 셰브첸코 박물관과 도서관이 거의 모두 있다. 국가 공식 행사나 학교에는 의레 셰브첸코의 시구가 걸려 있기 마련이다. 처음 키예프를 찾는 사람들은 아마도 셰브첸코가 이 도시의 창건자라고 오해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단지 한 사람의 시인이다.

지난 해 부정선거를 뒤엎고 정권을 바꿔 오렌지 혁명이라고 명명된 우크라이나 대통령 부정 선거 규탄 시위 현장에서도 나는 여러 차례 셰브첸코의 시를 목격하고 목이 메었었다.

1814년 농노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고아로 자란 시인. 고골리 등 우크라이나 출신이면서 러시아어로 작품을 쓴 사람들에게 보란듯이 우크라이나 어로 작품을 써서 영원히 살아있는 시인. 10년의 유배와 어려움 속에서도 오직 자신의 조국 우크라이나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시를 쓴 시인. 죽으면서도 우크라이나의 드네프르강 언덕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유언했던 시인.

달러 몇 푼 가지고 와서 호기를 부리며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비문화적이고 미개하다고 이야기하시는 분들, 우리 나라에도 이런 시인을 가지고 있는가? 오늘 다시 한번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조용히 읊조려 본다. 키예프대 교수
 


우주공학등 무한한 잠재력의 우크라 10,000㎞를 뛰어 넘은 학술교류 ‘뿌듯’
 
 
2005년 6월10일은 한국과 우크라이나 학계 간 기억할 만한 날이다. 주자문 한국학술진흥재단 이사장이 1만㎞가 넘는 거리를 날아 와 우크라이나 과학 아카데미(NASU)와 학술교류협정서에 서명하고 우크라이나 아카데미 원장 B E 바톤과 굳은 악수를 했다. 한국에는 자세히 보도가 안된 내용이지만, 이역만리 이곳에선 눈물나게 뜻깊은 행사이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NASU는 산하에 150개가 넘는 연구소와 대학을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국립 아카데미다. 원장 B E 바톤 박사는 87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정력적으로 일하며, 이날도 양국 학술 교류협정식에 참석하여 서명하고 양국의 학술교류를 위하여 건배를 제의했다.

주자문 이사장은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과의 학술문화 교류도 중요하지만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제3세계 여러 나라와 교류도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2002년 취임 이후 칠레, 멕시코, 이집트, 베트남, 터키, 인도와 학술교류 협정서에 서명했으며 이번에 체코 및 우크라이나와 학술교류협정을 체결함으로써 12개국 15개 중요 학술단체와의 협정서를 이끌었다”고 말했다.

아직도 어머니같이 모시는 우크라이나 지도교수님이 안경이 망가졌을 때 하신 푸념 한마디.

“우리나라(우크라이나)는 비행기를 만들고 핵발전기를 돌리는 나라지만 이런 안경 하나 제대로 못 만든단 말야.”

우크라이나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나라다. 농축산물을 제외한 신발, 양말, 심지어 마시는 물까지 수입을 하는 판국이지만, 오래 전부터 구소련의 전략에 따라 핵무기와 핵발전소, 항공 산업과 우주 공학, 그리고 기계 제작과 중화학 공업이 발전한 나라이다. 이러한 나라와의 학술교류 협정은 양국의 학술과 경제발전을 위해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이 지면을 빌려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수고하신 분들을 기록해 두고 싶다. 구수한 입담과 유머로 모임들을 이끌어 주신 이상목 전문위원, 모든 행사에서 꼼꼼히 메모를 하며 정확한 판단과 기획을 하신 윤언균 전략사업부장, 듬직하고 뚝심있게 일을 처리하신 이영수 국제교류팀장,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며 빈틈없이 실무를 추진했던 김정아 국제부 팀원이 그 분들이다. 또 통역과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은 키예프대 박사과정 오정석 군과 안드레이 군도 이번 협정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했다. 주자문 이사장님, 나라와 민족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시리라 믿습니다.
 

우크라이나 여성들 ‘노출의 계절’
아슬아슬 미니스커트 활보‥시선 고정 민망

 
키예프에서 친구처럼 지내는 후배 한 사람은 여름에는 운전을 하고 싶지 않단다. 자꾸 시선이 다른 곳으로 가기 때문이라고….

여성의 노출은 자기과시와 자신감의 표현인가? 남성의 시선을 집중하려는 본능적 행위인가? 25∼26도 정도의 더위 속에서도 지금 키예프는 온통 여성들의 노출로 장관을 이루고 있다.

노인을 제외한 많은 여성이 키예프라는 노출의 무대에서 온갖 공연을 하고 있다. 아슬아슬한 미니스커트, 거의 엉덩이와 앞부분만 가린 핫 팬츠, 등이 완전히 파인 윗도리, 노브라에 가슴의 절반을 내놓고 다니는 여성들….

젊은 여인들이 이렇다 보니 초등학생들도 따라 하고 아주머니들도 따라 하고, 심지어 나이가 든 부인네들도 심한 노출 증세를 보이고 있다. 키예프의 젊은 여성들은 아주 날씬하고 예쁜 편인데 서른 살만 넘으면 왠지 뚱뚱해지는 공통적인 현상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심한 노출을 한 사람도 간혹 있다.

물론 날씨가 덥고 겨울이 길어 짧은 햇살아래 맘껏 태양욕도 하고 보기 좋게 몸을 태운다는 의미도 있지만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해도 키예프 여성의 노출은 약간의 문제가 있다고 느낄 정도다.

특히 유행의 첨단을 걷는 키예프의 여대생들의 옷 차림이나 노출은 한번 생각해 볼 만하다.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다보면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가끔 난감할 때가 있다.

그런데 외국인 입장에서 생각하는 이런 문제를 정작 우크라이나 당사자들은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아니 생각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 여자들이 옷을 벗든 입든 뭇남성의 시선을 즐겁게 해주는 이런 노출 현상에 대해 말해 무엇하랴?

며칠전 우리 가족은 키예프를 관통하는 드네프르 강으로 물놀이를 갔다. 드네프르 강에는 중간에 작은 섬이 몇 개 있는데, 강주변에 사람이 많아 노젖는 작은배를 타고 강을 건너 섬으로 갔다. 요금은 1인당 200원. 멀리서는 안보였는데 섬에 접근하여 내릴 때쯤 되자 낯이 뜨거워지며 잘못 왔다는 생각이 순간 머리를 스쳤다.

완전히 옷을 벗은 남녀가 배구를 하고 강가에서 조깅을 하는데, 아, 이게 말로만 듣던 나체촌이구나! 우리 부부만 온게 아니라 애들까지 왔으니 이 위기를 어떻게 빠져 나가나?

태연한 척 “야 우리도 이왕 왔으니 수영이나 하고 가자”하고 물속으로 뛰어들었지만 아이들의 시선이 자꾸 배구팀으로 쏠리는 것을 느꼈다. 나체촌이라고 옷을 강제로 벗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물속에서 천천히 수영을 하며 우리 가족이 모두 벗고 뛰며 배구하는 모습을 상상해 봤다. 우리 가족의 모습을 의태어로 표현해 본다. 덜렁덜렁(나), 출렁출렁(처), 딸랑딸랑(아들), 촐랑촐랑(딸).
 

군대 얘기때 ‘뻥’ 섞는건 세계 공통
 
 
1983년 8월1일 비 내리는 용산역을 기억한다. 군에 가는 장정 아들에게 “눈물 흘리지 말아라”하시며 돌아서서 통곡의 눈물을 흘리셨을 어머니를 그린다. 논산행 기차에 오르자마자 쥐잡기며 좌로 굴러 우로 굴러 하는 기합소리며 어설프게 박박머리 깎은 장정들을 기죽이는 현역병들의 고함이 아직도 들리는 듯하다. 1687부대 100연대 1대대 통신소대. 아직도 1340…으로 시작되는 군번이 생생하다.

이곳에서 친하게 지내는 알레그 선생과 만나면 우리는 군생활 이야기를 가끔 한다. 전 세계 군생활 경험자는 군대 이야기를 할 때면 약간의 뻥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나는 AK-1소총 가지고 근무했는데 너는 무슨 소총 가지고 근무했냐?”

“야 나는 세상에서 M-16소총이 제일 좋은 줄 알아. 얼마나 잘 맞는데.”

“군 복무 할 때 남한하면 미군, 독재, 가난, 거지 이런 단어의 상징으로 생각했어.”

“나는 소련이 우리의 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소련하면 레닌, 공산당, 시베리아, 수용소군도 이런게 생각난다.”

이 친구는 학창시절에 공산청년동맹 회원이었고 군에서 3년을 근무했다고 자랑을 한다.

“구 소련군에서도 고참 신참 간 구타가 있었냐?”

“물론이지 졸병 때 무지 맞았고 고참 때는 조금 두들겼다.”

1980년대 초 미·소가 한창 이데올로기 전쟁을 수행하며 전 세계가 냉전의 소용돌이에 있던 시절, 한반도 남단에서 육군으로 근무했던 예비역 병장과 그 막강했던 소련 육군에 근무했던 전역병이 힘없이 만나 지난 날을 회고하며 농담을 했다.

세상 어디나 군에 보내는 부모님의 심정은 아프고 쓰릴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군대는 징병제이고 대학에 입학하지 않으면 18~19세에 입영통지가 나온다. 대학에 입학하면 장교로 갈 수도 있고 소정의 군사교육을 받으면 면제를 받기도 한다. 근무 기간은 12개월인데 그것도 어렵고 힘들다고 부모들은 온갖 방법으로 자식들을 군에 안보내려고 노력한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경제 사정이 어려워 군에 식량이나 보급품이 부족해 고생이 심하고, 특히 많이 먹을 왕성한 나이의 사병들에게 굶주림이 가장 큰 어려움이며 고참 졸병 간 구타 사건이나 인권 유린적인 일이 종종 일어나 군에 자식을 보낸 부모님들이 많은 걱정을 한다고 한다.

모든 대한의 국군 장병 여러분 고맙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참고 견뎌냅시다.
 

“대학나와야 신분상승” 대입전쟁
 
 
한국에서 서울대의 통합형 논술 등 본고사 도입문제를 둘러싸고 시끄럽지만, 9월에 새 학년이 시작되는 우크라이나는 7월 현재 입시와의 전쟁 중이다. 학교 당국자들은 농담으로 `수확의 계절'이라고 한다.(입시생 부모에게서 돈을 받는다는 뜻이다)

우크라이나도 부모들의 교육 열정이 대단하다. 집안의 모든 경제수단을 동원하여 자식을 대학에 보내려고 한다. 어수선한 나라에서 신분 수직상승의 가장 빠른 길이 교육이라는 것을 오래 전부터 부모님들은 알고 있었다. 소연방 시절에는 대학을 졸업하면 국가가 직장을 지정해 주었다. 요즘은 대학을 졸업하여 국가 공무원으로 근무하거나 사업을 하여 돈 잘버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우크라이나는 초등학교가 11년제이고 대학이 5년제이다. 우리나라같이 검정고시 제도나 내신성적 제도는 없다. 다만 졸업시 우수한 학생에게 금메달을 준다. 11학년을 마친 학생들은 자신이 원하는 어느 학교든 지원할 수 있다. 5년제 정규대학이나 2년제 전문학교(직업학교)에 진학하고, 입시에서 실패한 남학생은 군에 입대한다.

우크라이나 대핵들의 입학시험은 ▲우크라이나어 문학 ▲외국어 ▲지원학과와 연관이 있는 한 과목을 선택하여 3과목을 본다. 과목당 5점 만점이고 보통 합계 13점 이상이면 합격이다. 동점자가 많아 면접이 아주 중요한데 이때 대학 관계자의 힘이 작용한다.

대학 입시는 시험 출제나 시험일자, 면접 등 모든 것이 대학 자체적으로 이루어지며 정부의 어떤 간섭도 받지 않는다. 필자도 입시사정위원으로 매년 입시에 참여하고 있는데 입학시험이 아주 주관적이라고 여겨질 때가 종종 있다. 그러다 보니 학교 당국이 원하는 학생을 자유롭게 선발도 하지만 부정 입학의 소지가 다분하다. 물론 내가 속한 키예프대는 공정하게 입학사정이 이뤄진다.

구소련시절부터 1995년까지 모든 대학의 합격생은 학비는 없고 국가 장학금을 받았다. 그러다 얼마 전부터 대학 예산상 합격생의 반은 장학생으로 반은 학비를 내는 입학생으로 선발을 한다.

얼마 전 한국어과에 입학하고 싶다는 학생의 부모가 한번 만나 식사 대접을 하고 싶다고 전화를 했다.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면서 필자는 부모님께 이야기 했다.

"당신 자식 실력이 좋아 합격하면 좋고, 떨어지면 다른 대학에 가던지 공부를 더 해서 내년 에 다시 시험을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에게 10달러라도 준다면 당신 자식은 틀림없이 떨어질 것이다."
 

‘동유럽의 사무라이’ 코사크 고향
 
 
율 브리너가 주연했던 영화 ‘대장 불리바’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원작은 우크라이나 출신의 러시아 작가 고골리의 ‘타라스 불리바’이다. 17세기 폴란드 지배하 우크라이나 코사크 용사들의 해방전쟁을 그린 작품으로 주인공 타라스 불리바는 여자 때문에 우크라이나를 배신하고 폴란드에 협조한 아들을 비정하게 목을 베 죽인다.

19세기 러시아의 작가들이 꿈꾸던 이상향의 땅이 카프카스 지방이었다. 장수의 마을, 꿀이 흐르는 강, 미인이 많은 곳,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곳으로 푸슈킨(카프카스의 포로), 레르몬토프(우리 시대의 영웅), 톨스토이(카자키), 베스트제프(1824년 카프카스의 강가) 등이 카프카스 지방을 배경으로 작품을 썼다.

넒은 의미의 카프카스 지방은 카프카스 3국이라고 일컬어지는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외에도 카프카스 지방과 연결되는 러시아 남부 및 우크라이나 남부지방도 포함된다.

우크라이나의 코사크(우크라이나어 Козак, 러시아어 Казак, 영어 Cossack)는 지금은 러시아 영토인 돈강 유역의 돈코사크와 드네프르강 하류 자파로제 본영의 코사크가 유명했다. ‘고요한 돈강’이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숄로호프의 작품도 실상은 옛 코사크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코사크는 게티만이라는 군사 우두머리를 사령관으로 하나의 독립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우크라이나의 여러 지역을 군웅할거하며 서로 싸우고 때로 외세에 대항하거나 협조하며 우크라이나 역사에서 14~18세기 코사크의 시대(The Cossack Era)를 만들었다.

전장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는 용사, 조국을 위해서라면 처자식도 과감히 버리는 용사, 잔인하면서도 의리와 신의를 목숨같이 여기는 용사들, 콧수염이 길고, 머리의 둘레는 바짝 깎고 가운데 머리만을 땋아 늘어트린 변발의 코사크 용사들은 수많은 외세의 침입을 자신의 운명같이 맞이하며 싸우고 죽고 때로 노예같이 생활하며 끊질긴 생명을 연장해 왔다.

1991년 독립 전까지 러시아의 일부로 또는 소러시아라 불리던 우크라이나는 오렌지 혁명이라고 명명된 지난 대선에서 대통령 부정선거를 국민의 힘으로 거부하고 단 한 사람의 사상자나 투옥자 없이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정권 교체를 이루고 연 12%의 경제 성장을 기록하며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용맹했던 코사크의 후예들이 요즘 서유럽의 허드렛일 노동자로, 매춘부로 유출된다는 이곳 뉴스를 접하며 착잡한 심정이 된다.
 

우크라人 보통 30일간 여름휴가
 
 
우크라이나의 7, 8월은 휴가철이다. 7월초 입시만 끝나면 대학은 도서관까지 문을 닫는다. 웬만한 관공서도 정상적으로 업무를 보기 힘들다. 경제적으로는 좀 어려워도 도심의 많은 사람들이 흑해나 아조프해 또는 카르파트 산으로 휴가를 떠난다.

웬만한 사람들은 3~4주의 여행권을 직장에서 산다. 대학에서도 흑해에 있는 휴양소 여행권(푸초브카)을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한다. 보통 우리 돈으로 3만~4만원이면 3~4주 숙식을 해결할 수 있다.

재작년 우리가족도 흑해 바닷가에 있는 대학 휴양소로 휴가를 갔었는데 바닷가에서 할 일이라고는 수영, 먹기, 잠(낮잠), 독서, 운동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텔레비전도 전화도 컴퓨터도 라디오도 없는 키예프에서 1000㎞ 떨어진 시골 바닷가에서 우리가족은 아침에 일어나서 운동하고 아침 먹고 수영하고 점심 먹고 낮잠 자다 수영하고 책 좀 보다 저녁 먹고 산책하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며 지냈다. 이렇게 3주 생활 했더니 완전히 흑인같이 피부가 까맣게 탔고 애들 수영실력이 부쩍 향상됐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여름철에 시골이나 다차라는 별장에서 여름을 지내기도 한다. 보통 직장인의 휴가는 30일이지만 대학이나 학교는 60일정도 유급 휴가이다. 휴가철에는 휴가비와 휴가철 월급을 미리 받는다.

휴가철에 고향을 찾는 것도 우크라이나 생활의 한 전통이다. 우크라이나는 예부터 농경지가 많아 농업이 번창했고 아직도 인구의 4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도시의 많은 사람들이 시골의 부모님을 찾고 있다.

우리 가정에도 우크라이나의 시골 고향이 있다. 키예프에서 150㎞ 떨어져 있는 보그슬랍이라는 시골이다. 원래 졸업한 학생의 집인데 형님같은 학생 아버님과 형수님 같은 학생 어머님이 우리를 반긴다. 졸업한 학생은 키예프에서 직장 생활을 하느라 바쁘지만 우리 가족은 여름 방학, 부활절, 우크라이나력 성탄절에 꼭 이 시골에 간다.

닭을 잡으시는 형님, 온갖 음식을 장만하시는 형수님, 그리고 보배같이 아끼는 보드카와 포도주를 식사때 마다 내놓으시는 정성,이웃들도 불러 어려운 살림에 함께 나누고 술도 마시고 이런 저런 지난 일을 이야기하고 수영하고 낚시를 하다 보면 시간은 잠깐 사이 지나간다.

2~3일이 지나 키예프로 돌아올 때 쯤이면 신문지에 싼 달걀, 호박. 감자. 양파, 마늘, 당근, 보드카와 포도주, 생닭 한마리를 싸 주시고, 떠날 때는 여러 사람이 모여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손을 흔들어 주신다. 고향을 잃어버린 이 시대에도 우크라이나에는 아직도 우리나라 옛날의 시골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아파트 투기 붐’ 서울 강남 방불
 
 
10년 이상 이곳에서 사귀고 있는 선교사와 만나면 이런 농담을 한다.

“10년 전에 아파트 몇 채 사 놨으면 떼부자 되는건데 이게 뭡니까, 집 한 채 없이….”

구소련 시절 우크라이나의 주택 정책은 국가가 무상지급하는 것이었다. 직장별로 무주택자에게서 신청을 받아 국가에서 아파트를 지어 신청 순서대로 무상 지급했다. 국가는 아파트가 많고 기숙사가 많아 주택 정책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예를 들어 대학 근처에는 교수와 교직원을 위해 아파트와 기숙사를 지었다. 미혼은 기숙사에, 기혼은 아파트를 무상으로 받아 살았다. 무상으로 받는 사람들은 2∼3년, 길게는 5∼6년 기다린 사람도 있고 독립 전까지 아파트를 받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지역별로 노동자, 공무원, 선생님 등 같은 직종의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았다.

1992년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아파트 가격은 우리 식으로 15평 정도의 아파트가 3000∼4000달러(300만∼400만원)였고, 웬만큼 큰 아파트도 1만달러(1000만원)를 넘지 않았다. 아파트가 투기의 대상이라는 것은 생각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구소련시절 아는 아저씨 한 분은 별장에서 먹다 남은 사과를 키예프에 가지고 와, 몇 상자 팔았다는 죄명으로 경찰에 잡혀 부정축재 및 반사회주의 법에 걸려 2년형을 살았다고 한다. 그만큼 구 사회주의권에서는 부(富)의 축적을 범죄나 악으로 연결지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1991년 독립 후 지방의 많은 사람들이 키예프로 몰려왔고 돈에 미친 투기꾼들이 생기면서 지금의 아파트 값은 10여년 전에 비해 10배 이상 올라 요즘은 15평 아파트는 지역별로 차이는 있지만 대략 3만∼4만달러 정도이고 20만달러 이상하는 고가 아파트도 많아졌다. 러시아 혁명을 주도했던 레닌이나 철권통치를 했던 스탈린 시절이었다면 부동산 투기꾼들은 전원 사형이거나 최소 시베리아 유형이었을 것이다. 지금 키예프 전역에는 아파트 건설붐으로 도시 전체가 활기차면서도 뭔가 무계획적인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학에서 무상 임대해 준 기숙사 아파트 양쪽에도 새 고급아파트를 짓느라 분주하고 먼지가 날린다. 이제 몇 개월 후에는 외제차를 모는 신흥부자들이 가난한 대학 교수들과 어울려 친밀감도 악의도 없이 그저 한 동네를 이룰 것이다.

한국에서 부동산 투기가 여전하다는 소식을 듣고 있지만, 이제 우리 가정이 키예프에서 아파트를 사는 것도 물 건너갔다. 아예 키예프에서 떨어진 교외에 전통 한옥을 한 채 지어볼 생각을 한다.
 

영어가 우크라이나어 대용
 
 
해외여행의 문이 활짝 열려 많은 한국인이 해외로 여행을 한다. 아직 우크라이나를 찾는 한국인이 많지는 않지만 가끔 키예프에 오는 사람을 소개 받거나 만날 일이 있으면 만나는 사람에게 시장과 도서관과 선술집 그리고 시간이 있으면 시골을 가보라고 권한다.

어느 나라를 여행해도 마찬가지다. 외국 여행을 할 때 안내원을 따라 정해진 관광명소를 돌아보는 것도 즐겁겠지만 잠시 틈을 내서 자유스럽게 시장이나 도서관이나 선술집을 가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시장에서는 살아 움직이는 인간 군상을 볼 수 있다. 가끔 가격으로 실랑이를 벌이는 아주머니도 있고 낮술에 취해 떠드는 사람도 있고, 한 푼 적선을 기다리는 걸인도 있다.

키예프에서 유일하게 철거되지 않은 셰프첸코 거리의 레닌동상을 지나 베사랍스카 시장에 들어서면 삶의 활기가 넘친다. 온갖 과일, 야채, 고기, 생선이 좌판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우크라이나어나 러시아어를 몰라도 상관 없다. 영어로 ‘This’하며 손짓을 하거나 ‘How much’ 한마디면 족하다. 숫자는 세계 공통이므로 답답하면 종이에 가격을 써준다.

일본 친구는 시장 좌판에 널어놓고 파는 고기를 보고는 아예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하고, 중국 친구는 가격도 싸고 맛있다고 한다. 돼지고기가 가장 비싸고 다음은 닭, 양고기 순이고 소고기 값이 가장 싸다.

우리나라 도서관은 독서실화 되어 공부가 주이지만 우크라이나의 도서관은 책을 빌리거나 자료를 찾는 것이 주이다. 키예프에는 마을마다 마을 도서관이 있고 우리나라의 구에 해당하는 ‘라이온’ 별로 큰 도서관이 있으며 3000만권의 장서를 자랑하는 국립중앙도서관이 있다. 외국인도 여권을 보여주면 자료를 찾고 책을 볼 수 있다. 정치 경제가 좀 불안정해 보여도 마을도서관이나 중앙도서관에서 자료를 찾고 공부에 열중하는 학생이나 시민들을 보면 이 나라의 장래는 장밋빛으로 보인다.

뒷골목 선술집에서는 우크라이나의 평범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저 술 한 잔에 기분이 좋아, 외국인을 만나면 학창시절 배운 영어를 생각하며 헬로를 연발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다. 다행히 의사소통이 돼서 합석하여 건배라도 하면 어디서 왔냐고 물을 것이고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한국에 대한 온갖 찬사를 늘어놓을 것이다(단 소매치기나 사기꾼은 조심할 것).

키예프에 오는 한국 사람 중에 “백마를 타보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가끔 있다. 외국에까지 가서 매춘행위를 하려는 대한의 사나이들이여, 차라리 외국의 시장이나 도서관이나 선술집에서 그 나라의 서민정서를 느끼는 것이 더 값어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우크라선 개고기 먹으면 ‘범죄’ 취급
 
 
초복 중복 말복이면 한국에서는 보신탕이며 삼계탕을 먹지만 이곳 우크라이나에서는 특별히 먹는 음식이 없다. 여름철에는 제철 과일과 야채가 우리 가족의 식탁을 풍성하게 한다.

이곳에서 가끔 듣는 기분 나쁜 질문이 “한국에서는 개고기를 먹는다는데 너도 먹어 봤느냐”는 것이다. 나는 단호히 “절대 안 먹고 먹어본 적도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아무 개나 먹는 게 아니라 식용개가 따로 있다. 엄격한 위생 관리를 거친다. 유럽에서 말고기나 양고기를 먹는 것과 차이가 없다” 등등.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인천의 골목 골목을 찾아다니며 수육과 전골, 무침까지 개고기 순례를 다니던 때를 생각한다. 국민의 보건과 건강을 위해 개고기를 세계적인 식품으로 개발하고, 품종이 다양하고 번식력이 좋은 개가 인류의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그러기 위해 라면같이 대중화하여 포장육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떠들고 다닌 적이 있다. 한 잔 소주를 곁들인 개고기 맛을 본 지가 10년이 넘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때는 왜 그런 음식을 맛있다고 찾아다니며 먹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키예프의 많은 가정에서는 개를 사람과 같이 키운다. 물론 개 종류도 다양하고 탐나는 개도 많다. 그러나 개는 개같이 키워야 한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개를 침대에서 재우고, 음식을 따로 사서 먹이고, 개인 주택도 아닌 아파트에서 털 날리는 개를 키우는 사람을 보면 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파트에서 키우는 개는 하루에 2번 아침 저녁으로 배설을 위해 산책을 꼭 해야 한다.

키예프에서는 “식구가 몇이냐”고 물으면 개나 고양이를 포함하여 말하는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들에게 개고기를 먹는 것은 그냥 고기가 아니라 혐오 식품을 넘어서 범죄 행위로 느껴질 것이다.

미국이나 유럽에선 교포들 간에 은밀한 범죄 행위를 하듯 사막이나 산 또는 깊은 숲에서 개를 잡아 먹는다는 데 우크라이나 교포들도 여름에는 은밀하게 개를 잡아 먹는다. 개고기라고 안하고 ‘건강에 좋은 고기’, ‘우리나라 전통 음식’이라고 표현한다.

중국이나 베트남에서도 개고기를 먹는다는데 왜 개고기 하면 유럽에서는 유독 한국을 연상하고 비난하는지 알 수가 없다. 좋아하는 사람은 먹고, 싫어하는 사람은 안먹으면 그만이다(소고기, 돼지고기 같이).

이곳에서 몇 차례 특별식에 초대를 받았지만 가보지 못했다. 갈 마음이 없다. 숙소 앞에는 집 없는 개들이 많이 어른거린다. 그 중 몇 마리는 우리 가족이 지나가면 꼬리를 흔들고 눕는다. 그런데 개고기를 어떻게 먹을까? 채식주의자가 될 때인 것 같다.
 

‘비옥한 땅’ 우크라이나 수많은 외침 받아
 
 
한국에선 광복 60주년을 맞아 그동안 고난의 역사를 회고하고 반성하는 행사가 다양하게 열리고 있다. 반도에 위치한 우리가 외세의 침략을 수없이 당한 것처럼, 비옥한 옥토의 우크라이나 주변에는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멀리는 몽골과 발틱의 리투아니아, 지금은 우크라이나 영토이지만 예전에는 독자적으로 공국을 형성했던 크림 타타르, 바다 건너에는 터키 등이 항시 우크라이나를 노리고 침략해 왔다.

우크라이나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9세기 문헌상 최초로 등장하는 키예프 루시의 올레그 공작, 988년 블라지미르 대공의 기독교 수용, 몽골 타타르의 침공(1240~1450), 몽골 침입 후 여러 공국으로 분열, 그 중 일부가 북쪽으로 이동하여 모스크바 공국 건설, 게티만(지방 수령)의 분열과 전쟁, 14~15세기 우크라이나 서부 리투아니아 지배, 1560년대 폴란드 지배, 폴란드와 해방 전쟁(1648~1654), 전쟁 후 1654년 러시아 우크라이나 형제 동맹, 1917년 독립을 선언했으나 볼셰비키에 진압, 러시아 혁명 후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 1991년 독립….

힘없고 무능한 정부 밑에서 국민들은 온갖 고난과 고통을 당했다. 몽골 침입 시에는 움직이는 모든 수놈을 죽여버리라는 명령으로 몽골군 눈에 띄는 수많은 남자가 죽임을 당했고 여자는 정복군의 노예가 됐다.

18세기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페체르브르그를 건설하는데 강제노역으로 우크라이나의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발에 족쇄를 차고 노동을 했고 그곳에 뼈를 묻었다. 19세기 러·터 전쟁에서도 우크라이나의 용사들이 러시아군으로 동원되어 피를 흘렀다. 1930년대 대기근에서는 200만명 이상의 아사자가 속출했다. 히틀러가 1941년 폴란드를 침공하고 가장 먼저 공격한 곳이 우크라이나였다. 스탈린의 지배를 경험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오죽했으면 전쟁 초기 히틀러와 함께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모색하여 전쟁을 돕기도 했다. 2차세계대전 중에 우크라이나인 약 300만명 이상이 죽거나 부상했다. 러시아 혁명 후 70년 이상의 공산정권 아래에서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보존하며 생존했다. 우크라이나는 수많은 고난과 수난의 역사 속에서도 멸망하지 않고 1991년 8월24일 독립을 선포하고 세계사에 처음으로 자신의 국호와 국기, 국가를 휘날리며 우뚝 섰다. 오늘날에도 많은 민족이 지구상에서 나라를 이루지 못하고 세계 여러 나라로 흩어지거나 사라지는 예는 얼마든지 있다. 이제 독립 열네 돌을 맞이하는 우크라이나 수난의 역사는 영광의 역사로 대전환하고 있다.
 

고려인 교육열 100여 소수민족중 최고
 
 
우크라이나에는 약 2만명 이상의 한인 교포들이 있는데 보통 고려인이라고 부른다. 1989년 통계에 의하면 8900명의 고려인 교포들이 있는데 그후 소련의 해체와 중앙아시아의 정정 불안으로 많은 고려인들이 우크라이나로 유입됐다. 정확한 통계는 아직 없지만 한국외국어대 임영상 교수와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약 1만5000명에서 3만명의 고려인이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구소련여권을 소지한 사람이나 중앙 아시아에서 1990년대 이후에 와서 주거지 등록을 하지 않은 사람이 많고 혼혈되어 한국피가 있으면서도 스스로 우크라이나인으로 생각하는 사람 등도 있지만 1989년 이후 인구 통계가 없어 정확한 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우크라이나의 웬만한 소도시에도 우리 고려인 교포들이 살고 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초근목피의 조국을 등지고 두만강을 건넌 고려인들은 러시아 극동지방에 집단주거지를 이루며 살았다. 1910년대에 이미 그 수가 10만명을 넘어섰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으로 약 18만명이 죄인같이 기차 짐칸에 태워져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허허벌판으로 강제 이주당했다.

1953년 스탈린 사후 공민권이 회복되고 젊은층을 중심으로 한민족 특유의 교육열과 근면을 무기로 좋은 교육 환경과 직장을 찾아 모스크바, 페체르브르그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와 하리코프 등지로 소수의 젊은이들이 왔다. 그들이나 그들의 후손 중에는 아나톨리 김(작가), 율리 김 (음유 시인), 빅토르 쵸이(가수), 미하일 박(역사학자), 블라지미르 신(권투선수), 렐리 리(성악가)등 문화 예술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많다.

1950∼60년대에 우크라이나에 정착한 분들이 고려인 1세대로 이제는 60∼70세가 넘었다. 1970∼80년대에도 학업, 직장, 결혼 등의 이유로 주로 중앙아시아에서 여러 명의 고려인들이 우크라이나로 왔다. 당시만 해도 경제적인 면에서 발틱 3국을 제외하고는 우크라이나가 가장 살기 좋았다. 특히 농작물 재배에 남다른 소질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고려인들에게 드넓은 우크라이나 대평원의 농경지는 희망의 땅이었다.

러시아의 전설적인 가수 빅토르 쵸이(최)가 인기 절정이던 80년대 초에는 전소련의 고려인 교포 사이에 우크라이나로 가자는 붐이 일기도 했다. 현재는 불법체류자도 있지만 상업적인 기질을 발휘하여 신흥부자가 된 사람도 많으며 학자, 의사, 정치인, 사업가 등 우크라이나의 상류층으로 발돋움한 사람도 많다. 고려인들의 가장 큰 특징은 우크라이나의 100여 소수민족보다 교육 수준이 월등하게 높다는 것이다. 키예프에서 필자가 만나 60세 넘으신 분들은 거의 모두 초급대학 이상의 학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식들은 무조건 대학에 보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키예프한인회장 나탈리야 남 여사는 “고려인이 교육면에서 유대인보다 앞선다”고 얘기한다.
 

9월은 초등부터 대학까지 ‘입학 시즌’
 
 
우크라이나의 9월1일은 새 학년 개학이다. 이른 아침부터 거리거리에는 꽃을 든 학생들이 넘쳐난다. 여학생들은 머리에 큰 리본을 달고 남학생들은 나비 넥타이를 맨 정장이나 교복을 단정히 입고 등교한다.

초, 중학교 시절 여름방학이 끝날 즈음 숙제 걱정을 하며 밀린 일기를 쓰는 고역은 여기엔 없다. 우크라이나 초등학교(11년제)에서는 5월말에 방학을 하는데 일절 숙제라는 것이 없다. 석달 동안 지독히 공부를 안해 초조한 나머지 애들에게 한국어 영어 수학을 가르치려고 하면 애들은 “방학때 공부하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다”고 불평을 하며 꾀를 부린다.

9월1일, 일곱살짜리들이 초등학교 학생이 되는 날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슴의 반을 차지하는 커다란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간혹 3월 꽃샘추위에 떨며 입학식을 하지만 이곳에서는 가을이 시작되는 가장 좋은 날 멋을 부린 어린애들이 학교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볍고 희망차 보인다.

대통령, 삼부요인, 장차관 및 국회의원과 웬만한 정치인들도 자신의 출신학교나 근처 학교 입학식에 참석하여 신입생을 축하한다. 입학식에서는 11학년 학생이 1학년 신입생 대표를 무동 태우고 재학생 학부모 교사 사이를 작은 종을 흔들며 돌아다닌다. 모인 사람들은 어린이들의 앞날을 축복하며 힘껏 박수를 친다.

대학에서도 9월1일은 설레는 날이다. 어떤 녀석들이 입학했을까? 이번 학기에는 무엇을 할까? 벽안의 우크라이나 학생들에게 한국의 키 작은 선생은 무엇을 전할 수 있을까? 요즘 우크라이나의 장미 한 송이는 10흐리브니아(약 2000원)이다. 이곳의 급여 수준으로는 작은 돈이 아니다. 그렇지만 거의 모든 학생들이 장미 몇 송이를 1년간 가르칠 선생님께 드린다. 박봉의 선생님들은 꽃에 묻혀 행복한 날이다. 필자에게도 매년 9월1일에는 작은 책상에 장미가 수북이 쌓인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샴페인 한병, 초콜릿, 그리고 장미 한송이면 아주 훌륭한 선물이 된다. 선생님들에게도 그 이상의 선물이나 촌지는 거의 없다.

자식 자랑은 팔불출에 속한다지만 몇 해 전 딸내미 초등학교 입학식이 생각난다. 입학생 30명 중 유색인은 딸 혼자였다. 어떻게 적응할지, 말은 잘 알아들을지, 아이들이 동양애라고 놀리지는 않을지 온갖 걱정을 하며 입학식이 끝나고 교실로 들어갔다. 우리나라같이 키 순으로 자리를 정하고 앉아 있는데 선생님이 질문을 했다. “셰프첸코는 누구입니까?” 애들 입에서 축구선수다 대통령이다, 온갖 말이 튀어나오는데 당돌하게 딸내미가 손을 번쩍 들더니 “우크라이나의 민족시인입니다”고 대답했다. 그때 한창 필자가 셰프첸코의 시를 번역 하느라 애들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름이었다. 그 후 딸내미는 그 학급에서 우크라이나어를 가장 잘하는 학생이 되었다.
 

시인 이름 붙인 그림같은 거리들
 

 
키예프에는 유난히 시인 작가의 거리가 많다. 아마도 문인의 이름을 붙인 거리를 모두 모으면 한 권의 문인 사전이 될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작가 뿐만 아니라 러시아 및 동유럽 작가들의 이름이 붙은 거리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키예프에서 가장 크고 번화한 거리는 크레샤직(세례, 침례라는 뜻) 대로(大路)이고 크레샤직과 연결되는 거리로는 셰프첸코(시인), 레샤 우크라인카(여류 시인). 이반 프란코 (작가, 시인, 극작가, 평론가 ), 삭사간스키(우크라이나 극작가, 시인), 톨스토이, 푸슈킨, 고골리, 고리키(이상 러시아 작가) 거리 등이다.

1991년 우크라이나 독립 전에는 혁명 광장, 레닌대로, 스탈린로, 10월 혁명로, 승리거리, 붉은군대 거리 등 사회주의 혁명과 관련된 거리 이름이 많았으나 독립 후 이들 거리의 이름들은 거의 모두 바뀌었다.

유명 작가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에서도 생소한 문인들의 이름이 붙은 거리도 있다. 그만큼 문인을 존경하고 사랑하여 거리의 이름으로 남겨 영원히 기억하려는 것이다. 부러운 마음에 우리나라의 ‘윤동주 대로’ ‘김소월로’ ‘정지용로’ ‘이상로’등을 생각해 본다

우크라이나의 여류 시인의 이름을 딴 레샤 우크라인카 거리는 셰프첸코 거리와 연결되는 차도보다 인도가 넓고, 도로 양쪽 인도 외에 도로 가운데에도 긴공원같이 인도를 만들어 길 옆으로 포플러가 즐비한 그림같은 거리이다. 사이비 시인이 판을 치는 요즘 세상에 우크라이나 문학사에서 가끔 진주같은 신선한 시인을 만나는 일은 즐겁고 기쁜 일이며 진정한 문인을 접하는 일은 가슴 벅차고 설레는 일이다. 나는 이 우크라이나 여인을 사랑한다. 가냘프고 섬세하면서도 주체 할 수 없는 감흥을 시로 노래 한 여인. 전 생애를 비탄과 슬픔으로 지내고, 결혼을 했지만 사랑하는 사람과의 갈등으로 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을 노래한 시인.

1871년에 태어나 19세기 음울한 니콜라이 2세 치하에서 살다 1913년 결핵으로 4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며 남긴 시로 후대인을 위로하고 인간의 진실과 자연의 숭고함과 사랑의 고귀함을 일깨워주는 여인, 자신의 조국 우크라이나의 운명같이 자신의 필명을 레샤 우크라인카로 바꾸고 치열하게 살았던 여인. 당시의 어느 고관대작, 부자도 가지지 못한 영예를 사후에 가지고 키예프의 가장 아름다운 거리를 자신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영원히 살아있는 가난한 시인.

낙엽이 뒹구는 가을, 마음이 울적한 날에는 레샤 우크라인카 거리를 걸으며 그녀의 시구를 생각해 본다.
 

‘오렌지 혁명’ 이후에도 부패 만연
 
 
작년 겨울 우크라이나에서 부정선거 시비가 일어 수십만 인파가 시위에 참가할 때, 필자는 키예프대 학생들에게 한국의 4·19와 6월항쟁을 이야기하며 시위에 동참하라고 독려하고, 학생 및 교수들과 함께 시위에 참가했으며 몇몇 신문에 기고도 했었다.

일부 사람들은 그 정권이 그 정권이고, 혁명이란 일부 정치가의 정치놀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하했지만 정권이 바뀌고 시위 참가자들과 언론은 ‘오렌지혁명’이라고 명명했고 새정부에 많은 기대를 했었다.

그러나 새 정부의 조각(組閣)부터 필자는 실망했다. 논공행상이 판을 치고 밥그릇 싸움이 시작되어, 학생운동 ‘포라(pora)’를 주도했던 20대의 젊은이가 청소년부 장관이 됐으며 오렌지혁명에 자금을 댄 30대의 젊은 실업가들이 대거 경제 부처를 장악했고, 총리는 우여곡절 끝에 40대의 율리야 티모셴코가 임명되었다.

정권이 바뀌고 많은 사람이 부정 부패 척결과 부조리한 사회구조의 변화를 바랐다. 필자가 실제로 좋게 느끼는 점은 공항의 부정적인 요소나 교통경찰의 행패는 많이 시정되었으며 치안도 좋아졌다. 그렇지만 계속되는 물가 상승과 부정 부패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8개월전 정권이 바뀌고 거의 40% 정도 물가가 올랐다. 부패 상황은 살인적이다.

예를 들어 사업 인허가에는 30가지 이상의 서류가 필요한데 정상적으로 서류를 준비하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고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지만 담당자에게 2000~3000달러를 주면 며칠 만에 허가가 나온다. 운전면허증은 200달러, 자동차 등록은 100달러, 심지어 일부 대학의 학점도 200달러면 살 수 있다고 한다.

온갖 부정 부패의 고리가 끊어지지 않았고 고위층에서는 자신의 기업 이익을 위한 온갖 특혜와 특권을 누렸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10억원을 쓰면 4년 안에 50억원을 번다는 소문은 소문만이 아니다. 그리고 고위 공직자나 국회의원은 거의 모두 큰 기업과 연관을 갖고 있는데 이러다 보니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앞뒤 보지 않고 뛰는 사람들이 있다.

급기야 지난주 빅토르 유셴코 대통령의 측근인 진첸코 비서실장과 토멘코 부총리가 개혁 의지가 없는 정권에서는 일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사표를 제출했고, 대통령은 오렌지혁명의 동지였던 티모셴코 총리를 비롯한 각료 전원을 해임했다.

5년 중임의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엄청난 권력을 갖게 된다. 그만큼 대선은 치열하다. 우크라이나의 전·현직 총리는 다음 대선의 후보자로 나올 확률이 높다. 초대 레오니트 크라프추크 대통령에 의해 발탁된 레오니트 쿠치마가 크라프추크를 누르고 대통령이 되었고, 현 빅토르 유셴코도 쿠치마 정부에서 총리를 지냈었다. 성급한 판단이지만 다음 대선에서는 재선을 노리는 유셴코와 율리야 티모셴코 전 총리가 맞붙을 가능성이 높다. 동거중인 정부의 권력 싸움이 좀 일찍 노출됐을 뿐이다.

 

한국교민 200여명 ‘한가위 놀이마당’
 
 
세계 200여개국의 크고 작은 도시에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교민들은 추석이면 살고 있는 나라에서 둥근 달을 바라보며 먼 고국과 고향을 그릴 것이다. 키예프에서 우리의 추석에 1000만명 이상이 고향을 찾는 민족 대이동을 한다고 얘기하면 모두 놀라고 궁금해한다. 참 경이로운 명절이다.

인터넷을 사용하기 전에는 음력 설, 추석 심지어 생일도 잊고 지냈다. 음력 달력이 없으니 계산해 보기도 힘들었고 이런 저런 일에 치여 생각도 못했다. 그러다 5년 전부터 이곳에서도 추석을 찾게 되었다. 당시 정신(丁新) 전 우크라이나 대사가 교민들의 한가위 잔치와 체육대회를 제안해 현지 한국기업 지사의 회사원, 유학생, 선교사, 자영업자 등 키예프의 모든 한인(韓人) 가족이 모였다. 송편을 만들기 어려워 모스크바 떡집에 주문하면 1200㎞를 달려 오는 기차편으로 떡을 받았고, 각 가정에서 음식을 준비해 푸짐한 추석상을 차렸다. 특히 유학생이나 홀로 있는 사람에게는 한국음식을 맘껏 먹고 회포를 풀 수 있는 날이다. 이것이 전통이 되어 매년 추석 전후 토요일에 키예프 한인들이 모인다. 이 자리는 고려인 교포나 혼혈아 외국인은 참석할 수 없고 순수 한국 혈통의 한국인만 모여 한가위 놀이마당을 펼친다.

지난 9월17일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 교민 200여명이 모여 한가위 잔치를 벌였다. 마침 문화부에서 우크라이나에 우리 전통 음악을 전수하기 위해 온 전남대 국악과 졸업생으로 구성된 아리랑 사물놀이패의 풍물놀이가 있어 여흥을 더욱 돋우었다. 이성주 대사의 축사로 행사는 시작되었다. 200여명의 교민들을 봄, 여름, 가을, 겨울 4팀으로 나뉘어 축구, 달리기, 어린이 놀이, 퀴즈게임 등으로 남녀노소 모두 한마음으로 경기에 임했다. 어린 시절 학교운동장에서 청군 백군으로 나뉘어 운동회를 할 때 이긴 팀에게 점수를 더해주는 방식으로 게임을 하다보니 4팀의 경기는 점점 열전으로 변했다. 특히 대우, 삼성, LG 전자에서 푸짐한 상품을 협찬해 경기가 끝날 때마다 어린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분위기를 이끌었다.

한편에서는 중년을 넘긴 어른들의 술판이 벌어지고 어린이는 어린이끼리 몰려다니며 게임을 하고 오랜 만에 만나는 아주머니들은 아주머니들끼리 수다를 떨다보니 어느 사이 점심시간, 모스크바에서 특별 주문한 송편을 중심으로 각 가정에서 준비한 음식을 긴 식탁에 놓아 뷔페식으로 나누어 먹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아이들부터 노인까지 줄을 서서 음식 품평회를 하며 덕담을 나누며 먹는 모습은 눈물겹게 정겨웠다. 특히 대사관에서는 대형 전기밥솥과 가스불을 이용해 밥 100인분과 국을 준비하여 모든 참석자들이 따뜻한 밥과 국물을 먹었다.

한국인! 세상 어디에 있어도 김치와 고추장과 된장을 먹는 사람들. 한국인! 세상 어디에 있어도 추석과 설날과 조상들의 제삿날을 기억하는 사람들. 그런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이 가슴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하루였다.
 

의사·변호사·공무원 직업 인기 시들
 
 
우크라이나 키예프 사람들 월급을 물어보면 좀 의아한 면이 있다. 보통 150~200달러(15만~20만원)를 받는다고 한다. 좀 많이 받는 사람은 300달러 이상 되는 사람도 있고 개인사업가들은 엄청난 부자도 있지만 극소수이고 보통은 월급 200달러 정도로 보면 무난할 것이다. 그런데 먹는 것이나 생활하는 면은 월급 200달러 수준을 훨씬 넘는다. 젊은이들 옷차림이나 가전제품 그리고 요즘 유행하는 컴퓨터나 휴대전화 사용을 보아도 유럽의 다른 나라와 다름없다.

필자가 잘 아는 친구는 의사이고 부인은 약사다. 우리나라 같으면 환상의 커플일 것이다. 그런데 이 친구의 월급은 약 200달러이고 부인의 월급은 150달러라고 한다. 기본적인 한달 수입이 부부 합해서 350달러다. 그런데 애들 학교 보내고 유치원 보내고 여름이면 흑해로 휴가 떠나고, 겨울이면 스키장 가고, 러시아 자동차도 한 대 굴린다. 비결이 무엇일까?

이 친구는 키예프 근교에 ‘다차’라고 부르는 개인 별장을 가지고 있다. 주말이면 부모님과 다차에서 보내는데 감자며 여러 작물을 심어서 빵과 고기 이외에 식품을 사는 것이 거의 없다. (옛 소련시절 직업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다차를 국가에서 무상 지급 했다. 지금은 다차도 사고팔지만 키예프의 거의 모든 가정에 다차가 있다)

그리고 이 친구는 자신이 일하는 병원 외에 개인 병원을 개업한 친구와 연락해 수술이나 다른 진료를 도와준다. 그리고 자신이 담당하는 병원에서 진료를 하러 오는 아는 사람에게는 별도의 수수료를 받고 좋은 치료를 해주고 좋은 약을 준다.

그의 부인은 약사로 근무하다가 남는 약이나 시중에서 구하기 힘든 약을 모았다가 아는 사람에게 어느 정도 웃돈을 받고 판다. 비밀이지만 이 친구 말이 한 달에 부부가 합해서 1000달러 이상 번다는 것이다. 많은 부부가 맞벌이고 여러 사람이 직업 외 부업이 있다.

농담으로 우유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우유를 가지고 나오고, 담배 공장 사람은 담배, 전구 공장에서는 전구 등등 자신이 근무하는 공장이나 회사에서 나오는 제품을 월급 이상으로 가지고 나와 팔고 쓴다. 그러니 단순히 국민총생산(GNP)이나 평균 수입을 말하기는 곤란한 점이 있다.

가끔 한국에서는 공무원, 회사원, 의사, 법률가, 선생님등이 좋은 직업이라고 이야기 하면 이곳 사람들은 시큰둥하다. 도대체 돈되는 직업이 아니라는 뜻이다. 거리에서 담배를 팔아도 비즈니스한다고 하고, 키오스크라고 부르는 구멍가게를 해도 비즈니스를 한다 하고, 중고품을 모아 팔아도 비즈니스한다고 말한다. 비즈니스에 미친 사람들이다.

오랜 사회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전이 과정에서 겪게 되는 ‘돈에 미친’ 천박한 자본주의의 모습이 우크라이나 곳곳에서 보인다.
 

한국채소 심으며 ‘고국 향수’
 

 
키예프 시내에서 30여분만 시외로 나서면 동서남북이 온통 들판이고 대평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라진 짐마차나 말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여유있는 한국인들은 이곳에 와서 울타리만 치면 골프장이 될거라지만 필자는 어느해부턴가 우리 농작물을 심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왔다.

구소련 시절 우크라이나는 전 소비에트 연방 곡물의 4분의1을 생산하여 빵공장 또는 빵바구니라는 별칭이 있었다. 그만큼 농산물이 풍부하고 경작지가 좋다는 말이다. 지금도 인구의 40% 정도가 농업에 종사하며 아파트가 아닌 단독주택에서는 대개 텃밭을 가꾸며 살고 있다.

1970~1980년대만 하더라도 집단농장인 콜호스에서는 많은 트랙터와 경비행기를 이용한 농사로 대량의 곡물을 생산하여 농촌 생활 안정과 나라 경제 발전에 한몫을 단단히 했었다. 그러나 체제가 바뀌고 집단농장은 명맥만 유지할 뿐, 유가 상승과 유통체계 붕괴로 농업은 파탄 상태이고 독립 후 이농현상이 급격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사회주의 정권 하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던 농민들이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고 있다.

지금도 수입하는 치즈나 육류, 야채, 과일 등은 가격이 서유럽과 비슷하다. 그 넓고 좋은 땅을 두고 농산물을 수입하는 아이러니가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다.

우리집은 5년 전부터 키예프 근교에 조그만 땅을 빌려 여러가지 작물을 키우고 있다. 아는 사람으로부터 한국산 열무, 무, 배추씨를 받아 심었지만 첫해에는 실패했다. 거의 매일 가서 물을 뿌려주었지만 잘 자라지 않았다. 거름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식물도 한국산이 우크라이나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산다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듬해부터는 근처에 흔한 말똥을 사서 뿌린 다음 며칠 후 흙을 뒤집고 밭을 일구어 심었다 . 수확량이 퍽 많아 주변 사람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그러다 2~3년 전부터 키예프에도 대형마트가 생기면서 배추며 무를 팔기 시작하여 우리가 심는 것이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비효율적이라 생각하고 깻잎을 키우기로 했다.

작년과 올해 심은 깻잎은 대성공이었다. 깻잎은 어디에 심어도 잘 자란다. 250그루쯤 심었는데 주말이면 온통 깻잎 향기에 취해 살았다. 6월부터 9월까지 깻잎조림, 깻잎튀김, 깻잎볶음, 찐깻잎, 깻잎김밥, 깻잎달걀부침 그리고 국마다 깻잎을 넣어 먹으니 애들은 깻잎이라면 손사래를 치고 싫어한다. 날이 쌀쌀해 첫서리가 내리면 깻잎의 생명은 끝이다. 온통 까맣게 잎이 퇴색한다.

우리 밭의 깻잎은 조국의 향기를 느끼게 한다. 깻잎 몇 장을 따서 코에 대고 길게 심호흡을 하고 향내를 맡으면 구수하고 짙은 깻잎향과 함께 시골냄새가 배어난다. 30여년전 할머니가 20장씩 실로 묶어 100원에 팔던 그 깻잎이 키예프 변두리 흑토 위에서 자라는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다. 벌써 씨를 받을 때다.
 

한국문화 행사로 바쁜 10월
 
 
우리나라에서 매년 10월 초에 국경일 행사들이 연이어 있지만 이곳 우크라이나에서도 지난 한 주일은 크고 작은 행사로 바쁜 날들이었다.

오래 이곳에 살다보니 이런 저런 행사에 초대를 받는데 올해도 여러 행사장을 찾아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먼저 대사관 주최로 열린 개천절 행사는 각국 외교 사절과 우크라이나를 대표하는 인물, 교민들이 모여 키예프의 가장 고풍스러운 구르셉스키(1917년 당시 초대 대통령) 거리와 국회의사당 앞 리셉션 홀에서 진행된다. 올해는 10월4일 전·현직 우크라이나 외무장관 및 여러 나라 대사, 우크라이나 국회의원, 교민, 고려인 교포 그리고 키예프 국립대 총장 등이 참석하여 한국의 개천절을 축하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또 전(全)우크라이나 고려인협회 주최로 10월5일부터 7일까지 한국 영화제, 한국음식 소개, 남북한 그림전시회, 한국전통예술단 공연, 키예프 외국어대 한국어과 10주년 기념 세미나와 음악회, 갈라(Gala) 방송국에서 협찬하여 열린 우크라이나 교포 및 한국의 공연단이 참석한 대공연, 그리고 키예프국립대 한국어문학과에서 열린 한글의 날 행사 등이 잇따라 열렸다.

외로운 섬 같이 우크라이나 러시아 사람들 틈에 살면서도 조상의 나라를 잊지 못해 어설프게 고국을 해바라기하는 고려인들의 모임이 우크라이나의 큰 도시마다 있고 각 도시의 모임을 합하여 이루어진 것이 전 우크라이나 고려인협회다.

전 우크라이나 고려인협회가 주관한 한-우크라이나 문화 페스티벌 식장 입구에는 태극기와 인공기가 나란히 걸려 있었는데 남북한 대결 상황이 아닌 화해의 장을 만들려는 고려인들의 뜻을 읽을 수 있었다. 첫날 공연에서는 한국에서 온 손경순 전통 무용단의 부채춤, 살풀이, 승무 등의 공연이 있었으며 둘째 날에는 우크라이나에 퍼져 있는 각 지방의 고려인 교포들의 노래와 춤 경연이 있었고, 멀리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고려인 가수와 그룹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유명 가수들이 출연하여 고려인 교포와 한국에서 온 교민, 초대된 외국인 등 1000여명의 참석자가 한마음이 되어 어우러졌다.

사실 소연방 시절 고려인 교포들은 미국 교포에 비해 문화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소연방 붕괴 후 국가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려인들도 곤란을 겪고 있지만 우리 가락, 우리 춤 사위에 대한 흥은 여전했다.

10월9일 한글날 행사에서는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문자가 만들어진 날을 기념일로 하는, 전세계에 전무후무한 날이라고 필자가 강조했는데 영어, 불어, 독어,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 중국어, 일본어 등 그 언어의 날이 있는 것은 아마 한국어가 유일하다고 생각하며 가슴 뿌듯하게 이국 땅에서 한글날 행사를 치렀다. 외국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고국의 달력을 바라보고 사는 것 같다.
 

우크라선 20세 전후 결혼
 
 
쌀쌀한 가을 주말, 거리 거리 온갖 풍선을 달고 장식을 한 결혼 차량이 지나가는 것을 볼 때면 신부의 수줍은 얼굴이 보고 싶다.

요즘 우크라이나에서는 문란한 성행위가 온갖 매체를 통해 나오고 젊은이들의 동거나 혼전 관계가 흔하고 기혼자의 외도가 도를 지나치리만큼 많지만 젊은이들의 결혼은 언제나 신선하고 성스럽다.

세상이 좀 어지러워도 결혼식은 아름답다. 예식 없이 혼인신고만 하고 사는 부부도 많지만 보통 가정에서는 온갖 준비를 한다. 여자는 가전제품 등의 혼수품을 마련하고 남자는 집을 준비한다는 공식은 없다. 결혼 연령은 20세 전후가 많고 25~26세를 넘기면 만혼이라 하고 30세 이후의 결혼은 재혼이나 아주 늦은 결혼으로 여긴다.

며칠 전 제자의 결혼식이 있어 참석했었다. 식장에서 우리나라같이 축의금만 내고 식당으로 가는 일은 없다. 보통 5000원에서 1만원 정도의 축의금을 낸다.

신랑 신부는 ‘작스’(ЗАГС)라고 부르는 결혼등록소에 가서 서명하고 축하객들과 사진찍는다. 작스 공무원이 신랑 신부와 축하객에게 결혼이 성사되었음을 선포하고 결혼증명서를 주면 결혼 예식은 끝난다. 신혼여행은 따로 없고 시내 명소 중 한두 군데를 하객들과 같이 들러 사진 찍고 샴페인을 터트리면 모든 예식은 끝이다.

피로연은 보통 오후 5~6시에 시작되며 밤 12시를 넘기는 것은 보통이고 시골이나 작은 도시에서는 다음날 다시 모여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논다. 준비한 음식과 술이 동날 때까지 마시고 놀아야 직성이 풀리는데 심한 경우 3박4일간 피로연을 하는 경우도 있다.

술을 마실 때 급하게 취하도록 마시면 예의가 아닐 뿐 더러 장기전에 돌입할 수 없다. 몇 잔 건배하고 덕담 주고받고 신랑 신부에게 “고리카” (‘쓰다’는 뜻이지만 입맞추면 달콤해지니 키스하라는 뜻)를 큰소리로 연발하면서 손벽을 치면 신랑 신부는 진한 키스를 한다. 그러면 하객들이 숫자를 센다. 짓궂은 사람들은 술 마실 때마다 고리카를 연발하는데 백 번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얘기하고 노래하고 춤을 추다 보면 계속해서 음식이 나오기 때문에 취할 사이도 없다. 깨고 마시고 깨고 마시고 춤추고 사회자가 야한 농담도 하고 퀴즈나 게임을 이끌며 하객에게 준비한 선물도 나누어 준다. 얼큰히 취해 밤 12시 넘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아득하기만 하다.
 

남녀 모두 40도 넘는 독한술 즐겨
 
 
우크라이나의 서부 지역은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다. 외세의 침략이 많았고 지역적으로 유럽과 가깝기 때문에 서유럽의 유행도 가장 빠르게 들어온다. 폴란드와 접경을 이루는 리보프 지방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메카이다.

서부 우크라이나의 한 처녀가 임신을 하여 출산을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흑인아이를 낳았다. 출산을 지켜 본 할아버지가 한숨을 쉬며 한마디했다. “모스칼리만 아니면 괜찮다.” 모스칼리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모스크바 사람을 경멸하며 부르는 말이다. 러시아 사람들은 우크라이나 촌놈이라는 뜻으로 우크라이나 남자는 ‘하홀’ 여자는 ‘하훌루슈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술을 좋아하지만 우크라이나 하홀은 술을 아주 좋아한다. 술은 보통 40도의 보드카나 집에서 만든 사마곤이라는 50도의 독주가 제격이다. 1인당 2ℓ 이상을 마셔야 하홀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수업 중에 전형적인 우크라이나 스타일의 여학생이나 남학생에게 “나는 한국의 하홀인데 학생은 진짜 우크라이나의 하홀 같다”고 하면 교실이 떠나가게 학생들이 웃는다.

우크라이나 남자도 술을 잘 마시지만 여성들도 술을 잘 마시고 춤을 좋아한다. 지난날 온갖 외세의 지배로 남자들은 죽음을 당했지만 우크라이나 여성들은 온갖 수난을 겪어야 했다.

우크라이나 여성들은 키가 크고 체격이 좋지만 아주 여성다운 면이 있다. 남자들은 후줄근한 반면 젊은 여자들은 온갖 치장을 하고 멋진 화장을 한다. 그만큼 맵시가 좋고 몸매에 자신이 있다고 느껴진다. 웬만한 여성은 모델이나 배우 뺨치는 수준이다. 처음 우크라이나에 오는 한국 남자들은 우크라이나 여성들을 보고 놀란다. 우선 외모에 압도당하고 몇 마디 말이라도 걸어보면 그 호방함에 다시 놀란다. 차 한 잔 하자고 하면 뒤로 빼는 여성이 별로 없다.

친한 친구와 농담 끝에 한국엔 간통죄가 있어 배우자 있는 사람이 다른 이성과 잠자리를 같이하다 발각되면 감옥에도 가고 많은 벌금을 물어여 한다고 하자 그 친구 왈, “완전 악법이다 악법, 우리나라 같으면 감옥이 모자라 모든 학교를 감옥으로 만들어도 모자랄 것이다.”

얼마전 학생들에게 동거에 대해 물어보니 십중 팔구는 결혼 전에 해볼만하다는 대답이었고 우크라이나 친구 말에 의하면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기혼자 중 배우자 외 잠자리를 같이 하는 비율이 70~80%는 될 거라고 이야기한다.

옛 소련연방 시절 엄격했던 성범죄나 매춘이 급격히 늘어나고 우크라이나의 하홀 하훌루슈카의 성개념도 도덕성을 넘어 유희로 변하는 것 같다.


 



 

Posted by 비회원

로마 곳곳에 고대문명 흔적

로마 곳곳에 고대문명 흔적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14 14:27

로마 곳곳에 고대문명 흔적
콜로세움·개선문·베드로 성당 등 볼거리 빼곡 


 




지상에서 가장 예술적인 도시를 꼽으라면? 나는 서슴지 않고 파리, 피렌체, 로마를 꼽고 싶다. 베를린에도, 바르셀로나에도, 그리고 뉴욕에도 많은 미술관과 유적지가 있지만 그 어느 곳도 위의 세 도시를 능가하지는 못한다. 대부분의 도시들이 몇 군데 보고 나면 쇼핑으로 눈을 돌려야 하는 형편이지만 이들 세 도시에서는 몇날 며칠을 발이 부르트도록 다녀도 볼거리가 끝이 없다.

이제 ‘이탈리아 예술 산책’의 마지막 여행지로 로마를 남겨두었다. 가봐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닌 까닭에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19세기에 파리, 20세기에 뉴욕이 있었다면 로마는 기원전부터 18세기까지 무려 2000년 이상 유럽 예술의 중심지였다. 규모로 보나 역사로 보나 여타의 도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수준이다. 이 방대한 역사의 도시, 로마를 소개하려니 교과서적이긴 하지만 시대적 흐름에 따라 정리를 해보는 것도 효과적일 것 같다.

◈고대 로마(기원전 8세기~기원후 5세기)

오늘날 남아 있는 로마의 유적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들은 고대 로마의 모습, 특히 로마 제국의 모습이다. 공회당이라 불리는 포럼, 콜로세움, 개선문, 판테온, 도무스 아우레아…. 로마에는 2000년 전 문명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중세 로마(기원후 5~14세기)

로마에는 교황청이 있다. 12 제자 중에서 그리스도로부터 천국의 열쇠를 받은 베드로가 초대 교황이 되었고, 순교를 했다. 순교 장소에 교회를 세운 것이 4세기 경에 건립한 성 베드로 성당이다. 이후 신앙의 시대였던 중세 천년동안 로마는 서구 사회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을 비롯하여 많은 중세 초기 교회들이 남아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로마(15~16세기)

로마가 가장 화려했던 시대였다. 베드로 성당의 재건축이 이때 이루어졌고, 라파엘로, 미켈란젤로와 같은 천재 예술가들이 바로 로마의 교황청과 베드로 성당에서 그들의 재능을 뿜어냈다. 이들 외에도 당대 한 가락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로마에서 활동을 했다.

◈바로크 시대의 로마(17세기)

17세기 바로크 시대에 로마는 다시 한번 미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바로크 양식이 탄생된 곳이 바로 로마였으며 그것이 전 유럽으로 확산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로마는 예수회 교회를 비롯하여 화려함이 극에 달하는 오리지널 바로크 교회들의 집산지다.

◈신고전주의 시대(18세기말~19세기초)

한번도 고전, 고대를 망각한 적이 없었던 유럽의 미술계에 다시 한번 본격적인 고전 붐이 일어난 것이 신고전주의 양식이었고, 그 중심에 로마가 있었다. 예술가뿐만 아니라 유럽의 지성인들에게 로마 여행은 필수코스이자 지성의 완결 편이었다. 로마에 가보지 않고 지성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건축미의 극치 ‘베드로 성당’
웅장·정교… 인간의 한계는 어디인가… 


 
세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술가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교회, 교황이 대주교인 성당….

바티칸의 베드로성당을 수식하는 말은 이 밖에도 많이 있을 것이다. 베드로성당에 갈 때마다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를 생각하곤 했다. 인간의 건축술은 얼마만큼 장엄하고 웅장하며, 인간이 만들어낸 조각과 회화는 얼마나 정교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지.

베드로성당은 몸체와 광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광장 양쪽에는 거대한 기둥 숲으로 이루어진 두 개의 회랑이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두 팔을 벌리고 있는 것과 흡사하다. 그곳을 찾은 이들을 교회가 따듯하게 안아주고 있다는 의미로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 회랑과 광장은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거장 베르니니의 작품이다. 지난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거했을 때 우리는 수백만의 인파가 베드로성당 광장에 운집한 광경을 보았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 그것이야말로 광장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광장을 통과하여 교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대한 청동문을 통과해야 한다. 청동문 안쪽에는 나르텍스라는 공간이 있는데 교회의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공간이다. 여기서 내부로 들어가려면 다시 한번 청동문을 통과해야 한다.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는 동안 이런 여과 과정을 거치면서 정화된 마음을 가지도록 유도한 것이다. 베드로성당의 미술품들은 대부분이 수백년 이상 된 것들이지만 청동문 중에는 만추와 민구치를 비롯하여 20세기 초 이탈리아 최고의 조각가들의 작품이 있다. 그들은 피사노, 도나텔로, 미켈란젤로 그리고 베르니니의 계보를 잇는 세계적인 구상조각의 대가들이다.

성당 내부로 들어가면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되며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한동안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거대한 기둥들과 각양각색의 화려한 돌들로 만들어진 벽, 천장, 곳곳에 설치된 셀 수 없이 많은 조각작품들….

성당 안에 있는 수많은 조각 작품들은 대부분이 역대 교황들의 장례 기념비, 즉 무덤이다. 교황 한 분이 서거하실 때마다 당대 최고의 조각가에게 의뢰하여 장례 기념비를 제작케 하는 것이 교회의 오랜 전통이었다. 물론 이들 장례 조각은 교황 생전에 준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베드로성당이 처음 지어진 것은 324년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으로부터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은 밀라노 칙령(313년)이 발표된 직후이다. 그동안 금지됐던 그리스도교를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믿을 수 있게 되자 무엇보다도 절실했던 것이 종교예식을 치를 수 있는 장소였고,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교회였다.

베드로성당이 오늘날의 모습을 띠게 된 것은 15세기말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밀라노의 건축가 브라만테에게 재건축을 의뢰하면서부터이다. 이 거대한 성당을 다시 짓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했고, 교황은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를 팔기 시작했으며, 그것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에 결정적인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리하여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가 탄생하게 되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예수 시신 안고 있는 마리아 모습 조각미의 극치

 
베드로 성당은 뭐니 뭐니 해도 미켈란젤로와 베르니니가 주인공이다. 미켈란젤로는 16세기 르네상스를, 베르니니는 17세기 바로크 양식을 절정에 올려놓은, 두 사람 모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조각가들이다.

먼저 미켈란젤로의 작품으로는 그 유명한 ‘피에타’(사진)가 있다. 성당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피에타가 있는 곳이다. 피에타란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말인데, 미술에서는 성모님이 죽은 아들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을 그리거나 조각한 것을 가리킨다.

베드로 성당에 있는 ‘피에타’는 미켈란젤로가 24세 때 제작한 것이다. 아들의 시신을 안고 슬픔에 잠겨 있으나 결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성모님의 모습은 너무도 젊고 아름다워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죽은 예수님의 몸은 축 늘어져 있으나 인체의 골격은 물론 손등의 핏줄까지 정교하게 묘사되었다. 어쩌면 서 있는 형태보다 훨씬 더 만들기 어려웠을 죽은 인간의 모습을 스물 네 살의 미켈란젤로는 완벽하게 만들어냈다. 작품 전체를 감싸고 있는 성모님의 옷 주름은 부드러운 찰떡으로 빚어놓은 듯 감미롭다.

‘피에타’는 사실적 묘사 측면에서 본다면 미켈란젤로의 예술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그는 이 작품 이후 사실적 조각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였다. 향후 그의 예술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세계의 아름다움과 완벽함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형태를 통해 작가의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쪽으로 향했다. 그것은 4세기 후에나 등장한 현대 미술의 개념이기도 하다.

성당 중앙으로 발걸음을 향하면 거대한 돔 아래에 서게 된다. 이 돔 역시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것으로 높이는 무려 120m에 이른다. 베드로 성당을 하늘에서 보면 이 돔을 중심으로 정사각형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 같은 단순한 구조를 설계한 것이 바로 미켈란젤로이다.

돔 아래에는 제대가 있는데 이 제대를 둘러싼 구불 구불한 기둥 모양의 거대한 청동 덮개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베르니니의 작품으로 덮개를 받치는 기둥의 높이만도 29m가 된다. 베르니니의 작품 중에 대주교좌(大主敎座)도 있다. 주교좌가 있는 성당을 주교좌 성당이라 부른다. 세속이든 종교든 의자는 권위의 상징인 모양이다. 베르니니가 만든 성 베드로 주교좌는 너무도 화려하고 커서 정작 어디에 앉아야 할지 모를 정도이다. 역시 청동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네 명의 교부(敎父)가 의자를 받치고 있고, 하늘에서는 성령이 내려오고 있으며, 성령을 감싸고 있는 한 무리의 천사들이 구름떼에 둘러싸여 있는 형태로서 바로크 예술의 화려함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보여주려는 듯 하다.

베르니니는 교황님의 장례 묘비도 두점 제작했다. 하나는 우르바노 8세의 무덤이고 다른 하나는 알렉산데르 7세의 무덤이다. 사자(死者)가 중앙에 앉아 있고 그 아래에 의인화된 인물들이 서 있는 형식인데 이후 미국이나 유럽의 광장에 세워진 수많은 기념비들이 바로 이 작품을 응용한 것이다. 모방은 어렵지 않으나 창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켈란젤로와 베르니니가 위대한 이유는 그들이 창조자들이기 때문이다.
 

로마의 핵심은 바티칸이다. 바티칸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 나서도 최소한 1시간 정도는 줄을 서서 기다려야 입장표를 살 수 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표사느라고 2시간 이상을 길에 허비해야 하니 서두르는 것이 좋다.

바티칸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스탄자 디 라파엘로라 불리는 라파엘로의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진 방들과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와 벽화가 있는 시스티나 예배당이다. 바티칸의 모든 푯말은 방문객들을 이 두 곳으로 안내하고 있다.

시스티나 예배당은 교황의 전용 예배당(chapel)이자 신임 교황을 선출하는 곳으로서 교황청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데 바로 이곳에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와 벽화가 있다. 시스티나라는 말은 예배당을 건축토록 한 교황 식스투스 4세(1471~1484)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는 초기 르네상스의 대가들이었던 보티첼리, 핀투리키오, 페루지노, 기를란다요를 불러 그곳을 장식하도록 명했다. 페루지노는 라파엘로의 스승이고, 기를란다요는 미켈란젤로의 스승이다.

시스티나 예배당에 들어서는 순간 그러나, 이들 15세기 대가의 벽화는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대신 한 눈에 관람객을 압도하는 것은 미켈란젤로의 거대한 천장화와 벽화이다. 미켈란젤로는 1408년부터 1512년까지 4년에 걸쳐 이곳에 천장화를 그렸다. 고개를 위로 들어 천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한 인간이 그토록 거대한 공간을, 일찍이 유래가 없던 방식으로 채웠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 의문을 갖게 된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예술가들 중에서 미켈란젤로를 가장 위대한 예술가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미켈란젤로에게 이 일을 주문한 사람은 베드로 대성당 재건축을 추진했던 교황 율리우스 2세였다. 그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직접 군대를 지휘하는 전투적인 교황이었지만 예술을 사랑했고, 그것의 가치를 알았던 전형적인 르네상스 시대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알고 썩힐 리 없었다. 요즘 문화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문화마케팅, 문화전쟁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지만 이미 500년 전에 그는 문화의 위력을 알고 있었다.

율리우스 2세는 처음에는 미켈란젤로에게 자신의 영묘를 제작하도록 명령했었다. 조각가로서 이름을 날리던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대규모 영묘를 주문받게 되자 신바람이 나서 작품을 계획했다. 그것은 등신대 크기의 조각상이 40점이나 들어가는 그야말로 거대한 영묘였다. 미켈란젤로는 직접 카라라 대리석 산에 가서 돌을 채석했다.

그가 선택한 대리석이 지중해에서 뗏목을 타고 로마의 테베르 강에 도착하여 막상 돌 값을 지불해야 하는 순간 비정한 교황은 작가를 만나주지도 않으며 홀대했다. 이에 분개한 미켈란젤로는 더 이상 교황님이 시키는 일은 하지 않겠다며 가지고 있던 짐들을 처분하고 고향 피렌체로 내려와 버렸다. 교황은 뒤늦게 외교 서신을 보내고, 사람을 보내는 등 공을 들인 끝에 어렵사리 작가를 만날 수 있었는데 장소는 로마가 아니라 볼로냐였다. 미켈란젤로가 교황이 거주하던 로마로 가지 않고 제3의 장소를 택했다는 것은 권력 앞에서 굽히지 않았던 작가의 자존심이었다.


38세 요절 라파엘로 ‘전설’ 로 남아
교황 집무실에 프레스코화 그린뒤 ‘3대 거장’ 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그리고 라파엘로 이 세 사람을 르네상스 시대의 3대 거장으로 꼽는다. 이들 중 라파엘로(1483~1520)는 막내였다.

움브리아 지방의 작은 도시 우르비노에서 태어난 라파엘로는 스무살이 갓 넘은 1504년 넓은 세계에서 놀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피렌체에 왔다. 당시 피렌체에는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시청에서 벽화를 제작하고 있었다.

이 두 거장이 감히 접근조차 쉽지 않았던 괴팍한 천재들이었다면, 라파엘로는 상냥하고, 겸손하며, 붙임성 있는 젊은이였다. 그런 그에게 당대 최고의 무대에 설 기회가 주어졌다. 동향(同鄕) 사람이자 로마 베드로 성당의 건축가였던 브라만테의 추천으로 바티칸에 입성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자신의 집무실이었던 ‘서명의 방’이라 불리던 스탄자 디 세냐투라의 장식을 주문했고, 화가는 이 방의 천장과 벽을 신학, 철학, 시를 주제로 한 그림으로 장식했다. 동 시기, 동일 장소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두 거장이 동시에 작업을 한 전대미문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라파엘로가 그린 그림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등장하는 그 유명한 ‘아테네의 학당’(사진)을 비롯한 프레스코화다. ‘아테네의 학당’은 전성기 르네상스 회화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웅장한 건축물을 배경으로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의 명망 있는 철학자들의 모습을 그린 것인데 다빈치는 플라톤의 모습으로, 자신을 추천해준 건축가 브라만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습으로 그렸다. 인물 각자의 표현은 마치 실제 인물들을 사진으로 찍어놓은 듯 정교하고, 자연스러우며, 배경과 인물들의 공간적 조화는 뛰어났다. 비례, 조화, 균형으로 대표되는 르네상스 고전주의 회화가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라파엘로는 바티칸에서 모두 4개의 방에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첫 번째 방이 고전주의 회화의 절정을 보여주었다면, 두 번째 방에서는 자신이 애써 달성한 회화적 성과를 스스로 깨고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역시 창조의 세계를 추구했던 진정한 예술가였던 것이다.

라파엘로는 일약 스타가 되었고, 사람들은 이 젊은이의 그림을 칭송했다. 그의 사근사근한 성격은 과격한 미켈란젤로에게 혼쭐 났던 후원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이 쇄도했고, 심지어는 그를 추기경으로 선출하자는 의견까지 나왔다고 하니 그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의 질투를 샀던 것일까. 그는 한창 나이인 38세에 요절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사랑하는 애인 빵집 딸에게 유산으로 남겼다. 라파엘로의 작품으로 알려진 바티칸에 있는 나머지 두 개의 방은 그의 사후에 제자들이 그린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홀로 외로움 속에서 작업을 했다면, 라파엘로는 제자들을 고용하여 방대한 작업을 진행시켰다. 어찌 보면 세속적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당시에는 이런 공동작업이 오히려 일반적인 것이었다. 이후 19세기 초 신고전주의 양식이 유행하기까지 3세기 이상 라파엘로는 서구 회화의 지존의 자리를 지켰으며, 예술가들의 전설이 되었다.
 

인간탐구의 절정 ‘천지창조’
미켈란젤로, 시스티나 예배당에 4년간 그려 


 

그림은 그리기 싫다는 미켈란젤로에게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그리라고 명령했다. 당시 미켈란젤로는 ‘피에타’ , ‘다비드’ 와 같은 걸작을 통해 조각가로서는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었지만 화가로서의 경력은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다. 그 자신이 ‘조각가 미켈란젤로’ 라고 서명을 할 정도로 조각을 예술 중의 으뜸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는 일을 아예 내키지 않아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교황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미켈란젤로가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운 것은 피렌체의 기를란다요 공방에서였고, 그것도 겨우 1년여에 지나지 않았었다. 스승 역시 30년 전 교황의 부름을 받고 시스티나 예배당에 벽화를 그린 거장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조수를 몇 명 채용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물감을 준비하는 조수 한명만을 남겨두고 모두 돌려 보내고 혼자 작업에 착수했다. 1508년부터 1512년까지 만 4년 동안 그는 외로움 속에서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말이 쉽지 혼자서 그 높은 천장에 그림을 그리자면 엄청난 육체적 고통이 수반된다. 잠시 고개를 올려서 그림을 보려해도 고개가 아플 정도인데 4년간 누운 자세 혹은 머리를 쳐든 자세로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해보라. 그는 결국 그 일을 해냈고, 작업이 끝나고 난 후 몸이 굳어져서 몇 달 동안을 그림 그리던 자세로 지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림의 큰 뼈대를 보자면 중앙의 사각형들 안에는 천지창조를 그렸다. 하느님이 빛과 어둠을 가르는 장면, 바다와 육지의 동물들을 창조하는 장면, 아담의 창조, 이브의 창조, 뱀으로부터 유혹받은 아담과 하와, 낙원으로부터의 추방 그리고 노아의 홍수 등이 그려져 있다. 천장의 가장 자리에는 육중한 인물들이 앉아 있는 모습이 있는데 예수의 재림을 예언한 구약성서의 예언자들과 무녀들이다. 마지막으로 예언자와 예언자 사이 그리고 벽의 가장 위쪽 반달 모양에는 예수의 조상들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이들 장면 사이사이에 각양각색의 자세를 취하고 앉아 있는 젊은 남성들의 나체와 역시 나체의 아이들 등이 그려져 있다.

초기에 그린 그림들은 약간의 부자연스러움과 색채의 부조화가 발견되나 미켈란젤로는 곧 회화의 최고 경지에 도달했다. 그는 인간의 가장 어려운 자세를 총 망라하여 그리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이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자세를 다 그려 놓았다. 그것은 중세 이후 서양의 화가들이 3세기에 걸쳐 추구해온 인간에 대한 탐구의 절정이었다. 그가 그린 인체들은 에너지가 넘치고 아름다워서 인간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사랑의 표현으로 보인다. 흔히 르네상스 시대를 인간 중심의 시대, 혹은 휴머니즘의 시대라고 표현하는데 미켈란젤로의 이 천장화는 르네상스 정신의 결정판이었던 것이다.

이 그림이 탄생된 이후 서구 회화의 판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이들은 이 시스티나 예배당을 모르고서는 그림을 그릴 수가 없게 되었다. 당대의 미술사가 바사리는 미켈란젤로를 신에 비유했다. 천재의 개념도 바로 미켈란젤로에게서 나왔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동경했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들보다 동시대인 미켈란젤로를 더 위대한 인물로 여겼다. 고대를 능가한 근대인의 탄생을 지켜보았던 것이다.
 

외설이유로 ‘덧칠 수모’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제자가 나체에 가리개 그려

 
천장화를 그리고 난 지 30년이 지난 1536년쯤 새로 교황이 된 바오로 3세는 또 다시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예배당의 벽화를 그릴 것을 주문했다. 그 때 미켈란젤로의 나이 60이었다. 이제 늙어서 몸도 말을 듣지 않고,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못하겠다는 미켈란젤로에게 교황이 말했다.

“나는 당신의 그림을 갖기 위해 30년을 기다렸소. 이제 교황이 되었으니 내 명령을 따라야 하오!”

그렇게 해서 미켈란젤로는 늙은 몸을 이끌고 또 다시 이 거대한 벽을 혼자서 그리는 일에 착수했다.

주제는 최후의 심판이다. 최후의 심판이란 인류 종말의 날, 심판자인 예수님이 지상에 내려와서 인간의 생전의 행업에 따라 심판을 하여 선행한 자는 천국으로, 악행한 자는 지옥으로 보낸다는 주제다.

그림을 살펴보면 그림 중앙에 심판자 예수님이 내려오고 있다. 한 손을 위로 올린 근엄한 모습이다. 그 옆에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를 비롯하여 성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스도의 바로 아래에는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천사들이 나팔을 불고 있고, 그 양 옆에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사람들과 천국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가장 아랫부분을 보면 왼쪽에는 심판을 받기 위해 죽음에서 깨어나는 사람들 그리고 오른쪽은 지옥 장면이다.

원래는 예수님과 성모님을 제외하고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였다. 하루는 비아지오 다 체세나라는 추기경이 교황과 함께 한창 그림에 열중하고 있는 미켈란젤로를 방문했다.

“신성한 교황 성하의 예배당에 이런 벌거벗은 나체들은 어울리지 않는구려.”

이 말을 들은 미켈란젤로는 그 추기경의 얼굴을 지옥의 사자 미노스의 얼굴로 그려놨다. 말 한마디 잘못한 덕분에 그는 지금까지도 지옥의 사자 모습을 하며 관객을 맞고 있다.

이 그림이 공개되자 사람들 사이에서는 놀람과 찬사 그리고 비난이 가득했다. 놀라운 그림이라며 칭찬한 이들이 있었는가 하면, 이건 완전히 벌거벗은 이들로 가득한 목욕탕이라고 비난한 사람들도 있었다. 심지어는 그림을 모두 파괴해버리자는 과격한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맞서는 반종교개혁이라는 가톨릭 내부의 정화운동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 작품은 1563년 트렌트 공의회에서 본격적으로 토론의 대상이 되었고 이듬해에 외설적이란 이유로 ‘수정’ 이라는 형벌을 받게 된다. 결국 미켈란젤로가 사망하던 바로 그 해에 교황청은 그의 제자였던 다니엘라 다 볼테라라는 사람을 시켜서 나체의 중요한 부분을 각양각색의 가리개로 덧칠하여 가리게 한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말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전통적 형식을 초월하여 모든 형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작가의 정신세계를 보여준다. 그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를 성서와 문학 사이를, 그리고 전통과 혁신 사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제도권이 권위를 내세울 때, 예술적 직관을 교훈적 규범으로 대신하려 할 때, 권위의 이름으로 예술가를 억압하려 할 때, 그는 교회를 비롯한 모든 제도권과 맞서 싸웠다. 최후의 심판은 미켈란젤로의 이 같은 사상이 함축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걸작이다.
 

‘바로크 조각 寶庫’ 보르게세 미술관
베르니니 작품 가득… ‘예수회 성당’은 대표적 건축

 
사람들은 로마를 ‘영원의 도시’라 부른다. 로마인들로부터 시작된 이 도시의 영광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의미일까?

로마는 서구 역사의 살아있는 무대이자 역사적인 예술품들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도시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로마에 대한 믿음과 전설은 유효한 듯하다.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가 절정에 올려놓은 르네상스 이후 로마 예술이 다시 한번 번영한 것은 바로크 시대인 17세기였다. 바로크 예술은 한마디로 화려함의 절정이다. 대표적인 곳이 아마도 베르사유 궁전일 것이다. 하지만 그 바로크 예술이 처음선을 보인 곳은 로마였다. 당시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 교회는 종교개혁 이후 뼈를 깎는 내적 개혁을 거쳐 거듭났다. 그것이 예술로 표현된 것이 바로크 양식이다.

바로크 예술이 보여준 화려함은 승리한 가톨릭 교회의 자신감의 표현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예수회 성당은 바로크 예술이 첫 선을 보인 곳이다. 겉에서 보면 평범한 교회처럼 보이나 일단 안에 들어가면 화려함이 극에 달한다. 모든 건축 자재는 각양각색의 진귀한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천장을 올려다보면 천상이 그곳인 듯 구름 위에서 성인들과 예수,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수많은 천사들과 함께 보인다.

예수회 성당이 바로크 건축의 극치라면 바로크 조각의 진면목은 보르게세 미술관에서 즐길 수 있다. 이 미술관은 가히 조반니 베르니니의 미술관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이 조각가의 대표작들이 여러 점 소장되어 있다.

바람둥이 아폴로가 요정 다프네의 몸에 손을 대는 순간 다프네의 몸이 나무로 변해 버렸다는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한 ‘아폴로와 다프네’는 대리석 조각의 또 다른 지평을 연 걸작이다. 조각이 더 이상 땅을 굳게 디디고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공간을 날 듯 운동감이 가득하며, 손과 몸통이 나무줄기와 잎으로 변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한 이 작품은 이후 어떤 조각가도 다시는 재현하지 못한 정교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보르게세 미술관은 베르니니가 생존했던 17세기 최고의 예술 후원 가문이었던 추기경 시피오네 보르게세의 공원이자 별장이었다. 그곳은 티치아노, 카라바조, 라파엘로를 비롯하여 명성있는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가득 차 있다. 한 가문의 진귀한 소장품들이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으니 당시 예술에 대한 그들의 열정과 후원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후원 없이 예술은 탄생할 수 없다. 결점이 많은 이탈리아 사람들이지만 예술에 대한 안목과 열정만큼은 칭송받아 마땅할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인 바로크 시대의 불멸의 거장 카라바조의 작품은 산 루이지 프란체시 성당에서 볼 수 있다. 단 한점의 작품으로도 유럽의 미술관에서 특별전을 여는 이 작가의 작품이 이 교회에는 여러 점 있다. 그 밖에도 로마에는 수많은 미술관과 건축물들이 있다.

칼럼을 시작한지 일년이 지났다. 문화일보에 고정 지면을 할애받을 수 있었던 것이 무척 영광이었고, 글을 쓰는 매순간 행복했다. 이제 나의 부족한 칼럼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미술사를 전공한 필자에게 미술사가 아름다운 학문임을 다시금 느끼게 해준 소중한 기회였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독자께 감사드린다. 기꺼이 사진을 촬영해준 나의 친구이자 남편인 조각가 한진섭씨에게도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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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능가한 폼페이 최후의 날 - 폼페이

‘9·11’ 능가한 폼페이 최후의 날 - 폼페이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14 14:21

‘9·11’ 능가한 폼페이 최후의 날 - 폼페이
플리니우스 편지에 생생하게 기록돼 





 
기원 후 79년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했다. 화산 아래의 도시 폼페이가 순식간에 용암 속에 묻혔다. 언젠가 이탈리아의 TV에서 폼페이 최후의 순간을 다룬 다큐를 본 적이 있다. 이라크 전쟁 현장, 혹은 9·11 뉴욕 쌍둥이 빌딩의 폭발 현장을 보여주듯 생생하게 재현한 프로그램이었다.

폼페이에 관한 자료가 여럿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한 리포터가 참사 현장에서 생생하게 현장을 중계하듯 묘사해 나간 한 장의 편지가 남아 있다.

편지를 쓴 주인공은 로마의 대 역사가 노(老) 플리니우스의 조카로 당시의 대 문호이자 역사가였던 타치투스에게 보낸 것이다.

노 플리니우스는 ‘박물지, Historia Naturalis’라는 전 37권으로 이루어진 대 백과사전을 쓴 로마의 역사가인데 그는 화산이 폭발하던 당시 나폴리 만의 해군 제독으로 재임 중이었고, 화산 폭발 때 현장에서 사망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로마에 관한 지식의 대부분은 바로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 의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함대의 함장이었던 그는 충분히 피신할 시간과 기회, 도구가 있었지만 스스로 참혹한 죽음의 현장에 몸을 던졌다. 군인으로서, 학자로서, 또한 인간으로서 참으로 위대한 인물이었지만 그가 선택한 생애 마지막 순간은 그가 남긴 모든 업적 이상으로 위대했다. 여기에 플리니우스의 최후를 지켜본 그의 조카의 편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삼촌은 당시 나폴리 만에서 함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9월 9일 나의 모친은 삼촌에게 이상한 구름이 생겼다고 알렸다. 삼촌은 그것이 잘 보이는 곳으로 가기 위해 신발을 신고 나갔다. 큰 구름떼가 보였는데 그것은 흡사 가지가 위로 둥글게 뻗은 잣나무와 같았다. 과학자였던 삼촌이 더 가까이에서 관찰하고자 작은 배를 준비시켜서 집에서 나가려 할 때 카스코의 아내가 달려와서 산 아래 있는 자신의 별장이 위험에 처했다며 배로 피신시켜 달라고 애원했다. 과학자적 호기심은 인명을 구출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바뀌었고 삼촌은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구출하려고 외출의 목적을 바꿨다. 많은 이들이 탈출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이미 잿더미가 배를 덮치고 가까이 갈수록 재의 농도는 짙었다. 배를 사타비아 쪽으로 몰았다. 삼촌의 친구 폼포니아누스가 보였기 때문에 그를 구출하기 위해 배를 몰았다. 공포에 떨고 있는 친구를 배에 오르게 하고 그가 가지고 있던 물건들도 싣게 했다. 그리고 서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함을 가장하며 저녁식사를 했다.

한편 베수비오 화산에서 용암의 불덩이가 더 넓게 퍼졌다. 밤이 어두우니 불빛이 더욱 빛나 보였다. 삼촌은 사람들을 위로하였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 사이 용암재가 집을 덮쳐 더 이상 지체하다가는 빠져나올 수가 없다고 판단하자 삼촌은 일어나서 폼페이아노에게 갔다. 그들은 의논 후 밖으로 나오기로 결정했다. 화산재가 비 오듯 쏟아졌고 점점 집을 덮쳐 갔다. 해변에 나가서 배를 탈 수 있는지 살펴보았다. 용암이 다시 덮쳤다. 두 노예의 부축을 받고 삼촌이 피신을 시도했다. 그러나 기관지에 염증이 있었던 삼촌은 먼지와 가스로 인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불을 덮은 채 누워 있었는데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 그는 죽어 있었다.”
 

폼페이 건축물의 美와 견고함
‘신비의 별장 ‘ 벽화 등은 르네상스 작품 능가

 
폼페이는 서기 63년 대지진으로 도시 전체가 파괴되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힘을 모아 재건에 앞장섰으나 그로부터 16년 후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이번에는 도시 전체가 용암에 묻혀 버렸다. 그 후 1700년 동안 도시는 그 존재 자체가 잊혔다가 18세기 초 사람들이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지하 도시의 잔재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후 18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인 발굴 작업이 시작되어 195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18세기 유럽에서는 고전, 고대 문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빙켈만과 같은 유명한 고고학자가 출현하여 고대 그리스 미술에 대한 연구를 본격화했다. 빙켈만은 독일인으로서 로마에서 연구하면서 근대 미술사의 체계를 확립한 중요한 학자이다. 빙켈만으로부터 시작된 그리스 연구가 고대 로마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이루어진 폼페이의 발견과 발굴은 당시 서구 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꿔 놓는 대사건이었다. 폼페이의 회화, 조각, 공예품이 당시 미술계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고, 의상, 가구, 공예, 실내 디자인 심지어는 여인의 헤어스타일에 이르기까지 생활 곳곳에 영향을 미쳤다. 폼페이가 되살아난 것이다.

18세기 중·후반 유럽에 신고전주의라는 미술양식이 탄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현재 폼페이에 남아 있는 유적들은 당시 이 도시가 얼마나 화려했으며 예술적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폼페이는 당시 로마제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그곳의 건축물과 유물을 통해 고대 로마제국 시대의 생활과 문화 수준도 추측할 수 있다.

폼페이의 건축물은 2000년 전에 지어졌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고, 견고하며, 예술적이다. 대부분의 벽은 수준 높은 벽화로 장식이 되었으니 오늘날의 우리들보다 그들이 오히려 예술과 더 친숙했다.

현재 많은 저택과 별장이 남아 있지만 그 중에서 ‘신비의 별장’이라는 곳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별장은 아트리움이라 불리는 집 중앙에 사각형의 중정이 있고 중정 주변은 회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회랑을 비롯하여 집 곳곳을 벽화로 장식했다. 그 중에서도 ‘매질하는 여인’이라는 광경이 있는 벽화는 당시 여인들의 모습과 생활상을 그리고 있어서 흥미롭다. 춤추는 여인, 매질하는 여인, 매를 맞고 동료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위로받고 있는 여인의 모습 등 여인들의 일상이 그려져 있는데 이들의 모습은 1500년 후 르네상스 시대에서나 볼 수 있는 조화, 절제, 우아미를 보여주고 있다. 인체의 비례는 이상적인 비례인 8등신으로 표현되었고, 움직임이 자연스러우며, 공간의 표현 역시 탁월하다. 이후의 미술이 이에 미치지 못함을 보노라면 미술이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교가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가 될 수도 있음을 이들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폼페이 근처에는 우리나라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폼페이와 같은 운명을 맞이한 에라콜라노라는 마을이 있다. 폼페이를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그곳도 방문하길 권한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폼페이보다 온전하게 유적이 남아 있는가 하면, 폼페이에서는 볼 수 없는 독창적인 건축 장식들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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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릉위의 도시’ 이탈리아 파르마

‘구릉위의 도시’ 이탈리아 파르마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14 14:20

‘구릉위의 도시’ 이탈리아 파르마
치즈로 유명… 대성당 부조 등 예술품도 많아 






 
나는 지금 앙코르 와트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앙코르가 맞다. 앙코르 와트는 앙코르의 여러 유적지 중의 한 군데 일 뿐이라는 것을 이곳에 와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거대한 사원들을 둘러보았는데 ‘동양의 자존심’이라는 말에 걸맞게 건축의 규모가 거대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안의 미술의 내용과 질이 높은 듯 하였다. 이곳의 신전 건축물의 벽들은 대부분이 부조로 가득히 메워졌는데 그 내용은 이 지역의 신화, 전설, 종교, 그리고 이웃나라와 벌여서 승리한 전투 장면 들을 새겨놓았다. 결국 이곳의 미술품도 세속의 가장 권력자인 왕의 신격화를 추구하고 있으며 미술품이 왕의 권력을 지속시키고 홍보하려는 매체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여행객 중에는 한국인들이 많이 눈에 뜨이지만 서양 사람들도 꽤 많이 보인다. 인솔자의 설명에 따르면 서양 사람들은 이곳의 유적지를 보면서 절대로 떠들지 않고 숙연해진다고 한다. 그들이 우습게만 보았던 동양에 이토록 휼륭한 문명의 흔적이 있음을 보고는 놀란 것이라고 한다.

오늘은 구릉 위의 도시 파르마를 소개하려 한다 . 파르마는 피렌체에서 밀라노로 가는 중간 쯤에 위치한 도시이다. 파르마 시내를 들어가려면 고속도로를 거치게 되는데 아래를 보면 천길 낭떠러지이다. 고속도로가 깊은 골짜기와 골짜기를 연결해 놓은 때문이다. 그러나 경치는 비경이어서 우리나라의 설악산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우유회사 이름이 파르말라트(PARMALAT)이다. 파르마의 우유라는 뜻이다. 이곳이 구릉지대이다 보니 목장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파르마를 세계적인 도시로 만든 또하나의 생산품이 있는데 바로 팔마산이라 불리는 치즈이다. 팔마산은 영어식 표기이고 원어는 파르미지아노라고 부르는데 바로 파르마에서 만나는 제품이라는 뜻이다. 초콜릿 하나로 유명해 질 수 있듯이 치즈 하나로도 세계적으로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도시이다.

파르마는 대성당과 세례당이 있어서 예술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도시에 속한다. 파르마 대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인데 실내는 고딕양식이어서 장엄함을 뽐내고 있다. 이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세 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주교좌이다. 말 그대로 대주교의 의자 인데 이 주교좌가 있는 성당이 바로 대성당이다. 이 의자는 그 권위와는 달리 의자를 받치고 있는 사람들의 끙끙거리는 모습이 있는 유머러스한 내용이다. 두번째는 로마네스크 시대의 걸작품으로 알려진 부조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가 있고, 마지막으로 높디 높은 돔의 천장화가 있다. 이 천장화는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작가인 코레조가 그린 것인데 그의 이 돔 천장화는 1세기 후 유럽의 대부분 교회에서 돔 천장화가 유행한 것을 고려한다면 거의 효시에 속한다는 점에서 역사적 중요성이 있다.

대성당 밖으로 나오면 바로 세례당이 있는데 현대 건축물의 7,8층 정도의 높이의 석조 건축물이다. 대성당과 세례당이 독립적인 건축물로 지어진 것으로 보아 이 도시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특별히 동양 최대의 유적지인 앙코르 와트에서 글을 쓰면서 문명의 탄생과 스러짐을 생각케 한다. 또한 오늘날 우리가 대한 민국에서 태어난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 일인지를 생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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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바 ‘조토 명작의 산실’

파도바 ‘조토 명작의 산실’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14 14:19

파도바 ‘조토 명작의 산실’
아레나 예배당은 종교·세속 덕목 총망라한 우주 






 
파도바는 베네치아에서 기차로 약 30분 떨어져 있다. 파도바의 명성은 예술과 대학에 있다. 파도바대학은 볼로냐대학과 파리대학 다음으로 유럽에 세워진 대학으로 코페르니쿠스, 에라스무스를 비롯한 역사적 인물들이 이곳에서 수학했으며, 이 대학에서 교수를 지낸 인물로는 갈릴레이와 병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모르가니 등이 있다.

파도바가 자랑하는 또 하나의 보석은 아레나예배당이다. 이 예배당은 한 개인의 가족 예배당인데 규모로 보자면 지난주에 소개했던 성 안토니오 대성당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작다. 이 예배당의 그림은 엔리코 스크로베니 라는 사람이 주문하여 조토가 1303년에서 1305년 사이에 완성했다. 엔리코의 아버지는 무척 구두쇠였는데 사망한 부친이 연옥에서 고통받고 있을 것을 걱정하여 아버지의 죄를 덜기 위해 이 예배당을 지어 성모에게 봉헌했다고 한다. 그림은 4면의 벽과 천장이 모두 프레스코로 그려졌는데 내용은 그리스도와 성모의 일생에 관한 일화가 양쪽 벽을 차지하고 있고, 입구 안쪽 벽에 ‘최후의 심판’이 그려져 있다.

보는 이의 흥미를 자극하는 것은 ‘최후의 심판’이다. 그 중에서도 지옥에서 형벌을 받고 있는 지옥 편을 보면 각양각색의 죄인들이 그려져 있는데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오히려 유머러스해 보인다.

입에 기구가 끼워진 채 바비큐처럼 돌려지는 사람, 성기가 거세되는 남자, 모욕을 당하는 젊은 여자 등 각자의 죄목에 따른 형벌이 가해지고 있다.

‘최후의 심판’ 중앙 부분에는 주문자인 엔리코가 예배당의 모형을 성모에게 봉헌하는 모습이 보인다. 중세시대에는 그리스도나 성인들에 비해 인간은 훨씬 작게 그려졌는데 화가는 여기서 엔리코를 성모와 같은 크기로 그려놓았다. 미술품의 주문자가 그림 속에 직접 등장한 것도 바로 여기서이다.

조토 이후 미술품을 주문한 귀족이나 상인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그림 속에 넣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관행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중세의 신 중심의 세계에서 르네상스의 인간 중심의 세계로 옮아가고 있는 증거들이다. 미술은 학문보다 앞서서 근대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벽화 중에서 덕과 악덕을 의인화한 그림들도 흥미롭다. 덕으로는 신중, 강인함, 절제, 정의, 믿음, 자비, 희망이 있고, 악덕으로는 실망, 질투, 노여움, 변덕, 어리석음 등이 있다. 이들 각자의 이미지는 의인화하여 그려졌는데 덕목의 특징에 따라 남녀노소가 주인공이 되고 있다.

이를테면 절망은 젊은 여인이 목을 매어 자살하는 모습인데, 악마가 그녀의 영혼을 지옥으로 데려가기 위해 끌어내고 있다. 자살은 곧 지옥행임을 보여주고 있다. 법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저울을 들고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은 정의를 표현한 것으로서 왕관을 쓴 여왕이 양손에 저울을 들고 재는 모습이다. 변덕은 젊은 여인이 바퀴 위에 앉아서 뒤로 넘어지려는 모습이다. 장면 하나 하나에 모두 고개가 끄덕여진다. 조토는 일개 가문의 예배당에 종교와 세속의 덕목들이 총망라된 작은 우주를 그려놓았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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