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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강창매운탕

박정희와 강창매운탕 요리 맛집 정보 2008. 9. 10. 13:13

박정희와 강창매운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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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관 주인 "여기선 대구시장도 상 닦아"

 
 
1962년 박정희가 국가재건회의의장 자격으로 들렀던 강창 매운탕 1번지 대구관의 퇴락한 현재 모습(파란색 지붕). 
 
1962년 2월3일. 그날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은 5·16 거사 전날보다 더 들떠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울산에서 한국 근대화의 상징적 프로젝트인 제1차 경제개발계획이 이날 발진됐기 때문이다. 울산은 한국 첫 공업지구로 설정돼 정유·비료·자동차·조선 산업이 동시다발적으로 자릴 잡기 시작한다. 그 힘이 70년대 새마을 운동으로 이어졌다. 훗날 중앙정보부장이 되는 이후락도 자기 고향인 울산 살리기에 적극 관여했다. 61년 5월20일 군정 초대 대구시장에 부임한 당시 대전 2사단 참모장이었던 강원채 대령(85·현재 서울 상도동 거주)은 혁명 성공 후 박 소장의 첫 지방 나들이에 빠질 수 없어 새벽같이 기차를 타고 울산으로 향했다.

행사를 마친 박정희는 기분이 너무 좋은 나머지, 일행들과 기차를 타고 대구로 와서 잠시 회포를 푼다. 연회장은 대구의 여걸 마담, 김태남이 버티고 있던 청수원(현재 곽병원 남쪽 입구 모퉁이 태남빌딩). 혁명 거사 자금까지 대준 김태남은 박정희를 위해 진수성찬을 차려준다. 청수원은 박정희 혁명 거사 모의 장소라서 남달리 애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반주로 정종을 거나하게 마신 박정희는 갑자기 강창(江滄·대구시 달서구 파호동) 매운탕이 먹고 싶다면서 차를 대기하라고 했다. 1950년 12월12일 대구 계산성당에서 육영수와 결혼식을 올릴 때도 그는 광복 직후 금호강변 첫 매운탕 집격인 대구관(현재 달서구 파호동 49의 1)을 기억하고 있었다. 예정에 없던 일정이라 경호팀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는 그날따라 로맨티스트로 변했다. 운전석엔 강원채 시장을 앉혔다. 지금과 달리 비포장이었던 그날 박정희는 덜컹거리는 자리에서 속이 무척 불편했을 것이고 먼지를 적잖게 덮어 썼다. 박경원 도지사, 2군사령관 등과 경호팀도 거리를 두고 비포장 길을 뒤따랐다. 금호강의 야경과 대구관 매운탕을 앞에 한 박정희는 피말렸던 지난 세월을 생각하며 막걸리를 연거푸 몇 통 비웠다.

박정희는 이미지 관리 탓인지 유독 막걸리를 선호했다. 비록 시장이었지만 그날만은 말석이었던 강완채가 종업원(?)으로 전락, 행주 들고 호마이카 상을 닦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박정희를 더욱 기분좋게 한 건 주인 할머니의 당당한 처신이었다. 전주 콩나물 국밥 전문 식당 삼백집의 욕쟁이 할머니처럼 박정희에 대해 주눅들지 않았다. 그냥 음식에만 몰두하고 일행을 단순한 손님으로 봤다. 박정희는 그게 미더웠다. 박정희는 건더기에 관심이 없었다. 그냥 속풀이할 요량으로 국물만 몇 번 떠넣었다. 박정희는 원래 음식을 과식하지 않는다. 궁정동에서 운명의 저녁 식사를 할 때도 멸치 볶음 정도만 몇 점 집어 먹을 정도였다.

얼마뒤 김인 10대 경북 도지사(재임 시절인 66년 4월1일 포정동에서 현재 위치로 도청 이전)도 우연하게 영남일보 상무 강판룡 등과 대구관을 찾았다. 김 도지사는 소문을 들었지만 내부 분위기가 너무 퇴락해 눈살을 찌푸린다. 접은 미 군용 담요가 방석 대용일 정도였다. 김 도지사는 백씨 할머니가 자길 몰라주자 정색하며 상을 깨끗하게 닦아달라고 티를 냈다. 그때 백씨 할머니가 던진 한 마디가 압권이어서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된다. "대구 시장도 여기서 상 닦았는데…."

박정희는 군정시절 다시 강창을 찾는다. 느닷없이 오리 사냥에 나선 것이다. 당시 금호강엔 각종 오리가 많았다. 박정희는 13여명의 경호원을 대동하고 오전 11시쯤 도착한다. 배를 타고 달성군 다사읍 습지쪽으로 가서 오리 사냥을 즐기다가 오후 2시쯤 김동식씨 툇마루에 앉아 막걸리를 거나하게 즐기다 사라졌다. 그게 박정희의 마지막 강창행이었다는 게 금호강의 마지막 뱃사공 중 한 명인 한동호씨(75)의 전언이다.
 
60년대부터 2000년까지 2차례 확장 공사됐던 강창교 동단 초입에서 오른쪽 매운탕촌을 내려다본다. 이제 매운탕 집은 단 한 곳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대구관은 아직 철거되지 않은 채 원형을 간직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말기 암환자 같은 몰골이었다. 50∼70년대 한창 땐 강창에는 대구관, 대성관, 청송관, 성서식당, 이층식당 등 모두 6군데의 매운탕집이 전성기를 구가했다.

38년간 한 자리에서 성서식육식당을 꾸려가고 있는 여사장 배춘화씨도 좋았던 강창 시절을 못 잊는다.

백씨 할머니가 작고하면서 대구관 명맥은 가족한테 직접 이어지지 않고 고종사촌 집안으로 넘어간다. 바로 강창교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강정(달성군 다사읍 죽곡리 강정정수장 근처)의 경산식당이다. 강창에는 60년대초만 해도 미군들이 가설해 놓은 목재 가교가 놓여 있었다. 그렇지만 낙후돼 15분 걸리는 나룻배를 이용했다. 그곳 뱃사공이었던 한동호씨. 그가 바로 대구관 백씨 할머니의 고종사촌 동생이고 그의 다섯째 며느리 우명자씨(48)한테 맛의 바통이 건네졌다.

물론 그 시절엔 양어장 고기를 상상할 수 없었다. 물이 깨끗하고 손님들이 먹고 남을 만큼의 생선이 잡혔다. 낮엔 그물, 밤엔 강을 가로 질러 저인망식으로 고길 낚았다. 그때 고기잡는 사람은 김동식씨 등 3명이 있었다. 식당 주인들은 겨를이 없어 직접 고길 못 잡고 이들로부터 고기를 일괄 매입해 어망에 넣은 뒤 강에 잠시 보관해뒀다. 그땐 금호강 자체가 거대한 수조인 셈이다.

피면 지는 게 세상사. 강창도 그랬다. 페놀사태와 수질 오염, 강창교 공사, 상습 침수, 청천, 하양, 동촌, 평리동 등지에 매운탕촌 급증…. 결국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할 때쯤 강창은 '백기'를 들고 만다. 이로써 강창은 매운탕촌으로 완전히 기능을 상실한다. 그 와중에 강정(江亭) 매운탕 타운이 상종가를 친다.


'강창'시대 끝나자 2인자 '강정'이 부각

50년대 강창 매운탕의 좌장은 대구관, 비슷한 시기에 강정 매운탕촌이 조성되는데 그 대장은 대구식당이었다. 모두 상호에 대구가 들어갔다. 부동댁(폐업), 낙동식당, 대동식당, 금호식당, 경산식당, 다사식당 등 6집만 영업 중이다. 강정은 강창이 있을 동안 늘 2등이었다. 그런데 강창이 시들면서 급부상된다. 그 핵심부가 경산식당. 이 식당의 기운은 청천 유원지에서 건너왔다.

예전엔 강창 가기도 힘들었지만 강정 가긴 더 어려웠다. 비포장이고 버스편이 제대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운탕은 대중식이 되기 힘들었다. 박정희 같은 VIP들이나 기분내며 한 번 들르는 곳이었다. 자연 도심 속 매운탕은 외면당했다. 매운탕은 당연히 강가에 있어야 된다는 게 그 무렵 일반인들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90년들면서 '도심 매운탕 시대'가 개막된다. 잉어가 밀리고 메기, 쏘가리, 민물잡어가 전면에 나선다. 이에 앞서 80년대 마이카 붐은 매운탕 붐으로 일으켰다. 1980년 첫 선을 보인 기아의 봉고는 인기 캡이었다. 식당 주인들은 너도나도 그걸 구입했다. 단체 손님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주인들은 10명 이상만 되면 아무리 먼 반야월이라도 악착같이 데리러 갔다. 봉고차가 없는 집은 장사를 못할 지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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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이 꼭 잘끓인 매운탕 같네" - 화원유원지

"노을이 꼭 잘끓인 매운탕 같네" - 화원유원지 요리 맛집 정보 2008. 9. 6. 14:43

"노을이 꼭 잘끓인 매운탕 같네" - 화원유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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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의 동쪽'이란 뜻의 낙동(洛東). 그것이 강물을 머금고 525.15㎞ 남한 최장 '낙동강'이 될 때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낙동강도 부산 다대포까지 무료히 떼밀려 내려가는 게 권태로워 대구권역에서 크게 몸을 비튼다.

고령군 다산면 호촌리와 곽촌리 사이에서 금호강을 끌어안은 낙동강은 화원유원지를 지나 달성군 옥포면까지, 현풍면에서 구지면까지 두 번 사행(巳行)한다. 굽이친 거리가 무려 8㎞. 낙동강 뱃길의 중간 지점인 사문진 나루. 1905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이 대구에 처음으로 피아노를 들여 온 관문이었고 소금배도 자주 정박했다. 화원동산 전망대는 원래 봉화대 자리였다. 그 봉화는 수성못 뒷산 법이산 봉수대와 짝을 이뤄 연락을 주고받았다.

일몰녘. 대구 서쪽 변경 풍경은 더욱 황홀해진다. 달성군 하빈면 하산리 성주대교 초입 하목정, 달성군 다사읍 죽곡리 강창취수장 뒷산에서 보는 낙동강의 낙조도 '낙동강 낙조사(落照史)'에 남을 만하지만 최고급은 역시 화원동산 전망대인 상화대(嘗花臺). 낙동·금호강, 대명천, 팔공·비슬·가야산을 360도 일망무제 파노라마식으로 음미할 수 있는 천혜의 포인트. 여름날, 경남 합천군 쪽으로 지는 낙조는 너무도 미학적이다. 그래서 전국 사진작가들이 가장 눈독들이는 곳이다.

이곳 식당 주인들은 저 노을을 두고 "잘 끓인 매운탕 같다"는 기막힌 비유를 던진다. 역대 풍류객과 실력자들이 이런 환상적 언저릴 가만뒀을 리 만무하다. 일제는 이곳을 공원화하기 위해 대구 최초로 부영승합버스 노선을 이곳까지 연장한다. 1928년부터 화원은 유원지로 조성되고 40년엔 대구시립공원이 된다. 72년 이 언저리는 금복주한테 팔리고, 78년 12월 화원동산으로 탈바꿈됐지만 93년 사문진교가 생기면서 되레 경기는 꽁꽁 얼어붙기 시작한다. 화원동산 5만6천여평도 93년 6월1일 대구시설관리공단 관리로 넘어간다.

강정을 눈앞에 둔 화원유원지 매운탕촌. 그곳을 찾은 날 비가 무척 많이 내렸다. 비 탓인지 손님들이 너무 적었지만 하강 커브 경기에 익숙해져 버린 주인들은 그것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대다수 집들은 30년 이상 돼 무척 낡아보였다. 매운탕촌으로서의 화원유원지 전성기는 불과 60년대부터 30여년간. 다시 말해 어부들이 나룻배를 갖고 직접 여기서 고길 잡아서 자급자족했던 시기였다. '양식의 시대', 매운탕촌 특색도 그만큼 감퇴할 수밖에 없다.

이곳 매운탕은 원래 다끼파 때문에 더욱 유명해진다. 대구 따로국밥에 들어가는 대파는 거의 사문진 나루 건너 고령군 다산들에서 나왔다. 얼큰한 대구 소고기국이 낙동강을 만나 매운탕으로 발전된 셈이다. 귀한 소고기가 민물고기로 대체됐을 뿐 둘 다 얼큰함엔 변함없다.

사문진 나루의 역사를 지근 거리에서 지켜봐온 매운탕집은 화성, 제일, 시민. 이 언저리가 얼마나 유서깊은 곳인지를 알려주는 나무 한 그루가 눈길을 끈다. 200년은 족히 넘었을 것 같은 팽나무의 그늘이 세 집 그늘막 구실을 해왔다. 제일과 화성 사잇길. 여기가 예전 나루의 주 출입구이다. 사문진교가 개통되기 전 고령쪽에서 배를 타고 온 사람들은 이 팽나무 그늘 아래서 막걸리 한 사발, 참외, 수박, 오이, 토마토 등을 먹으면서 잠시 더위를 식혔을 것이다.

화원 유원지는 강창, 강정과 달리 처음부터 전문 매운탕촌으로 발전한 건 아니다. 그냥 행인들을 겨냥한 구멍가게형, 한정식집들이 10여곳 무질서하게 나루 주위에 포진해 있었다. 그게 70년대를 만나면서 졸지에 매운탕촌화된 것이다. 처음에는 식당 대신 '관(館)'이란 접미사가 상호에 많이 붙었다. 화성식당도 50년대만 해도 화성관이었다. 50년대엔 화성관, 낙동관, 대구관, 향춘관 등 네 집만 장사를 하고 있었다.

여기가 상업적 매운탕촌으로 발전하기 위해선 몇 가지 변수가 필요했는데 화원유원지는 그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다. 여름 휴가철엔 하루 1만여명의 모래찜질객들이 운집하고 70년대 들어선 섬유경기 호황으로 숱한 섬유공장들이 화원 언저리에 우후죽순으로 들어선다. 자연 근처 공장 관계자들이 여기서 회식 스타일의 모임을 자주 갖게 된다. 또한 마이카 붐이 불기 전 대구권 사람들은 해수욕장 가기가 너무 번거로웠다. '꿩 대신 닭'이라고 그들은 강변을 해수욕장 대용으로 애용한 것이다.

또한 70년대로 접어들면서 각종 계 모임이 붐을 이룬 것도 화원을 뜨게 만들었다. 물론 강창과 강정을 축으로 70년대초 성주대교 초입, 옥포 용연사, 동촌·청천유원지 등에도 매운탕촌이 동시다발적으로 형성된다. 초창기 폼잡이 단골들은 포니(74), 그라나다(78), 스텔라·봉고(80년)의 등장으로 더욱 기세등등해진다. 비포장 도로를 달려 매운탕촌 순례에 나선 그들은 버스 타고온 손님들의 부러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화원유원지는 상습 침수구역이다. 낙동강 물이 불기 시작하면 식당 주인들이 제일 먼저 챙기는 건 된장과 고춧가루. 그것은 그들에겐 '종자'와 마찬가지였다. 고기는 잃어도 영업에 지장이 없지만 그걸 날리면 끝장이다. 집집마다 된장과 고춧가루 맛이 다르기 때문에 빌려주기도 빌려오기도 뭣하다.

매운탕촌 터줏대감 시민식당 주인 이성도씨(73)를 찾았다. 그는 70년쯤 시민식당을 했고 그 아들이 대를 잇고 있다. 그가 30년 이상 된 금성 카세트 반주용 앰프를 보여준다. 그는 "지금은 퇴물이지만 한복 예쁘게 차려입고 이 반주기 앞에서 가무를 즐겼던 그때가 화원의 전성기"라고 말했다. 평생 여길 단 한 번도 떠나지 않은 제일식당 박월란씨(63)는 시민식당 앰프 만큼 오래된 매운탕 전용 백철 냄비 앞에서 포즈를 취한다. 화성식당 박만길씨(59)는 집 마당 팽나무 자랑을 한다. 이밖에 중앙식당의 김순호·오복의 이명조·국일의 이철호·성주의 여한수씨와 아궁이, 버들, 명성의 관계자들도 매운탕 예찬을 한다.

백사장이 손님몰이 한몫, 매운탕 먹으면 공짜 찜질 도우미

화원의 백미는 백사장이다. 하지만 추억의 백사장은 이젠 한 뼘도 보이지 않았다. 낙동강물은 이미 흑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70년대만 해도 왼편 백사장엔 찜질을 하려는 관광객들이 하루 수천명 넘게 몰려들었다. 처음 이곳에 온 아이들은 여기가 '화원 해수육장'인 줄로만 알았다. 그만큼 광활했다. 그 때 시민들은 솔직하게 포항 송도해수욕장 한 번 가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대다수 화원유원지, 팔달교 옆 밤숲, 무태, 동촌에서 위안을 삼아야 했다.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를 몰랐던 관광객들은 일단 백사장 바로 옆에 조성된 버드나무 숲에 자릴 잡았다. 비닐 돗자리가 없어 근처 식당에 가서 예전 제사 때 사용하던 멍석을 빌려오기도 했다. 60년대까지만해도 살평상 문화가 보편적이질 못했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그곳 구멍가게들이 앞다퉈 장구와 징, 꽹과리 등 각종 풍물을 대여해주기도 했다.
찜질 도우미도 '틈새 영업'으로 자릴 잡았다. 모래 찜질은 2인1조로 호흡이 맞아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데 일행과 혼자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혼자 자기 몸을 파묻지 못해 진땀을 뺄 수밖에 없었다. 이때 번개처럼 나타난 찜질 도우미가 모래 밀개 등으로 멋지게 모래를 덮어준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봉사료는 500원. 매운탕을 시켜먹으면 공짜.

모래사장은 전망대 절벽 바로 아래에서부터 남쪽으로 약 2㎞ 소바위까지 펼쳐져 있었다. 폭은 300여m. 화원동산 절벽 덤바위엔 민물 게와 다슬기, 홍합 등 다양한 어패류도 잡혔다. 식당 주인들은 특히 다슬기를 삶아 팔았다. 빛 바랜 종이에 담긴 다슬기, 그걸 후벼 파 먹을 수 있는 탱자나무 가시, 워낙 많은 사람들이 이걸 좋아하다 보니 백사장 곳곳엔 빈 다슬기가 함부로 버려져 흉물이 되기도 했고 가끔 마구 버린 가시에 찔려 비명을 지르는 사람도 속출했다. 찜질 철이 지나면 매운탕촌도 한풀 꺾인다. 주인들은 모두 집에서 채, 낚시용 뜰채 등을 들고 백사장으로 나간다.

백사장을 후벼 채질하면 금반지, 동전 등 별의별 물건이 다 나오기 때문이다. 화원유원지 백사장은 70∼80년대 중년 여성과 남성들에겐 '묻지마 백사장 카바레'로 변했다. 어떤 중년 부인은 이곳에 올 땐 요조숙녀처럼 점잔을 빼다가 해가 서산에 걸릴 때쯤이면 인사불성으로 변해 폭소를 자아냈다. 포대기에 싸인 아이가 자기 등밑으로 흘러내리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놀다가 식당 주인이 급히 아이를 챙기는 촌극도 숱하게 벌어졌다. 어떤 주당파는 버드나무 숲에서 취해 자다가 일행을 놓쳐 매운탕으로 속 풀고 거기서 회사로 출근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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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플러숲, 대구 중년들의 원정 쉼터" - 청천유원지

"포플러숲, 대구 중년들의 원정 쉼터" - 청천유원지 요리 맛집 정보 2008. 9. 6. 14:37

"포플러숲, 대구 중년들의 원정 쉼터" - 청천유원지


 
#풍경1

흐린 날 오후 3시, 두 남자가 금호강 제방에 앉아 금호강을 아련하게 바라본다. 나이가 많은 쪽이 젊은이에게 추억의 청천유원지 얘기를 다정스럽게 들려주고 있었다.

"청천(淸泉)역 아나?"

"그런 역도 있어요?"

"그래 있어."

"동대구역에서 3.1㎞ 가면 동촌역, 5.4㎞ 가면 반야월역, 6.51㎞ 가면 청천역이지. 거기서 6㎞ 가면 하양역, 4.9㎞ 더 가면 금호역이지. 동대구역에서 가면 오른편 창으로 잘 조성된 금호강 습지와 광활한 경산 들녘이 아스라하게 펼쳐져 있지. 1968년까지만 해도 대구역에서 기차를 타야 했는데 69년 동대구역이 생기면서 청천역이 급부상했어."

"요즘은 유원지보다는 랜드 시대잖아요."

"그런가? 60년대에서 70년대로 넘어오면서 대구의 중년층들은 환장하듯 노는데 목숨을 걸었어. 울고 싶었는데 화원, 강창, 동촌, 청천, 하양이 제때 그들의 뺨을 때려 준 거지. 그땐 정말 놀 곳도 놀거리도 없었어. 그 흔한 노래방이 어딨었어. 고작 극장쇼이고, 숨어 카바레 들어가 보지만 성에 차지 않았지. 시민들의 가슴은 잘 나갔지만 인프라가 그걸 못 받쳐준거지. 그러니 어쩌겠어.

노는데 목숨 건 막가파식 중년은 북, 장구, 징들고 도심에서 30리 정도 떨어진 숲 속으로 춤판 깔러 간거지. 그래서 화원·동촌 유원지 버드나무 숲이 그 때 어른들의 아지트가 된거야. 하지만 관할 경찰서는 그걸 엄하게 단속했고 그 덕분에 뜬 데가 바로 청천이지. 지금 청천이란 데를 알만한 사람들은 거의 50대 이상이겠지. 청천유원지는 80년대초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 근처에서 가라오케가 등장하기 전 지역의 마지막 야외 디스코장으로 급부상했어. 화원엔 버드나무, 청천엔 이태리 포플러가 대표주자였지.

흥미로운 건 이 두 곳 모두 민간인들이 인위적으로 조성한 강변 숲이야. 그 숲은 분명 70년대 야외 유흥문화 센터였지. 재밌지 않아. 그때 유원지 매운탕집 상호는 죄다 지명 투성이야. 부산, 대구, 광주, 영천, 현풍…. 고향에 죽고 고향에 사는 고향파들, 유원지 매운탕집은 거의 뜨내기였지. 근대화의 틈바구니 속에서 배운 게 없던 그들의 최대 승부처는 음식점·술집뿐. 요리전문가라서 매운탕집을 연 게 아니고, 어떻게 하다 보니 그런 어정쩡한 업소를 만든거야."

나이 많은 남자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담배연기가 금호강 바람과 뒤섞여 사라진다.

#퇴락한 청천유원지 매운탕촌

동대구IC에서 반야월 방향으로 차를 몰고 갔다. 대구시 동구와 경산의 경계 지점부터 대구∼영천간 산업도로가 나타나고 조금 가자 왼편에 SK청천주유소 맞은편에 초록 바탕에 노란 글씨의 '청천유원지' 진입 팻말이 보인다. 하지만 그 팻말은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다. 그걸 보고 그곳으로 진입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 같았다. 이제 청천 매운탕촌은 '박제된 마을'이다.

예전엔 35번 버스에서 내리거나 청천역에서 내려 청천 포플러 숲까지 10분 정도 걸어야만 했다. 어떤 이들은 동촌에서 포항·영천 방면으로 가는 화물차를 타고 가기도 했다. 무인 철길 건널목을 지나 경부고속도로 고가도로를 지나 2분 정도 차를 몰고 들어가자 막다른 곳엔 금호강 제방이 나타났다.
 
이곳에 제방을 쌓고, 강물 흐름에 지장 주는 길이 600m, 폭 100여m의 포플러 숲을 싹 없앤 것이다. 장사가 될 리 없어 모두 이 바닥을 떠날 수밖에.

청천유원지 매운탕촌은 포플러 숲 안에 조성됐다. 숲은 대구에 사는 이모씨가 하천 부지를 불하받아 당시 나무젓가락 원료 공급처로 조성한 것. 일명 미루나무로 불리는 포플러는 뿌리가 약한 대신 성장이 빨라 채 10년도 안돼 거목이 된다. 매년 전지돼 나무젓가락 재료로 투입됐는데 사정이야 어떻든 매운탕집은 해수욕장 한철 장사치들처럼 그곳에 말뚝을 박고 판을 벌였다.

매운탕집은 정식 건물이 아니고 해수욕장 상가 같은 가건물 스타일이었다. 한 업소 평균 200∼300평 크기. 주인은 거의 청천 사람들이 아니었다. 모두 청천 특수를 노린 외지인들이었다. 놀러 오는 사람의 3분의 2는 저마다 먹을 걸 사갖고 왔다. 심지어 하천에서 국을 끓여먹기 위해 파와 무, 백철솥까지 갖고 와 주인들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가끔 보란듯이 코로나, 포니를 타고 오는 아베크 단골들은 VIP 대접을 받게 된다.

1913년쯤 일제는 대구∼포항간 도로를 가설, 시외버스를 올린다. 청천은 대구에서 포항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있어 접근하는 데 용이했다. 하지만 차편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성미 급한 청천행 남성들은 갓 출시된 90cc 오토바이를 잘 이용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오토바이 탄 '청천파 티켓 걸'들이 특수를 창출했다. 이 여성들은 동촌 근처에 집결해 장사를 했는데 알음알음으로 연락받고 찾아 온 남성들을 태우고 약 14㎞ 떨어진 청천으로 비호처럼 달려갔다. 그 진풍경이 선데이 서울 등에 자주 등장했다. 도우미들은 청천 숲에서 남성들의 파트너가 돼 매운탕 먹고 놀다가 대구까지 데려다 주고 일당 3천원을 챙겼다.

기자가 찾은 날 청천 둑 아래 '해운대'와 '대구' 두 식당만이 외롭게 남아 있었다. 이 집의 역사를 아는 단골만 몇몇 여기 들러 추억의 매운탕을 먹을 따름이다.


◇ 34년역사 '물띠미 매운탕'

돌아오는 길, 물띠미 매운탕집을 찾았다. 물띠미 매운탕은 30여년 전부터 대구∼포항을 오가는 운전기사들에겐 인기 짱이었다. 물띠미는 금호강 물이 세차게 부딪히는 지점이며 고지대라서 이 지점에선 오가는 차들이 반드시 쉬어간다. 올해 34년 역사를 가진, 이 근처에선 가장 오래된 매운탕집. 여주인 최경씨(66)는 당초 ㄱ자 기와집을 1982년 3층 콘크리트조로 신축을 한다. 예전엔 물띠미 휴게소 언덕 바로 앞에 물띠미 나루가 있었고 배를 타고 대조리로 건너가면 백사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건너편 강변 부지는 대구 사과의 발흥지 중의 한 곳으로 과수원이 벨트식으로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초창기 매운탕 한 그릇은 800원. 단체 손님들은 거의 청천유원지로 빠지고 여기는 대구∼포항으로 오가는 시외버스·화물차·일반 승용차 운전자들이 잠시 쉬어간다. 휴게소 앞 길은 83년 동아건설에 의해 왕복 4차로로 넓혀진다.

99년 1월27일 대구고검장 신분으로 대검기자실에서 '국민앞에 사죄하며'란 글에서 '나를 심판하기 전에 검찰총장부터 옷 벗어라'며 항명파동을 일으켜 면직된 검사 1호 심재륜씨가 착잡한 심정을 잠시 잊고 자기 집 매운탕을 맛있게 먹고 갔다고 최경씨가 귀엣말로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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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만난 메기 '물 만났네∼'

논 만난 메기 '물 만났네∼' 요리 맛집 정보 2008. 9. 6. 14:34

논 만난 메기 '물 만났네∼'


논에서 담수양어…낚시꾼들 몰려, 즉석서 매운탕 끓여주다 '입소문'
처음엔 크기 상관없이 같은 값…'인정담긴 맛'으로 체인점 열어

 

 
논메기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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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기찜의 예입니다. 인터넷에서 퍼왔습니다.]
 
메기의 지난 세월 팔자는 처량했다. 그도 피라미, 쉬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골 장대했다. 그런데 복이 없어서 그런지 그 주위엔 강적이 많았다. 민물고기 중 가장 힘이 센 가물치는 잉어와 함께 산모들의 건강식으로 호시절을 누렸고, 민물장어는 허약한 남정네들의 삼복 보양식으로 자릴 잡았다. 심지어 자기보다 더 볼품없게 생긴 미꾸라지는 추어탕으로 귀인 대접받았다. 느닷없이 나타난 쏘가리도 잡어 매운탕계의 다크호스로 등장해 또 뒤로 밀려났다. 메기의 한을 누가 알쏜가. 메이저급 민물고기한테 불만이 많아 강바닥 펄 속에 머릴 처박고 숱한 날 울었으리라.

1980년대말까진 찬밥 신세. 그런데 90년초가 되자 메기신세 욱일승천. 그의 집에 쨍하고 빛이 든 것이다. 자연산 메기가 '논메기'란 닉네임을 갖고 기존 매운탕계에 일격을 가한 것이다. 잉어는 거의 그로기 상태였다. 메기가 강에서 논으로 들어가 메기 전성시대를 구가한 뒷 사연이 궁금하지 않는가?

#논메기 매운탕 1번지 달성군 다사읍 부곡리

대구시 달성군 다사읍 부곡1리 일명 셋터 마을. 논메기 신화의 발생지다. IMF 외환위기 폭풍 전야, 전형적 농촌 지역이었던 부곡리. 그곳에서 어떻게 논메기 매운탕이 태어났을까?

부곡리가 뜨자 강창교를 건너서 죽곡리∼부곡리∼문산리∼성주대교 가도가 졸지에 달성군이 정한 논메기 매운탕 거리로 발돋움해 현재 스무집이 장사하고 있다.

논메기 매운탕 붐을 일으킨 건 부곡1리의 손중헌씨(56). 논메기 매운탕 체인붐 주역은 서재 할매 매운탕을 만든 이귀달 할머니(작고)이다. 두 사람 때문에 잉어 매운탕·찜·향어·송어회 시대는 가고 논메기 매운탕 시대가 화려하게 전개된다.

강창교를 지나면 다사 고개가 마주선다. 그 정점에 자리한 서재 매운탕 본점을 지나면 오른편에 매곡정수장이 나온다. 우회전하다 보면 오른편에 부곡2리 다사 논메기 매운탕집이 나온다. 부곡1리는 강창교에서 약 4㎞ 떨어져 있는데 현재 이 마을엔 매운탕집이 다사와 부귀 두 곳밖에 없다. 한창 때는 다섯집이 있었다. 다사 매운탕의 한상봉(50)·박영순씨(45) 부부는 논메기 매운탕 찜의 진수를 보여주겠다며 기자를 주방으로 안내했다.

칼 등으로 메기를 기절시켜 내장을 들어내고 물로 깨끗하게 씻은 뒤 메기 몸에 6~7번 칼집을 낸다. 양념이 잘 배어들어가게 하기 위해서다. 부부는 다시마, 무로 우려낸 육수를 매운탕 냄비에 조금 붓고 메기를 넣은 뒤 가열시켰다. 비린내 제거를 위해 메기 몸에 소주를 조금 부은 뒤 그 위에 참기름을 둘렀다. 기본 양념은 마늘, 고춧가루, 후추, 재피, 된장 등 10여가지가 들어가지만 너무 단 맛이 나면 안되기 때문에 물엿은 사용하지 않는다.

옆 마을 부곡1리로 차를 몰았다. 달성군 다사읍 전체가 논메기 매운탕촌으로 성장한 것은 지리적 이점 때문인 듯 했다. 낙동·금호강과 연접해 있고 경부·88·구마·중앙·중부내륙·대구~포항 고속도로와 직결돼있다. 몇년전 왕복 2차로 국도가 왕복 4차로로 시원스럽게 확장돼 대구 지역민과 성주·고령권 주민들도 접근하기가 쉬워 매운탕촌으로선 적지인 셈.

손중헌씨를 만났다. 그는 92년 봄 사양길로 접어든 논농사에 미련을 버렸다. 히든 카드를 찾던 중 양어 사업을 구상했다. 그는 1천여평의 논을 갖고 있었다. 농사를 지어봐야 1년 매출액이 고작 150만원선, 그것 갖고는 아이들 학비도 제대로 지원할 수 없을 것 같아 돌파구를 찾은 것이다. 구원의 손길이 그에게 다가왔다. 달성군 농촌지도소 조해옥 소장이 그에게 담수양어 시범 사업을 소개한 것이다.

92년 6월1일 경남 창원군 대한수산 양식장 손해기 사장으로부터 8g 치어 6천마리를 구입해 논 6평에 집어 넣고 키운다. 메기는 야행성, 몇 군데에 그늘막을 치고, 뱀장어 사료 등을 많이 먹였다. 보통 논메기 생육기간은 1년6개월 정도. 그런데 손씨의 메기는 불과 4개월만에 40㎝, 300∼400g으로 성장했고 ㎏당 7천원선에 팔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양어만 알았지 마케팅엔 무지했다. 고전을 면치 못했다. 궁여지책 끝에 논메기 유료 낚시터로 돌파구를 찾았다.

그게 적중하기 시작한다. 일부 낚시꾼들이 거기로 몰려 들었다. 낚시꾼들은 잡은 논메기를 갖고 손씨의 집에서 배를 따 씻은 뒤 직접 매운탕을 끓여 먹었다. 요리의 '요'자도 몰랐던 그였지만 순간 논메기만 기를 게 아니라, 식육식당처럼 한쪽엔 양어장, 한쪽에 매운탕 식당을 차리면 돈이 될 것 같았다. 낚시꾼들에게 매운탕 기본기를 배운 뒤 양식장 옆에 테이블 5개 정도를 갖춘 25평짜리 비닐하우스 매운탕집을 만들었다. 손중헌 논메기 매운탕이 태어난 것이다. 주방도 없어 버너로 매운탕을 끓였지만 그게 산 중에서 먹는 라면 맛처럼 별미였다.

영업용 택시 운전사들의 입을 통해 지역의 단골을 대거 확보하게 된다. 하지만 그곳은 그린벨트 지역이라서 형질을 변경할 수 없었다. 깊이 60㎝급 양식장 설치도 불법이었다. 하지만 당시 다사면장은 고사 직전의 농촌 살리기 차원에서 손씨 매운탕 집을 식당으로 키워줬다. 95년 3월2일 부곡리 첫 논메기 전문 매운탕집 허가가 난다. 미식가들이 몰려들었다. 주민들도 손중헌 매운탕 붐에 힘을 받아 너도나도 논메기 매운탕집을 연다. 마을 전체 25가구 중 14가구가 전답을 팔아 논메기 매운탕집을 연다. 하지만 경기가 예전 같진 않은 모양이다. 현재 부곡1리 매운탕집은 모두 11군데.

부곡1리를 빠져나와 성주 방향으로 잠시 달리면 오른편에 문양 지하철 2호선 출발 기지가 보이고 그 오른편에 낙동·남강·나룻터·장수 식당이 논메기 매운탕을 파는데 이곳이 문산 매운탕촌이다.

#서재 원조 할매 메기 매운탕

80~90년대 식당가엔 '할매'붐이 인다. '할매=맛'이란 등식이 성립했다. 특히 칼국수 집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할매 칼국수'란 상호를 선호했다. 경쟁이 치열해지자 단골들은 누가 원조인가를 따졌다. 출발 시점이 흐릿하고 시·군·구 당국자들도 60년대 이전 영업허가·신고 대장을 갖고 있지 않아 솔직히 누가 먼저 장사를 시작했는지 판가름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았다.

특히 1대 부모들이 돌아간 경우 경쟁 업소 자식들간에 원조 논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저마다 자기 부모가 원조라고 주장하게 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대를 이은 자식들은 할매란 말 앞에는 반드시 '원조'란 수식어가 붙었다. 할매는 왜 원조를 고집했을까? 그것은 결코 할매의 맘이 아니었다. 할매는 마케팅 마인드가 제로였지만 그 맥을 잇는 자식들의 셈법은 빨랐다.

서재 할매 매운탕의 주인공은 지난 3월2일 작고한 이귀달 할머니. 경남 함양 출신인 이 할머니는 6·25때 남편을 여의고 영천을 거쳐 대구로 들어와 서구 내당동에서 살다가 20여년전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 골재 채취장 근처 금호강과 400여m 떨어진 10여평 규모의 무허가 판자촌에 정착한다. 큰 아들 김동진씨, 며느리, 3명의 손녀 등 6명의 식구가 동고동락했다. 흥부집을 방불케했다.

아들 김씨는 마땅한 반찬이 없을 경우에는 연호지, 신동지 등 도내 유명 유료 낚시터 등을 돌며 잉어 등을 잡아와 탕을 끓였다. 그냥 끓인 것이지 돈을 염두에 둔 건 아니다. 그런데 터가 좋아서 그런지 서재의 한 섬유회사 사장 등이 이 할머니가 끓인 매운탕을 먹은 뒤, 돈을 받지 않겠다면서 사양하는 이 할머니에게 만원짜리를 쥐어주고 갔다. 영업 아닌 영업이 되고 만 것이다. 이 할머니는 고마우면서도 면구스러웠다. 처음엔 정감어린 매운탕을 대·중·소로 나누지 못하고 크기에 관계없이 1만원씩 받기 시작했다.

점심 때가 되면 성서 공단에 있는 사장들이 즐겨 찾았다. 직원 4~5명과 함께 와서 1만5천원선.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번듯한 식당이 아니란 게 식도락가들에겐 매력 포인트였다. 날이갈수록 서재 판자촌 매운탕집은 대목 장터처럼 붐볐다. 사촌이 논 사면 배가 아프다고 했던가, 인근 일반 식당에서 이 할매 돈버는 꼴을 보지 못하고 당국에 신고한다. 그래서 수백만원의 벌금을 물고 무허가 주택도 헐리게 된다.

서재 매운탕은 주저 앉지 않았다. 10여년전 서재 매운탕이 변신을 한다. 무허가촌 서재 매운탕 시절을 끝내고 달서구 이곡동 와룡시장 근처로 옮겨와 공격적으로 장사를 시작한다. 2년 머물다가 근처 용산동으로 옮겼고 2000년 가을 재차 다사읍 죽곡리 다사 고갯마루 오른편에 자릴 잡는다.

서재 매운탕은 부곡리 매운탕과 달리 체인사업에 뛰어들었다. 선하게 생긴 이 할머니 사진을 간판에 찍어넣었다. 매운탕 소 1만원, 대 1만5천원. '매운탕은 비싸다'란 선입견을 서재 매운탕은 일거에 붕괴시켰다. IMF를 맞아 호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서민들에겐 부담없이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다가선다. 서재 브랜드가 뜨자 대구 시내에 무려 16개의 체인점이 생겨났다. 하지만 지금은 불과 6개 선으로 줄어들었다. 논메기 전성기 10년, 그 후속편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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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물 잡어 매운탕

민물 잡어 매운탕 요리 맛집 정보 2008. 9. 6. 14:31

민물 잡어 매운탕


꺽지, 뿌구리, 빠가사리 시원·구수·담백 잡어3인방 '귀한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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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물 잡어 매운탕의 예 ]


잡어탕 원천은 '천렵탕'.

천렵은 놀 것 없던 그 시절 한량들 최고의 레포츠 수단. 자연스럽게 강변 매운탕은 남성들 몫이 된다. 오뉴월 염천 아래 사발·통발·반두·족대·어망·파리 낚시질해 잡은 자잘한 잡어들이 '강변 카니발'에 동원된다. 백철 솥에 배딴 고기 들어가고 된장, 고춧가루, 고추장, 호박, 깻잎 넣고 끓인다. 보이는 식재료 대충 들어간다고 해서 '대충탕'으로 불렸다. 출출하면 국수 넣어 어탕 국수도 끓였다. 얼큰한 국물 맛이 술맛을 돋운다. 자갈밭에서 진탕 노는 모양이 꼭 소동파 '적벽부'의 후반부 장면을 연상시킨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천렵탕은 3급 매운탕이었다. 잡어는 메이저급 매운탕 양념으로 몇 마리 들어갈 정도로 푸대접 받았다. 낙동강, 금호강이 아닌 마을 앞 개천에서 잡힌 씨알 작은 잡어들은 '틈새 어종'으로 분류돼 법당 뒤로 밀려났다. 그런 잡어 3인방이 요즘 '귀하신 몸'으로 대접받고 있다. 이들의 맛 색조는 제각각. 특히 빡∼ 빡∼ 특이한 울음소릴 내는 빠가사리 맛은 담백, 꺽지는 시원, 뿌구리는 구수하다. 세 가지가 섞이면 칼칼·얼큰·개운하다.

매운탕 마니아들의 혀는 섬뜩할 정도로 정확하다. 마치 전라도 귀명창이 새내기 소리꾼 첫 소절만 들으면 소리의 깊이를 단번에 판가름하는 수준. 더 완벽한 음미를 위해 매운탕 먹기 전엔 다른 반찬엔 손을 안된다. 혀에 양념이 묻으면 감도가 떨어진단다. 그런데 문제는 비린내. 예전 어른들은 매운탕은 비린 맛으로 먹는다고 했지만 90년대 도시민들은 단연코 'No'. 그래서 도심 매운탕 집은 '비린내와의 전쟁'을 벌일 수밖에.

민물고기는 펄을 먹고 살아 입 안엔 흙과 유기물이 썩어 생긴 찌끼인 '해감'이 늘 담겨있다. 이 해감내가 갓난아기가 토악질한 젖내만큼 역겹다. 게다가 민물고기 피부에 함유된 휘발성 아린 화합물인 '피페리딘(Piperidine)'도 비린내를 유발시킨다. 몸 속에 퍼진 비린내. 어떻게 날려버리나. 제일 강력한 게 산초(山椒) 가루였다. 연이어 된장, 그 다음 방아 잎, 깻잎, 애호박, 호박잎, 심지어 생강즙과 당귀 등 한약재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양념은 '과유불급(過猶不及)'. 산초와 화학조미료를 과도하게 넣으면 진미는 실종된다.

잡어탕 중 가장 비싼 게 쏘가리탕(평균 4만원 이상). 그래서 그런지 관리 어종으로 매년 6∼7월엔 잡지 못한다. 1995년 충북도 내수면 개발 시험장에서 인공부하에 성공했고 2000년초 의성군이 치어를 관내 저수지 등에 다량 투입해 의성은 졸지에 쏘가리 고장으로 통한다. 하지만 쏘가리 양식은 매우 어렵다. 성질이 워낙 급해 장마 때 천둥소리에 놀라 배를 뒤집고 죽을 정도. 치어를 분양받아 키울 순 있어도 키울 공간이 부족하다. 최소 1㎞ 이상 하천을 끼고 양식을 해야 되는데 그런 공간을 확보하기 힘들다. 자연산의 경우 1급은 강원도, 2급은 금강·섬진강·경호강권이다. 낙동강은 유속도 느리고 여울이 별로 없어 3등급이다.

#민물 잡어 매운탕 대표주자들

금강(내당네거리 모퉁이), 민물박사(수성못 동측), 반도(중앙경영정보고 남측), 열이네(서재고개 북측 초입, 진천역 옆, 복현동), 이하수 매운탕(칠곡군 석적면 중리 부영아파트 근처), 강나루(복현동 에메랄드 호텔 뒤편, 대구MBC 남측).

대구를 대표하는 장수 민물 잡어 매운탕집이다. 이들은 1980년대 중반 강변 매운탕 문화가 타격을 받자 즉시 도심 속에 매운탕 문화를 퍼뜨린다. 모두 장사가 잘 됨에도 불구하고 거의 체인점 시스템을 도입하지 않고 자연산으로 승부를 걸고 있다. 또 대다수 부부가 식당을 꾸려가고 있다. 남편들은 하나같이 못말리는 '낚시광'. 성어기면 식당일은 아내에게 맡기고 낚싯대와 어망 등을 차에 싣고 전국 유명 강과 저수지 등지로 출어한다. 이들은 거의 50대 초반, 지역 매운탕 2세대인셈.

민물박사·금강·반도·이하수는 2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강나루·열이네는 후발 주자이지만 모두 금호강 수역인 동촌과 강창 매운탕과 인연을 맺으며 성장해 저력이 만만치 않다. 반도 주인 문상훈씨(59)는 반도 낚시점 주인이다. 민물박사는 유일하게 레스토랑 매운탕 시대를 열었다.

맛은 거의 자극적이지 않다. 얼큰함은 반도와 열이네가 제일 두드러지고 나머지는 된장 등을 잘 안배해 부드럽고 맵지 않아 퓨전 스타일의 매운탕 기분이 난다. 물론 옵션을 걸면 매운 청양고추를 넣어 땀나도록 해준다.

도심 잡어탕 개척자는 동아백화점 뒤편 초림식당(대표 이정언). 이들보다 앞섰지만 이 사장은 한 길을 못가고 훗날 밀리오레 뒤에서 업종을 바꿔 장춘면옥을 차린다.

▲민물박사= 상주시 낙동면 신오리 낙동 나루 근처에서 매운탕과 인연을 맺은 조상기씨(53). 그는 낙동 나루 근처에서 매운탕집을 꾸려 간 부모 조성규(76)·정봉순씨(75)로부터 매운탕 끓이는 법을 배웠다. 그가 현재 수성구 두산동 수성못 동편으로 오기까지 지난 20여년간은 '민물고기와의 동침 세월'. 그래서 민물박사란 별명을 갖게 된 것. 그는 주인이면서 주방장이고 홀 서빙맨인 동시에 고기가 떨어지면 직접 강으로 달려가는 강태공. 어부처럼 잘 익은 대춧빛 혈색이 돋보인다. 붕어 곰탕, 피라미 조림, 쏘가리 회, 자연산 장어 구이는 물론 어탕 국수, 자연산 미꾸라지로 요리한 추어탕까지 직접 요리하는 민물요리 전문가. 20여년 전 고향 상주를 떠나 청구고 옆에서 매운탕집을 차려 그동안 다섯 차례 이전했다가 현재 자리로 왔다. (053)768-2104

▲금강= 85년 9월 오픈한 금강 매운탕. 대구의 서구권 매운탕가의 좌장. 특공무술 덕분에 청와대 경호팀에서 생활하다 81년 전역한 이창열씨(51). 낚시파 인생을 살아 온 그는 초림식당 이 사장과 죽이 맞아 금강, 전북 진안 용담댐 수몰지역, 섬진강, 경호강, 임하댐 상류지역에서 쏘가리를 무진장 잡았다. 한 번 떠나면 2박3일, 많을 땐 쏘가리 13㎏를 잡아 왔다. 남 주기도 아깝고, 그래서 아내 곽영구씨(45)와 의기투합해 금강 매운탕 시대를 연다. 인기를 반영하듯 현재 지역에서 금강 상호를 슬쩍 모방한 식당이 7군데. (053)626-6106

▲강나루= 복현점과 범어점 두 곳이 있다. 복현점은 91년 등장했는데 사장 신태호씨(52)의 매형인 범어점 주인 이성복씨(51)가 현재 아들 이상협씨(28)와 잡어매운탕 대중화에 열을 올리고 있다.

범어점의 맛은 60년대 동촌 유원지 내 대표적 매운탕 집이었던 버드나무 식당 주인 홍모씨의 손맛에서 건너왔다. 그는 20세부터 동촌 K-2 부대 장교들과 영천 금호강 상류로 몰려가 고기를 잡았고 그가 직접 매운탕을 끓였다. 하지만 버드나무 식당은 90년쯤 폐업되고 그의 피혁사업도 여의치 않자 처가의 도움을 받아 92년 봄 고속버스터미널 근처에서 강나루 인기몰이에 나섰다. (053)742-7130


▲열이네= 세 자매 매운탕가의 주역. 김열이(58)·옥순(56)·옥이씨(49)의 어머니 정남연씨(15년 전 작고)는 전국 매운탕 메카였던 강창 매운탕촌 금호식당 주인이었다. 강창 매운탕 원조 대구식당 바로 아래 자리잡았던 금호식당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 지역 군 장교들이 자주 찾았다. 하지만 80년대 강창 매운탕 경기가 추락하자 정씨는 캐나다로 이민을 간다. 맏딸 김열이씨가 가업을 잇기 위해 90년쯤 성서공단에 이름없는 잡어매운탕집을 열었고 97년쯤 달서구 이곡동 서한2차 아파트 앞에서 본격적으로 열이네 매운탕 시대를 연다. 이때 왕실과 서재 매운탕 본점과 경쟁했다. 언니 밑에서 노하우를 배운 둘째는 달서구 진천역 미즈맘 병원 옆, 셋째는 평리동 구 신천지회관 옆 골목 안으로 분가했다. (053)583-5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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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비산·동락나루 매운탕

구미 비산·동락나루 매운탕 요리 맛집 정보 2008. 9. 6. 14:27

구미 비산·동락나루 매운탕
 


바이어 대접때도 "매운탕촌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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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낙동강 구미 구간엔 모두 8개의 나루가 있었다. 동락(東洛), 비산(緋山), 강정(江亭), 강창(江倉), 용산(龍山), 송당(松堂), 월골(月窟), 가산(加山). 나루 양측엔 어김없이 강나루주막이 진을 쳤고 그 주막의 단골은 강을 건너는 행인들. 장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안되는 것도 아니니 늘 그 메뉴에 그 서비스. 현대식 다리가 놓이면서 주막은 구멍가게, 아니면 식당으로 '버전 업'됐다. 낙동강 구미 구간은 약 45㎞. 평균 6㎞마다 1개씩 나루가 놓여 있은 셈이다. 그런데 지금 일선·승선·산호·구미·남구미·낙동 등 6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

강나루 주막은 여건상 매운탕 집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구미도 마찬가지였다. 대구의 강창, 강정, 화원 강나루 매운탕과 한 항렬로 발전해 온 구미 매운탕촌 양대 산맥은 비산과 동락. 비산쪽엔 대구·한양·강나루·수림·버드나무, 동락쪽엔 나룻터·왜관·동락·대교 등이 서로 마주보고 자릴 잡고 있다.

현재 두 곳의 자존심 대결은 대단하다. 서로 자신들이 구미 매운탕의 본가라고 우긴다. 인문지리적으로 볼 때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비산은 구미의 주 생활권인 반면 동락은 칠곡권이었다. 그런데 동락은 70년대 중반 개통된 구미대교 가설로 신도시로 조성되면서 급부상했고 한때 칠곡군 인동면(78년 구미시에 편입)에 속해 비산 사람들은 강 건너로 가길 꺼려 했다.

동락쪽 매운탕집 역사는 거의 35년선. 모두 자식이 명맥을 잇고 있다. 비산쪽은 가장 오래 됐다는 대구가 35년. 현재 주인들 모두 작고한 매운탕 1세대의 가게를 인수했기 때문에 어디가 유서깊은 곳인지를 따지는 건 무의미한 것 같다.

비산과 동락은 산호와 구미 대교를 끼고 약 1㎞ 떨어져 마주보고 서 있다. 특히 최근 개통된 산호대교의 휘황찬란한 야간 조명과 강건너 구미2·3공단 불빛 때문에 아베크족이 많이 몰리고 있다. 동락의 명물은 속칭 '새똥 바위'. 여현 장현광은 '부지암(不知巖)'이라 명명했다. 근처에 동락서원, 부지암 정사, 인동향교가 있고 그 바위는 잠수암이라 장마철에 어김없이 수면 아래에 위치한다. 그게 물에 잠기면 바위 위에 자릴 잡은 대교 등은 물난리를 겪어야 한다.

구미 매운탕촌은 구미공단이 만든 것이라고 보면 된다. 매운탕집은 구미공단의 공식 회식장소였다. 공단 사장들은 일본, 미국 바이어들이 들이닥치면 두 매운탕촌으로 안내했다. 80년대 들어 해운대 갈비, 금오산맥 등 숯불갈비집 등 각종 외식업소들이 등장하지만 그 전만 해도 회식 공간의 풍취를 가진 곳은 강변 매운탕촌을 따를 곳이 없었다. 풍광은 비산에서 양호동 강둑쪽이 좋다. 그래서 LG전자가 현재 외인아파트 근처에 영빈관을 만들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그곳을 단 한번도 이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과, 참외, 땅콩이 많이 재배되던 강 건너 모래밭엔 대규모 버드나무 숲이 조성됐다. 경산시 하양읍 청천의 포플러, 화원의 버드나무 숲에 필적됐다. 비산나루 옆에 조성된 구미1공단. 코오롱, LG전자, 오리온전기, 한국전자, 동국방직, 이화섬유, 계림요업, 한일방직 등의 간부들은 물론 직원들도 비번이거나 주말을 맞으면 비산나루로 우르르 몰려왔다. 배를 타고 강 건너로 가서 놀고 오는 것이다.

나룻배 중앙부엔 늘 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75년 어느 날 큰 사고가 날 뻔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뱃머리에 앉는 바람에 배가 전복된 것이다. 다행히 강 수심이 들쭉날쭉해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일본 관광객들은 특히 장어를 좋아했다. 공단 간부급 부인들은 여름철 오전만 되면 나루로 나왔다. 그들이 그곳에 온 건 일에 파묻혀 잠자리에서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남편을 위해 가물치, 자라, 잉어를 사러 온 것이다. 자연 용봉탕(용은 잉어·자라 등을, 봉은 닭을 의미한다. 용봉탕은 원래 지렁이를 먹은 닭을 끓인 탕을 말하는데, 지역에 따라 잉어와 닭, 자라와 닭을 함께 넣고 끓이기도 한다) 붐으로 이어진다.

비산·동락나루 잉어요리, 회·탕·찜 순으로 개발돼

잉어 요리는 잉어회, 잉어탕, 잉어찜 순으로 발전해 왔다. 두 곳 모두 처음엔 매운탕만 끓이고 찜을 선보이지 않았다. 80년대 들자 탕요리만 갖고는 손님을 잡기 힘들다고 판단한 동락나루의 여주인들이 의기투합해 '전국 매운탕 1번지' 강창을 비롯, 대구 도심 곳곳의 유명 매운탕촌을 뒤졌지만 잉어찜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평소 갈비찜 솜씨를 응용해 나름대로의 잉어찜 요리를 선보였다. 그들은 늘 주요 회사 과장급 이상 VIP 단골을 은밀하게 불러 시식요리를 내놓았다. 식도락가가 돼버린 그들의 지적은 거의 정확했다. 그들이 맛있다고 하면 입소문을 타고 직원들에게도 번져나갔다. 아들, 며느리와 함께 식당을 경영하는 동락나루 나룻터(사장 나춘자·60)는 잉어찜 양념을 두 번 바르는 것으로 차별화를 시도했다.

비산나루 터줏격인 대구식당 문천대씨(여·63)와 한양식당의 곽용기씨(60·전 구미시의원), 84년쯤 비산나루에서 물러나 구미의 마지막 도선장으로 불리는 전용식씨(65)를 차례로 만났다.

비산나루 매운탕에 첫불을 지핀 건 백인기씨. 그는 대구시 달서구 파호동 강창나루에서 매운탕 장사를 하다가 이곳으로 자릴 옮겼다. 현재 대구식당 자리에서 방을 얻어 매운탕을 끓였다. 60년대 후반쯤이었다. 하지만 손님이 그렇게 많지 않아 계약 기간도 채우지 못하고 그 자릴 떴다. 백씨가 등장할 때 김수홍씨가 현재 한양식당 자리에서 '어정(魚井)'이란 매운탕집을 연다.

백씨가 하던 식당은 당시 29세 때 그곳으로 시집온 대구 비산동 출신 문천대씨가 이어간다. 문씨의 고향이 대구라 선택의 여지없이 대구식당이란 간판을 걸었다. 문씨의 남편 신도식씨(81년 작고)는 한량 뱃사공으로 술과 친구를 좋아했기 때문에 가업은 억척스러운 문씨가 다 챙겼다. 문씨는 10년 이상 나룻배를 부리는 여자뱃사공. 그래서 구미시 문화행사 때 낙동강 마지막 처녀 뱃사공으로 뽑혀나가기도 한다. 문씨는 비산과 인연이 깊다. 태어난 곳도 비산동이고 시집 온 곳도 비산동이기 때문이다. 비산동 흙은 붉다. 그래서 대나무도 붉은 색을 띤다고 해서 자지기(紫竹)로 불렸다. 어정은 79년 곽씨가 인수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비산매운탕을 살린 건 구미공단이었다. 70년 안팎으로 구미·낙동 대교가 준공되자 거의 1만명의 공원이 비산나루를 찾아 몰려들었다. 금성사와 코오롱, 한국전자, 신영 등 굴지의 업체들 회식 자리는 선택의 여지 없이 매운탕집이었다. 그렇게 해서 대구, 대가, 대동, 어정 등 5개의 매운탕집이 들어서고 동락나루쪽에서 4군데가 군락을 이룬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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