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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국밥(상)-국일식당

따로국밥(상)-국일식당 요리 맛집 정보 2008.09.10 15:02

따로국밥(상)-국일식당

김두한 측근에 '매운 맛'…상표권 싸움서 한판승
'남편위해 끓인 국밥' 나무꾼들 외면못해 시작…6·25때 대히트 불구 "상놈이 먹는 국이지" 소리에 "따로 잉교?" 등장


 

#국일의 미공개 소송 비사

"뭐라고, 대구에 우리와 비슷한 상호를 가진 식당이 있다고. 그것 참…."

1996년 어느 날, 한때 주먹왕 김두한의 측근으로 활동한 서울 종로3가 K나이트클럽 모 회장(작고)이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K나이트클럽은 1924년 태동, 일제 때 명월관과 함께 최고 요정으로 군림했고, 광복 후 한정식 식당으로 변했다가 그 무렵 식당가, 복합 영화관, 나이트클럽 등이 입주한 복합빌딩시대를 열고 있던 차였다. 회장은 K의 배타적 권리를 선점하기 위해 1960년대초 서둘러 특허청에 상표등록을 했다. 그런데 10년마다 한 차례씩 상표등록을 갱신해야 하는 걸 담당자가 깜빡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때 대구시 중구 전동 흥국생명(80년 신축) 바로 서편에 자리잡고 있던 국일 따로국밥도 'K'와 이름이 비슷한 국일(國一)이란 상표를 특허내던 차였다. 양측은 그때까지 서로의 존재를 별로 모르고 있었다. 당연히 K쪽은 펄쩍 뛰면서 자기 상표권을 지키려고 소송을 제기한다. 국일도 대구 따로국밥의 자존심을 걸고 송사에 뛰어들었다. 3년여간의 소송, 법원은 국일 측의 손을 들어줬다.

그날 이후부터 한국 식당 및 유흥업 관련 업소는 '국일'이란 명칭이 들어간 상호를 일절 사용 못하게 된다. 물론 K도 자기 상호를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솔직히 K 입장으로선 날벼락인 셈이다. K측은 소송 전까지 국일을 얕잡아 본 것도 사실이다. 지방의 국밥집이 파워가 세면 얼마나 셀 것인가 하고 하대했다. 그런데 소송 과정에 K 못지않은 국일의 역사를 알곤 태도를 바꾼다. 국일측도 K한테 너무 매정하게 대한 것 같아 한발 양보한다. 그런 연유로 K는 지금 국일한테 로열티를 지급하고 상호를 사용하고 있다. K의 회장도 작고하기 전 몰래 대구로 내려와 그 국밥을 먹어봤고 측근들에게 "따로국밥이 소문대로 맵긴 맵군"이라며 국일을 재평가했다고 한다.

#국일은 어떻게 태어났는가

소피와 양지머리, 사골을 끓여 만든 육수, 파와 무, 그리고 고추기름이 가미된 '대구식 육개장'의 본산인 국일.

고사리와 계란이 가미된 서울식 육개장과 엄격하게 구별되는 국일 따로국밥이 97년 대구시 향토음식으로 지정되긴 했지만 아직 따로국밥이 대구를 대표하는 음식이란 전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동안 국일이 언론에 숱하게 알려졌지만 처음 문 열 때 위치, 메뉴와 조리법 등도 정확하지 못한 측면이 있고, 관련 사진조차도 거의 공개되지 못한 아쉬움도 있다.

국일의 가업은 1대 서동술(69년 작고)·김이순씨(75년 작고) 부부한테서 7남 봉준(81년 작고)·최영자씨(65) 부부로 이어지고 98년부터는 창업자의 손자 경덕(42)·경수씨(34) 형제에게로 체계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1대 서씨 할아버지는 구미시 해평면 출신으로 남구 성당못 근처에서 살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광복 직후 고향에 왔지만 먹고 살 일이 막막해 46년 한일극장 옆 공터 나무시장에서 나무를 팔면서 입에 풀칠을 했다. 김씨 할머니는 식성이 까다로운 남편을 위해 직접 나무시장까지 와서 점심을 해주고 갔다. 추운 겨울엔 국밥을 잘 끓였지만 정 많은 노부부는 국 냄새를 맡고 곁으로 몰려드는 나무꾼들을 외면하지 못하고 국을 좀 더 끓여줬다. 서씨의 권유로 김씨 할머니는 부창부수(夫唱婦隨)하기로 작정한다. '구루마' 한 쪽에 국거리가 담긴 작은 무쇠솥을 싣고 집과 나무시장 사이를 왕래했다. 국일의 출발은 그토록 허름했다.

국일이 처음 태동한 한일극장 옆 공터는 '음터'로 불린다. 공터 왼편 수백년된 회나무가 유명했는데, 경상감영시절엔 교수대로 활용돼 '흉목(凶木)'으로 터부시됐다. 회나무는 6·25 직전 군정청에 의해 베어진다.

40년대 국일은 번듯한 식당이 아니었다. 간판도 없었다. 단골에겐 그냥 성당동 할매, 서씨 할배집으로 통했다. 지금 같은 개별 의자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냥 돌멩이 두 개 위에 송판을 놓고 여러 명이 함께 앉도록 했다. 방도 2개가 있었고, 마당엔 늘 무쇠솥이 두 개 놓여 있었다. 서씨 할아버지는 고령군 다산면에서 올라 온 따로국밥용 '다끼파'를 서문시장에서 사와 틈만나면 다듬었다.

47년쯤 칠성동에 대성연탄 저탄장이 생긴다. 장작보다 훨씬 화력이 좋은 연탄이 국밥집에서 각광을 받는다. 몰래 훔쳐 온 석탄 가루는 찰흙, 폐유 등과 뒤섞여 음반으로 말하면 해적판 같은 '야미(闇)연탄'이란 이름으로 식당가에 불법유통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국일 바로 옆에 남일동 사창가(현재 미도백화점 자리)가 형성돼 있었는데 아침이면 해장 손님을 위해 직접 냄비를 들고 국을 사러 온 홍등가의 여인들도 있었다.

국일 따로국밥은 6·25의 히트작이다. 타지 피란민들이 들끓기 시작하고 전시 특수를 노린 상인들의 행보가 빨라진다. 국립극장으로 변한 한일극장엔 연일 유랑극단 배우들로 들끓는다. 국일도 덩달아 호황을 누릴 수밖에 없었다. 황금심, 남인수, 허장강, 구봉서, 배삼룡 등 악극 배우들도 거의 매일 국일을 찾았다. 여름철엔 주로 교동시장 내 강산면옥, 부산 안면옥 등으로 갔지만 겨울엔 국밥집 만한 곳이 없었다. 곱상하게 생긴 여배우들은 국에 밥이 말려진 국밥을 멀리했다. 사실 나무꾼만 찾았던 40년대는 국에 밥을 만 국밥 단일 메뉴가 문제될 게 없었다. 그런데 각계각층 피란민들이 손님이 되면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한다.

특히 식성이 까다로운 여배우들은 국밥에 유달리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켰다. 주문할 때도 "할머니, 전 국하고 밥하고 진짜 따로 주세요"라고 특별주문해 남자 배우들로부터 핀잔을 먹기도 했다. 가끔 갓 쓴 지체 높은 양반때문에 낭패도 당한다. "이게 상놈이나 먹는 국이지." 그런 소릴 듣고나면 노부부는 맥이 풀린다. 김씨 할머니도 더 긴장한다. 실수를 안하기 위해 손님들이 들어오면 늘 "따로잉교"라고 메뉴를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잡기장에 따로만 먹는 손님 이름도 별도로 적어뒀다. 대구로 온 피란민들 사이에 그 국밥이 점차 '국일 따로'로 공인된다. 결국 국일은 피란민들 때문에 국과 밥이 분리된 '따로'란 유별스러운 메뉴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만들게 된다. 그런데 이런 질문도 할 수 있다. 부산도 피란지인데 왜 하필이면 대구만 따로인가. 그건 당시 부산 국제시장 인기 음식이 돼지국밥인 탓이다. 돼지국밥은 국과 밥을 따로 내면 맛이 별로다. 당연히 국과 밥이 한데 섞여있어야 했기 때문에 '따로 소동'이 터질 리가 없다.

피란민들이 상경하자 국일도 비좁은 한일극장 옆 나무시장 시절을 청산하고 현재 흥국생명 자리로 이전한다. 그때 서씨 할아버지도 어엿한 식당 주인으로 처신한다.'국일'이란 상호를 직접 붓글씨로 적는다. 국일 간판은 1965년부터 정식으로 달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금복주가 그해 4월 1일부터 시내 보신탕집, 유명 식당 등에 홍보차원에서 간판달아주기 판촉전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금복주가 국일을 그냥 놔둘 리 없었다. 서씨 할아버지가 '나라에서 제일 맛 좋은 국밥집'이란 뜻으로 '국일(國一)'을 상호로 정한다. 이때 금복주 측의 요청에 따라 맨 왼편에 붉은 페인트로 금복주, 맨 오른편엔 복영감 마크가 들어간 함석 간판을 달게 된다. 이 무렵 금복주 간판 제작은 대구시 중구 동문동 동인네거리 근처 백마사 정규환 사장이 도맡았다.

국일은 대구은행 중앙로지점 서편 흥국생명 자리(단층 슬레이트조, 크기는 150여평, 8개 방에 홀 갖춤)에서 10년 머물다가 73년 흥국이 대구 사옥을 짓자 골목 안 현재 한일따로 건물에서 약 30여년간 영업을 하다가 7년전 지금 자리로 이전한다. 전성 시절 웃지 못할 일도 생긴다. 통행금지 해제 30분전에 문을 두드리는 간 큰 사람이 있었다. 야통 단속 경찰들이었다. 첫 국을 맛보기 위해 야근을 끝낸 중부경찰서 경찰과 경찰 출입기자 등도 가세했다. 그들로선 특권 아닌 특권이었다. 자연스럽게 국일은 다른 곳보다 약 30분 먼저 통금이 해제될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 국일은 한 마디로 술꾼들의 '해장터'였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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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국밥(중)-대구는 제각각

따로국밥(중)-대구는 제각각 요리 맛집 정보 2008.09.10 15:00

따로국밥(중)-대구는 제각각

육개장-우거지 선지국-선지 육개장, 조리법은 통일 안된 채 이름 같이 사용
주문방식에 의한 분류…식재료 차이
 


 
대구 따로국밥 조리법과 내용물은 크게 세갈래로 나눠진다.
벙글벙글식당의 따로국밥(주재료:사골육수+파+무+양지머리)
대덕식당 따로국밥(주재료:사골육수+우거지+선지)
국일식당 따로국밥(주재료:사골육수+파+무+선지+양지머리).  

 
# 해부! 따로국밥

3.14….

따로국밥 해부가 꼭 원주율, 즉 파이(π)값 끝자리수 찾는 것만큼 어렵기만 하다. 인류학자들에 따르면 국에 밥을 말아 먹는 건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한다.

국은 우리말이고 한자로는 갱(羹)·학()·탕(湯)으로 불린다. 작고한 대구 출신 이성우 교수(영남대 가정대학장, 한양대 식품영양학과 교수 등 역임)의 주저 '한국요리문화사'(교문사·1985년)에 따르면 갱은 채소가 섞인 고깃국, 확은 채소가 섞이지 않은 고깃국이라 언급돼 있다. 이 기준법에 따르면 육개장, 해장국, 보신탕 등은 갱으로 분류되고 곰탕, 설렁탕 등은 학쯤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대구 따로국밥은 따로 국밥 형 갱에 분류된다. 학과 갱에서 수분량이 감소되면 점차 전골→찌개→찜 순으로 발전해나간다. 서양에선 갱과 학을 합쳐 '수프'라 통칭한다. 일단 국→국밥→따로 국밥 순으로 분석해 본다.

국은 국밥에서 밥을 뺀 것이다. 국밥은 국과 밥이 한데 섞인 상태이다. 따로국밥은 반대로 국과 밥이 따로 떨어져 있다. 국은 밥을 위해 만들어진 주반찬으로 곰탕, 설렁탕, 추어탕, 복어탕, 대구탕, 보신탕, 황태탕, 생태탕, 삼계탕, 매운탕, 고디탕, 미역국, 재첩국 등 그 종류만도 수백종에 달한다. 이런 국에 밥을 말면 그게 국밥이다.

그런데 우린 언젠가부터 국밥을 쇠고기·돼지 국밥으로 한정시켜려 한다. 그래선 안된다. 곰탕도 밥과 국이 따로 나오면 곰탕 따로 국밥인거고 처음부터 밥을 말면 곰 국밥이다.

국밥은 국과 밥의 결합형태를 가리는 분류기준이다. 따라서 메뉴로 제시할 땐 '돼지 국밥'하는 식으로 국 종류를 알려주는 접두사를 붙여줘야 한다. 대표적인 게 콩나물 국밥, 돼지국밥, 선지해장국밥, 굴국밥 등이다. 설렁탕은 국밥형, 따로국밥형 두 종류가 있다. 서울 이문 설농탕은 국밥형이고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설렁탕집인 종로초등 뒷문 옆 부산 설렁탕은 밥을 말지 않은 따로 설렁탕이다.

문제는 '대구 따로국밥'.

대구시가 1997년 시내 따로국밥 전문 취급업소 21곳 중 국일, 벙글벙글, 대덕, 교동, 대구전통따로, 한우장을 국밥 전문 향토음식점으로 선정했다. 그런데 그 따로국밥이 타지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든다. 전주 비빔밥, 콩나물 국밥은 조리법이 통일돼 있다. 어디서 먹어도 그 맛이다. 하지만 대구 따로국밥은 식당마다 식재료와 맛이 다르다.

40여년 역사의 공평동 벙글벙글은 스스로 따로 국밥집이라고 불리는 걸 원치 않고 그냥 '대구 육개장집'으로 불리길 원한다. 거긴 선지가 안들어가고 그냥 사골을 곤 육수에 파와 무만 들어간다. 53년 역사를 가진 중구 시장북로 옛집과 최근 생긴 체인점 온천골 가마솥 국밥도 한 항렬이다.

하지만 서울 사람들은 왜 그걸 육개장이라 하지 않고 따로 국밥으로 고집하는지 의아해 한다. 참고로 서울 육개장엔 고사리와 계란이 추가된다. 벙글벙글도 처음엔 육개장이란 말만 사용했지만 대구 따로국밥이 워낙 강세라서 장사를 위해 따로 국밥이란 말을 차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스로 향토식당이길 거부한 옛집만 옥호 위에 육개장이란 말을 달았다. 국일, 교동, 대구, 한우장은 선지가 들어간다는 점에서 벙글벙글·옛집과 다르다. 파와 무, 양지머리 대신 우거지만 사용하는 대덕식당과도 다르다. 대덕도 따로국밥이란 말 대신 선지해장국을 선호한다.

결국 대구 따로국밥은 제각각이다. 크게 보면 대구식 육개장, 우거지 선지국, 선지 육개장 등으로 3분된다. 육개장이란 쉽게 개고기 대용의 쇠고기 국으로 이해하면 된다. 한땐 대구식 육개장이 '대구탕(大邱·代狗湯)'으로 불리기도 했다. 광복 직후 절대적 인기를 얻었던 만경관 맞은편 청도 해장국은 대덕식당과 비슷한 반면 청도는 된장을 넣지만 대덕은 그렇지 않다.

사실 대구 따로 국밥은 조리법이 아니고 주문 방식에 의한 분류법이다. 국일 전엔 따로 국밥이란 말이 없었다. 그냥 국밥으로 통칭됐다. 그런데 그걸 싫어하는 사람 때문에 따로국밥이란 광복 직후 대구의 한 따로 식당을 찾은 양반이 국에 밥을 말아 나온 국밥을 쉬 먹지 못하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다. 왼편 식탁 손님들이 따로 국밥을 먹으며 즐거워하는 모습과 대조적이다. 이런 예상치 못한 따로 국밥 파(派) '어른'들 덕분에 대구 따로국밥이 탄생된다.
 
 
 
 
대한민국 해장국 1번지로 불리는 서울 종로구 피맛골 초입. 
 
 
새 메뉴가 탄생된 것이다. 그 메뉴가 태동한 국일은 따로국밥 본향이 됐고 자연 대구식 육개장을 상징하는 고유명사로 둔갑한 것이다. 그런데 타 지역에서도 경상도 사람 때문에 따로국밥이란 말을 맘대로 이용했다. 물론 대구 따로국밥과 스타일이 달랐다. 브랜드를 도둑맞았지만 그 누구도 정식으로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이제 따로국밥에 제 이름을 부여해야 한다. 조리법에 대한 기준과 원칙이 정해져야 한다. 아직 학계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일단 따로국밥 식당 관계자와 당국자들부터 앞장서야 한다.

대구 따로국밥의 본명은 뭘까? 대충 '대구따로' '따로'로 압축된다. 선택은 공청회 등을 거치면 될 것 같다. 30년전 국일따로는 한 그릇 95원인 '따로'란 메뉴를 사용했지만 지금은 변별성이 부족한 따로국밥이란 메뉴를 사용하고 있다. 국일측도 따로로 돌아갈 모양이다. 관계자들끼리 논의를 잘 하면 합의점도 도출될 법하다. 일차적으로 대구시 등이 전국적 홍보를 하고, 2차적으로 대구시 예산으로 메뉴판과 간판 교체작업을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조리법까지 통일할 필요는 없다. 국일식 따로, 벙글벙글식 따로, 대덕식 따로로 특화시키면 된다. 물론 식당 앞이나 홀 한 쪽에 그 집 따로의 특징과 조리법을 공개해도 좋을 듯 싶다.


서울 종로지역 국밥집의 도전

"국에 밥 안말면 따로국밥이지…왜 대구 것이냐"

#해장국 골목 1번지 서울 피맛골

코털까지 얼어붙는 서울 세종로의 밤. 교보문고 동편 출입문 맞은편 피맛골 안내판이 '장명등(長明燈)'처럼 따스하게 보인다. 차량 경적소리와 생선 굽는 냄새, 가마솥에서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김, 24시간 편의점과 빌딩 불빛이 그윽한 앙상블을 빚어낸다. 혈관처럼 깔린 '미로(味路)' 같은 좁다란 골목 안에선 미각도 기운을 받는다. 1㎞ 남짓한 피맛골 골목, 서울 식도락가들에겐 '청진동 해장국 골목'으로 유명하다. '피마(避馬)'란 말은 예전 양반들이 경복궁으로 등청할 때 행인들이 잠시 말을 피한다는 데서 유래했는데 현재 교보문고 동편 종로1가에서 인사동을 거쳐 종로 3가 YMCA까지 이어지며 대구 종로 진골목, 계산동 뽕나무 골목에 비견되는데 요즘 재건축중이다.

대구에선 중구 전동 따로 국밥이 '대빵', 서울에선 종로구 피맛골(청진동) 해장국이 '대빵'인 시절이 있었다. 지금 피맛골 언저리에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종로구 공평동 이문 설농탕을 비롯해 반세기는 족히 넘었을 것 같은 종로구 청진동 한일관(한정식)과 선지 해장국의 원조격인 청진·청일옥(선지 해장국), 종로구 인사동 YMCA 옆 골목 안 시골집(안동 장터 국밥)과 그곳에서 분화한 사동면옥(국밥), 종로구 돈의동 영춘옥(꼬리 곰탕), 중구 을지로 2가 판코리아 골목안 이남장(설렁탕), 을지로의 하동관(곰탕), 강남으로 건너 뛴 역삼동 곰탕집 장도리….

그 판세가 대구와 닮은 꼴이다. 피맛골 언저리 국밥집이 대구은행 중앙로지점 옆 국밥집과 비교된다. 도심에서 좀 벗어난 강남의 장도리가 남구 앞산 안지랑골 초입 대덕식당처럼 후발주자로 맹위를 떨치고 있다.

피맛골 식당 주인들을 만나 넌지시 대구 따로국밥에 대해 운을 뗐다. 알긴 알지만 다들 따로국밥이 도대체 어떤 성격의 국밥인지 의아해 한다. 한마디로 대구 따로국밥이라고 해서 유별난 게 뭐냐고 반문하며 대구가 독점하려는데 제동을 건다. 종로구 L식당의 한 조리사 왈, "국에 밥을 말지 않으면 모두 따로 국밥이 아니냐, 따로 국밥이 어떻게 한 도시를 대표하는 음식이 될 수 있냐"라고 볼멘소릴 한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교보문고로 갔다. 음식 관련 코너에 들러 수십 권의 음식 관련 책을 일별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확인됐다. 몇몇 교수가 펴낸 조리학 경상도 음식 편을 읽었는데 따로국밥이란 말 자체가 언급되지 않았다. 홍보 부족일까, 교수들의 관심 부족일까. 대구 따로국밥, 일관되고 표준화된 홍보지침이 마련돼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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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국밥(하)-청도집

따로국밥(하)-청도집 요리 맛집 정보 2008.09.10 14:58

따로국밥(하)-청도집

하루, 딱! 200인분만 끓여, 지각 손님들 '주방 습격'
단골 거지엔 1년에 한번씩 밥값 지불 요구 "굶주림 채우는 인정따로…염치교육 따로"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사진은 한겨레신문에서 퍼온 따로국밥 사진 ]

 
5년 전 대구 따로의 전통을 잇기 위해 경산 영남대 근처에서 문을 연 가마솥 국밥 온천골 상인점 주인 김용태씨(60)가 참·감나무 피목을 아궁이에 넣고 부뚜막에 걸린 전통 가마솥에 담긴 국을 정성스레 끓이고 있다. 
 
"이노무 짜식, 청도집 국 사오라캤지, 누가 청도관 꺼 사오라 카더나."

"아부지예, 내가 보이께 마 그 국이 그 국이데예."

"뭐라카노, 니가 국맛을 우예 아노. 청도관은 국기름이 벌겋게 응겨있어 딱 질색이다."

광복 직후 어느날 아침, 대구시 중구 남산동 골목에서 흘러나온 한 부자 간의 대화 내용이다. 그 무렵 자식들은 공부는 뒷전이고 아버지 심부름이 큰 일이었다. 술 심부름 아니면 술국 심부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침 나절 냄비들고 술국 심부름가는 아이들의 행렬이 볼 만 했다. 아버지께 혼이 난 남산동 모씨 아들, 깜빡하는 바람에 청도집으로 가질 않고 집에서 가까운 청도관 해장국집으로 간 것이다.

청도집과 청도관은 국일관(현재 국일따로를 그땐 일부러 그렇게 부름. 실제 국일관이란 고급요리집도 45년 동문동에서 영업했다)과 함께 광복 직후 대구의 3대 해장국 집으로 주름잡는다.

일제 말엽 문을 연 청도관은 전통 대구식 육개장을 빚었고 청도집은 선지우거지 해장국 스타일이었다. 청도관은 현재 중앙파출소 서편 약전골목 초입 왼편에 있었고, 청도집은 처음엔 만경관 동편에 있다가 나중에 교동따로 맞은편 심이비인후과 자리로 옮겼으며, 결국 구 상서여상 맞은편에서 최후를 맞는다.

구한말까진 대구읍성 남문(영남제일관) 앞 염매시장에서 계산성당으로 이어지는 뽕나무 골목 좌우편에 주막형 여관이 우후죽순 포진해 있었다. 거기가 바로 대구 육개장의 발상지이지만 상권 이동으로 광복 직후엔 중구 전동 골목으로 서북진한다.

청도집은 그 시절 술꾼들에겐 '묻지마 술국'으로 통했다. 거긴 숙취를 한 방에 풀어주는 '병원'같은 곳이었다.

이 곳 내력을 잘 알고 있는 강판용씨(85·제3대 대구시의원·전 삼보건설회장)는 "문닫지 않고 지금까지 명맥을 잇고 있었다면 한강 이남에선 가장 오래된 문화재급 국밥집이 됐을 것"이라며 "자식들이 가업을 제대로 못 이은 게 무척 안타깝다"고 증언했다. 청도집은 만경관 동편에 남북 방향으로 길게 자리잡았던 구한말 대구진위대(1907년 8월4일 해산) 주둔지였던 남영(南營·수천평 규모로 화교학교 등을 포함, 경상감영공원보다 더 넓었음)의 허름한 문간방에서 첫 출발했다. 청도집은 처음엔 달동네 주민들을 상대했지만 점차 '도민 해장국집'으로 성장하다가 60년대 초 한일로(현 국채보상로)가 뚫리면서 심이비인후과 자리로 이전한다.

90여평 넓이의 기와집이었던 청도집. 오전에 200인분 정도 국을 끓여서 팔고 나면 더 이상 손님을 받지 않았다. 물을 더 부어 국을 끓인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었다. 18년 전 쯤 타계한 김천 출신의 주인 김씨 할매의 시댁은 청도였다. 대구로 따로 살림을 나와 먹고살 게 없던 청도 할매는 그 시절 식당 여주인들이 다 그러했듯 시댁에서 배운 요리 솜씨만 믿고 식당을 연 것이다.

미원(57년 등장)이 들어가지 않아 맛이 특출날 수밖에 없었다. 청도 할매는 국일관 김이순 할매, 요정 청수원 여주인 김태남처럼 여걸 스타일이었다. 가끔 국이 떨어졌다고 해도, 손님을 밀어내도 유별난 단골들은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주방으로 직행해 찬모들을 기겁케 했다. 독에 받아놓은 물을 한 바가지 넣고 가마솥 주변에 눌어붙은 시래기, 우거지, 근대를 주걱으로 긁어모아 내일 국끓이용 고기 몇 점 섞어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국요리를 했다. 그 시절에만가능했던 인정어린 광경이다. 당시 가마솥은 3개, 새우젓으로 담근 깍두기 맛이 워낙 깊고 시원해 국 없이 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우는 손님도 있었다. 할매는 자주 가마솥 자랑을 늘어놓았다.

"우리 가마솥에 기름이 하도 많이 묻어 있어 물만 넣고 끓여도 대구 사람 반은 충분하게 믹일끼라."

70년대 중반까지 깡통든 거지들이 청도집을 자주 찾았다. 하지만 그들은 '말벌집'이었다. 잘못 건드렸다간 예상치 못한 봉변을 당할 수 있었다. 당시 식당 주인들에겐 거지와 상이군경은 박절하게 못 대하는 불청객이었다. 청도 할매도 그걸 감지하고 식은 밥에 국을 듬뿍 담아주었으며 파워있는 거지에겐 별도 자리까지 마련해줬다. 하지만 '거지근성'엔 매정했다. 1년에 한 번 정도는 꼭 밥값을 내도록 유도했다. 거지도 염치가 있어야 먹고 살 수 있다는 걸 가르쳐 주고 싶어서다. 그렇게 길들인 걸인들 중에 훗날 대오각성, 청도해장국 노하우를 전수해 식당 주인으로 변신한 사람도 있었다.

선거철이면 반월당 신민·민주당사 당원들의 '사랑채'였다. 74년 12월27일 덕산동 반월당 신민당 경북지부당사 현판식 참석차 대구에 온 김영삼 총재가 이틀간 상이군경회원들에 의해 숙소인 금호호텔(현 아미고호텔)에 감금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때 대구에 온 전국 기자들과 신민당원, 정보 형사들이 철야의 피곤한 몸을 푼 곳도 청도집이었다.

청도집 해장국에는 사골 곤 육수와 근대, 우거지, 시래기, 동배추 등과 선지, 고추기름, 콩나물, 양념으로 마늘과 된장 등이 가미된다. 전체적으론 서울 청진동 해장국과 전주 콩나물국밥, 시래깃국, 육개장이 절충된 스타일이었다. 그땐 기름이 인기였다. 없어서 못먹었다. 청도집은 청도관과 국일관에 비해 벌건 기름 기운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청도집 영업은 보통 오후 3시 정도면 끝이 난다. 그렇기 때문에 오전에 국밥을 먹으려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100명 이상 손님을 동시에 수용할 수 없어 청도집 할매는 쌍둥이 아들이 경영하던 명문다방의 테이블까지 식탁으로 활용했다. 주방에서 퍼담은 국밥을 다방으로 배달하는 모습이 볼 만 했다.

한 시절을 풍미했던 청도집, 하지만 그 종말은 비극적이었다.

'식당 해서 번 돈 남편 아니면 자식이 탕진한다'는 옛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심덕 좋은 청도 할매가 어렵게 모은 자산은 안타깝게도 쌍둥이 아들의 사업 자금으로 들어간 다음 사업 실패로 날아가고 만다. 이사간 청도집도 경매에 넘어가고 말았다. 청도집은 이후 심이비인후과 측에 팔려 철거된다.

쌍둥이 아들은 단골들의 압력(?) 때문에 청도집을 살리려 구 상서여상 맞은편 오모 내과 동편 골목 안에서 제2의 창업을 했지만 2년도 안돼 문을 닫고 만다. 거리엔 국밥보다 더 맛있는 음식이 폭증했다.

청도 할매의 손맛은 누가 답습했을까. 취재 결과 남구 그랜드호텔 뒤편 찜 전문 일송정과 남구 대명9동 한정식집 일송명가의 한 관계자에게로 흘러들었다. 그 식당의 한 관계자가 청도 할매 며느리로 들어간 것이다. 또 청도집 주방 찬모에게서 국 끓이는 법을 배운 강봉업씨가 27년 식당 경험을 앞세워 99년 예전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청도 해장국집을 연다. 이 집은 청도식 해장국을 끓이지만 식재료로 시래기를 선호한다. 요즘도 가끔 몇몇 노인들이 그때 청도집 시절을 못잊어 여길 들르기도 한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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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 따로국밥 묵어봤나?”

“니들 따로국밥 묵어봤나?” 요리 맛집 정보 2008.09.10 14:56
“니들 따로국밥 묵어봤나?”




서울의 육개장을 변형한 대구의 자존심… 60년 세월 동안 한결같은 ‘국일식당’의 맛

10여년 전 미술사학자 유홍준, 소설가 유시춘, 경상대 교수 김덕현 등 천하의 말쟁이 7~8명이 인사동 어느 한정식 집에서 어울린 적이 있었다. 정치 이야기에서부터 대학 이야기, 문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말쟁이들답게 동서고금 세상만사를 넘나들다가 마지막에는 음식 이야기에 이르렀는데, 자연스레 각자가 자기 고향의 특별한 음식이나 자기가 먹어본 맛있는 음식 이야기를 풀어놓기에 바빴다. 유홍준 교수는 남도 문화유산 답사길에서 맛본 해남 천일식당의 떡갈비 예찬에 열을 냈고, 유시춘씨는 설악산 단풍구경 길에 들린 하진부 부일식당 산채정식의 담백한 맛을 기억해냈다. 이렇게 술꾼은 술꾼대로, 맛꾼은 맛꾼대로 자기가 접해본 ‘진미’를 이야기하는데, 안동이 고향인 김덕현 교수만이 할 말이 없는 듯 입맛을 쩍쩍 다셨다. 이러고저러고 말의 성찬이 한바탕 훑고 지나간 뒤 잠시 화제가 끊어질 즈음 김덕현 교수가 한마디 불쑥 던졌다. “니들 간고등어 먹어봤나?”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모두들 배꼽을 잡고 웃을 수밖에 없었는데, 눈치 빠른 독자들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기본적으로 먹을거리가 부족하던 50·6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그것도 안동과 같이 내륙 깊숙한 곳에 살았던 사람들이 그 시절에 어쩌다 맛보던 특미, 진미는 소금에 절이다 못해 소금 자체가 아닌가 싶은 간고등어가 거의 유일했다. 초여름 보리 이삭이 익어갈 무렵 농촌의 어머니들은 지난 장날 꼬깃꼬깃 장롱에 넣어 둔 지전 몇장을 간고등어와 바꾼 뒤, 품앗이 일꾼들의 반찬으로 파, 마늘, 고춧가루 빨갛게 양념하여 바작거리게 졸이거나, 화로에 불씨 담아 석쇠에 누르스름하게 굽는다. 푸슬한 보리밥 한 그릇을 후딱 비우고 나면 바로 그 자리에서 배가 고파오던 그 시절, 물에 말은 밥 한 숟가락에 간고등어 한점 집어 입에 넣으면 그 짭잘한 맛에 밥알이 씹히는지도 모르고 목으로 넘어가니, 안동 사람 김덕현에게 이보다 더 맛있는 음식이 있었을까?

안동에 간고등어가 있다면 대구에는 따로국밥이 있다. 대구의 따로국밥은 서울의 육개장이 변한 것이다. 1700년대 말의 백과서 <경도잡지>에 의하면 “개장이란 개고기에 흰파를 넣고 끓인 구장(狗醬)을 말하는데, 국을 끓여 고춧가루를 뿌리고 흰밥을 말아서 먹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개고기를 끓인 개장(狗醬)이 식성에 맞지 않는 사람은 대신 쇠고기를 쓰고, 이를 육개장이라 했다고 한다. ‘육회’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나라에서는 ‘육’(肉)자가 들어가면 쇠고기를 가리킨다. 대구의 따로국밥은 서울식 육개장처럼 고기를 잘게 찢어서 얹는 것이 아니고, “고기를 썰어서 장에 풀어 물을 많이 붓고 끓이되 썰어 넣은 고기점이 푹 익어 풀리도록 끓인다. 파잎은 썰지 않고 그대로 넣고 기름 치고 후춧가루를 넣는다”는 1869년의 조리서 <규곤요람>에서 소개한 육개장 조리법에 가깝다.

지난 9월 말, 30여년 전 민청학련 사건에서 고문과 조작으로 무고하게 사형선고를 받고 세상을 떠나신 여정남, 하재완, 송상진, 도예종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러 이철, 여익구 등과 함께 대구를 찾았다. 1974년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에 맞서 투옥된 이래 지금까지 줄곧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임구호, 강기룡, 임규영 등 대구의 친구들과도 오랜만에 만나 밤새 통음하며 회포를 풀었다. 일반적인 경북·대구 정서와는 ‘따로’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등 그 고장 출신 독재자들과 맞서온 이들의 외로운 투쟁이 눈물겨웠다.

이튿날 쓰린 속도 풀 겸 음식이야기 취재도 할 겸 나만 ‘따로’ 20여년 전 한번 들렸던 ‘국일따로국밥’(053-253-7623)을 찾았다. 그때는 그저 짜고 매웠다는 느낌뿐이었는데, 가만히 국밥에 들어간 쇠고기·파·선지·기름 등을 음미하면서 먹으니 목으로 넘어가는 국물맛이 시원하고도 개운하다. 1946년 고 서동술씨로부터 시작되어 이제 손자 서경덕(40)씨까지 이어오니, 국일식당이 어느새 60년의 역사를 자랑하게 되었다. 대구 시민들이여, 어느 자리에서든 음식 이야기가 나오면 주눅들지 말고 당당하게 말하시라. “니들 국일식당 따로국밥 묵어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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