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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만난 메기 '물 만났네∼'

논 만난 메기 '물 만났네∼' 요리 맛집 정보 2008. 9. 6. 14:34

논 만난 메기 '물 만났네∼'


논에서 담수양어…낚시꾼들 몰려, 즉석서 매운탕 끓여주다 '입소문'
처음엔 크기 상관없이 같은 값…'인정담긴 맛'으로 체인점 열어

 

 
논메기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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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기찜의 예입니다. 인터넷에서 퍼왔습니다.]
 
메기의 지난 세월 팔자는 처량했다. 그도 피라미, 쉬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골 장대했다. 그런데 복이 없어서 그런지 그 주위엔 강적이 많았다. 민물고기 중 가장 힘이 센 가물치는 잉어와 함께 산모들의 건강식으로 호시절을 누렸고, 민물장어는 허약한 남정네들의 삼복 보양식으로 자릴 잡았다. 심지어 자기보다 더 볼품없게 생긴 미꾸라지는 추어탕으로 귀인 대접받았다. 느닷없이 나타난 쏘가리도 잡어 매운탕계의 다크호스로 등장해 또 뒤로 밀려났다. 메기의 한을 누가 알쏜가. 메이저급 민물고기한테 불만이 많아 강바닥 펄 속에 머릴 처박고 숱한 날 울었으리라.

1980년대말까진 찬밥 신세. 그런데 90년초가 되자 메기신세 욱일승천. 그의 집에 쨍하고 빛이 든 것이다. 자연산 메기가 '논메기'란 닉네임을 갖고 기존 매운탕계에 일격을 가한 것이다. 잉어는 거의 그로기 상태였다. 메기가 강에서 논으로 들어가 메기 전성시대를 구가한 뒷 사연이 궁금하지 않는가?

#논메기 매운탕 1번지 달성군 다사읍 부곡리

대구시 달성군 다사읍 부곡1리 일명 셋터 마을. 논메기 신화의 발생지다. IMF 외환위기 폭풍 전야, 전형적 농촌 지역이었던 부곡리. 그곳에서 어떻게 논메기 매운탕이 태어났을까?

부곡리가 뜨자 강창교를 건너서 죽곡리∼부곡리∼문산리∼성주대교 가도가 졸지에 달성군이 정한 논메기 매운탕 거리로 발돋움해 현재 스무집이 장사하고 있다.

논메기 매운탕 붐을 일으킨 건 부곡1리의 손중헌씨(56). 논메기 매운탕 체인붐 주역은 서재 할매 매운탕을 만든 이귀달 할머니(작고)이다. 두 사람 때문에 잉어 매운탕·찜·향어·송어회 시대는 가고 논메기 매운탕 시대가 화려하게 전개된다.

강창교를 지나면 다사 고개가 마주선다. 그 정점에 자리한 서재 매운탕 본점을 지나면 오른편에 매곡정수장이 나온다. 우회전하다 보면 오른편에 부곡2리 다사 논메기 매운탕집이 나온다. 부곡1리는 강창교에서 약 4㎞ 떨어져 있는데 현재 이 마을엔 매운탕집이 다사와 부귀 두 곳밖에 없다. 한창 때는 다섯집이 있었다. 다사 매운탕의 한상봉(50)·박영순씨(45) 부부는 논메기 매운탕 찜의 진수를 보여주겠다며 기자를 주방으로 안내했다.

칼 등으로 메기를 기절시켜 내장을 들어내고 물로 깨끗하게 씻은 뒤 메기 몸에 6~7번 칼집을 낸다. 양념이 잘 배어들어가게 하기 위해서다. 부부는 다시마, 무로 우려낸 육수를 매운탕 냄비에 조금 붓고 메기를 넣은 뒤 가열시켰다. 비린내 제거를 위해 메기 몸에 소주를 조금 부은 뒤 그 위에 참기름을 둘렀다. 기본 양념은 마늘, 고춧가루, 후추, 재피, 된장 등 10여가지가 들어가지만 너무 단 맛이 나면 안되기 때문에 물엿은 사용하지 않는다.

옆 마을 부곡1리로 차를 몰았다. 달성군 다사읍 전체가 논메기 매운탕촌으로 성장한 것은 지리적 이점 때문인 듯 했다. 낙동·금호강과 연접해 있고 경부·88·구마·중앙·중부내륙·대구~포항 고속도로와 직결돼있다. 몇년전 왕복 2차로 국도가 왕복 4차로로 시원스럽게 확장돼 대구 지역민과 성주·고령권 주민들도 접근하기가 쉬워 매운탕촌으로선 적지인 셈.

손중헌씨를 만났다. 그는 92년 봄 사양길로 접어든 논농사에 미련을 버렸다. 히든 카드를 찾던 중 양어 사업을 구상했다. 그는 1천여평의 논을 갖고 있었다. 농사를 지어봐야 1년 매출액이 고작 150만원선, 그것 갖고는 아이들 학비도 제대로 지원할 수 없을 것 같아 돌파구를 찾은 것이다. 구원의 손길이 그에게 다가왔다. 달성군 농촌지도소 조해옥 소장이 그에게 담수양어 시범 사업을 소개한 것이다.

92년 6월1일 경남 창원군 대한수산 양식장 손해기 사장으로부터 8g 치어 6천마리를 구입해 논 6평에 집어 넣고 키운다. 메기는 야행성, 몇 군데에 그늘막을 치고, 뱀장어 사료 등을 많이 먹였다. 보통 논메기 생육기간은 1년6개월 정도. 그런데 손씨의 메기는 불과 4개월만에 40㎝, 300∼400g으로 성장했고 ㎏당 7천원선에 팔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양어만 알았지 마케팅엔 무지했다. 고전을 면치 못했다. 궁여지책 끝에 논메기 유료 낚시터로 돌파구를 찾았다.

그게 적중하기 시작한다. 일부 낚시꾼들이 거기로 몰려 들었다. 낚시꾼들은 잡은 논메기를 갖고 손씨의 집에서 배를 따 씻은 뒤 직접 매운탕을 끓여 먹었다. 요리의 '요'자도 몰랐던 그였지만 순간 논메기만 기를 게 아니라, 식육식당처럼 한쪽엔 양어장, 한쪽에 매운탕 식당을 차리면 돈이 될 것 같았다. 낚시꾼들에게 매운탕 기본기를 배운 뒤 양식장 옆에 테이블 5개 정도를 갖춘 25평짜리 비닐하우스 매운탕집을 만들었다. 손중헌 논메기 매운탕이 태어난 것이다. 주방도 없어 버너로 매운탕을 끓였지만 그게 산 중에서 먹는 라면 맛처럼 별미였다.

영업용 택시 운전사들의 입을 통해 지역의 단골을 대거 확보하게 된다. 하지만 그곳은 그린벨트 지역이라서 형질을 변경할 수 없었다. 깊이 60㎝급 양식장 설치도 불법이었다. 하지만 당시 다사면장은 고사 직전의 농촌 살리기 차원에서 손씨 매운탕 집을 식당으로 키워줬다. 95년 3월2일 부곡리 첫 논메기 전문 매운탕집 허가가 난다. 미식가들이 몰려들었다. 주민들도 손중헌 매운탕 붐에 힘을 받아 너도나도 논메기 매운탕집을 연다. 마을 전체 25가구 중 14가구가 전답을 팔아 논메기 매운탕집을 연다. 하지만 경기가 예전 같진 않은 모양이다. 현재 부곡1리 매운탕집은 모두 11군데.

부곡1리를 빠져나와 성주 방향으로 잠시 달리면 오른편에 문양 지하철 2호선 출발 기지가 보이고 그 오른편에 낙동·남강·나룻터·장수 식당이 논메기 매운탕을 파는데 이곳이 문산 매운탕촌이다.

#서재 원조 할매 메기 매운탕

80~90년대 식당가엔 '할매'붐이 인다. '할매=맛'이란 등식이 성립했다. 특히 칼국수 집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할매 칼국수'란 상호를 선호했다. 경쟁이 치열해지자 단골들은 누가 원조인가를 따졌다. 출발 시점이 흐릿하고 시·군·구 당국자들도 60년대 이전 영업허가·신고 대장을 갖고 있지 않아 솔직히 누가 먼저 장사를 시작했는지 판가름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았다.

특히 1대 부모들이 돌아간 경우 경쟁 업소 자식들간에 원조 논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저마다 자기 부모가 원조라고 주장하게 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대를 이은 자식들은 할매란 말 앞에는 반드시 '원조'란 수식어가 붙었다. 할매는 왜 원조를 고집했을까? 그것은 결코 할매의 맘이 아니었다. 할매는 마케팅 마인드가 제로였지만 그 맥을 잇는 자식들의 셈법은 빨랐다.

서재 할매 매운탕의 주인공은 지난 3월2일 작고한 이귀달 할머니. 경남 함양 출신인 이 할머니는 6·25때 남편을 여의고 영천을 거쳐 대구로 들어와 서구 내당동에서 살다가 20여년전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 골재 채취장 근처 금호강과 400여m 떨어진 10여평 규모의 무허가 판자촌에 정착한다. 큰 아들 김동진씨, 며느리, 3명의 손녀 등 6명의 식구가 동고동락했다. 흥부집을 방불케했다.

아들 김씨는 마땅한 반찬이 없을 경우에는 연호지, 신동지 등 도내 유명 유료 낚시터 등을 돌며 잉어 등을 잡아와 탕을 끓였다. 그냥 끓인 것이지 돈을 염두에 둔 건 아니다. 그런데 터가 좋아서 그런지 서재의 한 섬유회사 사장 등이 이 할머니가 끓인 매운탕을 먹은 뒤, 돈을 받지 않겠다면서 사양하는 이 할머니에게 만원짜리를 쥐어주고 갔다. 영업 아닌 영업이 되고 만 것이다. 이 할머니는 고마우면서도 면구스러웠다. 처음엔 정감어린 매운탕을 대·중·소로 나누지 못하고 크기에 관계없이 1만원씩 받기 시작했다.

점심 때가 되면 성서 공단에 있는 사장들이 즐겨 찾았다. 직원 4~5명과 함께 와서 1만5천원선.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번듯한 식당이 아니란 게 식도락가들에겐 매력 포인트였다. 날이갈수록 서재 판자촌 매운탕집은 대목 장터처럼 붐볐다. 사촌이 논 사면 배가 아프다고 했던가, 인근 일반 식당에서 이 할매 돈버는 꼴을 보지 못하고 당국에 신고한다. 그래서 수백만원의 벌금을 물고 무허가 주택도 헐리게 된다.

서재 매운탕은 주저 앉지 않았다. 10여년전 서재 매운탕이 변신을 한다. 무허가촌 서재 매운탕 시절을 끝내고 달서구 이곡동 와룡시장 근처로 옮겨와 공격적으로 장사를 시작한다. 2년 머물다가 근처 용산동으로 옮겼고 2000년 가을 재차 다사읍 죽곡리 다사 고갯마루 오른편에 자릴 잡는다.

서재 매운탕은 부곡리 매운탕과 달리 체인사업에 뛰어들었다. 선하게 생긴 이 할머니 사진을 간판에 찍어넣었다. 매운탕 소 1만원, 대 1만5천원. '매운탕은 비싸다'란 선입견을 서재 매운탕은 일거에 붕괴시켰다. IMF를 맞아 호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서민들에겐 부담없이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다가선다. 서재 브랜드가 뜨자 대구 시내에 무려 16개의 체인점이 생겨났다. 하지만 지금은 불과 6개 선으로 줄어들었다. 논메기 전성기 10년, 그 후속편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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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물 잡어 매운탕

민물 잡어 매운탕 요리 맛집 정보 2008. 9. 6. 14:31

민물 잡어 매운탕


꺽지, 뿌구리, 빠가사리 시원·구수·담백 잡어3인방 '귀한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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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물 잡어 매운탕의 예 ]


잡어탕 원천은 '천렵탕'.

천렵은 놀 것 없던 그 시절 한량들 최고의 레포츠 수단. 자연스럽게 강변 매운탕은 남성들 몫이 된다. 오뉴월 염천 아래 사발·통발·반두·족대·어망·파리 낚시질해 잡은 자잘한 잡어들이 '강변 카니발'에 동원된다. 백철 솥에 배딴 고기 들어가고 된장, 고춧가루, 고추장, 호박, 깻잎 넣고 끓인다. 보이는 식재료 대충 들어간다고 해서 '대충탕'으로 불렸다. 출출하면 국수 넣어 어탕 국수도 끓였다. 얼큰한 국물 맛이 술맛을 돋운다. 자갈밭에서 진탕 노는 모양이 꼭 소동파 '적벽부'의 후반부 장면을 연상시킨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천렵탕은 3급 매운탕이었다. 잡어는 메이저급 매운탕 양념으로 몇 마리 들어갈 정도로 푸대접 받았다. 낙동강, 금호강이 아닌 마을 앞 개천에서 잡힌 씨알 작은 잡어들은 '틈새 어종'으로 분류돼 법당 뒤로 밀려났다. 그런 잡어 3인방이 요즘 '귀하신 몸'으로 대접받고 있다. 이들의 맛 색조는 제각각. 특히 빡∼ 빡∼ 특이한 울음소릴 내는 빠가사리 맛은 담백, 꺽지는 시원, 뿌구리는 구수하다. 세 가지가 섞이면 칼칼·얼큰·개운하다.

매운탕 마니아들의 혀는 섬뜩할 정도로 정확하다. 마치 전라도 귀명창이 새내기 소리꾼 첫 소절만 들으면 소리의 깊이를 단번에 판가름하는 수준. 더 완벽한 음미를 위해 매운탕 먹기 전엔 다른 반찬엔 손을 안된다. 혀에 양념이 묻으면 감도가 떨어진단다. 그런데 문제는 비린내. 예전 어른들은 매운탕은 비린 맛으로 먹는다고 했지만 90년대 도시민들은 단연코 'No'. 그래서 도심 매운탕 집은 '비린내와의 전쟁'을 벌일 수밖에.

민물고기는 펄을 먹고 살아 입 안엔 흙과 유기물이 썩어 생긴 찌끼인 '해감'이 늘 담겨있다. 이 해감내가 갓난아기가 토악질한 젖내만큼 역겹다. 게다가 민물고기 피부에 함유된 휘발성 아린 화합물인 '피페리딘(Piperidine)'도 비린내를 유발시킨다. 몸 속에 퍼진 비린내. 어떻게 날려버리나. 제일 강력한 게 산초(山椒) 가루였다. 연이어 된장, 그 다음 방아 잎, 깻잎, 애호박, 호박잎, 심지어 생강즙과 당귀 등 한약재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양념은 '과유불급(過猶不及)'. 산초와 화학조미료를 과도하게 넣으면 진미는 실종된다.

잡어탕 중 가장 비싼 게 쏘가리탕(평균 4만원 이상). 그래서 그런지 관리 어종으로 매년 6∼7월엔 잡지 못한다. 1995년 충북도 내수면 개발 시험장에서 인공부하에 성공했고 2000년초 의성군이 치어를 관내 저수지 등에 다량 투입해 의성은 졸지에 쏘가리 고장으로 통한다. 하지만 쏘가리 양식은 매우 어렵다. 성질이 워낙 급해 장마 때 천둥소리에 놀라 배를 뒤집고 죽을 정도. 치어를 분양받아 키울 순 있어도 키울 공간이 부족하다. 최소 1㎞ 이상 하천을 끼고 양식을 해야 되는데 그런 공간을 확보하기 힘들다. 자연산의 경우 1급은 강원도, 2급은 금강·섬진강·경호강권이다. 낙동강은 유속도 느리고 여울이 별로 없어 3등급이다.

#민물 잡어 매운탕 대표주자들

금강(내당네거리 모퉁이), 민물박사(수성못 동측), 반도(중앙경영정보고 남측), 열이네(서재고개 북측 초입, 진천역 옆, 복현동), 이하수 매운탕(칠곡군 석적면 중리 부영아파트 근처), 강나루(복현동 에메랄드 호텔 뒤편, 대구MBC 남측).

대구를 대표하는 장수 민물 잡어 매운탕집이다. 이들은 1980년대 중반 강변 매운탕 문화가 타격을 받자 즉시 도심 속에 매운탕 문화를 퍼뜨린다. 모두 장사가 잘 됨에도 불구하고 거의 체인점 시스템을 도입하지 않고 자연산으로 승부를 걸고 있다. 또 대다수 부부가 식당을 꾸려가고 있다. 남편들은 하나같이 못말리는 '낚시광'. 성어기면 식당일은 아내에게 맡기고 낚싯대와 어망 등을 차에 싣고 전국 유명 강과 저수지 등지로 출어한다. 이들은 거의 50대 초반, 지역 매운탕 2세대인셈.

민물박사·금강·반도·이하수는 2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강나루·열이네는 후발 주자이지만 모두 금호강 수역인 동촌과 강창 매운탕과 인연을 맺으며 성장해 저력이 만만치 않다. 반도 주인 문상훈씨(59)는 반도 낚시점 주인이다. 민물박사는 유일하게 레스토랑 매운탕 시대를 열었다.

맛은 거의 자극적이지 않다. 얼큰함은 반도와 열이네가 제일 두드러지고 나머지는 된장 등을 잘 안배해 부드럽고 맵지 않아 퓨전 스타일의 매운탕 기분이 난다. 물론 옵션을 걸면 매운 청양고추를 넣어 땀나도록 해준다.

도심 잡어탕 개척자는 동아백화점 뒤편 초림식당(대표 이정언). 이들보다 앞섰지만 이 사장은 한 길을 못가고 훗날 밀리오레 뒤에서 업종을 바꿔 장춘면옥을 차린다.

▲민물박사= 상주시 낙동면 신오리 낙동 나루 근처에서 매운탕과 인연을 맺은 조상기씨(53). 그는 낙동 나루 근처에서 매운탕집을 꾸려 간 부모 조성규(76)·정봉순씨(75)로부터 매운탕 끓이는 법을 배웠다. 그가 현재 수성구 두산동 수성못 동편으로 오기까지 지난 20여년간은 '민물고기와의 동침 세월'. 그래서 민물박사란 별명을 갖게 된 것. 그는 주인이면서 주방장이고 홀 서빙맨인 동시에 고기가 떨어지면 직접 강으로 달려가는 강태공. 어부처럼 잘 익은 대춧빛 혈색이 돋보인다. 붕어 곰탕, 피라미 조림, 쏘가리 회, 자연산 장어 구이는 물론 어탕 국수, 자연산 미꾸라지로 요리한 추어탕까지 직접 요리하는 민물요리 전문가. 20여년 전 고향 상주를 떠나 청구고 옆에서 매운탕집을 차려 그동안 다섯 차례 이전했다가 현재 자리로 왔다. (053)768-2104

▲금강= 85년 9월 오픈한 금강 매운탕. 대구의 서구권 매운탕가의 좌장. 특공무술 덕분에 청와대 경호팀에서 생활하다 81년 전역한 이창열씨(51). 낚시파 인생을 살아 온 그는 초림식당 이 사장과 죽이 맞아 금강, 전북 진안 용담댐 수몰지역, 섬진강, 경호강, 임하댐 상류지역에서 쏘가리를 무진장 잡았다. 한 번 떠나면 2박3일, 많을 땐 쏘가리 13㎏를 잡아 왔다. 남 주기도 아깝고, 그래서 아내 곽영구씨(45)와 의기투합해 금강 매운탕 시대를 연다. 인기를 반영하듯 현재 지역에서 금강 상호를 슬쩍 모방한 식당이 7군데. (053)626-6106

▲강나루= 복현점과 범어점 두 곳이 있다. 복현점은 91년 등장했는데 사장 신태호씨(52)의 매형인 범어점 주인 이성복씨(51)가 현재 아들 이상협씨(28)와 잡어매운탕 대중화에 열을 올리고 있다.

범어점의 맛은 60년대 동촌 유원지 내 대표적 매운탕 집이었던 버드나무 식당 주인 홍모씨의 손맛에서 건너왔다. 그는 20세부터 동촌 K-2 부대 장교들과 영천 금호강 상류로 몰려가 고기를 잡았고 그가 직접 매운탕을 끓였다. 하지만 버드나무 식당은 90년쯤 폐업되고 그의 피혁사업도 여의치 않자 처가의 도움을 받아 92년 봄 고속버스터미널 근처에서 강나루 인기몰이에 나섰다. (053)742-7130


▲열이네= 세 자매 매운탕가의 주역. 김열이(58)·옥순(56)·옥이씨(49)의 어머니 정남연씨(15년 전 작고)는 전국 매운탕 메카였던 강창 매운탕촌 금호식당 주인이었다. 강창 매운탕 원조 대구식당 바로 아래 자리잡았던 금호식당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 지역 군 장교들이 자주 찾았다. 하지만 80년대 강창 매운탕 경기가 추락하자 정씨는 캐나다로 이민을 간다. 맏딸 김열이씨가 가업을 잇기 위해 90년쯤 성서공단에 이름없는 잡어매운탕집을 열었고 97년쯤 달서구 이곡동 서한2차 아파트 앞에서 본격적으로 열이네 매운탕 시대를 연다. 이때 왕실과 서재 매운탕 본점과 경쟁했다. 언니 밑에서 노하우를 배운 둘째는 달서구 진천역 미즈맘 병원 옆, 셋째는 평리동 구 신천지회관 옆 골목 안으로 분가했다. (053)583-5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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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비산·동락나루 매운탕

구미 비산·동락나루 매운탕 요리 맛집 정보 2008. 9. 6. 14:27

구미 비산·동락나루 매운탕
 


바이어 대접때도 "매운탕촌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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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낙동강 구미 구간엔 모두 8개의 나루가 있었다. 동락(東洛), 비산(緋山), 강정(江亭), 강창(江倉), 용산(龍山), 송당(松堂), 월골(月窟), 가산(加山). 나루 양측엔 어김없이 강나루주막이 진을 쳤고 그 주막의 단골은 강을 건너는 행인들. 장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안되는 것도 아니니 늘 그 메뉴에 그 서비스. 현대식 다리가 놓이면서 주막은 구멍가게, 아니면 식당으로 '버전 업'됐다. 낙동강 구미 구간은 약 45㎞. 평균 6㎞마다 1개씩 나루가 놓여 있은 셈이다. 그런데 지금 일선·승선·산호·구미·남구미·낙동 등 6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

강나루 주막은 여건상 매운탕 집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구미도 마찬가지였다. 대구의 강창, 강정, 화원 강나루 매운탕과 한 항렬로 발전해 온 구미 매운탕촌 양대 산맥은 비산과 동락. 비산쪽엔 대구·한양·강나루·수림·버드나무, 동락쪽엔 나룻터·왜관·동락·대교 등이 서로 마주보고 자릴 잡고 있다.

현재 두 곳의 자존심 대결은 대단하다. 서로 자신들이 구미 매운탕의 본가라고 우긴다. 인문지리적으로 볼 때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비산은 구미의 주 생활권인 반면 동락은 칠곡권이었다. 그런데 동락은 70년대 중반 개통된 구미대교 가설로 신도시로 조성되면서 급부상했고 한때 칠곡군 인동면(78년 구미시에 편입)에 속해 비산 사람들은 강 건너로 가길 꺼려 했다.

동락쪽 매운탕집 역사는 거의 35년선. 모두 자식이 명맥을 잇고 있다. 비산쪽은 가장 오래 됐다는 대구가 35년. 현재 주인들 모두 작고한 매운탕 1세대의 가게를 인수했기 때문에 어디가 유서깊은 곳인지를 따지는 건 무의미한 것 같다.

비산과 동락은 산호와 구미 대교를 끼고 약 1㎞ 떨어져 마주보고 서 있다. 특히 최근 개통된 산호대교의 휘황찬란한 야간 조명과 강건너 구미2·3공단 불빛 때문에 아베크족이 많이 몰리고 있다. 동락의 명물은 속칭 '새똥 바위'. 여현 장현광은 '부지암(不知巖)'이라 명명했다. 근처에 동락서원, 부지암 정사, 인동향교가 있고 그 바위는 잠수암이라 장마철에 어김없이 수면 아래에 위치한다. 그게 물에 잠기면 바위 위에 자릴 잡은 대교 등은 물난리를 겪어야 한다.

구미 매운탕촌은 구미공단이 만든 것이라고 보면 된다. 매운탕집은 구미공단의 공식 회식장소였다. 공단 사장들은 일본, 미국 바이어들이 들이닥치면 두 매운탕촌으로 안내했다. 80년대 들어 해운대 갈비, 금오산맥 등 숯불갈비집 등 각종 외식업소들이 등장하지만 그 전만 해도 회식 공간의 풍취를 가진 곳은 강변 매운탕촌을 따를 곳이 없었다. 풍광은 비산에서 양호동 강둑쪽이 좋다. 그래서 LG전자가 현재 외인아파트 근처에 영빈관을 만들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그곳을 단 한번도 이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과, 참외, 땅콩이 많이 재배되던 강 건너 모래밭엔 대규모 버드나무 숲이 조성됐다. 경산시 하양읍 청천의 포플러, 화원의 버드나무 숲에 필적됐다. 비산나루 옆에 조성된 구미1공단. 코오롱, LG전자, 오리온전기, 한국전자, 동국방직, 이화섬유, 계림요업, 한일방직 등의 간부들은 물론 직원들도 비번이거나 주말을 맞으면 비산나루로 우르르 몰려왔다. 배를 타고 강 건너로 가서 놀고 오는 것이다.

나룻배 중앙부엔 늘 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75년 어느 날 큰 사고가 날 뻔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뱃머리에 앉는 바람에 배가 전복된 것이다. 다행히 강 수심이 들쭉날쭉해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일본 관광객들은 특히 장어를 좋아했다. 공단 간부급 부인들은 여름철 오전만 되면 나루로 나왔다. 그들이 그곳에 온 건 일에 파묻혀 잠자리에서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남편을 위해 가물치, 자라, 잉어를 사러 온 것이다. 자연 용봉탕(용은 잉어·자라 등을, 봉은 닭을 의미한다. 용봉탕은 원래 지렁이를 먹은 닭을 끓인 탕을 말하는데, 지역에 따라 잉어와 닭, 자라와 닭을 함께 넣고 끓이기도 한다) 붐으로 이어진다.

비산·동락나루 잉어요리, 회·탕·찜 순으로 개발돼

잉어 요리는 잉어회, 잉어탕, 잉어찜 순으로 발전해 왔다. 두 곳 모두 처음엔 매운탕만 끓이고 찜을 선보이지 않았다. 80년대 들자 탕요리만 갖고는 손님을 잡기 힘들다고 판단한 동락나루의 여주인들이 의기투합해 '전국 매운탕 1번지' 강창을 비롯, 대구 도심 곳곳의 유명 매운탕촌을 뒤졌지만 잉어찜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평소 갈비찜 솜씨를 응용해 나름대로의 잉어찜 요리를 선보였다. 그들은 늘 주요 회사 과장급 이상 VIP 단골을 은밀하게 불러 시식요리를 내놓았다. 식도락가가 돼버린 그들의 지적은 거의 정확했다. 그들이 맛있다고 하면 입소문을 타고 직원들에게도 번져나갔다. 아들, 며느리와 함께 식당을 경영하는 동락나루 나룻터(사장 나춘자·60)는 잉어찜 양념을 두 번 바르는 것으로 차별화를 시도했다.

비산나루 터줏격인 대구식당 문천대씨(여·63)와 한양식당의 곽용기씨(60·전 구미시의원), 84년쯤 비산나루에서 물러나 구미의 마지막 도선장으로 불리는 전용식씨(65)를 차례로 만났다.

비산나루 매운탕에 첫불을 지핀 건 백인기씨. 그는 대구시 달서구 파호동 강창나루에서 매운탕 장사를 하다가 이곳으로 자릴 옮겼다. 현재 대구식당 자리에서 방을 얻어 매운탕을 끓였다. 60년대 후반쯤이었다. 하지만 손님이 그렇게 많지 않아 계약 기간도 채우지 못하고 그 자릴 떴다. 백씨가 등장할 때 김수홍씨가 현재 한양식당 자리에서 '어정(魚井)'이란 매운탕집을 연다.

백씨가 하던 식당은 당시 29세 때 그곳으로 시집온 대구 비산동 출신 문천대씨가 이어간다. 문씨의 고향이 대구라 선택의 여지없이 대구식당이란 간판을 걸었다. 문씨의 남편 신도식씨(81년 작고)는 한량 뱃사공으로 술과 친구를 좋아했기 때문에 가업은 억척스러운 문씨가 다 챙겼다. 문씨는 10년 이상 나룻배를 부리는 여자뱃사공. 그래서 구미시 문화행사 때 낙동강 마지막 처녀 뱃사공으로 뽑혀나가기도 한다. 문씨는 비산과 인연이 깊다. 태어난 곳도 비산동이고 시집 온 곳도 비산동이기 때문이다. 비산동 흙은 붉다. 그래서 대나무도 붉은 색을 띤다고 해서 자지기(紫竹)로 불렸다. 어정은 79년 곽씨가 인수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비산매운탕을 살린 건 구미공단이었다. 70년 안팎으로 구미·낙동 대교가 준공되자 거의 1만명의 공원이 비산나루를 찾아 몰려들었다. 금성사와 코오롱, 한국전자, 신영 등 굴지의 업체들 회식 자리는 선택의 여지 없이 매운탕집이었다. 그렇게 해서 대구, 대가, 대동, 어정 등 5개의 매운탕집이 들어서고 동락나루쪽에서 4군데가 군락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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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국면, 70년 역사의 전국 최장수 국수

풍국면, 70년 역사의 전국 최장수 국수 요리 맛집 정보 2008. 9. 6. 14:20

풍국면, 70년 역사의 전국 최장수 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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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공장
 
북구 노원동 3가 만평로터리 근처에 자릴 잡은 풍국면은 70년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소표와 함께 전국 최장수 국수공장으로 기반을 잡았다.

풍국면은 처음부터 국수 전문 공장으로 태어난 건 아니다. 원래 일본인의 제면제분 공장을 신재순(작고)이 인수했다. 하지만 창업 40여년만에 풍국산업은 사업합리화 차원에서 풍국면을 포기하고 79년 7월1일 당시 서문시장 최대 쌀 도매상 주인 최정수한테 매각한다.

풍국면의 전신은 33년 3월18일 서구 내당동 현재 내당파출소 동편 마루요시(丸吉) 제분·제면 공장. 이때 시스템은 반자동이었다.

마루요시는 49년 제면부, 제분부, 정부양곡 도정부를 가진 대한압맥공업(주)으로 업그레이드된다. 53년 (주)풍국산업으로 자릴 잡는다. 풍국은 이미 제면사업과 동시에 도정·제분 사업도 병행했다. 풍국은 국내에선 처음으로 일본에서 개발된 '인조미(人造米)'생산설비를 수입해 온다. 인조미는 압맥(押麥·납작보리)으로 불렸는데 압맥은 스팀 기계로 보리를 한 번 압열시켰기 때문에 쌀과 섞은 뒤 바로 밥을 해도 괜찮았다. 압맥 전엔 보리쌀을 먼저 삶은 뒤 쌀에 앉혀 번거로웠다.

신재순은 선친과 친했던 당시 대구 실세 동암 서상일을찾아가 압맥이 군납될 수 있도록 요청한다. 그렇게 해서 한때 육·해·공군에 풍국의 압맥이 독점 보급된 적도 있다. 풍국은 60년대 후반 제면부 공장을 따로 마련하기 위해 부산의 영남제분 노원동 공장 부지를 인수해 풍국면 자동화 시스템을 세팅하고 73년 6월4일 구자춘 경북도지사, 이규이 대구시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풍국면 노원 공장 준공식을 갖는다. 풍국면이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풍국면은 대구에선 처음으로 69년 3월5일 아리랑 라면을 개발하지만 참패 당한다. 삼양은 밀가루 공장에서 밀가루를 가져와 63년 라면을 개발해 돈을 엄청나게 번다. 당연히 기존 제분제면 회사들도 라면사업에 군침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삼양은 거리로 나가 연탄불로 라면을 끓여 행인들을 대상으로 무료시식 이벤트를 갖는 등 마케팅 마인드가 확립돼 있었지만 다른 제분 회사들은 오랜 독점 탓에 자만심에 빠져 있었다. 설상가상 정부는 지역 기업을 살리기 위해 지역 사정에 따라 각기 다른 원가를 반영한 정부 가격인 '고시가격제'를 78년 전격 해제한다. 대기업이 농림부에 로비를 한 것이다. 결국 풍국은 제분 영업권을 농림부에 반납하고 풍국면은 서문시장 쌀 도매 거상 최정수에게 매각한다.
 

이병철의 별표 국수 삼성그룹 밑거름

 
'돈병철'이란 별명을 가졌던 삼성그룹의 창업자 호암 이병철은 일본 와세다대 유학 시절 각기병에 걸린다. 그는 온천 요양 중 중대 결단을 내린다. 학업보다는 큰 사업가가 되겠다는 청운의 꿈을 품고 귀국한다. 26세 때 마산에서 협동 정미소 사업과 부동산업으로 성공, 27세 때 대구, 부산, 김해 등지에 200여만평의 토지를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중일전쟁 때 자금동원령에 따른 은행 대출 동결로 큰 타격을 입는다. 재기를 노리며 대구로 진입한다. 38년 3월1일 대구시 중구 인교동 61의 1(오토바이 골목 서북단)에서 지하 1층, 지상 4층 크기의 삼성상회를 오픈한다. 이병철은 이곳에서 삼성그룹의 에너지원을 확보하게 된다.

그는 대구 근교에서 수집한 청과물과 포항 등지에 온 수산물 등을 중국과 만주로 수출하는 한편 국산 제분기와 제면기를 설치 별표 국수를 판 것이다.

삼성은 제면기를 통해 강아지풀 대 굵기만한 가는 건면을 뽑아냈고, 이걸 종이 띠로 어른 팔목 굵기만하게(375g, 3인분용) 포장해 상점과 식당에 팔았다. 삼성상회 앞에는 국수를 선점하려는 소도매상인들이 몰고온 이륜차, 짐자전거, 리어카, 말구루마로 북적댔다.

삼성상회의 주력 상품은 별표 국수. 하지만 이병철이있을 땐 생각한 것만큼 장사가 안됐다. 별표 국수를 성공적으로 키운 사람이 나타나는데 그가 바로 이병철의 동향(경남 의령)인 박윤갑이다. 그는 먹고 살기 위해 이병철을 찾아간다. 사람 됨됨이를 간파한 이병철은 박윤갑에게 국수 공장을 맡기고 광복 직후 삼성물산을 서울에 구축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박윤갑은 그걸 야무지게 살린다. 사람 복이 많은 이병철은 또 한 사람의 능력가를 만난다. 그가 훗날 이병철의 오른팔이자 삼성의 감사가 되는 대구상고 출신 이창업이다.

그는 현재 대신동 서문빌딩 근처 조선양조장(대표주는 정종 월계관) 총관리인이 된다. 상경한 이병철은 6·25발발과 함께 생산 기반을 송두리째 잃은 채 대구로 내려온다. 그런데 이병철의 두 수족이 국수와 술 공장을 워낙 잘 살린 덕분에 훗날 제일제당, 제일모직의 설립자본을 마련하게 된다. 6·25 때 삼성상회는 현재 SK텔레콤 대구지사 자리에 풍국주정공장을 설립하고 삼성 사이다를 시판한다.

박윤갑(작고)은 후에 대구 상공회의소 회장과 새마을금고 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동구청 자리에 삼성제지를 세워 제일모직 포장 상자 공급을 독점했지만 사업이 여의치 않아 이무일(작고)이 이끄는 무림제지에 넘어가고 만다.
 

 대구는 '국수의 고향'이다.

1970년대 대구 국수가 타지로 팔려나갈 때 포장지에 '대구명산 국수'란 문구를 찍었다. 물론 국수의 원산지는 중국이다. 60년대 한국 섬유 생산량의 절대다수가 대구에서 생산됐듯 국수도 80년대말까지만 해도 대구가 전국 시장의 50% 이상을 독점했다. 참고로 소면은 일제 때 '왜국수'로 불렀고 한국 공장에선 '세면(細麵)'으로 불린다. 일본에선 우동, 칼국수처럼 굵은 국수는 중화면, 우리는 중면으로 불렸다.

소면의 사전적 의미는 고기붙이를 넣지 않은 국수, 이와 비슷한 일본의 소바(蕎麥)는 메밀가루로 만든 면을 의미하며 메밀국수는 '소바키리'로 불린다. 소바는 16세기말∼17세기초 등장했다는 게 정설이다. 이와 비슷한 게 중국 면 요리 울면과 기스면이 있다. 기스면(鷄絲麵)은 말 그대로 실처럼 가는 국수를 닭고기 육수에 말아낸 국수로 보면 된다.

대구는 왜 국수가 강했을까? 그것은 날씨 때문이다. 요즘은 자동화 시스템 때문에 고온의 실내 건조대에 걸려 8∼9시간 만에 절단되지만 예전엔 야외 건조대에서 이틀 정도 말려야만 했다. 당연히 고온다습한 대구 기후가 수요가 급증하는 여름날 국수 만들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국수는 칼국수와 달리 재빨리 요리해 먹을 수 있는 소면이었다. 하지만 70년대 전만 해도 국수 전문점이 없었다.

특히 잔칫집에서 폭발적 인기를 얻어 점차 잔치국수로 자릴 잡는다. 설렁탕 집은 물론 시장 국밥집 등에선 국에 국수를 넣은 육국수(국수장국, 일명 온면)가 잘 팔렸다. 기존 칼국수 문화 속에 소면을 앞세운 잔치 국수문화가 싹터나오게 된다. 잔치국수는 90년대부터 양산된 일식집 후식으로도 각광받는다.

일제 때 대구의 메이저브랜드는 원대동 구 부민극장 맞은편의 닭표였다. 일제 말 이병철이 별표 국수, 신재순이 풍국면을 선보였지만 선두권에 진입하진 못했다. 


그 시절 제면기. 
 
 
광복 직후 일본이 물러나자 지역에선 국수 춘추전국시대가 펼쳐진다. 50년대 지역 유지였던 양조장·도정공장 주인들은 너도나도 국수공장을 세웠다.

골목마다 국수 빼는 집이 인기 업종이 된다. 48년 닭표에 대적하기 위해 권팔수(62년 작고)가 북구 침산동 1501에 소표 국수(대양제면)를 세운다. 풍국면은 그때까지만 해도 풍국산업의 주력 상품은 아니었다. 소표는 국수 전문 공장으로선 별표국수와 쌍벽을 이룬다. 70년대초 소표는 달성·원대·침산동 공장을 가진 지역 메이저급 국수공장이 된다. 이와 함께 보신탕으로 유명한 원대동 대원식당 맞은편에 왕관 국수, 내당동 풍국산업 맞은편 봉표국수가 각축전을 벌인다. 소표는 창업주 권팔수의 사망으로 장남 권호상이 물려받았지만 99년 경영악화로 동생 권호용에게 경영권이 넘어간다.

50∼70년대 대구에선 선두권 뒤를 말표, 백양표, 영양국수, 새농촌, 금성, 달성, 종표, 제비표, 학표 등 무려 30여개의 국수 공장이 다경쟁체제를 유지했다. 이들은 기존 칼국수 문화를 겨냥, 건조 칼국수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삼성상회 주력 상품으로 개발돼 50년대 반짝 영향력을 행사하던 별표 국수는 60년대로 넘어오지 못하고 퇴장하고 만다.

대신 33년 창업된 풍국면, 48년 모습을 드러낸 소표는 대구의 간판 국수 공장으로 지금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 하지만 대다수 국수공장들은 80년대말에서 90년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경주, 진주, 전주, 진천(충북)의 OEM 오뚜기 국수 공장의 위세에 눌려 거의 백기를 들고 만다. 현재 지역엔 풍국, 소표, 금성, 달성(고령), 대구종합식품, 갈산국수 등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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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국수,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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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칼국수

할매칼국수 요리 맛집 정보 2008. 9. 6. 13:54

할매칼국수

할머니들의 정성이 진품칼국수만들어냈다
인기 상호…1위 '할매' 2위는'고향'


1960년대만해도 칼국수는 집에서만 빚어 먹는 거란 게 일반적 정서였다. 그런데 일제 때 등장한 기계로 뺀 소면은 사정이 좀 달랐다. 특히 입맛 떨어지는 오뉴월엔 소면 특수까지 일어나 일반 식당 주인들도 소면만은 구해놓아야 했다.

그런데 70년대로 접어들면서 유신정권 덕분에 칼국수 수요가 폭증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조국 근대화 기치를 내걸고 새마을 운동을 주도하면서 쌀 소비를 억제했다. 쌀이 너무 부족해 혼·분식을 장려한 것이다. 공무원들은 싫어도 토요일 점심 한 끼는 칼국수를 먹어야만 했다. 정부 시책인 탓이다. 그 흐름이 칼국수 붐으로 이어진 셈이다. 그 무렵 칼국수 붐을 재빨리 감지한 일부 대구 시청·국세청(현재 밀리오레 자리) 공무원들은 고향 노모를 설득해 대구시내에서 칼국수집을 열도록 바람을 넣기도 했다.

그 시절 손님들은 칼국수 집만은 상호가 토속적이길 원했다. 상호 인기 순위 1위는 '할매', 그 다음이 '고향'이었다. 70년대초만해도 '간판없는 칼국수집'이 유행했다. 점포 얻을 돈이 없어 자기 집 안방에서 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그렇지만 손님들은 화려한 콘크리트 건물보다 허름한 한옥 칼국수집를 선호했다.

그런 배경을 안고 대구 지역에 동곡 할매 칼국수, 경주 할매 칼국수, 명덕 할매 칼국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동곡·경주 할매는 외모도 비슷하고 성격도 불 같아 고위 공직자라도 수가 틀리면 바로 욕을 해대는 바람에 '욕쟁이 할머니'로 유명했다. 이들 할매들의 공통점은 남편 복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대신 칼국수에 맘을 의탁한 탓에 지금 같은 '진품 칼국수'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 같다.


#동곡 할매 칼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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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군 하빈면 동곡리 127 동곡장. 이 시장 거리는 1970년 문을 연 동곡 할매 국수집 특수 때문에 칼국수 집이 주변에 6개 더 생길 정도로 '칼국수 시장'으로 변모했다. 동곡을 칼국수 마을로 만들어 놓고 8년 전 작고한 강신조 할매 고향은 동촌이다. 그래서 초창기 식당 이름은 동곡이 아니고 동촌이었다. 동곡으로 시집 왔지만 먹고 살 일이 막막했다. 동곡 장터 초가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눈감고도 요리할 수 있는 칼국수.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다행히 달성군에서 가난한 할매한테 밀가루를 적잖이 배급해주었다. 부산 출신의 큰 며느리 김옥희(52)와 홍두깨를 밀었다.

동곡 칼국수는 더울 땐 건진국수, 추울 땐 누른국수를 추천한다. 건진국수는 현재 서문시장 한 켠에 있는 왕근이 칼국수 스타일. 손님들은 항상 물이 끓고 있는 가마솥에 맨먼저 눈길을 빼앗긴다.

동곡 할매는 별다른 재료를 사용하지 않는다. 칼국수는 단순한 맛이 최고의 맛이라고 믿는다. 양념장 맛으로 승부를 건다. 밀가루 반죽 때 계란을 섞어 2일간 숙성한 뒤 할매의 손자 김동혁(33)이 홍두깨로 밀어내면 며느리 김옥희가 썬다. 썬 칼국수는 즉시 가마솥에 넣어 초벌 끓이를 한다. 5분 정도 지나서 막대기로 국수를 걷어 올린다. 이 동작이 인상적이다. 희끄무레한 밀가루 색 흔적이 보이면 다시 가마솥 안에 집어 넣는다. 그 흔적이 사라져 투명하고 매끈한 기운이 감돌면 끄집어낸다. 가마솥 옆에 찬물이 담긴 큰 '다라이'가 있다. 그곳에 갓 끄집어 낸 칼국수를 씻은 뒤 건져서 그릇에 담고 가마솥 국수물을 조금 부은 뒤 국간장, 파, 고춧가루, 참기름이 고루 들어간 양념장을 얹으면 요리 끝. 가마솥 물엔 밀가루 기운이 스며들어가 있는데 꼭 숭늉 맛이다. 이 물로 열무김치를 담그기도 하고 몇몇 단골은 냉면 육수처럼 한 그릇 들이키기도 한다.동곡 칼국수 맛은 꼭 찜질방에서 방금 나온 화장 안한 처녀 얼굴 같다.

#경주 할매 칼국수

올해 여든일곱 살의 황금연 할매. 경주 건천 출신인 할매는 일찍 남편을 여의고 홀몸이 됐다. 외동딸과 먹고 살기 위해 대구로 온 그는 현재 중앙 시네마 근처 한미약국 뒤에서 삯바느질로 연명을 했다.

하지만 그는 바느질을 멀리하고 홀린 듯 73년 대구백화점 옆 골목(대구시 중구 공평동 44의 7)에서 고향 이름을 딴 경주 할매 칼국수 집을 연다. 단칸 사글세 방에서 단돈 1만원을 갖고 칼국수집을 열었다. 시장에 가서 호마이카 상을 샀다. 개업 초기 구입해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호마이카 상에 남겨진 빛바랜 자국이 이 집 역사를 대변한다.

칼국수 맛은 국물 맛. 최고의 맛을 위해 할머니는 최고의 재료만을 구했다. 매월 음력 8월에 잡히는 '노리끼리한' 비늘의 충무 멸치 오사리를 150포 정도 구입해 1년간 국물을 만든다. 김장용 배추와 달리 오동통하고 젓가락 크기만한 얼갈이 계열의 배추 '청방'을 칼국수에 넣는다. 초창기엔 지금과 달리 연탄불로 국수를 끓여냈다. 쇠망에 멸치를 넣고 국물을 빚으면 쇳물 냄새가 난다면서 굳이 삼베 보자기에 멸치를 넣는다. 장인급 감각이 아닐 수 없다.

할매는 입이 걸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욕쟁이 할매'. 애써 요리한 국수가 남는 걸 좌시하지 못한다.

"먹을 만큼만 먹지, 다 처먹지도 못하면서 남기긴 왜 남겨!"

정이 많아 거지가 와도 매정하게 쫓아보내지 못하고 칼국수 한 그릇을 건네준다. 전성기 땐 서울 롯데호텔 측에서 공짜로 점포를 내주겠다면서 호의를 보였지만 "식당이 너무 커지면 칼국수 맛이 없어진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현재 조카 황성욱씨 내외, 올케 양분이씨(72)가 가맥을 잇고 있다. 할매는 지금도 누추하기 이를 데 없는 칼국수집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 역시 칼국수 명장다운 풍모이다.

#명덕 할매 칼국수

남구 대명동 2가 경북예고 뒤편 골목 주택가에 자릴 잡은 명덕 할매 칼국수. 그곳을 유명하게 만든 송주연 할매(79)는 성주군 초전면 대장리 출신.처음부터 칼국수집을 연 건 아니다. 칠곡군 약목면 관호리로 시집온 직후 서문시장에서 포목점을 꾸려갔는데 큰 화재로 점포를 잃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국수집을 열었다. 경주·동곡 할매와 달리 새색시처럼 부끄럼이 많은 송씨 할매. 처음엔 간판없이 가정 집에서 홍두깨를 밀었다. 경북예고 입구에서 3년간 있다가 현재 자리로 이전해왔는데 초창기 국수 한 그릇 값은 고작 600원.

50대 초반이었지만 부끄러움이 많아 손님한테 국수를 내놓을 때도 절대 얼굴을 마주치지 않았다. 술도 팔지 않았고 돼지고기 수육도 내놓지 않았다. 손님이 많을 땐 이웃 할머니를 불러 품삯으로 퍼진 국수를 주기도 했다.

대구교육대·계명대·영남대 교수들이 주 고객이었다. 차분한 솜씨의 할매 칼국수에 반한 것이다. 몇몇 계명대 교수들은 외국 출장갔다 대구에 내리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온다.

이 집의 위상을 말해주는 미담도 잇따랐다. 다도인 최정수씨가 어느 날 느닷없이 일본 야마하 피아노 사장 등 3명의 일본 고위 인사를 데리고 이곳을 찾았다. 최씨가 대구를 대표할만한 음식점을 찾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일행을 이곳으로 안내한 것이다. 국수를 다 먹고난 일본 인사들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우동맛과 달리 조선 백자 같은 담백한 국물맛에 매료돼 할매한테 경의를 표하고 돌아갔다.

이곳 국수는 경주 할매 칼국수와 비슷한 조리법을 갖고 있다. 국물맛은 충무산 오사리로 낸다. 채소는 겨울엔 삼동초, 여름철엔 청방배추를 넣고, 양지머리를 참기름으로 볶아 고명으로 올린다. 계란 지단, 해물류 등은 국물맛을 텁텁하게 만든다며 사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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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와 냉면 - '냉면의 고장 풍기'를 아십니까 ?

영주와 냉면 - '냉면의 고장 풍기'를 아십니까 ? 요리 맛집 정보 2008. 9. 6. 13:34

영주와 냉면 -  '냉면의 고장 풍기'를 아십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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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표적인 곳은  :  '연한' 서부냉면-'질긴' 함흥면옥


영주시 풍기읍. 사람들 대다수는 '풍기'하면 인삼부터 떠올린다. 조선 중종조 주세붕이 1541년 풍기 군수로 부임해 풍기의 토양, 기후를 조사한 결과 인삼재배 적지임을 알아내고 산삼종자를 채취하여 인삼재배를 시작한다. 이때부터 풍기는 졸지에 '인삼의 메카'로 자릴 잡는다.

그러나 식도락가들은 풍기를 '냉면의 고장'으로 꼽으려고 한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도내 23개 시·군 중 6·25 때 가장 많은 피란민이 여기로 몰려든다. 휴전 직후 그곳 주민 80% 이상이 이북 사람들이었다. 자연 이북식 음식의 좌장격인 냉면이 뿌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아직 상당수 타지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잘 모른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 풍기가 '냉면촌'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게 '정감록' 때문이란 점이다. 정감록에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에 자손을 간직하라"란 대목이 나온다. 특히 정감록에 따르면 전국 열 곳의 길지(吉地) 중 첫 손으로 꼽힌 곳이 소백산 자락을 깔고 앉은 풍기, 특히 금계1·2리가 명당으로 알려지면서 19세기 풍전등화의 한반도 정세를 우려한 안목 깊은 가문들이 앞다퉈 여기로 이주한다. 그 대열에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현장을 지켜봤던 김계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82·풍기 출신으로 현재 서울에 거주)의 조부 김태립도 섞여 있었다. 그는 1885년 평북 정주 고향 사람들과 함께 금계1리로 들어와 쟁쟁한 가문을 일군다. 김태립의 아들 길준은 풍기고(영주과학기술고)를 설립했고, 그의 아들 계삼(작고)도 소백산관광 대표를 역임했다. 계원·계삼 형제는 타지 사람들이 오면 풍기 냉면을 융숭하게 대접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풍기 냉면은 점차 전국적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휴전 직후 풍기에선 견직(인견)물 공장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난다. 물론 그 공장주 대다수는 이북인들이었다. 풍기역(중앙선), 인삼시장, 견직물 공장 등으로 인해 상권이 비대해진다. 그 무렵 다른 시골 단위에서 식당 간판이 달린 곳은 눈을 닦고 봐도 찾기 힘들었다. 그러나 풍기는 장사가 잘 돼 현대식 냉면집이 자릴 잡을 수 있었다. 풍기읍 사무소 맞은편에 풍일냉면(60년대 폐업), 풍기초등 정문 앞 우진팔씨의 냉면집, 풍기역 굴다리 맞은편에 최응상씨의 냉면집 등이 전성기를 구가하지만 대를 잇지 못해 지금은 자취를 감추고 없다. 안타깝게도 70년대 견직물 산업의 몰락으로 냉면집도 일제히 문을 닫는다. 풍일냉면 주방장은 영주로 내려가 냉면문화를 퍼트린다. 풍기와 달리 영주시내엔 50년대만 해도 냉면집이 없었고 70년대초 하망동에 함흥면옥이 첫 냉면집격으로 나타난다.

영주권 냉면문화 중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뭘까. 그건 풍기 냉면의 대표주자 서부냉면은 메밀이 많이 들어가 면발이 별로 질기지 않은 반면, 영주시내 함흥면옥은 고구마 전분만 사용해 가위를 사용해야 될 정도로 질기다는 사실이다.


#풍기 서부냉면

그 맛의 원천은 김숙인 할머니(81)가 쥐고 있다. 평북 운산이 고향인 김 할머니는 1·4 후퇴 때 남편 김경섭 할아버지(81)와 풍기로 내려왔다. 아직 메밀을 멧돌에 직접 갈고, 철제 냉면틀에서 면을 직접 뽑아내는 것만은 예전 그대로다. 

물론 이 집의 명물은 식당 한 켠에 자릴 잡은 메밀 가는 기계식 멧돌. 간 메밀을 체질하는 김 할머니의 자태가 바로 이 집 역사다.

김 할머니가 처음부터 냉면집을 염두에 둔 건 아니다. 처음엔 메밀묵 장사부터 시작했다. 겨울에 힘을 더 발휘하는 메밀묵. 그러나 여름철에는 맛이 없어 잘 팔리질 않았다. 하절기, 남아도는 메밀을 활용해야만 했고, 견직물 공장 기술자였던 남편의 월급만으로 살기 힘들어 73년 큰 맘먹고 서부냉면을 연다. 그런데 이북과 달리 경상도 사람들은 꿩, 돼지고기 육수에 거부감을 보였다. 남한 실정에 맞게 소고기 육수를 내기 위해 눈·귀동냥을 많이 했다.

서부 냉면의 맛은 무심하고 담담하다. 대구시 남구 봉덕동 대동강과 비슷한 맛이다. 얼큰함과 짠맛에 길들여진 경상도 본토 어른들은 맹물같은 육수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기도 하지만 가만히 음미해보면 '무심 속 진미'를 느끼게 된다. 곁반찬도 단출해 고춧가루를 묻히지 않은 무 김치와 열무김치가 전부다. 장남 제호씨(48)도 서울로 올라가 공무원 생활을 했지만 가업을 잇기 위해 직장을 나와 서울시청 앞 프라자호텔 후문에 서울 분점을 냈다. 현재 본점은 김씨 할머니, 차남 제세씨(41), 며느리 명연옥씨(44)가 지키고 있다.


#서문가든

94년말 평북 구성군 당현면에서 이곳 서부동으로 피란 온 허덕영의 손자 정씨(50)가 문을 열었다. 선대는 이곳에서 견직물 공장을 경영했고, 허정씨도 그곳에서 일을 하다가 여의치 않아 냉면집을 열었다. 육수는 사골과 사태살을 사용하고 동치미 국물을 조금 섞는다. 메밀과 전분은 5 대 1 비율로 섞는다.


#영주 함흥면옥

우수락(작고)·홍금순(82) 부부는 1·4 후퇴 때 함남 함흥군 신포에서 속초로 내려온다. 그곳에서 약 15년쯤 함흥식 냉면을 퍼트린다. 70년대초 영주시 하망동 중앙교회 옆으로 왔다가 82년쯤 태극당 옆 골목 안으로 이전한다. 한때 홍 할머니의 딸 명옥씨가 가업을 잇다가 손을 떼고 현재는 아들 경식씨(38)가 본점과 메밀명가(영주동)를 운영하고 있다.

요즘 몸이 불편한 홍 할머니는 "함흥 냉면은 회냉면이라고 하죠. 싱싱한 명태와 가자미, 홍어 등을 넣는데 우리집은 가오리를 넣고 있어요. 함흥식 전통을 살리기 위해 메밀은 전혀 넣지 않고 고구마 전분만으로 면발을 뺍니다"면서 함흥냉면의 본질을 설명했다. 참고로 속초에서 가장 오래된 냉면집 금호동 함흥냉면옥(대표 이석봉)은 회냉면에 명태회를 올려준다.

우 사장은 "평양식은 메밀이 많이 들어가 덜 질기고, 함흥식은 전분이 많아 질긴 게 제 맛이란 걸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면서 냉면장사 고충을 토로한다.


#서부 불고기 식당

풍기읍 서부리 129의 1 서부 불고기 식당. 현재 사장 김순자씨(59)의 시아버지 배찬덕씨는 평남 덕천군 출신이다. 그도 처음부터 냉면집을 생각한 건 아니다. 월남한 사람들이 가장 만만하게 시작했던 견직물 공장을 꾸려가는 한편, 풍기읍의 첫 보신탕집도 오픈했다. 70년대 들면서 견직물이 사양길을 걸으면서 공장들이 도산을 한다. 배씨의 부인 권오희씨(작고)는 남편 사업이 괜찮았을 땐 냉면집을 상상도 못했다. 76년 권씨는 보신탕집 운영도 안되고 직물 공장까지 어려워지자 며느리와 함께 냉면집을 오픈한다. 육수는 사골을 섞지 않고 양지머리만으로 내고, 면은 직접 가루를 낸 메밀과 전분을 함께 섞어 빼낸다.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되고 영주 부석사 관광 특수가 일자 질긴 면발 수요가 늘어, 면발도 전보다 더 질기게 빚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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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유명 냉면집

대구의 유명 냉면집 요리 맛집 정보 2008. 9. 6. 13:30

대구의 유명 냉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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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냉면]



 
# 대동면옥(중구 계산동), 대동강(남구 봉덕동), 부산 안면옥(중구 공평동).

강산면옥과 함께 대구를 대표하는 냉면 전문점들이다. 특히 대동면옥과 부산 안면옥의 마스코트격인 온육수는 외지인들로부터 특별대접을 받는다. 북한에서 즐겼던 온육수는 왜 생겨났을까. 그 이유는 냉면이 겨울 음식이란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찬 냉면과 뜨끈한 육수를 통해 음양의 조화를 노렸다. 그래서 냉면이 사철 음식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골수 냉면파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말이 있다. 바로 '선주후면(先酒後麵)'이다. '술을 먼저 먹고 나중에 냉면으로 속을 푼다'는 의미다. 이때 냉면은 해장국이나 마찬가지다. 마치 바닷가 어부들이 식전에 먹던 속풀이 물회와 같은 구실을 한다.

냉면요리엔 잔 일손이 많이 간다. 밀가루로 칼국수를 뽑는 건 냉면 면발 빼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메밀 반죽은 뜨거운 물에 재빨리 반죽하지 않으면 메밀 입자끼리 잘 엉겨붙지 않아 면발이 잘 빼지질 않는다. 가능한 한 오래 반죽해야 쫄깃해지는데 요즘처럼 자동반죽기가 없던 그 시절 반죽일은 중노동이었다. 그래서 힘들면 달려갈 수 있는 집이 있는 제바닥 일꾼들은 몇달 못 견디고 도망가기 일쑤였다. 여건상 타지 출신이 더 오래 견뎠다. 그래서 그런지 대구지역 유명 냉면집 주방장들은 거의 호남 출신이다.

메밀은 가는 방법에 따라 질감이 달라진다. 재래식 맷돌을 사용할 경우 메밀 외피만 갈리고 속은 살려주기 때문에 반죽해도 면이 쫄깃해진다. 하지만 요즘처럼 고속 분쇄기를 사용할 경우 열도 많이 발생하고 속까지 으깨놓기 때문에 반죽해도 탄력이 별로 없다. 온육수는 주방장 취향마다 조리법이 조금씩 다르다. 예전 이북 사람들은 냉면 삶은 물에 국간장을 조금 가미해 온육수를 만들어 마셨다.


# 대동면옥·부산안면옥, 온육수 유명

중구 계산동1가 뒷골목, 퇴락했다지만 대동면옥이 반세기 이상 자릴 지켜 체면은 유지하고 있다. 70년대말까지만 해도 이 골목 남쪽 끝에 유명한 요정 일심관, 불고기 요리 1번지로 군림했던 계산동 땅집이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해 있어 불야성을 이뤘다.

대동면옥과 부산 안면옥 사장은 한 집안 사람이다.

대동면옥 초대 사장 안차천(현재 구미에 거주)의 형 안목천은 6·25 때 부산시 중구 창선동으로 피란, 자기 성을 따 부산 안면옥을 오픈한다. 안씨 집안은 이미 구한말부터 평양에서 안면옥을 꾸려온 냉면 명가. 평양 안면옥은 제분소까지 소유할 정도로 큰 규모였다. 부산으로 내려온 안면옥이 요즘 맛 보기 힘든 '이북식 쟁반요리'를 내놓아 대박을 터트린다. 이 요리는 일종의 '북한식 소고기 전골'로 당시 남한엔 없었다. 고기를 다 먹고 나면 밥을 볶아 먹지 않고 냉면 사리를 넣어 먹는 게 이색적이다. 그런데 부산 안면옥이 어떤 연유로 대구로 오게 됐을까.

부산 안면옥 동절기 휴업…이듬해 4월쯤 재개

부산의 안씨는 식당이 정상궤도에 오르자 식당보다는 세상사에 더 관심 많은 '한량'으로 변모한다. 보다 못한 부인이 현재 대구 부산 안면옥 사장인 조카 방수영(75)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그때 방수영은 거창여고를 거쳐 진주고에서 영어교사로 있었다. 가업을 이어준다는 일념을 갖고 교직을 박차고 나와 부산 안면옥을 떠맡게 된다. 그가 대구로 올라와 부산 안면옥 대구지점을 대구국세청(현재 밀리오레) 동편 골목 안에 오픈한다. 날이 갈수록 부산보다 대구지점이 더 히트를 친다. 결국 부산 안면옥 본점이 대구지점에 통폐합되고 만다. 부산 안면옥은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추어탕집인 상주식당처럼 동절기엔 영업을 하지 않고 이듬해 4월1일쯤 다시 문을 연다.

대동면옥과 부산 안면옥 냉면 온육수 맛은 조금 다르다. 

대동면옥은 냉면 삶은 물과 고기 삶은 물을 섞는 반면, 부산 안면옥은 사골, 잡뼈 등을 약 24시간 삶은 물에 간장, 무, 생강, 파뿌리, 마늘 등 갖은 양념류를 넣어 빚는다. 대동면옥 온육수의 맛은 '분청사기', 부산 안면옥은 '조선백자' 같다.

대동면옥, 술꾼들 심야 해장파티집으로 애용

대동면옥은 50년대까지는 중구 동산파출소 앞 큰 길가에 있다가 60년대초 현재 자리로 이전한다. 그때 대동면옥 냉면은 특히 요정의 단골들에게 '해장면' 구실을 했다. 60년대초 구 오성고 근처에 자리잡았던 5관구 H 사령관은 지역의 유력 인사와 술독에 빠지길 좋아했다. 특히 금호호텔 북쪽 인교동 골목안에 자리잡았던 단골 요정 수향원(나중에 죽림헌으로 바뀜. 고 이병철 삼성그룹 명예회장이 자주 이용)에서 술이 거나해지면 '심야의 해장냉면 파티'를 자주 만들었다. 동석자들과 함께 어깨동무하고 대동면옥으로 직행, 느닷없이 유리창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유리창이 깨지는 촌극도 연출했다.

"옛 모습이 좋아" 리모델링 못하게 막기도

대동면옥은 강산면옥에 비해 규모는 작았지만 골목으로 이전한 뒤부터 엄청나게 성장한다. 현재 56평 ㅁ자 일본 적산 가옥은 여러번 개조해도 퇴락미가 돋보인다. 몇십년 단골 노인들은 추억의 음식인 냉면집은 너무 화려하고 거창하면 안된다면서 89년 4대 주인이 된 이옥자(50)에게 리모델링 못하게 압력을 가한다. 흥미로운 건 상당수 단골들은 주인 이옥자를 명맥을 잇는 손부로 간주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옥자는 결코 이북에서 내려오지 않은, 대구토박이다.

대동면옥이 늘 좋았던 건 아니다. 2대 백모 사장 시절에 위상이 추락했고 그걸 현재 서문시장에서 포목점을 하고 있는 이두영이 평북 운산에서 냉면집 주방장으로 있던 이창섭 할아버지로부터 기술을 전수해 3대 사장이 되며 현재 4대 사장 이옥자가 잃어버린 예전 대동의 명성을 되찾는다.

# 봉덕동 대동강, 실향민들의 '제맛'

남구 봉덕2동 대동강. 초대 주인 윤일순(77)은 평남 중화군 해안면 죽산리 출신이다. 그녀의 선친은 식당업에 간여하지 않았다. 22세 때 혈족 8명과 함께 1·4 후퇴, 서울을 거쳐 서구 내당동으로 피란온다. 그녀 집안은 내당동 서부교회에서 우유를 얻어먹을 정도로 가난했다. 그 가난이 그녀를 냉면집 주인으로 만든 것이다. 65년 당시 제과점에서 중국집으로 변해 있던 허름한 13평 한옥을 구입한 직후 자신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이북 음식을 팔았다. 비지, 빈대떡, 만두국을 끓여 팔다가 68년부터 평양식 냉면을 집중 판매한다.

윤일순은 고향에서 먹은 광천수 맛 같은 동치미 국물에 말아 먹던 김치말이 냉면맛을 잊지 못한다. 그래서 요즘도 육수에 동치미 국물을 조금 섞는다. 이북에선 꿩 육수와 동치미를 반반씩 섞었다고 한다.

이수성·이재용·윤덕홍·이동원씨등 자주 찾아

가업을 이은 외동딸 석정희(53)는 대동강 냉면 맛을 평가받기 위해 2002년 중국 베이징에 가서 시식회를 갖기도 했다. 윤일순은 북한 동치미에 대한 정보를 더 알려줬다. 북한에선 음력 9월에 김치를 담가 이듬해 음력 2~3월까지 먹기 때문에 큰 독을 땅에 6개월쯤 묻어둔다. 동절기에 꽝꽝 언 김치를 걷어내고 말갛게 고인 국물을 퍼낼 때 아녀자들의 맘이 가장 설레는 순간이다.

대동강 냉면 색은 메밀묵처럼 연한 데다가 육수까지 말갛기 그지 않다. 양념 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아 신세대들에겐 맹물맛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나이든 실향민들에겐 그게 '제 맛'이라고 한다.

'향수'를 부른 평양 출신 가수 이동원, 작곡가 김희갑·작사가 양인자 부부, 이수성 전 총리, 윤덕홍 전 대구대총장, 이재용 환경부장관 등이 자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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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자장면-짬뽕

우동-자장면-짬뽕 요리 맛집 정보 2008. 9. 6. 13:24

우동-자장면-짬뽕

자장면 없는 中 간자장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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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엔 자장면이 없다

중국엔 자장면은 없고 간자장만 있다.

간자장은 중국말로 '자장미엔(炸醬麵)'. 이게 한국인들에겐 자장면으로 들렸던 것이다. '작(炸)'은 '볶는다'는 뜻. 그렇다면 자장면은 '간자장'을 의미하는데, 실제 한국의 자장면은 볶지 않고 끓여 익힌 것이다.

한국으로 건너온 중화요리의 고향은 베이징(北京)과 산둥(山東)이다. 일제 때 한국으로 온 화교들은 대다수 산둥성 출신이고 이들은 베이징 요리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 베이징 사람들은 여름엔 자장미엔, 겨울엔 한국의 우동과 같은 스타일의 '따루미엔'을 즐긴다.

한국으로 온 화교들이 처음부터 자장면을 판 건 아니다. 만두와 호떡부터 먼저 팔았다. 초기엔 화교 자본이 축적되지 않았기 때문에 구멍가게형이 먼저 등장한 것이다. 1905년 산둥성 뭐핑(牟平)현 출신의 조리사 위시광(于希光)이 개업한 공화춘이 맨 먼저 자장면을 팔았다고 하지만 이 대목은 아직 학설적으로 정리된 건 아니다.

화교들은 한국인이 김치와 고추·된장을 좋아하는 것만큼 춘장에 국수 비벼먹는 걸 좋아했다. 공화춘이 생기기 전 인천항 부두의 화교 인부들은 점심 때면 삼삼오오 모여앉아 춘장을 볶아 국수에 얹어 한끼 요기를 해결했다. 그게 훗날 식당으로 흘러들어갔다고 봐야 될 것 같다.


# 춘장 원래 불그스름

화교들은 한국으로 건너올 때 우리의 고추·된장같은 춘장을 갖고 왔다. 입맛이 없을 땐 춘장만 찍어 먹어도 속이 편했다. 우린 춘장이라고 하는데 중국에선 '충장'이라고 한다. 충은 '파 총(蔥)'의 중국식 발음. 원래 춘장에 어울리는 건 대파였다. 파와 춘장이 합쳐져서 충장이 된 것이다. 우린 춘장, 자장, 면장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 자장은 기름에 볶은 장이고 면장은 파를 찍어 먹는 장을 의미한다. 따라서 중화요리집 주인한테 춘장을 달라고 해선 안되고 "면장을 달라"고 해야 맞다. 중국 춘장은 현재 한국에서 개발된 것보다 더 짜다. 원래 춘장은 좀 불그스름한데, 장 속 밀가루가 산화되면서 시간이 갈수록 검게 변한다. 대파와 양파, 어느 쪽을 사용해도 자장면 맛에는 별로 영향을 안주지만 어느 한쪽 가격이 오르면 싼 걸 사용할 수밖에 없다. 일본의 다쿠앙 선사가 개발해 낸 반찬인 단무지도 일제 때 자장면 옆에 붙게 된다.


# 한국식 자장면 개발

한국인들도 인천항 '부두 자장면' 맛에 반하게 된다. 하지만 한국인에겐 너무 짰다. 화교 조리사에게 "물을 좀 섞고 제철 채소를 더 넣으면 맛있을 것"이라고 조언한다. 자장면에 중독된 한국인들이 급증하자 공화춘 등 매머드급 중화요리집들이 화상 기질을 발휘해 한국식 자장면을 재빨리 개발한 것이다. 화교들보다는 한국인을 상대해야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물론 일본인들도 자장면을 좋아해 자기 스타일로 바꾸는데 그 과정에 캐러멜, 다쿠앙, 식초 등을 등장시킨다. 일부 화교 조리사들은 "현재 한국 자장면도 일본 요리사들이 개발한 것이고, 그 조리법이 훗날 한국인 조리사들에게 전해졌다"고 주장한다.

춘장은 밀가루 60%에 콩 40%가 들어간다. 소금으로 간해서 1년간 숙성시켜 만든다.


# 한국 자장면도 중국으로 수출된다

1999년 한국 자장면이 중국 베이징으로 역수출된다. 베이징에서 한국인이 많이 모여사는 '왕징(望京) '아파트 단지에 자금성(대표 박광자)이 들어온 것이다. 자장면은 800년 역사를 가진 베이징의 서민요리였다. 쌀보다 밀가루가 많이 생산되는 중국 허베이(河北) 지방에선 밀가루 요리가 유난히 많았다. 자장면이 활성화된 것도 그 때문이다. 지금도 베이징엔 전통 베이징 자장면으로 불리는 '라오베이징 자장미엔(老北京炸醬麵)'이 곳곳에 진을 치고 있다. 하지만 한국 것과 달리, 중국 자장면엔 고기와 채소가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인들에겐 맛있다는 느낌이 안든다. 중국의 남·북방 지역에선 자장면을 잘 먹지 않는다. 현재 베이징 자장면 한 그릇 값은 5∼8위안(600∼960원)선.


# 짬뽕·우동, 개발은 일본…본적은 중국

중국인들은 짬뽕을 '소마미엔(炒碼麵)'이라고 부른다. 소마미엔 육수는 돼지뼈로 빚으며, 네댓가지 채소도 함께 넣는데 우리처럼 맵지 않다. 한국의 우동과 비슷한 게 다루미엔이다. 이는 중국식 국물면으로 '칭탕미엔(淸湯麵)'으로도 불리는데 환자용으로 널리 사용된다. 요즘엔 면을 기계로 뽑지만 예전엔 면발에 더 탄력을 주기 위해 손수 밀가루를 반죽해 수타면을 뽑았다.

짬뽕의 주민등록지는 일본이지만 본적은 중국이다. 1571년 일본 최초로 개항한 나가사키가 짬뽕이 태어난 곳이다. 나가사키는 짬뽕과 함께 카스테라로도 유명한 고장이다. 나가사키 짬뽕은 우리와 달리 색깔도 흰색이며 맵지도 않다.

일본 짬뽕의 최초 개발자는 중국 푸젠(福建)성 출신의 징헤준(陳平順). 그는 일본 내 중국 유학생들을 배려해 1899년 나가사키에 오픈한 중국 음식점 시카이로에서 싸고 맛있는 음식을 개발한다. 해물, 양파 등 쓰고 남은 재료를 넣고 볶은 뒤 국수에 얹고 쓸모없는 돼지뼈, 닭뼈 등을 고아 만든 육수를 부었다. 그 음식 이름은 '밥 먹었느냐'는 의미의 중국말 '츠판(吃飯)'. 그게 일본에서 짬뽕으로 변해 한국으로 들어온다. 현재 시카이로는 5층짜리 식당으로 성장했고, 1층은 짬뽕 박물관으로 꾸몄다. 일본 짬뽕 가격은 우리보다 비싸 1만원선. 대구에도 최근 나가사키 짬뽕집이 대구백화점 맞은편에 들어왔다.

우동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옛날 중국인들은 끼니를 잇기 어려울 때 감자나 밀가루로 반죽을 해서 과자를 만들어 기름에 잘 튀겨먹었다. 이걸 '혼돈'이라고 하는데 나중엔 기름 대신 끓는 물에 삶아 먹는 형식으로 변하면서 반죽 길이도 점차 늘어난다. 이게 '온돈'이라 불리며 후에 일본 우동의 전신이 된다. 1천300년전 일본의 홍법대사가 중국에 불교를 공부하러 왔다가 온돈 조리법을 배워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식 우동을 개발한다.

중국 우동은 오징어, 새우, 홍합 등 각종 해산물과 갖은 야채를 넣고 끓여내어 맑고 깔끔한 데 비해, 일본 우동은 가다랭이 육수 맛이 강해 훨씬 감칠 맛이 있다. 도쿄를 비롯한 간토(關東) 지방에선 소바(메밀국수)를 면류의 좌장으로 치지만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간사이(關西)에서는 밀가루 국수인 우동을 최고로 친다. '가케루(끼얹다)'의 명사형 '가케'가 붙은 가케우동은 한국에선 '가끼우동'으로 불리고, 이게 한국인 사이에 인기를 얻어 나중엔 홍익매점 가락국수, 북성로 돼지 불고기 우동 등으로 변형된다. 가끼우동에 유부를 얹어주면 '기쓰네(여우) 우동', 튀김 부스러기가 올라가면 '다누키(너구리) 우동', 찹쌀떡이 들어가면 '치카라(힘) 우동'이 된다. 가히 일본은 '우동 나라'라 할 만하다.

사누키(일본 서남부 시코쿠섬의 가가와현) 우동은 일본을 대표한다. 현재도 가가와현에는 무려 2천500여개의 우동 전문점이 있으며, 조리법을 가르치는 우동학교도 10여 군데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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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종로와 군방각

대구 종로와 군방각 요리 맛집 정보 2008. 9. 6. 13:21

대구 종로와 군방각



종로, 대구 화교들의 세거지
군방각, 대구 유지들의 사랑방



# 한·중·일인들 섞여 살았던 종로

'China high restaurant 群芳閣 '
"저게 뭐라 쓴 기고?"
"내가 우째 알겠노."

60년대초 대구시 중구 종로 대로를 걷던 두 한국인이 나눈 대화다. 그때 종로 거리에서 행인들의 이목을 끌었던 것 중 하나가 종로 2가 23 대구 첫 중화요리집이인 군방각(群芳閣) 간판이었다. 군방각은 '봄철 백초 향기가 물씬 피어나듯 많은 손님들이 모이는 공간'이란 뜻을 담고 있다.

종로는 동인동, 향촌동, 북성로와 달리 한국·중국·일본인들이 뒤섞여 살아간 곳으로 특히 대구 화교들의 세거지였다. 종로 중심부엔 군방각, 화교를 상대로 하는 잡화상 화상공회(華商公會·현 쎈추럴호텔 주차장 자리), 인화당 한약방(현재 경미반점 자리), 대구화교소학교에 이어 복해반점, 경미반점, 영생덕, 천안성 등 중화요릿집이 가세를 한다. 특히 임진왜란 때 대구로 귀화한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도 종로 바로 서편 지역 계산동에서 뽕나무를 기르며 두릉 두씨 가문을 키워나갔다.

# 佛 개선문 같았던 군방각 출입구

타계한 영화배우 율 브린너처럼 늘 삭발하고 다녔던 군방각 주인 모문금(慕文錦)은 중국 산둥(山東) 출신으로 스케일이 호방했다. 사업 수완도 남다른 사업가였다. 그는 대구화교 1세대 좌장격으로 60년대초 한국에도 관광호텔 특수가 일 것을 예감한 듯 6·25 직후 건물을 개조할 때 간판에 한자와 영어를 병기했다.

1963년 2월 영남일보에 소개된 식당 입구는 '개선문' 같았다. 대지 250평 크기의 군방각은 공중에서 보면 T자형이었다. 입구는 웅장했다. 1m 남짓한 장방형 대리석을 정·좌·우, 세 방향으로 세워올리고 거기에 상호를 해서체로 새겨넣었다. 붉은색 톤의 중국 전통 대문인 '패루(牌樓)'를 연상시켰다.

군방각 입구 통로는 현재 쎈추럴호텔(옛 종로호텔) 주차장 입구와 일치한다. 입구를 지나 본관으로 가기 위해선 회랑 같은 좁다란 골목을 걸어가야 한다. 1905년 한국에서 가장 먼저 자장면을 판 것으로 알려진 인천 첫 중화요릿집 공화춘(共和春)보다 더 화려하고 규모도 컸다.

# 화교 대부 모문금, 원래 건축업자

모문금은 1903년쯤 한국에 온다. 하지만 곧바로 대구로 오진 않았다. 대구로 오기 전 충청도에서 요릿집을 먼저 연다. 무슨 생각이 들어서인지 그는 서울의 몇몇 화교 건축가들과 합세, 건축업에 뛰어들어 거금을 거머쥐게 된다. 모문금은 1913년쯤 대구 대교구장 드망드 주교의 부름을 받고 동향 출신 건축 기술자 강의관(姜義寬) 등과 함께 대구로 온다. 모문금에 앞서 1901년 산둥성 건축 기술자 26명과 요리사 2명도 계산성당을 짓기 위해 선발대로 대구로 왔다. 이때부터 대구 화교의 역사가 본격화되고 중화요리도 점차 뿌리를 내리게 된다. 화교 건축기술자들은 남산초등학교 근처에 벽돌공장을 짓는다. 그들이 만든 적벽돌은 지금의 남산동, 계산동, 진골목의 담은 물론 종교건물, 일본 관공서 건축 재료로도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모문금이 군방각을 맨처음 세운 걸로 알고 있는데 그건 아니다. 그 전에 같은 이름으로 장사를 하고 있던 화교가 있었는데 모문금이 장사가 잘 안되던 군방각을 매입해 크게 키운 것이다. 초창기 군방각은 푸른 빛의 목조건축물이었다.

일제 때 한국인과 일본인은 자기 나라 음식점만 찾길 좋아했다. 특히 일본인들은 더 그랬다. 그렇지만 군방각만은 예외였다. 이국인들이 국적을 초월해 출입했고, 특히 근처 진골목에 포진하고 있던 부자 서병국이 자주 이용했다. 진골목 서부자로 불린 그는 46년 콜레라에 걸려 타계했다.

그때 한국 유지들에게 군방각은 단순한 요릿집이 아니라 사랑방 구실까지 했다. 2층 별실에서 코스요리를 시키고 근처 교동 시장 내에 있던 대동권번 등에 전화를 걸어 기생도 부를 수 있었다. 한창 때 군방각은 '군방각 요정'으로도 둔갑했다.

# 모문금, 비즈니스 마인드 탁월

모문금은 비즈니스 마인드도 탁월했다. 파격적으로 한국 유지들이 애인과 밀애를 나눌 수 있도록 별실까지 만들어 줬다. 1층에선 자장면, 만두, 탕수육 등 값싼 단일 메뉴, 2층(의자 180개) 룸은 코스 요리 전문 공간이었다. 3층은 대형홀이라서 결혼식, 환갑 잔치, 연말연시 각종 리셉션, 특히 60년대초엔 2군사령부 회식 자리로도 애용됐다.

60년대초만 해도 대구에선 이렇다할만한 예식장이 없었다. 고려예식장만 해도 67년에 생겨났다. 따라서 많은 식탁과 각종 요리가 즉석에서 해결되는 군방각이 결혼식장으론 적격이었다. 실제 모문금은 3층에 군방각 예식장을 만들어 화교들이 결혼식과 환갑 잔치를 벌일 수 있도록 구조를 조금씩 개조해나갔다.

# 6·25 때는 잠시 대만으로 피란도

모문금은 6·25 때 막강한 재력을 이용, 고위층을 통해 대만으로 피란갈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화교들은 언감생심이었다. 모문금은 믿을만한 사람에게 자기 식당을 위탁관리시킨다. 종전 직후 모문금이 대구로 돌아왔지만 군방각 건물은 모문금의 허락없이 신식으로 개조돼 있었다. 모문금은 분통을 터트리면서 건물을 중화요릿집에 걸맞게 리모델링한다.

# 항일운동 군자금 지원 고초 겪어

모문금은 항일 마인드가 남달랐다. 일제 땐 독립군들에게 군자금을 지원해 이런저런 고초를 겪기까지 한다. 건축업자 출신이기 때문에 그는 요리에 통달한 사람은 아니었다. 주방은 왕모씨에게 맡겨두고 자신은 굵직한 단골 확보에 치중했다.

일부 한국인들은 모문금의 항일정신을 폄훼하기도 했다. 한국인들한테 환심을 사기 위해 그가 꾸민 일이라고 보기도 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일제 말기 모문금은 일경의 요시찰 대상이 된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했을 무렵, 일제는 유흥업소들을 통제했다. 전시 총동원 정국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극장 상영도 제한됐고 호화로운 식당도 거의 문을 닫을 판국이었다. 일경은 툭하면 모문금을 대구경찰서로 연행해갔다. 그 바람에 한 달간 영업정지처분은 물론 업종 변경압력까지 받는다.

60년대로 접어들면서 군방각의 영업은 극도로 저조해진다. 대구엔 자장면·우동 말고도 먹을 게 지천으로 깔리게 된다. 무엇보다 다양한 한식이 등장한 것이다. 57년쯤 계산동 땅집이 불고기 붐을 일으키고, 뒤이어 동산동 실골목 특수를 노린 진갈비 등이 숯불갈비 붐을 일으킨다.

또한 '납작만두의 대명사' 미성당도 분식문화에 불을 댕긴다. 또 수형당, 만미당, 고려당, 런던제과, 삼송빵집, 뉴욕뉴욕 등 숱한 제과점이 봇물터지듯 등장한다. 6·25 직후 먹을 것 없던 때의 대구가 아니었다. 자연 중화요리 마니아들의 발걸음이 뜸해질 수밖에 없었다.

# 군방각 팔고 대만 건너 가 사망

모문금은 예지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60년대 후반 군방각을 종로호텔 건립자인 진주 출신의 박종실(2003년 작고)에게 팔아버린다. 자식들이 군방각에 미련이 없었는지, 아니면 모문금이 중화요리의 미래가 어둡다는 걸 예감해서 자식에게 식당을 물려주지 않았는가는 분명치 않다.

모문금은 5남매 중 두 딸은 미국에 유학 보내 의학공부를 시켰고, 나머지 자식도 중국 본토 및 대만 등지로 외유시킨다. 모문금은 군방각을 팔고 얼마 안돼 대구를 떠나 대만으로 건너가 타계한다. 군방각은 67∼68년에 철거되고 그 위에 종로호텔이 들어선다. 종로호텔은 여러 번 증축된 뒤 70년에 비로소 현재 모습을 갖게 된다. 현재 신관 6층 천장 보에 '68년 8월19일'이라 적힌 상량문이 적혀 있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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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대표적 중화요릿집

대구의 대표적 중화요릿집 요리 맛집 정보 2008. 9. 6. 13:19

 대구의 대표적 중화요릿집

우중충한 날이면 박정희 소장이 들러 식사하던 곳 인화반점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인화반점-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중화요릿집

현재 대구에선 가장 오래된 중화요릿집이다.

아들 악영무(岳永武·53)에게 가업을 물려주고 대구시 남구 효성타운 자택에서 쉬고 있는 악적창(岳積昌·75). 그는 지금 종로 경미반점 대표 당빈백(唐賓伯·79)과 함께 지역 화상들 사이에선 좌장격으로 통한다.

인화반점의 역사는 현재 중구 종로 경미반점(1950년대엔 인화당 한약방 자리) 옆 운남관(雲南館)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자기 가게가 없어 여러 곳을 전전한다. 북성로에선 대루원, 다시 태평로 이통(利通)반점 시절을 거쳐 53년쯤 경북대 의대 동편에 인화반점을 오픈한다.

초창기 인화반점 근처는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개발이 안돼 비가 오면 장화를 신고 다녀야 했다. 60년 초 한일로가 뚫리기 전까지는 합승차도 다니지 않았다. 가게도 무척 옹색했다. 10여평 규모의 양철집에 테이블도 고작 4개밖에 없었다. 인화반점 자리엔 허베이성 출신의 곡전린(穀殿麟)이 경영하던 명려(明麗)반점이 있었다. 그때 가장 잘 팔린 건 자장면과 자장밥, 간자장, 볶음밥, 탕수육, 잡채 등이었다.

인화반점이 오늘까지 올 수 있었던 건 2군사령부, 경북대 의대, 경북도청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현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한 켠에 자리잡은 한국은행 대구경북본부 자리에는 55년 2월26일까지 육군본부가 있었다. 육본이 서울로 올라간 뒤 2군사령부가 그 자리에 들어와 13년 머물다 68년 12월3일 만촌동 무열대로 이전한다.

인화반점과 2군사령부 취사병은 한때 공생관계를 유지했다. 취사·보초병들은 툭하면 악적창을 불렀다. 자장면 한 그릇을 넘겨달라는 사인이다. 자장면을 좋아하는 일부 장교들은 부하더러 자장면을 사오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돈 없는 취사병들은 군납 식자재를 갖고 인화반점과 흥정을 했다. 그 때만 해도 고기가 귀했다. 군납 돼지고기가 나오면 신문지에 싸서 악적창에게 넘겨줬다. 악적창은 고기값만큼 자장면을 건네주었다. 요즘과 달리 당시 2군사령부 담은 아주 낮았고 철조망도 가설돼 있지 않아 그런 음성적 거래가 가능했다.

특히 비가 오고 날이 우중충하면 박정희 소장(당시 2군사령부 부사령관)도 부관들과 그곳에 와서 요릴 먹었다. 하지만 악적창은 박 소장이 훗날 5·16군사정변을 통해 대통령이 될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악적창은 한국인들한테 괄세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사전에 박 소장을 알아 챙겨주지 못한 걸 무척 후회한다고 회고했다.

경북도청이 60년대 후반 구 중앙공원 자리에서 산격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만 해도 도지사 관사는 구 대구여고 근처 관사촌에 있었다. 박경원·김인 도지사도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야참이 생각나면 자장면을 주문했다. 관사 방문객이 많으면 악적창이 직접 리어카에 식재료를 싣고 관사 부엌으로 가서 출장요리를 만들기도 했다.

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가벼운 철가방이 나오지 않아 엄청나게 무거웠던 3단짜리 나무가방을 들고 다녀야 했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팔 힘이 약해 짬뽕 국물을 쏟을 때도 비일비재했다. 인화는 65년부터 철가방을 사용한다.

장사가 잘 된 인화반점을 괴롭힌 한국인도 적잖았다. 갓 출소한 범죄자, 깡패, 유령단체 회원들까지 자장면과 배갈을 공짜로 시켜먹고 오리발을 내밀기 일쑤였다. 심지어 차비까지 뜯은 뒤 자랑스럽게 사라지기도 했다. 악적창은 억장이 무너졌지만 동인파출소에 신고를 하지 않았다.

인화반점은 2003년 11월쯤 문을 닫았다가 지난 7월 단골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구MBC 동편에 재개업했다.


#동해반점-50년대 대구에서 3번째 컸던 반점

인화반점과 비슷한 시기에 태동한 북성로의 대표적 중화요릿집이 동해반점이다. 대구역에서 중앙로 쪽으로 올라오다 보면 우측에 북성로 초입이 보인다. 왼편 동봉식당·손자장 간판이 보이는 상가가 바로 동해반점이 있던 곳이다.

동해반점 서편엔 일제 때 대구의 대표적 백화점 미나카이(三中井)가 자릴 잡았다. 50년대만 해도 대구역에서 가장 가까운 중국집이 바로 동해반점이었다. 그래서 호주머니 사정이 괜찮은 승객들은 동해반점으로 잘 갔다. 동해반점의 규모는 군방각과 기린원 다음으로 컸다. 2층 높이의 동해반점은 57년쯤 왕책겸(王策謙), 궁극례(宮克禮) 두 사람이 공동투자금 500만환으로 오픈했다. 원래 이 집은 바로 옆에 있던 아세아양행(대표 이상태·76) 소유였다. 아세아는 미성당, 황금당과 함께 중앙로 금은방 시대를 연 주역이다.

왕책겸과 궁극례는 돈을 벌기 위해 배갈 한 잔, 담배 한 개비 들지 않았다. 15개 룸을 가진 동해반점 종업원 수는 한국인 종업원(배달 담당)을 포함해 모두 15명이었다. 주문이 폭주, 전화도 3대를 설치했다. 궁씨는 14세 때 중국 산둥성에서 우리나라로 건너왔다. 그는 서울의 한 중화요릿집 보이로 있다가 개성으로 가서 독립을 하고, 6·25 때 대구로 피란와 동업자 왕씨를 만난다. 왕씨는 군방각의 종업원으로 12년간 일했다. 암기력도 비상해 일제 때 대구의 동명까지 모두 암기할 정도였다. 대구를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동해반점은 90년쯤 한국인의 손에 넘어갔다가 2년 전 명맥이 끊어지고 만다.

#기린원-군방각 이후 한때 최고로 군림

대구시 중구 수창동 옛 대구전매청 맞은편 기린원(麒麟園)도 동해반점과 비슷한 시기에 문을 연다. 99년쯤 대구은행 본점 맞은편에서 잡탕밥 붐을 일으킨 덕영대반점으로 넘어간다.

기린원은 60년대 기린원예식장으로 더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군방각이 68년쯤 문을 닫고 난 뒤 대구의 최고 중화요릿집으로 군림하다가 덕영대반점 시대로 넘어간다.

원래 기린원 자리엔 배갈 공장이 있었다. 동아쇼핑 옆 염매시장에서 잡화상으로 활동하던 이경문(李慶文)이 경영하던 만생(萬生·뒤에 수성구로 공장을 이전해 수성고량주로 변신했지만 80년대 폐업) 고량주 공장이었다. 이경문은 중식 특수를 예감하고 공장을 허문 뒤 2층 높이의 기린원을 세운다. 장사가 잘 되자 3·4층을 증축한다. 군방각처럼 기린원도 점차 요정화돼 간다. 지역 유지들은 이곳에서 기생을 불러 풍류를 즐기기도 했다.

나중에 산둥 사람인 구비소(邱丕昭), 강소춘(姜所春)이 동업관계를 형성하다가 후에 자기 몫을 챙긴 뒤 갈라진다. 이경문은 대만으로 갔고, 구비소도 미국으로 가 버렸다. 후에 필서만(畢序萬)과 현재 만촌동 이마트 근처 금란반점 장가금 사장이 다시 동업 관계를 형성했고, 현재는 서덕재(徐德財·60)·석수영(石秀英·56) 부부가 '기린원 제2 전성시대'를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연경반점-외환위기 이후 '全家福' 붐 일으켜

대구시 수성구 중동 현대병원 맞은편에 자리한 연경반점. 후발주자이면서도 IMF 외환위기 직후 전국에 걸쳐 '전가복(全家福) 붐'을 일으킨다.

올해 마흔일곱의 사장 손보충(孫寶忠). 그의 아버지 손진(孫珍)은 산둥성 치하현 출신으로 인천으로 들어와 부산을 거쳐 대구 종로에 정착했다. 손진은 동해반점과 기린원 주방장 등으로 일하다 나중에 북구 침산2동파출소 근처에 동화반점과 만경관 서편 원화반점을 끌고 왔고, 93년 가업을 이어받은 손보충이 남구 이천동 남도극장 앞에서 낡은 2층 건물을 빌려 연경반점 시대를 연다. 처음부터 전가복이 팔린 건 아니다. 여느 식당과 비슷한 중식 메뉴를 팔았다. 그런데 식도락가들 사이에 "집맛은 별로인 데도 전가복 맛은 죽인다"란 입소문이 나돈다. 시장·도지사, 판·검사도 그곳에 와선 비좁다거나 식당이 불결하다는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맛 때문이었다.

전가복은 손보충이 생각해낸 아이템이 아니다. 단골들이 손보충의 음식 솜씨가 만만치 않음을 간파하고 좀 더 고급메뉴를 내놓으라고 압력(?)을 가해 탄생한 것이다. 그런 배경을 안고 무려 35가지 신선한 재료가 총망라된 '연경반점 발(發) 전가복'이 탄생된다. 그는 최고의 요리법은 최고의 재료 확보란 걸 잘 안다. 그래서 매년 송이철이 되면 집을 비운다. 산지를 돌며 1등급 국내산 송이를 몇 t씩 다량 매입해 저온고에 넣어두고, 사철 싱싱한 식재료를 내놓는다. 서해안 태안반도에서 해삼, 여수에서 전복과 관자(조갯살), 부산과 울진에선 대게를 골라 온다. 단골과의 유대를 위해 즉석에서 배갈 한 잔을 주고받는 손보충의 도타운 정, 그게 아직 다른 화상들에겐 낯설기도 할 것이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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