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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성공원의 큰 코끼리 동영상

대구 달성공원의 큰 코끼리 동영상 애완동물 2008. 10. 12.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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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국밥(상)-국일식당

따로국밥(상)-국일식당 요리 맛집 정보 2008. 9. 10. 15:02

따로국밥(상)-국일식당

김두한 측근에 '매운 맛'…상표권 싸움서 한판승
'남편위해 끓인 국밥' 나무꾼들 외면못해 시작…6·25때 대히트 불구 "상놈이 먹는 국이지" 소리에 "따로 잉교?" 등장


 

#국일의 미공개 소송 비사

"뭐라고, 대구에 우리와 비슷한 상호를 가진 식당이 있다고. 그것 참…."

1996년 어느 날, 한때 주먹왕 김두한의 측근으로 활동한 서울 종로3가 K나이트클럽 모 회장(작고)이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K나이트클럽은 1924년 태동, 일제 때 명월관과 함께 최고 요정으로 군림했고, 광복 후 한정식 식당으로 변했다가 그 무렵 식당가, 복합 영화관, 나이트클럽 등이 입주한 복합빌딩시대를 열고 있던 차였다. 회장은 K의 배타적 권리를 선점하기 위해 1960년대초 서둘러 특허청에 상표등록을 했다. 그런데 10년마다 한 차례씩 상표등록을 갱신해야 하는 걸 담당자가 깜빡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때 대구시 중구 전동 흥국생명(80년 신축) 바로 서편에 자리잡고 있던 국일 따로국밥도 'K'와 이름이 비슷한 국일(國一)이란 상표를 특허내던 차였다. 양측은 그때까지 서로의 존재를 별로 모르고 있었다. 당연히 K쪽은 펄쩍 뛰면서 자기 상표권을 지키려고 소송을 제기한다. 국일도 대구 따로국밥의 자존심을 걸고 송사에 뛰어들었다. 3년여간의 소송, 법원은 국일 측의 손을 들어줬다.

그날 이후부터 한국 식당 및 유흥업 관련 업소는 '국일'이란 명칭이 들어간 상호를 일절 사용 못하게 된다. 물론 K도 자기 상호를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솔직히 K 입장으로선 날벼락인 셈이다. K측은 소송 전까지 국일을 얕잡아 본 것도 사실이다. 지방의 국밥집이 파워가 세면 얼마나 셀 것인가 하고 하대했다. 그런데 소송 과정에 K 못지않은 국일의 역사를 알곤 태도를 바꾼다. 국일측도 K한테 너무 매정하게 대한 것 같아 한발 양보한다. 그런 연유로 K는 지금 국일한테 로열티를 지급하고 상호를 사용하고 있다. K의 회장도 작고하기 전 몰래 대구로 내려와 그 국밥을 먹어봤고 측근들에게 "따로국밥이 소문대로 맵긴 맵군"이라며 국일을 재평가했다고 한다.

#국일은 어떻게 태어났는가

소피와 양지머리, 사골을 끓여 만든 육수, 파와 무, 그리고 고추기름이 가미된 '대구식 육개장'의 본산인 국일.

고사리와 계란이 가미된 서울식 육개장과 엄격하게 구별되는 국일 따로국밥이 97년 대구시 향토음식으로 지정되긴 했지만 아직 따로국밥이 대구를 대표하는 음식이란 전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동안 국일이 언론에 숱하게 알려졌지만 처음 문 열 때 위치, 메뉴와 조리법 등도 정확하지 못한 측면이 있고, 관련 사진조차도 거의 공개되지 못한 아쉬움도 있다.

국일의 가업은 1대 서동술(69년 작고)·김이순씨(75년 작고) 부부한테서 7남 봉준(81년 작고)·최영자씨(65) 부부로 이어지고 98년부터는 창업자의 손자 경덕(42)·경수씨(34) 형제에게로 체계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1대 서씨 할아버지는 구미시 해평면 출신으로 남구 성당못 근처에서 살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광복 직후 고향에 왔지만 먹고 살 일이 막막해 46년 한일극장 옆 공터 나무시장에서 나무를 팔면서 입에 풀칠을 했다. 김씨 할머니는 식성이 까다로운 남편을 위해 직접 나무시장까지 와서 점심을 해주고 갔다. 추운 겨울엔 국밥을 잘 끓였지만 정 많은 노부부는 국 냄새를 맡고 곁으로 몰려드는 나무꾼들을 외면하지 못하고 국을 좀 더 끓여줬다. 서씨의 권유로 김씨 할머니는 부창부수(夫唱婦隨)하기로 작정한다. '구루마' 한 쪽에 국거리가 담긴 작은 무쇠솥을 싣고 집과 나무시장 사이를 왕래했다. 국일의 출발은 그토록 허름했다.

국일이 처음 태동한 한일극장 옆 공터는 '음터'로 불린다. 공터 왼편 수백년된 회나무가 유명했는데, 경상감영시절엔 교수대로 활용돼 '흉목(凶木)'으로 터부시됐다. 회나무는 6·25 직전 군정청에 의해 베어진다.

40년대 국일은 번듯한 식당이 아니었다. 간판도 없었다. 단골에겐 그냥 성당동 할매, 서씨 할배집으로 통했다. 지금 같은 개별 의자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냥 돌멩이 두 개 위에 송판을 놓고 여러 명이 함께 앉도록 했다. 방도 2개가 있었고, 마당엔 늘 무쇠솥이 두 개 놓여 있었다. 서씨 할아버지는 고령군 다산면에서 올라 온 따로국밥용 '다끼파'를 서문시장에서 사와 틈만나면 다듬었다.

47년쯤 칠성동에 대성연탄 저탄장이 생긴다. 장작보다 훨씬 화력이 좋은 연탄이 국밥집에서 각광을 받는다. 몰래 훔쳐 온 석탄 가루는 찰흙, 폐유 등과 뒤섞여 음반으로 말하면 해적판 같은 '야미(闇)연탄'이란 이름으로 식당가에 불법유통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국일 바로 옆에 남일동 사창가(현재 미도백화점 자리)가 형성돼 있었는데 아침이면 해장 손님을 위해 직접 냄비를 들고 국을 사러 온 홍등가의 여인들도 있었다.

국일 따로국밥은 6·25의 히트작이다. 타지 피란민들이 들끓기 시작하고 전시 특수를 노린 상인들의 행보가 빨라진다. 국립극장으로 변한 한일극장엔 연일 유랑극단 배우들로 들끓는다. 국일도 덩달아 호황을 누릴 수밖에 없었다. 황금심, 남인수, 허장강, 구봉서, 배삼룡 등 악극 배우들도 거의 매일 국일을 찾았다. 여름철엔 주로 교동시장 내 강산면옥, 부산 안면옥 등으로 갔지만 겨울엔 국밥집 만한 곳이 없었다. 곱상하게 생긴 여배우들은 국에 밥이 말려진 국밥을 멀리했다. 사실 나무꾼만 찾았던 40년대는 국에 밥을 만 국밥 단일 메뉴가 문제될 게 없었다. 그런데 각계각층 피란민들이 손님이 되면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한다.

특히 식성이 까다로운 여배우들은 국밥에 유달리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켰다. 주문할 때도 "할머니, 전 국하고 밥하고 진짜 따로 주세요"라고 특별주문해 남자 배우들로부터 핀잔을 먹기도 했다. 가끔 갓 쓴 지체 높은 양반때문에 낭패도 당한다. "이게 상놈이나 먹는 국이지." 그런 소릴 듣고나면 노부부는 맥이 풀린다. 김씨 할머니도 더 긴장한다. 실수를 안하기 위해 손님들이 들어오면 늘 "따로잉교"라고 메뉴를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잡기장에 따로만 먹는 손님 이름도 별도로 적어뒀다. 대구로 온 피란민들 사이에 그 국밥이 점차 '국일 따로'로 공인된다. 결국 국일은 피란민들 때문에 국과 밥이 분리된 '따로'란 유별스러운 메뉴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만들게 된다. 그런데 이런 질문도 할 수 있다. 부산도 피란지인데 왜 하필이면 대구만 따로인가. 그건 당시 부산 국제시장 인기 음식이 돼지국밥인 탓이다. 돼지국밥은 국과 밥을 따로 내면 맛이 별로다. 당연히 국과 밥이 한데 섞여있어야 했기 때문에 '따로 소동'이 터질 리가 없다.

피란민들이 상경하자 국일도 비좁은 한일극장 옆 나무시장 시절을 청산하고 현재 흥국생명 자리로 이전한다. 그때 서씨 할아버지도 어엿한 식당 주인으로 처신한다.'국일'이란 상호를 직접 붓글씨로 적는다. 국일 간판은 1965년부터 정식으로 달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금복주가 그해 4월 1일부터 시내 보신탕집, 유명 식당 등에 홍보차원에서 간판달아주기 판촉전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금복주가 국일을 그냥 놔둘 리 없었다. 서씨 할아버지가 '나라에서 제일 맛 좋은 국밥집'이란 뜻으로 '국일(國一)'을 상호로 정한다. 이때 금복주 측의 요청에 따라 맨 왼편에 붉은 페인트로 금복주, 맨 오른편엔 복영감 마크가 들어간 함석 간판을 달게 된다. 이 무렵 금복주 간판 제작은 대구시 중구 동문동 동인네거리 근처 백마사 정규환 사장이 도맡았다.

국일은 대구은행 중앙로지점 서편 흥국생명 자리(단층 슬레이트조, 크기는 150여평, 8개 방에 홀 갖춤)에서 10년 머물다가 73년 흥국이 대구 사옥을 짓자 골목 안 현재 한일따로 건물에서 약 30여년간 영업을 하다가 7년전 지금 자리로 이전한다. 전성 시절 웃지 못할 일도 생긴다. 통행금지 해제 30분전에 문을 두드리는 간 큰 사람이 있었다. 야통 단속 경찰들이었다. 첫 국을 맛보기 위해 야근을 끝낸 중부경찰서 경찰과 경찰 출입기자 등도 가세했다. 그들로선 특권 아닌 특권이었다. 자연스럽게 국일은 다른 곳보다 약 30분 먼저 통금이 해제될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 국일은 한 마디로 술꾼들의 '해장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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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국밥(중)-대구는 제각각

따로국밥(중)-대구는 제각각 요리 맛집 정보 2008. 9. 10. 15:00

따로국밥(중)-대구는 제각각

육개장-우거지 선지국-선지 육개장, 조리법은 통일 안된 채 이름 같이 사용
주문방식에 의한 분류…식재료 차이
 


 
대구 따로국밥 조리법과 내용물은 크게 세갈래로 나눠진다.
벙글벙글식당의 따로국밥(주재료:사골육수+파+무+양지머리)
대덕식당 따로국밥(주재료:사골육수+우거지+선지)
국일식당 따로국밥(주재료:사골육수+파+무+선지+양지머리).  

 
# 해부! 따로국밥

3.14….

따로국밥 해부가 꼭 원주율, 즉 파이(π)값 끝자리수 찾는 것만큼 어렵기만 하다. 인류학자들에 따르면 국에 밥을 말아 먹는 건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한다.

국은 우리말이고 한자로는 갱(羹)·학()·탕(湯)으로 불린다. 작고한 대구 출신 이성우 교수(영남대 가정대학장, 한양대 식품영양학과 교수 등 역임)의 주저 '한국요리문화사'(교문사·1985년)에 따르면 갱은 채소가 섞인 고깃국, 확은 채소가 섞이지 않은 고깃국이라 언급돼 있다. 이 기준법에 따르면 육개장, 해장국, 보신탕 등은 갱으로 분류되고 곰탕, 설렁탕 등은 학쯤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대구 따로국밥은 따로 국밥 형 갱에 분류된다. 학과 갱에서 수분량이 감소되면 점차 전골→찌개→찜 순으로 발전해나간다. 서양에선 갱과 학을 합쳐 '수프'라 통칭한다. 일단 국→국밥→따로 국밥 순으로 분석해 본다.

국은 국밥에서 밥을 뺀 것이다. 국밥은 국과 밥이 한데 섞인 상태이다. 따로국밥은 반대로 국과 밥이 따로 떨어져 있다. 국은 밥을 위해 만들어진 주반찬으로 곰탕, 설렁탕, 추어탕, 복어탕, 대구탕, 보신탕, 황태탕, 생태탕, 삼계탕, 매운탕, 고디탕, 미역국, 재첩국 등 그 종류만도 수백종에 달한다. 이런 국에 밥을 말면 그게 국밥이다.

그런데 우린 언젠가부터 국밥을 쇠고기·돼지 국밥으로 한정시켜려 한다. 그래선 안된다. 곰탕도 밥과 국이 따로 나오면 곰탕 따로 국밥인거고 처음부터 밥을 말면 곰 국밥이다.

국밥은 국과 밥의 결합형태를 가리는 분류기준이다. 따라서 메뉴로 제시할 땐 '돼지 국밥'하는 식으로 국 종류를 알려주는 접두사를 붙여줘야 한다. 대표적인 게 콩나물 국밥, 돼지국밥, 선지해장국밥, 굴국밥 등이다. 설렁탕은 국밥형, 따로국밥형 두 종류가 있다. 서울 이문 설농탕은 국밥형이고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설렁탕집인 종로초등 뒷문 옆 부산 설렁탕은 밥을 말지 않은 따로 설렁탕이다.

문제는 '대구 따로국밥'.

대구시가 1997년 시내 따로국밥 전문 취급업소 21곳 중 국일, 벙글벙글, 대덕, 교동, 대구전통따로, 한우장을 국밥 전문 향토음식점으로 선정했다. 그런데 그 따로국밥이 타지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든다. 전주 비빔밥, 콩나물 국밥은 조리법이 통일돼 있다. 어디서 먹어도 그 맛이다. 하지만 대구 따로국밥은 식당마다 식재료와 맛이 다르다.

40여년 역사의 공평동 벙글벙글은 스스로 따로 국밥집이라고 불리는 걸 원치 않고 그냥 '대구 육개장집'으로 불리길 원한다. 거긴 선지가 안들어가고 그냥 사골을 곤 육수에 파와 무만 들어간다. 53년 역사를 가진 중구 시장북로 옛집과 최근 생긴 체인점 온천골 가마솥 국밥도 한 항렬이다.

하지만 서울 사람들은 왜 그걸 육개장이라 하지 않고 따로 국밥으로 고집하는지 의아해 한다. 참고로 서울 육개장엔 고사리와 계란이 추가된다. 벙글벙글도 처음엔 육개장이란 말만 사용했지만 대구 따로국밥이 워낙 강세라서 장사를 위해 따로 국밥이란 말을 차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스로 향토식당이길 거부한 옛집만 옥호 위에 육개장이란 말을 달았다. 국일, 교동, 대구, 한우장은 선지가 들어간다는 점에서 벙글벙글·옛집과 다르다. 파와 무, 양지머리 대신 우거지만 사용하는 대덕식당과도 다르다. 대덕도 따로국밥이란 말 대신 선지해장국을 선호한다.

결국 대구 따로국밥은 제각각이다. 크게 보면 대구식 육개장, 우거지 선지국, 선지 육개장 등으로 3분된다. 육개장이란 쉽게 개고기 대용의 쇠고기 국으로 이해하면 된다. 한땐 대구식 육개장이 '대구탕(大邱·代狗湯)'으로 불리기도 했다. 광복 직후 절대적 인기를 얻었던 만경관 맞은편 청도 해장국은 대덕식당과 비슷한 반면 청도는 된장을 넣지만 대덕은 그렇지 않다.

사실 대구 따로 국밥은 조리법이 아니고 주문 방식에 의한 분류법이다. 국일 전엔 따로 국밥이란 말이 없었다. 그냥 국밥으로 통칭됐다. 그런데 그걸 싫어하는 사람 때문에 따로국밥이란 광복 직후 대구의 한 따로 식당을 찾은 양반이 국에 밥을 말아 나온 국밥을 쉬 먹지 못하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다. 왼편 식탁 손님들이 따로 국밥을 먹으며 즐거워하는 모습과 대조적이다. 이런 예상치 못한 따로 국밥 파(派) '어른'들 덕분에 대구 따로국밥이 탄생된다.
 
 
 
 
대한민국 해장국 1번지로 불리는 서울 종로구 피맛골 초입. 
 
 
새 메뉴가 탄생된 것이다. 그 메뉴가 태동한 국일은 따로국밥 본향이 됐고 자연 대구식 육개장을 상징하는 고유명사로 둔갑한 것이다. 그런데 타 지역에서도 경상도 사람 때문에 따로국밥이란 말을 맘대로 이용했다. 물론 대구 따로국밥과 스타일이 달랐다. 브랜드를 도둑맞았지만 그 누구도 정식으로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이제 따로국밥에 제 이름을 부여해야 한다. 조리법에 대한 기준과 원칙이 정해져야 한다. 아직 학계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일단 따로국밥 식당 관계자와 당국자들부터 앞장서야 한다.

대구 따로국밥의 본명은 뭘까? 대충 '대구따로' '따로'로 압축된다. 선택은 공청회 등을 거치면 될 것 같다. 30년전 국일따로는 한 그릇 95원인 '따로'란 메뉴를 사용했지만 지금은 변별성이 부족한 따로국밥이란 메뉴를 사용하고 있다. 국일측도 따로로 돌아갈 모양이다. 관계자들끼리 논의를 잘 하면 합의점도 도출될 법하다. 일차적으로 대구시 등이 전국적 홍보를 하고, 2차적으로 대구시 예산으로 메뉴판과 간판 교체작업을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조리법까지 통일할 필요는 없다. 국일식 따로, 벙글벙글식 따로, 대덕식 따로로 특화시키면 된다. 물론 식당 앞이나 홀 한 쪽에 그 집 따로의 특징과 조리법을 공개해도 좋을 듯 싶다.


서울 종로지역 국밥집의 도전

"국에 밥 안말면 따로국밥이지…왜 대구 것이냐"

#해장국 골목 1번지 서울 피맛골

코털까지 얼어붙는 서울 세종로의 밤. 교보문고 동편 출입문 맞은편 피맛골 안내판이 '장명등(長明燈)'처럼 따스하게 보인다. 차량 경적소리와 생선 굽는 냄새, 가마솥에서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김, 24시간 편의점과 빌딩 불빛이 그윽한 앙상블을 빚어낸다. 혈관처럼 깔린 '미로(味路)' 같은 좁다란 골목 안에선 미각도 기운을 받는다. 1㎞ 남짓한 피맛골 골목, 서울 식도락가들에겐 '청진동 해장국 골목'으로 유명하다. '피마(避馬)'란 말은 예전 양반들이 경복궁으로 등청할 때 행인들이 잠시 말을 피한다는 데서 유래했는데 현재 교보문고 동편 종로1가에서 인사동을 거쳐 종로 3가 YMCA까지 이어지며 대구 종로 진골목, 계산동 뽕나무 골목에 비견되는데 요즘 재건축중이다.

대구에선 중구 전동 따로 국밥이 '대빵', 서울에선 종로구 피맛골(청진동) 해장국이 '대빵'인 시절이 있었다. 지금 피맛골 언저리에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종로구 공평동 이문 설농탕을 비롯해 반세기는 족히 넘었을 것 같은 종로구 청진동 한일관(한정식)과 선지 해장국의 원조격인 청진·청일옥(선지 해장국), 종로구 인사동 YMCA 옆 골목 안 시골집(안동 장터 국밥)과 그곳에서 분화한 사동면옥(국밥), 종로구 돈의동 영춘옥(꼬리 곰탕), 중구 을지로 2가 판코리아 골목안 이남장(설렁탕), 을지로의 하동관(곰탕), 강남으로 건너 뛴 역삼동 곰탕집 장도리….

그 판세가 대구와 닮은 꼴이다. 피맛골 언저리 국밥집이 대구은행 중앙로지점 옆 국밥집과 비교된다. 도심에서 좀 벗어난 강남의 장도리가 남구 앞산 안지랑골 초입 대덕식당처럼 후발주자로 맹위를 떨치고 있다.

피맛골 식당 주인들을 만나 넌지시 대구 따로국밥에 대해 운을 뗐다. 알긴 알지만 다들 따로국밥이 도대체 어떤 성격의 국밥인지 의아해 한다. 한마디로 대구 따로국밥이라고 해서 유별난 게 뭐냐고 반문하며 대구가 독점하려는데 제동을 건다. 종로구 L식당의 한 조리사 왈, "국에 밥을 말지 않으면 모두 따로 국밥이 아니냐, 따로 국밥이 어떻게 한 도시를 대표하는 음식이 될 수 있냐"라고 볼멘소릴 한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교보문고로 갔다. 음식 관련 코너에 들러 수십 권의 음식 관련 책을 일별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확인됐다. 몇몇 교수가 펴낸 조리학 경상도 음식 편을 읽었는데 따로국밥이란 말 자체가 언급되지 않았다. 홍보 부족일까, 교수들의 관심 부족일까. 대구 따로국밥, 일관되고 표준화된 홍보지침이 마련돼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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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국밥(하)-청도집

따로국밥(하)-청도집 요리 맛집 정보 2008. 9. 10. 14:58

따로국밥(하)-청도집

하루, 딱! 200인분만 끓여, 지각 손님들 '주방 습격'
단골 거지엔 1년에 한번씩 밥값 지불 요구 "굶주림 채우는 인정따로…염치교육 따로"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사진은 한겨레신문에서 퍼온 따로국밥 사진 ]

 
5년 전 대구 따로의 전통을 잇기 위해 경산 영남대 근처에서 문을 연 가마솥 국밥 온천골 상인점 주인 김용태씨(60)가 참·감나무 피목을 아궁이에 넣고 부뚜막에 걸린 전통 가마솥에 담긴 국을 정성스레 끓이고 있다. 
 
"이노무 짜식, 청도집 국 사오라캤지, 누가 청도관 꺼 사오라 카더나."

"아부지예, 내가 보이께 마 그 국이 그 국이데예."

"뭐라카노, 니가 국맛을 우예 아노. 청도관은 국기름이 벌겋게 응겨있어 딱 질색이다."

광복 직후 어느날 아침, 대구시 중구 남산동 골목에서 흘러나온 한 부자 간의 대화 내용이다. 그 무렵 자식들은 공부는 뒷전이고 아버지 심부름이 큰 일이었다. 술 심부름 아니면 술국 심부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침 나절 냄비들고 술국 심부름가는 아이들의 행렬이 볼 만 했다. 아버지께 혼이 난 남산동 모씨 아들, 깜빡하는 바람에 청도집으로 가질 않고 집에서 가까운 청도관 해장국집으로 간 것이다.

청도집과 청도관은 국일관(현재 국일따로를 그땐 일부러 그렇게 부름. 실제 국일관이란 고급요리집도 45년 동문동에서 영업했다)과 함께 광복 직후 대구의 3대 해장국 집으로 주름잡는다.

일제 말엽 문을 연 청도관은 전통 대구식 육개장을 빚었고 청도집은 선지우거지 해장국 스타일이었다. 청도관은 현재 중앙파출소 서편 약전골목 초입 왼편에 있었고, 청도집은 처음엔 만경관 동편에 있다가 나중에 교동따로 맞은편 심이비인후과 자리로 옮겼으며, 결국 구 상서여상 맞은편에서 최후를 맞는다.

구한말까진 대구읍성 남문(영남제일관) 앞 염매시장에서 계산성당으로 이어지는 뽕나무 골목 좌우편에 주막형 여관이 우후죽순 포진해 있었다. 거기가 바로 대구 육개장의 발상지이지만 상권 이동으로 광복 직후엔 중구 전동 골목으로 서북진한다.

청도집은 그 시절 술꾼들에겐 '묻지마 술국'으로 통했다. 거긴 숙취를 한 방에 풀어주는 '병원'같은 곳이었다.

이 곳 내력을 잘 알고 있는 강판용씨(85·제3대 대구시의원·전 삼보건설회장)는 "문닫지 않고 지금까지 명맥을 잇고 있었다면 한강 이남에선 가장 오래된 문화재급 국밥집이 됐을 것"이라며 "자식들이 가업을 제대로 못 이은 게 무척 안타깝다"고 증언했다. 청도집은 만경관 동편에 남북 방향으로 길게 자리잡았던 구한말 대구진위대(1907년 8월4일 해산) 주둔지였던 남영(南營·수천평 규모로 화교학교 등을 포함, 경상감영공원보다 더 넓었음)의 허름한 문간방에서 첫 출발했다. 청도집은 처음엔 달동네 주민들을 상대했지만 점차 '도민 해장국집'으로 성장하다가 60년대 초 한일로(현 국채보상로)가 뚫리면서 심이비인후과 자리로 이전한다.

90여평 넓이의 기와집이었던 청도집. 오전에 200인분 정도 국을 끓여서 팔고 나면 더 이상 손님을 받지 않았다. 물을 더 부어 국을 끓인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었다. 18년 전 쯤 타계한 김천 출신의 주인 김씨 할매의 시댁은 청도였다. 대구로 따로 살림을 나와 먹고살 게 없던 청도 할매는 그 시절 식당 여주인들이 다 그러했듯 시댁에서 배운 요리 솜씨만 믿고 식당을 연 것이다.

미원(57년 등장)이 들어가지 않아 맛이 특출날 수밖에 없었다. 청도 할매는 국일관 김이순 할매, 요정 청수원 여주인 김태남처럼 여걸 스타일이었다. 가끔 국이 떨어졌다고 해도, 손님을 밀어내도 유별난 단골들은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주방으로 직행해 찬모들을 기겁케 했다. 독에 받아놓은 물을 한 바가지 넣고 가마솥 주변에 눌어붙은 시래기, 우거지, 근대를 주걱으로 긁어모아 내일 국끓이용 고기 몇 점 섞어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국요리를 했다. 그 시절에만가능했던 인정어린 광경이다. 당시 가마솥은 3개, 새우젓으로 담근 깍두기 맛이 워낙 깊고 시원해 국 없이 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우는 손님도 있었다. 할매는 자주 가마솥 자랑을 늘어놓았다.

"우리 가마솥에 기름이 하도 많이 묻어 있어 물만 넣고 끓여도 대구 사람 반은 충분하게 믹일끼라."

70년대 중반까지 깡통든 거지들이 청도집을 자주 찾았다. 하지만 그들은 '말벌집'이었다. 잘못 건드렸다간 예상치 못한 봉변을 당할 수 있었다. 당시 식당 주인들에겐 거지와 상이군경은 박절하게 못 대하는 불청객이었다. 청도 할매도 그걸 감지하고 식은 밥에 국을 듬뿍 담아주었으며 파워있는 거지에겐 별도 자리까지 마련해줬다. 하지만 '거지근성'엔 매정했다. 1년에 한 번 정도는 꼭 밥값을 내도록 유도했다. 거지도 염치가 있어야 먹고 살 수 있다는 걸 가르쳐 주고 싶어서다. 그렇게 길들인 걸인들 중에 훗날 대오각성, 청도해장국 노하우를 전수해 식당 주인으로 변신한 사람도 있었다.

선거철이면 반월당 신민·민주당사 당원들의 '사랑채'였다. 74년 12월27일 덕산동 반월당 신민당 경북지부당사 현판식 참석차 대구에 온 김영삼 총재가 이틀간 상이군경회원들에 의해 숙소인 금호호텔(현 아미고호텔)에 감금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때 대구에 온 전국 기자들과 신민당원, 정보 형사들이 철야의 피곤한 몸을 푼 곳도 청도집이었다.

청도집 해장국에는 사골 곤 육수와 근대, 우거지, 시래기, 동배추 등과 선지, 고추기름, 콩나물, 양념으로 마늘과 된장 등이 가미된다. 전체적으론 서울 청진동 해장국과 전주 콩나물국밥, 시래깃국, 육개장이 절충된 스타일이었다. 그땐 기름이 인기였다. 없어서 못먹었다. 청도집은 청도관과 국일관에 비해 벌건 기름 기운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청도집 영업은 보통 오후 3시 정도면 끝이 난다. 그렇기 때문에 오전에 국밥을 먹으려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100명 이상 손님을 동시에 수용할 수 없어 청도집 할매는 쌍둥이 아들이 경영하던 명문다방의 테이블까지 식탁으로 활용했다. 주방에서 퍼담은 국밥을 다방으로 배달하는 모습이 볼 만 했다.

한 시절을 풍미했던 청도집, 하지만 그 종말은 비극적이었다.

'식당 해서 번 돈 남편 아니면 자식이 탕진한다'는 옛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심덕 좋은 청도 할매가 어렵게 모은 자산은 안타깝게도 쌍둥이 아들의 사업 자금으로 들어간 다음 사업 실패로 날아가고 만다. 이사간 청도집도 경매에 넘어가고 말았다. 청도집은 이후 심이비인후과 측에 팔려 철거된다.

쌍둥이 아들은 단골들의 압력(?) 때문에 청도집을 살리려 구 상서여상 맞은편 오모 내과 동편 골목 안에서 제2의 창업을 했지만 2년도 안돼 문을 닫고 만다. 거리엔 국밥보다 더 맛있는 음식이 폭증했다.

청도 할매의 손맛은 누가 답습했을까. 취재 결과 남구 그랜드호텔 뒤편 찜 전문 일송정과 남구 대명9동 한정식집 일송명가의 한 관계자에게로 흘러들었다. 그 식당의 한 관계자가 청도 할매 며느리로 들어간 것이다. 또 청도집 주방 찬모에게서 국 끓이는 법을 배운 강봉업씨가 27년 식당 경험을 앞세워 99년 예전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청도 해장국집을 연다. 이 집은 청도식 해장국을 끓이지만 식재료로 시래기를 선호한다. 요즘도 가끔 몇몇 노인들이 그때 청도집 시절을 못잊어 여길 들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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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개장 전문 대구 '옛집'

육개장 전문 대구 '옛집' 요리 맛집 정보 2008. 9. 10. 14:40

육개장 전문 대구 '옛집'

"덧칠 안한 맛" 40년간의 고집
대파의 흰뿌리·무로 국물, 소피·고사리 안넣어 '깔끔'
미로같은 시장북로에 위치, 4칸의 방안 "손님들 빼곡"


사용자 삽입 이미지

 
국밥은 주막식과 장터식 두 종류가 있다. 이젠 그 구분도 애매하고, 소고기 국밥으로 통합된 듯 하다. 물론 곰탕, 설렁탕, 갈비탕도 국밥에 포함된다. 쉽게 말해 주막 국밥은 '시래기국'을 닮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는 주막이 시들해지면서 시장 곁으로 모여들고 소고기가 많이 섞인 육개장 스타일의 '장국밥'으로 변형된다. 일반인들은 육개장과 소고기 국의 차이점을 궁금해 한다. 하지만 일치된 학설은 없다. 다만 육개장 국물은 통상 사골로 만들고, 소고기 국은 소뼈 대신 양지머리를 사용한다고 보면 된다. 소고기 국은 예상치 못한 손님이 들이닥쳤을 때 1시간 내 후딱 끓일 수 있어 경상도 주부들이 선호한다. 소고기 국엔 녹두발, 토란 등도 가미된다. 물론 대구 따로국밥은 '육개장'분과에 속한다. 지금 간단하게 끓여 먹는 소고기 국은 대구따로국밥과는 조금 차이가 난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엄격하게 분류하기 힘들다. 표준 요리법이 주방마다 제각각인 탓이다.

대구의 경우 주막식 국밥은 청도집(대구시 중구 종로 심이비인후과 자리)으로 명맥이 이어지다가 사라졌고, 장터국밥은 국일 식당과 옛집, 벙글벙글 등이 각기 다른 스타일로 전수하고 있다. 일본과 달리 우리는 그렇게 오래된 국밥집을 갖고 있지 못하다. 주인이 바뀌지 않고 혈족이 대를 이어 최소 5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국밥집은 눈을 닦고 찾아봐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식당문화가 광복 직후 본격화됐기 때문이다. 전국 3천여군데 식당을 두루 섭렵하고 '2000년 한국의 음식명가 1천300집'이란 음식기행 가이드북을 펴낸 김순경씨(64)는 주막식 국밥의 대표격을 경남 의령경찰서 옆 '종로식당', 장터국밥은 의성읍 의성 큰 장터 한 켠에 50여년간 자릴 잡고 있는 소머리 곰국 전문 '남선옥'을 꼽았다.

종로식당은 의령의 터줏식당 격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남해고속도로 공사 현장 방문차 이 식당에 두 번이나 다녀가고, 전두환 대통령도 고향을 다녀갈 때 들러 '대통령 국밥집'으로도 불린다. 60여년째 종로식당을 지키고 있던 이봉순 할머니는 최근 타계했고, 현재 며느리 송영희씨(42)가 2대 주인으로 활동중이다. 이곳은 소뼈를 끓이지 않고 양지, 갈비살, 뱃살을 삶아 국물을 만든다. 특이한 점은 대구 육개장과 달리, 대파 대신 콩나물과 설렁탕용 쓴 쪽파가 고명으로 올라가 꼭 콩나물 국 같다. 이런 스타일은 요즘 장례식장 용으로 많이 유통되고 있다.

대구시에 의해 향토 따로국밥집으로 분류되지는 않았지만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국밥집이 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게 중구 시장북로 육개장 전문 '옛집'이다. 서문교회 북측 골목 미싱가게 뒤편에 자리한 50여평 규모의 이 허름한 국밥집은 일반인들에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찾기도 힘들고 별도 주차공간도 없다. 게다가 밤에는 국을 팔지 않고 낮에만 그냥 끓인 국을 팔기 때문에 단골만 찾는다. 하지만 1960년대만 해도 달성공원 초입 나무시장에 나왔던 마부는 물론, 국맛때문에 지역 명사들이 자주 출입했다. 구자춘 도지사, 박재홍·김종기 국회의원을 비롯해 서대구세무소, 전매청 직원, 심지어 동산병원 환자들까지 붐볐다.

처음부터 육개장을 판 건 아니다. 1대 주인 차천수 할머니(1995년 84세로 작고)는 6·25 종전 직후 먹고 살 게 없어 칼국수를 팔았다. 맏며느리로 들어 온 김광자씨(63)가 육개장으로 돌렸다. 60년대초부터 가마솥을 걸었다. 구절양장 좁디좁은 골목, 하지만 머리에 닿을 듯한 처마를 지나가면 송이버섯 못잖은 국맛이 기다리고 있다.

고기는 양지머리 대신, 기름이 별로 없어 장조림 용으로 사랑받는 사태를 선호한다. 서울 육개장과 달리 고기를 반듯하게 썰어준다. 간을 맞출 때 소금 대신 '지렁'(조선 간장)을 넣는다. 자칫 간수를 빼지 않은 소금을 넣을 경우 국에 쓴 맛이 남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고되어도 장은 해마다 담근다. 방은 모두 4개, 일찍 오지 않으면 앉을 자리가 없어 국을 못 먹는다.

김씨는 요즘 원조 국밥에 일침을 가한다. "원래 진짜가 진짜라고 떠드는 법이 있습니까?"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옛집은 요리 스타일을 변형시키지 않고 있다. 예전 방식 그대로를 사랑하는 단골때문에 지금까지 살아남았는지도 모른다. 김씨는 국에 소피, 고사리 등을 넣지 않는다. 맛에 덧칠을 하지 않겠다는 심산이다. "그걸 넣으면 맛이 깔끔하지 않아요. 오직 대파 흰 뿌리와 무만 갖고 국을 끓인다"고 옛집의 맛을 자랑했다.

옛집 골목은 그 자체가 문화재감이다. 대구에선 가장 허름한 골목, 머잖아 재개발될 것 같다. 하지만 국맛은 낡지 않았다. 옛집 스타일의 국맛을 전수하기 위해 이런 저런 사람들이 기웃거린다. 김씨가 가르쳐 줘보지만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다. 편한 것만을 원하고 자연스러운 맛을 못 내 결국 감미료에 의존하는 것을 볼 때 김씨의 맘도 무겁기만 하다. 김씨는 국밥은 체인점과 궁합이 맞지 않는다고 믿어 체인점 사업 제의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시어머니한테서 물려받은 요리법을 둘째 아들 박무득씨(36)한테 전수시키고 있다. 박씨는 대학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했으며, 방촌시장에서 육개장을 팔다 여의치 않아 현재는 대구백화점 근처 한 식당 주방장으로 일하고 있다.

옛집 주방도 시대의 흐름을 외면못한다. 87년부터 가마솥이 사라지고 양은솥이 등장한다. 70년대형 부엌 타일, 양은 솥, 50년 넘은 놋 종지, 니스를 칠해 반들반들한 장판, 툇마루에 앉아 파란 하늘이 한 움큼 보이는 퇴락미가 국맛을 더해준다.


한일관 貰 못받자 건물주가 운영, 은행원 단골 많아…한때 국일이 입주

◇한일 따로국밥집

대경음식포럼(회장 박진환)이 2명의 따로국밥 장인을 초청해 지난해 12월19일 따로국밥 재현 행사를 가졌다. 주인공은 최수학씨(67)와 구동운씨(63)였다. 70∼78년 최수학씨는 대구 불고기 1번지 계산동 '땅집' '남포집' 등의 주방장을 역임하고 '한일따로'에서 일을 했다. 한일따로 옆 '신일관'엔 구씨가 포진했고 후에 국밥, 냉면, 만두, 불고기 등 30여가지 각종 한정식 요리 전문 '대구분식'(1970년 1월7일 대구백화점 주차장 자리에서 개업), 80∼89년은 '제주가든' 주방장으로 있었다.

한일따로도 '족보'가 있는데, 국일따로의 그늘에 가려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대구은행 중앙로 지점(구 대구은행 본점) 옆 골목 안에 자릴 잡은 한일따로. 예전엔 그 자리에 요정 '한일관'이 있었다. 한일관은 광복 직후 백모씨가 경북도 공무원과 은행원 등을 겨냥해 문을 열었다. 그런데 60년대 후반 산격동 현재 장소로 이전하면서 단골 공무원들을 뺏겨 존폐 위기에 놓인다. 집세를 낼 형편이 못되자 건물주였던 김경환씨(작고)가 백씨를 무궁화 백화점 쪽으로 내보낸 뒤 자신이 직접 한일따로를 시작한다. 한일따로는 입지조건이 너무 좋았다. 동편에는 당시 한국은행(서울신탁은행→서울은행→현재 하나은행)과 외환은행, 대구은행 본점이 진을 치고 앉아 점심 때가 되면 은행원들이 많이 찾았다. 그뒤 한일따로는 1년6개월 정도 '삼한따로'로 영업을 하다가 흥국생명 대구지사가 사옥을 짓는 바람에 쫓겨난 국일따로한테 공간을 내준다. 국일이 30여년간 한일따로에 입주해 있다 97년 현재 장소로 이전하자, 한일따로의 2대 사장 김영일씨(63)가 97년 다시 영업을 시작했다.

한일관 옆에 자리 잡았던 신일관은 1960년쯤 문을 연다. 2층 기와집인 신일관의 방은 모두 17개였다. 당시 카운트가 없어 여주인 앞치마 주머니가 전대 대용이었다. 청도 출신의 백남근씨가 개업한 신일관은 계절마다 내놓는 국이 달랐다. 봄·여름엔 보신탕, 가을엔 추어탕, 겨울철엔 따로 국밥과 곰탕이 나와 지역민들에겐 '국백화점'으로 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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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풍 곰탕

현풍 곰탕 요리 맛집 정보 2008. 9. 10. 14:18

현풍 곰탕



"어무이∼, 잘 끓이는 곰국 하나만 팝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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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곰탕의 예 , 사진은 인터넷에서,...]



#'막걸리' vs '청주'

현풍과 나주.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곰탕의 메카. 서울 중구 수하동 조흥은행 뒤편 '하동관'과 꼬리곰탕으로 유명한 종로구 돈의동 '영춘옥'도 대표격이다. 서울식은 나주 스타일이다. 결국 국내 곰탕은 크게 현풍식과 나주식으로 양분된다. 현풍식은 국물이 진하고 누른 빛깔이 감도는 우윳빛인데 반해 나주식은 양념 없는 서울식 소고깃국처럼 국물이 맑은 게 특징이다. 그래서 경상도 사람들이 나주 곰탕을 처음 보면 "국이 왜 이렇게 멀겋냐"며 놀란다. 예로부터 '모양은 전주, 맛은 나주'라 했다. 하지만 나주곰탕이 처음부터 뜬 건 아니다. 1973년 11월 호남·남해고속도로가 개통되자 경상도·수도권 곰탕 마니아들이 이곳으로 와 입소문을 내면서부터 나주곰탕 시대가 개막된다. 대표 주자는 전남 나주시 중앙동 구(舊) 나주시청 근처의 하얀집, 송월동 신(新) 나주시청 근처의 남평집, 노안집이다. 나주는 70년대 이전까지는 곰탕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 '곰국'으로 불렀다. 조리법도 현풍과 달랐다. 나주는 밥을 만 장터 곰국밥 스타일이지만, 현풍은 밥을 따로 내놓았다. 국물에 들어가는 고기도 현풍은 양(소의 위)과 소꼬리 등 부산물을 적극 활용하지만, 나주식은 국물이 탁해진다고 뼈와 부산물은 거의 넣지 않으며 사태와 양지머리를 애용한다. 두 도시 곰탕을 술에 비교하면 현풍은 '막걸리', 나주는 '청주'로 보면 된다.

현재 현풍엔 두 개의 곰탕 브랜드가 있다. 원조 현풍 박소선 할매 곰탕과 현풍할매곰탕이다. 물론 박소선이 원조이다. 현풍을 곰탕 마을로 만든 주인공은 박소선 할매(1919~87). 할매는 대학을 나온 것도, 식품영양학을 배운 것도 아니다. 고령군 개진면 개포리 친정어머니에게 곰국 끓이는 법을 배웠다. 처음엔 곰탕 전문집이 아니었다. 50년대초 정식, 닭백숙 등 손님이 원하는 메뉴를 파는 허름한 밥집이었다.

달성군 현풍면 하리 128의 1, 40여년 전만 해도 거긴 벽촌이었다. 식당 앞엔 먼지 날리는 비포장도로가 자리했다. 손님이라고 해봐야 정미소, 양조장, 면사무소, 주재소(파출소) 직원, 수리조합 직원뿐이었다. 박소선곰탕은 지금과 스타일이 조금 달라 다른 부산물은 거의 들어가지 않고 우족 육수에 밥 말아 김치와 함께 내놓았다. 그때 소는 거의 일소였다. 이들 소의 앞다리 뼈는 지금 사육소보다 골수가 몇 배나 풍부했다. 24시간 이상 골 경우 뼈가 푸석해지고 구멍도 숭숭 뚫린다. 손님들은 에끼스처럼 스며나오는 골분을 쭉쭉 빨아먹었다. 다 먹고 나면 마치 아교풀을 바른 듯 입술이 쩍쩍 붙었다. 그런데 요즘 수입산 육우들은 예전과 달리 골수가 그렇게 풍성하지 못하다.

슬레이트와 판자로 얼기설기 엮은 허물어질 듯한 골방 할매집에도 쨍하고 볕이 스며든다. 구마고속도로(1977년 12월 준공) 공사가 시작됐고, 도로공사와 동아건설 직원들이 박소선할매집을 '함바(飯場·공사장 부속식당)'로 찍은 것이다. 근처에 마땅한 식당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서울로 올라가서 호텔 지배인으로 활동중이던 외아들 차준용씨(64)도 고향에 내려온다. 달라진 면소재지 풍속도를 사업적으로 활용할 묘안을 짜낸다. 박소선은 음식을 머리로 만들어선 안된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어무이, 곰국 하나는 정말 잘 끓이지 않능교. 이제부터 곰국만 팝시다."

자식 이길 부모가 있겠는가. 어머니는 아들의 말을 듣는다. 차씨도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대구로 내려온다. 매일 버스타고 성당동 도축장(1962년쯤 원대동에서 현재 두류수영장 맞은편 롤러스케이트장 자리로 이전)을 오가며 양질의 부산물을 확보했다. 박소선할매집이 곰탕 전문집으로 변했을 당시 곰탕 한 그릇 가격은 1천원. 지금은 8천원. 60년대만 해도 곰탕은 있는 자의 전유물이었다. 가정에선 뼈를 고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독감 걸린 남편이나 수험생 자녀 건강식으로 끓이지 않는 다음에야 엄두를 못냈다. 조리가 힘든 반면 돈이 별로 남지 않아 전문 식당도 태동하기 힘들었다. 고작 따로국밥, 설렁탕이 전부였다.

차씨는 방 안과 출입구에 '곰국 있습니다'란 글귀가 적힌 종이를 몇 장 붙여놓았다. 다들 "곰국이 뭐냐"며 궁금해 했다. 전날 한 솥을 끓여도 다음날 오후 2~3시가 되면 동이 나 버렸다. 밤에 식당을 찾은 현장 인부와 관계 직원들은 국을 먹지 못해 불평했다. 고기를 다량 확보하기 위해 코티나 승용차도 전세냈다.

# 원조 시비

박소선 할매의 원래 식당명은 '일심'이었다. 그런데 단골들은 그걸 무시하고 꼭 "현풍면에 오면 할매집이라면 다 아니 그곳으로 오라"고 일러줬다. 그런 연유로 차씨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일심식당은 졸지에 '할매집'으로 변했다. 차씨는 속이 상했지만 장사를 하기 위해선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일심식당 옆에 '할매집'이란 아크릴 간판을 하나 더 붙인다. 나중엔 '현풍 할매집'으로 변하게 된다. 현풍 할매집이 정식으로 군청에 등록된 것이 70년대 중반쯤이다. 80년엔 대구로 진출한다. 약전골목에 1호 분점을 낸 뒤 사보이호텔 맞은 편 현재 유료주차장 자리에 2호점을 낸다. 94년 앞산에도 분점을 낸다. 현풍 곰탕은 창녕 부곡온천 덕분에 몸값이 더 치솟는다.

80년대에서 90년대로 넘어오던 어느 날 대구지방법원으로부터 현풍할매곰탕이란 상호를 사용할 수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명령을 받게 된다. 같은 동네 사람이 현풍 곰탕 사업에 가세한 것이다. 특허제도를 몰랐던 차씨, 자신의 상호를 지키기 위해 3년 이상의 송사를 벌였다. 결국 얻은 건 원래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고 '원조 현풍 박소선 할매집 곰탕'이란 긴 이름을 갖게 된다.


# 맛의 원천

소뼈 종류만 해도 10여종이 넘는다. 정골(正骨)은 소머리, 사골, 소꼬리이고 나머지는 잡뼈로 보면 된다. 사골은 우족을 말한다. 물론 소머리뼈 등 잡뼈는 설렁탕에 주로 들어간다. 가장 골수가 풍부한 부위는 사골이다. 흔히 사골은 끓여선 안되고 고아야 된다고 한다. 고는 것과 끓이는 게 다르기 때문이다. 끓이는 건 소고깃국처럼 한두시간 양지머리와 같은 정육으로 육수를 내는 것이고, 고는 건 끓이는 시간이 12~24시간으로 무척 길다. 물론 사골은 한번 고고 버리지 않는다. 3번까지 골 수 있다. 농촌진흥청 축산연구소 김진형 박사의 실험(1999년)에 의하면 두번째 육수가 가장 구수한 것으로 밝혀졌다.

현풍은 가마솥 대신 백철 솥을 사용한다. 물도 과감하게 수돗물, 화력은 가스를 사용한다. 가마솥은 관리를 잘 못하면 철 성분이 맛을 감퇴시킬 우려가 있어 꺼리고, 요즘 수돗물은 잘만 끓이면 약수 이상의 맛을 낸다는 것이 차씨의 설명이다. 불도 고기 품질만 확실하다면 굳이 번거로운 장작불을 사용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강조한다. 박소선 곰탕 맛의 원천은 소의 위인 양에서 온다.

양은 펼쳐 놓으면 거의 가로·세로 1m 정도의 크기이고 크게 4부분(양, 절창, 처녑, 홍창)으로 이뤄져 있다. 그런데 내벽을 감싼 검은색 털 가죽 벗기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예전엔 일일이 벗겼지만 10년 전부터는 축산물공판장 근처 직원들이 수고비를 받고 벗겨준다.

솥 안에 넣기 전에 우족은 수세미로 깨끗하게 씻어 뜨거운 물에 넣어 멸균한다. 고기 시작하기 전엔 가장 중요한 절차가 있다. 참기름을 몇 번 휘두른 뒤 덖는다. 누린내를 제거하기 위해서다. 누린내 제거는 곰탕 요리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보통 소금물로 씻으면 가장 빠른 시간내 누린내가 사라진다고 한다. 하지만 완전하게 제거할 순 없다. 그래서 나주에선 무명천 속에 마늘, 양파, 파, 무 등을 넣고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육수 속에 넣어둔다. 현풍식은 참기름이 스며들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나주식에 비해 더 고소한 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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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머리 장터국밥

소머리 장터국밥 요리 맛집 정보 2008. 9. 10. 14:14

소머리 장터국밥


"장터 한켠 情밴 이 맛…살맛 난다" 


 
#장터엔 국밥이 있었다

장터에 가면 없던 식욕도 팽팽하게 되살아났다. 눈 흩날리는 겨울, 종일 펄펄 끓고 있는 가마솥은 손님들에겐 '정(情)의 도가니'같은 것이었다. 투실투실한 몸매의 심성 좋은 아줌마. 큼지막한 손에 잡힌 식칼에 숭덩숭덩 잘려나간 허드레 편육, 찬 보리밥 한 덩어리를 뚝배기 안에 함께 담고 육수를 붓는다. 딱딱하기 이를 데 없는 나무 의자에 앉아 한 그릇 후딱 해치운 손님들의 표정은 더없이 평온하기만 했다. 그 시절 손자들은 왜 하나같이 국밥 속 정체불명의 고기에 기겁했을까. 할아버지는 "요 놈" 하고 머리에 꿀밤 하나 먹이곤 손자가 입에도 대지 않고 한 쪽으로 밀쳐놓은 우랑(소 생식기), 수구레(가죽에서 벗겨낸 질긴 고기), 소 혀, 지라, 허파 등을 대신 먹어줬다.

버릴 게 아무것도 없다는 소. 고면 골수록 구수해진다는 소뼈, 그걸 솥에 모두 집어 넣고 몇날 며칠을 고면 국 맛은 어떨까? 고는 것도 한계가 있다. 한도를 넘으면 되레 맛이 감소된다. 사골의 한계는 네 번이다. 그래서 사골(?)인가. 네번 넘으면 뼈 속엔 골수가 전혀 남지 않아 플라스틱 넣고 고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관건은 뼈와 부산물 고기의 조합. 그런데 그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소머리와 사골과 소꼬리 중 어느 육수가 농밀할까? 1등은 사골, 2등은 소꼬리, 3등은 소머리이다. 곰탕엔 사골, 설렁탕엔 소머리가 제격이다. 물론 갈비뼈, 등뼈, 엉덩이뼈 등 잡뼈류는 곰탕에 원칙적으로 들어가지 않고 설렁탕에만 들어간다. 하지만 지금 이 원칙은 다 깨져버렸다.

종종 음식을 맛이 아니라 돈으로 생각하는 주인들도 꽤 있다. 육수 맛 내려고 미원, 소고기 다시다, 커피용 프리마, 심지어 마요네즈까지 넣는다. 육개장은 모르지만 곰탕과 설렁탕엔 그런 감미료를 넣는 건 음식의 ABC도 모르는 바보같은 짓이다. 보석에 페인트칠한 꼴이라고나 할까. 1956년 화학 조미료가 등장하기 전엔 자연 조미료를 적극 활용했다. 뼈만 고면 육수가 너무 담백해 맛이 없다. 그런 담백 깔끔한 육수맛을 원하기도 하지만 일반인들은 '플러스 알파'가 가미되길 원한다. 그래서 양, 곱창, 간 등 각종 부산물을 함께 넣는다. 마치 블랙 커피에 설탕과 프리마를 넣는 것과 비슷한 이치. 고기 부산물을 고면 그 속에서 감미로운 성분이 스며나와 국맛은 더욱 풍성해진다. 이 풍성한 맛을 인위적으로 제조한 게 바로 '미원'이다. 그렇게 감미로운 맛을 일본에선 '우마미'라고 표현된다. 1908년 일본은 다시마 등에서 추출되는 글루타민산나트륨(MSG)으로 만든 '아지노모도(味の素)'를 개발, 20년대 중반 한국으로 갖고 들어와 매일신보 등에 광고한다.

#소머리 국밥집 의성 남선옥을 찾아서

장터 국밥엔 두 종류가 있다. 돼지국밥과 소머리 국밥(이하 소국밥). 소국밥은 곰탕과 설렁탕 중 어느 계열에 속할까. 설렁탕 쪽이다. 설렁탕은 '뼈의 미학'이 두드러진 메뉴다. 그런데 지금은 고기를 더 강조하다 보니 점차 곰탕 스타일로 변했다. 언제부터인가 장터 소국밥집이 거의 사라졌지만 다행히 경북엔 전국적 장터 소국밥집이 몇 개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게 청도군 풍각읍 풍각시장 내 간판없는 풍각소머리 국밥집(주인 김달마(64)·김소쌍분(52) 내외)과 의성읍 큰장 내 남선옥(주인 안대필(68)·김정애(64) 내외와 장남 안용명)이다. 집단 소국밥촌으로 유명한 곳은 90년대 들어 중부고속도로 곤지암 나들목에서 불과 1㎞ 떨어진 곳에 형성된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 소머리 국밥촌. 곤지암 소국밥 원조는 최미자씨(61)가 경영한 소국밥집이고 한창 땐 10군데가 넘었지만 지금은 원조 최씨가 관리하고 있는 1·2관과 인기 코미디언 배연정씨 국밥집 등 5곳 뿐이다.

육쪽 마늘의 고장, 의성 남선옥 소국밥집을 찾았다.

마늘 철이 아니라서인지, 시장 맞은편에 대형 할인매장이 생겨서 그런지 오후 1시를 넘자 의성읍 큰장은 파장 분위기다. 하지만 남선옥만은 손님이 좀 북적댔다. 그래도 오후 2시만 넘어서면 손님이 거의 들지 않는다. 장날따라 5일마다 문을 열기 때문이다. 하루 전에 장만해 둔 200여인분이 동이 나면 더이상 팔지 않는다. 1960년대 시골 소읍 상점같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식당 안엔 젊은이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흑갈색 격자 창문을 통해 장·노년층 단골이 왼편 사랑채에 엉덩이를 붙인 채 국밥을 먹는 광경이 그대로 보인다. 큰 딸 안홍주씨(40)가 거실과 부뚜막 사이 문지방에 자릴 잡고 어머니 김정애씨와 2인 1조로 호흡을 척척 맞춰가며 국밥을 퍼담는 그림이 더없이 정겹다. 뚝배기를 손님한테 전해주는 장남 안용명씨(38), 그의 부인 차미숙씨는 주방을 지킨다.

남선옥. 처음부터 소머리 국밥집으로 출발한 건 아니다. 광복 직후엔 '색시집'으로 유명했다. 1대 사장 이태조씨(작고)는 오전과 오후에는 배고픈 상인들을 위해 돼지 국밥을 팔았고, 밤에 객고를 풀고 싶은 돈많은 상인을 대상으로 색시들의 웃음을 판 것이다. 마늘 철이 되면 남선옥은 마당 빗자루도 일손을 거들어야 할 정도로 분주하다. 어떤 상인들은 음식 값 대신 마늘 한 접을 주방에 던져주기도 했다. 식성 까다로운 단골들은 자기가 갖고 온 마늘을 호주머니에서 끄집어 내 날된장에 찍어 먹었다. 그래도 주인은 눈총을 주지 못했다. 남선옥 주인은 25년전 안대필씨로 바뀐다. 그는 의성 중심가에서 영천식육식당을 경영했고, 그 노하우를 토대로 남선옥을 소국밥집으로 바꾼다. 남선옥 옥호 역사는 반세기가 넘지만 소국밥 역사는 30여년인 셈.

남선옥 소국밥은 곤지암 스타일과는 사뭇 달랐다. 곤지암은 국물은 사골로 내고 그 물에 소머리를 삶아낸 뒤 소 뼈는 버리고 18근 정도 나온다는 소머릿고기를 썰어 국밥 형태로 넣어준다. 하지만 남선옥은 사골을 사용하지 않고 대신 소머리 뼈를 매우 중요시한다. 대를 이은 안용명씨가 뼈 고는 비법을 간단하게 소개했다.

"소머리 뼈와 잡뼈를 한꺼번에 넣은 뒤 양, 허파, 염통, 지라, 콩팥, 우랑 등 각종 뒷고기도 함께 넣고 끓입니다. 물론 고기는 중간에 건져내죠. 잡 기름도 일부러 걷어내지 않습니다. 굳기름은 오래 고면 차츰 증발하고 식용 속기름만 남습니다. 물론 종일 가마솥을 지켜야죠."

이는 설렁탕과 곰탕을 결합한 남선옥만의 독특한 육수 빚기다. 지난해 안동과학대 식품조리과를 졸업한 용일씨 집안 사람들의 가업잇기, 그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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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동산동 갈비골목

대구 동산동 갈비골목 요리 맛집 정보 2008. 9. 10. 13:59

대구 동산동 갈비골목



"큰 불 났어요" 소방관도 착각, 자욱한 숯불연기
"잘 나갈때 하루 황소 7마리 반 팔아"


 
 
# 소갈비 숯불구이의 등장

1962년 어느 날 오후, 한일극장 바로 서편에 자리잡은 대구소방서 소방관 대기실. 신참 소방관이 부리나케 대기실로 들어왔다.

"큰일났습니다. 중구 동산동 실골목 근처에 큰불이 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고참들은 하나같이 느긋한 표정이었다. 몇몇 고참들은 신참 말엔 아랑곳하지 않고 실실 웃기까지 했다.

"알았어. 동산동 근처에 불이 난 것 같다고 했지. 가까운 곳이니 굳이 불자동차(소방자동차)까지 출동하긴 뭣하니, 자네가 물통 들고 일단 현장에 다녀와봐."

동산동 연기의 내막을 전혀 알지 못한 신참은 연기나는 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1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 신참이 풀이 죽어 들어와서 고참에게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결과 보고를 했다.

"불은 불인데, 소갈비 불이라서 …."

지금은 해가 져버린 대구시 중구 동산동 대신네거리 동편 코너 옆골목에 위치한 동산동 갈비골목. 거길 지척에 두고 있는 대구소방서는 동산동 갈비골목 석쇠에서 피어오른 연기 때문에 이같은 해프닝을 숱하게 경험한다. 이 골목 주인들이 호시절을 떠올릴 때면 반드시 그 얘기를 무용담처럼 토로했다. 그만큼 장사가 잘 된 시절이 있었다는 우회적인 표현이다.

60년대, 대구에도 가든·그릴·회관 시대가 도래한다. 그곳에 가면 어김없이 맛있는 불고기, 소갈비구이 등이 있었다. 숱한 모임·회식·계·단합대회 …. 대구에 토착 자본이 풍성하게 형성된 덕이다. 북성로 기계공구 골목 등 각종 '골목산업'의 위세는 상상을 초월했다. 70년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만 해도 대구는 한강 이남에선 최고 잘나가는 도시였다. 6·25특수를 고스란히 흡수한 탓이다. 실을 만들고 천을 짜고, 그걸로 양복·양장지를 만들고 옷을 만드는 게 한 공간에서 가능한 도시가 바로 대구였다. 서문시장과 숱한 섬유공장들. 그들 사이에서 각종 실을 유통시켜주는 대구 섬유계의 허브(Hub) 구실을 한 곳이 바로 동산동 실가게였다. 특히 서문시장 포목점과 동산동 실가게는 50년대 한국경제의 심장부나 마찬가지였다. 동산동 동산파출소에서 대신동 네거리에 이르는 길이 전국 최대 '원사(原絲)거리'로 부상한다. 지역은 물론 전국에서 몰려온 숱한 사장과 도매상인들, 그들은 사업 확장과 로비, 사교 등을 위한 자기들만의 특별한 공간이 필요했다. 그 수요에 부응한 게 바로 지난 회에 소개된 불고기 전문 계산땅집과 이번 회에 소개되는 동산동 갈비골목이다.

광복 직후~6·25(한국전쟁)~60년대 보릿고개 때 서민들은 금쪽보다 더 귀하던 소고기를 구워먹을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국으로 끓이면 더 많은 사람이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질보다 양이 우선이었다. 물 한 드럼통에 고기 달랑 한 점이 미덕이었다. 하지만 경제수준이 향상되면서 국밥 마니아들이 점차 불고기·소갈비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이 즈음 "오늘, 나 소갈비 뜯고 왔다"란 말이 특권층을 암시하는 유행어로 자릴 잡는다.


◇ 대구 갈비 1호집 '진갈비'

청도군 운문면에서 태어난 진홍렬씨(70). 그는 동산동 갈비골목의 터줏대감처럼 골목 초입을 지키고 있다. 기자가 오후 3시쯤 찾았을 때 그의 아내 박분순씨(66)가 기자에게 "44년간 갈비에 붙은 살을 펴냈으니 나도 이 분야에서 아마 인간문화재라 해도 과언은 아닐끼라"면서 농담을 던졌다. 기자도 일손을 좀 거들어보았지만 뼈에 붙은 갈비살은 제대로 펴지지 않았다. 갈비살이 떨어지면 손님들은 다른 고길 붙였다고 오해한다. 떨어지지 않게 최대한 길게 펴는 기술은 하루 아침에 터득되지 않는다. 접착제를 부착한 가짜 포천이동갈비 소동도 그런 기술적 제약 때문에 발생한 건지도 모른다.

진씨는 광복 직후 수원 영동시장 내 싸전 거리에서 화춘옥(華春屋)이란 음식점을 내고 56년부터 선을 보인 수원갈비의 명성을 잘 알고 있었다. 수원갈비 1대 주인 이귀성씨가 개발한 수원갈비는 6·25 때 부산 해운대로 전파돼 해운대갈비를 파생시킨다. 해운대 암소숯불갈비도 그런 연유로 태어난 것이다. 하지만 진씨가 현재 자리에서 진갈비를 낼 때만 해도 대구에선 소갈비를 구워먹는다는 게 무척 생소했다. 그는 모험을 걸기로 맘먹고 61년 오픈을 한다. 5년 뒤 태동갈비가 생기고 뒤이어 성주식당 등 16개 업소가 밀집하게 된다. 진갈비는 훗날 원갈비, 태동갈비와 함께 동산동 갈비골목의 3인방으로 20여년간 호시절을 구가했지만 지금 남은 건 진갈비, 예전(구 태동), 먹쇠, 동산, 성주식당 등 6개밖에 없다.

그땐 식육점 주인들이 도축할 소를 공동 구매해 서구 원대3가 내환병원 옆에 있었던 도축장(거기에 있던 신흥산업은 63년 성당못 옆에서 삼익뉴타운 근처로, 다시 북구 유통단지로 옮긴다)에서 고기를 가져왔다. 진씨는 진로 측과 손을 잡고 진로의 '진(眞)'자를 넣어 진갈비로 상호를 정한다.

어둠이 깔리면 대신네거리는 온통 갈비가 익으면서 생긴 연기로 뒤덮인다. 그 냄새가 워낙 구수해 경찰들도 은근하게 업소지도를 핑계로 접대를 받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단속반이 들이닥쳤다. 진갈비가 허가 없이 영업한다고 문제를 삼은 것이다. 대구지법 박헌기 판사는 단속권이 있는 보안과에서 해당 식당들을 대상으로 영업허가에 대한 사전 홍보작업을 게을리한 점을 적시해 무혐의 처분을 한다.

당시 갈비는 1인분으로 팔지 않고 한 대(약 15㎝)씩 팔렸다. 초창기 한 대 가격은 20원이었고 생갈비보다는 양념갈비가 유행했다. 수원갈비는 큼직하게 잘랐지만, 그는 5㎝ 정도로 알맞게 잘라 팔았다. 간장과 마늘, 설탕, 배, 참기름을 적당한 비율로 섞어 갈비양념을 만들어 쟀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재는 시간을 가르쳐주는 이가 없어 숱한 시행착오를 한 끝에 6~10시간이 적당하다는 걸 체험적으로 알아낸다. 또한 고기 속 육즙을 빨리 증발시키지 않고 속까지 은은하게 익혀주는 참숯을 지금껏 고집하고 있다. 10년 전부터는 좀 더 고급인 생갈비가 지역에서 유행하게 된다.

그 시절 갈비 요리의 최대 제약조건은 저온숙성 문제였다. 지금처럼 고기 전용 냉장고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아이스박스에 얼음을 넣고 고길 저장했다. 여름엔 몇 시간만 방치해도 고기가 변질돼 먹을 수 없었다. 단골들의 상에 그 고길 얹을 수 없었다. 그런 정보를 귀신처럼 안 이웃 주민들이 문을 닫을 때쯤 나타나서는 얻어가 물에 씻어 국거리로 활용했다고 한다.

갈비는 잘 숙성시키고, 양념에 잘 재고, 그 다음에 잘 구워야 한다. 특히 구울 때 화력이 약하면 고기 맛이 없어진다. 적당한 화력에서 알맞은 시간 고루 구워야 하는데, 그걸 알고 굽는 손님들은 거의 없다. 주인이 일일이 구워줘야 하는데, 현재 그렇게 못하고 있으니 일단 손님들은 갈비의 진미를 반도 못 가져간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진씨는 "좋은 갈비 만드는 법은 밥 짓는 것과 똑같다"면서 "나쁜 재료를 갖곤 아무리 좋은 요리방법을 동원해도 결국 좋은 맛을 내지 못한다"고 말했다.

진갈비는 지금처럼 전기톱이 없어 초창기엔 도끼로 갈비를 잘랐다. 불편함을 느낀 진씨가 70년대 초 서울의 마장동에 가서 전기톱을 대구에서 맨 처음 구입했다. 지금도 그 전기톱이 식당 한 쪽에 놓여 있다. 어떤 날에는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하루에 황소 7마리 반을 팔아치운 적도 있다. 산림보호 차원에서 당국이 숯불가게에서 참나무 숯을 못 쓰게 하는 바람에 한때 화차용 갈탄으로 고기를 굽기도 했다. 한창 장사가 잘 될 때는 진로소주 영업 책임자가 진로 간판만 달고 장사를 하면 100만원을 무상으로 지원하겠다고 물밑 제의를 했을 정도다. 하지만 이 골목 역시 깔끔한 실내 인테리어, 넓은 주차공간을 앞세운 가든형 숯불갈비집의 등장과 도심교통난 등으로 인해 서산낙일의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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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대창가든

신성-대창가든 요리 맛집 정보 2008. 9. 10. 13:57

신성-대창가든



맛대결의 후반전…뜨거웠던 '후식경쟁' 


 
숯불 갈비집. 롱런하기 어렵다. 요즘처럼 입맛 까다롭고 라이프 사이클이 짧아진 시절엔 10년 버티기 힘들다. 대구에도 지난 40여년 세월 속에 숱한 갈비집이 명멸했다. 30년 이상 역사를 간직한 갈비집은 취재결과 겨우 3개 정도밖에 없었다. 1957년 태동한 계산 땅집 불고기 붐은 동산동 진갈비·태동갈비·사리원 등으로 인해 대신동 갈비시대를 연다. 이 기류는 즉시 70년대 동인동 찜갈비, 80년대 북성로 돼지고기와 양념돼지갈비 시대를 파생시켰다. 현재 진갈비와 함께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숯불갈비집 신성·대창가든은 본식으로 나온 고기 못지않게 불판 볶음밥, 김치와 된장 등 후식의 중요성을 각인시킨 선구자들이다.

# 등심 로스구이 원조 신성가든

1971년 동구 신암동 육교 근처에 막강한 로스구이 집이 생겨난다. 신성가든(현재 SS패션)이었다. 신성은 의성 출신의 초대 사장 장문상(72)·김옥난(72) 부부한테서 외아들 장성운(50)에게로 명맥이 이어진 대구의 첫 등심 로스구이 집이다. 신성은 양념갈비시대에 도전장을 냈다. 77년 쯤 대구은행 신암동 지점 근처, 86년엔 수성구 시대를 겨냥해 수성구 대구은행 본점 동편으로 옮긴다.

신성의 히트작은 생 등심구이와 불판 볶음밥이다. 신성 전만해도 대구에선 곁반찬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불고기국물에 밥 먹는 게 고작이다. 밥에 된장을 곁들인 건 80년대 버전이다. 그런데 신성은 한발 빨랐다. 불판 볶음밥 요리법은 간단하다. 파와 잘게 썬 김치, 참기름이 가미됐을 뿐인데 식당 복인지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불판에 눌어붙은 누룽지 긁어 먹는 맛도 특별했다. 나중엔 불판 볶음밥이 등심보다 더 유명(?)해질 지경이었다.

신성이 등장할 무렵 국내엔 한우 등급시스템이 전무했다. 그 때문에 웃지못할 에피소드가 신성에서 발생한다. 그땐 마블링에 대한 일반인들의 이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대다수 손님들은 기름이 많이 박혀 있으면 저급한 줄 착각했다. 지방이 박혀 있지 않은 사태살류가 고급으로 취급됐다. 하지만 신성은 손님들이 머잖아 마블링 위력을 실감할 것이라 확신하고 일반 정육점이 꺼려하는 지방 가득한 등심을 독점 매입했다. 신성은 불고기와 양념갈비 시대가 곧 끝날 것이라 확신했다. 생등심 하나만 특화시키기로 맘 먹는다. 일반 정육점도 지방질 많은 고길 팔지 못하면 신성에 전화를 걸었다.

신성은 초창기 유행했던 석쇠를 사용하지 않고 구멍없는 무쇠 철판을 사용했다. 또한 숯불을 사용하지 않고 프로판 가스(1974년 대구에 프로판 가스 등장)를 사용했다. 초창기엔 기본 반찬이 지금처럼 풍부하지 않아서 갈비집 꾸려나가기가 무척 쉬웠다. 고작 깍두기, 물김치, 겉절이가 전부였다. 여종업원이 별도로 테이블 서빙을 하지 않았다. 손님 알아서 잘라 먹었다. 하지만 2000년부터 일본식 서비스를 원했다. 고기를 뒤집고 자르고 먹는 것까지 챙겨주길 원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신성의 주 단골은 동국무역, 경북광유, 한진섬유 기사, 경북대 교수 등이었다. 주인 장성운씨는 지금껏 잊지 못하는 단골 한명을 기억해냈다. 바로 얼마 전 타계한 백욱기 동국그룹 회장이었다. 70년대 어느 날 전체 직원 200명 회식 장소가 신성으로 정해진다. 비좁아 동국 전직원을 두 파트로 나눠 2일간 고길 구웠다. 가격이 235여만원이 나왔다. 장인 정신을 앞세워 신성은 고기값을 단 십원도 깎아주지 않았고 그것이 장인정신이라 인정한 백 회장은 애써 비서한테 십원짜리를 얻어 칼같이 계산해 버린 것이다. 백욱기의 스케일과 세심함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고 신성측도 여태껏 그 감동을 기억하고 있다.

# 고성동 대창가든

북구와 서구의 경계선인 태평네거리. 대구종합경기장에서 태평네거리 방향으로 가다 보면 리모델링중인 태평전화국 바로 남쪽에 일제때 건물 한 채가 보인다. 이 건물은 지금은 옹색하기 이를 데 없지만 광복 직후만 해도 1943년 문을 연 KBS방송 총국(현재 태평전화국 자리)과 함께 서대구의 수문장 구실을 했다. 일제 때 헌병대, 광복 직후에는 맹아학교가 됐다가 북구 침산동 경상여고 전신 경희여상이 개교했던 자리로도 유명하다. 한때는 북구 수도사업소, 고물상, 청룡탁구장이 200평 대지 안에 3분해 입주한 적도 있다.

그 건물의 마지막 소유자는 대창가든. 충북 영동에서 손맛 짭짤하기로 유명한 여주인 정채연씨(65)는 대림건설의 경부고속도로 공사 때문에 팔자가 트이게 된다. 난공사로 유명했던 충북 옥천터널과 수십m 고가도로 공사를 따낸 대림측은 정씨를 250여명의 공사장 인부들이 사용하게 될 함바 책임자로 발탁한다. 수소문해 본 결과 그 근처에서 그녀의 음식 솜씨가 수준급이란 걸 알아낸 것이다. 정씨는 68년쯤 현재 기사들이 자주 들르는 개미식당에서 함바를 열었다. 점심 때는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해주었는데 그게 대박이 터졌다. 가끔 양지머리와 대파, 무로 경상도식 육개장도 끓여주었다. 그 식사가 소문이 나 본사 직원들이 현장에 들르면 다른 곳에 가지 않고 함바로 직행할 정도로 음식 솜씨를 인정받는다. 70년 7월7일 경부고속도로 개통 직후 정씨의 사촌언니로부터 연락이 왔다. 대구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퍼모스트 아이스크림 대리점을 맡아 경영해볼 것을 종용한 것이다. 정씨는 4남매를 벌어 먹이기 위해 대구로 진출한다. 처음엔 현재 고성동 대지약국 맞은편 고성마을금고 자리에서 대림식당을 연다. 대림이란 상호는 대림 직원들과의 인연을 잊지 않겠다는 정씨의 배려였다. 정씨는 신암동 아이스크림 대리점과 대림식당 두 개를 동시에 끌고 갔지만 아이스크림 사업은 실패한다.

70년대 중반쯤 본격적으로 숯불갈비에만 전념하기로 맘을 먹는다. 그렇게 해서 얻은 식당이 바로 일제 때 그 건물이었다.

대창은 특히 안동에서 좋은 고기가 많이 나온다는 걸 알고 오전 6시 지배인을 대동하고 안동 도축장으로 갔다. 왕복 5시간 걸렸다. 보통 등심은 세덩어리, 갈비는 열짝 정도 구입하면 차에 가득했다. 물론 외상은 가능한 한 피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현금 결제를 하면 그만큼 진짜 고길 가질 수 있는 확률이 더 높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곁반찬도 토속미를 가득 갖췄다. 그게 장점이다. 초창기 히트작은 장떡과 오이무침이었고 후반부로 가면서 각종 김치와 게장이 인기를 끌었다. 특히 새우·멸치·황석어 젓갈로 만든 청방김치는 미원 많이 들어간 포장김치와 격이 다르다. 담은 후 반년 정도 김치 냉장고에서 숙성시킨다. 끄집어내면 삭은 냄새가 가득하다. 게장도 직접 담근다.

◇대구의 대표 숯불갈비집 현황표
 
식 당
 개업 연도
 폐업 유무
 
계산 땅집
 1957년
 대구 첫 불고기 집/80년대 중반 폐업
 
진갈비
 1961년
 중구 동산동 실골목 존속
 
신성가든
 1971년
 86년 신암동에서 수성구로 이전 존속
 
대창가든
 1972년
 북구 고성동 존속
 
한일가든
 1970년대초
 84년쯤 중국집 아서원에 넘어감
 
제주가든
 1974년
 2004년 폐업/반월당 제주집에서 동인동 제주옥, 1980년 범어동 네거리로 이전
 
오륙도
 1970년대 중반
 88년쯤 폐업
 
부일갈비
 1977년
 83년쯤 폐업
 
한국가든
 1981년
 97년 수성구 만포장 가든으로 개명 이전
 
경북가든
 1980년대초
 폐업
 
한솔가든
 1980년대초
 폐업
 
앞산가든
 1982년
 앞산네거리 근처에서 존속
 
푸른동산
 1980년대초
 2003년 8월 폐업
 
늘봄가든
 1984년
 폐업, 늘봄 예식장으로 변함
 
원도매 불고기
 1980년
 밀리오레 동편 골목에서 존속
 
비원
 1991년
 99년 수성구 전신전화국 네거리로 이전 존속
 
안압정
 1998년
 구미 금오산맥 전신
 
대원군
 2003년
 한정식 수림의 방계 식당
 
가야동산
 1985년
 폐업, 현재 포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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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포장가든-안압정

만포장가든-안압정 요리 맛집 정보 2008. 9. 10. 13:56

만포장가든-안압정


갈비계 '쌍두마차'…'女人天下' 거저 된 게 아니다
 




 
1990년대 후반 IMF 외환 위기와 2000년대 들어 두 차례 광우병 파문으로 80년대 그 많던 가든형 갈비집이 하나둘 이 바닥을 떠났다. 하지만 대구시 수성구 '만포장가든'의 박영희씨(58), '안압정'의 김옥순씨(53)는 업종 변경하지 않고 여인갈비 천하를 구가하고 있다. 그건 결코 '운'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우아한 자태의 백조가 수면 밑에선 분주하게 발을 놀려야 하듯 이들의 일상도 거의 '전투상황'이다. 둘은 만나 보았다. 공통점이 많았다. 박씨는 의성 도리원, 김씨는 충북 영동 출신이다. 둘다 학원에서 배운 음식솜씨가 아니다. 박씨가 81년 대구시 서구에 삼성공원이란 갈비집을 한국가든으로 리모델링 재개업했을 무렵, 김씨는 시집 식구가 꾸려가던 구미시 원평동 해운대갈비집을 인수해 경영 일선에 나선다. 식당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모두 이 바닥에서 한 경지를 개척했다. 대구에 갈비살 문화를 맨처음 퍼트렸고, 사이드 메뉴도 한정식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레스토랑을 경영하다가 고배를 마셨고 갈비집으로 되돌아 온 것도 닮은 꼴이다. 미모의 여걸 스타일, 게다가 도전정신까지 엇비슷하다. 둘은 갈비계에선 경쟁대상이지만 서로를 진정한 프로라고 인정했다. 둘의 삶의 이면이 궁금했다.


#From 한국가든 To 만포장가든

동대구로에서 대봉교 쪽으로 차를 몰았다. 대구시 수성구 수성3가 만포장가든이 보였다. 만포장, 흔전만전, 즉 넉넉하게 부리고 사용하는 모습을 의미하는데 박 사장 인심도 '만포장'급이다.

상당수 손님들은 박 사장이 81년 숯불갈비집 삼성공원을 인수해 지역에서 맨처음 주물럭 등심 붐을 일으킨 한국가든 오너였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한국가든은 80년대초 대구호텔 근처의 오륙도(대표 박국광)와 함께 대구 서부권 숯불갈비업계의 리더 격이었다. 그녀는 의성군 도리원에서 정미소를 경영하던 아버지 덕분에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면서 꿈에 부푼 학창 시절을 보냈다. 무용을 배웠고 타고난 미모때문에 무용가의 길을 밟고 있던 중 기울어진 가세를 살리기 위해 겁도 없이 29세에 갈비집을 열었다.

일단 음식의 격을 위해 호남 출신 주방장을 기용했다. 전라도 여수 출신 김재수씨(52)였다. 그는 한국가든의 1등공신으로 박씨와 25년의 끈끈한 인연을 유지하며 현재 만포장 주방장으로 몸담고 있다.

그녀는 양념갈비시대가 끝나감을 감지했다. 눈여겨 본 건 레스토랑의 스테이크였다. 그걸 꼭 레스토랑에서만 팔라는 법이 없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런 배경을 깔고 주물럭 등심이 태어난 것이다. 등심은 약 1㎝ 두께로 두껍게 썰고 부드러움을 위해 올리브유와 소금만 갖고 하루 이상 숙성시켰다. 특히 82년부터 야간통금이 해제되면서 심야의 한국가든은 영업용 택시 운전사들의 휴게실로 둔갑했다. 선지우거지국을 한 그릇 먹고 비디오가 마련된 별실에서 잠시 눈을 붙이기도 했다.

한국가든은 오픈하던 해 치러진 11대 총선, 박 사장의 여동생 종희씨가 2대 사장으로 나섰을 직후인 93년 서갑 보궐선거 특수도 맛본다. 정호용과 문희갑 진영 선거운동원들은 서구지역의 다양한 여론이 이합집산되는 한국가든을 집중공략했다. 선거 운동원들은 박 사장을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해 읍소 작전을 펼쳤다.

그녀는 89년쯤 반석 위에 올려 놓은 한국가든을 여동생 종희씨에게 물려주고 잠시 외도를 한다. 94년쯤 수성구 황금동 어린이회관 맞은편에 레스토랑 '만남의 광장'을 연 것이다. 대구에서 흔치 않던 바다가재 요리, 통기타·피아노 라이브 음악, 인공폭포에 모카커피와 에스페르소도 선보였다. 하지만 손님들은 격을 원하지 않고 '눅진눅진한' 서비스를 원했다. 그게 싫었다. 개업 2년6개월만에 문을 닫는다. 장고한 결과, 자기 갈 길이 갈비집이란 걸 알고 97년 만포장 시대를 연다. 약 320평 대지에 120평 규모였다. 당시로선 꽤 큰 규모였다.

한국가든 때와 달리 이젠 자신이 모든 걸 챙기기로 맘먹는다. 몇 가지 원칙을 정했다. 고기는 일단 제일 좋은 것, 음식은 내 손으로, 손님 마중과 배웅도 사장이 챙길 것. 그녀의 요리 솜씨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수준이다. 요리학원장 뺨칠 정도다.

우엉전, 쑥버무리, 더덕 튀김, 꽈리고추 튀김, 오이 소박이, 열무김치, 우거지국, 호박전, 갓김치, 새우겨자채 무침, 수수떡, 버섯…. 끝이 없다. 한정식 집을 연상시켜 만포장은 한때 한낮 중년 여성들의 계모임 장소 1순위로 각광받기도 했다. 대구에선 처음으로 웰빙 한우를 가져왔다. 경남 거창군 가조면의 한 농장에서 2001년부터 길러낸 쑥 먹인 '하이쑥 한우'였다. 전두환 대통령도 종로초등 동창생 200명과 된장국, 된장에 삭힌 고추를 곁들여 갈비살을 먹었다.


#웰빙 숯불갈비 신기원 연 안압정

안압정은 지금 전국 갈비업자들이 제일 부러워하면서도 겁내는 '태풍의 눈'이다. '오감(五感) 감동'전략 탓이다. '마음사냥'에 성공한 것이다. 특히'시각(視覺)'을 중시한다. '보기 좋아야 먹기 좋다'는 논리다. 홀은 없다. 모든 손님은 방으로 들어간다. 회식형 갈비집이다. 방 한 쪽 구석엔 작은 정원이 병풍처럼 깔려있다. 꼭 대숲 속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다. 살평상, 오죽(烏竹)과 수련 심어진 항아리, 싸리나무 등 백초의 조화가 남다르다. 안압정에선 아줌마· 아저씨란 호칭이 들리지 않는다. 선생님, 주임님 등으로 바뀌었다.

안압정은 영업보다는 '경영'이란 말이 더 어울린다. 김 사장은 늘 남보다 '반 보' 앞서간다. '안목'탓이다. 구미 해운대갈비, 금오산맥, 수성구 비원 모두 그녀의 작품이다. 김씨는 78년 시집 온 구미시 원평동 해운대갈비집에서 일을 낸다. 그녀의 나이 26세 때였다. 그 식당은 원래 시댁 식구가 꾸려가던 것인데 오픈한지 한 달만에 그녀가 떠맡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식당이 아니었다. 대대적인 수술을 해야만 했다.

맨먼저 '조명 혁신'에 돌입했다. 형광등 불빛이 식당 분위기를 창백하게 만든다고 보고 즉각 햇빛에 가까운 백열등으로 교체했다. 다음은 경직된 식당 조직 타파. 주방장 1인 천하 식당 시스템에 제동을 걸며 식당 정보 공유화를 개선한다. 매주 토요일 밤엔 어김없이 팀장이 모여 분임조 회의를 하고 월 2회 총회를 연다. 한국표준협회 관계자들의 노하우도 빌렸다. 그 노하우가 안압정 식단 표준화를 완성시킨다. 삼성반도체, LG 등 국내 굴지 기업 혁신 프로그램의 하나인 품질관리(QC)기법을 활용한 것이다. 조직도 육부, 영업, 경리, 관리, 교육, 식사, 세척, 조경 등으로 팀제로 나눴다. 종업원이 곧 사장임을 주지시켰다. 식당도 오픈형으로 개조하고 식기도 도자기로 교체했다. 여종업원의 모습은 스위스 알프스 소녀, 친절과 센스는 스튜어디스급으로 격상시켰다. 환한 복장, 환한 미소 전략이 먹혀들었다.

87년엔 계절별 사이드 메뉴 개발에 나선다. 계절별 해조류 현황 분석을 끝냈다. 1주일 두 번 밤 새워가며 삼천포 해안을 뒤졌다. 꽃게 사러 군산 가고, 좋은 김치는 순천 등지서 공수해왔다. 요즘은 가창면 정대 골짜기에서 무공해 야채, 대구 인근 재래시장에서 전통 먹거릴 구해 온다. 식단이 확 달라졌다. 일식집에서도 제대로 갖추기 힘든 돌미역, 고시래기, 돌가사리, 젓갈, 훈제 연어, 홍어, 해삼 내장, 멍게, 해파리 등이 기본 찬으로 얹히는 '안압정 해조종합세트'가 탄생한 것이다.

그 반향은 86·87년 한국표준협회 주최 전국 서비스 부문 대상, 88년엔 세계품질관리 대회 금상 수상으로 드러났다. 이후 주차난 때문에 88년 11월15일 구미시청 근처에 종업원 80명, 540여평 규모의 초대형 구미 금오산맥 시대를 열지만 남편과의 불화로 구미시대를 접는다. 대구로 들어와 90년 수성못 옆에 레스토랑 '상류사회'를 열지만 자기 일이 아니었다. 재차 92년 3월 수성구 만촌동에서 비원 시대를 열었다. 룸은 사랑방형으로 개조하고 해조류에 이어 무공해 야채 버전을 소개했다. 하지만 건강이 악화돼 95년 12월 조카 김명희씨(47)한테 물려주고 잠시 침잠기를 거쳤다가 99년 9월 안압정을 오픈한다. 그녀는 이젠 오직 갈비집뿐이라고 다짐했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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