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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자전거여행 에세이 (2)

김훈 자전거여행 에세이 (2)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05 13:27
김훈 자전거여행 에세이 (2)






 

始原의 힘, 신생의 합창 갯벌은 순결의 역사
풍경의안쪽 - 선재도 갯벌에서

 
시화방조제 위 4차선 도로는 바다를 가로질러 금을 그은 일직선이다. 이 도로를 자동차로 달릴 때, 운전자의 시야 속에서 도로의 전방은 소실점에 닿아 있고 가로등이 바다와 수평선을 토막쳐낸다. 내륙 쪽 인공호수도 바다처럼 수평선을 긋고 있는데, 고압전선을 늘어뜨린 높은 송전탑의 대열이 그 넓은 물을 건너간다. 일직선의 제방으로 막힌 바다와 호수는 가로등과 송전탑으로 구획되면서 소인국(小人國)의 해안풍경으로 백미러를 흘러나간다. 이 도로의 운전자들은 바다조차도 토목구조물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십상이고, 가속기 페달을 세게 밟을수록 이 착각은 심화된다.

경기만, 남양만, 아산만의 해안선은 시멘트 제방으로 막혀 일직선으로 변해간다. 시화방조제, 화옹방조제, 탄도방조제, 남양방조제, 석문방조제, 대호방조제, 삽교방조제가 갯벌을 막았고, 건설 중인 대규모 항만과 염전을 갈아엎고 들어서는 임해공단, 산업단지, 자동차주행시험장, 해안도로, 섬들을 잇는 초대형 교량들이 해안풍경을 직선으로 바꾸어 놓았다. 새로 나온 서해안 5만분의 1지도는 한국토목기술발달사연표와 같고 서해안의 대한민국은 토목국가다. 아직도 살아남은 갯벌은 그 토목의 풍경 사이에 겨우 끼어있다.

대부도 동쪽 선재도 갯벌과 화성시 서신면 갯벌은 방조제와 방조제 사이에서 살아남았다. 선재도 갯벌에서는 연간 20억원어치의 바지락이 잡힌다. 서신면 갯벌에서는 아직도 떠나지 않은 염전들이 초여름의 소금을 긁어 모으기 시작했다.

선재도 갯벌의 조개잡이 역사는 수 만년이 넘는다. 선재도 사매기갯벌, 버드러지갯벌, 앞골갯벌에는 10년전까지 조개무덤 8개가 남아있었다. 경기도 박물관은 그중 2개를 신석기의 조개무덤으로 확인했다. 이 갯벌 마을에서 8대, 300여년의 세거를 이어가는 이승인(55·선재어촌계장)씨에 따르면, 이 신석기 조개무덤은 피라미드 모양으로, 밑동이 150여평, 꼭대기가 10여평, 높이는 10m정도였는데, 그 꼭대기는 전망이 좋고 바람이 시원해서 여름저녁에 마을사람들이 올라가서 밥해먹고 놀았다고 한다. 어느 핸가 양계장에 사료를 공급하는 업자들이 섬으로 몰려와 제분공장을 차려놓고 이 신석기의 조개껍데기를 빻아서 배로 실어냈다. 업자들은 이 섬에서 7~8년 동안 성업을 누리면서 무덤을 다 파먹고 떠났다. 조개무덤은 사라졌고 밑동의 흔적만 남았다. 이승인씨에 따르면 신석기의 조개껍데기는 전부가 바지락이었다고 한다.

선재도 갯벌 어촌계 270가구 어민들은 신석기의 바지락껍데기 무덤이 들어선 바로 그 갯벌에서 지금도 바지락을 잡는다. 굵은 모래와 잔 돌멩이가 많이 섞인 이 갯벌은 호미로 긁으면 버스럭거리는데, 이 굵고 거친 갯벌에서는 신석기 이래 지금까지 바지락 이외의 조개류는 세력을 형성하지 못한다. 수만년동안 갯벌은 온통 바지락뿐이다. 어민들은 썰물에 나가고 밀물에 돌아온다. 물이 들고 나는 날짜와 시간에 따라 여기 저기서 드러나고 잠기는 갯벌을 따라서 어민들은 작업장을 바꾸며 이동한다. 안 봐도 알 수 있거니와, 이 갯벌에서 신석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작업방식도 이와 다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바다의 순환과 갯벌의 자생력이 그 수만년의 세월을 순일하게 버티어내고 있다.

갯벌에는 시간이 쌓이지 않고 시간이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갯벌은 역사를 이루지 않지만, 갯벌은 신생하는 순결한 시간의 힘으로 역사를 넘어선다. 갯벌에서 바지락을 캐는 사람들의 풍경은 제 손으로 먹이를 찾아 거두는 일차산업의 시원적 경건성을 느끼게 한다. 작은 새우 새끼들도 제 몸을 방어하기 위한 갑옷을 입고 태어난다. 새우는 어린조개를 먹고 자라서 가자미에게 먹힌다. 어린조개는 플랑크톤을 먹는다. 어렸을 때는 가자미에게 먹히고 자라면 갈매기와 인간에게 먹힌다. 인간은 고래를 먹고 상어를 먹을 수 있지만, 먹이사슬의 아래쪽 전부를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삼킬 수 있는 하층부의 먹이는 5~6단계의 사슬을 거치며 올라와야 한다. 갈매기가 바지락을 쪼아 먹고 인간이 바지락을 주워 먹을 때 인간과 갈매기는 먹이사슬 속에서 조개 이하의 하층구조에 관한 한 동격이다. 바지락 캐는 풍경의 시원적 경건성은 이 동격의 운명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바지락을 담은 인간의 소쿠리를 향해 날쌘 갈매기들은 사납게 달려든다.

갯벌의 먹이사슬은 약육강식의 고통이라기보다는 순환하는 먹이의 조화와 질서를 느끼게 한다. 새가 벌레를 쪼아 먹는 사태 앞에서 부처가 느낀 절망은 그 개별적 존재들이다. 그때 부처는 미성년이었다. 갯벌은 미성년의 슬픔을 훨씬 넘어선 공간으로 펼쳐져있다.

선재도 어촌계는 1가구당 하루에 바지락 40㎏이상을 잡지 못한다. 40㎏이 넘는 초과분은 어촌계에서 거두어 공동 분배한다. 40㎏은 요즘 가격으로 8만원이다. 1년에 115~120일만 바지락을 캘 수 있다. 4개 어장을 차례로 돌아가면서 작업을 한다. 당일 작업의 어장지정은 어촌계의 결정에 따른다. 외지인은 이 마을에 산 지 5년이 지나면 어촌계에 가입할 수 있다. 1인이 아니라 1가구가 생산과 분배의 단위다. 그래서 노동력이 왕성한 젊은이들이나 친척이 많은 집에서 어장을 휩쓸어 갈 수 없고 근력 없는 할머니들도 잡은 만큼의 대가를 받는다. 가구당 어획은 40㎏ 한도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젊은이들의 불만이 없지 않지만, 이 바지락 캐는 마을은 오랜 삶의 전통 속에서 자율적이고도 자생적으로 정착된 이 생산과 분배의 법칙을 지엄하게 준수하고 있다. 이 마을의 생산과 분배의 법칙은 인문적이다. 플랑크톤에서 갯지렁이와 어린새우를 거쳐 바지락에 이르고, 바지락에서 다시 갈매기로 이어지는 갯벌의 먹이를 인간이 사는 마을의 먹이로 전환시키고 있다. 1가구당 하루에 40㎏ 미만인 것이다.
 

‘인간의 땅’ 된 갯벌엔 조개·게 흔적만
풍경의 안쪽 - 남양만 갯벌에서 

 
갯벌의 법률적 지위는 공유수면이다. 법은 갯벌을 땅이 아니라 바다로 규정하고 있다. 바다는 필지로 나누어 개인이 소유권을 등기할 수가 없다. 갯벌의 법률적 소유권자는 국가다. 그래서 공유수면의 공유(公有)는 공동체의 총유(總有)라는 뜻이 아니라 국가의 독점소유라는 뜻이다. 갯벌에서 양식어로나 채취어로로 삶을 영위하는 연안어민들은 국가의 바다를 관습적으로 이용해서 수익을 얻는, 권리 없는 사람들이다. 국가가 갯벌을 매립하면 연안어민들은 관행적 수익에 대한 보상을 받는다. 떠나든지, 땅으로 바뀐 갯가마을에 눌러앉아 살든지는 각자 알아서 할 일이다. 연안어민들은 갯가에 살기는 하지만 그 갯벌을 관리하는 법제 안에 살지는 않는다.

공유수면매립법에 따르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정부투자기관, 그리고 국가의 허가를 받은 민간인은 바다를 막아 갯벌을 매립할 수 있다. 방조제 공사에는 막대한 비용과 오랜 세월이 소요된다. 매립을 허가받은 자가 방조제와 그 부대시설이 완공하고 준공검사를 받으면 그 공사비총액과 이자총액에 해당하는 만큼의 매립지에 대한 소유권을 취득한다.

갯벌은 막는 자의 것이다. 공유수면은 사유토지로 바뀌어 간다. 서산 간척지는 현대그룹의 땅이고 인천간척지는 동아그룹의 땅이다. 현대간척지에는 호텔, 콘도, 골프장이 들어설 작정이고, 동아간척지의 토지용도는 허가당시의 농업용에서 공업용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남양만 갯벌이 화옹방조제로 막힌 지 2년이 지났다. 화옹방조제는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매향리에서 화성시 서신면 궁평리까지의 바다를 막은 9.8㎞다. 궁평리 쪽에 길이 100m의 배수갑문이 뚫려있다. 바닷물 한줄기가 이 배수갑문을 통해서 남양만 북쪽으로 길게 흘러들어오고, 물길이 닿지 않는 갯벌 전체는 아득한 지평선을 그으며 이제 땅으로 변해간다. 2년 전의 바다 한가운데를 향해 자전거는 나아갈 수 있다.

이 말라가는 갯벌은 인공과 자연, 연속과 단절, 물과 땅 사이에 끼어서 바래어지는 시간의 풍경처럼 보였다. 들어난 바다의 속살이 낮은 언덕과 고랑으로 끝없이 출렁거리면서 지평선에 닿는데, 언덕은 이에 말라서 허연 소금을 뒤집어썼고 고랑은 때때로 비에 젖어 아직도 습하다. 이 마른 갯벌의 한가운데 서면 언덕과 고랑은 전방위로 퍼져나가고 먼 언덕들이 소금기를 몰아가는 바람에 흔들려 시선은 자주 어지럼증을 일으킨다. 다시 시선을 수습해서 먼 곳을 바라보면, 언덕과 고랑들은 불쑥불쑥 마구잡이로 그 마른 갯벌에 들어선 것이 아니라, 고랑들은 길게 구비치고 휘어지면서 이어져 나가고 언덕들이 그 언저리를 따라가며 솟고 또 잦는 것이어서 언덕과 고랑은 물의 흐름과 시간의 흐름에 실리는 계통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고랑과 언덕의 무수한 계통들은 마른 갯벌을 가득 채우며 합쳐지고 또 갈라지면서, 더 큰 계통을 이루며 이제는 막혀버린 바다 쪽으로 나아갔는데, 그 먼 쪽은 저녁의 어스름 속으로 풀어지면서 언어의 추격권을 벗어나고 있었다. 언어는 갯벌에 주저 않아 마땅했다. 바다의 속살 위로 자전거를 몰아가는 이 마른 갯벌의 낯선 풍경은 시간의 작용과 공간의 작용이 합쳐져서 이루어내는 생성과 소멸이었고 지속과 전환이었는데, 시간과 공간은 바다 물 밑에서 만나 시간도 아니고 공간도 아닌 세상을 열어내고 있었다. 거기서는 생성, 소멸, 지속, 전환 따위의, 어떠한 개념적 언어도 저 혼자서 독자적 의미의 힘으로 자립할 수 없을 것이었다. 아마도 저절로 되어진 모든 것들은 필연적일 것이고, 바다의 속살이 말라가는 이 갯벌에서는 필연이 자유의 반대말도 아니었다.

남양만의 2만 5000분의 1지도를 읽는 일은 섬세한 이미지들로 가득한 시를 읽는 것과 같다. 거기서, 바다와 육지는 은밀한 풍경을 이루며 교접한다. 큰 갯고랑 하나가 강처럼 내륙을 깊이 파고들면서 장덕리 포구에 닿아있고 이 갯고랑을 줄기로 삼아 다시 남쪽으로 10여개의 작은 해수로들이 가지를 뻗어 육지의 안쪽을 향한다. 그 마을의 들은 바다를 빨아 당기는 흡반처럼 보인다. 해수로를 따라 배들이 드나들어서 물길이 끝나는 마을마다 작고 오래된 포구들이 들어서 있었다. 지금은 물길이 막혀서 어선은 떠났거나 뻘에 처박혔고 포구는 문을 닫았다.

남양만 갯벌은 입자가 고와서 깊이 빠지는 뻘이었다. 전국에서 먹는 가리맛 조개의 50%이상이 이 뻘에서 잡혔다. 남양만의 가리맛 조개는 다 죽었다. 빈 껍질들이 캄캄한 뻘흙을 물고 널려있다. 게들이 떠난 빈 구멍들이 햇볕에 말라서 먼지를 낸다. 게들은 아마 아직도 물이 흐르는 뻘의 북쪽으로 갔을 것이다. 게가 떠난 지 얼마 안 된 구멍에는 게가 구멍 속에서 밀어낸 흙덩이들도 남아있다. 갯지렁이들도 북쪽 물가에 모여 있고 새들도 아직 젖어있는 뻘 쪽으로 옮겨갔다. 산 것들은 모두 물 흐르는 곳으로 몰려갔고 오래된 갯가 마을들을 내륙 속에 고립되었다. 육지에 가까운 갯가에는 민들레, 쑥 같은 육지식물들이 번지기 시작했고 나문재, 칠면초와 같은 염생식물들은 갯벌 안쪽에서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 땅에 소금기가 다 빠지면 염생식물들이 사라지고 육지식물들이 이 2년 전의 바다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생명은 무너져가는 과정에서조차도 그 고유한 질서를 완성한다. 이제 간척지 중앙의 넓은 갯벌에는 벌레 한 마리도 살지 않는다. 이 황무지가 바다 밑의 굴곡을 들어내며 끝없는 언덕과 고랑으로 출렁거리고, 마른 갯벌은 생성과 소멸의 추억으로 가득 차있었다. 멀어서 보이지 않는 새들이 높은 목청으로 울었다.

바다가 육지로 변해가는 이 공유수면의 마른갯벌은 아직은 분양되지 않은 공유토면이다. 더 늦기 전에 다들 한번씩 가볼 만하다.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 것인지,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변하지 않는지, 그 공유토면은 가르쳐준다.
 

멸절(滅絶)의 시공을 향해 ‘갇힌 물’은 흐른다
풍경의 안쪽-장덕수로에서

 
이제 경기만, 남양만, 아산만, 천수만은 바다 위로 뻗은 4차선 도로를 달려서 찾아가기보다는 방조제가 막히기 전에 제작된 2만5000분의 1 지도를 들여다보는 편이 훨씬 더 산하의 진실에 가깝다. 지도는 산하에 대한 인간의 몽상을 흔들어 깨우는데, 이 깨어남은 등고선, 해수로, 연안항로, 지방2급하천, 소하천, 등대, 농로, 우마차로, 임도, 포구, 양수장, 배수장, 저수지, 전, 답, 염전, 성곽, 우물 같은 표지물들의 엄격한 사실성에 바탕 한 것이다.

그래서 이 몽상은 산하의 물적토대를 확보한 과학이다. 오래된 지도는 더 이상 사실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지 않지만, 남양만에서는 토목공사가 이루어낸 거대한 사실의 풍경이 오히려 몽환처럼 보인다. 경기만과 남양만 일대에서 내륙으로 편입되어서 사라진 포구들은 아마도 100여 개소가 될 것이다. 긴 갯고랑 언저리에 들어서 있던 그 포구들은 대체로 포, 진, 곶, 고잔, 머리, 개, 여, 말, 들, 안, 뿌리, 게미, 배미, 끝, 너머 같은 이름을 달고, 지금은 물길이 끊어진 내륙이다.

남양만의 장덕수로는 아직도 산하의 강력한 진실을 키우며 마른갯벌 위를 흘러간다. 장덕수로는 남양만의 주류 갯고랑이다. 갯벌의 북쪽을 길게 파고 들어가면서 남쪽 갯벌 위로 10여 갈래의 작은 갯고랑들을 거느렸다. 남양만이 화옹방조제로 막히기 전에 장덕수로의 수심은 갯벌보다 7~8m 낮았다. 썰물 때도 배들은 이 갯고랑 수로를 따라서 왕모대, 사곶, 고모, 호곡, 고온이, 선창 같은 작은 어촌마을들을 지나서 장덕포구에 닿았다.

장덕포구는 갯고랑이 끝나는 내륙 안쪽의 어항으로, 오랫동안 이 남양만 갯벌의 생산과 교역의 중심부였다. 장덕포구도 지금은 내륙이다. 지금, 장덕수로의 바닷물은 화옹방조제의 궁평리 쪽 끝부분에 뚫린 100m의 배수갑문을 통해서 흘러들어 온다.

장덕수로는 2008년 안에 시화호처럼 내륙의 담수호로 바뀔 운명인데, 그 기간에 수질오염을 막기 위해 주기적으로 수문을 열어서 바닷물을 바꾸어 준다. 바다는 인간이 구멍을 열어줄 때만, 인간이 만든 구멍으로 드나든다. 장덕수로는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사육되고 관리되면서 사막처럼 말라버린 갯벌 위에 펼쳐져 있다.

장덕수로는 마지막 숨을 이어가며 겨우겨우 흐른다. 멱통이 막힌 이 수로는 아직 아주 죽지는 않아서, 멸절이 임박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기어이 멸절의 물가로 불러 모은다. 불러 모으면서, 마른갯벌의 아득한 소금밭을 건너간다. 남양만에서는 살아남은 것들이 살아남은 것들 쪽으로 가까이 모이면서 멸절의 운명을 맞는다. 마른 뻘에서 살아남은 가리맛조개와 게들은 모두 이 수로 쪽으로 왔고, 원양을 건너오는 새들도 아직은 이 수로에 내려앉아 젖은 흙을 들쑤셔서 먹는다. 지난 4월 말에는 세계적인 희귀종인 저어새가 몇 마리 다녀갔고, 도요새의 무리들도 다녀갔다.

새들이 이 빈곤한 습지를 계속 찾아오는 이유는 알 수 없다. 무착륙비행으로 원양을 건너오는 새들이 대륙과 대륙 사이에서 어떻게 방향감을 유지하는 것인지를 나는 알 수 없다. 새들의 나라에도 등대나 항로표지나 관제탑이나 무선국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별과 별 사이에서 방향을 인도하는 강력한 추억의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인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수 억년 동안 갯벌 먹이사슬의 최정상을 누리던 새들의 한 종족이 어째서 시공 속에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멸절의 운명을 맞는 것인지, 그 종족의 내막을 나는 몰라 마땅하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저어새의 몸매와 동작이 정주(定住)하지 않고 떠도는 자의 육신을 완성하고 있다는 정도다.

새들은 썰물에 먹고 게들은 밀물에 먹는다. 썰물의 갯벌에 내려앉은 저어새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걷는다. 저어새는 개흙을 몸에 묻히지 않고 뻘물에 몸을 적시지 않는다. 저어새는 필요한 최소한의 뻘만을 딛고, 몸을 뻘에 섞거나 비비지 않는다. 저어새는 뻘에서 먹지만 그 뻘에 속하지 않는다. 저어새는 이 섭생의 물가가 자신의 고향이 아니라는 운명을 체득한 자의 낯선 동작으로 그 뻘 위를 걷는다. 날개와 부리와 다리가 이 정주하지 않는 것들의 존재의 집이다. 유랑의 살림살이는 모두 몸속에 구현되어 있다.

저어새의 부리는 넓적하고 도요새의 부리는 뾰족하다. 그래서 저어새와 도요새는 같은 구역에서 먹이의 적대관계를 겨우 피해가는 듯 싶다. 저어새는 갯벌 위를 기어가는 것을 주워서 먹고 도요새는 뻘 속에 숨은 것들을 쑤셔서 먹는다. 저어새의 넓적한 부리는 둔하고 어눌한 입처럼 보인다.

저어새가 먹는 모습을 들여다보면, 그 넓적한 부리가 그들 종족의 멸절의 한 원인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오기도 하지만, 새들에게 새들의 일을 물어볼 수가 없다. 도요새의 무리들은 부리의 길이가 종마다 다르다. 종달도요의 부리는 1㎝ 정도이고 알락꼬리도요의 부리는 10㎝에 달한다. 부리의 길이에 따라 뻘 속에 숨은 먹이의 층위가 갈라져서 도요의 무리들은 같은 구역 안에서 다투지 않고 먹이를 독점하지 않으면서 먹이사슬의 상층지위를 함께 누린다.

멸절의 시공을 향해 흐르는 장덕수로에 멸절의 시공을 날아가는 저어새들이 내려앉는다. 새들은 멀어서 잘 보이지 않고,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마른갯벌을 건너온다. 부리가 뾰족한 것들과 넓적한 것들과, 긴 것들과 짧은 것들이 마침내 함께 쑤실 것이 없고 넘길 것이 없는 날들이 장덕수로 언저리에 다가오고 있다. 장덕수로는 그 마지막 날들까지 산 것들을 불러 모아 빈약한 마지막 먹이를 대접하면서 여전히 내륙 깊숙한 곳을 향하고 있다. 

포도농사 짓는 어민들… 담수호 냉해로 분쟁 거듭
 
마산포(경기도 화성군 송산면)는 경기만의 남쪽 포구로, 영흥도, 덕적도를 거쳐 중국난징(南京)과 교역하였다. 신라 재상 김춘추가 한반도에 당나라 군대를 끌어들일 때 이 포구에서 중국으로 떠났다(646년). 임오군란 때는 명성황후의 요청을 받은 청나라 군대가 이 포구로 상륙하였다(1882년).

청나라 군대는 수원을 거쳐 서울로 쳐들어가서 대원군을 붙잡았다. 대원군은 이 포구에서 중국으로 끌려갔다. 경기만이 시화방조제로 막히자 마산포는 내륙이 되었고 그 앞바다의 형도와 어도는 산봉우리만 갯벌 위로 떴다. 방갈로가 들어섰고 포구와 섬 사이의 갯벌은 경비행기 연습장이나 서바이벌 게임장이 되었다. 어민들은 포도농사로 생업을 바꾸었으나 마른 갯벌을 쓸어오는 소금바람과 겨울철에 얼어붙는 담수호의 냉해로 시공 측과 분쟁이 일고 있다.

선창 포구는 화성호 안쪽이다. 화옹방조제가 물길을 끊어서, 이제는 이름만 선창이다. 선착장과 횟집은 그대로 남아있는데, 바닷물이 없다. 배들은 방조제 밖 궁평리나 매향리 포구로 옮겨갔다. 선창 포구의 횟집은 이제는 다른 포구에서 생선을 받아다가 팔고 있다.

왕모대는 남양만 안쪽의 장덕수로 북쪽에 들어선 포구다. 장덕수로에 배가 들어오지 않자 포구는 이제 문을 닫았다. 배가 없어진 수로에는 윈드서핑을 하는 젊은이들의 돛단배가 모여들어 있다. 2년전까지 여러 TV방송들이 내고향자랑, 특산품자랑을 촬영하던 포구다. 두 군데 남은 횟집들도 방조제 위 점포로 떠날 작정이다. 삶의 방식과 기본구조 전체가 지속 불가능하고 회복 불가능한 방식으로 단절되었다. 오래된 마을들의 역사는 이제 0에서부터 새로 시작되고 있다. 마을마다 선착장이 남아서, 마른갯벌 쪽으로 뻗어있다.
 

공동소유·공동작업 50년 ‘세월’을 나눠갖는 사람들  
피란민이 간척한 '공생염전' 이야기

 
공생염전(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매화리)은 1951년 강원도 철원·김화지역(철의 삼각지) 피란민 55세대가 이 갯가로 들어와서 간척한 염전이다.

피란민들은 미군이 주는 구호물자를 받아먹으며 등짐으로 돌과 흙을 날라서 남양만 바다에 880m의 뚝방을 쌓았다. 이 뚝방이 지금도 염전 13만평을 지켜낸다. 미군들은 이 피란민들의 필사적인 개미노동에 경악했다. 미국에서 영상제작사를 불러들여 피란민들의 노동을 다큐멘터리로 찍었다. 이 필름의 제목은 ‘바다를 밀어낸 사람들’이었다. 필름은 면사무소 앞마당에서 상영되었고 미 본토에도 건너갔다.

염전이 완성되자 피란민들은 자치조합을 결성했다. 이 조합의 이름은 ‘철의 삼각지 자치난민공생조합’이었다. 공생조합은 공생(共生)의 원칙으로 염전을 나누었다. 소금창고 1동이 1만2000평의 염전을 관할하고 창고 1동을 6명이 공동소유하고 공동작업하는 방식이었다. 1세대 피란민들은 염전의 소출에 기대서 마을을 이루었고 자식을 낳았다.

1세대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나서, 철의 삼각지 고향으로 돌아가 묻혔거나 이 마을 뒷산에 묻혔다. 지금은 2세대들이 염전을 경영하는데, 선대가 정한 소유와 관리의 원칙을 승계하고 있다. 6명이 소금창고 1동을 공유하는데, 외지로 나간 사람들은 현지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소유의 몫을 임대하고 1년에 소금 1000 가마를 받는 방식이다. 공생염전의 소금창고는 모두 13동이다. 한 동 마다 1년에 7000~8000 가마(30㎏짜리)를 거둔다. 요즘 천일염 시세는 1가마에 1만2000원이다.

이 마을 염부 권호원씨(67)는 14살 때 아버지를 따라 피란 왔다. 아버지와 함께 등짐으로 돌을 날라 뚝방을 쌓았다. 그 염전에서 권씨는 지금도 소금을 거둔다. “이제는 염전 일을 할 젊은이가 없다. 염전은 결국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고 권씨는 말했다. 1세대의 뚝방은 아직도 튼튼히 바다를 막고 있다. 고무래를 미는 권씨의 굽은 등 위로 서해의 폭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빛·바람 머금은 ‘세월’을 퍼 담는다
풍경의 안쪽 - 서해안 염전에서

 
염전은 갯가의 평야다. 바깥은 바다 쪽으로 펼쳐지고 안쪽은 야산에 기댄 마을에 닿는다. 염전은 폭양에 바래지며 해풍에 쓸리운다. 염전의 생산방식은 기다림과 졸여짐이다. 염전은 하늘과 태양과 바람과 바다에 모든 생산의 바탕을 내 맡긴 채 광활하고 아득하다. 염전은 속수무책의 평야인 것이다.

염전은 바다를 밀어낸 인공의 들이고, 수산업과 농업의 사이에 끼어있는 완충의 평야다. 염전은 잡거나 기르지 않고, 캐거나 따지 않는다. 염전은 기다리는 들이다. 온 들판에 펼쳐놓은 바닷물이 마르고 졸여져서, 그 원소의 응어리 안으로 고요해질 때까지 염부는 속수무책으로 기다린다.

염전은 바다를 원료로 하지만 바다로 나아가지 않고, 넓은 밭을 펼쳐놓지만 심거나 가꾸지 않는다. 염부는 생명을 기르지 않지만, 시간은 염전의 생산을 길러준다. 바다와 육지 사이에서, 염전은 수산업도 아니고 농업도 아니다. 염전은 산업자원부 산하에 등록되는 광업이다. 소금은 식량이 아니라 광물질인데, 기다림의 결정체인 이 광물질이 모든 식량을 인간이 넘길 수 있고 인간이 친화할 수 있는 먹이로 바꾸어준다.

염부들은 기다림의 구조 안으로 물을 끌어와서 펼쳐놓고, 그 기다림을 바닥을 훑어서 시간의 앙금을 거둔다. 폭양 아래서 염전바닥을 훑는 염부들의 노동은 모든 일차산업의 생산노동들 중에서 가장 단순한 원초성의 풍경을 이룬다. 안강망 어선을 몰고 연안어장으로 나가는 어부들이나 농기계로 모를 심고 벼를 거두는 농부들과는 달리 염부들은 매우 단순한 생산도구 만을 지닌다. 염부는 다만 고무래로 밀고 곰배로 긁고 삽으로 퍼 담는다. 염전노동의 이 단순성은 소금이 인간의 노동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저절로 빚어지는 결정체이기 때문일 터인데, 이 노동의 단순성은 소금의 원초성과 닮아있다. 염부의 노동은 시간을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전개되고, 소금은 먹이의 질료를 시간의 안쪽으로 끌고 들어가서 거기에 시간의 맛과 무늬를 새겨 넣는다. 젓갈과 김치의 맛은 소금이 매개하는 시간의 맛이다. 염전은 생산의 가장 순결한 밑바닥이고 소금은 모든 맛의 발생과 작동의 원리이다. 그리고 이 단순성과 원초성의 작동범위는 먹이와 시간 속으로 광활하다.

바다 쪽으로 긴 뚝방이 뻗어나가고, 억새풀 우거진 뚝방 길 위로 듬성듬성 들어선 소금창고들이 시야 속에서 멀어져간다. 염전은 서해의 특징적 풍광이었다. 서해안 여러 염전의 소금창고들이 어째서 똑같은 모양으로 지어지는 것인지를 나는 알 수 없지만, 서해안의 소금창고들은 하나의 완성된 양식을 이루고 있다. 이처럼 완연한 질감을 갖는 건축물이란 흔치않다.

소금창고는 지상의 모든 건축물 중에서 가장 헐겁고 남루해 보인다. 소금창고들은 멀리 떨어져서 군집을 이루지 않고, 시선의 방향으로 소멸하는 개별성을 이룬다. 소금창고는 공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의도를 들어내지 않는다. 오직 실용적일 뿐인 이 건축물은 어떠한 장식적 구조도 없이 필요한 선과 면 몇 개만으로 이 세상의 시공과 경계하고 있는데, 이 경계는 불려갈 듯이 위태로워 보인다. 소금창고는 이 위태로운 경계 위에서 햇볕과 바람에 풍화되는데, 검은 콜타르를 칠한 목재들은 색이 바래어지고 목질이 뒤틀리면서 풍화되는 것들의 속살의 결을 들어낸다. 소금창고는 역학구조를 이루는 선과 면을 공간 속에 녹여서 사실성을 증발시키는 방식으로 풍화된다. 바닷물은 풍화되어 새롭게 태어나는 소금의 사실성을 이루고 소금창고는 풍화되어서 사실성의 멍에를 벗는다. 염전은 시간이 기르는 밭인데, 그 풍화의 끝은 신생이거나 소멸이다.

이제 경기만, 남양만의 염전은 거의 대부분 사라졌다. 소래염전, 오이도염전, 군자염전, 시흥염전, 마도염전은 모두 대규모 공단이나 간척지로 바뀌었고 중국산 소금과 공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화학소금을 당해낼 수 없는 작은 염전들은 왕새우 양식장으로 바뀌었다. 남양만의 염전은 경기도 서신면 매화리, 백미리의 바닷가에 겨우 남아있다. 시화방조제와 화옹방조제 구간을 운 좋게 벗어난 오목한 해안선에 바래어져가는 서해의 풍경은 살아있다.

이 염전들은 밭을 12단계로 펼쳐놓고 물을 이동시킨다. 뚝방 너머에서 퍼 올린 바닷물을 저수지에 가두어놓고 한 단계씩 낮은 밭으로 물을 옮겨간다. 한 단계의 밭을 ‘배미’라고 부른다. 12단계의 배미들은 3㎝씩의 차이로 층이 진다. 염부는 한 배미 마다 4~5일 씩을 기다려야한다. 기다림의 들판은 가장자리가 보이지 않는데, 이 광활한 평면구도 전체는 36㎝의 경사를 이룬다. 더디고 흔적 없는 기다림이다.

햇볕이 증발시킨 물기를 바람이 걷어가면서 소금은 엉긴다. 소금은 시간을 건너오는 바다의 배후처럼 염전 바닥으로 온다. 바람은 습기를 걷어가되, 물을 흔들지는 말아야한다. 북서풍을 따라서 오는 소금은 굵은 입자가 단단하고 동풍을 따라서 오는 소금은 밀가루처럼 곱다. 남동풍을 따라서 오는 소금은 습해서 무겁고 남서풍을 따라서 오는 소금은 거칠고 건조하고 푸석거린다. 늙은 염부들은 바람을 저 자신의 숨결처럼 세밀히 이해하고 있다. 잔잔한 남서풍을 따라서 오는 소금이 무릇 짠 맛의 으뜸이다. 남서풍은 흔한 바람이 아니다. 말라서 바스락거리는 남서풍에 실려 오는 소금은 바다 전체를 한 톨의 결정체 안에 응축하는 향기에 도달하고, 모든 맛에 스미고 모든 맛을 다스리는 삼투력과 통솔력을 갖는다. 염전은 인공구조물이지만 이제 천연기념물의 표정으로 서신면 바닷가에서 말라가고 졸여진다.
 

바람과 향기, 숲은 ‘숨’이다
풍경의 안쪽 - 광릉 숲에서

 
나는 모국어의 여러 글자들 중에서 ‘숲’을 편애한다. ‘수풀’도 좋지만 ‘숲’만은 못하다. ‘숲’이라는 글자의 생김새는 숲과 똑같다. ‘숲’의 어감은 깊고 서늘한데, 이 서늘함 속에는 향기와 습기가 번져있다. ‘숲’의 어감 속에는 말라서 바스락거리는 건조감이 들어있고 젖어서 편안한 습기가 느껴진다. ‘숲’은 마른 글자인가 젖은 글자인가. 이 글자 속에서는 나무를 흔드는 바람소리가 들리고, 골짜기를 휩쓸며 치솟는 눈보라 소리가 들리고 떡갈나무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린다.

깊은 숲 속에서는 숨 또한 깊어져서 들숨은 몸속의 먼 오지에까지 스며드는데, 숲이 숨 속으로 빨려 들어올 때 나는 숲과 숨은 같은 어원을 가진 글자라는 행복한 몽상을 방치해둔다. 내 몽상 속에서 숲은 대지 위로 펼쳐놓은 숨의 바다이고 숨이 닿는 자리마다 숲은 일어선다. ‘숲’의 피읖받침은 외향성이고 ‘숨’의 미음받침은 내향성이다. 그래서 숲은 우거져서 펼쳐지고 숨은 몸 안으로 스미는데 숨이 숲을 빨아 당길 때 나무의 숨과 사람의 숨은 포개지고, 몸속이 숲이고 숲이 숨인 것이어서 ‘숲’과 ‘숨’은 동일한 발생근거를 갖는다는 나의 몽상은 어학적으로는 어떨는지 몰라도 인체생리학적으로는 과히 틀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몸이 입증하는 것들을 논리의 이름으로 부정할 수 있을 만큼 명석하지 못하다.

밥벌이에 지친 날에는 숲 속의 나무들이 더 아름다워 보인다. 먹이를 몸 밖에서 구하지 않고, 몸 밖의 먹이를 입으로 씹어서 몸 안으로 밀어 넣지 않고, 제 몸 속에서 햇빛과 물과 공기를 비벼서 스스로를 부양하는 저 푸르고 우뚝한 것들은 얼마나 복 받은 존재들인가. 중생의 맨 밑바닥에서, 나무는 중생의 탈을 벗고 있다. 밥벌이에 지친 저녁에 이경준교수가 지은 ‘수목생리학’이나 파브르의 ‘식물기’를 꺼내놓고 광합성, 수목의 생장, 햇빛과 엽록소의 관계 같은 페이지들을 읽는 일은 쓸쓸하다. 이 쓸쓸함은 식물의 자족(自足)앞에서 느끼는 동물의 슬픔이다. 무기물을 유기물로 전환시키는 작용이 나무의 생명현상이다.

그 전환의 생화학적 과정을 모두 분석하고 분석의 파편들을 다시 종합해도 어째서 생명이 아닌 것들로부터 생명인 것이 빚어지는 것인지를 나는 알 수가 없다. 어째서 이 전환은 초록계통의 세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숲은 왜 초록색인지, 숲을 초록으로 인지하는 나의 지각과 언어는 정당한 것인지를 나는 결국 알지 못한다. 나의 무지에도 불구하고 광합성을 기술하는 수목생리학의 페이지들은 아름답고, 바람에 흔들리는 광릉의 여름 숲은 자유가 깃들만큼 서늘하고 깊어서, 숲 속에서 나는 세계의 궁극으로 다가가는 식물학자가 되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숲 속의 모든 나무는 먹이 없이 스스로 살아가는 독립기관이다. 나무는 뿌리에서부터 우듬지 꼭대기의 잎에까지 물을 이동시키는데, ‘수목생리학’에 따르면 이 물은 분자들 간의 상호응집작용으로 이동하는 것이어서 나무는 양분을 만들기 위해서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는다. 물은 저절로 이동한다. 나무는 서두르거나 늑장을 부리지 않는다. 기다렸다가 때가 이르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나무는 개화나 결실에 많은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 나무는 생명이 아닌 것을 생명으로 바꾸는 전환의 과정으로 저 자신의 생명을 완성한다. 그래서 나무는 오래오래 땅 위에 살아있는 것인데 500년이 된 느티나무조차도 젊어있어서 땅 위에 늙은 나무란 없다.

여름의 광릉 숲은 나무들마다 제 모습으로 무성해져서, 나무의 개별성은 주저없이 발현되어 있다. 참나무 큰 잎은 늘 바람에 서걱거린다.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굴참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의 그늘도 마찬가지다. 잎 사이마다 빛이 꺾이면서 스며들어 참나무 숲 속은 어슴푸레하고 그림자가 없다. 넓은 잎들이 물기를 내품어 참나무 숲에서는 콧구멍 속이 편안해진다.

소나무나 전나무 숲의 바닥은 가는 잎 사이로 스며들어온, 자잘한 빛들이 바글거린다. 전나무는 키가 커서 전나무 숲 바닥의 빛들은 멀어 보이고 소나무 숲 바닥의 빛은 가까워 보인다. 소나무 숲의 향기는 말라있고 참나무 숲의 향기는 젖어있다. 숲 속의 나무들 중에서 느티나무는 가장 완강한 착지성(着地性)을 보인다. 느티나무의 밑동은 중심이 되는 기둥을 구별할 수 없다.

느티나무 밑동은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또 들러붙어서 튼튼한 저변의 근거를 확보한다. 느티나무는 화사하지 않고 꽃도 볼품없지만, 느티나무는 강력하고 장대하다. 산전수전의 신령성이 서린 그 밑동은 오래 사는 자가 이기는 자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마을 어귀의 정자나무나 당나무는 대부분이 느티나무다. 느티나무가 들어선 숲에서 다른 나무들은 이 신령한 나무 곁에 범접하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있다. 참나무, 소나무, 느릅나무는 굴곡진 껍질로 외벽을 치지만, 백일홍, 물푸레나무, 자작나무는 기름기 흐르는 껍질 위에 꽃사슴의 무늬를 그려낸다.

여름의 광릉 숲에서, 숲의 전체성은 이 모든 나무들의 개별성을 품고 있었고, 몸 밖에서 벌어먹어야하는 자의 먹이의 운명만이 그 전체성에서 제외되어 있었는데, 숲 속에서는 그 제외된 운명이 선명히 드러남으로써 오히려 견딜 만했다.
 

켜켜이 쌓인 동심원은 나무가 쓴 ‘史書’
풍경의 안쪽 - 광릉수목원 산림박물관에서

 
광릉 국립수목원 산림박물관에서는 수백년 된 고목의 나이테와 나무를 다루는 목공들의 연장이 볼 만하다. 나무의 역사는 제 몸 속에 기록된다. 이 동심원의 세계는 생명현상 속에 자리 잡은 자연현상의 모습일 터인데, 여기에는 생명과 자연이 포개져서 질서 있는 문양을 이룬다. 나이테는 자연현상들 중에서 가장 인간의 책에 가깝게 느껴지는데, 이 친근감은 문양이 생명을 통과해 나온 자연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테뿐 아니라, 나무를 세로로 잘랐을 때 드러나는 결의 무늬들도 마찬가지다. 오래된 절이나 한옥의 기둥, 마루, 대들보, 문지방에 드러난 나무결의 무늬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까닭도 그쯤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 결은 자연의 흐름을 따라가는 생명의 선이며 리듬이다.

나이테를 읽어내는 식물학자들은 나무의 생몰연대와 나무가 겪은 삶의 충만과 결핍, 고통과 기쁨, 일과 휴식에 관하여 나무 한 그루마다 개별적으로 설명할 수가 있다. 나이테는 나무가 쓴 책과도 같고 식물학자들이 그 책을 읽어내서, 나무는 인간의 책 속으로 편입된다. 태양흑점의 발생주기를 연구하던 미국의 천문학자 더글러스 박사는 1000년이 넘은 나무의 나이테를 들여다보면서 흑점발생의 그래프를 작성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나는 박상진교수가 쓴 ‘역사가 새겨진 나무 이야기’라는 책에서 읽었다. 지구의 땅 위에 솟아난 나무는 태양의 흑점과 몸으로 교신하고 있었다. 국립수목원 뒷마당에는 몇 년 전 홍수 때 뿌리 뽑힌 전나무의 밑동이 전시되어 있다. 이 나무는 200년이 넘은 것인데, 그 생몰연대는 1818년부터 1988년까지이다. 정약용이 목민심서를 쓰던 무렵에 태어나 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무렵까지 이 전나무는 수목원 진입로에서 살았다. 한국 현대사가 근대성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오작동을 반복하던 시절에, 이 나무는 나이테 동심원 안쪽으로 과거를 온전히 지녀가고 있었다. 그 동심원의 깊은 안쪽은 고요하고 단단해 보였다.

나무는 개체 안에 세대를 축적한다. 지나간 세대는 동심원의 안쪽으로 모이고 젊은 세대가 몸의 바깥쪽을 둘러싼다. 나무껍질 바로 밑이 가장 활발히 살아있는 세대이다. 이 젊은 세대가 뿌리의 물을 우듬지까지 끌어올려 모든 잎들을 빛나게 하고 나무의 몸통을 키운다. 그리고 이 젊은 세대는 점차 기능이 둔화되고 마침내 정지되어 동심원의 안쪽으로 숨어들고, 나무껍질 밑에는 다시 새로운 세대가 태어난다. 젊음은 바깥쪽을 둘러싸고 늙음은 안쪽으로 고인다. 식물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나무밑동에서 살아있는 부분은 지름의 10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바깥쪽이고 그 안쪽은 대부분 생명의 기능이 소멸한 상태라고 한다. 동심원의 중심부는 물기가 닿지 않아 무기물로 변해있고, 이 중심부는 나무가 사는 일에 간여하지 않는다. 이 중심부는 무위(無爲)와 적막의 나라인데, 이 무위의 중심이 나무의 전 생명을 하늘을 향한 수직으로 버티어준다. 하나의 핵심부를 중심으로 여러 겹의 동심원을 이루는 세대들의 역할분담과 역할전승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 나이테를 들여다보는 일의 기쁨이다.

나무의 늙음은 낡음이나 쇠퇴가 아니라 완성이다. 이 완성은 적막한 무위이며 단단한 응축인 것인데, 하늘을 향해 곧게 서는 나무의 향일성은 이 중심의 무위에 기대고 있다. 무위의 중심이 곧게 서지 못하면 나무는 쓰러지고 거죽의 젊음은 살 자리를 잃는다. 중심부는 존재의 고요한 기둥이고 바깥쪽은 생성(生成)의 바쁜 현장인데, 새로운 세대의 표층이 태어나면 생성과 존재가 사명을 교대하면서 나이테는 하나씩 늘어간다. 동심원 속에서, 늙음과 젊음이, 전위와 후방이 순탄한 질서를 이루어 나무는 곧게 서서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또 잎을 떨군다. 나이테의 동심원 속에서는 후방이 전위보다 훨씬 더 두껍고 단단한 것이어서 잎 피는 나무의 그 찬란함은 모두 이 후방에 기대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중심부 쪽 후방이 나무의 가장 단단하고 안정된 부분이어서, 기둥을 세울 때 목공은 나무의 겉 부분은 다 깎아 버린다. 고급가구는 대부분이 후방만을 잘라내서 목재로 쓰고 있다.

목공들은 석수나 옹기장이나 대장장이에 비해서 훨씬 더 다양하고 정교한 연장을 지니고 있다. 목공들의 연장이 아주 정교해진 것은 목재가 인간에게 가장 가깝고 일상적인 자연재료이기 때문일 것이다. 목공의 연장은 나무의 성질과 나무의 결을 다스리는 도구다. 수습시절의 목공은 끌로 구멍 뚫는 정도의 일을 익히지만, 숙련도가 높아지면 대패질이나 자귀질로 나무의 결을 다스리는 솜씨를 배운다. 대패와 자귀는 나무의 결을 따라서, 혹은 결을 가로지르면서 건너가는데, 대패가 밀고 지나간 자리에 나무의 존재 자취는 선연히 드러난다. 이 자취는 고요한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벌어졌던 나무의 삶의 궤적이다. 목재에 먹줄을 칠 줄 알면 목공의 생애는 완성된다. 먹줄을 치는 목공은 나무의 구조와 존재 전체, 그 핵심부의 단단한 적막을 모두 체득한 목공의 거장이다. 김홍도의 풍속화첩 속에서, 먹줄 치는 목공의 자세는 나이테 동심원의 안쪽처럼 고요하다.

나무들 사이를 자전거로 달릴 때, 바퀴는 굴러도 바퀴의 중심축의 한 극점은 항상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이 극점이 움직인다면 자전거 바퀴의 회전운동은 불가능할 것이다. 적막한 중심은 나이테 동심원 속에 있고 자전거 바퀴 속에도 있다. 그 중심이 자전거를 나아가게 해준다. 숲 속으로 자전거를 저어갈 때 나무와 자전거는 다르지 않다. 나무는 늘 인간의 마을에서 자란다. 광릉 숲은 서울에서 가까워서 좋다.
 

해를 품는 수련, 절정에도 고요가…
풍경의 안쪽 - 광릉 숲속 연못에서

 
광릉 숲 속 연못에 수련이 피었다. 수련이 피면 여름의 연못은 살아있는 동안의 시간 속에서 가득 차고 고요한 순간을 완성한다. 수련은 여름의 꽃이지만 작약, 모란, 달리아, 맨드라미 같은 여름 꽃들의 수다스러움이 없다. 수련은 절정의 순간에서 고요하다. 여름 연못에 수련이 피어나는 사태는 ‘이 어인 일인가’라는 막막한 질문을 반복하게 한다.

나의 태어남은 어인 일이고 수련의 피어남은 어인 일이며, 살아서 눈을 뜨고 수련을 들여다보는 일은 대체 어인 일인가. 이 질문의 본질은 절박할수록 치매하고, 치매할수록 더욱 절박해서, 그 치매와 절박으로부터 달아날 수가 없는 것인데, 수련은 그 질문 너머에서 핀다. 수련 꽃 핀 여름 연못가에 주저앉은 자와 물 위에 핀 꽃 사이의 거리는 아득히 멀고, 이 거리를 건너가는 방편은 다만 ‘보인다’라는 한 개의 자동사 이외에는 없지 싶지만, 이 의심할 수 없이 확실한 빈곤이 살아있는 동안의 기쁨이다.

수련은 물 위에 떠서 피지만, 한자로는 물수(水)가 아니라 잠들수(睡)를 골라서 수련(睡蓮)이라고 쓴다. 아마도 햇살이 물 위에 퍼져서 수련의 꽃잎이 벌어지기 전인 아침나절에 지어진 이름인 듯싶지만, 꽃잎이 빛을 향해 활짝 벌어지는 대낮에도 물과 빛 사이에서 피는 그 꽃의 중심부는 늘 고요해서 수련의 잠과 수련의 깸은 구분되는 것이 아닌데, 이 혼곤한 이름을 지은 사람은 수련이 꽃잎을 오므린 아침나절의 봉우리 속에 자신의 잠을 포갤 수 있었던 놀라운 몽상가였을 것이다.

여름 아침의 연못에서는 수련 뿐 아니라 물도 잠들어 있다. 물이 밤 새 내쉰 숨은 비린 향기와 물안개로 수면 위에 깔려있고, 해를 기다리는 물속은 아직 발현되지 않은 무수한 빛과 색의 입자들을 재우면서 어둡다. 빛과 색으로 존재하는 것들은 시간 위에 실려서 멀리서부터 다가오는데, 그 모든 생멸의 과정이 살아있는 동안의 뜬 눈에 다 보이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래서 여름의 연못은 인상주의의 낙원이며 지옥이다. 수련을 그린 모네의 화폭은 그 빛과 빛 사이, 색과 색 사이, 순간과 순간 사이의 경계를 비집고 들어가서 거기에서 새로운 빛과 시간의 나라를 열어내는데, 이 나라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지옥 위에 건설된 보이는 것들의 낙원이다.

여름 아침의 수련은 그렇게 다가오는 빛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꽃잎을 접고 잠들어있다. 수련이 잠들 때, 오므린 봉오리 속에서 빛과 시간과 꽃 사이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바라보는 자가 말할 수 없지만, 수련의 잠은 자족한 고요의 절정을 이룬다. 그 오므림의 외양은 곤한 잠이고 그 내면은 맹렬한 깨어있음이어서, 수련의 잠은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잠이 아니고 수련의 오므림은 벌어지기를 기다리는 오므림이 아니다.

수련은 빛의 세기와 각도에 정확히 반응한다. 그래서 수련을 들여다보는 일에는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의 숨 막히는 허송세월이 필요하다. 수련은 부지런한 몽상가의 꽃이다. 모네와 수련을 말하는 바슐라르의 글(꿈꿀권리/1980, 이가림옮김, 열화당)은 “클로드 모네처럼 물가의 아름다움을 거두어 충분히 저장해두고, 강가에 피는 꽃들의 짧고 격렬한 역사를 말하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러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클로드 모네는 이른 아침부터 길을 떠나는 것이다… 그토록 많이 되찾아진 젊음, 낮과 밤의 리듬에 대한 그토록 충실한 복종, 새벽의 순간을 알리는 그 정확성, 이것이야말로 수련으로 하여금 인상주의의 꽃이 되도록 하는 이유인 것이다. 수련은 세계의 한 순간이다”라고 적어 놓았다. 화가는 연못위에 핀 수련의 순간들을 화폭 위로 번지게 하고 철학가는 화폭 위의 수련으로부터 연못 위의 수련으로 건너간다. 바슐라르의 글 속에서는 시간에 대한 수련의 정확한 복종이 수련의 리듬을 완성시키고, 모네의 화폭에서 이 완성의 순간은 빛을 따라 흘러가고 있다. 아침 10시가 넘어서 물 위로 햇살이 퍼지면 풀과 나무의 그림자를 드리운 물빛은 더 깊고 더 투명해진다. 물속에 숨어있던 색과 빛과 음영의 잠재태들이 발현되기 시작하는 그때, 수련은 꽃잎을 연다. 노랑어리연꽃이 열릴 때 여름의 연못은 찬란하다. 수련의 집안에서 노랑어리연꽃은 작은 꽃에 속하는데 그 꽃의 열림은 얌전하고도 영롱하다. 열려진 그 꽃 속에 여름의 빛이 들끓고, 그 들끓는 속은 맹렬하게 고요해서 그 꽃의 열림은 더욱 혼곤한 잠처럼 보인다. 그래서 수련의 잠과 수련의 깨어남은 시간에 복종하는 꽃의 리듬일 뿐, 잠도 깨어남도 아닐 것이었다.

대낮에 활짝 열린 수련은 날이 흐려지면 꽃잎을 오므리고 해가 다시 나오면 꽃잎을 연다. 그래서 여름의 연못은 빛을 따라서 색들이 열리고 닫히는 꽃밭이다. 여름의 빛이 물풀의 생명을 충돌질해서 그 안쪽의 색들을 피어나게 한다. 날이 저물어, 대기 중의 빛이 모두 스러지면 수련은 야물게도 꽃잎을 오므리고 밤을 맞는데, 그때, 여름 연못가의 하루는 돌이킬 수 없이 다 지나간 것이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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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자전거 여행에세이(1)

김훈 자전거 여행에세이(1) 국내외 여행정보 2008.10.05 13:26

김훈 자전거 여행에세이 (1)
 
 

 

無爲의 자연 향해 끝없이 말을 거는 인간 
 
 
풍경은은 사물로서 무의미하다. 그렇게 말하는 편이 덜 틀릴 것 같다. 풍경은 인문이 아니라 자연이다. 풍경은 본래 스스로 그러하다. 풍경은 아름답거나 추악하지 않다. 풍경은 쓸쓸하거나 화사하지 않다. 풍경은 자유도 아니고 억압도 아니다. 풍경은 인간을 향해 아무런 말도 걸어오지 않는다. 풍경은 언어와 사소한 관련도 없는 시간과 공간 속으로 펼쳐져있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는 말은 광막해서 나는 그 권역의 넓이와 가장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자연은 쉴 새 없이 작용해서 바쁘고, 풍경은 그 바쁜 자연의 외양으로 드러나있다. 무위자연의 ‘무위’는 그 바쁜 것들에 손댈 수 없고 거기에 개입할 수 없는 인간의 속수무책을 말하는 것으로, 나는 겨우 이해하고 있다.

흐르는 강물을 들여다 보면서 공자는 말했다.

―흘러가는 것은 저러하구나.

‘저러하다’니, 어떠하다는 말인가. ‘저러하구나’라는 말은 ‘흘러가는구나’라는 말처럼, 나에게는 들렸다. 그래서 공자의 말은 동어반복이다. 동어반복은 하나마나한 말인가.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공자의 그 말을 읽을 때마다 언어를 버리거나 언어를 넘어서려는 성인의 조바심을 느꼈다. 흐르는 물가에서, 성인은 언어와 자연 사이의 위태로운 경계에 당도한 것이다.

그 경계에서, 공자는 자연을 상대로 인간의 언어로 말을 걸기 보다는 언어를 풀어서 놓아주고 곧바로 자연 쪽으로 건너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공자는 끝끝내 언어를 버리지 못한다. 공자는 그 경계를 넘어가지 않고, 다시 인간의 안쪽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그 부자유한 한계 안에서 공자는 아름답다. 시선을 거두어 안쪽으로 향한 공자가 ‘저러하구나’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자연 쪽으로 건너가려는 자의 말이 아니라, 자연을 인간 쪽으로 끌어들이려는 자의 독백처럼 들린다.

‘산에는 꽃피네, 꽃이 피네’라고, 김소월이 그 단순성의 절창으로 노래할 때도, 그 노래는 말을 걸 수 없는 자연을 향해 기어이 말을 걸어야하는 인간의 슬픔과 그리움의 노래로 나에게는 들린다. 아마도 그것이 모든 서경시(敍景詩)의 운명일 것이다.

풍경은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지만, 인간이 풍경을 향해 끝없이 말을 걸고 있다. 그러므로 풍경과 언어의 관계는 영원한 짝사랑이고, 언어의 사랑은 짝사랑에서 완성되는데, 그렇게 완성된 사랑은 끝끝내 불완전한 사랑이다. 언어의 사랑은 불완전을 완성한다.

대중가수 이태원은 ‘솔개’라는 노래에서 “우리는 말 안하고 살 수가 없나. 나르는 솔개처럼”이라고 노래했다. 그 노랫말은 한동안 나를 괴롭혔다. 오랜 마음고생 끝에 내가 도달한 결론은 이렇다. 우리는 말 안하고 살 수가 없다 우리는 나르는 솔개가 아니다 공자도 흐르는 물가를 말 안하고 지나치지는 못하셨다. 그러나 ‘저러하구나’라는 한마디로 사태를 정리하고 수다를 떨지 않는 성인의 압축능력은 얼마나 복된 것인가. 나에게는 그런 복이 없다.

조강(祖江)은 여러 강들의 통합으로서 깊고 크다. 넓고 느리게 흘러서 일몰의 서해로 나아간다. 한반도 중부내륙의 모든 수계(水系)는 조강에서 합쳐져 소멸한다. 남한강과 북한강을 합쳐서 내려온 한강은 김포 들판의 북단에 이르러 임진강과 만난다. 거기까지 흘러온 임진강은 이미 한탄강과 그 유역의 모든 수계를 이끌고 가득 차있다. 크고 넓은 강들이 만나는 자리에는 만남의 흔적이 없다. 강들은 본래 그러한 것처럼 만난다. 거기서부터 조강은 강화도 북단과 개풍군 남단 사이로 유로(流路)를 열면서 서해로 나아가다가 다시 개성에서 내려오는 예성강을 끌어들인다.

하구의 조강은 물이 아니라 시간의 모습으로 바뀌어 가면서 바다에 닿는다. 강이 바다로 다가갈수록, 거기까지 따라온 산들도 낮고 멀어져서 일몰의 조강은 광막한 소멸의 정서 속에서 아득하고 막막하다. 강들은 이 헐거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소멸하는데, 물들이 다시 이 하구로 당도하는 것이어서 조강은 모든 물들의 만남이고 해체이며 신생이다. 이 소멸의 하구는 다시 모든 수계들의 먼 상류 쪽 시원을 끌어당겨 바다에 이르게 한다. 여기는 내 분단조국의 멱통이다.

밀물에, 조강은 깊숙이 밀린다. 서해의 밀물은 강을 가득히 채우며 달려들어, 거대한 강물이 더 큰 바닷물에 밀려나면서 강은 거칠게 뒤챈다. 산의 아랫도리가 물에 감기고 모든 수계는 상류까지 부풀어 숨차다. 밀물의 조강에서는 바닷물의 압박으로 숨을 몰아쉬는 강물의 헐떡거림이 들린다.

썰물에, 조강은 가쁜 숨을 길게 내쉬듯이 바다로 내닫는다. 강의 숨결이 낮고 멀어질 때, 상류의 수계들은 숨통이 열려가는 하구로 달려들고, 물이 몰려간 먼 바다 쪽으로 젖어서 빛나는 저녁의 개펄이 들어나, 물이 멀리 몰려간 개펄은 빛으로 가득 찬다.

조강의 그믐사리는 새벽에 만조를 이룬다. 강은 시간의 힘으로 밀리고 쓸린다. 그믐사리가 지나면 물의 대고조(大高潮)는 점점 늦어져서 조강의 보름사리는 석양 무렵에 만조를 이루어, 그 큰 강의 관능은 시간과 교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때, 강은 밀려들고 몰려나가는 물의 소리로 수런거리는데, 그 소리는 인간의 감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다. 만조의 강이 숨을 뒤채일때, 그 소리는 모든 소리가 동시에 뒤섞여 버리는 백색의 잡음이다.

그 소리는 아무런 스펙트럼을 이루지 않고, 어떠한 음의 권역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 소리의 질감과 표정은 인간의 언어나 미의식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그 소리는 사람의 목소리와 악기의 소리와 짐승의 소리에 길들여진 인간이 듣기에 무의미하고 무표정하고 무계통하고 무정형하다. 그 소리는 혼돈의 밑바닥에서 울리는, 무서운 소리다. 보름사리의 조강에서 그 소리는 늙은 시간이 물러나가고 새로운 시간이 세상으로 밀려오는 소리처럼 들린다. 이 하구는 내 분단조국의 서부전선이다.

산하는 거기에 얼룩진 역사의 표정을 신속히 지우고, 산맥은 봄마다 새잎으로 덮인다. 보름사리에 조강 물 수런거리는 소리는 적막의 소리다. 그 소리에는 역사의 찌꺼기가 묻어있지 않다.

그러나 저무는 조강에서는 산하가 모조리 지워버리고 남은 그 적막이 오히려 역사의 표정처럼 보인다. 조강진(祖江津)은 김포군 월곶면 조강리와, 강건너 개풍군 조강리를 잇는 내수면 뱃길이다. 강심을 따라 휴전선이 그어졌고, 같은 이름을 가진 나루터의 두 마을이 강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다. 한강하구에 군사분계선이 획정되자 나루는 사라졌고 물가의 주민들은 소개되었다.

고려 초에서 조선이 끝날 때까지 조강진은 번창한 나루였다. 전국에서 걷히는 세곡의 거의 대부분은 서해의 뱃길을 따라 조강나루로 운송되었다. 조강나루에 쌓인 세곡은 다시 한강을 거슬러 서울로 가거나 예성강을 거슬러 개성으로 갔다. 조강은 조수가 사나워 썰물이면 배들은 강을 거슬러 오르지 못했고, 밀물이면 바다로 나아가지 못했다. 조강나루는 날마다 물때를 기다리는 선단들로 장관을 이루었고 주막과 여인숙과 짐꾼들로 북적거렸다.

조강은 지금 적막하다. 조강은 태초의 적막으로 돌아갔고, 인간이 해독할 수 없는 자연의 백색음향이 물살을 따라 밀리고 쓸린다. 날마다 강화 쪽으로 해가 저물어, 북쪽 조강마을과 남쪽 조강마을이 같은 노을에 물들고, 젊은 초병은 저쪽으로 돌아서있다.

일산에서 떠난 자전거는 느리게 북상했다. 자전거는 불과 두어 시간 만에 이 하구에 닿는다. 자전거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거기는 일산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다.

山河의 흐름엔 경계가 없었다
풍경의 안쪽 - 중부전선에서

 
책상에서 2만5000분의 1 지도를 읽듯이 육안으로 산하를 읽어낼 수는 없다. 지도는 시계(視界) 너머의 산하를 개념화하고, 육안으로 더듬는 산하는 늘 시계 안에 갇힌다.

중부전선 남방한계선상의 태풍전망대는 남한 땅에서 가장 넓은 내륙의 시계를 허용한다. 영주 부석사에서 바라보는 소백산맥의 능선이나 군산 옥구염전에서 바라보는 만경강 갯벌과 서해 쪽의 시계는 넓고, 그 시계의 권역은 비어있다.

거기서, 시선의 사정거리는 빈 공간의 가장자리쯤에서 끝나고 그 너머에 닿지 못한다. 시선이 닿지 못하는 그 너머의 공간이 다시 사람을 유혹하지만 시선은 결국 그 공간을 감당하지 못한 채 기진하는 것이어서, 옥구염전에서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크다.

태풍전망대에서는 넓은 시계 안이 산과 강으로 가득 차서 출렁거린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보려는 자들의 시선을 맞아들여서, 여기서는 흔들리는 산하의 리듬감이 시선을 따라 몸속으로 흘러들어온다.

임진강은 함경도, 황해도의 내륙산악을 파행하며 내려와 비무장지대 구간을 S자로 흘러서 경기도 연천군 왕진면 고잔하리의 배터거리(이 옛 나루터에 지금은 필승교라는 다리가 놓여있다)에서부터 남한 땅으로 유입한다.

태풍전망대에서는 황해도 금천 방면에서 흘러내려와 비무장지대를 건너가는 임진강의 전 구간이 한 눈에 보인다. 산이 하늘과 맞닿은 먼 곳에서 강은 흘러온다. 산들이 강이 나아가는 길을 비켜주는 것인지, 강은 산들의 기세가 낮게 엎드린 유순한 언저리를 골라서 돌아나간다.

유로연장 10㎞ 미만의 작은 하천 3개가 비무장지대를 동서로 흘러와 임진강에 닿는다. 작은 개울들도 작은 산들의 낮은 곳을 파고들었고 산들이 비켜가면서 강의 앞길을 예비하는 것이어서, 이 고지에서 강과 산은 서로 반가워하면서도 어려워하고 있었다.

이 관측소에서 휴전선까지의 직선거리는 800m라고 젊은 장교는 설명했다. 그러나 휴전선은 아무런 가시적 표지물도 아니었다. 그것은 이 지상의 물리적 공간 속에 부재하는 금이었다. 그 부재하는 금의 북쪽에서 산들은 바다처럼 출렁거리며 남쪽으로 몰려 내려왔고, 산협을 빠져나온 작은 물들이 큰물에 닿아 남으로 흘렀다. 산하의 리듬은 멀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불러들이는 진양조이거나 치솟고 잦아드는 휘모리였다.

관측소 앞 강 건너 쪽으로 북한의 오장동 농장 37만평이 펼쳐져 있었고 농장의 가장자리를 흐르는 개울이 석양에 붉었다. 먼 산들이 포개진 골짜기와 분지들은 보이지 않았으나, 보이지 않는 산간마을들이 봄 농사를 준비하느라고 화전을 태우는 연기가 남쪽으로 흘러왔다. 연기는 낮게 깔리면서 봉우리들을 덮었다. 한국전쟁의 격전지 베티고지와 노리고지 피의 능선은 고도 150m 미만의 야트막한 토산이었다. 지금은 물이 올라 신록의 싹을 내민 수목으로 덮여있다.

내려다보이는 격전의 고지들의 한옹큼의 흙더미였는데, 다듬어주기를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낮게 엎드려 있었다. 한계선 능선을 따라서 초소와 교통호는 끝없이 이어졌고, 야간경계근무를 신고하는 병사들의 고함소리가 능선을 따라 울려 퍼졌는데, 저무는 진양조의 산하는 더욱 먼 것들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73년 철수한 미군 흔적 일상에 널려
풍경의 안쪽 - 파주에서

 
경의선 도로를 잇는 공사가 진행 중인 파주 들에는 전쟁의 원한을 잊지 못해하는 온갖 조형물들이 들어서 있다. 여러나라 군대들의 참전기념비, 전사자 추모비, 무장공비섬멸기념비, 땅굴발견기념물, 망향비, 전적비, 위령비들이다. 길은 그 사이로 이어지고 있다. 오래전에 철수한 주한미군의 흔적들도 일상의 공간 속에 널려있다.

파주시 파평면 장파리에는 1970년에 미군이 지어준 ‘재건학교’건물 3칸이 남아있다. “미육군 중령 미카엘 호란이 지휘하는 미 육군 보병 제2사단 23연대 1대대 장병들이 지어준 학교”라는 영문표시가 선명하다. 미군 23연대는 임진강 건너편에 주둔했다. 주말이면 미군들은 ‘리비교’라는 다리를 건너 마을로 넘어와서 놀다갔다.

마을에는 미군 전용 술집 4개소가 있었다. 블루문 홀, 럭키바, 라스트찬스, DMZ홀이었다. 라스트찬스는 민통선 초입인 리비교 남단인데, 귀대하는 미군들이 마지막으로 놀다가는 업소였고 DMZ홀은 흑인병사들만 따로 노는 곳이었다. 흑인병사와 백인병사 사이에는 싸움이 잦았다. 헌병들이 늘 마을을 순찰했다.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팔던 여자들의 홀하우스는 ‘불야성’이라는 간판을 걸고 지금은 비어있다. 마을 노인회장 곽상국(73)씨에 따르면 70년대 초까지 이 마을에는 양색시 700여명이 들끓었고 전국에서 청소년이 몰려들어 미군을 상대로 하우스보이, 펨프, 구두닦이, 심부름꾼, 빨래, 행상을 해서 벌어먹었다. 블루문 홀은 지금은 개인주택이 되었고 럭키바에는 전기제품 공장이 들어섰고 DMZ홀은 싱크대 공장이 되었는데, 건물은 모두 그대로 남아있다.

‘재건학교’는 이 기지촌 마을로 몰려든 청소년들을 위해 마을주민들이 부지를 마련하고 미군들이 건축자재를 제공해서 지은 학교다. 교실 3칸에 학생60여명의 야학이었다. 서울에서 대학생들이 와서 국어와 국사를 가르쳤고 명절 때 미군들이 와서 학용품과 초콜릿을 나누어 주었다. 이 ‘재건학교’건너편의 장파초등학교 건물도 그 무렵에는 미군이 지어준 콘센트였다. 23연대는 73년에 철수했고, 마을의 경기는 급속히 침체되었다. 청소년들은 흩어져서 돌아갔고, ‘재건학교’는 문을 닫았다. 이 건물은 지금은 농업용 창고로 쓰이고 있다.

외지인들이 빠져나간 마을에는 지금 농토를 가진 주민들이 남아서 봄 농사를 시작했다. 미군들이 건너오던 리비교를 농민들이 거꾸로 건너간다. 경운기에 모판을 싣고 임진강을 건너가서 민통선 안쪽 들에 벼를 심는다. 전쟁 때, 임진강 너머 마을에서 강 하나를 건너서 피란 온 농민들도 있다. 지금 그들의 고향은 민통선 안이다. 봄에, 그 농민들은 강을 건너가 고향의 들에 벼를 심는다.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는 마을 아이들이 ‘재건학교’앞길에서 놀고 있다. 아침이면 아이들은 이 ‘재건학교’앞길을 지나서 길 건너편 초등학교에 간다. 파주 들에서는 끊어진 경의선 도로를 잇는 일의 어려움을 알만하다.

전쟁의 자취들은 일상 속에 널려있고 봄은 임진강의 이쪽과 저쪽에 가득하다. 개성으로 가는 4차로 도로가 이 들을 지나고 있다. 여기가 통일의 길목이다.
 

공간의 무한감, 북녘까지 포옹할듯
풍경의 안쪽 - 김포평야에서

 
조선화가 겸재(謙齋, 1676~1759)는 한강을 오르내리면서 강변 경관을 즐겨 그렸다. 겸재의 한강화폭들은 강을 상류에서부터 그려내려 오다가 행주산성 건너편인, 지금의 서울 강서구 개화동 개화산(128m) 위에서 끝난다. 개화산은 겸재의 최하류 관측소다.

개화산 꼭대기는 강이 스러지는 하구에 펼쳐지는 공간의 무한감을 보여준다. 겸재의 시대뿐만 아니라, 지금도 개화산 위에서 바라보는 한강하구는 아득하게 넓어서 눈 둘 곳 없다. 겸재의 화폭 위쪽에서, 흐려진 조강은 멀리 김포반도 북단을 돌아서 서해로 나아가고 낮게 엎드린 산들은 산의 잔영으로 멀어진다.

조선의 화가들은 이 하구의 먼 산들을 잔산(殘山)이라고 불렀다. 잔산은 공간을 분할하지 않는다. 잔산은 공간 속으로 풀어져서 오히려 공간의 무한감을 완성시켜준다. 그 넓은 공간에 여린 빛들이 가득해서 겸재의 화폭이 보여주는 한강하구와 김포들판은 늘 새로운 빛으로 빛나는 무한강산이다.

행주를 지나온 한강은 김포대교 아래쪽 영사정 앞에서부터 갑자기 강폭이 넓어져서 강 건너 일산 쪽 도시풍경이 눈에 흔들린다. 김포의 들판도 여기서부터 한강연안을 따라 서북쪽으로 펼쳐진다. 넓은 들의 가장자리를 다시 넓은 강이 느리게 흘러가는 김포의 무한감은 여기서 열린다. 김포는 한강이 수억만년 동안 운반해온 토사가 쌓여 이루어진 하구의 충적평야다. 낮은 산과 작은 하천들 사이에서 노년기의 지형은 편안하다. 김포평야는 한강이 낳은 자식과도 같은 땅인데, 평야는 그 아비의 넓이와 순함을 닮아 있다.

48번 국도를 따라서 김포를 건너가는 자동차 안에서는 김포의 무한감을 느낄 수 없다. 48번 국도를 버리고 고촌, 통진, 월곶, 하성 쪽 한강연안의 들로 들어서야 김포의 넓이는 드러난다.

김포평야를 자전거로 달리는 느낌은 신기하다. 오르막도 없고 내리막도 없는 들길을 아무리 달려가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오지 않는다. 뒤로 돌아서서 온 길을 거꾸로 달려도 마찬가지다. 오른쪽으로 가도 왼쪽으로 가도 진행감은 거의 없다. 자전거의 진행은 넓은 공간 속으로 파묻혀 버리고 시야에 걸리는 표적물이 거의 없어서 자전거를 탄 사람은 늘 제자리에 붙어있는 느낌이다. 들을 다 건너가서 강가로 나오면 거기서부터는 더 넓은 물이 펼쳐져서 어디까지 왔는지 알 수가 없다.

이 들이 한국 도작농업의 발상지이며, 지금은 수리시설과 경지정리가 완비된 현대식 경작지다. 논들은 모두 축구장이나 야구장만큼씩 크다. 잘 포장된 농로가 반듯하게 들판을 구획하고, 모세수로들이 그 농로를 따라 흐른다. 농가들은 대개가 5000평에서 3만평 정도의 큰 논을 기계를 써서 경작하고 있다. 안전하고 전문화된 대형 농토다. 혼자서 트랙터를 몰고 논을 갈면 한꺼번에 고랑 다섯 개가 파져서 소 다섯 마리를 몰고 나가는 힘과 같은데 소보다 깊이 팔 수 있고 속도는 소에 비교할 수 없이 빠르다.

김포평야의 농업은 오직 쌀이다. 논두렁에 콩 심고, 밭두렁에 깨 심고, 뒤뜰에 고추 심고, 텃밭에 배추 심고, 장독대에 부추 심고, 산에 가서 더덕 캐고, 소, 닭, 염소, 오리를 모두 기르는 이른바 복합식 영농은 김포평야에서는 성립될 수 없다. 김포평야의 농부들은 김포쌀을 ‘금쌀’이라는 브랜드로 부른다. 금쌀로 밥을 지으면 차지고 윤기가 흐른다. 차지다는 말은 밥알의 응집력이 좋다는 말이다. 그러나 차지다고해서 밥알이 서로 뒤엉키고 들러붙어서는 금쌀이 아니다. 금쌀로 지은 밥은 차지면서도 밥을 씹을 때 입안에서 밥알이 한알씩 따로 씹힌다. 한알의 개별성 속에 찰기가 살아있고, 응집성이 개별성을 훼손하지 않는다. 금쌀은 밥알의 응집성과 개별성의 조화이며 미각과 촉각의 종합이다. 이것은 깊어서 편안한 매혹이며, 영구히 유효한 밥이다. 놀라운 밥인 것이다.

지금 김포평야의 넓은 들에는 이 금쌀을 예비하는 어린 모들이 모판 속에서 자라고 있다. 아득한 들에 오직 벼들만이 들어서 있는 풍경은 김포의 무한감을 금쌀로 가득 채운다. 김포의 북쪽, 시암리, 가금리, 조강리 마을의 농부들은 조강 건너 북한의 마을들을 일상의 풍경으로 바라보면서 들에서 일한다. 조강에 나룻배가 다니던 시절에는 북한 개풍군 사람들과 혼인도 많이 했다. 저녁마다 서해의 노을이 이 무한공간을 가득 채우고, 김포의 무한감은 강 건너 북한 쪽까지 넓어져가고 있다.
 

분단·개발에 쇠락해간 ‘물고기 천국’
풍경의 안쪽 - 김포반도 전류리 포구에서

 
김포반도는 동쪽으로 한강하구에 닿고 서쪽으로는 염하를 경계로 강화를 마주 대하는데, 북쪽은 조강 너머로 북한 땅 개풍을 건너다본다. 넓은 강과 좁은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의 물가에는 작은 포구와 나루들이 촘촘히 박혀있었으나 종전 직후 조강의 강심을 따라 비무장지대(DMZ)가 그어지자 반도 북쪽의 포구와 나루는 폐지되었다.

지금 김포반도의 한강 연안쪽 어장은 김포시 하성면 전류리포구가 최전방이며 최하류이다. 넓은 강 건너편으로 자유로를 질주하는 자동차들과 출판단지의 세련된 건축물과 일산신도시의 고층빌딩들이 바라다보이는 이 작은 포구에서 한강하구의 전통어업은 살아있다.

한강의 어로저지선은 전류리 포구 아래쪽으로 200m 내려간 강물 위다. 거기에 월선금지를 알리는 부표가 떠있다. 이 어장의 밀물과 썰물은 한반도 남쪽에서 가장 깊이 밀고 멀리 썬다. 강은 넓고 어장은 좁은데, 좁은 어장의 물은 거칠어 어로는 힘겹고 어획은 영세하지만 고기 잡는 포구의 오래된 삶은 끈질기다.

전류리 포구는 어선 19척, 어민가구 10여호로 한강어촌계 소속의 전류리 선단을 이룬다. 이 포구보다 하류 쪽 조강포, 신리포, 마근포, 시암리, 후평리 어장은 종전 직후에 모두 폐지되었다. 어민들은 흩어져갔거나, 1t 미만의 동력 없는 목선을 끌고 전류리포구로 옮아왔다. 분단시대의 한강 어업 최전방기지는 일산시가지와 김포시가지 사이에 낀 이 한강하구의 전류리 포구다.

전류리 선단의 어선들은 0.5t에서 5t 사이의 배들이다. 작은 배는 바다에서 올라오는 고기를 잡고 큰 배는 가을에 새우를 잡는다. 이 강물 위에서 어선들은 모두 가로 1m 세로 1m 넓이의 빨간 깃발을 달아야 한다. 이 깃발은 강안을 지키는 초병들과 포구에서 200m 떨어진 저지선 쪽으로 나아가는 어선들 사이의 신호이며 식별의 장치다. 어선들은 200m 안에서 고기를 잡는다.

이 하구의 물은 하루에 두 번, 3시간 씩 계속 밀고 9시간 씩 계속 썬다. 바다의 조수는 진퇴를 반복하면서 밀고 썰지만, 전류리 포구 앞 강물은 3시간을 잇달아 상류로 치닫다가 9시간을 하류 쪽으로 쏟아져내려간다. 역류와 순류가 교차되는 순간, 강물은 10여분 기름처럼 고요해져서 미동도 하지 않는다. 전류리 어부들은 이 적막의 순간을 ‘참’이라고 부른다. ‘참’은 격랑을 예비하는 정적이다. 강물 위에서 ‘참’을 맞은 때 어부들은 다시 거꾸로 달려드는 물살이 무서워서 배의 방향을 돌려놓는다. 치고 올라갈 때 물은 ‘곧게 일어서서’ 달려드는데, 역류하는 물은 서울 강남구 압구정 밑까지 압박한다. 다시 강이 흐름을 거꾸로 돌려 바다를 향할 때 상류에 갇혀있던 강물은 한꺼번에 이 하구를 향해 쏟아져 내려온다. 전류리는 한자로 ‘顚流里’라고 쓴다. 강물이 거꾸로 뒤집혀 흐르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전류리 선단의 어선들은 이제 목선은 거의 없고 대개가 섬유강화플라스틱(FRP)배들이지만, 동력은 30마력을 넘지 못한다. 0.5t~1t의 작은 배들은 15마력짜리 스즈키 엔진 1개를 꽁무니에 달았고 그보다 큰 배들은 30마력은 쓴다. DMZ가 지척인 어장에서는 30마력 이상의 동력은 허가되지 않는다. 전류리 어부 심상록(66)씨에 따르면, 어선에 동력부착이 허용된 것은 3년 전부터다. 그 이전까지 이 어장의 모든 배들은 오직 어부의 몸으로 노를 저어서 이 사나운 물 위로 나아갔다. 17세 때 뱃일을 시작한 심씨는 50년 가까이 이 하구에서 동력 없는 배에 노를 저어서 고기를 잡았다. 혼자서 노를 젓고 투망까지 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보름사리와 그믐사리에 물은 가장 사납다. 간만차 9m 정도의 흔한 사리가 쪽사리다. 9m를 넘으면 악사리이고, 그보다 더 심하면 대사리이고 7월 백중사리는 대대사리다. 바다의 고기들은 악사리, 대사리, 대대사리 때 역류하는 물을 따라 이 하구로 몰려온다. 그래서 심씨는 지금도 물이 거친 날 새벽에는 더 일찍 일어나 2.5t 배를 끌고 강으로 나아가, 이제 어종이 말라가는 강에 그물을 던진다.

전류리 선단의 한양1호(0.45t·목선·15마력)주인 우제경(62)씨는 조강 너머 장단에서 피란 내려온 어부다. 그는 이 마을 처녀와 결혼해서, 강에서 고기를 잡아서 살고 있다. 조금 때는 고기가 많이 오지 않는다. 고기가 오지 않는 날 그는 가끔씩 가족들을 데리고 강 건너편 오두산전망대나 파주 쪽 도라산전망대에 올라간다. 거기서 그의 고향 장단의 덕물산과 그 언저리 고향의 평야가 보인다. 고향을 보고 내려와서 그는 다시 고기가 말라가는 강으로 배를 몰고 나아간다. 젊었을 때는 배가 빠질까 무서워서 잡은 고기를 버리고 포구로 돌아올 정도로 어획량이 많았다고 그는 회상했다. 상류 쪽에서 김포대교, 행주대교, 일산대교를 건설하면서 토사가 밀려 내려와 강심에 쌓이고 하류의 오염이 극심해서 어장은 메말라간다고 그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사코 이 어장을 ‘황금어장’이라고 불렀다.

“보리가 팰 무렵에 웅어가 올라오고 철쭉이 피면 황복이 올라온다. 실뱀장어, 송어, 깨나리, 참게, 새우가 철마다 나오고 민물고기와 바닷고기가 모두 모인다. 물범도 살고 있다. 마릿수가 적어지기는 했지만, 모두들 모여든다. 여기는 본래 고기의 천국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저녁 무렵에 포구에 닿은 그의 0.45t 목선에 올라가 어창을 열어보니 잔 물고기 대여섯 마리가 퍼덕거리고 있었다.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온 상인이 앉은뱅이 저울에 그의 고기를 달아서 사갈 때, 강 건너 일산 신도시 쪽으로 러브호텔, 카바레, 나이트클럽, 룸살롱, 카페, 아파트, 교회, 사찰에 저녁 불빛이 켜졌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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