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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동산동 갈비골목

대구 동산동 갈비골목 요리 맛집 정보 2008.09.10 13:59

대구 동산동 갈비골목



"큰 불 났어요" 소방관도 착각, 자욱한 숯불연기
"잘 나갈때 하루 황소 7마리 반 팔아"


 
 
# 소갈비 숯불구이의 등장

1962년 어느 날 오후, 한일극장 바로 서편에 자리잡은 대구소방서 소방관 대기실. 신참 소방관이 부리나케 대기실로 들어왔다.

"큰일났습니다. 중구 동산동 실골목 근처에 큰불이 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고참들은 하나같이 느긋한 표정이었다. 몇몇 고참들은 신참 말엔 아랑곳하지 않고 실실 웃기까지 했다.

"알았어. 동산동 근처에 불이 난 것 같다고 했지. 가까운 곳이니 굳이 불자동차(소방자동차)까지 출동하긴 뭣하니, 자네가 물통 들고 일단 현장에 다녀와봐."

동산동 연기의 내막을 전혀 알지 못한 신참은 연기나는 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1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 신참이 풀이 죽어 들어와서 고참에게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결과 보고를 했다.

"불은 불인데, 소갈비 불이라서 …."

지금은 해가 져버린 대구시 중구 동산동 대신네거리 동편 코너 옆골목에 위치한 동산동 갈비골목. 거길 지척에 두고 있는 대구소방서는 동산동 갈비골목 석쇠에서 피어오른 연기 때문에 이같은 해프닝을 숱하게 경험한다. 이 골목 주인들이 호시절을 떠올릴 때면 반드시 그 얘기를 무용담처럼 토로했다. 그만큼 장사가 잘 된 시절이 있었다는 우회적인 표현이다.

60년대, 대구에도 가든·그릴·회관 시대가 도래한다. 그곳에 가면 어김없이 맛있는 불고기, 소갈비구이 등이 있었다. 숱한 모임·회식·계·단합대회 …. 대구에 토착 자본이 풍성하게 형성된 덕이다. 북성로 기계공구 골목 등 각종 '골목산업'의 위세는 상상을 초월했다. 70년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만 해도 대구는 한강 이남에선 최고 잘나가는 도시였다. 6·25특수를 고스란히 흡수한 탓이다. 실을 만들고 천을 짜고, 그걸로 양복·양장지를 만들고 옷을 만드는 게 한 공간에서 가능한 도시가 바로 대구였다. 서문시장과 숱한 섬유공장들. 그들 사이에서 각종 실을 유통시켜주는 대구 섬유계의 허브(Hub) 구실을 한 곳이 바로 동산동 실가게였다. 특히 서문시장 포목점과 동산동 실가게는 50년대 한국경제의 심장부나 마찬가지였다. 동산동 동산파출소에서 대신동 네거리에 이르는 길이 전국 최대 '원사(原絲)거리'로 부상한다. 지역은 물론 전국에서 몰려온 숱한 사장과 도매상인들, 그들은 사업 확장과 로비, 사교 등을 위한 자기들만의 특별한 공간이 필요했다. 그 수요에 부응한 게 바로 지난 회에 소개된 불고기 전문 계산땅집과 이번 회에 소개되는 동산동 갈비골목이다.

광복 직후~6·25(한국전쟁)~60년대 보릿고개 때 서민들은 금쪽보다 더 귀하던 소고기를 구워먹을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국으로 끓이면 더 많은 사람이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질보다 양이 우선이었다. 물 한 드럼통에 고기 달랑 한 점이 미덕이었다. 하지만 경제수준이 향상되면서 국밥 마니아들이 점차 불고기·소갈비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이 즈음 "오늘, 나 소갈비 뜯고 왔다"란 말이 특권층을 암시하는 유행어로 자릴 잡는다.


◇ 대구 갈비 1호집 '진갈비'

청도군 운문면에서 태어난 진홍렬씨(70). 그는 동산동 갈비골목의 터줏대감처럼 골목 초입을 지키고 있다. 기자가 오후 3시쯤 찾았을 때 그의 아내 박분순씨(66)가 기자에게 "44년간 갈비에 붙은 살을 펴냈으니 나도 이 분야에서 아마 인간문화재라 해도 과언은 아닐끼라"면서 농담을 던졌다. 기자도 일손을 좀 거들어보았지만 뼈에 붙은 갈비살은 제대로 펴지지 않았다. 갈비살이 떨어지면 손님들은 다른 고길 붙였다고 오해한다. 떨어지지 않게 최대한 길게 펴는 기술은 하루 아침에 터득되지 않는다. 접착제를 부착한 가짜 포천이동갈비 소동도 그런 기술적 제약 때문에 발생한 건지도 모른다.

진씨는 광복 직후 수원 영동시장 내 싸전 거리에서 화춘옥(華春屋)이란 음식점을 내고 56년부터 선을 보인 수원갈비의 명성을 잘 알고 있었다. 수원갈비 1대 주인 이귀성씨가 개발한 수원갈비는 6·25 때 부산 해운대로 전파돼 해운대갈비를 파생시킨다. 해운대 암소숯불갈비도 그런 연유로 태어난 것이다. 하지만 진씨가 현재 자리에서 진갈비를 낼 때만 해도 대구에선 소갈비를 구워먹는다는 게 무척 생소했다. 그는 모험을 걸기로 맘먹고 61년 오픈을 한다. 5년 뒤 태동갈비가 생기고 뒤이어 성주식당 등 16개 업소가 밀집하게 된다. 진갈비는 훗날 원갈비, 태동갈비와 함께 동산동 갈비골목의 3인방으로 20여년간 호시절을 구가했지만 지금 남은 건 진갈비, 예전(구 태동), 먹쇠, 동산, 성주식당 등 6개밖에 없다.

그땐 식육점 주인들이 도축할 소를 공동 구매해 서구 원대3가 내환병원 옆에 있었던 도축장(거기에 있던 신흥산업은 63년 성당못 옆에서 삼익뉴타운 근처로, 다시 북구 유통단지로 옮긴다)에서 고기를 가져왔다. 진씨는 진로 측과 손을 잡고 진로의 '진(眞)'자를 넣어 진갈비로 상호를 정한다.

어둠이 깔리면 대신네거리는 온통 갈비가 익으면서 생긴 연기로 뒤덮인다. 그 냄새가 워낙 구수해 경찰들도 은근하게 업소지도를 핑계로 접대를 받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단속반이 들이닥쳤다. 진갈비가 허가 없이 영업한다고 문제를 삼은 것이다. 대구지법 박헌기 판사는 단속권이 있는 보안과에서 해당 식당들을 대상으로 영업허가에 대한 사전 홍보작업을 게을리한 점을 적시해 무혐의 처분을 한다.

당시 갈비는 1인분으로 팔지 않고 한 대(약 15㎝)씩 팔렸다. 초창기 한 대 가격은 20원이었고 생갈비보다는 양념갈비가 유행했다. 수원갈비는 큼직하게 잘랐지만, 그는 5㎝ 정도로 알맞게 잘라 팔았다. 간장과 마늘, 설탕, 배, 참기름을 적당한 비율로 섞어 갈비양념을 만들어 쟀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재는 시간을 가르쳐주는 이가 없어 숱한 시행착오를 한 끝에 6~10시간이 적당하다는 걸 체험적으로 알아낸다. 또한 고기 속 육즙을 빨리 증발시키지 않고 속까지 은은하게 익혀주는 참숯을 지금껏 고집하고 있다. 10년 전부터는 좀 더 고급인 생갈비가 지역에서 유행하게 된다.

그 시절 갈비 요리의 최대 제약조건은 저온숙성 문제였다. 지금처럼 고기 전용 냉장고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아이스박스에 얼음을 넣고 고길 저장했다. 여름엔 몇 시간만 방치해도 고기가 변질돼 먹을 수 없었다. 단골들의 상에 그 고길 얹을 수 없었다. 그런 정보를 귀신처럼 안 이웃 주민들이 문을 닫을 때쯤 나타나서는 얻어가 물에 씻어 국거리로 활용했다고 한다.

갈비는 잘 숙성시키고, 양념에 잘 재고, 그 다음에 잘 구워야 한다. 특히 구울 때 화력이 약하면 고기 맛이 없어진다. 적당한 화력에서 알맞은 시간 고루 구워야 하는데, 그걸 알고 굽는 손님들은 거의 없다. 주인이 일일이 구워줘야 하는데, 현재 그렇게 못하고 있으니 일단 손님들은 갈비의 진미를 반도 못 가져간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진씨는 "좋은 갈비 만드는 법은 밥 짓는 것과 똑같다"면서 "나쁜 재료를 갖곤 아무리 좋은 요리방법을 동원해도 결국 좋은 맛을 내지 못한다"고 말했다.

진갈비는 지금처럼 전기톱이 없어 초창기엔 도끼로 갈비를 잘랐다. 불편함을 느낀 진씨가 70년대 초 서울의 마장동에 가서 전기톱을 대구에서 맨 처음 구입했다. 지금도 그 전기톱이 식당 한 쪽에 놓여 있다. 어떤 날에는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하루에 황소 7마리 반을 팔아치운 적도 있다. 산림보호 차원에서 당국이 숯불가게에서 참나무 숯을 못 쓰게 하는 바람에 한때 화차용 갈탄으로 고기를 굽기도 했다. 한창 장사가 잘 될 때는 진로소주 영업 책임자가 진로 간판만 달고 장사를 하면 100만원을 무상으로 지원하겠다고 물밑 제의를 했을 정도다. 하지만 이 골목 역시 깔끔한 실내 인테리어, 넓은 주차공간을 앞세운 가든형 숯불갈비집의 등장과 도심교통난 등으로 인해 서산낙일의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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