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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히메지 성'

[세계문화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히메지 성' 국내외 여행정보 2008.11.03 17:23

[세계문화유산] 일본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히메지 성'







세계문화유산 '히메지 성'



[ 히메지 성, 사진 출처 : http://jssel.egloos.com ]
영어 명칭 Himeji-jo
프랑스어 명칭 Himeji-jo
등록 연도 1993년




히메지 성(일본어: 姫路城, ひめじじょう 히메지조[*]은 효고 현 히메지 시에 있는 제곽식 평산성이다. 성벽이 백색의 회벽으로 되어 있어 하쿠로 성(白鷺城: 백로 성)이라고 불리고 있다. 《白鷺城》를 잘못 읽어 시로사키 성으로 불리는 경우도 많이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근세 성곽이다. 성 전체는 세계유산이며 국가 사적이다. 천수를 포함하여 여러 건물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현존하는 천수각을 가진 12곳의 성 가운데 한 곳이며, 에도 시대 이전에 건조된 천수를 가진 성곽 중 하나이다. 천수각이 국보인 성은 히메지 성을 포함하여 마쓰모토 성, 이누야마 성, 히코네 성 이 네 곳뿐이다. 이들 성 중에서도 가장 성이 온전히 보존되어, 천하의 명성, 일본 제일의 명성이라고 불리고 있다.

성이 축성된 이래 폐성과 전화의 위기를 모두 면해, 천수를 비롯 많은 건물이 현존해 있고, 그 중에서 대천수, 소천수, 와타리 망루 등 8개동이 국보, 74동의 각종 건조물(망루 27동, 문 15동, 담 32동)이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또, 199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있다.

히메지 성의 주소인 《히메지 시 혼 정 68번지》는 일본의 주소 중 천황의 거처인 고쿄에 이어 2번째의 면적을 자랑한다. 근대에는 육군 보병 제10연대가 주둔했었다.

시대극이나 영화 등의 현지 촬영지로 유명하다.

 

히메지 성의 역사

산요도의 교통이 요지에 히메지 성이있다. 에도 시대에는 도자마 다이묘인 이케다 가문과 신판 다이묘인 마쓰다이라 가문 그리고, 후다이 다이묘가 성주로 역임하였다. 더욱이 서국[1] 도자마 다이묘의 감시를 위해 사이고쿠 단다이(西国探題)가 설치되었다.

무로마치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축성은 1346년 아카마쓰 사다노리가 남북조 시대에 그의 아버지 아카마쓰 노리무라가 히메야마 산에 세웠던 사찰 쇼묘지를 토대로 성을 축성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1441년 가키쓰의 난에서 아카마쓰 가문이 몰락하자 야마나 가문의 세력하에 있게되었다. 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오닌의 난이 일어났고, 이런 혼란한 상황속에 다시 아카마쓰 가문이 이 지역을 탈환하였다.

16세기 전반 고차쿠 성를 중심으로 아카마쓰 가문의 일족인 고데라 가문이 하리마 평야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고데라 가문의 사관이였던 구로다 시게타카가 조다이[2]로 하리마 성에 입성한다. (이 시기 축성설도 있다.) 시게타카에의해 소규모 성채정도에 불과하던 히메지 성을 개축한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고 히메야마 산의 지형을 잘 살린 중세성곽이라고 생각된다. 1573년까지 구로다 가문 대대로 조다이에 역임되었지만, 1576년 오다 노부나가의 명을 받은 하시바 히데요시가 하리마에 주둔하자, 하리마 국내에서는 오다 가문을 지지하는 세력과 모리 가문을 지지하는 세력이 대립하게 되었고, 결국엔 오다 가문을 지지하는 세력이 승리하게 되었다. 모리 가문을 지지했던 고데라 가문은 몰락하자, 사관으로 있던 구로다 요시타카는 재빨리 하시바 히데요시 슬하로 들어가게된다.

1580년 구로다 요시타카는 히데요시에게 히메지 성을 본성으로 삼도록 성을 헌상한다. 히데요시는 같은 해 음력 4월부터 다음해 음력 3월에 걸쳐 성을 대폭 개수하였고, 히메지 성은 근세성곽으로 재탄생되었다. 당시 유행했던 석벽으로 성을 둘렀으며, 더욱이 성에 천수를 세운다. 이 천수는 3층이였다고 전해진다. 성의 남부에는 대규모 성하 마을이 생겼으며, 히메지를 하리마 국의 중심지가 되도록 정비하였다. 이 시기 히메지 북쪽으로 지나던 산요도를 끌어들여 히메지의 성하 마을을 관통하게 정비하였다.

1582년 음력 6월 히데요시는 주군 오다 노부나가를 죽인 아케치 미쓰히데를 야마자키에서 격파하고 단숨에 천하 폐자의 자리에 올랐다. 다음해인 1583년 자신의 거처를 오사카 성으로 옮기고, 히메지 성은 동생 하시바 히데나가에게 주었지만, 히데나가도 1585년 야마토 고리야마 산성으로 이봉되었기 때문에 이를 대신하여 사돈 관계인 기노시타 이에사다가 히메지 성에 입성 이 지역을 다스린다.

1601년 이에사다는 빗추 아시모리 번으로 이봉되었고, 그를 대신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이케다 데루마사가 하리마 일국 52만석을 영지로 받아 히메지 성에 입성한다. 이 시기 히메지 성은 8년에 걸쳐 대폭 개수되었어며, 성의 면적도 전보다 훨씬 넓어졌다.

에도 시대

히메지 성의 조감도1617년 3대 번주 이케다 미쓰마사가 아직 유아였기 때문에 중요 거점을 맡기기에는 불안하다고 판단, 이나바 돗토리 번으로 전봉 조치한다. 그 후임으로 이세 구와나 번에서 혼다 다다마사가 15만석에 입봉되어 입성한다. 1618년 제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인 센히메와 혼다 다다마사의 아들 혼다 다다토키와의 결혼을 계기로 니시노마루를 정비해, 성의 대부분이 완성되었다.

그 후에도 히메지 번주는 신판 및 후다이 다이묘가 역임되었으며, 1749년 고즈케 마에바시 번에서 사카이 다다즈미가 입봉되어 메이지 유신때까지 대대로 사카이 가문이 성주로 역임했다. 그러나, 고쿠다카 15만석의 히메지 번의 경제력으로는 유지하기에는 너무 벅찬 성이였고, 게다가 번주가 막부의 요직에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번의 경제를 압박했다.

히메지 성은 에도 시대에도 몇 번의 수리가 있었지만, 당시 기술로는 천수의 무게를 못 이겨 지반이 침하되는 것을 보고만 있었고, 게다가 기둥과 들보등의 변형도 심했다. 민요에서도 엿볼수 있는데 《동쪽으로 기운 히메지의 성은 꽃 같은 에도가 그리운가》라고 노래하고 있다.

막부 말기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히메지 번주 사카이 다다토는 로주로써 막부측에 속해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같이 있었기 때문에 히메지 번도 조정의 적으로 인식되어 오카야마 번과 다쓰노 번의 병사 1,500명에 포위되었다. 이 때 이케다 데루마사의 자손인 이케다 모치마사가 이끄는 오카야마 번의 부대가 히메지 성을 향해 수발의 공포탄을 쏘아 위협사격을 하는 중에 실탄도 발사되어 한발이 남서쪽의 福中門에 명중되었다. 신정부군의 히메지 성 총공격이 불가피해 보였지만, 셋쓰의 호상 기타가제 쇼조가 15만량을 신정부군에 헌상해 무력충돌을 막았다. 그 간에 번주를 대신하여 성을 관리하던 가신들이 개성을 결정하였고, 신정부군과 화친하였다. 이렇게 해서 히메지 성에서 일어난 무력충돌은 일단락되었다.


메이지 시대 이후

1871년 (메이지 4년) 폐번치현과 1873년 (메이지 6년)에 공포한 폐성령에 따라 일본의 많은 성들이 해체 매각되었다. 히메지 성도 경매에 붙여져 요네다 정에 사는 한 개인에게 23엔 50전에 낙찰되었다. 성의 기와를 팔 목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해체 비용이 너무 던다는 이유로 지지부진하자 성에 대한 권리가 소멸되었다. 그 후 1927년 (쇼와 2년) 그의 아들이 히메지 성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다는 기사가 났지만, 별개의 신문이 후일 취재한 결과 사실무근이란 기사를 실었다.

성터에는 진지로서 최적의 장소라 생각한 군은 부대를 성터에 배치하였다. 그 예로 1874년 (메이지 7년) 히메지 성내에 보병 제10연대가 주둔하였고, 그 때 본성(本城) 등의 산노마루에 있는 건물과 무사시노 어전 등 다수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더욱이 1882년에 일어난 화재로 비젠마루가 소실되었다.

한편 메이지 시대 초기에 실행된 개혁이 일단락된 1877년 (메이지 10년)무렵에는 일본의 성곽 보존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있었고, 그에 따라 1878년 육군의 건축담당부서의 나카무라 시게토 대좌[3]가 육군성 장관인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나고야 성 및 히메지 성의 보존을 다조칸(太政官)[4]에 제출하도록 요구해, 일말의 성과를 얻었다. 히메지 성의 히시노 문 안쪽에는 나카무라 대좌를 기리는 현창비가 남아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예산의 문제가 남아있었고, 육군의 예산으로는 성의 보존비의 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긴급한 수리만 한 채 방치되고 있어, 지역 유지들이 중의원에 진정서를 제출하여 1910년 (메이지 43년) 국고 보조금 9만3천 엔이 지급되어 성이 대대적으로 수리되었다. 이를 〈메이지 대수리〉라고 한다. 그래도 기울어진 천수를 수리하는 데에는 비용이 부족했고, 천수가 기울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1919년 (다이쇼 8년) 육군성이 니시노마루를 수리하였고, 그 후, 제10연대는 오카야마로 이전되었다.


부전의 성

〈쇼와 대수리〉를 논하기 앞서 히메지 성은 부전의 성(不戦の城)으로 불린다. 이 것은 막부 말기와 태평양 전쟁 때 전화를 모면했기 때문이다. 막부 말기 전화의 위기는 앞서 서술했기 때문에 이제 태평양 전쟁에 대해서 서술하고자 한다.

히메지 성의 성벽은 백색으로 매우 눈에 잘 띌 뿐더러, 육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의 폭격대상이었다. 그래서, 히메지 성의 주요부분에는 검게 칠해진 망이 씌워졌다. 1945년(쇼와 20년) 7월 3일의 히메지 대공습으로 히메지 성 주변은 불길에 휩싸였다. 다행히도 본성 터에 있던 중학교 교사만 소실되었을 뿐이고, 니시노마루의 폭탄 2발은 불발 혹은 곧 소화(消火)되었다. 또, 대천수에도 소이탄이 떨어졌지만 불발로 그쳐, 성 전체는 기적적으로 소실을 면했다. (히메지 성은 중요 문화재로 폭격의 대상이 아니라는 속설이 있지만, 일본의 나고야 성과 독일에 대한 무차별 폭격 등으로 볼 때 신빙성은 없다.) 다음날 아침, 성이 무사한 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쇼와 대수리

히메지 성 대천수의 구조 모형1928년 (쇼와 3년) 히메지 성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문부성의 소관으로 되었다. 실제는 히메지 시가 관리를 맡고 있다. 1931년 (쇼와 6년) 천수각은 국보로 지정되었고, 후에 와타리 망루 등도 국보로 지정된다. 단 이 시점에서 국보는 구(舊) 국보를 뜻하는 것이다. 현재의 중요문화재에 상응한다.

쇼와 대수리는 1934년 (쇼와 9년) 니시노마루의 와타리 망루가 호우에 석벽 등이 붕괴된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건물을 한번 해체한 다음 다시 조립하는 방식이였다. 먼저 천수 이외의 건물을 손받지만, 1944년 (쇼와 19년) 태평양 전쟁의 전국 악화로 중단되었고, 다행이도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이 성이 소실되는 것은 면했다. 1950년 (쇼와 25년) 대수리는 재개되었고, 1955년 (쇼와 30년) 천수를 제외한 모든 건물의 수리가 완료되었다.

1956년 (쇼와 31년)부터 천수의 수리에 착수했으며 특히 천수 전체의 거대한 지붕을 해체 수리하였다. 이에 따라 구조물에 써여있는 여러 문장이 발견되었고, 히메지 성의 연구에도 큰 기폭제가 되었다. 한편 성을 받치고 있던 주춧돌은 철거되였고, 철근콘크리트로된 새로운 주춧돌이 놓이게 되었다. 기존의 주춧돌은 산노마루 북쪽 광장에 그대로 배열되어있다.

천수가 해체될 때 , 이를 지지하던 동쪽 기둥과 서쪽 기둥 중, 서쪽 기둥은 썩어 재사용이 불가능하였고, 이를 대신할 목재를 찾게된다. 효고 현 간자키 군 이치카와 정의 가사가타 신사 경내의 전나무가 검토되었지만, 상부가 휘어있고, 뿌리 부분이 썩었다는 의문이 들어 보류되었다. 1959년 (쇼와 34년)이 되어서야 기후 현 에나 군 쓰케치 정 (현 나카쓰가와 시)의 산에서 적당한 전나무를 찾았다. 하지만, 벌목하는 과정에서 나무가 꺾겨 버렸고, 하는 수없이 그 옆에 나무를 벌목해 운반했지만, 이마저도 나무가 너무 커서 꺾어졌다. 궁여지책으로 두 나무를 잇는 방식으로 가사가타 신사의 전나무와 이어 사용되었다. 실제 예전에 사용되었던 서쪽의 심주도 두 나무를 이어 만든 것이다. 서쪽 기둥은 구조적으로 중앙부부분이 분활되지 않으면 기둥을 세울때 먼저 세워진 동쪽 기둥의 간섭을 받아, 좁은 공간에서 작업을 해야되고, 제대로 조립을 할 수 없었기때문이다.

천수의 수리에 맞추어 기와의 중량을 경감시켰으며, 내진성을 강화시키기 위해 금속제를 새롭게 사용하였다. 한편으로는 석벽 등은 천수에 별 지장을 두지 않는다고 판단되어 대부분 손을 보지 않았다. 천수의 수리는 1964년 (쇼와 39년) 완료되었다.

천수각의 공사비는 약 5억 3,000엔으로, 태평양 전쟁전의 수리비를 물가로 환산해 합산하면 약 10억엔 (1964년 당시 가격)에 해당된다고 사료된다.

1993년 (헤세 5년)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2006년 (헤세 18년) 4월 6일 일본 100대 명성에 선정되었다.


헤이세이 대수리 (예정)

2009년도 착공 ~ 2011년도 마칠 예정이다. 공사비는 10억엔 이상으로 보인다. 목재의 부식이 진행됨에따라 대천수의 옷칠과 기와의 교체, 내진성 보강에 중점을 둘 예정이다. 보수작업중에도 견학할 수 있도록 사항을 검토하고 있다.

 

히메지 성의 구조

기본 배치


[히메지 성의 고지도]

북쪽에서 본 히메지 성과 원시림전형적으로 제곽식 평산성이다. 천수는 히메야마 산 중심에 있으며, 그 주위를 여러 건물과 성벽으로 둘러쳐있다. 전체적으로 볼때 히메야마 산의 북쪽을 기점으로 좌측선회하는 구조로 되어있다. 선회반경은 다시 내 구역, 중간 구역, 외 구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현재 내 구역의 범위가 히메지 성의 범위로 인식하고 있다. 중간 구역, 외 구역에는 성하 마을이 입지해 있기 때문에 이 구역이 히메지 성의 소가마에(総構え)에 해당된다.

내 구역의 내부는 혼마루, 니노마루, 산노마루, 니시노마루, 데마루의 5중 구조로 되어있다. 내 구역 밖에도 미즈쿠루와, 고시쿠루와, 오비쿠루와 등이 있다. 또, 이들 성문은 이로하 순[5]으로 명명되어 좀더 세밀하게 구역을 나누고 있다. 현재 산노마루는 광장으로 사용되고 있고, 데마루의 일부는 히메지 동물원에 속해있다.

이케다 데루마사가 축성한 연도는 정확히 세키가하라 전투와 오사카 전투의 중간 시점이었고, 그런 이유로 실전위주의 방어라인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화려하고 웅장하여 서국 쇼군으로 불리는 이케다 데루마사의 위엄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1615년 에도 막부에 의한 일국일성령에 따라 새로운 성을 축성하거나 성을 개축할수 없게 되어 쇼군의 명령으로 지어진 에도 성과 나고야 성 등을 제외하고는 히메지 성과 같은 규모에 성은 지어지지 않았다.

히메야마 산 북부에는 축성 이전부터 원시림이 존재해, 예전부터 혼마루로부터 원시림으로 통하는 비밀통로가 존재한다는 소문이 있지만, 현시점에서 통로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았다. 산노마루부터 니시노마루의 석벽 밑에는 사기야마구치 문이 내측해자로 연결되어 있다.

히메야마 산의 서쪽에 있는 센바 강(船場川)은 내측해자 가까이에서 흐르고 있어 해자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강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예부터 여기를 수운으로 이용했었다.

통로와 문

통로는 미로와 같이 구불구불하거나 넓어졌다 좁아졌다하여 천수가 위치한 쪽으로 곧바로 전진할 수 없게 되어있다. 본래의 지형과 하시바 히데요시가 성주로 재임한 시절의 성의 방어라인이 살아있다고 생각된다. 문도 한사람만 드나들 정도로 좁거나, 용도를 모르는 장소와 구조를 가지고 있는 점으로 볼 때 여하튼 앞으로 나가기 어려운 구조를 하고 있다. 이것은 방어를 위한 것이고 적을 분산시켜 좁은 길에서 각개격파를 하기 위한 고안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현재 성의 출입구인 히시노 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앞에 보이는 이노 문, 로노 문, 하노 문의 순으로 가는 길이 천수에 빨리 도착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 히시노 문으로부터 오른쪽에 있는 루노 문으로 가는 쪽이 빠르다. 루노 문은 토사로 묻어 숨길 수 있는 우즈미 문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적에게 불의의 타격을 입히려고 만들어 진 문이라 사료된다. 하노 문부터 니노 문에 이르는 통로는 적병이 성을 방어하는 측에 등을 보이지않으면 전진하기 어렵다. 그리고, 호노 문은 좁은 쇠문이다. 그 후에도 대천수에 도달하려면 천수군 주위를 돌지 않으면 안된다.

천수

연립식인 대천수와 소천수히메지 성의 천수는 현존해있는 12곳의 천수 중 하나이다.

히메지 성의 천수는 히메야마 산 정상에 놓여진 천수대 위에 건립된 것으로 1580년 봄 하시바 히데요시가 삼층천수를 건립한 것이 그 시초이다. 그 후 이케다 데루마사에 의해 해체 되어 이누이 소천수가 세워질때 그 부재로 사용되어 현재 모습을 띄고 있다.

천수의 구조는 동서에 두 심주로 지탱되는 5층6계 지하1층인 7층의 대천수와 3층인 소천수 3개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천수와 천수 사이에는 2층인 와타리 망루로 연결되어 있다. 이런 양식을 연립식이라고 한다. 건축시기와 구성으로 볼때 후기 망루형에 속한다. 전체는 백색의 회벽으로 되어 있어 방화, 내화, 총탄의 방어와 미관상의 이유도 있다고 본다.

천수의 외관은 다른 성의 천수와 비교해도 매우 다채롭다. 다양한 하후를 볼수 있으며 소천수에는 가토마도를 볼수 있다. 가토마도는 후기 망루형 천수인 히코네 성등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누이 소천수의 가토마도는 미완성을 강조하기 위해 격자가 없다.

히메지 성의 천수는 히메야마 산 (표고 45.6m) 정상에 건립되었고, 히메지 성 자체 높이는 석벽이 14.85m, 건물이 31.5m로 도합하자면 해발 92m가 된다. 천수의 총중량은 대략 5,700t이다. 예전에는 6,200t이였지만, 《쇼와 대수리》때 기와 등을 경량화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천수각 안에는 히메지 성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니시노마루

니시노마루(西の丸)에는 와타리 망루인 나가쓰보네(長局), 그리고, 그 북단에 위치한 게쇼 망루(化粧櫓)가 있다.나가쓰보네는 시녀인 지조(侍女)들의 방이다. 게쇼 망루는 혼다 다다마사가 이세 구와나 번에서 하리마 히메지 번으로 이봉되었을 때, 며느리인 센히메의 게쇼료(化粧料)[6] 10만석으로 1618년에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센히메는 니시노마루 안에 있는 주쇼마루(中書丸)와 산노마루(三の丸)의 무사시노 어전(武蔵野御殿)을 거처로 삼았다. 현재 두 건물은 소실되었다. 게쇼 망루(化粧櫓)에는 이름 그대로 화장품(化粧品)의 흔적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고시쿠루와, 미즈쿠루와

기름 벽으로 불리는 토담천수 북쪽에 있는 고시쿠루와(腰曲輪)에는 농성을 위한 우물과 곡물 창고인 고메구라(米蔵)와 소금 창고인 시오구라(塩蔵)가 있었다. 덧붙여 평상시에 사용되던 창고는 히메야마 산 주위에 있었다.

천수의 밑은 암반으로 우물을 팔 수 없었고, 그 때문에 천수와 고시쿠루와 사이에는 미즈쿠루와(水曲輪)를 두어, 미즈 일문(水一門)부터 미즈 오문(水五門)까지 문을 설치하였다.

고시쿠루와 안에는 호노 문 내측에 기름 벽(油壁)이라고 불리는 토담이 있다. 백색 회벽인 다른 담과 달리 차색(茶色)인 것이 특징이다. 만드는 방법과 그 이유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하고 그중 히데요시가 성주 였을 때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도 있다.

하라키리마루

본래 성의 방어와 사격 등으로 사용되던 장소였지만, 어스레한 분위기 탓에 이러한 이름이 생겼다고 사료된다. 실제 할복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고, 애당초 성안에서 죄인 등을 할복시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방어시설

이시오토시가 설치된 망루와 사마가 있는 담성벽의 담에는 수많은 구멍이 있다. 이것을 사마(狹間)라고 하는데 일종의 사격용 구멍이다. 대체로 사각형으로 된 것은 야사마(矢狹間)이며 그 외의 것은 뎃포사마(鉄砲狭間)이다. 야사마는 활을 사용해 적을 공격하는 구멍이며, 뎃포사마는 조총을 사용하여 적을 공격하는 구멍이다. 또, 천수의 벽에도 사마를 볼수 있다. 그리고, 각각의 건물에는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병에게 돌과 끓은 물로 공격할 수 있도록 이시오토시(石落し)가 설치되어 있다.

그 밖의 특징적인 구조물

건물과 담의 지붕에 있는 기와 등에서 역대 성주로 역임했던 가문의 문장들을 볼 수 있다. 이케다 가문의 호랑나비 문양, 도요토미 가문의 오동나무 문양, 혼다 가문의 아욱 문양 등이다. 그중에서 열십자 문양의 기와도 있다.

성주의 거관

애당초 성주의 거관은 천수대 아래에 있는 혼마루로 비젠마루(備前丸)로 불리고 있다. 이는 이케다 데루마사의 소령과 연관된 이름이다. 그러나, 비젠마루는 산 정상에 있는 탓에 불편하였고, 혼다 다다마사가 히메지 번으로 이봉되었을 때 산노마루에 혼조(本城)라는 거관을 지어 그곳에서 생활하였다. 제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 시대의 성주 사카키바라 마사미네가 요시와라 유곽으로부터 다카오다유[7]를 낙적(落籍)[8]시켜 살계한 니시야시키(西屋敷)가 있었다. 현재 니시야시키 터는 히메지 성의 정원인 고코엔(好古園)으로 정비되었다.

현재 산노마루의 본조(本城)가 있었던 자리는 정원인 센히메보탄엔(千姫ぼたん園)으로 정비되었고, 무카이야시키(向屋敷)가 있던 자리는 산노마루 광장으로 정비되었다. 이 산노마루 광장은 시민들의 휴식처 및 이벤트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중간 구역, 외 구역

중간 구역에는 무가 저택이 있었고, 외 구역에는 하급무사와 마을 주민들이 거주하였다. 현재 히메지 시 중심부에 남아 있는 마을 이름에서 그 마을의 성격을 알수 있다. 일례를 들자면 가누치 정(鍛冶町:대장장이 마을), 고야 정(紺屋町:직물을 염색하는 사람들의 마을) 등의 장인 마을과, 고메야 정(米屋町:미곡상 마을), 시오 정(塩町:소금상 마을) 등의 상인 마을, 고쇼 정 (小姓町:신분이 높은 사람을 보좌하는 사람의 마을) 다카조 정(鷹匠町:매를 키우는 사람의 마을) 등의 신분과 관련있는 마을, 가미데라 정(上寺町), 시모데라 정(下寺町) 등의 사찰 관련 마을 등이 있다. 에도 시대에 이렇게 성곽 안에 많은 마을이 입지해 있는 경우는 드물다. 이와 같이 도시을 둘러싼 성곽이 있는 경우를 소가마에(総構え)라고 한다. 그 밖에 소가마에가 유명한 성으로는 에도 성과 오다와라 성이 있다. 오늘날 중간 구역과 외 구역에는 해자와 석벽의 일부가 남아있고, 국도 372호(国道372号) 주변에는 다케노몬 교차로(竹の門交差点), 노자토 길(野里街道) 인근에는 노자토몬 우체국(野里門郵便局)라는 형태로 문의 이름이 남아있다. 외 구역 남쪽에는 산요 본선 히메지 역 부근에까지 달하고 있다.

그 외에도 히메지 성 주소지인 히메지 시 혼 정 68번지(本町68番地)는 주위에 경찰서, 고등학교, 미술관등이 있다. 번지로는 고쿄의 도쿄 도 지요다 구 지요다 1번지 다음으로 면적이 넓다. 혼 정 68번지(本町68番地)는 내 구역 및 중간 구역에 해당되며 메이지・다이쇼 시대에는 육군 보병 제10연대가 주둔했었다. 1980년대 이후 이 일대는 정비되거나 재개발되어 다채로운 문화시설과 관광명소가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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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유네스코가 지정한 일본의 세계문화유산 '호류지 지역의 불교건조물'

[세계문화유산] 유네스코가 지정한 일본의 세계문화유산 '호류지 지역의 불교건조물' 국내외 여행정보 2008.11.03 17:10

[세계문화유산] 유네스코가 지정한 일본의 세계문화유산 '호류지 지역의 불교건조물'








유네스코가 지정한 호류지 지역의 불교건조물






영문명 Buddhist Monuments in the Horyu-ji Area
프랑스명 Monuments bouddhiques de la région d'Horyu-ji
등록년 1993년






호류지 지역의 불교건조물 (일본어: 法隆寺地域の仏教建造物 호류지치이키노 붓쿄켄조부쓰[*]) 는 199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나라 현 이코마 군 이카루가 정에 있는 호류지(法隆寺) 및 호키지(法起寺)의 불교 건축물을 말한다.

호류지를 비롯 나라 현 지역의 불교 건축물은 쇼토쿠 태자(聖徳太子)와 인연이 깊다. 중국 육조 시대의 건축양식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호류지의 사이인가란(西院伽藍)은 건립연도에 관해 여러 설이 존재하지만, 세계 최고(最古)의 목조건물로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져있다.

호류지를 비롯한 일련의 사원들은 메이지 시대 초기에 불교에 대한 탄압으로 위축되었지만, 후에 정책은 뒤집어 졌고, 호류지 금당과 오층탑을 비롯 여러 건물이 1897년 사찰보호법제정으로 국가로 부터 보호받았다. 태평양 전쟁후 이들 건물은 1950년 제정된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국보 및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시간이 흘러 1993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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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자연유산] 우리나라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자연유산 '제주 화산섬과 용암 동굴'

[세계자연유산] 우리나라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자연유산 '제주 화산섬과 용암 동굴' 국내외 여행정보 2008.11.03 15:31

[세계자연유산] 우리나라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제주 화산섬과 용암 동굴'





유네스코 지정 세계자연유산 '제주 화산섬과 용암 동굴'






성산일출봉 정상 분지

  • 제주 화산섬과 용암 동굴 (2007)

    Jeju Volcanic Island and Lava Tubes


    제주 화산섬과 용암 동굴은 제주특별자치도에 있는 한국최초의 세계자연유산지구이다. 한라산 천연보호구역, 거문오름 용암동굴계, 성산일출봉 응회환 3개의 구역으로 구분한다. 2007 6 27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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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문화유산] 우리나라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유적'

    [세계문화유산] 우리나라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유적' 국내외 여행정보 2008.11.03 15:27

    [세계문화유산] 우리나라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유적'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유적'



     

    강화도 고인돌 유적지

  •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유적 (2000)

    Gochang, Hwasun and Ganghwa Dolmen Sites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대한민국의 세계문화유산이다. 전북 고창. 전남 화순, 경기 강화에 나뉘어 위치해 있는 고인돌군()이다.


     


    고창 고인돌유적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죽림리와 도산리 일대에 동서로 1,764m 범위에 442기가 분포해 있다.


    고창지석묘군(사적 391)

    도산리지석묘(전라북도기념물 49)


     

    화순 고인돌유적


    도곡면효산리와 춘양면 대신리 일대의 계곡을 따라 10㎞에 걸쳐 500여기의 고인돌이 분포해 있으며 고인돌에 쓰이는 돌을 캐기 위한 채석장도 발견되었다.


     
    화순 효산리 대신리 지석묘군(사적 410)

     

    강화
    고인돌유적

  • 부근리 삼거리, 오상리 등의 지역에 고려산 기슭을따라 120 기의 고인돌들이 분포해 있다

    강화지석묘(사적137

    내가지석묘(인천광역시기념물 16

    강화대산리고인돌(인천광역시기념물 31)

    강화 부근리점골지석묘(인천광역시기념물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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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문화유산] 우리나라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경주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우리나라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경주역사유적지구' 국내외 여행정보 2008.11.03 15:19

    [세계문화유산] 우리나라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경주역사유적지구'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경주역사유적지구'





    경주 분황사

    Gyeongju Historic Areas

     


  • 경주역사유적지구 (2000)

    경주역사유적지구(慶州歷史遺蹟地區)는 2000년 12월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대한민국의 세계유산으로 경주시 일대의 신라 유적,유물들을 말한다. 같은 세계유산인 일본의 교토, 나라 유적지보다 유적의 밀집도나 다양성 면에서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다.


  • 5개 지구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월성지구(月城地區), 황룡사지구(黃龍寺地區), 산성지구(山城地區), 남산지구(南産地區), 대릉원지구(大陵院地區)의 5개 지구로 나뉜다.




    신라 고분지역


    월성지구

    경주 계림(사적 제19호)

    경주월성(사적 제16호)

    경주임해전지(사적 제18호)

    경주 첨성대(국보 제31호)

    내물왕릉, 계림, 월성지대(사적 및 명승 제2호)



     

    황룡사 9층 탑 모형

    황룡사지구

    분황사 석탑황룡사지(사적 제6호)

    분황사 석탑(국보 제30호)

    산성지구

    명활산성(사적 제47호)

    남산지구

    보리사 마애석불(지방유형문화재 제193호)

    경주남산 미륵곡 석불좌상(보물 제136호)

    경주남산용장사곡 삼층석탑(보물 제186호)

    경주남산용장사곡 석불좌상(보물 제187호)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보물 제913호)

    천룡사지 삼층석탑(보물 제1188호)

    남간사지 당간지주(보물 제909호)

    남간사지 석정(지방문화재자료 제13호)

    경주남산리 삼층석탑(보물 제124호)

    경주배리 석불입상(보물 제63호)

    경주남산 불곡 석불좌상(보물 제198호)

    경주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보물 제199호)

    남산 칠불암 마애석불(보물 제200호)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보물 제201호)

    경주 삼릉계곡 석불좌상(보물 제666호)

    남산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지방유형문화재 제19호)

    남산 삼릉계곡 선각 육존불(지방유형문화재 제21호)

    경주남산 입곡 석불두(지방유형문화재 제94호)

    남산 침식곡 석불좌상(지방유형문화재 제112호)

    남산 열암곡 석불좌상(지방유형문화재 제113호)

    남산 약수계곡 마애입불상(지방유형문화재 제114호)

    남산 삼릉계곡 마애 석가여래좌상(지방유형문화재 제158호)

    남산 삼릉계곡 선각 여래좌상(지방유형문화재 제159호)

    경주배리 윤을곡 마애불좌상(지방유형문화재 제195호)

    배리 삼릉(사적 제219호)

    신라일성왕릉(사적 제173호)

    신라정강왕릉(사적 제186호)

    신라헌강왕릉(사적 제187호)

    지마왕릉(사적 제221호)

    경애왕릉(사적 제222호)

    신라내물왕릉(사적 제188호)

    경주포석정지(사적 제1호)

    경주 남산성(사적 제22호)

    서출지(사적 제138호)

    경주나정(사적 제245호)

    경주남산동 석조감실(지방문화재자료 제6호)

    백운대 마애석불입상(지방유형문화재 제206호)

    대릉원지구

    신라 미추왕릉(사적 제175호)

    경주황남리고분군(사적 제40호)

    경주노동리고분군(사적 제38호)

    경주노서리고분군(사적 제39호)

    신라 오릉(사적 제172호)

    경주동부사적지대(사적 제161호)

    재매정(사적 제24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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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문화유산] 우리나라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해인사 장경판전'

    [세계문화유산] 우리나라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해인사 장경판전' 국내외 여행정보 2008.11.03 15:14

    [세계문화유산] 우리나라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해인사 장경판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해인사 장경판전'



  • 해인사 장경판전 (1995)

     

    신라시대 애장왕 3년(802년)에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창건했다.[1] 그들은 가야산에 초막을 세우고 참선을 했는데 등창으로 고생하던 애장왕비의 병을 낫게 해주어 애장왕이 절을 창건하도록 했다. 순응과 이정 이후 결언대덕(決言大德)이란 승려가 사찰 창건을 계속했고 주지가 되었다. 918년에는 희랑(希郞)이라는 당시 해인사 주지가 고려를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고려 태조가 국찰(國刹)로 삼았다. 해인사는 5차례가 넘는 화재로 인해 여러번 중창되었는데, 현재의 전각들은 대부분 조선 말기 때의 것이다. 해인사는 1993년에 성철스님이 입적한 곳이기도 하다.


     


    해인사 창건의 참뜻은 “해인”이라는 낱말에 응집되어 있다. 해인이라는 말은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인삼매는 일심법계의 세계를 가르키는 말이며 부처님 정각의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곧 있는 그대로의 세계, 진실된 지혜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 객관적인 사상의 세계이니 바로 영원한 진리의 세계이다. 해인삼매는 또한 오염됨이 없는 청정무구한 우리의 본디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며, 우리의 마음이 명경지수의 경지에 이르러 맑고 투명해서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그대로 비치는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고려말리 1371년 세계최초의 목판본 활자


    이러한 모습을, 한 없이 깊고 넓으며 아무런 걸림 없는 바다에 비유되어 거친 파도 곧, 우리들 마음의 번뇌망상이 비로소 멈출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속에 비치는 경지를 해인삼매라 하였다. 이러한 여실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모습이요, 중생의 본 모습이니 이것이 곧 해인삼매의 가르침인 것이다.



    청정도량 해인사, 이곳은 우리들 마음의 고향이다. 그래서 황량한 대지를 방황하는 현대의 이방인들을 다정한 고향의 손짓으로 부르고 있다. 팔만대장경, 높은 탑, 자연의 그윽함이 있다고 그런 것이 아니다. 해인삼매의 한 생각, 맑은 마음 그 거룩한 도량이 바로 해인사이기 때문이다.




    해인사의 문화재_ 장경판전


    199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국보 52호 해인사 장경판전과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서 조선 태조7년에 옮겨진 국보 32호 팔만대장경, 보물 제128호 반야사 원경왕사비(般若寺元景王師碑), 보물 264호 석조여래입상(石造如來立像), 보물 제518호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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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문화유산] 우리나라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불국사와 석굴암'

    [세계문화유산] 우리나라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불국사와 석굴암' 국내외 여행정보 2008.11.03 15:04

    [세계문화유산] 우리나라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불국사와 석굴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불국사와 석굴암'


     

     

  • 불국사석굴암 (1995)


    불국사고금창기에 따른 창건역사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따르면 불국사는 신라시대 법흥왕 15년(528년)에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의 새로운 사찰의 건립 소원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사찰 건립후 574년 진흥왕(眞興王)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절을 크게 중건하였는 바, 비로자나부처님(毘盧遮那佛)과 아미타부처님(阿彌陀佛)을 주조해 봉안하였다고 기록되고 있다. 문무왕 10년(670년)에 무설전(無說殿)을 새로 지어 화엄경(華嚴經)을 여기서 가르쳤다고 하며, 그 후 경덕왕 10년(751년)에 드디어 김대성(金大城)에 의하여 크게 개수되면서 오늘날 불국사에 상징물로 알려진 탑과 성교 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다보탑



    불국사 사적에 따른 창건역사


    불국사 사적(事蹟)에 따르면 불국사는 이미 눌지왕(訥祗王)때에 아도화상(阿道和尙)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한다. 불국사고금창기에서 이미 언급 되었듯이 사찰의 대폭적인 증수는 김대성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국보 26호 금불상



     


    국보 61호 사리탑



    삼국유사에 따른 역사


    삼국유사(三國遺事) 5권 대성효 2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 조에는 역시 김대성이 불국사 창건자로 언급되고 있으며, 불교의 윤회설에 따라 이전의 부모님을 기리기 위하여 석굴암을, 지금의 부모를 섬긴다는 뜻에서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석굴암

    석굴암(石窟庵)은 대한민국의 경북 경주시 진현동 891(토함산 중턱)에 위치하여 있는 석굴사찰(石窟寺刹)이다. 신라 경덕왕 10년(751년)에 불국사와 같은 시기에 처음 세워졌으며, 신라의 건축과 조형미술이 반영되어 있다. 석굴암의 원래 이름은 ‘석불사(石佛寺)’였으나, ‘석굴’, ‘조가절’ 등의 이름을 거쳐 일제강점기 이후로 석굴암으로 불리고 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석굴이며, 1913년 이후로 일제가 수차례 해체·조립·수리하기 전까지는 원형을 유지하였다. 현재는 부실복원에 의한 습도 문제로 유리벽으로 막아 보존되고 있다.


     

     


    맑은 날이면 바다까지 내려다 보이는 토함산 중턱



    석굴암은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적인 가치와 독특한 건축미를 인정받아 불국사와 함께 1995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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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문화유산] 우리나라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종묘'

    [세계문화유산] 우리나라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종묘' 국내외 여행정보 2008.11.03 15:02

    [세계문화유산] 우리나라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종묘'


     



    유네스코 세계유산 종묘

     


     

     

  • 종묘 (1995)

    종묘(宗廟)는 조선 왕조의 역대 제왕들과 왕후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례를 봉행하는 유교 사당으로, 1394년 10월 태조가 서울로 수도를 옮긴 그 해 12월에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즉위년(1608년)에 다시 지어졌다.

     


     


    서울시 종로구 훈정동 1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사적 제1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위치상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의 남쪽에 인접해 있다. 조선시대에는 서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도로가 나면서 끊기고, 현재는 육교로 연결되어 있는 상태이다.



    종묘에서는 조선 왕조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종묘의 건축물들과 600여년 간 제례행사를 지내 온 가치가 인정되어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으며, 종묘제례(중요무형문화제 제56호)와 제사를 지낼 때에 춤과 함께 연주되는 음악인 종묘제례악(중요 무형문화제 제1호)은 2001년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등록되었다. 종묘제례는 매년 5월 첫째주 일요일에 어가행렬과 함께 전주 이씨 종친에 의한 제사로 거행된다.


     

     

    종묘는 사직단과 함께 조상에 대한 예절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조선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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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문화유산] 우리나라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창덕궁

    [세계문화유산] 우리나라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창덕궁 국내외 여행정보 2008.11.03 14:57

    [세계문화유산] 우리나라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창덕궁







    세계문화유산 창덕궁




  • 창덕궁 (1997)

    Changdeokgung Palace Complex


     창덕궁(昌德宮)은 서울시에 있는 조선 시대 궁궐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동쪽으로 창경궁과 맞닿아 있다.

     

    임진왜란 이후 다시 지어졌고, 폐허로 변한 경복궁의 역할을 대체하여 임금이 거처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곳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많은 부분이 의도적으로 훼손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그려진 《동궐도》를 참조하여 복원이 진행되고 있다.


    돈화문의 야경돈화문(敦化門)은 창덕궁의 정문이다. 조선 태종 12년(1412년)에 처음 세워졌으며, 지금의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광해군 원년(1609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1963년에 보물 제383호로 지정되었다.


    금천교


    금천교((錦川橋)는 창덕궁 입구와 인정전 사이에 흐르는 개울에 놓인 돌다리이다. 조선 태종 11년(1411년)에 세워졌다.




    인정전 내부인정전(仁政殿)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 2층 구조이다. 1405년 처음 지어졌다가 1418년 다시 지어졌다. 이 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10년 중건하였으나, 1803년 다시 소실되어 이듬해에 재건하였다. 앞마당은 조정이라 불리며, 품계석이 늘어서 있다. 일제 강점기에 조정에 잔디를 깔았으나, 지금은 다시 박석으로 덮여있다.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5호로 지정되었다.


     


    선정전(宣政殿)은 조선 시대 때 왕과 신하들이 나랏일을 논하던 곳이기도 하며, 왕비나 왕족들과 크고 작은 연회를 열기도 한 곳이다. 즉 지금의 대통령 집무실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정전과 복도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 보물 814호이다.


    어차고


    어차고(御車庫)는 대조전 앞에서 조금 먼 뜰에 있으며, 고종 황제와 순종 황제의 옛 차를 보관하여 어차고라고 한다. 현재 어차는 궁중유물전시관에 전시되고 있다.





    보물 제815호인 희정당(熙政堂)은 연산군 2년 대조전 남쪽에 왕이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는 편전으로 지어졌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복구하였으나, 인조 반정 때 또다시 불타 1647년(인조 25년)에 다시 지었다. 1833년(순조 33년)에 대조전과 함께 불에 타서 이듬해에 재건하였으나 1917년에 또 불에 탔다. 지금의 건물은 1888년(고종 25년)에 지은 경복궁의 강녕전을 1920년에 옮겨다 개조한 것이다. 희정당은 정면 11칸, 측면 5칸 규모이고 네 귀에 모두 추녀를 단 팔작지붕을 얹고 있으며, 처마의 무게를 받치는 공포가 새 날개 모양인 익공 양식을 사용하였다. 가운데 3칸을 응접실로 사용하였고, 좌우에 여러 칸의 작은 방을 만들었으며 그 방 뒤쪽에 골방과 목욕탕 등을 설치하여 용도에 맞게 사용하였다.





    대조전


    대조전대조전((大造殿))은 조선 시대의 왕 인조과 효종, 순종을 비롯하여 성종이 승하한곳이고, 순조의 세자로 나중에 추존된 익종이 태어나기도 한 곳이다. 보물 816호이다. 태종 5년(1405년) 에 지었는데, 임진왜란과 그 후에도 화재로 여러 번 다시 짓기도 하였다. 1917년 또다시 화재가 났는데,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고 다시 이곳에 재건하여 '대조전'이라는 현판을 걸어 오늘날까지 자리 잡고 있다. 내부는 대체로 서양식으로 침전이고 침대 등이 있다.



    낙선재 일대


    낙선재(樂善齋)는 헌종 13년(1847년)에 지어진 창덕궁의 건물이다. 이 일대에는 숙종, 정조, 헌종 때에 지어진 소박한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부용지와 부용정창덕궁 후원의 연못과 연못 남쪽의 정자를 부용지(芙蓉池)와 부용정(芙蓉亭)이라 하며, 부용정 맞은편에는 주합루(宙合樓)와 규장각(奎章閣)의 2층 건물을 비롯하여 여러 건물들이 있다. 규장각은 정조 즉위년(1776년)에 지어졌다.


    영화당


    영화당(暎花堂)은 부용정 동쪽에 있는 건물이다.


    불로문


    조선 시대 왕들의 불로장생을 기원하는 연경당 앞에 세워진 문이다. ㄷ 자 모양의 단순한 돌문으로 맨 위에 불로문(不老門)이라 쓰여 있다. 단순한 돌문이다. 불로문의 기둥에 쇠가 걸렸던 흔적으로 보아 본래는 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문을 지나가 는 사람은 무병장수한다고 알려진다. 동궐도에 의하면 불로문 앞에는 불로지(不老池)라는 연못이 있었다.


     


    옥류천


    애련지(愛蓮池)와 애련정


    창덕궁 후원의 애련정애련정(愛蓮亭)은 숙종 18년(1692년)에 지어졌다.


    연경당


    연경당 내부의 건물들연경당(延慶堂)은 순조 28년(1828년)에 창덕궁 후원에 지어진 집으로, 왕궁이 아닌 상류 주택의 양식을 따라 지어졌다. 총 99칸이다.


    금호문(金虎門)은 창덕궁 안에 있는 문으로 1926년에 금호문 의거가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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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문화유산] 우리나라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

    [세계문화유산] 우리나라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 국내외 여행정보 2008.11.03 14:53

     [세계문화유산] 우리나라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





  • 수원 화성 (1997)

    수원성_ 화성(華城)은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에 있는 5.4km 길이의 성곽이다. 1963년 사적 3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수원 화성은 한국 성의 구성요소인 옹성, 성문, 암문, 산대, 체성, 치성, 적대, 포대, 봉수대 등을 모두 갖추어 한국 성곽 건축 기술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된다.




    조선 후기 정조때인 1794년 착공하여 1796년에 준공되었다.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그 무덤을 최고의 명당 터로 옮긴 정조는 그 인근에 신도시인 화성을 건설했다. 기존에 화강암으로 쌓았던 방식을 버리고 벽돌로 쌓는 축성 공사에는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가 활용되어 인력 소모를 적게 하였다. 화성성역의궤라는 공사 보고서가 있다.


    화성은 돌로 성곽을 쌓은 석성이다. 네 개의 대문과 두 곳의 수문이 있다.


    대문으로는 장안문(북문), 팔달문(남문), 창룡문(동문), 화서문(서문)이 있다. 장안문과 팔달문은 옹성을 둘러 적이 쉽게 문을 부수지 못하도록 하였다. 성곽에는 돈대, 각루, 공심돈, 적대, 장대등 적의 침입을 방비하는 시설을 갖추었다.


    장안문은 화성의 정문으로 화강암을 다듬어 큰 무지개 문을 만들고 그 아래로 왕의 가마가 지나갈 수 있도록 넓은 길을 냈다. 그 앞으로 옹성과 두개의 적대를 세워 보호했으며, 옹성은 독을 반으로 쪼갠 모습으로 성문을 둥글게 감싸고 있어 바깥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없고, 적이 성문을 쉽게 공격하지 못하게 하는 구조를 가졌다. 그 이름은 중국의 수도였던 장안을 본 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장차 수도로 만들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화홍문


    화홍문은 화성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홍수를 대비하여 수원천 위에 세워졌다. 인근의 방화수류정은 경관이 매우 좋다.




    팔달문의 화성의 남문으로 전국 각지로부터 사람과 물산이 모이고 흩어진다는 뜻이다. 현재 좌우의 성벽은 헐려 길이 생기고 건물들이 들어섰다. 축대위로 누각이 서 있는데 2층으로 지어져 매우 높게 보인다.




    화성의 서쪽에 좌우 성벽에 연결되는 석축에 무지개 모양의 문양의 문을 내고 그 위에 단층 구조의 문루가 있는데 이것이 화서문이다. 화서문의 옆에 서북공심돈이 있는데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 경계할 수 있도록 높게 지어진 망루로 벽면 곳곳에 나 있는 구멍으로 활과 포도 쏠 수 있다.


    서장대는 팔달산의 정상에 선 망대로 사방 100리가 내려다 보인다. 정조는 이곳에 올라 군사훈련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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