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 신용대출, 담보대출, 성형수술, 성형, 지방흡입, 임플란트, 라색, 라식, 화환, 꽃배달, 기념일, 선물, 주식, 펀드, 금융, 여행, 신혼여행, 결혼


따로국밥(상)-국일식당

따로국밥(상)-국일식당 요리 맛집 정보 2008. 9. 10. 15:02

따로국밥(상)-국일식당

김두한 측근에 '매운 맛'…상표권 싸움서 한판승
'남편위해 끓인 국밥' 나무꾼들 외면못해 시작…6·25때 대히트 불구 "상놈이 먹는 국이지" 소리에 "따로 잉교?" 등장


 

#국일의 미공개 소송 비사

"뭐라고, 대구에 우리와 비슷한 상호를 가진 식당이 있다고. 그것 참…."

1996년 어느 날, 한때 주먹왕 김두한의 측근으로 활동한 서울 종로3가 K나이트클럽 모 회장(작고)이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K나이트클럽은 1924년 태동, 일제 때 명월관과 함께 최고 요정으로 군림했고, 광복 후 한정식 식당으로 변했다가 그 무렵 식당가, 복합 영화관, 나이트클럽 등이 입주한 복합빌딩시대를 열고 있던 차였다. 회장은 K의 배타적 권리를 선점하기 위해 1960년대초 서둘러 특허청에 상표등록을 했다. 그런데 10년마다 한 차례씩 상표등록을 갱신해야 하는 걸 담당자가 깜빡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때 대구시 중구 전동 흥국생명(80년 신축) 바로 서편에 자리잡고 있던 국일 따로국밥도 'K'와 이름이 비슷한 국일(國一)이란 상표를 특허내던 차였다. 양측은 그때까지 서로의 존재를 별로 모르고 있었다. 당연히 K쪽은 펄쩍 뛰면서 자기 상표권을 지키려고 소송을 제기한다. 국일도 대구 따로국밥의 자존심을 걸고 송사에 뛰어들었다. 3년여간의 소송, 법원은 국일 측의 손을 들어줬다.

그날 이후부터 한국 식당 및 유흥업 관련 업소는 '국일'이란 명칭이 들어간 상호를 일절 사용 못하게 된다. 물론 K도 자기 상호를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솔직히 K 입장으로선 날벼락인 셈이다. K측은 소송 전까지 국일을 얕잡아 본 것도 사실이다. 지방의 국밥집이 파워가 세면 얼마나 셀 것인가 하고 하대했다. 그런데 소송 과정에 K 못지않은 국일의 역사를 알곤 태도를 바꾼다. 국일측도 K한테 너무 매정하게 대한 것 같아 한발 양보한다. 그런 연유로 K는 지금 국일한테 로열티를 지급하고 상호를 사용하고 있다. K의 회장도 작고하기 전 몰래 대구로 내려와 그 국밥을 먹어봤고 측근들에게 "따로국밥이 소문대로 맵긴 맵군"이라며 국일을 재평가했다고 한다.

#국일은 어떻게 태어났는가

소피와 양지머리, 사골을 끓여 만든 육수, 파와 무, 그리고 고추기름이 가미된 '대구식 육개장'의 본산인 국일.

고사리와 계란이 가미된 서울식 육개장과 엄격하게 구별되는 국일 따로국밥이 97년 대구시 향토음식으로 지정되긴 했지만 아직 따로국밥이 대구를 대표하는 음식이란 전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동안 국일이 언론에 숱하게 알려졌지만 처음 문 열 때 위치, 메뉴와 조리법 등도 정확하지 못한 측면이 있고, 관련 사진조차도 거의 공개되지 못한 아쉬움도 있다.

국일의 가업은 1대 서동술(69년 작고)·김이순씨(75년 작고) 부부한테서 7남 봉준(81년 작고)·최영자씨(65) 부부로 이어지고 98년부터는 창업자의 손자 경덕(42)·경수씨(34) 형제에게로 체계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1대 서씨 할아버지는 구미시 해평면 출신으로 남구 성당못 근처에서 살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광복 직후 고향에 왔지만 먹고 살 일이 막막해 46년 한일극장 옆 공터 나무시장에서 나무를 팔면서 입에 풀칠을 했다. 김씨 할머니는 식성이 까다로운 남편을 위해 직접 나무시장까지 와서 점심을 해주고 갔다. 추운 겨울엔 국밥을 잘 끓였지만 정 많은 노부부는 국 냄새를 맡고 곁으로 몰려드는 나무꾼들을 외면하지 못하고 국을 좀 더 끓여줬다. 서씨의 권유로 김씨 할머니는 부창부수(夫唱婦隨)하기로 작정한다. '구루마' 한 쪽에 국거리가 담긴 작은 무쇠솥을 싣고 집과 나무시장 사이를 왕래했다. 국일의 출발은 그토록 허름했다.

국일이 처음 태동한 한일극장 옆 공터는 '음터'로 불린다. 공터 왼편 수백년된 회나무가 유명했는데, 경상감영시절엔 교수대로 활용돼 '흉목(凶木)'으로 터부시됐다. 회나무는 6·25 직전 군정청에 의해 베어진다.

40년대 국일은 번듯한 식당이 아니었다. 간판도 없었다. 단골에겐 그냥 성당동 할매, 서씨 할배집으로 통했다. 지금 같은 개별 의자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냥 돌멩이 두 개 위에 송판을 놓고 여러 명이 함께 앉도록 했다. 방도 2개가 있었고, 마당엔 늘 무쇠솥이 두 개 놓여 있었다. 서씨 할아버지는 고령군 다산면에서 올라 온 따로국밥용 '다끼파'를 서문시장에서 사와 틈만나면 다듬었다.

47년쯤 칠성동에 대성연탄 저탄장이 생긴다. 장작보다 훨씬 화력이 좋은 연탄이 국밥집에서 각광을 받는다. 몰래 훔쳐 온 석탄 가루는 찰흙, 폐유 등과 뒤섞여 음반으로 말하면 해적판 같은 '야미(闇)연탄'이란 이름으로 식당가에 불법유통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국일 바로 옆에 남일동 사창가(현재 미도백화점 자리)가 형성돼 있었는데 아침이면 해장 손님을 위해 직접 냄비를 들고 국을 사러 온 홍등가의 여인들도 있었다.

국일 따로국밥은 6·25의 히트작이다. 타지 피란민들이 들끓기 시작하고 전시 특수를 노린 상인들의 행보가 빨라진다. 국립극장으로 변한 한일극장엔 연일 유랑극단 배우들로 들끓는다. 국일도 덩달아 호황을 누릴 수밖에 없었다. 황금심, 남인수, 허장강, 구봉서, 배삼룡 등 악극 배우들도 거의 매일 국일을 찾았다. 여름철엔 주로 교동시장 내 강산면옥, 부산 안면옥 등으로 갔지만 겨울엔 국밥집 만한 곳이 없었다. 곱상하게 생긴 여배우들은 국에 밥이 말려진 국밥을 멀리했다. 사실 나무꾼만 찾았던 40년대는 국에 밥을 만 국밥 단일 메뉴가 문제될 게 없었다. 그런데 각계각층 피란민들이 손님이 되면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한다.

특히 식성이 까다로운 여배우들은 국밥에 유달리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켰다. 주문할 때도 "할머니, 전 국하고 밥하고 진짜 따로 주세요"라고 특별주문해 남자 배우들로부터 핀잔을 먹기도 했다. 가끔 갓 쓴 지체 높은 양반때문에 낭패도 당한다. "이게 상놈이나 먹는 국이지." 그런 소릴 듣고나면 노부부는 맥이 풀린다. 김씨 할머니도 더 긴장한다. 실수를 안하기 위해 손님들이 들어오면 늘 "따로잉교"라고 메뉴를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잡기장에 따로만 먹는 손님 이름도 별도로 적어뒀다. 대구로 온 피란민들 사이에 그 국밥이 점차 '국일 따로'로 공인된다. 결국 국일은 피란민들 때문에 국과 밥이 분리된 '따로'란 유별스러운 메뉴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만들게 된다. 그런데 이런 질문도 할 수 있다. 부산도 피란지인데 왜 하필이면 대구만 따로인가. 그건 당시 부산 국제시장 인기 음식이 돼지국밥인 탓이다. 돼지국밥은 국과 밥을 따로 내면 맛이 별로다. 당연히 국과 밥이 한데 섞여있어야 했기 때문에 '따로 소동'이 터질 리가 없다.

피란민들이 상경하자 국일도 비좁은 한일극장 옆 나무시장 시절을 청산하고 현재 흥국생명 자리로 이전한다. 그때 서씨 할아버지도 어엿한 식당 주인으로 처신한다.'국일'이란 상호를 직접 붓글씨로 적는다. 국일 간판은 1965년부터 정식으로 달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금복주가 그해 4월 1일부터 시내 보신탕집, 유명 식당 등에 홍보차원에서 간판달아주기 판촉전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금복주가 국일을 그냥 놔둘 리 없었다. 서씨 할아버지가 '나라에서 제일 맛 좋은 국밥집'이란 뜻으로 '국일(國一)'을 상호로 정한다. 이때 금복주 측의 요청에 따라 맨 왼편에 붉은 페인트로 금복주, 맨 오른편엔 복영감 마크가 들어간 함석 간판을 달게 된다. 이 무렵 금복주 간판 제작은 대구시 중구 동문동 동인네거리 근처 백마사 정규환 사장이 도맡았다.

국일은 대구은행 중앙로지점 서편 흥국생명 자리(단층 슬레이트조, 크기는 150여평, 8개 방에 홀 갖춤)에서 10년 머물다가 73년 흥국이 대구 사옥을 짓자 골목 안 현재 한일따로 건물에서 약 30여년간 영업을 하다가 7년전 지금 자리로 이전한다. 전성 시절 웃지 못할 일도 생긴다. 통행금지 해제 30분전에 문을 두드리는 간 큰 사람이 있었다. 야통 단속 경찰들이었다. 첫 국을 맛보기 위해 야근을 끝낸 중부경찰서 경찰과 경찰 출입기자 등도 가세했다. 그들로선 특권 아닌 특권이었다. 자연스럽게 국일은 다른 곳보다 약 30분 먼저 통금이 해제될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 국일은 한 마디로 술꾼들의 '해장터'였다.
 


Posted by 비회원

댓글을 달아 주세요

하단 사이드바 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