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 신용대출, 담보대출, 성형수술, 성형, 지방흡입, 임플란트, 라색, 라식, 화환, 꽃배달, 기념일, 선물, 주식, 펀드, 금융, 여행, 신혼여행, 결혼


따로국밥(하)-청도집

따로국밥(하)-청도집 요리 맛집 정보 2008. 9. 10. 14:58

따로국밥(하)-청도집

하루, 딱! 200인분만 끓여, 지각 손님들 '주방 습격'
단골 거지엔 1년에 한번씩 밥값 지불 요구 "굶주림 채우는 인정따로…염치교육 따로"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사진은 한겨레신문에서 퍼온 따로국밥 사진 ]

 
5년 전 대구 따로의 전통을 잇기 위해 경산 영남대 근처에서 문을 연 가마솥 국밥 온천골 상인점 주인 김용태씨(60)가 참·감나무 피목을 아궁이에 넣고 부뚜막에 걸린 전통 가마솥에 담긴 국을 정성스레 끓이고 있다. 
 
"이노무 짜식, 청도집 국 사오라캤지, 누가 청도관 꺼 사오라 카더나."

"아부지예, 내가 보이께 마 그 국이 그 국이데예."

"뭐라카노, 니가 국맛을 우예 아노. 청도관은 국기름이 벌겋게 응겨있어 딱 질색이다."

광복 직후 어느날 아침, 대구시 중구 남산동 골목에서 흘러나온 한 부자 간의 대화 내용이다. 그 무렵 자식들은 공부는 뒷전이고 아버지 심부름이 큰 일이었다. 술 심부름 아니면 술국 심부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침 나절 냄비들고 술국 심부름가는 아이들의 행렬이 볼 만 했다. 아버지께 혼이 난 남산동 모씨 아들, 깜빡하는 바람에 청도집으로 가질 않고 집에서 가까운 청도관 해장국집으로 간 것이다.

청도집과 청도관은 국일관(현재 국일따로를 그땐 일부러 그렇게 부름. 실제 국일관이란 고급요리집도 45년 동문동에서 영업했다)과 함께 광복 직후 대구의 3대 해장국 집으로 주름잡는다.

일제 말엽 문을 연 청도관은 전통 대구식 육개장을 빚었고 청도집은 선지우거지 해장국 스타일이었다. 청도관은 현재 중앙파출소 서편 약전골목 초입 왼편에 있었고, 청도집은 처음엔 만경관 동편에 있다가 나중에 교동따로 맞은편 심이비인후과 자리로 옮겼으며, 결국 구 상서여상 맞은편에서 최후를 맞는다.

구한말까진 대구읍성 남문(영남제일관) 앞 염매시장에서 계산성당으로 이어지는 뽕나무 골목 좌우편에 주막형 여관이 우후죽순 포진해 있었다. 거기가 바로 대구 육개장의 발상지이지만 상권 이동으로 광복 직후엔 중구 전동 골목으로 서북진한다.

청도집은 그 시절 술꾼들에겐 '묻지마 술국'으로 통했다. 거긴 숙취를 한 방에 풀어주는 '병원'같은 곳이었다.

이 곳 내력을 잘 알고 있는 강판용씨(85·제3대 대구시의원·전 삼보건설회장)는 "문닫지 않고 지금까지 명맥을 잇고 있었다면 한강 이남에선 가장 오래된 문화재급 국밥집이 됐을 것"이라며 "자식들이 가업을 제대로 못 이은 게 무척 안타깝다"고 증언했다. 청도집은 만경관 동편에 남북 방향으로 길게 자리잡았던 구한말 대구진위대(1907년 8월4일 해산) 주둔지였던 남영(南營·수천평 규모로 화교학교 등을 포함, 경상감영공원보다 더 넓었음)의 허름한 문간방에서 첫 출발했다. 청도집은 처음엔 달동네 주민들을 상대했지만 점차 '도민 해장국집'으로 성장하다가 60년대 초 한일로(현 국채보상로)가 뚫리면서 심이비인후과 자리로 이전한다.

90여평 넓이의 기와집이었던 청도집. 오전에 200인분 정도 국을 끓여서 팔고 나면 더 이상 손님을 받지 않았다. 물을 더 부어 국을 끓인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었다. 18년 전 쯤 타계한 김천 출신의 주인 김씨 할매의 시댁은 청도였다. 대구로 따로 살림을 나와 먹고살 게 없던 청도 할매는 그 시절 식당 여주인들이 다 그러했듯 시댁에서 배운 요리 솜씨만 믿고 식당을 연 것이다.

미원(57년 등장)이 들어가지 않아 맛이 특출날 수밖에 없었다. 청도 할매는 국일관 김이순 할매, 요정 청수원 여주인 김태남처럼 여걸 스타일이었다. 가끔 국이 떨어졌다고 해도, 손님을 밀어내도 유별난 단골들은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주방으로 직행해 찬모들을 기겁케 했다. 독에 받아놓은 물을 한 바가지 넣고 가마솥 주변에 눌어붙은 시래기, 우거지, 근대를 주걱으로 긁어모아 내일 국끓이용 고기 몇 점 섞어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국요리를 했다. 그 시절에만가능했던 인정어린 광경이다. 당시 가마솥은 3개, 새우젓으로 담근 깍두기 맛이 워낙 깊고 시원해 국 없이 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우는 손님도 있었다. 할매는 자주 가마솥 자랑을 늘어놓았다.

"우리 가마솥에 기름이 하도 많이 묻어 있어 물만 넣고 끓여도 대구 사람 반은 충분하게 믹일끼라."

70년대 중반까지 깡통든 거지들이 청도집을 자주 찾았다. 하지만 그들은 '말벌집'이었다. 잘못 건드렸다간 예상치 못한 봉변을 당할 수 있었다. 당시 식당 주인들에겐 거지와 상이군경은 박절하게 못 대하는 불청객이었다. 청도 할매도 그걸 감지하고 식은 밥에 국을 듬뿍 담아주었으며 파워있는 거지에겐 별도 자리까지 마련해줬다. 하지만 '거지근성'엔 매정했다. 1년에 한 번 정도는 꼭 밥값을 내도록 유도했다. 거지도 염치가 있어야 먹고 살 수 있다는 걸 가르쳐 주고 싶어서다. 그렇게 길들인 걸인들 중에 훗날 대오각성, 청도해장국 노하우를 전수해 식당 주인으로 변신한 사람도 있었다.

선거철이면 반월당 신민·민주당사 당원들의 '사랑채'였다. 74년 12월27일 덕산동 반월당 신민당 경북지부당사 현판식 참석차 대구에 온 김영삼 총재가 이틀간 상이군경회원들에 의해 숙소인 금호호텔(현 아미고호텔)에 감금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때 대구에 온 전국 기자들과 신민당원, 정보 형사들이 철야의 피곤한 몸을 푼 곳도 청도집이었다.

청도집 해장국에는 사골 곤 육수와 근대, 우거지, 시래기, 동배추 등과 선지, 고추기름, 콩나물, 양념으로 마늘과 된장 등이 가미된다. 전체적으론 서울 청진동 해장국과 전주 콩나물국밥, 시래깃국, 육개장이 절충된 스타일이었다. 그땐 기름이 인기였다. 없어서 못먹었다. 청도집은 청도관과 국일관에 비해 벌건 기름 기운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청도집 영업은 보통 오후 3시 정도면 끝이 난다. 그렇기 때문에 오전에 국밥을 먹으려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100명 이상 손님을 동시에 수용할 수 없어 청도집 할매는 쌍둥이 아들이 경영하던 명문다방의 테이블까지 식탁으로 활용했다. 주방에서 퍼담은 국밥을 다방으로 배달하는 모습이 볼 만 했다.

한 시절을 풍미했던 청도집, 하지만 그 종말은 비극적이었다.

'식당 해서 번 돈 남편 아니면 자식이 탕진한다'는 옛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심덕 좋은 청도 할매가 어렵게 모은 자산은 안타깝게도 쌍둥이 아들의 사업 자금으로 들어간 다음 사업 실패로 날아가고 만다. 이사간 청도집도 경매에 넘어가고 말았다. 청도집은 이후 심이비인후과 측에 팔려 철거된다.

쌍둥이 아들은 단골들의 압력(?) 때문에 청도집을 살리려 구 상서여상 맞은편 오모 내과 동편 골목 안에서 제2의 창업을 했지만 2년도 안돼 문을 닫고 만다. 거리엔 국밥보다 더 맛있는 음식이 폭증했다.

청도 할매의 손맛은 누가 답습했을까. 취재 결과 남구 그랜드호텔 뒤편 찜 전문 일송정과 남구 대명9동 한정식집 일송명가의 한 관계자에게로 흘러들었다. 그 식당의 한 관계자가 청도 할매 며느리로 들어간 것이다. 또 청도집 주방 찬모에게서 국 끓이는 법을 배운 강봉업씨가 27년 식당 경험을 앞세워 99년 예전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청도 해장국집을 연다. 이 집은 청도식 해장국을 끓이지만 식재료로 시래기를 선호한다. 요즘도 가끔 몇몇 노인들이 그때 청도집 시절을 못잊어 여길 들르기도 한다..
 


Posted by 비회원

댓글을 달아 주세요

하단 사이드바 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