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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개장 전문 대구 '옛집'

육개장 전문 대구 '옛집' 요리 맛집 정보 2008.09.10 14:40

육개장 전문 대구 '옛집'

"덧칠 안한 맛" 40년간의 고집
대파의 흰뿌리·무로 국물, 소피·고사리 안넣어 '깔끔'
미로같은 시장북로에 위치, 4칸의 방안 "손님들 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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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밥은 주막식과 장터식 두 종류가 있다. 이젠 그 구분도 애매하고, 소고기 국밥으로 통합된 듯 하다. 물론 곰탕, 설렁탕, 갈비탕도 국밥에 포함된다. 쉽게 말해 주막 국밥은 '시래기국'을 닮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는 주막이 시들해지면서 시장 곁으로 모여들고 소고기가 많이 섞인 육개장 스타일의 '장국밥'으로 변형된다. 일반인들은 육개장과 소고기 국의 차이점을 궁금해 한다. 하지만 일치된 학설은 없다. 다만 육개장 국물은 통상 사골로 만들고, 소고기 국은 소뼈 대신 양지머리를 사용한다고 보면 된다. 소고기 국은 예상치 못한 손님이 들이닥쳤을 때 1시간 내 후딱 끓일 수 있어 경상도 주부들이 선호한다. 소고기 국엔 녹두발, 토란 등도 가미된다. 물론 대구 따로국밥은 '육개장'분과에 속한다. 지금 간단하게 끓여 먹는 소고기 국은 대구따로국밥과는 조금 차이가 난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엄격하게 분류하기 힘들다. 표준 요리법이 주방마다 제각각인 탓이다.

대구의 경우 주막식 국밥은 청도집(대구시 중구 종로 심이비인후과 자리)으로 명맥이 이어지다가 사라졌고, 장터국밥은 국일 식당과 옛집, 벙글벙글 등이 각기 다른 스타일로 전수하고 있다. 일본과 달리 우리는 그렇게 오래된 국밥집을 갖고 있지 못하다. 주인이 바뀌지 않고 혈족이 대를 이어 최소 5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국밥집은 눈을 닦고 찾아봐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식당문화가 광복 직후 본격화됐기 때문이다. 전국 3천여군데 식당을 두루 섭렵하고 '2000년 한국의 음식명가 1천300집'이란 음식기행 가이드북을 펴낸 김순경씨(64)는 주막식 국밥의 대표격을 경남 의령경찰서 옆 '종로식당', 장터국밥은 의성읍 의성 큰 장터 한 켠에 50여년간 자릴 잡고 있는 소머리 곰국 전문 '남선옥'을 꼽았다.

종로식당은 의령의 터줏식당 격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남해고속도로 공사 현장 방문차 이 식당에 두 번이나 다녀가고, 전두환 대통령도 고향을 다녀갈 때 들러 '대통령 국밥집'으로도 불린다. 60여년째 종로식당을 지키고 있던 이봉순 할머니는 최근 타계했고, 현재 며느리 송영희씨(42)가 2대 주인으로 활동중이다. 이곳은 소뼈를 끓이지 않고 양지, 갈비살, 뱃살을 삶아 국물을 만든다. 특이한 점은 대구 육개장과 달리, 대파 대신 콩나물과 설렁탕용 쓴 쪽파가 고명으로 올라가 꼭 콩나물 국 같다. 이런 스타일은 요즘 장례식장 용으로 많이 유통되고 있다.

대구시에 의해 향토 따로국밥집으로 분류되지는 않았지만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국밥집이 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게 중구 시장북로 육개장 전문 '옛집'이다. 서문교회 북측 골목 미싱가게 뒤편에 자리한 50여평 규모의 이 허름한 국밥집은 일반인들에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찾기도 힘들고 별도 주차공간도 없다. 게다가 밤에는 국을 팔지 않고 낮에만 그냥 끓인 국을 팔기 때문에 단골만 찾는다. 하지만 1960년대만 해도 달성공원 초입 나무시장에 나왔던 마부는 물론, 국맛때문에 지역 명사들이 자주 출입했다. 구자춘 도지사, 박재홍·김종기 국회의원을 비롯해 서대구세무소, 전매청 직원, 심지어 동산병원 환자들까지 붐볐다.

처음부터 육개장을 판 건 아니다. 1대 주인 차천수 할머니(1995년 84세로 작고)는 6·25 종전 직후 먹고 살 게 없어 칼국수를 팔았다. 맏며느리로 들어 온 김광자씨(63)가 육개장으로 돌렸다. 60년대초부터 가마솥을 걸었다. 구절양장 좁디좁은 골목, 하지만 머리에 닿을 듯한 처마를 지나가면 송이버섯 못잖은 국맛이 기다리고 있다.

고기는 양지머리 대신, 기름이 별로 없어 장조림 용으로 사랑받는 사태를 선호한다. 서울 육개장과 달리 고기를 반듯하게 썰어준다. 간을 맞출 때 소금 대신 '지렁'(조선 간장)을 넣는다. 자칫 간수를 빼지 않은 소금을 넣을 경우 국에 쓴 맛이 남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고되어도 장은 해마다 담근다. 방은 모두 4개, 일찍 오지 않으면 앉을 자리가 없어 국을 못 먹는다.

김씨는 요즘 원조 국밥에 일침을 가한다. "원래 진짜가 진짜라고 떠드는 법이 있습니까?"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옛집은 요리 스타일을 변형시키지 않고 있다. 예전 방식 그대로를 사랑하는 단골때문에 지금까지 살아남았는지도 모른다. 김씨는 국에 소피, 고사리 등을 넣지 않는다. 맛에 덧칠을 하지 않겠다는 심산이다. "그걸 넣으면 맛이 깔끔하지 않아요. 오직 대파 흰 뿌리와 무만 갖고 국을 끓인다"고 옛집의 맛을 자랑했다.

옛집 골목은 그 자체가 문화재감이다. 대구에선 가장 허름한 골목, 머잖아 재개발될 것 같다. 하지만 국맛은 낡지 않았다. 옛집 스타일의 국맛을 전수하기 위해 이런 저런 사람들이 기웃거린다. 김씨가 가르쳐 줘보지만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다. 편한 것만을 원하고 자연스러운 맛을 못 내 결국 감미료에 의존하는 것을 볼 때 김씨의 맘도 무겁기만 하다. 김씨는 국밥은 체인점과 궁합이 맞지 않는다고 믿어 체인점 사업 제의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시어머니한테서 물려받은 요리법을 둘째 아들 박무득씨(36)한테 전수시키고 있다. 박씨는 대학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했으며, 방촌시장에서 육개장을 팔다 여의치 않아 현재는 대구백화점 근처 한 식당 주방장으로 일하고 있다.

옛집 주방도 시대의 흐름을 외면못한다. 87년부터 가마솥이 사라지고 양은솥이 등장한다. 70년대형 부엌 타일, 양은 솥, 50년 넘은 놋 종지, 니스를 칠해 반들반들한 장판, 툇마루에 앉아 파란 하늘이 한 움큼 보이는 퇴락미가 국맛을 더해준다.


한일관 貰 못받자 건물주가 운영, 은행원 단골 많아…한때 국일이 입주

◇한일 따로국밥집

대경음식포럼(회장 박진환)이 2명의 따로국밥 장인을 초청해 지난해 12월19일 따로국밥 재현 행사를 가졌다. 주인공은 최수학씨(67)와 구동운씨(63)였다. 70∼78년 최수학씨는 대구 불고기 1번지 계산동 '땅집' '남포집' 등의 주방장을 역임하고 '한일따로'에서 일을 했다. 한일따로 옆 '신일관'엔 구씨가 포진했고 후에 국밥, 냉면, 만두, 불고기 등 30여가지 각종 한정식 요리 전문 '대구분식'(1970년 1월7일 대구백화점 주차장 자리에서 개업), 80∼89년은 '제주가든' 주방장으로 있었다.

한일따로도 '족보'가 있는데, 국일따로의 그늘에 가려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대구은행 중앙로 지점(구 대구은행 본점) 옆 골목 안에 자릴 잡은 한일따로. 예전엔 그 자리에 요정 '한일관'이 있었다. 한일관은 광복 직후 백모씨가 경북도 공무원과 은행원 등을 겨냥해 문을 열었다. 그런데 60년대 후반 산격동 현재 장소로 이전하면서 단골 공무원들을 뺏겨 존폐 위기에 놓인다. 집세를 낼 형편이 못되자 건물주였던 김경환씨(작고)가 백씨를 무궁화 백화점 쪽으로 내보낸 뒤 자신이 직접 한일따로를 시작한다. 한일따로는 입지조건이 너무 좋았다. 동편에는 당시 한국은행(서울신탁은행→서울은행→현재 하나은행)과 외환은행, 대구은행 본점이 진을 치고 앉아 점심 때가 되면 은행원들이 많이 찾았다. 그뒤 한일따로는 1년6개월 정도 '삼한따로'로 영업을 하다가 흥국생명 대구지사가 사옥을 짓는 바람에 쫓겨난 국일따로한테 공간을 내준다. 국일이 30여년간 한일따로에 입주해 있다 97년 현재 장소로 이전하자, 한일따로의 2대 사장 김영일씨(63)가 97년 다시 영업을 시작했다.

한일관 옆에 자리 잡았던 신일관은 1960년쯤 문을 연다. 2층 기와집인 신일관의 방은 모두 17개였다. 당시 카운트가 없어 여주인 앞치마 주머니가 전대 대용이었다. 청도 출신의 백남근씨가 개업한 신일관은 계절마다 내놓는 국이 달랐다. 봄·여름엔 보신탕, 가을엔 추어탕, 겨울철엔 따로 국밥과 곰탕이 나와 지역민들에겐 '국백화점'으로 통했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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