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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풍 곰탕

현풍 곰탕 요리 맛집 정보 2008. 9. 10. 14:18

현풍 곰탕



"어무이∼, 잘 끓이는 곰국 하나만 팝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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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곰탕의 예 , 사진은 인터넷에서,...]



#'막걸리' vs '청주'

현풍과 나주.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곰탕의 메카. 서울 중구 수하동 조흥은행 뒤편 '하동관'과 꼬리곰탕으로 유명한 종로구 돈의동 '영춘옥'도 대표격이다. 서울식은 나주 스타일이다. 결국 국내 곰탕은 크게 현풍식과 나주식으로 양분된다. 현풍식은 국물이 진하고 누른 빛깔이 감도는 우윳빛인데 반해 나주식은 양념 없는 서울식 소고깃국처럼 국물이 맑은 게 특징이다. 그래서 경상도 사람들이 나주 곰탕을 처음 보면 "국이 왜 이렇게 멀겋냐"며 놀란다. 예로부터 '모양은 전주, 맛은 나주'라 했다. 하지만 나주곰탕이 처음부터 뜬 건 아니다. 1973년 11월 호남·남해고속도로가 개통되자 경상도·수도권 곰탕 마니아들이 이곳으로 와 입소문을 내면서부터 나주곰탕 시대가 개막된다. 대표 주자는 전남 나주시 중앙동 구(舊) 나주시청 근처의 하얀집, 송월동 신(新) 나주시청 근처의 남평집, 노안집이다. 나주는 70년대 이전까지는 곰탕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 '곰국'으로 불렀다. 조리법도 현풍과 달랐다. 나주는 밥을 만 장터 곰국밥 스타일이지만, 현풍은 밥을 따로 내놓았다. 국물에 들어가는 고기도 현풍은 양(소의 위)과 소꼬리 등 부산물을 적극 활용하지만, 나주식은 국물이 탁해진다고 뼈와 부산물은 거의 넣지 않으며 사태와 양지머리를 애용한다. 두 도시 곰탕을 술에 비교하면 현풍은 '막걸리', 나주는 '청주'로 보면 된다.

현재 현풍엔 두 개의 곰탕 브랜드가 있다. 원조 현풍 박소선 할매 곰탕과 현풍할매곰탕이다. 물론 박소선이 원조이다. 현풍을 곰탕 마을로 만든 주인공은 박소선 할매(1919~87). 할매는 대학을 나온 것도, 식품영양학을 배운 것도 아니다. 고령군 개진면 개포리 친정어머니에게 곰국 끓이는 법을 배웠다. 처음엔 곰탕 전문집이 아니었다. 50년대초 정식, 닭백숙 등 손님이 원하는 메뉴를 파는 허름한 밥집이었다.

달성군 현풍면 하리 128의 1, 40여년 전만 해도 거긴 벽촌이었다. 식당 앞엔 먼지 날리는 비포장도로가 자리했다. 손님이라고 해봐야 정미소, 양조장, 면사무소, 주재소(파출소) 직원, 수리조합 직원뿐이었다. 박소선곰탕은 지금과 스타일이 조금 달라 다른 부산물은 거의 들어가지 않고 우족 육수에 밥 말아 김치와 함께 내놓았다. 그때 소는 거의 일소였다. 이들 소의 앞다리 뼈는 지금 사육소보다 골수가 몇 배나 풍부했다. 24시간 이상 골 경우 뼈가 푸석해지고 구멍도 숭숭 뚫린다. 손님들은 에끼스처럼 스며나오는 골분을 쭉쭉 빨아먹었다. 다 먹고 나면 마치 아교풀을 바른 듯 입술이 쩍쩍 붙었다. 그런데 요즘 수입산 육우들은 예전과 달리 골수가 그렇게 풍성하지 못하다.

슬레이트와 판자로 얼기설기 엮은 허물어질 듯한 골방 할매집에도 쨍하고 볕이 스며든다. 구마고속도로(1977년 12월 준공) 공사가 시작됐고, 도로공사와 동아건설 직원들이 박소선할매집을 '함바(飯場·공사장 부속식당)'로 찍은 것이다. 근처에 마땅한 식당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서울로 올라가서 호텔 지배인으로 활동중이던 외아들 차준용씨(64)도 고향에 내려온다. 달라진 면소재지 풍속도를 사업적으로 활용할 묘안을 짜낸다. 박소선은 음식을 머리로 만들어선 안된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어무이, 곰국 하나는 정말 잘 끓이지 않능교. 이제부터 곰국만 팝시다."

자식 이길 부모가 있겠는가. 어머니는 아들의 말을 듣는다. 차씨도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대구로 내려온다. 매일 버스타고 성당동 도축장(1962년쯤 원대동에서 현재 두류수영장 맞은편 롤러스케이트장 자리로 이전)을 오가며 양질의 부산물을 확보했다. 박소선할매집이 곰탕 전문집으로 변했을 당시 곰탕 한 그릇 가격은 1천원. 지금은 8천원. 60년대만 해도 곰탕은 있는 자의 전유물이었다. 가정에선 뼈를 고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독감 걸린 남편이나 수험생 자녀 건강식으로 끓이지 않는 다음에야 엄두를 못냈다. 조리가 힘든 반면 돈이 별로 남지 않아 전문 식당도 태동하기 힘들었다. 고작 따로국밥, 설렁탕이 전부였다.

차씨는 방 안과 출입구에 '곰국 있습니다'란 글귀가 적힌 종이를 몇 장 붙여놓았다. 다들 "곰국이 뭐냐"며 궁금해 했다. 전날 한 솥을 끓여도 다음날 오후 2~3시가 되면 동이 나 버렸다. 밤에 식당을 찾은 현장 인부와 관계 직원들은 국을 먹지 못해 불평했다. 고기를 다량 확보하기 위해 코티나 승용차도 전세냈다.

# 원조 시비

박소선 할매의 원래 식당명은 '일심'이었다. 그런데 단골들은 그걸 무시하고 꼭 "현풍면에 오면 할매집이라면 다 아니 그곳으로 오라"고 일러줬다. 그런 연유로 차씨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일심식당은 졸지에 '할매집'으로 변했다. 차씨는 속이 상했지만 장사를 하기 위해선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일심식당 옆에 '할매집'이란 아크릴 간판을 하나 더 붙인다. 나중엔 '현풍 할매집'으로 변하게 된다. 현풍 할매집이 정식으로 군청에 등록된 것이 70년대 중반쯤이다. 80년엔 대구로 진출한다. 약전골목에 1호 분점을 낸 뒤 사보이호텔 맞은 편 현재 유료주차장 자리에 2호점을 낸다. 94년 앞산에도 분점을 낸다. 현풍 곰탕은 창녕 부곡온천 덕분에 몸값이 더 치솟는다.

80년대에서 90년대로 넘어오던 어느 날 대구지방법원으로부터 현풍할매곰탕이란 상호를 사용할 수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명령을 받게 된다. 같은 동네 사람이 현풍 곰탕 사업에 가세한 것이다. 특허제도를 몰랐던 차씨, 자신의 상호를 지키기 위해 3년 이상의 송사를 벌였다. 결국 얻은 건 원래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고 '원조 현풍 박소선 할매집 곰탕'이란 긴 이름을 갖게 된다.


# 맛의 원천

소뼈 종류만 해도 10여종이 넘는다. 정골(正骨)은 소머리, 사골, 소꼬리이고 나머지는 잡뼈로 보면 된다. 사골은 우족을 말한다. 물론 소머리뼈 등 잡뼈는 설렁탕에 주로 들어간다. 가장 골수가 풍부한 부위는 사골이다. 흔히 사골은 끓여선 안되고 고아야 된다고 한다. 고는 것과 끓이는 게 다르기 때문이다. 끓이는 건 소고깃국처럼 한두시간 양지머리와 같은 정육으로 육수를 내는 것이고, 고는 건 끓이는 시간이 12~24시간으로 무척 길다. 물론 사골은 한번 고고 버리지 않는다. 3번까지 골 수 있다. 농촌진흥청 축산연구소 김진형 박사의 실험(1999년)에 의하면 두번째 육수가 가장 구수한 것으로 밝혀졌다.

현풍은 가마솥 대신 백철 솥을 사용한다. 물도 과감하게 수돗물, 화력은 가스를 사용한다. 가마솥은 관리를 잘 못하면 철 성분이 맛을 감퇴시킬 우려가 있어 꺼리고, 요즘 수돗물은 잘만 끓이면 약수 이상의 맛을 낸다는 것이 차씨의 설명이다. 불도 고기 품질만 확실하다면 굳이 번거로운 장작불을 사용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강조한다. 박소선 곰탕 맛의 원천은 소의 위인 양에서 온다.

양은 펼쳐 놓으면 거의 가로·세로 1m 정도의 크기이고 크게 4부분(양, 절창, 처녑, 홍창)으로 이뤄져 있다. 그런데 내벽을 감싼 검은색 털 가죽 벗기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예전엔 일일이 벗겼지만 10년 전부터는 축산물공판장 근처 직원들이 수고비를 받고 벗겨준다.

솥 안에 넣기 전에 우족은 수세미로 깨끗하게 씻어 뜨거운 물에 넣어 멸균한다. 고기 시작하기 전엔 가장 중요한 절차가 있다. 참기름을 몇 번 휘두른 뒤 덖는다. 누린내를 제거하기 위해서다. 누린내 제거는 곰탕 요리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보통 소금물로 씻으면 가장 빠른 시간내 누린내가 사라진다고 한다. 하지만 완전하게 제거할 순 없다. 그래서 나주에선 무명천 속에 마늘, 양파, 파, 무 등을 넣고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육수 속에 넣어둔다. 현풍식은 참기름이 스며들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나주식에 비해 더 고소한 맛이 난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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