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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대창가든

신성-대창가든 요리 맛집 정보 2008.09.10 13:57

신성-대창가든



맛대결의 후반전…뜨거웠던 '후식경쟁' 


 
숯불 갈비집. 롱런하기 어렵다. 요즘처럼 입맛 까다롭고 라이프 사이클이 짧아진 시절엔 10년 버티기 힘들다. 대구에도 지난 40여년 세월 속에 숱한 갈비집이 명멸했다. 30년 이상 역사를 간직한 갈비집은 취재결과 겨우 3개 정도밖에 없었다. 1957년 태동한 계산 땅집 불고기 붐은 동산동 진갈비·태동갈비·사리원 등으로 인해 대신동 갈비시대를 연다. 이 기류는 즉시 70년대 동인동 찜갈비, 80년대 북성로 돼지고기와 양념돼지갈비 시대를 파생시켰다. 현재 진갈비와 함께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숯불갈비집 신성·대창가든은 본식으로 나온 고기 못지않게 불판 볶음밥, 김치와 된장 등 후식의 중요성을 각인시킨 선구자들이다.

# 등심 로스구이 원조 신성가든

1971년 동구 신암동 육교 근처에 막강한 로스구이 집이 생겨난다. 신성가든(현재 SS패션)이었다. 신성은 의성 출신의 초대 사장 장문상(72)·김옥난(72) 부부한테서 외아들 장성운(50)에게로 명맥이 이어진 대구의 첫 등심 로스구이 집이다. 신성은 양념갈비시대에 도전장을 냈다. 77년 쯤 대구은행 신암동 지점 근처, 86년엔 수성구 시대를 겨냥해 수성구 대구은행 본점 동편으로 옮긴다.

신성의 히트작은 생 등심구이와 불판 볶음밥이다. 신성 전만해도 대구에선 곁반찬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불고기국물에 밥 먹는 게 고작이다. 밥에 된장을 곁들인 건 80년대 버전이다. 그런데 신성은 한발 빨랐다. 불판 볶음밥 요리법은 간단하다. 파와 잘게 썬 김치, 참기름이 가미됐을 뿐인데 식당 복인지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불판에 눌어붙은 누룽지 긁어 먹는 맛도 특별했다. 나중엔 불판 볶음밥이 등심보다 더 유명(?)해질 지경이었다.

신성이 등장할 무렵 국내엔 한우 등급시스템이 전무했다. 그 때문에 웃지못할 에피소드가 신성에서 발생한다. 그땐 마블링에 대한 일반인들의 이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대다수 손님들은 기름이 많이 박혀 있으면 저급한 줄 착각했다. 지방이 박혀 있지 않은 사태살류가 고급으로 취급됐다. 하지만 신성은 손님들이 머잖아 마블링 위력을 실감할 것이라 확신하고 일반 정육점이 꺼려하는 지방 가득한 등심을 독점 매입했다. 신성은 불고기와 양념갈비 시대가 곧 끝날 것이라 확신했다. 생등심 하나만 특화시키기로 맘 먹는다. 일반 정육점도 지방질 많은 고길 팔지 못하면 신성에 전화를 걸었다.

신성은 초창기 유행했던 석쇠를 사용하지 않고 구멍없는 무쇠 철판을 사용했다. 또한 숯불을 사용하지 않고 프로판 가스(1974년 대구에 프로판 가스 등장)를 사용했다. 초창기엔 기본 반찬이 지금처럼 풍부하지 않아서 갈비집 꾸려나가기가 무척 쉬웠다. 고작 깍두기, 물김치, 겉절이가 전부였다. 여종업원이 별도로 테이블 서빙을 하지 않았다. 손님 알아서 잘라 먹었다. 하지만 2000년부터 일본식 서비스를 원했다. 고기를 뒤집고 자르고 먹는 것까지 챙겨주길 원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신성의 주 단골은 동국무역, 경북광유, 한진섬유 기사, 경북대 교수 등이었다. 주인 장성운씨는 지금껏 잊지 못하는 단골 한명을 기억해냈다. 바로 얼마 전 타계한 백욱기 동국그룹 회장이었다. 70년대 어느 날 전체 직원 200명 회식 장소가 신성으로 정해진다. 비좁아 동국 전직원을 두 파트로 나눠 2일간 고길 구웠다. 가격이 235여만원이 나왔다. 장인 정신을 앞세워 신성은 고기값을 단 십원도 깎아주지 않았고 그것이 장인정신이라 인정한 백 회장은 애써 비서한테 십원짜리를 얻어 칼같이 계산해 버린 것이다. 백욱기의 스케일과 세심함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고 신성측도 여태껏 그 감동을 기억하고 있다.

# 고성동 대창가든

북구와 서구의 경계선인 태평네거리. 대구종합경기장에서 태평네거리 방향으로 가다 보면 리모델링중인 태평전화국 바로 남쪽에 일제때 건물 한 채가 보인다. 이 건물은 지금은 옹색하기 이를 데 없지만 광복 직후만 해도 1943년 문을 연 KBS방송 총국(현재 태평전화국 자리)과 함께 서대구의 수문장 구실을 했다. 일제 때 헌병대, 광복 직후에는 맹아학교가 됐다가 북구 침산동 경상여고 전신 경희여상이 개교했던 자리로도 유명하다. 한때는 북구 수도사업소, 고물상, 청룡탁구장이 200평 대지 안에 3분해 입주한 적도 있다.

그 건물의 마지막 소유자는 대창가든. 충북 영동에서 손맛 짭짤하기로 유명한 여주인 정채연씨(65)는 대림건설의 경부고속도로 공사 때문에 팔자가 트이게 된다. 난공사로 유명했던 충북 옥천터널과 수십m 고가도로 공사를 따낸 대림측은 정씨를 250여명의 공사장 인부들이 사용하게 될 함바 책임자로 발탁한다. 수소문해 본 결과 그 근처에서 그녀의 음식 솜씨가 수준급이란 걸 알아낸 것이다. 정씨는 68년쯤 현재 기사들이 자주 들르는 개미식당에서 함바를 열었다. 점심 때는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해주었는데 그게 대박이 터졌다. 가끔 양지머리와 대파, 무로 경상도식 육개장도 끓여주었다. 그 식사가 소문이 나 본사 직원들이 현장에 들르면 다른 곳에 가지 않고 함바로 직행할 정도로 음식 솜씨를 인정받는다. 70년 7월7일 경부고속도로 개통 직후 정씨의 사촌언니로부터 연락이 왔다. 대구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퍼모스트 아이스크림 대리점을 맡아 경영해볼 것을 종용한 것이다. 정씨는 4남매를 벌어 먹이기 위해 대구로 진출한다. 처음엔 현재 고성동 대지약국 맞은편 고성마을금고 자리에서 대림식당을 연다. 대림이란 상호는 대림 직원들과의 인연을 잊지 않겠다는 정씨의 배려였다. 정씨는 신암동 아이스크림 대리점과 대림식당 두 개를 동시에 끌고 갔지만 아이스크림 사업은 실패한다.

70년대 중반쯤 본격적으로 숯불갈비에만 전념하기로 맘을 먹는다. 그렇게 해서 얻은 식당이 바로 일제 때 그 건물이었다.

대창은 특히 안동에서 좋은 고기가 많이 나온다는 걸 알고 오전 6시 지배인을 대동하고 안동 도축장으로 갔다. 왕복 5시간 걸렸다. 보통 등심은 세덩어리, 갈비는 열짝 정도 구입하면 차에 가득했다. 물론 외상은 가능한 한 피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현금 결제를 하면 그만큼 진짜 고길 가질 수 있는 확률이 더 높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곁반찬도 토속미를 가득 갖췄다. 그게 장점이다. 초창기 히트작은 장떡과 오이무침이었고 후반부로 가면서 각종 김치와 게장이 인기를 끌었다. 특히 새우·멸치·황석어 젓갈로 만든 청방김치는 미원 많이 들어간 포장김치와 격이 다르다. 담은 후 반년 정도 김치 냉장고에서 숙성시킨다. 끄집어내면 삭은 냄새가 가득하다. 게장도 직접 담근다.

◇대구의 대표 숯불갈비집 현황표
 
식 당
 개업 연도
 폐업 유무
 
계산 땅집
 1957년
 대구 첫 불고기 집/80년대 중반 폐업
 
진갈비
 1961년
 중구 동산동 실골목 존속
 
신성가든
 1971년
 86년 신암동에서 수성구로 이전 존속
 
대창가든
 1972년
 북구 고성동 존속
 
한일가든
 1970년대초
 84년쯤 중국집 아서원에 넘어감
 
제주가든
 1974년
 2004년 폐업/반월당 제주집에서 동인동 제주옥, 1980년 범어동 네거리로 이전
 
오륙도
 1970년대 중반
 88년쯤 폐업
 
부일갈비
 1977년
 83년쯤 폐업
 
한국가든
 1981년
 97년 수성구 만포장 가든으로 개명 이전
 
경북가든
 1980년대초
 폐업
 
한솔가든
 1980년대초
 폐업
 
앞산가든
 1982년
 앞산네거리 근처에서 존속
 
푸른동산
 1980년대초
 2003년 8월 폐업
 
늘봄가든
 1984년
 폐업, 늘봄 예식장으로 변함
 
원도매 불고기
 1980년
 밀리오레 동편 골목에서 존속
 
비원
 1991년
 99년 수성구 전신전화국 네거리로 이전 존속
 
안압정
 1998년
 구미 금오산맥 전신
 
대원군
 2003년
 한정식 수림의 방계 식당
 
가야동산
 1985년
 폐업, 현재 포석정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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