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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0년대 대구대표 빵집

50∼60년대 대구대표 빵집 요리 맛집 정보 2008. 9. 6. 12:33

50∼60년대 대구대표 빵집




"냄새 끝내준다…꼴깍" 대구형무소 재소자 괴롭힌? 삼미제과


 
삼미(三美)제과사, 삼송(三松)빵집, 송영사는 광복 직후 대구의 '3인방 빵집'으로 불렸다. 누가 뭐래도 이들은 1970~80년대에 뉴욕·뉴델·런던제과를 등장시킨 '대구 빵의 산파'였다.

50년대 중부경찰서 네거리는 '빵거리'로 군림한다. 이들 3인방의 뒤를 이어 고려당, 중부 경찰서 바로 북측에 일성당(사장 김도권), 바로 옆에 동양당, 종로초등 정문 맞은편에 덕인당, 대구역 앞 대우센터 뒤편에 구일제과점(박태준), 동성로 미도방 맞은편에 풍년당, 종로초등 근처에 풍곡당(사장 이을수), 약전골목 동문 근처엔 백일당, 학원서림 부근에는 맘모스 등이 나타난다. 특히 구일제과는 건과자 전문점으로 유명했다. 60년대를 화려하게 물들인 맘모스의 기술은 뉴욕을 거쳐 뉴델로 이어져 70~80년대 대구를 빵의 도시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그만큼 기술이 출중했다. 맘모스 초기 직원인 김정환씨(수성구 지산동 뉴욕제과 사장)는 "맘모스는 대구에선 처음으로 즉석 도넛을 개발해 지역 제빵 문화를 한 단계 성숙시켰다"고 증언했다. 무궁화 백화점 근처에 있다가 나중에 학원서림 자리로 이전한 맘모스의 김모 사장은 북한 출신으로 대구에선 처음으로 즉석 도넛과 '고로케'(야채 도넛)를 유행시켰다.

이 무렵 잘 나가는 7개 제과점 주인들이 모여 '7인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일본 연수까지 다녀오면서 일본의 선진 제빵 기술을 가져왔고, 이 모임은 90년대 뉴델제과 사장 최종수씨가 주축이 된 '과우회(菓友會)'로 발전한다.

# 출소자는 삼미 빵 실? 먹고 직성 풀어

삼미제과사의 최팔용 사장, 삼송빵집의 서모 사장, 송영사 사장, 고려당의 하경봉 사장, 수형당의 진병수 사장, 이들은 모두 북성로 일본 빵집 이마사카 출신이었고 흥미롭게도 모두 유도 유단자였다.

삼미제과사는 경북대 사대부설초등 맞은편 골목에 있는 옛 경북학원 자리(현재 대구요리학원)에 있었다. 삼덕동 대구형무소(1910년 대구감옥으로 출발해 23년 대구형무소, 61년 대구교도소로 개칭한 뒤 71년 6월1일 화원으로 이전) 정문 바로 근처에 있어 수형자들에겐 잊지 못할 추억의 빵집이 된다. 바람불면 빵굽는 냄새가 형무소 담 안으로 들어갔다. 재소자들은 '냄새와의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건 또 다른 '고문'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면회인들은 삼미의 빵을 사들고 면회소로 갔고, 출소자들도 복수하듯 그곳 단팥빵 등을 배터지게 먹고 집으로 가야 직성이 풀렸다.

최 사장은 50년대 초 수형당보다 앞서 군에 빵을 납품하기도 했지만 친구인 진 사장의 사업 수완을 이겨내지 못하고 57년쯤 좌초되고 만다. 현재 아카데미 옆 골목 안에 자릴 잡고 있는 최가네 케이크 사장 최무갑씨(62)가 그의 아들이다.

# 대신동 삼송빵집은 여름철 빙설도 유명

중구 대신동. 일제 땐 깐깐한 동네였다. 서문시장·금은방 골목·동산약국과 함께 대신동 명물로 통했던 빵집이 있다. 바로 삼송빵집이다. 기자도 계성중 시절 그 앞을 지나 등·하교를 했다. 은행 정문처럼 생긴 가게 외관과 회색빛 간판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시절 여름철이면 삼송빵집 빙설이 유명했다. 유명한 게 또 있었다. 바로 섬유회관 근처의 백운당, 달성공원 초입의 영선당에서 나온 요즘 잘 팔리는 '비비빅'처럼 생긴 팥 아이스바였다. 판매원들은 성인이 아니고 코흘리개였다. 그들은 때로 앵벌이로 전락해 통을 메고 찹쌀·망개떡 장사처럼 도심 곳곳을 파고들어 적잖은 돈을 업자들에게 안겨줬다. '동정상술'의 극치였다.

현재 중구 동성로 3가 제일극장 맞은편 삼송 베이커리는 광복 직후 서모 사장이 세운 삼송빵집의 상호를 계승했다. 지금은 삼송 상호가 하나밖에 없지만 20년 전만 해도 서구 등 변두리에 몇 개 있었다. 삼송이 그만큼 유명한 탓이었다.

서모 사장은 4남매를 뒀지만 그 시절 부자 빵집이 다 그렇듯 자녀들은 빵 장사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빵집 사장들은 장남만은 판검사·의사·교수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삼송빵집 자녀들은 모두 미국으로 이민가버렸다. 이후 삼송의 주인은 여러번 바뀐다. 중구 공평동 스텔라 베이커리 김호상 사장, 옛 송죽극장 옆 뉴델제과 최종수 사장도 삼송 간판을 걸었다.

삼송은 60년대 중반 대형화재를 당한다. 그로 인해 동산약국과 삼송빵집이 동시에 피해를 입는다. 이 화재는 73년 6월6일 송죽극장 옆 뉴델제과 화재와 함께 대구의 대표적 빵집 화제로 기록된다. 삼송은 신축된 뒤 종업원이 한번 맡았다가 73년쯤 역시 삼송의 기술자였던 박명호·정옥희씨(62) 부부한테 넘어온다. 이들이 삼송의 마지막 사장이 된다.

70년대 초 삼송은 50여평 규모로, 홀엔 8개의 테이블이 있었다. 주로 단팥빵과 크림빵, 찹쌀떡이 많이 나갔다. 특히 계성·원화·신명여고 등 지역 각급 학교 매점에 많은 빵을 팔았다. 노동절, 운동회 땐 각종 빵 주문이 폭주했다. 옆에 있던 황태자 제과점(도질수 사장)과 산다방도 삼송 때문에 덩달아 장사가 잘 됐다. 등교 때는 근처 학생들이 단팥빵 등을 책가방 안에 몰래 쑤셔넣고 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규율부장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책을 다 빼낸 뒤 가방 밑바닥에 빵을 깔고 그 위에 책을 올려놓았다. 감쪽 같지만 그 빵은 과연 어떻게 됐을까.

바로 옆엔 동화사행 시외버스 정류소가 있었다. 후에 이 자린 동산약국에 팔린다. 물론 버스 정류소가 삼송 특수에 부채질을 해준다. 주말이면 그곳에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김밥 대신 빵이었던 시절이니 장사는 두 말할 필요가 없었다. 박 사장은 주문 물량을 다 충족할 수 없어 남산초등 근처에 공장을 세웠다. 한때 대구예식장 제과부도 맡았던 박 사장은 중구 도원동 금수세탁소 바로 길 건너 영화제과점도 함께 경영했다.

70년대까지 전성기를 구가했던 대신동 상권은 80년대로 접어들면서 급속도로 추락하게 된다. 바로 서문시장 상권이 쇠락한 것이다. 박 사장은 '탈(脫)대신동'을 결심하고 87년 2월 제일극장 맞은편으로 이전한다. 한때 옛 국제극장 골목에서 불고기 전문 용궁식당으로 외도, 뼈아픈 좌절을 맛본 뒤 본업으로 돌아왔다.

대신동 니베 의상실 사장이었던 부인, 그리고 장남과 함께 만든 추억의 고로케를 맛보라며 그가 기자에게 몇 개 내밀며 빙그레 웃었다. 비록 경기는 별로라지만 그 표정만은 '호황'이었 다.


고로케와 크로켓, 도넛과의 관계는?

크로켓(Croquette)은 일본말 '고로케'와 같은 말이다. 그렇지만 이 둘은 도넛(Doughnut)과는 좀 다르다. 물론 식물성 기름에 튀겼다는 점에선 같다. 단지 속과 겉을 어떻게 꾸몄는가가 좀 다르다.

여기서 도넛의 유래를 알아보자. 16세기쯤 네덜란드, 독일 등 북유럽권에서 탄생한 도넛은 원래 구멍이 없었다. 영국인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 올 때만 해도 도넛엔 구멍이 없었다. 도넛 구멍은 19세기 초 미국의 한슨 크로켓 그레고리 때문에 생겨난다. 그는 엄마가 주는 케이크의 중심부가 덜 익은 게 늘 불만이었다. 어느 날 그 케이크의 중심부를 포크로 떼어 내고 먹었는데 그게 훗날 도넛 구멍으로 발전한다. 한슨 크로켓은 선장이 된 뒤에도 도넛 구멍을 절묘하게 활용했다. 파도가 높을 땐 구멍난 도넛을 기관실 타륜 손잡이에 걸어놓았고, 그걸 본 선원들을 통해 도넛 구멍이 전세계로 확산된 것이다.

통상적으로 도넛은 팥앙금이 들어가는 빵 도넛과 초콜릿 시럽 등으로 표면을 코팅한 과자형 도넛이 있다. 반면 고로케 속엔 야채와 다진 고기가 들어간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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