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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뉴델·런던 제과점

뉴욕·뉴델·런던 제과점 요리 맛집 정보 2008. 9. 6. 12:31

뉴욕·뉴델·런던 제과점



대구를 제빵도시 면모 갖추게 한 '3인방'



 
업의 본질은 성공이라기보다는 실패인 것 같다. 흥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모두 될 것 같아 사업을 시작했고, 그래서 대박을 터트리지만 결국은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해, 더러는 내분으로 인해 폐업하게 된다. 대구의 제빵사도 그랬다.

그렇게 잘 나가던 일성당, 덕인당, 동양당, 구일제과였지만 즉석 야채도넛(일명 고로케) 흐름을 등장시킨 맘모스한테 무릎을 꿇고 만다. 하지만 맘모스의 신기술을 눈여겨 본 사람이 있었다. 바로 뉴욕과 뉴델 사장이었다. 50년대 3인방 제빵인이 있었듯 70년대에도 대구 제빵계를 주름잡던 3인방이 있었다. 바로 뉴욕의 강신영·이점석 사장, 뉴델의 최종수 사장, 런던의 조원길 사장이다. 이들은 현재 일흔을 바라보고 있는 제빵계 원로로 강 사장을 제외하곤 모두 생존해 있지만 현업에선 손을 뗐다. 특히 이들로 인해 대구가 비로소 제빵도시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물론 그들이 전성기를 구가할 때 제과점은 문만 열면 장사가 됐고 모두 적잖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역시 그땐 여건이 좋았다. 섬유경기가 호황이었고, 패스트푸드가 대구에 본격 상륙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과점은 호황을 누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80년대 중반 거의 동시에 폐업을 하면서 대구의 제빵 시장도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하게 된다.

# 뉴욕제과…한창 땐 한강 이남서 가장 돈 많이 벌어

교동시장 초입 오른쪽 모퉁이에 생겼다. 보래옥으로 있다가 북한 출신의 강신영씨가 60년대 인수해 뉴욕제과로 상호를 바꿨고 훗날 한일극장 근처로 이전해 대구 최고의 제과점으로 성공한다.

보래옥 시절의 뉴욕은 장소 덕을 톡톡히 본다. 보래옥을 인수한 강 사장은 70년대 대구 상권이 남동진한다는 사실을 알고 한일극장 근처로 자릴 옮긴다. 강 사장은 직원 복이 많았다. 대구에선 처음으로 모닝식빵을 개발한 중구 포정동 풍차베이커리 사장 권영오씨, 수성구 시지에서 뉴욕제과를 경영하고 있는 김정환씨, 고려당 베이커리 사장 강대건씨 등이 그곳을 거쳤고, 그때마다 신제품을 개발해줬다. 그런 연유로 뉴욕의 사라다빵이 불티나게 팔린다. 일반 집과는 달리 뉴욕은 감자를 깍두기처럼 썰어 찬물에 4~5시간 담가둔 뒤 삶아 아린맛을 없앴다. 포장 빵이 귀했는데 뉴욕은 낱개 포장 시스템을 도입한다. 강 사장은 스텔라 베이커리의 고 김호상 사장처럼 기술 아웃소싱의 귀재였다. 초창기부터 빵 기술을 외부에서 배워왔다. 그는 보래옥에서 일을 하면서 주인의 신임을 받아 가게를 인수한 것이다. 장사가 잘 되니 홀이 좁아졌다. 대구지방국세청(현재 밀리오레 자리) 뒤편 공장과 교동시장 근처 자택에서 빵을 만들어 가져왔다. 한일극장 맞은편으로 왔을 때 대구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점포가 임대가 아니라 자기 소유라서 더욱 경쟁력이 있었다. 한창 때는 한강 이남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번 제과점이 된다.

하지만 집안 사정으로 뉴욕은 도중 하차하고 옛 동원예식장 지하 동원제과점을 운영한 상주 출신의 이점석씨(전 대구경북제과협회 지회장)가 뉴욕을 인수해 더욱 발전시킨다.

# 뉴델제과…현대식 백화점 제빵코너 스타일 도입

뉴욕의 아성에 도전한 게 바로 옛 송죽극장 동편에 있었던 뉴델제과다. 교동시장 입구 맞은편 동성로변에 자리잡고 있어 초창기 뉴욕처럼 장사가 잘 됐다. 뉴델의 최종수 사장은 처음엔 과자 도매점도 하면서 기반을 다진다. 하지만 뉴델은 예상도 하지 못한 악재를 만나 치명상을 입게 된다. 바로 1973년 현충일 오후 2시50분이었다.

대구시 동성로 1가 5, 뉴델제과점에서 대형 화재가 난 것이다. 근처 송죽극장 등을 포함해 500여평 건물이 전소됐다. 2층 작업장 프로판가스  취급 부주의로 불이 나 60평 크기의 뉴델과 바로 옆 송죽극장, 만보당, 시대완구, 에펠양화점, 새한편물점 등까지 모두 태웠다. 하루 전에 고용된 경남 합천 출신의 박모군이 도넛을 만들다가 프로판가스 호스를 갈아끼우는 순간 흘러나온 가스가 빵굽는 화덕에 퍼진 것이다. 그날 뉴델의 제빵 기술 책임자 최무갑씨는 아직 현장을 떠나지 않고 시내에서 최가네 케이크점을 운영하고 있다.

최 사장은 원래 수형당 기술자 출신으로 처음엔 대신동 삼송빵집을 운영하다가 뉴델제과를 만들어 성공한다. 그는 최무갑씨에게 킹뉴델을 건네주기도 한다. 이땐 백화점에선 빵을 팔지 않았다. 상품권 개념도 생겨나지 않았다. 가장 인기있는 건 버터로 만든 케이크와 롤케이크류가 선물용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뉴델은 무려 1만여 개를 철야작업을 통해 만들어냈다. 크리스마스 한 달 전부터 작업을 시작해야 했다. 지금은 아무도 안 먹지만 그땐 버터로 만든 꽃잎을 만들어 꽂아놓기도 했다.

하지만 최 사장은 백전노장이었다. 무시무시한 기술과 아이디어를 가진 한 기술자를 만나게 된다. 바로 지역에서 음식 컨설팅 사업가로 변신한 윤문식씨(58)였다. 윤씨는 서울 롯데 백화점 판매시스템에서 반짝 하는 아이디어를 얻는다. 마치 요즘 김밥집처럼 빵집 한 코너에 바텐 비슷한 오픈형 가판대를 마련하고 그 옆에 기름솥을 놓고 각종 도넛과 핫도그 등을 즉석에서 만들었다. 요즘 백화점 제빵 코너 판매 스타일이 이때 등장한 것이다. 최 사장은 런던제과와 뉴욕제과 사이에서 고사 직전이던 킹뉴델을 황제당으로 상호를 바꾸어 런던과 팽팽한 접전을 펼친다. 황제당 '즉석 제빵 시스템'은 이후 전국적으로 선풍을 일으켰고 후에 지역 제빵사들은 너도 나도 그 모델을 도입하게 된다.

# 런던제과…한때 미도백화점 연매출 버금가는 고수익

70년대 초 옛 원호청, 현재 LG 마에스트로 매장에 또 하나의 무시무시한 저력을 가진 제과점이 들어온다. 바로 런던제과였다. 규모도 뉴욕보다 더 컸다. 특히 하절기엔 얼음 빙설이 강했다. 삶은 팥, 프루츠와 수박을 얹었다.

뉴델 최 사장은 비록 친구간이긴 하지만 런던의 등장에 초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엔 제과점 허가가 무척 까다로웠다. 그만큼 진입장벽이 높았던 것이다. 런던은 번번이 시설 미비로 중구청 위생과로부터 영업허가를 받지 못한다. 어렵게 개점한 조원길 사장에게 호재가 안겨진다. 런던이 개업하고 1년 남짓 지난 뒤 바로 경쟁업소 뉴델이 전소된 것이다. 그 덕분에 런던은 한때 미도백화점 1년 매출에 버금갈 정도로 고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 3인방은 전두환 정권 말기쯤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

하지만 뉴욕·뉴델·런던은 전두환 정권 말기쯤 소리소문없이 사라진다. 그건 지역 제빵인들에겐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취재를 하는 과정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감이 들었다. 3인방은 나름대로 부동산 자본을 확보하고 있었고, 또한 제빵 영업이 갈수록 마진율이 줄어든다는 걸 알고 있었다. 부가가치세(77년 도입)로 인해 수익률까지 날로 감소하고 있었다. 8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각종 패스트푸드가 대구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제빵산업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걸 안 것이다. 또한 지역자본가로 성장한 그들을 겨냥한 정부 당국의 정치적 압력도 달갑지 않았다. 돈을 벌어도 그렇게 맘이 편하지 못했다. 제빵 사업다각화를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이들은 지쳐 있었다. 설상가상 장남들도 하나 같이 공부에만 열중했고, 사장들도 장남에게 빵집을 물려줄 맘이 없었다

3인방은 그런 연유로 86아시안게임·88서울올림픽 특수를 누려보지도 못하고 한꺼번에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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