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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라 · 공주당 제과점

스텔라 · 공주당 제과점 요리 맛집 정보 2008. 9. 6. 12:30

스텔라 · 공주당 제과점

90년대 '스텔라 빵'은 젊은 층 자기과시 수단
도넛전문'공주당' 꽈배기 등 히트
 

 
 
# 스텔라 신화 만든 김호상씨

1980~90년대 초 대구에서 젊은시절을 보낸 사람치고 대구시 중구 공평동 스텔라 제과점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광복 직후 형성된 일본식 제과 제빵 문화를 대구 정서에 맞게 발전시킨 제과점 중 하나가 바로 스텔라였다. 김호상 사장(본명 김태성)은 아직 대구 제빵인들에겐 입지전적 인물로 추앙받는다. 그는 빵밖에 몰랐고 그래서 제빵 장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현재 대한제과협회장 김영모씨도 그의 밑에서 기술을 배워 훗날 상경해 국내 최고의 제빵인으로 성공한다. 다시말해 대구에서 기술을 배워 서울에서 성공한 것이다. 특히 김영모 베이커리 강남점은 162명의 직원을 거느린 명실상부한 한국 최고의 빵집으로 평가된다.

호사다마랄까, 김호상 사장의 사업은 '희극'이었지만 그의 삶은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90년대 말 어느 날 밤, 김 사장 내외가 자신의 아파트에 침입한 괴한에게 피살된 것이다. 청천벽력 같은 사건을 접한 지역 제빵인들은 한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뉴욕·뉴델·런던의 침몰 이후 상심하고 있던 제빵인들의 자존심을 지켜준 선배 제빵인을 잃은 슬픔은 너무나도 컸다. 휴대폰 추적에 의해 범인은 잡혔지만, 설상가상 스텔라의 아성은 그날 이후 빙산과 충돌한 타이타닉호 신세로 전락해버렸다.

안동 출신의 김 사장은 '빵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그의 기술은 대구에 머물지 않았다. 국제적이었다. 서울로 가서 기술을 배우려고 하자 서울은 처음엔 그를 밀어냈다. 그는 월급을 포기하면서까지 서울의 앞선 기술을 배워 내려왔다. 그는 돈을 조금 벌면 재빨리 최첨단 제빵기기를 구입했다. 신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 현지로도 날아갔다.

그래서 스텔라 가게는 화려해도 그의 가계는 초라했다. 김 사장은 3억원짜리 고가의 제빵기기를 들여놓아도 부인에겐 좋은 옷 한벌 사주지 않을 정도로 가정엔 인색했다.

그는 60년대 대신동 삼송 빵집을 잠시 경영하다가 곧이어 대구백화점 앞으로 이전해 4년간 실력을 발휘했지만 돈은 안됐다. 재차 한일극장 동편 현재 밀밭제과 근처로 자릴 옮겨 2년간 버텼지만 역시 고전한다. 그때 김 사장 앞에 새로운 점포가 나타났다. 지금은 2·28기념중앙공원에 편입돼 사라진 스텔라 본점 건물이었다. 거기서 대운이 터졌고 88서울 올림픽 직후부터 스텔라는 대박행진을 한다.

김 사장은 지역에선 처음으로 셀프시스템을 도입한다. 손님이 맘에 드는 빵을 집어와 카운터에서 계산할 수 있도록 홀 구조를 확 바꾼 것이다. 당시 대전 최고의 빵집 성심당의 서비스 기법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새하얀 집, 스텔라는 '영 베이커리(Young bakery)'였다. 예전엔 기성세대를 겨냥했는데 스텔라부터 주고객이 젊은 층으로 바뀐다. 젊은이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인테리어·서비스 라인을 제시한 것이다.

90년대 초, 스텔라 글자가 보이는 케이스에 빵을 넣고 가는 것도 젊은이들의 '자기과시 수단'이었다. 그들 덕분에 한창 때 하루 500만∼600만원을 벌었다.

김 사장 내외가 피살됐지만 자녀들은 돈방석에 앉은 스텔라를 포기할 수 없었다. 장녀 지수, 차남 창하씨가 공동경영자로 뛰어들었다. 자릴 잡자 창하씨는 독립해 중앙파출소 근처에 제2스텔라를 개업했다. 제빵계 어른들은 그곳이 영업사각지대라면서 만류했다. 하지만 고집 센 창하씨는 남의 말을 듣지 않았다. 개업 2년만에 항복하고만다. 'IMF 파고'는 너무 높았다. 스텔라 본점도 경영위기에 봉착한다. 각종 재료 값도 제대로 못 챙길 정도로 장사는 바닥이었다. 결국 부채를 감당하지 못한 지수씨도 스텔라 본점을 포기하고 잠적해버린다.

현재 스텔라 부지는 멀티플렉스 영화관 부지로 편입돼 골조 해체 작업이 거의 완료된 상태이다. 기자가 찾은 날 쇼윈도에 적힌 황량한 스텔라 베이커리란 영문자만이 이곳이 스텔라 제과점이란 사실을 알려줬다.


# 동아백화점이 탄생시킨 공주당
 
성주군 월항면 출신으로 맨손으로 대구로 와 공주당 브랜드를 만든 박건서 사장. 그는 70년대 초 동아백화점(72년 개점) 맞은편 석탑베이커리 옆 골목에서 허름한 간판의 도넛 전문점을 차렸다. 이 집 단골은 동아백화점 여직원들이었다. 여직원들이 안보이면 십중팔구 도넛을 사먹으러 간 것이었다. 그녀들 때문에 돈을 많이 번 박 사장은 81년 2·28기념중앙공원 맞은편 한일로변에 제대로 간판을 단 공주당 빵집을 연다. 공주당이란 상호는 동아백화점 여직원들의 성원에 대한 답례의 표시였다. 물론 공주란 '백화점 여직원'들을 의미한다.

공주당의 히트작은 꽈배기 등 각종 도넛이었다. 초창기 하루 매출이 20만∼30만원대였으나 700만원대까지 급신장됐다. 공주당은 다른 집과 달리 '빵 가격 다각화'를 시도한다. 좀 더 많이 사가는 사람은 좀더 많이 가져 갈 수 있도록 판매전략을 짠 것이다.

# 제빵 아이디어맨 윤문식씨

공주당의 성공 신화 뒤엔 또 한 명의 제빵 기술자가 숨어 있다. 상주 출신의 윤문식씨(58)다. 그는 스텔라 베이커리 김 사장과 함께 지역의 대표적 제빵 아이디어맨으로 불린다.

그는 평리중 시절 빵을 만나 40여년간 외길을 걷고 있다. 그의 외가도 제빵가문이었다. 계란 총판을 하는 대봉동 외가에 머물던 시절 역시 한 외가 친척이 꾸려가던 만미당(옛 코리아 백화점 1층에 있었으며 현재 보세의류 전문점으로 바뀜), 대구 첫 윈도 베이커리격인 고려당(기술책임자 박세관)에서 기술을 많이 배운다. 2년 정도 있다가 그의 팔자를 고쳐놓는 막강한 제과점을 만난다. 향촌동 무궁화 백화점 근처에 있던 맘모스였다. 북한 출신의 김영식 내외는 즉석 크로켓(고로케)·도넛류를 잘 만들었다. 이곳의 도넛기술이 훗날 윤씨를 통해 공주당으로 전해진다. 60년대 초 그때는 식용유가 본격적으로 개발되지 않았다. 오리지널 쇼팅을 사용해 지금보다 더 맛이 좋았다. 그때 빵 책임자는 윤 씨였고 공장장은 배우열씨(작고)였다. 맘모스가 3년 정도 히트를 칠 때쯤 인물 스카우트에 귀재인 뉴욕제과의 강신영 사장이 두 명을 함께 뉴욕으로 스카우트한다.

그는 아직도 한일로가 갓 뚫리고 난 뒤 등장한 뉴욕 제과점 '개업 마케팅'에 얽힌 추억을 잊지 못한다.

"강 사장과 저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짜냈습니다. 당시 갓 등장한 영남일보 전용 경비행기를 동원해 시가 전역에 전단지를 뿌렸습니다. 그 뿐만 아니었습니다. 강 사장은 개점일과 생일이 일치하는 손님에게 케이크를 무료로 제공한다는 문구까지 삽입했습니다. 홍보감각이 대단했죠."

윤씨는 뉴욕 케이크를 좀 색다르게 만들기 위해 프루츠를 다른 제과점보다 듬뿍 담았다. 제철이 아닌 과일을 먹을 수 있어 더 많은 케이크가 팔릴 수밖에 없었다. 도넛도 맘모스와 다른 버전으로 만들었다. 기름에 뛰긴 야채 대신 샐러드 버전을 도입했고 지역에선 처음으로 통조림 소고기가 들어간 샌드위치까지 개발해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킨다. 지역에선 처음으로 제과점에 레스토랑 컨셉트를 가미한 것이다. 80년 킹뉴델 후신의 황제당 기술책임자로 들어가 대구에선 처음으로 즉석코너시스템을 개발한다.

신암육교 근처에서 케이크 타운, 84년엔 영주 중심가에서 황제당 제과, 경주시 태극당, 경주조선호텔 제과점을 거친뒤 85년 공주당의 박 사장과 손을 잡고 '공주당 전성시대'를 열어주고 떠난다. 하지만 박 사장은 경영합리화를 명분으로 다가온 전문 브로커에게 속아 재산을 날린다. 현재 박 사장은 대구를 떠나 서울에서 만두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도산한 공주당은 97년 박 사장의 조카 찬홍씨(40)가 인수해 명맥을 이었다. 한편 윤씨는 영천시 임고면 3사관학교 뒤편에 전국 최대 찹쌀떡 전문업체인 태정식품을 열었지만 화재로 타격을 받았고, 우여곡절을 거쳐 2004년 달성군 논공읍에서 도매용 제빵전문업체인 에이스 식품을 창업했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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