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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제빵업계 지금은…

대구 제빵업계 지금은… 요리 맛집 정보 2008. 9. 6. 12:25

대구 제빵업계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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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대구는 '빵 도시'였다. 현재 서울에서 가장 잘 팔리는 케이크를 만들고 있는 김영모 베이커리의 기술력도 실은 대구에서 잉태됐다. 그 유명한 서울의 고려당이 넘보지 못한 곳이 바로 대구였다. 1970년대 대구의 메이저급 제과점의 연매출액은 시시한 백화점보다 나았다.

'빵 권하던 시절', 빵집은 문만 열면 돈을 벌었다. 한동안 빵집의 생존을 위협하는 경쟁자는 거의 없었다. 그 때문에 제빵인도 점점 구태의연해진다. 새로운 기술 개발에 매달리지도 않았다. 매너리즘에 빠져 미래의 빵에 대해서 고민할 열정을 뺏긴 것이다.

하지만 80년대 후반 들면서 대한민국 제과업계의 지형도는 이전과 판이하게 돌아갔다. 다국적 패스트푸드 브랜드의 습격이 시작됐다. 빵 말고도 다양한 간식거리가 쏟아져나왔다. 온갖 스타일의 다방과 레스토랑으로 인해 다과점 구실을 한 지역 제과점의 매력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그래도 대다수 제과점은 "설마 제과점이 어떻게 될까"라며 안이하게 대처했다. 80년초 밀탑제과, 89년 파리바게뜨의 공세를 그들은 제대로 받아내지 못했다.

세상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건너가듯 빵 시장도 많이 달라졌다. 케이크만 해도 이전의 딱딱한 버터케이크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다. 솜사탕 같은 '생크림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판이 달라지면 주인의 마인드도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대구는 '2%'가 부족했다. 지역 제빵인은 근시안적이었다. 돈을 좀 벌면 재투자해야 하는데 그걸 재빨리 하지 못했다. 90년대말 1천여 개에 육박하던 대구 제과점 수는 이제 420개로 줄어들었다.

시장은 냉엄하고 냉정하다. 남보다 앞선 '제빵 라인'을 선보여야 한다. 자기를 알릴 수 있는 마케팅도 벌여야 한다. 그런 견지에서 아직도 대구엔 괜찮은 실력파가 모여있다. 대한제과협회 대구경북 관계자 5명이 이번 취재를 위해 얼마전 반월당의 한 식당에 모였다. 그들은 스스로를 성찰하고 또 자책했다. 또한 80년대초 느닷없이 동반폐업한 런던·뉴욕·황제당에 대해서도 안타까운 감정을 내비치기도 했다. 지금의 어려움이 발전의 도약대가 될 것임을 확인했다.

스텔라 베이커리 고 김호상 사장, 또한 고려당베이커리 강대건 사장, 삼송베이커리의 박명호 사장 뿐만 아니라 중구 포정동 풍차베이커리 권영오 사장(65), 중구 동성로 아카데미 극장 옆 골목 최가네 케이크의 최무갑 사장(64) 등 원로 제빵인도 특히 대구 제빵의 영광을 재현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영원한 승자는 없다. 사업도 그렇다. 방심하면 퇴장되고, 시대를 읽고 경영을 업그레이드시키면 '명가(名家)'가 된다. 대구 제빵의 시련기, 발상의 전환을 하면 그건 어쩜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일 수도 있다.

# 포정동 풍차베이커리-모닝빵 개발 직장인에 대인기

의성군 비안면 출신인 권영오씨. 그는 옛 런던제과에서 몇 걸음되지 않는 포정동 길가에 있는 풍차베이커리를 꾸려가고 있다. 아직도 새벽같이 일어나 밀가루 반죽에 자신의 손을 집어넣는다. 권씨는 요즘 빵이 너무 겉만 번지르르하다면서 푸념을 늘어놓는다.

기자를 작업장으로 데리고 갔다. 봄이 왔건만 아직 그곳은 찬바람이 일렁거렸다. 자신의 손때가 묻어 있는 수십년된 거무튀튀한 빵굽는 철제 용기를 자랑스럽게 만져본다. 그는 시대를 너무 앞서가는 게 영 마뜩찮은 모양이다. 도공같은 그는 정석 그대로의 빵만을 고집한다. 그래서 주위에선 좀 우직하다는 지적도 받지만, 그는 여생을 계속 그렇게 걸을 것이다.

18세 때 중부경찰서 옆 일성당에서 6년간 제빵 기술을 배운 뒤, 90여평 규모의 만미당(옛 코리아백화점 1층), 뉴욕제과, 마지막엔 런던제과에서 절정기를 맞고 뒤엔 독립한다. 그는 대구 제과점의 영광과 좌절을 골고루 맛봤다.  
 
빵집을 갖게 된다. 놀랍게도 그때도 가스 대신 연탄가마를 사용했다. 32공탄을 사용해 빵을 구웠다. 홀은 좀 산뜻했지만 작업장은 정반대였다. 40×50㎝ 철제 빵판에 이스트로 반죽한 밀가루를 붓고 6개 빵판을 순차적으로 밀어넣어 구워냈다.

풍차는 명물 빵을 개발했다. 바로 '모닝빵'이었다. 이 빵은 식빵과 조금 달랐다. 식빵은 보통 강력분·설탕·소금·버터를 섞어 만드는데, 모닝빵은 물 대신 우유와 계란 노른자를 첨가한다. 물론 더 부드러워 식빵처럼 굽지 않고 그냥 먹어도 좋았다.

모닝빵은 시대의 산물이었다. 특히 80년대로 접어들자 도심에 적잖은 봉급생활자들이 이 빵에 반하게 된다.

모닝빵은 아침 먹을 겨를이 없던 동성로 직장인에겐 더없이 고마운 아침거리였다. 오전 7시가 되면 남녀 직장인들이 풍차 앞에 줄을 섰다. 이 소문은 인근 다방과 레스토랑으로 퍼졌다. 덕산레스토랑, 경일투자, 대구은행 본점 지하 레스토랑가도 에피타이저 빵을 풍차에서 대량 매입해갔다. 현재 정통 레스토랑에서 즐기는 감귤만한 크기의 빵은 바로 모닝빵의 후신으로 보면 된다. 일반 다방에서도 손님을 잡기 위해 커피 옆에 모닝빵을 내놓기 시작한다. 풍차는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속에 아무것도 없는 모닝빵, 자칫 물리기 쉬워 풍차는 오뚜기 식품에서 출시한 버터와 딸기잼도 팔았다. 모닝빵은 보통 한 봉지에 20개, 그 옆엔 늘 우유 한 병이 따라붙는다.

풍차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위력을 가진 런던제과가 바로 근처에 있는데도 풍차의 영업이 잘 된 건 무슨 이유일까. 바로 런던제과가 일찍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런던은 보통 밤 10시30분에 문을 닫는다. 그때부터 약 1시간은 풍차세상. 심야 손님들이 귀가하면서 이곳에서 갖가지 빵을 사가는 것이다. 처음엔 큰 골판지 케이스에 이런저런 빵을 담아갔는데, 80년대 후반부터 낱개 포장이 선호된다. 하지만 풍차의 호시절은 90년대초 지하철 1호선 공사로 인해 끝나게 된다. 물론 지금 경기는 바닥권이다. 그래도 가끔 그 시절 모닝빵이 생각나 찾는 단골이 풍차의 '원군'이다.

# 최가네 케이크-다른 빵은 접고 오직 케이크만 만들어

교동시장 수형당과 함께 광복 직후 대구의 대표적 제빵 브랜드인 삼미제과사 최팔용 대표의 아들인 무갑씨. 현재 아카데미극장 옆 골목 안 대구 젊은이에게 가장 어필하는 케이크 전문점 최가네 사장인 그는 지역 제빵계에선 풍운아로 통한다. 한때 사업실패로 은둔의 세월을 보냈지만 한국 최초의 케이크 브랜드를 개발해 화제가 되고 있다.

최씨는 수형당 빵공장 기술자, 뉴델제과점 총기술자로 활동하다가 76년 킹뉴델, 79년엔 로마제과점도 경영했지만 파산의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이어 경주 코오롱·도쿄호텔 제과부를 거쳐 다시 대구로 입성했다. 와신상담의 각오로 2001년 중구 동성로 2가에 전국 첫 케이크 전문점을 열었다. 다른 빵은 접고 오직 케이크만 만든 게 적중한 것이다. 최씨는 젊은이들이 무엇을 원하는 지 알고 있었다.

최가네의 특화된 케이크는 즉시 동성로 젊은이의 혀를 사로잡는다. 그는 뉴 밀레니엄 시작과 함께 한국 제빵업계 판도를 분석했다. 역시 특화시키지 않고 소품종 다량 생산을 해선 승산이 없다고 분석했다. 그래서 90년대 가장 폭발적 인기를 끈 생케이크를 사업 컨셉트로 정한 것. 젊은이의 호주머니 사정을 감안해 조각 낸 낱개 케이크도 팔았다.

최가네는 제빵 가문이다. 가족 모두 직원으로 뛴다. 장남 재호씨(31), 큰 며느리 조소영씨, 둘째아들 재익씨(27)가 함께 일한다. 2층 공방에선 무스·딸기·치즈·초콜릿·샤워체리·고구마·녹차·호박 등 무려 20여 종의 케이크를 만든다. 냉동 진열장에 담긴 케이크가 흡사 '무지개 궁전'속으로 들어온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오는 6월쯤 근처로 확장 이전한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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