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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레스토랑 '마이하우스'

대구 레스토랑 '마이하우스' 요리 맛집 정보 2008.09.06 12:00

대구 레스토랑 '마이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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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밀리 레스토랑의 원조 마이하우스

앞산순환도로변에 있는 마이하우스. 그곳은 대구의 첫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기록된다. 그 레스토랑이 하루 아침에 완성된 건 물론 아니다. 달성군 하빈면 출신인 구본건 사장(55)은 그 작품을 빚기 위해 다양한 밑바닥 인생을 감수한다.

외식업을 하기 전 지역의 유명 DJ로 활동했다. 교동시장 동쪽 초입 왼편에 자리잡은 몽마르뜨르 음악 다방을 비롯, 산타나·선샤인·백조의 호수 등 '스낵형 레스토랑'을 거쳤다. 부업으로 담배장사를 했고, 그걸 자신이 몸담았던 스낵·분식점에 공급한다. 1976년쯤 대보백화점에 2개의 점포를 낸다. 지하엔 분식점, 2층엔 액세서리 코너였다. 무궁화·미도백화점으로 사업을 확장했지만 파산한다.


# 경영 전략의 원천은 한일회관에서 왔다

마이하우스 영업 전략의 원천은 어디서 온 걸까?

대구시 중구 대봉동 만리장성 맞은편에 '회관형 레스토랑 스타일'의 한일회관이 있었다. 구 사장은 이곳에서 외식업의 노하우를 배우게 된다.

고사 직전의 한일회관을 살리기 위해 고안된 게 바로 멤버십카드(VIP)였다. 구 사장은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각 사회 기관단체장, 유명 회사 총무부장 등 레스토랑에 올 만한 사람 1천명을 골랐다. 발송작업도 돋보였다. 복신엽서(수·발신 겸용 우편엽서)를 활용했다.

'귀하를 VIP 회원으로 모신다'는 취지의 문구를 적었다. 그걸 받은 사람들은 은근히 그 카드를 자기 과시용으로 활용했다. 그 사실을 안 지역 금융권도 멤버십카드를 만든다. 카드 제조기가 없어 구 사장이 직접 코팅해 보냈다. 카드에 회원의 영문자까지 박았다. 효과는 폭발적이어서 VIP 카드는 일파만파의 파급력을 보였고 나중에 금융사, 호텔 등도 이 시스템을 도입한다.

한일은 일단 당시 보험회사 신입사원 연수 프로그램 책자를 갖고 왔다. 거울을 보고 미소짓는 법을 가르쳤다. 한일 측은 손님이 곧 내 식구란 걸 인식시켜줬다. 어린이와 노약자가 들어오면 활짝 웃으며 손잡고 식탁까지 데려가 줬다. 계산도 손님이 직접 카운터에서 하도록 만들지 않았다. 담당 웨이터가 계산서를 갖고 계산한 뒤 거스름돈을 갖고 왔다. 매상이 예전보다 5배나 늘었다. 그때 로스구이 1인분이 1천800원, 웨이터 봉급이 3만원이었다.

# 카페테리아 레스토랑 패밀리 가든

한일 시대를 뒤로 한 구 사장은 83년 11월쯤 자기 사업장을 갖는다. 옛 관광열차 근처 골목 안에 45평 크기의 골목집 식당을 연다. 공예대전 대상 작품을 카피해 식당 식기로 이용했다. 일반 식기는 양에 차지 않았다. 대구에선 처음으로 가마솥밥을 선보였다. 80년대 초 통행금지가 해제되자 손님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시내에서 처음으로 대구 서민들이 즐겨 먹던 추억의 '콩나물 갱시기'를 내놓았다. 떡, 콩나물, 묵은지, 굴이 들어간 것에 심야 취객들은 원더풀을 외쳤다. 한 그릇에 1천원, 하루에 300~400명이 밀려들었다.

86년 대구시민도서관 자리에 대구백화점 별관이 생긴다. 구 사장은 대백 측과 상의해 그곳에 대구 첫 카페테리아 레스토랑(고속도로 휴게소처럼 좋아하는 메뉴를 골라 카운터에서 합산)인 패밀리 가든을 오픈한다. 손님들에게 메뉴 선택의 자율권을 더욱 많이 준 것이다. 이곳의 전체 평수는 230평, 양식으론 함박스테이크, 돈가스, 불고기, 비프스테이크, 닭고기 튀김 등 70~80가지를 내놓았다.

# 패밀리 가든의 영업위기…빚 눈덩이

손님이 격감했다. 6개월이 지났지만 반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적자 운영이 지속되자 하루 적자액이 50만원까지 치솟았다. 하루에 10명도 오지 않은 때도 있었다. 지역민들은 아직 생소한 뷔페식 레스토랑이 부담스러웠다. 호기심을 가지면서도 선뜻 그곳에 들어오질 못한 것이다. 시장 분석이 잘못된 것이다. 손님이 오지 않아도 음식은 매일 준비해야 했다. 남은 건 모두 쓰레기통 안으로 직행했다. 임대료 독촉, 단전 경고, 재료 공급처에서도 더 이상 공짜로 물건을 줄 수 없다고 했다. 1억5천만원의 빚, 최대 위기였다.

그럴 즈음 인천에 유명한 뷔페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여장부 정해룡 사장(78)이 인천의 한 부두 농협 창고를 뷔페로 개조해 대박행진 중이었다. 뭔가 번뜩하는 게 있어 곧바로 인천에 가서 '해진' 뷔페의 경영 노하우를 배워온다. 정 사장도 한때 너무 힘들어 자살 충동을 느꼈다. 비슷한 처지의 구 사장이 꼭 분신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정 사장은 먹고살기 위해 인천시청 옆 난전에서 국내 첫 좌판형 한식 뷔페를 연다. 밥, 김치, 나물 등을 먹고 싶은 만큼 먹도록 했다. 70년대 후반 그것을 토대로 국내 첫 뷔페를 차린다. 구 사장이 해진 뷔페 스타일을 대구로 갖고 온다.

# 패밀리 가든은 패밀리 뷔페를 몰고 오고

패밀리 가든은 패밀리 뷔페로 변신한다. 그 변신은 대성공이었다. 상다리 휘도록 푸짐하게 차린 상처럼 먹을 수 있었다. 패밀리 가든에 반응을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는 일단 주방을 장악해야 된다고 생각해 6개월간 직접 요리도 했다. 86년 10월 패밀리 뷔페를 열고 2천명의 VIP에게 영업 재개 인사장을 보냈다. 가격도 매우 저렴하게 했다. 1인분 4천500원이었다. 이렇게 해서 한강 이남 최초의 뷔페 레스토랑이 대구에 생겨난다.

신선한 먹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심야까지 음식을 장만했다. 그때 출장 뷔페도 함께 시작했다. 1년3개월 만에 빚을 완전 청산할 수 있었다. 뷔페 붐이 일자 매장을 더 큰 곳으로 옮긴다. 단일 면적으론 대구에서 가장 큰 대명9동 대덕빌딩 9층에 316평 크기의 패밀리 뷔페를 90년 6월 연다.

패밀리 뷔페 붐은 기사식당으로 옮겨붙는다. 기사식당이 뷔페식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랜드 호텔, 신라, 코리아, 태백산맥, 나드리, 한아름, 다래웨딩 뷔페(1992)까지 생긴다. 레스토랑형 뷔페가 웨딩뷔페형으로 발전된다. 대구호텔 근처에 고기 전문 뷔페까지 생긴다.

# 레스토랑과 한식당의 절충 마이하우스 탄생

뷔페가 너무 많이 생겼다. 패밀리는 특화하지 않으면 살기 힘들다고 생각하고 일본 도쿄에 있는 한 고기 전문 뷔페, 미선장의 경영 기법을 배운다. 구 사장은 해산물과 육류를 혼합한 뷔페 식당을 출범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디어는 용도폐기된다. 한 직원이 구 사장의 사업 구상을 갖고 앞산순환도로변에서 식당을 열어버린 것이다. 계획은 전면 백지화된다.

그는 지역 특성을 생각했다. 앞산 앞에서 일을 벌이려면 일단 건강 식단에 초점을 맞춰야 된다고 생각했다. 국민소득 1만달러 시대, 식당 스타일이 점점 패밀리형으로 갈 것으로 전망했다. 건강과 친환경, 가족을 생각한 레스토랑. 그게 대구의 첫 패밀리 레스토랑 마이하우스(93년 3월1일 개점)의 사업 컨셉트였다.

마이하우스는 실내 공기를 맑게 하는 화초를 심었다. 실내 구조는 일본 게이오 프라자호텔 내 식당 일부를 참고했다. 정통 레스토랑과 한식당을 절충했다. 꼭 내 집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도록 배려한 것. 로고는 샐러드를 뜻하는 녹색, 육류를 가리키는 붉은색, 그리고 깨끗한 환경을 의미하는 흰색을 합쳐 만들었다. 가족끼리 앉을 수 있는 갈색 라운드 테이블, 시원스럽게 터치한 원형 천장, 대기하는 손님들을 위해 입구 오른쪽에 대기룸도 설치해 신문과 잡지를 비치했다.

# 처음엔 고전했다 그러나 차츰 입소문이 나고

여느 패밀리 레스토랑은 이름뿐인 경우가 많았다. 거의 어른들만을 위한 메뉴가 주종을 이룬다. 하지만 마이하우스는 달랐다. 어린이를 위해 단팥죽, 돈가스, 불꽃이 피어오르는 폭탄밥도 만들었다. 노인들을 위해 호박죽도 개발했다.

인천상륙작전을 방불케 하는 치밀한 창업 계획서를 짰다. 한일회관, 골목집, 패밀리 가든, 패밀리 뷔페의 노하우가 마이하우스에 총동원됐다. 그렇게 해서 1인분 3천850원의 뷔페식이 태어났다.

첫날엔 손님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영업전략을 새로 짰다. 온 손님 500명을 불러 1주일간 무료 시식 행사를 했다. 일부 손님들은 "50가지 음식을 차려놓고 그렇게 돈을 적게 받아서야 장사가 되겠냐"고 걱정을 했다. 직원들도 3천여원의 식사대에 불만을 가졌다. 하지만 차츰 입소문이 났다. 특히 지역 레스토랑에선 처음으로 오전 6~8시 조식 죽뷔페도 열었다.

'안주하면 죽는다.' 마이하우스가 지역 식당가에 던진 경고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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