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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0년대 대구 유명 일식집

50∼60년대 대구 유명 일식집 요리 맛집 정보 2008.09.06 11:55

50∼60년대 대구 유명 일식집



50∼60년대 풍미한 '삼거리'
영화 빨간마후라 신영균 최무룡씨도 촬영 끝나면 "삼거리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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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일식사는 중구 향촌동에서 발원한다. 일반인에게 향촌동은 서울 무교동·부산 남포동과 함께 전국 3대 주점가로 알려져 있지만 일제 때는 한강 이남 최고의 일식 타운. 향촌동 일식문화는 일제 때 절정기를 맞았고 1950~60년대도 여전히 호경기를 누린다. 하지만 70년대로 접어들면서 향촌동 일식 시대는 끝이난다. 점차 주점가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취재를 위해 향촌동을 둘러봤다. 실버들을 위한 카바레와 선술집이 흘러넘쳤다. 초밥집이 점점이 박혀 있었지만 예전 일식당은 아니었다. 인기 메뉴는 4천원짜리 실버형 초밥(우동과 구운 생선을 서비스로 제공). 돈없는 노인들을 상대하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단다. 그 시절 향촌동의 정통 일식당은 전멸이었다.


# 스모노 전문점 할매집…80살 주인 아직도 영업중

행히 한 곳만은 일제 때 발원한 초무침회의 일종인 '스모노(酢物)' 요리의 전통을 잘 지켜가고 있었다. 옛 상업은행 네거리에서 북측 골목 안에 있는 할매집이다. 70대 이상 노인들에겐 '곤도집'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곤도상이란 향촌동의 대표적 일식 조리사였던 권영수씨의 창씨개명한 이름. 80년 타계한 그는 일제 때 미화 등 향촌동 근처의 여러 일식당을 돌며 일식을 체계적으로 배운 괄괄한 성질의 조리사이다. 광복 후 사업 자금이 없어 한동안 다른 사람 밑에서 일을 했다. 독립한 곳은 향촌동 서편 골목 끝 왼편 모퉁이 지하실에 있던 녹향음악감상실 건물 2층 곤도집이었다.

곤도집은 정통 일식당은 아니었다. 초밥과 오뎅, 히레사케, 스모노 등 여러가지 일식 요리를 잘 만든 선술집이었다. 거기선 김치와 막걸리도 나왔다. 그는 주당 손님보다 술을 더 많이 마셨고 낭비벽도 심했다. 호인인 탓이다. 술이 거나해지고 기분이 좋지 않으면 식당 문을 닫아버렸다. 그가 타계하자 혼자 남은 아내 이월분 할머니(80)는 남편과 함께 주방 일을 해온 덕분에 가업을 계속 이을 수 있었다. '향촌동 스모노 할매'로 통하는 그녀는 요즘 청력이 너무 약해 보청기에 의존하고 있다. 관절염도 심해 제대로 걷기 힘들지만 그 시절 손님들이 찾는 게 너무 고마워 스모노 요리를 계속 붙들고 있다.

# 향촌동 일식집 출입한 한국인은 손에 꼽을 정도

일제 때 향촌동의 일식당에 출입할 수 있는 한국인은 손가락으로 꼽힐 정도였다. 일본인은 일본인 동네, 한국인은 한국인 동네의 식당을 주로 이용했다. 칠성동, 태평로, 북성로, 화전동, 서문로, 포정동 등 대구역전은 거의 일본인이 차지해버렸다. 향촌동은 일본인을 위한 유흥가였다.

일제 때 일본 여관은 식당업을 겸했다. 잠만 자는 여인숙도 있었지만 대다수 여관은 투숙객들이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일식의 역사는 여관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조리사가 없으면 여관업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간판을 달 때도 '식사도 한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여관 앞에 요리를 의미하는'할팽(割烹)'이란 단어를 붙였다. 할팽 여관보다 한 등급 높은 건 호텔이다. 일제 때 호텔은 철도청 부설이었다.

# 최고급 할팽 여관 가게츠…유명 정치인 많이 이용

일제 때 지역 최고급 할팽 여관은 옛 상업은행 대구지점 뒤편 골목 안에 있는 향촌동 가게츠(花月)였다. 이 가게츠는 60년대까지 화월 여관으로 존속했다. 50년대는 유명 정치인들이 이 여관을 잘 이용했다.

비록 외형은 예전 그대로지만 워낙 낙후돼 철거 직전의 음산한 표정이 안쓰럽기만 하다. 6·25 때 그 여관 한 쪽에 르네상스 음악감상실이 들어오기도 했다. 50년대초 작고한 구상 시인도 영남일보 편집국장 시절 그 여관을 본거지로 해서 '낭만의 향촌동 시절'을 구가했고 연작시 '초토의 시'도 건질 수 있었다. 가게츠는 70년대초 여관에서 성인 디스코장 '원투쓰리'로 바뀐다.  이후 판 코리아를 거쳐 현재는 실버 카바레로 변모했다.

# 일제 때 대구의 대표적인 향촌동 주변 일본 식당들

일제 때 대구의 대표적 일식당들은 거의 향촌동과 그 근처에 밀집해 있었다.

미자꾸(味樂·동성로 소재, 오뎅 전문), 비카(美華·향촌동, 고급 도시락의 일종인 마쿠노우치 전문), 쇼치쿠(松竹·향촌동 옛 상업은행 대구지점 뒤편, 복어전문), 고우미(香味·향촌동, 회·장어덮밥 전문), 가모가와(鴨川·화전동, 일·양식 전문), 도수이엔(刀水園·칠성동, 최고급 요정), 기쿠후지(菊富士·대구백화점 근처, 사시미·우동·소바 전문), 다마스시(玉壽司·서문로, 초밥·뎀뿌라·아게모노(튀김의 일종) 전문), 가게츠(花月·향촌동, 할팽 여관), 아카시(明石·향촌동, 할팽 여관), 오오에로(大江樓·중구 도원동, 시오아키(소금구이)·나베(냄비 요리) 전문), 야마토(大和·향촌동, 할팽 여관), 가이코(海光·향촌동, 오뎅·스모노 전문), 만세이앙(滿盛庵·중앙로, 단팥죽·소바 전문), 교지쿠(魚竹·북성로, 사시미 전문) 등이 대표격으로 꼽힌다.

이들 일식당은 광복 직후 적산으로 처분된다. 그곳의 한국인 조리사들 중 재력이 있던 사람들은 일제 때 예전 식당과 결별하고 새로운 식당을 개업했고, 또 일부는 일제 때 식당 주인으로부터 영업권을 건네받아 예전 일본 상호로 영업을 계속했으며 나머지는 가진 돈이 없어 다른 식당의 조리사로 들어갔다. 광복 직후 얼마까지 대구엔 일본식 상호가 적힌 간판이 적잖았지만 반감은 별로 없었다. 상당수 인사들이 일본풍에 젖어 있었던 탓이다.

# 향촌동 일식당, 포정동 은성 등장으로 대거 문닫아

복 직후 대구를 대표하는 일식당들은 향촌동을 거점으로 60년대까지 장사를 하다가 70년대초 혜성처럼 나타난 포정동의 은성 때문에 치명상을 입고 일제히 문을 닫는다.

50~60년대 대구를 대표하는 일식당은 향촌동을 거점으로 한 해광·미화·미향·향미·삼거리가 메이저급이다. 이밖에 향촌동의 미옥·송죽·와싱톤·안락·가보자·낙미를 비롯해 삼영(한일극장 맞은편), 삼락(아세아 극장 근처), 이학(만경관 옆), 낙락(아세아 극장 근처), 영락, 미림(대신동), 석백산(중앙파출소와 동아양봉원 사이) 등이 포진했다. 이들 중 삼락·삼영·영락·낙락·이학·석백산 등은 광복 직후 복어전문 식당으로 유명했다. 그 시절 일식당 상호용 한자는 미(味), 락(樂), 송(松), 해(海), 향(香), 학(鶴) 등이 인기였다.

# "삼거리에 와보지 않고 대구 왔다갔다는 말 하지 말라"

대구시 중구 남일동 중앙시네마 서편 골목 한주초밥. 그곳엔 현재 지역 최고령 일식 조리사 이우태 대표(70)가 일을 하고 있다. 그는 특히 삼거리에서 잔뼈가 굵은 조리사이다.

상주시 낙동면 출신인 그는 6·25와 함께 대구로 피란왔다. 그때 그가 제일 먼저 일을 배운 곳은 현재 미도백화점 자리에 있던 2층 목조 산가쿠(三角)였다. 이곳은 일제 때 일본인이 경영한 식당인데 광복 후 한국인한테 넘어간다. 일본인 주인이 종업원 박삼식씨(작고)의 성실함에 반해 식당을 물려준 것이다. 박씨는 산가쿠를 두 배로 키웠다. 향촌동의 미향 사장 조탁씨와 동업관계를 맺고 산가쿠를 삼거리로 상호변경해 신장개업한다. 테이블도 7개에서 30개로 늘어난다. 2층엔 회식용 다다미방이 무려 11개가 있었다.

삼거리의 위세는 64년 상영된 신상옥 감독의 영화 '빨간 마후라' 대구 현지 촬영 때도 여실하게 드러났다. 주연배우 신영균과 최무룡은 대구 동촌 비행장에서의 영화 촬영이 끝나면 스태프와 함께 부리나케 삼거리로 달려왔다. 초밥과 우동, 오뎅 맛이 워낙 좋아 "삼거리에 와보지 않고 대구에 왔다갔다 말하지 마라"란 말까지 스태프 사이에 유행하기도 했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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