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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일식당 종가격 '미화'

대구 일식당 종가격 '미화' 요리 맛집 정보 2008.09.06 11:53

대구 일식당 종가격 '미화'



한창때 종업원 100명, 조리사는 군대식 규율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
1960년대말까지 지역 일식촌의 종가격은 누가 뭐래도 미화(美華)였다.

인접한 해광, 미향, 미옥, 향미, 삼거리 등도 나름대로의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미화의 독주를 견제하긴 힘들었다. 음식도 음식이거니와 무엇보다 주인이 대외적 활동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게 가능한 것 같다. 충청도 출신의 이종화 사장(작고)은 훗날 대구상공회의소 상임위원, 음식업중앙회 대구지회장, 향촌동 상가번영회장, 무궁화백화점 사장 등을 거치면서 식당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다. 한때 대구일보 사장직까지 제의받을 정도로 명망가가 된다. 그 덕분에 '미화 문중'을 이룰 수 있었다.

물론 거기서 쟁쟁한 조리사들이 많이 배출됐다. 향촌동 주부센터의 김정식 사장(67), 종로의 미성초밥 정훈성 사장(67), 대봉맨션 상가에 있는 다미초밥의 이준석 사장(66), 정용암씨(56·대구역전 길조초밥 대표 역임, 현재 범어교회 맞은편의 한 일식당 주방장), 이용규씨(61·동아쇼핑 구미지점 랑데뷰 책임자 역임) 등이 바로 그들이다.

# 사미센 가락이 흘러나온 요정형 식당

화는 일제 때 오픈한 일본인들을 위한 요정형 식당이었다. 꽉 짜인 풀코스 메뉴라인, 정통 정원, 밤엔 일본 전통악기 사미센(三味絃) 가락이 흘러나왔고, 게이샤들까지 들락거렸다. 광복 직후엔 해광도 미화와 함께 요정형으로 크게 성공한다.

미화 입구엔 주렴처럼 생긴 '노렝'이 펄럭거렸다. 천으로 만든 노렝의 아랫단은 손님들이 자연스럽게 출입할 수 있게 두 곳이 트여져 있다. 노포(老鋪·일본의 오래된 업소)에는 반드시 노렝이 있다. 거기에 상호와 로고격인 문장(紋章)을 새겨놓는다. 그것은 그 식당의 자존심이었다. 그걸 달면 주인이 "절대로 음식 갖고 손님을 속이지 않겠다"는 걸 손님에게 약속한 것이다.

# 우키요에가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고

광복 직후 영업권을 인수한 이 사장은 정통 일식당 풍모를 갖추기 위해 18세기 때 절정기를 맞는 일본 민속판화인 '우키요에(浮歲繪)'를 여러 점 구해 걸어뒀다. 정통 일식당 주인이 우키요에 한 점 못 걸면 단골에게 눈총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키요에의 대가 중 한 명인 가츠시카 후쿠사이가 그린 '후지산 36경' 중 특히 해일 이는 바다 풍경은 가장 시각적 미학이 돋보여 한국 일식당 주인들이 선호했다.

이런 작품들이 정작 일본에선 푸대접을 받고 일부 브로커들을 통해 유럽에서 꽃을 피워 후에 일본으로 역수입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세잔, 고흐, 고갱, 모네, 마네, 로트렉 등 후기인상파 작가들이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유럽에서의 대박행진을 본 일본의 화상들이 미국 보스턴 등지를 돌며 우키요에 재매입에 나서게 된다. 우키요에 소재로는 가부키, 분라쿠(인형극), 노(能) 등 일본전통극에 출연한 배우, 스모 선수, 게이샤 등이 사랑을 받았다. 요즘 지역 일식당가엔 거의 컬러 프린팅 된 복제품들이 액자나 노렝 형태로 걸려있다. 이밖에 전통극 노의 여자 가면인 오다후쿠(御多福)·오까메, 금복주의 마스코트였던 복노인처럼 생긴 선동자 가면 등도 일식당 액세서리로 선호된다.

# 복어와 장어 요리도 일식집 대표메뉴

100여평 크기의 미화엔 다다미방이 10개, 조리대 앞엔 모두 15개의 등받이 탁자가 놓여 있었다. 한창 때는 총 종업원수가 100명이 넘었다. 미화엔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일식 요리가 다 구비돼 있었고 조리사들도 파트별로 조가 잘 짜여져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지금은 일식집에서 분리된 복어와 장어 요리도 반세기전엔 일식집의 대표메뉴였다. 사시미도 일반 생선보다 복사시미를 최고로 쳤다. 주요 재료는 염매시장에서 사왔다. 사시미용 생선은 수족관이 없어 포항 죽도시장에서 배송한 걸 얼음 위에 얹어놓고 사용했다.

요즘은 13~14℃를 유지해주는 첨단 수족관 덕분에 '즉석활어회'가 가능했다. 그러나 60년대만해도 활어를 넣어두는 수족관이 없었다. 당시 거의 
 
 
촬영 협조=서울 코리아나 호텔 일식부 사카에 출신인 경주대 외식조리학과 김현룡 교수가 카이세키 요리의 한 품목으로 만든 마구로 사시미. 얼음 항아리 아이디어가 빛난다.  
 
미화 출신 정훈성씨가 꾸려가고 있는 종로 미성초밥(위)과 미화에서 해광을 거친 김정식씨가 세운 주부센터. 현재는 보리밥 뷔페로 바뀌었다. 
 
 
나무 궤짝에 얼음을 채우고 그 위에 선어를 얹어 식당으로 갖고 왔다. 그것을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부패해 먹을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회보다는 초밥, 매운탕, 지리 등이 잘 팔릴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 대다수 일식당 주인들은 먼 포항 죽도시장 대신 염매시장의 선어를 사용했다. 서문시장과 칠성시장의 생선은 일식당에 그렇게 어필되지 못했다. 지역에선 대번초밥, 주부센터, 홍학(옛 코리아백화점 내) 등에 힘입어 70년대말~80년대초 수족관 활어시대가 열린다.

# 월급도 받지 못했던 올챙이 조리사들

때만 해도 올챙이 조리사들에겐 월급이 없었다. 조리사들은 단지 숙식만 해결하면 그것으로 족했다. 미화도 그랬다. 타지에서 온 가난한 농부의 자식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왔다. "그냥 밥만 먹여주면 열심히 일하겠다"면서 주방장 김말암씨 등에게 애원을 했다.

신참은 늘 잔심부름을 하고 청소만 전담했다. 식재료는 최소 1년이 경과하기 전엔 만지지 못한다. 요리를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땐 요리 정보가 몇몇 조리사에게 독점돼 있었고 그건 잘 공개하지 않았다. 요령껏 그 노하우를 훔쳐가야만 했다. 물론 일정 시간이 지나면 어깨 너머로 요리술을 터득하게 되지만.

흔히 식당 조리사들은 '이다바(板場) 출신'이라고 낮게 평가된다. 실제는 이다바 보다 '이다마에(板前)'가 정확한 표현이다. '이다'란 도마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도마 앞에 선 주방 팀장급 조리사에게 '이다마에상'이란 호칭이 붙여진다. 광복 직후부터 반일감정 때문에 일식 조리사를 일부러 이다바 출신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용어가 장인정신을 갖고 일하는 그들의 심사를 부담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것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 정통 일본 요리사는 모두 8계층으로 구분

아무나 도마 앞에서 '호죠(사시미용 일본 칼)'를 들지 못한다. 여러 단계의 견습시절을 거쳐야 가능하다.

맨 아래 단계 조리사를 '오이마와시'라고 부른다. 이들은 그릇씻기, 물품 구매, 청소 등 허드렛일을 한다. 이 시기를 적어도 2~3년 보내야 한다. 다음은 '핫슨바(八寸場)' 시기. 이때 견본을 보며 요리를 접시에 담는 일을 한다. 그 다음은 '와키이다(脇板)'. 이때는 생선을 물로 씻고 내장과 비늘을 제거하는 등 재료를 다듬는다. 이렇게 최소 5년간 세 단계를 보내야 된다. 그 다음 단계가 중견 조리사로 대접받는 5년간의 이다마에(板前) 시기. 이다마에 1기 때 비로소 칼을 잡을 수 있다. 냄비요리에 능한 팀장격인 와키나베(脇鍋), 구이요리를 잘 하는 야키카타(燒方) 등은 부조리장격인 '나카타(煮方)'를 도와준다. 도쿄에선 주방장을 '하나이다(花板)'로 받든다. 요리의 신 쯤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부하들을 이끄는 탁월한 리더십은 물론 식품과 가격의 본질까지 훤하게 간파해야 된다.

고교 졸업 후 일식 요정에 오면 스무 살까지 오이마와시로 일한다. 일본에선 식당 옮기는 걸 금기시한다. 그래서 말을 자주 갈아타면 경력이 거의 인정되지 않는다. 우리와는 좀 다른 풍토다. 사력을 다해 한 공간에서 목숨을 걸어야 나카타까지 올라갈 수 있다. 이다마에 정도가 되면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 나카타 이상은 천부적 재능이 있어야 된다. 하나이타는 아무나 못 올라간다. 골프로 말하면 타이거우즈급이랄까.

# 방만한 경영으로 미화도 최후의 길로 들어서

이 사장은 사업을 매우 방만하게 펼쳤다. 친척을 불러 옆에 미옥도 차리게 했고, 장어 도매상까지 경영한다. 하지만 향촌동 재개발이 일어날 때쯤인 70년대초 미화는 향촌동을 뜬다. 이 사장은 중부보건소 맞은편 자기 집으로 미화를 이전해 영업을 계속하지만 갓 등장한 중구 포정동 은성의 폭발적 파워에 밀려 단골을 많이 잃는다. 이 과정에 무궁화백화점도 공동투자해 짓고 모 페인트 대구경북 총판도 꾸려간다. 하지만 무궁화백화점 부도 여파에 휘말려 미화도 최후를 맞고 만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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