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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번과 대어의 돌풍

대번과 대어의 돌풍 요리 맛집 정보 2008.09.06 11:49

대번과 대어의 돌풍





'서비스 밑반찬' 으로 대구 일식문화 바꿔



대번의 강병덕(56)·대어의 노정섭 사장(44). 두 사람은 공통점이 꽤 많다.

고향도 경남 진주시 미천면. 청년기 부산·경남권에서 일식의 기초를 다졌고 20대에 주방장 겸 사장이 됐다. 기본기를 배운 뒤 대구 일식계에 도전장을 내 일가를 이뤘다. 둘 때문에 부산·경남의 일식문화가 지역으로 유입된다. 지역에 '공짜 스키다시 문화'를 퍼트리는 데에도 일조했다. 공짜 스키다시, 이건 일식 정통파들에겐 참 난감한 흐름이었다. 공짜는 손님에겐 좋지만 업주에게는 '일식의 덤핑화'를 초래하고, 일식당이 정체불명의 횟집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 우려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일식 미학'은 생존경쟁 속에서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둘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원칙만을 고집할 수 없었다.

# 활어차 시스템 재빨리 도입한 대번

대번초밥의 사장 강병덕. 15세 때 진주의 한 식당에서 조리사의 꿈을 키운다. 1965년쯤 대구로 와 360평 크기의 당시 대구 최고급 일식당인 해광에 입문한다. 3년간 기본기를 배운 뒤 조탁 사장이 운영하던 향촌동 미향으로 옮긴다. 거기서 튀김요리 등을 배우며 4년간 불판장 시절을 보낸다. 당시 주방 질서는 지금과 전혀 달랐다. 특수군부대 규율보다 더 엄격했다. 일해도 월급이 나오지 않고 핵심 조리술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냥 눈치껏 선배들의 솜씨를 배워야만 했다. 신참은 주방장과 눈도 못 맞췄다. 3~4일만에 손톱을 깎아야 했다. 머리도 기를 수 없었다. 주방에 들어갈 땐 일반 신발은 벗고 무릎까지 오는 장화를 신었다. 세제도 없어 식용유로 만든 검정비누를 사용해 식기에 묻은 기름기를 뺐다. 초밥 만드는 연습을 할 때도 생선이 귀해 비계를 이용했다.

강 사장은 15세부터 3년간 해광에 있다가 미화에서 간부격인 불판장이 된다. 그곳에서 아카데미극장 옆 수정(대표 한정자)으로 간다. 그 뒤 대구백화점 맞은편 미조리, 주부센터를 거쳐 30년 전에 동아양봉원 근처에서 대번을 오픈한다. 드디어 사장이 된다.

대번은 대구 일식사에 한 획을 긋는 일을 한다.

60년대 대구 일식 1번지는 향촌동. 그런데 70~80년대 점차 중구 봉산동 동아양봉원 근처로 동남진한다. 봉산동 일식시대를 연 게 바로 대번이다.

현재 대번은 규모가 크지만 초창기엔 아담했다. 홀 크기 20평·방 3개·홀 테이블 4개 규모였다. 대번은 지역에선 선두격으로 활어차와 수족관 시스템을 개발했다. 당시 시내에선 살아있는 활어를 구경할 수 없었다. 동·남해안에서 가져오면 오는 중에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얼음 위에 선어를 놓고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도심에서도 활어를 구경할 수 없을까? 직접 나무 수조를 짜서 화물차 짐칸에 실었다. 포항에서 대구를 왕복하는데 5~6시간 걸렸지만 고기는 죽지 않았다. 대번은 포항 죽도시장 내 영동시장을 주로 이용했다. 대번은 정통 일식만 고집하지 않았다. 일식도 대중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제철 재료를 공짜로 내놓아 선풍을 일으킨다. 봉산동에서 15년 머물다가 주차하기 좋은 황금네거리 근처로 이전한다. 황금동 시절 장사가 가장 잘 돼 하루 평균 300명 이상 몰려들었다. 강 사장은 동고동락한 총주방장 김만수씨(61)를 데리고 지난 2월 들안길로 이전했다.

# 화끈한 인심 풍기는 대어

1천500만원짜리 구불구불한 낙락장송이 손님을 맞는다. 원가를 생각하면 고가의 정원수를 감히 생각 못할 법한데 대어는 일을 저질렀다. 70년대 후반 대구에도 활어를 보관할 수 있는 수족관이 등장하는데, 특히 대번이 그 산파 역할을 했다. 
 
 
그는 체력 좋은 날 손님 방을 순회하면서 시중을 들고, 주종불문 150여 잔을 마시고도 취기를 삭일 줄 안다. 그러나 지금은 몸을 조심한다. 현재 지역 일식 회초밥 식당 중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수성구 두산동 대어. 그 뒤안길은 단골들도 잘 모른다. 어렵사리 노 사장과 인터뷰를 했다.

78년 부산으로 가서 가구 일을 배우다가 적성에 안맞아 부산 서면의 미조리에 들어간다. 거기서 2년간 기술을 배운 뒤 당시 부산 최고의 일식당인 용두산 공원 밑 명송으로 갔다. 월급이 충분치 않았다. 자립하고 싶어 대구로 진출한다. 대구시 서구 7호광장 옛 88회관 뒤편에서 85년 5월 부산횟집을 연다. 대구 일식계를 평정하리란 야망도 있었다. 그런데 처참하게 무너진다. 그해 여름, 난데없이 비브리오한테 습격당한 것이다. 그는 살기위해 직접 광고지를 돌리며 살길을 찾았지만 6개월 만에 백기를 들고만다. 다시 동아양봉원 서쪽에 대영초밥을 차렸다. 그때만 해도 정통 일식에 가까운 '부산식 일식'을 고집했다.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공짜는 없이.'

그러나 그게 대구 사람들한테 전혀 호응을 못받는다. "사람 감질나게 하는 것도 아니고…."

단골들이 하나둘 떨어져나갔다. 정통 일식 코스요리, 가이세키는 '언발에 오줌누기 식'이었다. 또 6개월 만에 참패한다. 그는 현실을 인정한다. 대구 사람들이 원하는 걸 만들자. 그렇게 다짐하고 대번 바로 옆에 오사카성이란 초밥집을 연다. 공짜 스키다시에 사활을 건다. 맘껏 내주자. 그럼 감동할 것이다. 죽과 수프, 땅콩, 콩, 은행알, 멍게·해삼, 전복, 메로 구이, 튀김, 참치, 마끼, 산낙지, 송이구이, 게 등 무려 30여종을 내 놓았다. 방 7개·8석 다이·6개의 테이블·종업원 12명 규모의 오사카성이 화제가 된다. 압권은 마술쇼 같은 랍스타 요리. 버터 두른 프라이팬에 오른 랍스타를 술로 불붙여 구워냈다.

그는 대구가 공짜 스키다시에 움찔하는 걸 감지했다. 사업의 승부처를 확인한 것이다. 사시미는 다른 조리사에게 맡기고 자기는 스키다시만 챙겼다. 시장보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생선 재료값이 50만원이면 스키다시 재료는 100만원어치라서 이윤율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대어와 대번이 일으킨 스키다시 문화를 다른 일식당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88년 결혼 직후 그는 오사카를 처분하고 그랜드 호텔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으로 건너간다. 90년 1월3일 250평 식당 안에 8개의 방·테이블 5개·12석 다이가 세팅됐다.

당시 그는 자본금 2천500만원에 빌린 돈 1억3천여만원을 보탰다. 근처에는 80년대 중반 동대구로의 첫 일식당이었던 대형 횟집이 있었다. 모두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으로 봤다.

대어가 채 3개월이 안돼 문을 닫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예상은 빗나갔고 대어는 성황을 이뤘다. 대어의 서비스는 대구스타일, 인테리어는 부산식, 단골들의 프라이버시를 보장해주기 위해 룸도 밀폐식으로 짰다. 대어의 랍스타는 더 불티나게 팔렸고, 스키다시도 더욱 좋아졌다. 다른 업소 주인들과 주방장이 대어로 견학을 왔다. 대어는 3개월 전에 예약을 하지 않으면 방을 잡지 못할 정도였다. 92년 넘치는 손님을 위해 황금네거리 근처에 대륙을 연다. 범어동 대어가 도시계획에 편입돼 뜯기는 바람에 94년 11월 두산동으로 옮기고 대륙은 IMF외환위기 때 동서인 박병면씨에게 넘긴다.

현재 대어는 500평 넓이에 20개의 방과 12석의 다이·20개의 테이블을 갖고 있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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