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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무침회타운

대구 무침회타운 요리 맛집 정보 2008. 9. 6. 11:46

대구 무침회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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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시에서 갈라져 나온 사시미는 '한국형'으로 변형된다. 특히 경상도에서는 담백투명한 사시미가 얼큰하고 화끈하게 분칠된다. 생고추냉이 대신 사시미 옆에 마늘과 된장·초고추장이 붙게 된다. 이를 일식 마니아들은 '일식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인다. 한국식 화끈한 사시미는 경상도의 명물 '무침회'와 같은 항렬이다. 대표적 지역의 무침회 거리는 대구시 동구 불로동과 서구 내당동. 한때는 경대교 근처에도 군락을 이뤘지만 지금은 명맥이 끊어졌다. 무침회와 사촌간인 물회는 본거지 포항에서 태어나 현재 대구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불로동과 내당동 무침회는 외형상 비슷해 보여도 차이가 있다. 불로동은 내당동보다 초장이 뻑뻑하다. 그것은 고추장으로 초장을 만들지 않고 직접 고춧가루와 사과식초 등을 가미해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식단도 두 곳이 조금 달라 내당동엔 소라·고둥이 들어가는데 불로동은 패류는 사용하지 않는다. 이제 추억의 무침회 골목으로 가 보자.

유성환 전 국회의원도 한때 불로동서 무침회 장사

# 불로동 회타운-70∼80년대 대학 신입생들의 환영회 장소로 인기

1980년대 초 어느 날 전경 수개 중대 병력이 대구시 동구 불로동 일대에 포진된다. 난데없는 전경의 출현에 놀란 주민들은 자기 동네에 무장공비가 나타난 줄 안다. 하지만 그날 오후 인구에 오랫동안 회자될 해프닝이 벌어진다. 김동영, 최형우 등 신민당 내 김영삼 계보 거물급 정객들이 이 동네에 들이닥쳤고 만일의 사태를 생각해 당국에서 폴리스 라인을 친 것이다. 선거철도 아닌데 신민당 지도부가 이 골목에 온 이유는 뭘까? 한 지역 정객의 식당 개업식을 축하해주기 위해서다. 화제의 정객은 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됐고 86년 '대한민국 국시는 반공이 아니고 통일'이란 국시 파동으로 구속돼 파란을 일으킨 유성환이었다. 유성환 내외는 70년대 중반부터 불로동 골목에서 무침회를 팔았다. 80년대 초에는 불로파출소 뒷골목 황보택 사장이 꾸려가던 성주식당을 인수해 재오픈했고, 그때 야인들이 축하인사를 온 것이다. 그날 김영삼은 불로동 무침회를 안주로 불로막걸리를 마신 뒤 금일봉을 내놓고 상경했다. 유성환은 국회의원이 된 후 성주식당을 장모에게 넘겨주고 상경한다.

태평양, 옥포, 성주, 팔공, 태종대, 황해, 불로횟집, 동해, 제일, 가야, 해운대…. 한창 때 불로동엔 20여개 업소가 운집해 있었다.

이 골목의 태동 배경은 뭘까?

70년쯤 불로동 출신인 황보택 사장이 현재 경주보양탕 자리에서 성주관이란 대폿집을 차렸다. 그 집이 무침회 타운의 원류가 된다. 그 집 탁주는 근처 대구탁주에서 만든 불로막걸리였다. 특히 안주가 경쟁력이 있었다. 그때 다른 탁주집에선 도루묵, 막창·곱창이 주종이었는데 성주관에선 경상도 잔칫집에서 자주 선보이는 무침회를 안주로 개발한 것. 아나고, 오징어, 가오리, 한치, 병어, 전어, 문어 등이 주탁에 올랐다. 정통 횟집용 생선은 아니지만 그래도 회 대용으론 손색이 없었다. 채썬 무를 쟁반에 올리고, 그 위에 갖은 횟감을 올린 뒤 마지막엔 회초장을 부었다. 무치는 것은 손님의 몫. 뒤에 성주관은 성주식당으로 바뀌면서 무침회의 산파역이 된다.

특히 이 골목은 70~80년대 지역 대학생들의 신입생 환영회 및 MT 장소로 인기 짱이었다. 이들의 교통수단은 동화사행 76번·20번 버스. 불로교 초입에 내리면 그순간 회타운은 '불로훈련소'로 둔갑된다. 선배들은 식당 안으로 들어가기 전 후배들을 짓궂게 굴렸다. '일어섯' '앉아' '동작 그만' 등 온갖 지시·명령·구호·구령 소리가 난무했다. 선착순 달리기도 시켰다. 하지만 주인들은 빙긋 웃으며 그 광경을 감상할 수밖에 없었다. 저들이 돈줄이기 때문이다. 겁에 질린 후배들이 주탁에 앉으면 폭탄주가 제조된다. 큼지막한 바가지에 막걸리와 소주를 섞었다. 마시는 데 남녀 구분이 없었고 술을 못먹어도 마셔야만 했다. 막차를 놓치면 불로여인숙에서 새우잠을 자야만 했다.불로동 회타운은 정통 횟집 대용이었다. 회는 먹고 싶은데 비싸서 상대적으로 무침회를 많이 찾는다. 80년대 초만 해도 수족관이 없어 활어는 구경할 수 없었다. 생명력이 가장 강한 아나고가 이 거리에서 인기를 끌 수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횟집이 흔하지 않아 선택의 여지 없이 불로동 골목으로 사람들이 몰린 측면도 있다. 하지만 90년대 들면서 사람들의 입맛이 까다로워져 회가 대중화되자 이곳 무침회도 점차 경쟁력을 잃는다. 90년초 이 거리에도 수족관이 들어와 활어시대가 열린다. 팔리지 않는 무침회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몇몇 집이 정통 횟집으로 말을 갈아탄다. 이밖에 제일은 경주보양탕, 팔공은 해물찜집, 태종대는 돼지 목살 전문점으로 변한다. 현재 불로동에서 무침회 명맥을 잇고 있는 곳은 형제간인 이찬교·필교 사장이 경영하는 태평양과 옥포, 단 두 곳밖에 없다.

# 내당동 무침회 골목-원류는 진주식당 여주인 일명 '화끈할매'

90년대로 접어들면서 불로동 골목이 시들할 때쯤 반사적으로 내당동 무침회 골목이 상승라인을 탄다. 내당동 무침회 식당은 반고개 명성약국 옆 350m 길이의 골목 양편에 산재해 있다. 현재 무침회 거리는 해물탕, 숯불갈비, 칼국수 식당 등이 혼재한 먹거리 골목으로 팽창 중이다.

내당동 무침회의 원류는 옛 구남여상 근처에 있었던 일명 진주식당 여주인 '화끈 할매'. 이 식당은 된장, 해물, 떡볶이 등을 주메뉴로 한 분식스타일의 실비집이었다. 술손님들에게 내놓은 대표 안주는 불로동 황보 사장처럼 무침회였다. 60~70년대, 서구 내당동은 거의 달동네 수준이었다. 드문드문 초가도 보였고 이렇다할 만한 식당가도 없었다. 이현·성서·3공단 직공들은 마땅히 회식할 곳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매콤·달콤·시큼한 초장맛이 일품인 진주식당으로 몰려들었다. 그 단골 중 한 명이 훗날 내당동 회골목의 기반을 다진 전남 광주 출신의 한기석씨. 그의 무침회 노하우는 화끈 할매에서 온 것이다. 그는 진주식당에 진을 치다시피하면서 그 기술을 배운다.

70년대 중반쯤 한씨는 현재 무침회 골목 구 호남식당 자리에서 호남식당이란 상호를 갖고 1천800원짜리 무침회를 선보인다. 원래 그 자리는 메리야스 공장 부지였는데 공장이 파산하자 구 호남 등 4개 무침회 업소가 그곳에 다 들어간다. 호남식당 무침회는 주당들에게 특히 사랑을 받게 된다. 호남이 잘 되니 다른 집도 슬그머니 무침회 식당으로 업종을 변경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한씨는 3년 정도 하다가 그 식당을 현재 호남식당 사장 장창현씨(55)의 형 하현씨(67)에게 넘긴다. 그렇지만 3년 정도 하다가 비브리오 파동을 맞아 다시 손을 놓는다. 이때 동생 장씨가 물려받아 성공가도를 달린다. 장씨는 팔달시장에서 80년대초 자갈치 횟집을 경영했다. 2년 정도 있다가 내당동으로 건너왔다. 비록 비브리오 정국이었지만 장씨는 무침회가 분명 다시 붐을 일으킬 걸 확신하고 계속 버텼다. 장씨는 84년쯤 지금 자리로 이전한다.

무침회는 고도의 조리술을 필요로 하는 건 아니다. 관건은 초장 맛. 그건 어느 집이나 비슷한 것 같지만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불로동과 달리 소라, 고둥, 오징어 등이 주종을 이룬다. 채소는 채썬 무와 미나리 정도만 넣는다. 80년대 중반 왕복 2차로 성주로 나가는 국도변이었던 그 길에는 호남을 비롯해 창원, 대궁, 똘똘이 등 5~6개 업소밖에 없었다. 현재 13개 업소(호남·구 호남·똘똘이·대궁·마산·삼영·충무·반고개·푸른 무침회·의성·늘푸른·동아·청송)가 밀집해 있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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