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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 그리고 칠레의 와인

독립전쟁, 그리고 칠레의 와인 와인정보 2008.10.15 14:51

독립전쟁, 그리고 칠레의 와인



 


칠레는 남미 대륙의 한 나라이다. 태평양을 끼고 남북이 3,000여 마일이나 길게 뻗어있고 안데스 산맥을
등지고 바다로 향한 동서의 폭은 겨우 100여 마일에 불과할 정도로 좁다.
그리고 국토의 곳곳은 아주 특이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북쪽은 아타카마 사막(Atacama desert)이 가로막고
동쪽은 해발 20,000피트의 눈 덮인 안데스 산맥이, 서쪽으로는 태평양 그리고 남쪽으로는 빙하의 안타르티카(Antartica)가 자리잡고 있다.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포도의 산지는 이 나라 중심부에 있는 센트럴밸리(Central Valley)를 위시해
아콘카구아 밸리(Aconca-qua Valley), 카사블랑카 밸리(Casa-blanca Valley), 이타타 밸리 (Itata Valley)
그리고 비오비오 밸리(Bio-Bio Valley)에 분포하고 있다.
연중 작열하는태양,안데스산맥의 눈 녹은 풍부한 지하수, 홈볼트 조류에 의한 밤과 낮의 기온차, 입지적 여건에 의한 포도 전염병의 예방, 저렴한 생산비용, 신기술에 대한 과감한 투자 등이 칠레를 오늘날 세계 유수의 와인산국으로 이끌어 놓았다. 무엇보다 질에 비해 가격이 상대적으로 낮아 국제 유통시장에서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정복자, 선교사, 그리고 프랑스에서 온 와인 메이커

몇몇 나라의 사례에서 보듯 칠레 와인의 역사도 스페인의 정복자(Conquistadores)와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16세기 중반, 헤르난 코르테스(Hernan Cortes)가 이 땅에 처음으로 유럽의 포도 종(vitis vinefera)을 들여온 것으로 돼 있다. 아마도 멕시코를 거쳐 페루를 통해 유입된 것으로 본다. 현재 이 땅의 토종으로 알려진 파이스(Pais)가 그 원형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는 아르헨티나에서는 크리올라(Criolla), 캘리포니아에서는 미션 종(Mission grape)d으로 불리우고 있다. 그러나 칠레의 포도 산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나라는 스페인이 아니라 바로 프랑스였다. 19세기 중엽부터 부유한 토지 소유자들은 프랑스 보르도 풍의 저택을 짓고 부를 과시하면서 까베르네 소비뇽 등 보르도 원산지의 포도종을 들여오고 이곳 와인 메이커들을 초청하였다. 사실 , 프랑스의 와인 메이커들이 칠레로 들어갈 무렵에는 유럽 전역이 필록세라로 포도밭이 황폐화되어 일자리마저 잃고 있었다. 때문에 필록세라의 피해를 입지 않은 칠레를 찾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오늘날 칠레 와인의
기본적 특성이 왜 프랑스의 보르도를 닮았는가 하는 의문에 해답을 준다고 하겠다.

 

독립전쟁과 와인

칠레 와인의 역사는 스페인 정복자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는 과정과 서로 깊이 연관을 갖는다.  1810년, 칠레의 독립을 가져다 준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산디아고(Sandiago)에서 7인의 시민의회가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스페인과 맞섰다. 물론 스페인이 이를 수용할 리 없었고 결국 내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칠레의 애국독립군대는 죤 맥케나(John Mackenna)와 베르나르도 오히길스 (Bernardo O'Higgins)의 지휘하에 놓였다. 맥케나 장군은 아일랜드 계열의 직업군인이었고 스페인 군복무를 한 이력도 갖고 있었다. 오히긴스 역시 아일랜드 핏줄이고 이웃 페루 왕국의 장교이던 암브로시오 오히긴스(Ambrosio O'Higgins)의 아들이기도 했다. 1814년 오히긴스는 란카구아(Ranca-qua) 전투에서 스페인 군에게 크게 패하게 되었고 그의 120명 부하들은 와인 저장고로 피신해 위난을 면하게 됐다. 오늘날 산타리타(VinaSanta Rita)의 와이너리가 그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오히긴스는 이 와이너리에서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성공적인 탈출을 하게 되고 여기에서 또 다른 애국지사이던 호세 데 산마르틴(Jose de San Martin)과 합세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다시 눈덮인 안데스를 넘어와 칠레로 진격, 스페인의 마지막 점령군을 축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1820년 칠레는 독립을 쟁취했다.
이처럼 칠레 와인은 건국초기의 이야기들과 여러 면에서 맞물려있다. 120명이 피신했던 역사적 와인 저장고를 내세워 '120'의 숫자를 브랜드화해 마케팅에 활용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일로 칠레의 와인 가문들은 독립전쟁과 여러 인연을 갖고 있다. 특히 이나라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두 가문이 독립전쟁의 영웅인 맥케나 장군의 직계 후예들이라는 점이다. 운두라가(Undurra-ga)와 에이씨귀레(Eyzaguirre)가 바로 이들 가문이다.

 

칠레 와인의 새로운 진전

칠레 와인의 역사에는 두 차례 큰 시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첫 번째가 스페인 정복기간에 있었던 일이다.식민지 칠레가 포도주 산업을 융성하게 발전시켜 나가자 종주국 스페인이 위기를 느끼게 되고 스페인은 칠레의 포도주 산업을 막기 위해 여러 차례 왕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고서도 별반 효과가 없자 포도주의 수출을 막고, 포도밭을 뭉개버리기도 했다.
두 번째 재난은 70년대 살바도르 아옌다(Salvador Allende, 1970-1973) 대통령의 사회주의 정권이 급진적인 토지개혁의 미명 아래 수천 헥타르의 포도밭을 뭉개버린데에서 비롯되었다.

  이 정책의 영향으로 70년대 중반에서 80년 경까지 포도주 산업은 불안 속에서 명맥만 유지할 정도였다.
70년대말, 10만9천 헥타르의 포도 경작지 중 거의 절반이 사라지기도 했다. 다시 부활한 칠레 포도주 산업은 이제 엄청난 탄력을 받고 발전하고 있다. 여태까지 칠레 정부는 다른 신세계와 마찬가지로 와인산업에 대한 규제 없이 창이적 양조를 기대해 왔다. 그러나 종전의 입장을 바꾸고 칠레 정부도 1995년 새로이 포도주 산업에 대한 규제적 법령을 마련했다. 한예로써 레이블에 포도 경작지가 표기되면 이 경우에는 적어도 75%의 포도가 이 곳에서 나와야한다는 것이다. 이제 칠레 와인은 넘치는 에너지로 우리 시장에 줄기차게 다가서고 있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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