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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의 유랑에세이 알타이를 찾아서 - 몽골(2)

이윤기의 유랑에세이 알타이를 찾아서 - 몽골(2) 국내외 여행정보 2008. 10. 14. 15:53

이윤기의 유랑에세이 알타이를 찾아서 - 몽골(2)



몽골어에 녹아있는 우리말
 
몽골 땅을 떠돌다 보면, 혹은 몽골인들을 만나거나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자주 있다. 그들의 행동거지나 하는 말이 우리와 너무 흡사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낯선 땅 몽골에 와 있다는 것을 깜박 잊어버리게 될 정도다. 몽골인들의 천막집 게르 안에서 휘파람을 불어서는 안 된다. 문지방을 밟아서도 안 된다. 나에게 한문을 가르쳐 준 나의 할머니는 막둥이 손자인 나를 가장 아껴 주었다. 하지만 휘파람 불기를 좋아하던 내가 문지방을 밟고 휘파람을 불었을 때는 용서하는 법이 없었다.

연하의 몽골인들에게 술잔을 권하면 그들은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두 손으로 받아, 술 한 방울을 손가락에 찍어 ‘고수레’를 한 다음에야 마신다. 예의 바른 젊은이라면 자세를 옆으로 약간 틀기까지 한다. 술이 한 순배 갑신하게 돌면 함께 노래하는 것도 비슷하다.

한 주일 전, 몽골인 세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몽골에서 길라잡이 노릇을 해준 신혼부부와 중년의 사업가였다. 함께 마시고, ‘아버지는 말치기’를 다섯 번쯤 함께 불렀다. 몽골인들은 산솜다리(에델바이스)를 ‘차간 오르’라고 부른다. ‘흰 산’이라는 뜻이란다. 나의 상상력은 근거 없이 튄다. ‘차간’은 우리말 ‘차갑다’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차가운 눈은 흰색이니까, ‘차갑다’와 ‘희다’를 동일시하는 것은 아닐까? ‘오르’는 산을 뜻하는 제주도 말 ‘오름’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몽골인들은 설날을 ‘차간 사르’라고 부른다. ‘흰날’(白日)이라는 뜻이란다. ‘설날’은 ‘낯선 날’이라는 해석이 있다. 아무 것도 기록되지 않은 ‘백지 같이 흰 날’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흰 날’과 무관할 수 없다. ‘모르’, ‘조금’, ‘바룬’같은 몽골말은 통역 없이도 ‘말’, ‘조금’, ‘바른’으로 새겨들을 수 있다. ‘몽골풍(風)’, ‘고려양(高麗樣)’이라는 개념으로 이것을 설명할 수도 있기는 하겠다.

고려와 몽골(원나라)은 고려 원종 때부터 약 100년 동안 꽤 우호적으로 교류했다. 당시 고려의 중상류층은 몽골풍습을 즐겨 받아들였는데 이것이 바로 몽골풍이다. 여자가 족두리 쓰고, 옷고름에 장도(粧刀) 매달고, 신부가 연지 찍고, 남자가 마고자 입는 것은 이 때 들어온 풍속이다. 왕의 진지를 ‘수라’라고 하는 것도, ‘장사치’, ‘시정아치’처럼 말끝에 ‘치’를 붙임으로써 대상을 비하하는 것도 몽골풍이라고 한다.

고려에서 몽골로 들어간 풍습도 있다. 몽골에서 쓰이는 ‘고려 만두’, ‘고려 떡’, 검은 빛이 도는, 푸른 기물(器物)에 붙어 있는 ‘고려 아청(鴉靑)’이라는 이름은 고려 풍습의 잔재, 즉 ‘고려양’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몽골에서 내가 체험한 ‘이상한 낯익음’은 몽골풍과 고려양, 이 두 개념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본의 역사 소설가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는 ‘국사(國師)’로 불리기까지 하던 인물이다. 그의 장편소설 ‘몽골의 초원’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검은’은 몽골어로 ‘카르(kar)’다. 몽골 고어와 같은 어족에 속하는 터키어에서도 ‘카라(kara)’는 ‘흑(黑)’을 뜻한다. 일본어 ‘쿠로(黑)’도 우연이 아닐 것이라고 나는 학생시절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도 ‘쿠로’라고 하는, 일본어로서는 너무 강렬한 발음을 몇 번이고 반복하면, 이윽고 콧구멍에 유라시아 냄새가 퍼져간다.―

대학시절 몽골어를 전공한 작가의 말 치고는 엄살이 심하다. 몽골어 ‘카르(하르)’가 터키어 ‘카라’, 일본어 ‘쿠로’와 같은 말이라는 것을 몽골어를 전공한 그가 몰랐을 리 없다. ‘가라말’은 ‘검은 말(黑馬)’을 지칭하는, 지금도 제주도에서 쓰이는, 좁게는 몽골말, 넓게는 알타이 말이다. ‘콧구멍에 유라시아 냄새가 퍼져나간다’는 대목도 조금 이상하다. ‘유라시아’는 지리개념 아닌가. 한국과 일본이 여기에 속하기는 한다. 하지만 한 마디 말이 불러일으키고 퍼져나가게 하는 것은 지리개념인 ‘유라시아’ 냄새가 아니라 언어개념인 ‘알타이’ 냄새여야 할 것 같다. 알타이말을 쓰는 몽골의 민담을 읽으면 정말 알타이 냄새가 콧구멍 속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다.

‘몽골 민간 신화’(체렌소드놈 지음, 이평래 역, 대원사)에 따르면, 태초에 이 세상에는 공기와 물, 이 두 가지밖에 없었다. 오치르바니 보르항(금강불)은 차강 슈헤르트(흰 일산을 가진 이)에게, 물밑으로 들어가 큰 거북이를 끌고 올라와 뒤집어 놓으라고 한다. 슈헤르트가 그렇게 하자 오치르바니 보르항은 거북이의 배 위에 앉는다. 그가 앉아 있을 동안 슈헤르트가 흙을 집어와 올려놓자 거북이의 배 위에 대지가 생겨난다. 대지가 무엇인가? 가장 튼튼한 바탕으로 불리는 반석(盤石)조차 대지 위에 놓인다. 신화의 진술은 진지한 가운데 우스꽝스럽다. 하지만 민담의 진술은 우스꽝스러운 가운데 진지하다.

몽골 민담 한 토막을 읽어 보자. ‘재미있는 몽골 민담’(이정희 역, 백산자료원)에 나오는 이야기를 줄였다. 내용은 이렇다. 수거북이가 산에서 원숭이 한 마리를 사귀어 함께 놀다가 집으로 돌아온다. 암거북이는 지아비 거북이가, 필시 암원숭이와 재미를 보고 왔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이런 말을 한다.

“내가 오늘 몸이 아파요.”

“왜? 어떻게 아파? 무얼 먹으면 나을까?”

“암원숭이의 염통을 먹으면 나을 거예요.”

수거북이는 암원숭이를 찾아가, 그 동안 친구가 된 만큼 저녁식사에 초대하고 싶다고 말한다. 암원숭이가, 가고 싶기는 하지만 헤엄을 칠 줄 모른다고 하자, 거북이는 자기가 헤엄을 잘 치는 만큼 등에 올라타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이윽고 거북이 집에 이르자 수거북이는 안면을 싹 바꾸고 실토한다.

“우리 집사람이 아픈데 너의 염통을 먹어야 낫는다고 하니 네 염통을 꺼내어야겠다.”

그러자 암원숭이가 정색을 하고 응수한다.

“어머, 그럼 진작 말하지 그랬니. 우리 원숭이들은 염통을 언제나 나무 꼭대기에 걸어둔단다. 빨리 돌아가서 내 염통을 가지고 오자.”

그래서 둘은 다시 뭍으로 돌아온다. 원숭이는 재빨리 나무 꼭대기로 톡 튀어 올라가, 똥 덩어리를 하나 거북이에게 던지면서 소리친다.

“네 마누라 보고 이 염통이나 먹으라고 해”

나는 암거북이가, 암원숭이의 염통을 먹으면 나을 거예요, 하는 대목에서 이야기의 결말을 짐작했다. 고전소설 ‘별주부전’을 읽고, 판소리 ‘별주부전’을 읽은 보람일 것이다. 옛이야기의 힘이다. 옛이야기는, 우리와 알타이 사이의, 오래 끊어져 있던 오솔길을 번번이, 한 순간에 이어놓고 만다.
 

영웅 칭기즈칸 메시아로 돌아오다
 
몽골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즐기는 농담이 하나 있다. 몽골의 수도 이름은, 다녀오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울란바토르’, 다녀온 사람들에게는 ‘울란바타르’라는 농담이 그것이다.

몽골인들 가운데 저희 나라 수도를 ‘울란바토르’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정확하게 ‘울란바타르(Ulaan Baatar)’다. ‘울란바타르’는 ‘붉은 전사(戰士)’라는 뜻이란다. 울란바타르의 정부 종합청사 앞에는, 몽골에 간 관광객이라면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거쳐 가는 유명한 광장이 있다. ‘수흐 바타르’ 광장이다. ‘도끼 전사’의 광장이라는 뜻이다. 이 광장에 기마 석상으로 서 있는 수흐 바타르는 1923년 겨우 서른살에 세상을 떠났는데도 몽골에서는 ‘혁명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1922년에 몽골 인민군 총사령관이 되어 인민정부를 수립하고 스스로 국방장관 자리에 올랐다가 꽃다운 서른살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불세출의 영웅이다. 이 영웅을 몽골인들은 반드시 ‘수흐 바타르’라고 부른다. 우리가 몽골의 수도를 ‘울란바토르’라고 부르는 것은 영어 표기 ‘울란바토르(Ulan Bator)’에 버릇 들어 있기 때문이다.

울란바타르는 ‘붉은전사’의미

참 이상한 일도 다 있다. 몽골에 대한 나의 간접 체험은 미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나는 미국이라는 나라, 영어라는 언어를 통해 몽골과 칭기즈칸을 여러 차례 간접 체험했다. 어린 시절에 테무진(칭기즈칸) 이야기를 읽었다.

테무진이 부족을 통일하고 ‘칭기즈칸’ 자리에 오르는 시점까지만 정리한 이야기였다. 청소년 시절에는 영어로 된 ‘칭기즈칸’을 읽었다. 테무진은 칭기즈칸 자리에 오르고부터 7년 동안이나 유럽을 휩쓸었는데도 그 책에는 그 이야기가 실려 있지 않았다. 칭기즈칸의 모습을 이미지로 처음 본 것은 미국 영화 ‘칭기즈칸’에서였다.

1956년 미국에서 제작된 ‘정복자(The conqueror)’였다. 90년대 초 폐암으로 사망한, 미국 카우보이의 상징 같은 배우 존 웨인이 테무진을, ‘삼손과 데릴라’에서 데릴라 역을 맡았을 정도로 요염한 ‘섹시 스타’ 스잔 헤이워드가 타타르 공주 보르테를 연기한 영화였다. 전형적인 미국 ‘수컷’ 존 웨인의 테무진 연기는 어린 눈에도 영 안 어울렸다. 이 영화 역시, 테무진이 칭기즈칸의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이야기만 다룰 뿐 칭기즈칸의 유럽 정복 이야기는 다루고 있지 않다.

1992년 미국의 동부지역을 여행했다. 워싱턴DC에 있는 스미스소니언 자연사박물관에서는 거대한 공룡의 화석 앞에 아들딸을 세우고 여러 장의 사진을 찍기도 했다. 복원된 공룡 화석 앞에서, 미국은 참 굉장한 나라로구나, 이렇게만 여겼을 뿐, 그 화석의 고향이 어디인지 의심해보지 않았으니 한심하다. 화석의 고향은 몽골이었다. 1924년 미국은 신생국 몽골을 꼬드겨 컨테이너 20개 분량의 공룡 화석을 헐값에 사들여갔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2002년 7월 몽골의 유서 깊은 ‘울란바타르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아침에는 조용했는데, 저녁에는 분위기가 그렇게 어수선할 수 없었다. 색안경 낀 검은 양복차림의 젊은 미국인들이 들락거리고 있어서 까닭을 물어보았다. 영화 ‘칭기즈칸’을 새로 찍기 위해 미국에서 온, 멋대가리 없는 배우 스티븐 시걸이 그 호텔에 들었다고 했다. 뒷날 그 영화 제작이 취소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나보다 더 반긴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1991년 몽골이 러시아와 결별하고 사회주의를 포기한다는 소식도 나는 미국에서 들었다. 사회주의 몽골에서 민족 영웅 칭기즈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은 체제에 대한 도전이나 다름 없는 금기였다. 상대적 강세를 보이기 마련인 민족 영웅 이미지가 상대적 열세일 수 있는 외래 영웅인 레닌 이미지를 약화시킬 터이기 때문이었다.

사회주의 몽골에서 칭기즈칸 정신의 부활을 암암리에 역설했다가 행방불명이 된 몽골인이 여럿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사회주의가 떠난 나라 몽골에서 신화와 중세 종교가 부활하고 칭기즈칸 이미지가 화산처럼 용출할 것임을 예감했다. 몽골인들에게 사회주의 신화를 대신할 메시아가 반드시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1995년 미국의 워싱턴포스트는 서기 1000년부터 당시인 1995년까지 세계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기념비적 인물을 선정한 적이 있다. 나폴레옹이 아니었다. 히틀러도 아니었다. 바로 칭기즈칸이었다. 유럽 문화와 역사가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유럽의 악몽 칭기즈칸이었다. 언젠가는 황인종이 또 한차례 백인종을 짓밟을 것이라는 유럽인들의 불길한 예감 ‘황화(黃禍·yellow peril)론’의 진원지였다.

‘유목민 이야기’(김종래 지음·자우출판)에 따르면, 나폴레옹이 정복한 땅의 넓이는 115만(한반도는 약 23만) ㎢, 히틀러가 지배한 면적은, 나폴레옹에 견주어 2배 가까이 되는 219만㎢다. 기원전 4세기에 이 두 사람이 차지했던 땅의 면적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땅을 차지한 정복자가 있으니 그가 바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다.

칭기즈칸이 정복한 땅의 넓이는 얼마나 될까? 나폴레옹과 히틀러와 알렉산드로스가 차지했던 땅을 모두 합친 것보다 훨씬 넓은 777만㎢다. 하지만 정복한 땅의 넓이는 정복자의 크기가 아니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한 민족의 무의식에서 그 민족의 영웅이 차지하는 자리다.

칭기즈칸 유럽등 777만㎢ 정복!

중국 여행이나 터키 여행은 긴장의 연속이다. 딱정벌레 같이 극성스럽게 따라붙는 장사치들과 터무니없는 바가지 요금 때문이다. 중국이나 터키가 그렇듯이 몽골 역시 잘 사는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몽골 여행에 그런 긴장은 없다. 몽골에도 장사치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강매하려 들지 않는다. 어찌나 의연한지 약간 무례해 보일 정도다. 바가지 씌우는 일은 전무하다고 보아도 좋다. 2002년 6월, 숙박시설이 있을 리 없는 초원 지대에서, 우리 일행 다섯 사람은 유목민의 게르를 빌려 하룻밤을 지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날 저녁과 다음날 아침까지 그 게르에서 먹었다. 사례비는 일금 5000투그릭, 우리 돈 5000원이다. 1만원을 주자고 내가 제안했다. 몽골인 안내자가 내게 말했다.

“그건 몽골인에 대한, 칭기즈칸에 대한 실례죠.”

〈잘못 쓴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바로잡는다. 9월30일자 이 지면에, 설날을 일컫는 몽골말 ‘차간 사르’는 ‘흰날(白日)’이라는 뜻이란다, 이렇게 잘못 썼다. ‘흰날(白日)’이 아니라 ‘흰달(白月)’이라고 이영산(출판사 꿈엔들 대표)씨가 지적해 주었다.
 

초원, 걸으면 길이 된다
 
나는 소설가다. 이야기를 짓는 사람이다. 업(業)을 짓는 사람이다. 업 짓기를 직업으로 가진 사람, 그것이 바로 소설가다. 나는 슬픈 이야기를 지음으로써 슬픈 업을 짓는 사람인 것 같다. 나는 노래 부르기를 즐긴다. 그러나 노래 부르기는 나의 직업이 아니다. 다만 즐길 뿐이다. 나는 어느 곳에서든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한다. 심지어 초상집에서도 슬픈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초상집에서의 노래 부르기는 우리의 통념이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대가수 조영남 앞에서도 겁 없이 노래를 부른다. 조영남으로부터 잘 부른다는 소리를 들은 적은 없다. 다만 나의 노래를 불렀을 뿐이다. 나는 큰 소리꾼 장사익 앞에서도 겁 없이 노래를 부른다. 장사익의 노래가 아닌, 나의 노래를 부른다. 장사익으로부터는 잘 부른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심지어, 언제 날 잡아 녹음 한번 하자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내가 대가수와 큰 소리꾼 앞에서 부르는 노래는 대개 슬픈 노래다. 내가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는 ‘세 동무’, ‘봄날은 간다’ 같은 슬픈 노래들이다. 소월(素月)의 시에다 곡을 붙인 ‘옛 이야기’는 내가 가장 즐겨 부르는, 슬픈 노래 중의 하나다.


고요하고 어두운 밤이 오며는

어스레한 등불에 밤이 되며는

외로움에 아픔에 다만 혼자서

하염없는 눈물에 저는 웁니다


제 한 몸도 예전에 눈물 모르고

조그마한 세상을 보냈습니다

그 때는 지난날의 옛이야기도

아무 설움 모르고 외웠습니다

 

그런데 우리 님이 가신 뒤에는

아주 저를 버리고 가신 뒤에는

전날에 제게 있던 모든 것들이

가지가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한때에 외워 두었던

옛이야기 뿐만은 남았습니다

나날이 짙어가는 옛이야기는

부질없이 제 몸을 울려줍니다

 

나는 2절의 노랫말을 가장 좋아한다. ‘눈물 모르고’ 살아낸 세상은 ‘조그만 세상’이었단다. 그렇다면 눈물 알고 사는 세상, 슬픔 알고 사는 세상은 큰 세상이겠다. 나는 4절의 노랫말도 좋아한다. ‘우리 님’ 가신 뒤로, ‘제게 있던 모든 것들이 없어지고 말았’단다. 그런데 ‘그 한때에 외워 두었던 옛이야기 뿐만은 남’아 ‘나날이 짙어’ 간단다. 그렇게 짙어가는 옛이야기들이 ‘제 몸을 울려’ 준단다. 옛이야기가 삶의 슬픈 동인(動因)이 되고 있단다.

슬픔없이 아름다운 노래는 빚어지지 않는다. 지극한 슬픔을 노래할 수 있도록, 소리꾼이 되려는 딸을 장님으로 만들어 버리는 저 ‘서편제’의 실패한 판소리꾼 유동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와 고은의 소설 ‘어린 나그네’에 나오는, 지극한 슬픔을 절창의 씨앗으로 삼는다는 이 모티프, 벌써 아득한 옛날의 힌두 설화에 나오는 슬픈 풍경화이기도 하다.

슬픈 노래를 잘 부르기 위해서는 심안(心眼)을 얻어야 한다. 심안을 얻자면 육안(肉眼)을 잃어야 하는가? 고대 그리스의 절창(絶唱) 호메로스도 육안을 잃은 뒤에야 심안을 얻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우스 이야기’에 등장하는 음유시인 데모도코스도 앞을 보지 못한다.

알타이 말을 쓰는 몽골인들에게 처음으로 슬픈 이야기, 슬픈 노래를 들려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이야기’의 탄생 설화가 참 놀랍다.

아득한 옛날 몽골에 몹쓸 전염병이 창궐했다. 많은 사람들이 겁에 질려, 목숨을 부지하고자, 병든 식구들을 버리고 살던 땅을 떠났다. 이렇게 버려진 병자 가운데 ‘타르바’라는 열 다섯살배기 소년이 있었다. 병세가 위중했던 타르바의 영혼은 자신이 죽은 것으로 여기고 육신을 떠났다.

그런데 저승의 염라대왕은 아직 저승에 올 때가 되지 않았는데 어째서 육신을 떠나왔느냐고 물었다. 타르바의 영혼은, 자신이 죽은 줄 알고 육신을 떠나왔노라고 대답했다. 염라대왕은, 저승을 떠나 이승의 육신으로 되돌아가되, 저승에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하나 골라서 가지고 가라고 했다. 재물, 행운, 기쁨, 만족, 슬픔, 걱정, 재미, 웃음, 놀이, 이야기, 춤 등등, 이승에는 없는 것들이 많이 있었다. 타르바의 영혼은 ‘이야기’를 가지고 돌아가기로 했다. 염라대왕이 기꺼이 그것을 허락했다.

타르바의 영혼이 ‘이야기’를 가지고 이승으로 돌아와, 잠시 버리고 떠났던 육신에 다시 깃들고자 했다./그런데 육신을 보니, 눈알이 없었다. 타르바가 저승 가느라고 떠나 있을 동안 까마귀가 육신의 눈알을 뽑아 먹어 버린 것이다. 타르바의 영혼은 망설였다. 제 육신에 다시 깃들자면 앞을 보지 못하는 채 여생을 살아야 한다./그렇다고 해서 염라대왕의 섭리를 거절할 수도 없는 일이다.

타르바는 결국 그 육신에 다시 깃들었다. 이렇게 육신에 다시 깃든 타르바는 예전의 타르바가 아니었다. ‘이야기’는 그가 육안 대신에 얻은 심안이었다./이 심안 덕분에 그는 세상의 이치를 두루 알 수 있었고, 이로써 장차 일어날 일을 미리 헤아릴 수도 있었다. 몽골인들이 이야기를 잘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타르바 덕분이란다. 몽골에는 이야기가 흔하다. 세계의 많은 학자는 오늘날에도 몽골의 소수민족을 찾아다니며 옛이야기를 모은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몽골인들이 이야기를 잘 하고 좋아하는 것은 타르바 덕분이 아닌 것 같다. 오랜 세월, 문자와 인연이 적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몽골인들에게, ‘문자와의 인연 없음’은 ‘심안을 얻기 위해 잃어야 하는 육안’ 같은 것인가?

몽골의 초원에는 길이 없다. 다르게 말하면 길 아닌 데가 없다. 무수한 길 가운데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길이 마침내 몽골의 길이 된다. 몽골 ‘이야기’의 운명도 그런 것 같다. 무수한 이야기 중에서 가장 많이, 사람들 입에 오르는 것만이 몽골 이야기로 남는 것 같다. 나는 신화나 전설을 그렇게 이해한다.
 

女根 산세에 男根石 성(性)스러운 풍경, 성(聖)스러운 풍속.
 

따르릉. 그 소리에 잠을 깼다. ‘전화가 왔구나, 모닝콜이구나’싶었다. 수화기를 들었다. 말이 아주 빨랐다. 퉁명스럽기가 언 코 쥐어박는 것 같았다.

“kebarakadeye.”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했다. 엄살이 아니다. 호들갑도 아니다.

나는 여행을 자주, 그리고 많이 다닌다. 여행지에서 잠자리에 들 때는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술을 마신다. 그래서 아침까지 취기가 남아 있는 것이 보통이다. 잠에서 깨어나면 나는 묻는다.

여기는 어디인가? 미국인가, 캐나다인가… 그리스인가, 이탈리아인가… 중국인가, 몽골인가… 내가 듣고 있는 이 말은 어느 나라 말인가? 그런데 내가 아침 잠에서 깨어난 곳은 우리나라다. 뿐만 아니다. 나의 고향 경상북도다. 그런데도 나는 “뭐라고요” 하고 되물었다.

“깨바라 카데예.”

그제서야 알아들을 수 있었다. ‘깨우라고 하던데요’이런 뜻이다. 누군가가 호텔 주인, 혹은 호텔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아침잠이 많은 나를 깨워주라고 했던 모양이다. 나는 낯선 것의 낯을 익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나는 낯익은 것을 낯설게 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나는 어느 나라를 여행하면, 이 나라는 우리나라와 얼마나 다른가, 이런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이 나라는 우리나라와 얼마나 같은가, 하고 묻기를 좋아한다.

그러다 내 고향 사투리 앞에서 이런 망신을 당한 것이다. 한반도의 꼬리에 해당하는 호미곶(虎尾岬)의 한 ‘파크’에서 당한 망신이다. 호미곶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설화 주인공 ‘연오랑과 세오녀’의 동상이 조성되어 있는 곳, 이육사의 시비(詩碑)가 서 있는 곳이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아차 하는 순간에 사람을 설화의 세계로, 시의 세계로 편입시켜 버리는 곳이다. 나는 그런 세계로 ‘자아서’발 들여놓기를 좋아한다. 나는 그런 세계에 편입되는 것을 좋아한다.

10월 11일, 경상북도 포항시 칠포리의 ‘칠포리 암각화’를 보러 가는 날이었다. 나는 호미곶에서 칠포리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버스를 탄 채 주위의 산세를 둘러보다가, ‘이제 거의 다 왔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산세가 심상치 않았다. 반듯하게 드러누운 여성의 사타구니 같았다. 경주 근방에 있는 여근곡(女根谷)보다 훨씬 더 그랬다. 산 이름이 ‘곤륜산’이라고 했다. ‘이름 한번 거창하구나’ 싶었다. ‘곤륜산(쿨론산)’이라면 중국 신화에 나오는, 마시면 영생불사하는 물이 흐르는 곳, 중국의 태모여신(太母女神)이라고 할 수 있는 서왕모(西王母)가 살고 있다는 산 아닌가?

나의 짐작은 빗나가지 않았다. 거의 다 온 것이 아니었다. 내가 쳐다보고 ‘거진 다 왔겠구나’ 하고 생각했던 산이 바로 곤륜산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한 300m 올라가니 암각화가 있었다. 길이 약 3m, 높이 약 2m 되는 바위에 새겨진 도형. 그 유명한 칠포리 암각화였다. 암각화를 설명해준 송재학 시인의 말을 바로 옮긴다.

“……여기의 이 그림이 여성신적인 지모신상(地母神像)입니다. 여기 이 계곡이 여성의 어느 부분과 유사하다고 봐야겠죠. 여기서 늘 물이 흘렀는데, 물이라는 것은 생명의 재생 및 탄생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한 부분에다 그림을 함께 새김으로써 여성 신에 대한 믿음을 드높이지 않았겠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암각화가 숨겨져 있는 곤륜산의 형태가 여성의 신체를 닮은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약 3000년 전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단다. 몽골 북부 호이트 쳉헤린 동굴 벽화를 보고 온 직후였다. 호이트 쳉헤린 동굴 벽화는 약 30만~50만년 전에 조성된 것이라고 했다. 나는 송재학 시인에게 “조성 연대가 그것밖에 안 되어요? 좀 더 올려 잡을 수 없나요”하고 물었다. 송시인은 웃으면서 “올려 잡아서 뭐 합니꺼”하고 반문했다.

나는 암각화 그 자체에 대해서는 쓸 것이 없다. 내가 잘 아는 분야도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는 쓸 수 있다. 곤륜산은 지금 보아도 ‘야하게’생긴 산이다. 암벽화 조성의 추정 연도가 옳다면 3000년 전에도 곤륜산은 야하게 생긴 산이었을 것 같다. 그 야하게 생긴 산, 성(性)스럽게 생긴 산 기슭의 암벽화는 고대인들의 ‘성소(聖所)’였던 것 같다.

암각화가 새겨진 자리는 고대인들이 풍요와 다산을 빌던 곳이었던 것 같다. 나는 성(性)스러운 풍경이 성(聖)스러운 풍속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성(聖)스러운 풍경을 고대 종교라고 바꿔 부르기를 좋아한다. 남근석(男根石) 앞에서 아들 낳기를 비는 여인을 상상해 보라. 힌두교에서 링감(男根)과 요니(女根)는 가장 성스러운 것들 중의 하나다. 칠포리 암각화는 노천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우리에게 3000년전 문화 유산이 어디 흔한가? 방치되어서는 안 될 것 같다.

2002년 7월 몽골 제국의 첫 수도가 있던 하라호룸에 다녀왔다. 하라호룸으로 들어가는데 산세가 심상치 않았다. 벌거벗고 누워 있는 여인의 사타구니 같았다. ‘산세가 저러면 반드시 저 산세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을 거라… 몽골제국이 이런 산 밑의 벌판을 첫 수도로 삼은 것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 이런 생각이 들어 몽골인 친구에게 물어 보았다. 과연 ‘이야기’가 있었다. 이야기는 나의 종교이기도 하다.

하라호룸의 옛 황궁 만안궁(萬安宮),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황궁 터에는 16세기에 세워진 라마 불교 사원 ‘에르덴 조’가 있다. 이 사원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옛 하라호룸 성벽의 석재로 세웠다는 100여개의 스투파(불탑)다.

100여개를 일일이 셀 필요는 없다. 108개다. 언필칭 백팔번뇌다. 108은 몽골인들이 좋아하는 수이기도 하다. 라마 사원 앞에서 앞산을 바라보는데 가슴이 뭉클해지는 기분이었다. 민둥산 모양이 영락없이, 반듯이 누워 있는 여인의 샅이었다. 몽골인 친구가 히죽히죽 웃으면서 설명했다.

“16세기 적 일이라던가요? 스님들이라면 도를 닦고 공부를 해야 하는데 이 에르덴 조의 젊은 라마교 스님들은 도통 마음잡고 공부할 생각을 하지 않더래요. 저 산세 좀 보세요. 가슴 두근거리죠? 저도 볼 때마나 가슴이 두근거려요. 스님들 중에 중국 풍수에 밝은 분이 있었나 봐요.

풍수에 밝은 분은 에르덴 조의 연세 많은 스님들에게 ‘저 산의 음기(陰氣)를 누르려면 강력한 양기(陽氣)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충고했나 봐요. 어떻게? ‘돌로써 굵은 남근(男根)을 깎아 저 산쪽으로 눕혀 놓으면 음기가 잡힌다’ 이렇게 대답했나 봐요. 실제로 저 산 밑에는 거대한 남근석이 누워 있어요. 남근석을 누인 뒤로는 스님들이 마음 잡고 도도 잘 닦더라지요. 아무래도 누가 만든 이야기 같아요. 그래서 저는 안 믿어요.”
 

제비 대신 황금매가 물어다준 박씨
 
나는 열 살 될 때까지 어머니보다는 할머니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잠도 할머니 방에서 잤다. 내가 일곱 남매 중 막내여서 그랬을 것이다. 할머니는 막내 손자를 돌보아줌으로써 홀어머니의 일손을 덜어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런데 할머니와 보낸 유년이 내게는 축복이었다. 할머니는 이야기꾼이었다.

할머니는 글에 밝았다. 그래서 할머니 거처하던 사랑방에는 마을 사람들이 자주 그리고 많이 모였다. 할머니는 글 모르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격식 따져가면서 써야 하는 편지를 대신 써주기도 했고, 옛 이야기 책을 송창(誦唱) 가락에 맞추어 읽어주기도 했다. 나는 턱을 괴고 엎드린 채 할머니의 이야기를 내 것으로 따 담았다.

할머니는 내게, ‘이야기’의 그릇이 될 한글과 천자문을 가르쳐준 분이기도 하다. 할머니는, “옛 이야기 너무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는데…”하면서도 내게 옛 이야기 들려주기를 좋아했다. ‘너도 장차 이런 사람이 되거라’ 이런 생각에서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던 것일까? 우리나라와 중국의 옛 영웅들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할머니 이야기를 중간에 자르고 들어가, “그 다음은 이렇게, 저렇게 되는 거 아니에요?” 이렇게 물음으로써, 말하자면 이야기 줄거리의 다음 마디를 미리 아는 척함으로써 할머니를 조금 놀라게 했던 것 같다.

가령 할머니가, “그런데 말이다, 어느 날 어머니 아버지가 아들에게 느닷없이 절을 하면서…” 이러면 내가, “할머니, 그 어머니 아버지는 아들의 친부모가 아니었던 거죠?” 이렇게 아는 척하는 식이었다. “하루는 제자를 불러…” 할머니가 이러면 나는, “이제 더 가르칠 게 없으니 산을 내려 가거라, 이랬죠?” 하는 식이었다.

할머니는 그러는 나를 퍽 신통하게 여겼다. 이렇게 쓴다고 해서, 내가 그 어리던 시절에 벌써 영웅담 전개 과정의 전형을 짐작하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다. 어린 내가 그렇게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그것도 상당히 정형화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뜻이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로 나는 어머니 품으로 돌아갔다. 어머니는 할머니 못지않게 책 읽기를 좋아했다. ‘이야기의 흐름에 깨어 있기’를 통해 ‘이야기 전개 방식 미리 짐작’하기는 이때부터 나의 쾌적한 취미 생활 중 하나였다.

그러던 아이가 그로부터 20여년 세월이 흐른 뒤 책 한권을 읽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어떤 지역, 어떤 문화권의 영웅이 되었든 이 세계의 영웅들 한살이 이야기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고 주장한 조지프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라는 책이다.

나는 세계 여러 나라의 영웅 신화, 전설, 민담을 30여년째 즐겨 읽고 있다. 나는 어느 나라 이야기가 되었든 약 3분의 2까지만 읽고는 가만히 책을 덮고 이야기라는 강(江)의 다음 흐름을 나 나름으로 유추해 본다. 다만 취미생활일 뿐, 정확하게 유추해내는 쾌거를 자주 올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깝게 유추해내는 일은 자주 있다. 특히, 알타이 어계(語系)에 속하는 나라의 신화나 민담을 읽을 때 자주 있다.

‘몽골 구비 설화’(주채혁 역주, 백산자료원)에 실린 ‘황금매 이야기’는, 이야기라는 것이 어떻게 흐르게 되어 있는지 잘 보여준다. 앞 대목은 이렇다.

옛날 하고도 한 옛날, 살기 좋던 땅에 큰 가뭄이 들었다. 그 땅에 살던 한 어머니는 두 아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다.

“황금매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으니 황금매를 찾아가거라.”

형과 아우는 길을 떠났다. 며칠을 걸었는데 갈림길이 나타났다. 형제는 큰 길과 작은 길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큰 길에는 ‘큰 부자가 되는 길’, 작은 길에는 ‘험난한 길’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다. 형은 큰 길을, 아우는 작은 길을 선택했다. 형은 오래지 않아 큰 부자가 되었다.

아우는 모진 고생 끝에 황금매를 찾아내었다. 큰 가뭄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말을 들은 황금매는 파란 구슬과 빨간 구슬을 주면서, 파란 구슬을 강에 던지면 강물이 다시 흐를 것이고, 빨간 구슬을 묻으면 땅이 다시 기름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우가 돌아서려는데, 황금매가 호리병박씨 한 알을 주면서, 어려운 일이 있거든 해뜰녘에 자기 이름을 부르라고 했다.

아우가 돌아 와서 보니, 형은 큰 부자가 되어, 가뭄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을 돌볼 생각은 않고 혼자 떵떵거리며 살고 있었다. 아우는, 파란 구슬은 메마른 강에 던지고, 빨간 구슬은 땅에 묻었다. 강물이 다시 흐르고 땅이 다시 옥토가 되었다.

부자가 된 형은 가정을 꾸려 호의호식을 일삼을 뿐, 홀어머니와 아우는 돌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우는 정성껏 어머니를 돌보면서 호리병박씨를 심고 정성스럽게 가꾸었다. 오래지 않아 박이 열렸다. 아우가 박을 가르자 황소 두 마리, 백마 한 마리, 30여마리의 산양이 나왔다. 박이 여러 개여서 아우는 큰 부자가 되었다.

형이 그 많던 재산을 탕진하고 알거지가 되는데는 그리 긴 세월이 필요하지 않았다. 알거지가 된 형은 아우를 찾아가, 부자가 된 연유를 물었다. 아우는 형에게, 황금매를 만나고, 호리병박씨 얻은 내력을 숨김없이 일러 주었다.

여기까지가 책에 씌어져 있는 내용이다. 나는 이쯤 읽으면 책을 덮는다. 여기서부터는 나도 쓸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흥부전’을 읽은 사람이면 누구든, 여기서부터는 혼자서 이야기를 끝맺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누구든 상상할 수 있는 흐름을 탄다.

형은 아우로부터 배운대로 황금매를 부른다. 황금매가 나타나 소원을 묻는다. 형은 파란 구슬도 빨간 구슬도 말고 다만 호리병박씨 하나만을 바란다고 말한다. 황금매는 호리병박씨를 토해준다. 형은 박씨를 심는다. 그러고는 물을 준다. 첫날만 물을 주었을 뿐이다. 호리병박은 근근이 자라 열매를 맺었다.

형이 박을 타자, 큰 뱀이 한 마리 나와 형을 목졸라 죽였다. 아우는 잘 먹고 잘 살았다… 알타이 구비 전승에는 별주부전 이야기, 흥부놀부 이야기도 있다.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는 몽골에서도, 만주에서도 들을 수 있다. 나에게, 알타이를 떠돌며 이야기를 듣는 일은 삶을 읽는 일이다. 옛 이야기를 좋아해서 가난을 면하지 못하지만 나는 오래 더 떠돌아야 한다. 삶이 무엇인지 아직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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