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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의 유랑에세이 알타이를 찾아서 - 몽골(1)

이윤기의 유랑에세이 알타이를 찾아서 - 몽골(1) 국내외 여행정보 2008. 10. 14. 15:51

이윤기의 유랑에세이 알타이를 찾아서 - 몽골
 
 


 
친근한 말·몸짓 원초적 낯익음
우리, 언제 어디에서 무엇으로 만났기에?

나는 어느 나라에 가든지 그 나라 도시 거리의 간판을 읽으려고 무척 애쓴다. 그래서, 안내하는 사람을 몹시 성가시게 한다. 비아냥도 자주 듣는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따라서 무상(無常)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의 언어들을 꼭 읽어야 성에 차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고소롬한 취미 생활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끝없는 초원, 황량한 사막, 풀 뜯는 가축 무리. ‘몽골’이라는 나라 이름과 함께 떠오르는 풍경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몽골’이라는 나라의 풍경이지 현대 도시인 수도의 풍경은 아니다. 브얀트 오하 공항을 벗어나면 곧 수도 울란바토르 시가지가 펼쳐진다. 수도로 들어가자면, 어느 나라에서든 볼 수 있는, 고층 건물과 첨단 전자기기 광고판의 숲을 지나야 한다.

2002년 여름, 공항에서 울란바토르로 들어가면서 가만히 보니 그 도시가 내 눈에 설지 않았다. 초행인데도 불구하고 도시는 내게 너무나 낯익은 도시였다. 이것은 그리스 도시가 아닌가? 어째서 그리스 도시 같아 보이는가? 몽골 말에 관한 정보가 거의 없는 사내에게 초행인 나라 도시 거리의 간판을 읽는 일은 도무지 가능하지 않다. 그런데 그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다. 몽골은 한문을 쓰는 나라도, 로마 문자를 쓰는 나라도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거리의 간판을 떠듬떠듬 읽고 있었다.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

나는 몽골을 위구르 문자를 쓰는 나라로만 알고 있었는데 1941년부터는 키릴 문자를 쓰고 있단다. 키릴 문자는 옛 소련에 속해 있던 국가들,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지에서 쓰이는 문자다. 초행인 내가 거리 간판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이 문자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문자는 9세기에 동방 정교회가 슬라브 족에게 파견한 그리스 인 형제가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사도 성 키릴루스와 메토디우스가 바로 이들이다.

이들이 슬라브 족 신도들을 위해 문자를 만들면서 바탕으로 삼은 문자가 있다. 바로 9세기에 그들의 조국 그리스가 쓰던 그리스 어, 신학도(神學徒)면 누구나 익혀야 하는 헬라(希臘) 어다. 신학대학 다닌 경력이 있는 내가 울란바토르 거리의 간판을 읽을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몽골 인들이 추가한 모음이 더러 있고, 형태가 조금 달라지기는 했지만 키릴 문자에는 알파베타(ΑΒ)는 물론, 감마(Γ),델타(Δ), 람다(Λ), 피(Φ)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건축물에도 그리스 문화권의 잔영이 짙게 어른거린다. 근대 이후 몽골에 가장 강한 영향을 미친 러시아의 정교회가 그리스 정교회의 강력한 영향권 안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러시아 정교회와 그리스 정교회라는 징검다리를 통해 몽골에서 그리스 문화의 잔영을 읽고는 낯익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낯익음의 정체는 무엇인가? 학습을 통한 낯익음이다. 그리스 문화 읽기와 인연이 없는 사람은 느끼기 어려운 낯익음이다.

나는 어느 나라에 가든지 꼭 그 나라 노래를 한곡쯤 배우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이동할 때면 그 나라 노래 카세트 테이프를 기어이 하나 사서 틀게 함으로써 안내하는 사람을 몹시 성가시게 한다. 그래서 호기심 많은 늙은 소인배라는 비아냥을 자주 듣는다. 하지만 나는 이 쾌적한 취미 생활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몽골 제국의 옛 수도 하라호룸(카라코룸)으로 가던 길이었다. 몽골인 친구가 소련 제 지프에서 틀어준 카세트 테이프의 노래들이 귀에 익었다. 그 중에서도 ‘미니 아아브 아도칭 훈(나의 아버지는 말 치는 사람)’이라는 노래가 귀에 익었다. 몇 차례 듣고부터는 따라 불렀다. 가볍게 걷는 말 잔등 위에서, 기분 좋은 흔들림에 몸을 맡기고 부르면 좋을 듯한 빠르기, 한을 가슴에다 간직하는 대신 바람에 흩날려 버리는 듯한 그 가락이 좋았다. 끝없이 아득했다. 그날 오후 내내 그 노래를 따라 불렀다.

몽골 인 운전기사는 6척 장신의 거구였다. 남산만한 배를 러시아 제 지프의 핸들에다 댄 채로 운전했다. 살살 꾀어서 전직을 물었더니 씨름 선수였단다. 밤이 되고 초원의 천막집 게르에 들게 되었다. 술을 권하자 그는 우리가 윗사람 앞에서 그러듯이 왼손을 오른손 손목에 대면서 오른손으로 공손하게 잔을 받았다. 그러고는 술잔을 왼손으로 옮긴 다음, 오른 손 중지로 술을 찍어 하늘로 튀기면서 나지막하게, 텡그리, 하고 속삭였다. ‘텡그리’는 천신(天神)이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몽골 식 ‘고수레’다. 소변 마려워서 일어섰더니 에르데네가 팔다리를 좌악 벌리고 서서 우리가 더러 그러듯이 입구를 막으면서, 더 안 마시면 못 나간다고 떼를 썼다.

달빛 아래로 술 자리를 옮겼다. 천막집 게르를 숙소로 빌려준 브리야트 족 안주인도 합류했다. 수줍음을 몰랐다. 멀리서, 달빛 교교한 초원을 가르며 말을 타고 달려오는 이가 있었다. 게르 주인 말치기였다. 물론 초면이었다. 그 역시 두 손으로 술잔을 받았다. 갓 배운 노래 ‘나의 아버지는 말 치는 사람’을 내가 선창했다. 에르데네 씨가 엄청난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웅장한 테너로 따라붙었다. 주인집 내외도 거침없이 따라왔다. 내 소리는 그들의 소리를 뚫지 못했다. 달빛 아래서 유라시아 인들이 벌인 그 황홀한 술잔치, 노래 잔치 자리에서 나는 너무 아득해서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튿날 몽골 인 친구에게 가사의 내용을 물었다. 그냥 들었을 뿐 메모는 하지 않았다. 돌아온 뒤에도 나는 술만 마시면 늘 이 노래를 불렀다. 나는 이로써 많은 사람들을 짜증스럽게 만들었을 것이다.

몽골은 자동차로 여행하기에는 너무 넓은 나라다. 자동차 여행이 거의 불가능한 지역을 두루 답사하기 위해 2003년 여름에는 여럿이 추렴하여 헬리콥터를 빌렸다. 조종사의 이익과 여객의 이익은 상충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어느 달밤에 함께 이 노래, ‘미니 아아브 아도칭 훈’을 부름으로써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나는 노래 불러도 좋은 곳이면 어디에서든 이 노래를 부름으로써 몽골인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이 노래를 모르는 몽골 인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이 노래를 좋아한 것은 가락과 노랫말 때문이었다. 그런데 몽골어를 잘 아는 이로부터 노랫말을 정확하게 해석한 쪽지를 받고는 더욱 놀랐다. 미니(나의) 아아브(아버지) 아도칭(말치는) 훈(사람), 미니(나의) 아아브(아버지) 도오칭(노래하는) 훈(사람)…. 어순(語順)이 우리 말과 거의 같다. 우리 말과 같은 알타이 어에 속하는 언어라서 그렇단다. 그들이 쓰는 말뿐만이 아니다. 몽골에 가면 너무나 눈에 익은 몸짓을 보고, 너무나 귀에 익은 말을 듣게 된다. 이 낯익음도 학습을 통한 낯익음인 것인가? 아니다. 나는 이것을 ‘학습을 통한 낯익음’이 아닌, ‘원초적 낯익음’으로 부르려고 한다.

‘알타이’는 몽골 고원에 있는 거대한 산맥이다. 말에 관한 한, 알타이 어는 조선, 일본, 몽골, 심지어는 유럽에 속하는 터키, 헝가리까지 아우른다. 나는 누구인가? 알타이 말을 쓰는 사람이다. 알타이 말이란 무엇인가? 알타이 인이 사는 ‘존재의 집’이다. 알타이 신화는 무엇인가? 알타이 문화의 희미한 옛 추억의 그림자 아닌가? 우리 옛이야기의 고향을 찾아 벌써 여러 차례 나는 유라시아를 떠돌았다. 한동안 몽골에 머물다 만주로 떠나려 한다.

  
“무지개 나라” 따뜻한 이름으로 한국을 부른다

올해 2월에는 그리스와 이집트를, 7월에는 몽골을, 8월에는 중국을 여행했다. 나 같은 사람 때문에 우리나라의 여행수지 적자가 무더기로 발생하는 것 같아서 늘 미안하다. 그러나 세 차례 여행에서 내가 사들여온 책이 100여 권, 찍어온 사진이 1만여 장이다. 이로써 나는 독자들로부터나마 면죄부를 얻었으면 한다.

8월의 중국 여행은 조금 특별했듯이 나와 한문과의 관계도 조금 특별하다. 네댓 살 무렵에 천자문을 떼고 초중급 한문 서적을 읽었다. 20대에는 사서삼경의 맛을 두루 보았다. 30대에는, 생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언어는 영어였는데도 불구하고, 중국의 이름난 고전을 열심히 읽었다.

40대 중반부터 50대 중반까지는 미국에서 당시(唐詩)와 송사(宋詞)를 많이 읽었다.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의 문사철(文史哲)을 아우르는 책 ‘세설신어’와 신괴소설 전집인 ‘요재지이’를 한 해 동안 집중적으로 독파하기도 했다. 이 수지 적자도 한번 따져 봐야 한다. 무역에 견준다면 수출은 언감생심, 일방적인 수입이었다.

지난 7월. 내가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에 대해서 쓴 책 두 권을 중국에서 번역 출간하고 싶다고 했다. 드디어 중국이라는 대양에 읽을거리를 두 권 보태는구나 싶어서 자랑스러웠다. 8월에는 중국에서 저자가 직접 베이징으로 와서 ‘조인식’이라는 것에 참가해달라는 연락이 왔다.

중국 작가협회의, 강당같이 넓은 ‘조인식’ 현장은 흡사 두 나라 정부간의 문화협정 체결 현장 같았다. 축사와 연설이 이어졌다. 내게도 차례가 왔다. 나는 나의 오래된 중국 문화 짝사랑을 그 자리에서 고백했다. 그토록 오래 중국을 짝사랑하고 중국의 문화를 읽어오던 사내가 드디어 중국인들에게 초라하나마 읽을거리를 제공하게 되어 감개가 무량하다고 말하다 보니 콧날이 시큰했다.

나는 말이 나온 김에, 2001년에는 시안(西安)에서 우루무치에 이르는 기나긴 실크로드를, 시안에서 베이징(北京)에 이르는 역시 기나긴 여로를 자동차로 각각 주파했는데 두 차례에 걸친 자동차 여행도 사실은 중국 신화의 현장 답사와 촬영이 그 목적이었다는 것을 고백했다. 그런데 그 대목에 이르자 중국인들이 술렁거렸다. 동석해 있던 10여명의 중국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한 기자는 질문하기보다는 반성하겠다면서 한국인이 쓴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 중국인으로서는 몹시 부끄럽다고 했다. 그는, 자기 나라인 중국 신화의 정리 작업까지 한국인에게 맡기게 된 것이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다고도 했다.

그 민감한 반응에 약간 당황했던 나는 회견이 끝난 뒤의 만찬 자리에서 기자들에게 따로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날 밤 기자들에게 내가 설명한 내용은, 내가 왜 중국과 몽골을 한동안 더 떠돌아야 하는지 그 까닭에 대한 설명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역사는 중국 역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우리가 쓰는 한국어도 중국의 한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신화나 민담은 국가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에 속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든, 문자로 기록되어 전해지든, 언어를 통해 전해지는 신화나 민담의 진화·퇴화 과정은 한 민족의 정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다.

한문에 실려 중국에서 넘어온 이야기의 많은 파편은 우리 문화에 묻어 우리 것으로 육화하기도 했고 때로는 우리 정서와 어울리지 못하고 퇴화하기도 했던 것 같다. 우리는 장구한 세월 단일한 민족 국가로 중국 문화 쪽으로 문을 열고 있었다. 문제는 중국이다. 우리가 ‘중국’이라고 불러온 나라는 단일한 민족 국가가 아니었다.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이렇게 국가의 이름이 바뀔 때마다 몽골족, 한족, 만주족, 이런 식으로 지배 계급의 민족이 바뀐 것이다.

그러니까 호기심이 많은 나는 중국이라는 국가를 지배한 경험을 지닌 민족들의 신화와, 지금 ‘중국 신화’라고 불리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궁금한 것이지, 중국인들을 대신하여 중국 신화를 정리하자는 것이 아닌 것이다. 원나라를 세워 근 한 세기 중국을 지배했고, 우리에게도 신산스러운 세월을 살게 했던 몽골족의, 낯익어 보이는 신화와 민담을 기웃거리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낯익음’을 열쇠말로 삼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

약 세 시간 비행거리에 있는 몽골은, 우리나라를 침략한 북방 오랑캐 ‘몽고족’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나라, 맞다. 그러나 ‘몽고(蒙古)’는, 원나라 시대 몽골인들에게 호되게 휘둘린 적이 있는 중국이 붙인 이름이다. ‘어리석고 후진 인간들이 사는 나라’ 정도의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몽골’은 ‘사람 중의 사람이 사는 나라’라는 뜻이란다. 그들은 우리나라를 ‘솔롱고스’, 즉 ‘무지개 나라’라는 따뜻한 이름으로 부른다. 내 뇌리에는 중학교 역사책의 ‘몽고족의 침략’을 통해 습득한, 어두운 몽골족 이미지가 오래 남아 있었다.

들꽃향기 흩날리는 아침 한약달이는 냄새 밥상엔 쌀밥과 김치가… “대통령 조반도 이렇습니다”

그러나 몽골은 내가 여행해본 나라 중에서 정서적으로 우리와 가장 가까운 나라, 가장 더럽혀지지 않은,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였다. 지난 여름 몽골의 한 특별한 숙소에서 맞은 아침을 나는 오래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서늘한 아침 바람이 그렇게 향기로울 수 없었다. 들꽃들이 다투어 향기를 흩날리는지, 아침 바람에서 한약 달이는 냄새가 났다. 아침 밥상에는 쌀밥과 김치가 올라와 있었다.

시중드는 이에게, 몽골인들이 김치를 좋아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김치를 좋아하는 대통령께서 아침마다 드시는 것으로, 우리를 위해 특별히 내놓는 것이라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대통령께서도 지금 아래층에서 여러분과 똑같은 조반을 들고 계십니다.”

나는 외국인인데도 불구하고 몽골의 바가반디 대통령을 두 번 뵙는 행운을 누렸다. 한번은 나담 축제 개막식에 나와 개막을 선언하는 대통령을 먼발치에서 뵈었다. 그날 오후 전통옷으로 차려 입은 대통령은 국무총리를 대동하고 손을 흔들면서 관람객들 사이를 천천히 걸었는데 경호가 조금도 매섭지 않았다. 외국인인 나도 3m까지 접근해서 대통령의 사진을 찍었을 정도다. 나의 몽골인 친구는, 몽골은 대통령과 국민이 ‘서로 사랑하는 나라’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몽골을 ‘몽고’라고 부를 수 없다.

중국인들이 몽골인들을 여전히 ‘몽고인’이라고 부르듯이 몽골인도 중국인을 여전히 싸잡아 ‘햐타드 훈’이라고 부른다. ‘거란인(契丹人)’이라는 뜻이다. 중국을 뜻하는 러시아어 ‘키타이’도 ‘거란’이라는 뜻이다. 중국인을 좋아하지 않는 몽골인이 중국인을 놀려먹은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몽골인이 중국인의 만두가게 앞을 지나게 되었다. 몽골인은 가게 앞에서 만두 냄새를 흠뻑 맡았다. 몽골인을 어수룩하게 본 중국인이 냄새 맡은 값을 내야 한다고 우겼다. 몽골인은 돈주머니를 꺼내 중국인 코 앞에서, 쩔렁 소리가 나게 한 차례 흔들어 보이고는 도로 넣었다. 중국인이 왜 그냥 넣느냐고 하자 몽골인이 대답했다.

“나는 만두 냄새만 맡았으니, 당신도 돈 쩔렁거리는 소리만 들어.”
 
 
2003년 6월 말,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브얀트 오하 공항으로 갔다. 헬리콥터가 기다리고 있었다. 붉은 헬리콥터였다. 동체에 선명하게 키릴 문자로 ‘텡게린 울란’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다. ‘하늘의 붉은 새’다. 몽골 국적 ‘미아트’ 항공사에 소속되어 있는 조종사와 동승할 엔지니어, 정비 기술자가 말쑥하게 정장하고 있었다. 기체도 그렇게 완벽하게 정비되어 있을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헬리콥터에 올라 안전 띠를 매고 이륙을 기다렸다. 헬리콥터의 프로펠러는 조종사가 엔진을 시동한다고 해서 금방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2, 3초 동안 귀에 매우 거슬리는 고음의 금속성이 난 다음에야 프로펠러가 움직인다. 그런데 그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듣는 순간 목이 메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하얀 헬리콥터’라는 단편소설로 문단에 데뷔한 사내가 33년 만에 다시 타 보는 빨간 헬리콥터였다.

33년 전에는 헬리콥터에 자주 올랐다. 베트남 땅에서는 요즘 서울에서 콜택시 타듯이 헬리콥터를 자주 탔다. 완전무장하고 탔다. 베트남에서 프로펠러 돌기 전에 들려오는, 그 귀에 거슬리는 고음의 금속성을 들을 때마다 살아서 다시 헬리콥터 타고 돌아올 수 있을까 싶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 소리를 33년 만에 다시 들은 것이다. 공포의 기억이 세월을 되돌려 놓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그랬다.

아, 여기는 베트남이 아니지, 나는 이제 전투병이 아니지…. 동그란 현창(舷窓)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는 사내는 이제 철모 쓴 전투병이 아니었다. 백발의 중늙은이었다. 하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헬리콥터에 가지고 오른 장비는 비슷했다. 배낭이, 열개의 주머니가 달린 가죽 조끼로 바뀐 것뿐이다. 소총과 로켓 포는 필름 카메라와 디지털 카메라로, 소총 실탄은 필름과 건전지로, 군용 폰초 우의(雨衣)는 미국제 등산용 ‘콜먼’ 비옷으로, 수통은 생수병으로, 전투 식량 ‘C 레이션’은 몽골 화폐로 바뀌었을 뿐이다. 전투 장비 무게에 견주어 촬영 장비 무게가 가벼워진 것 같지는 않았다. 노병(老兵)의 체감 중량이 그랬다.

그 넓은 땅에서 어떻게 이동할 것인가? 만 한 해 전인, 2002년 7월의 몽골 여행 경험이 결론을 내리는데 도움을 주었다. 울란바토르에서 겨우 200여㎞ 떨어져 있는 몽골 제국의 첫 수도 하라호룸을 다녀오는데 만 이틀이 걸렸다. 몽골 인들에게 거룩한 산인 보르항 산 다녀오는데는 만 나흘이 걸렸다. 여름이라서 초원 길이 몹시 질척거렸다. 빌려서 타고 간 러시아제 지프 ‘자린유스’ 바퀴가 자주 진창에 빠졌다.

그 바람에 보르항 산에는 접근조차 하지 못한 채 멀찍이서 올려다보고는 사진 찍고 돌아서는 수밖에 없었다. 알타이 산맥을 넘어 보자면 두 주일 일정은 다시 짜야 한다고 했다. 고비 사막을 다녀오자면 두 주일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몽골 인들 마음의 성소 보르항 산을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그 산중의 이깔나무와 자작나무 숲을 보고 싶었다. 고비 사막도 다녀오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알타이 산맥을 넘고 싶었다. 알타이 산맥의 자락이나 골짜기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 보고 싶었다. 북서부의 호수 지대에 사는 몽골 인들도 보고 싶었다. 그러자면 1만㎞ 가까이 여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문제는 이동 수단의 기동성이었다. 1만㎞는 하루 이동 거리 200~ 300㎞가 고작인 자동차의 기동성으로는 함부로 도전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달리는 말에서 활쏘는 모습 고구려인 보는 듯

몽골에서 내가 관찰하고자 한 것 중의 하나가 유목민의 기동성이다. 내가 눈을 대는 곳은 13세기 몽골 제국의 성립을 가능하게 했던, 이동 수단의 물리적 기동성이기도 하고 높은 기동성을 항상 가능하게 하는 그들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소유의 물량은 기동성에 반비례한다.

조(趙) 나라 무령왕(武靈王)이 ‘호복기사(胡服騎射)’를 극구 장려한 것은 기원전 3세기의 일이다. 흉노족이 시도 때도 없이 몰려와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을 보다 못해 내어놓은 무령왕의 고육지책이다. 호복기사는 ‘말 타고 싸우기 좋은 오랑캐의 옷 입기와 달리는 말 잔등에서의 활쏘기’다. 오랑캐 옷은 바로 기동성을 으뜸으로 치는 유라시아 유목민의 옷, 말 달리며 활쏘기는 바로 기원전 3세기 쯤, 중앙 아시아 유목민들과 교류하던 파르티아 식 활쏘기(Partian shaft)인 것 같다.

그는, 황하인(黃河人)들의 긴 두루마기와 너무 넓은 소매가 기동성을 해치는 것은 물론 활을 쏘는데 장애가 된다고 판단했음이 분명하다. 파르티아 식 활쏘기란 말을 탄 채 몸을 틀어 뒤따라오는 적을 향해 활을 쏘는 사법(射法)이다. 이런 식으로 활을 쏘는 모습은 중국의 1세기 화상전, 즉 벽돌 그림에도 등장하고 고구려 벽화에도 등장한다. 나는 등자(??子)가 12세기나 되어서야 등장했다는 서양 역사가들의 주장을 신용하지 않는다. 등자에 발을 대지 않고는 파르티아 식 활쏘기가 가능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무령왕은 농경민이 유목민의 기동성에 짓밟힐 것임을 천년 전에 예감한 선각자였던 것 같다.

13세기의 몽골 인들의 높은 기동성을 보장해준 것은 말이었다. 몽골 인들이 걸음마보다 말타기를 먼저 배운다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이제 없다. 하지만 이들의 기동성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 고려인들이 말 타고 견마 잡히고 한적한 시골길을 걷고 있을 때 그들은 질풍처럼 초원을 내달았다. 한 마리 말에만 의지했던 것도 아니다. 두 마리의 말을 번갈아 가면서 타고 달렸다.

그들의 먹을거리는 육포(肉脯)였다. 몽골 인들의 육포 가공 기술 수준은 500㎏의 쇠고기를 30㎏으로 가공하여 양의 몸에서 떼어낸 방광에 고스란히 집어넣을 수 있는 정도였다. 그들의 중요한 마실거리는 말젖이었다. 그들은 말젖을 양가죽 부대에 넣어 말 잔등에 싣고는, 이것을 깔고 앉은 채로 말을 달렸다. 이렇게 며칠을 깔고 앉아서 뭉개면서 달리면 말젖은 몽골 인의 엉덩이 밑에서 스스로 발효, 말젖술이 되었다고 한다.

평균 70㎏에 이르는 갑옷과 무기로 중무장한 13세기의 유럽의 기병을 짓밟아 버린 것은 바로 7㎏의 경량화한 무기로 가볍게 무장한 몽골의 경기병이었다. 유라시아는 몽골 인들의 기동성에 짓밟힌 것이다.

몽골 인들이 오축(五畜), 곧 다섯 가지 가축이라고 부르는 것은 양, 소, 염소, 낙타, 말이다. 그들은 돼지나 닭이나 오리 같은 것은 거의 기르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스스로 먼 거리를 이동하는 기동성이 없기 때문이다.

기동성은 내 삶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의 하나이기도 하다. 나는 기동성을 떨어뜨리는 물건은 소유하지 않으려고 한다. 두 주일 정도의 해외 여행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20분이면 충분하다. 나의 노트북 컴퓨터와 두 대의 카메라는 5분대기조의 소총과 같아서 언제든 들고 뛰어 나갈 수 있게 준비되어 있다.

나는 유목민처럼 다목적에다 다기능을 아우르는 단 한 벌의 옷을 며칠이고 줄기차게 입는다. 나는 며칠 동안 샤워하지 않고도 잘 잠들 수 있다. 농경정착민의 피가 오래 흐르던 내 핏줄 속에서 아무래도 유목민의 피, 알타이 인자(因子)가 잠을 깨고 있는 것 같다. 내 탓인지, 시대 탓인지.


聖山‘보르항’꼭대기에 서낭당이 있었다

몽골 마니아 수준을 넘어 몽골 전문가가 되어 있는 내 친구로부터 놀라운 말을 들었다. 보르항 산 가는 길에, 몽골 드나들기를 옆집 드나들 듯하는 그가 혼잣말하듯이 이랬다.

“몽골인들, 이상해요. 전쟁 치르느라고 저희 나라에서 멀리 떨어지면, 아무 산이나 하나 골라잡아 보르항 산으로 터억 정해놓고 거기에다 제사를 지낸답니다. 보르항 산은 세계 도처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바로 몽골인들이랍니다.”

나는 그게 어디에 기록에 남아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하지만 몽골 문화에 관한 한, 어디에 기록으로 남아 있느냐는 질문은 좀 어리석다. 신화나 민담도 그냥 신화, 설화 하지 않고 ‘구전 신화’, ‘구비 설화’라고 하는 나라가 몽골이다. 나는 그가 빈말을 하지 않았으리라고 확신한다. 놀라운 것은 그가 한 말이 아메리카 인디언 수우족 추장 블랙 엘크가 한 말을 정확하게 상기시킨다는 점이다. 블렉 엘크가 이 말은 남긴 것은 영적인 체험을 통해 종족의 참담한 미래를 암시하는 환상을 본 직후의 일이다.

“나는 이 세계의 중심에 있는, 가장 높은 산으로 올라갔다. 내가 본 환상은 다른 것이 아니다. 성스럽게 바라본 세계의 모습이었다. (내가 환상 속에서 본 것은 사우드 다코다에 있는 하아네이 산이었다.)그러나 하아네이 산은 세계 도처에 있다.”

나는 아직 금강산을 다녀오지 않았다.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가 아니다. 내가 금강산을 다녀오지 않은 것은 백두산에 대한 예의 때문이다. 나는 아직 백두산도 다녀오지 않았다. 중국 땅을 통해서 백두산을 다녀올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백두산을 그런 식으로 다녀오고 싶지는 않다. 반드시 북한 땅을 밟으면서 백두산을 다녀오고 싶은 것이다. 나에게 백두산은 거룩한 산, 성산(聖山)이다. 나와 성산의 만남은 각별해야 한다는 신념을 나는 가지고 있다. 북한 땅을 지나 백두산을 다녀온 운 좋은 사람들도 여럿 있다. 하지만 그런 행운의 차례가 내게는 찾아오지 않았다.

백두산이 내게 성산이듯이 보르항 산은 몽골인들의 성산이다. 유럽 언어에서는 ‘부르칸(Burkhan)’, ‘보르칸(Borkhan)’으로 쓰기도 한다. 몽골의 ‘보르항’이 육당 최남선의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의 그 ‘불함’일 것이라는 주장, 결국은 ‘한밝’(太白)과 동의어일 것이라는 주장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주장에 동조하거나 그런 주장을 논파하는 것은 나의 소임이 아니다. 나는 나의 성산, 몽골인들의 성산을 내 나름대로 만나려고 한다.

보르항은 하느님-버드나무 뜻해

몽골 말의 ‘보르항’은 ‘하느님’을 뜻한다. ‘보르항 박시’, 즉 ‘하느님 샤만’은 그래서 몽골의 창조신이다. ‘보르항’은 ‘부처님’이기도 하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몽골의 민간 신화에는 ‘식그무니 보르항’이다. 미륵불은 ‘마이다르 보르항’이다. ‘보르항’은 ‘버드나무’를 뜻하기도 한단다. 세상에, 버드나무라니! 만주족의 창조신화에 등장하는 여신 ‘아부카허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부카허허는 물 있는 곳이면 어디에든 존재한다는 여신이다.

‘아부카허허’라는 말은 ‘여음(女陰)’과 ‘버들 천모(天母)’라는 뜻을 동시에 지닌단다. 버들이 무엇이던가? 생명의 근원인 물 근처에 가장 먼저 자리를 잡고 자라는 나무가 아닌가? 동명성왕 고주몽의 어머니 이름이 그래서 ‘버들꽃(柳花) 부인’이었던가? 그렇다면, 처녀 시절의 신혜왕후가 젊은 장수 시절의 태조 왕건에게 건네주었다는 물바가지에 둥둥 떠 있었다는 그 버드나뭇잎은 그냥 버드나뭇잎이 아니었다는 것인가?

2002년 7월 보르항 산을 바라고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를 떠났다. 그러나 나흘 간을 고생하고도 보르항 산에 오르지 못했다. 초원이 질어서 자동차가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멀리서 본 보르항 산 기슭의 초원과 강이 어찌 그리도 낯익던지. 2003년 7월에는 러시아 제 헬리콥터를 타고 시속 300㎞로 날았다. 자동차로 이틀 걸리는 거리를 단 한 시간에 날아 보르항 산을 넘었다.

보르항 산을 넘으면서 나는 정상에 선 거대한 어워(서낭당)를 내려다 보았다. 몽골인들에게는 성산인 만큼 헬리콥터는 정상에 착륙할 수 없다고 했다. 나도 알고 있었다. 원래 헬리콥터는 정상 부근에 착륙하고 우리 일행은 거기에서 도보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정상을 다녀오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헬리콥터는 정상 부근에 착륙하지 않았다. 헬리콥터가 정상에서 꽤 멀리 떨어진 초원에 착륙한 뒤에야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 훈련받고 20년 동안이나 전투기 조종사로 일했다는 몽골인 기장이 통역을 통해서 말했다.

“알고 계시다시피 헬리콥터는 보르항 산 정상에는 착륙할 수 없습니다. 거룩한 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헬리콥터는 원래 보르항 정상에서 도보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산마루에 착륙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헬리콥터가 그 산꼭대기에 세시간 머무는 동안 여러분은 도보로 정상을 다녀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러분 일행에 여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여성은 거룩한 산 보르항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여성의 보르항 접근이 몽골에서는 언감생심(言敢生心)입니다.

산기슭의 초원과 강 무척 낯익어!

그래서 서로 미리 확인하지 않았던 것인데, 그 허물이 큽니다. 지금 헬리콥터가 착륙해 있는 이 지점은, 보르항 정상에서 도보로 세 시간 반 떨어진 곳입니다. 헬리콥터는 지금부터 다섯 시간을 이곳에 머뭅니다. 항공 규정상 아홉 시까지 이 헬리콥터는 울란바토르 공항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남성들에게는 다섯 시간의 여유가 있습니다. 서둘러 도보로 다녀오셔야 겠습니다.”

기장은 물론 항법사, 정비사까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태도는 완강했다. 도무지 헬리콥터를 조종하는 사람들 같지 않았다. 오르내리는데 일곱 시간 걸리는 거리를 다섯 시간에 다녀오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나도 나서지 못했다. 여음의 상징일 수도 있는 버드나무 어워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성산 보르항에 대한 예의도, 동행한 여성에 대한 예의도 아닐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르항 정상이 보이는 자리에 머물다 가기로 했다.

헬리콥터 그늘에서 점심 도시락 먹을 채비를 했다. 조종사에게 반주로 가져온 몽골 보드카를 권했다. 조종사가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잔을 받았다. 취중 조종을 하려나 싶어 내심 잠깐 불안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는 두 손으로 잔을 받아들고는 보르항 산 정상을 등지고 서더니, 술잔의 보드카를 머리 위로 뿌리면서 텡그리(天神), 하고 외쳤다. 몽골 식 고수레였다.

러시아 사회주의의 영향력이 약화된 몽골에 신성한 것들이 부활하고 있었다.
 

돌무더기에 소원 비는 ‘어워’ 신앙

내 안에 존재하는 아이는 아직도 여전히 유치한데, 내 안으로 들어온 이야기의 나이는 거진 반백 살이 되어가는 것이 나는 퍽 억울하다. 내 나이 여남은 살 되었을 때, 시집간 누님과 함께 읍내 가는 길에 서낭당을 지났다. 누님은 서낭당에 막돌 세 개를 정성스럽게 보태고는 합장을 한 채 읍을 세 번 했다. 나는 침만 세 번 뱉고 지나가려고 했다. 누님은, 사람이 그러는 게 아니라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잔소리를 들었다.

시집간 다음 해, 시부모 허락을 얻어 처음으로 친정 나들이를 하게 되었단다. 누님은 동백기름 발라 머리 빗고, 빳빳하게 풀해 다림질한 열닷새 무명 단속곳에 유똥치마 받쳐입고 시집을 나왔더란다. 머리에는 떡보퉁이 이고, 한 손에는 오골계 한 마리까지 들었으니 신바람이 났을 터이다. 시집에서 30리 길을 걸어와 우리 마을 앞산에 들어서고부터는 인적이 끊기면서 무서운 정이 확 들기 시작하더란다. 그 때부터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란다.

싸박 싸박 싸박… 걸음을 멈추고 둘러보면 사방이 고요한데, 걸으면 또 들리는 그 소리. 싸박 싸박 싸박… 못 들은 체하고 계속 산을 오르자니 머리끝이 서고 등짝에 식은땀이 번지더란다. 낮 귀신 아니면 개호주인 모양이구나, 싶어서 누님은 큰 맘 먹고 휙 뒤를 돌아다보았더니, 맙소사… 다복솔 뒤로 검은 그림자가 휙 들어가는 것 같더란다. 누님은, 아이고 사람 살려… 하는 심정으로 그 자리에 덜퍼덕 주저앉고 말았단다.

누님은 신장님, 칠성님, 산신님께도 빌어보고, 돌아가신 조상님께도 빌었더란다. 빌고 또 빌면서, 진동한동 서낭당 있는 데까지 올랐단다. 서낭당에 이르니까, 살았구나 싶더라지. 누님은 막돌 세 개를 얹었더란다. 처음에는 돌이 자리를 잡지 못하더니, 떡 보따리 오골계 보따리를 내려놓고 싹싹 비니까, 돌이 자리를 잡더란다. 서낭신이 응감한 모양이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무서움이 싹 가시더란다. 무엇이 따라왔을까, 곰곰 따져 보았더니, 개호주도 아니고 낮귀신도 아니더란다. 풀 먹여 다려 입은 열닷새 무명 단속곳 가랑이가 슬키는 소리더란다.

가운데 버드나무 막대기에 ‘하닥’매달아

누님은 이 이야기 끝에, 섬기는 것이 없으면 사람은 막 살게 된다면서 내게도 서낭당에 돌 얹을 것을 권했다. 나는 고집이 센 아이였다.

그로부터 20년 뒤, 누님과 함께 바로 그 서낭당 옆을 지났다. 우리 어린 시절에는 서낭당 돌무더기가 어른의 키로 두 길이 넘도록 높았는데, 그게 다 허물어져 서낭당이 밋밋했다. 나는 당연히 누님만은 그 서낭당에다 돌을 얹을 줄 알았는데 얹지 않았다. 내가 물었다. 돌 안 얹어요, 막 사시기로 했어요? 누님은, 서낭 신 대신 부처님 섬기니 막 사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몽골의 풍물 중에서 우리의 마음 바닥을 가장 절실하게 흔들어놓는 것이 바로 ‘어워’와 어워 신앙일 것 같다. 어워의 모양은, 몽골 이야기만 나오면 사진과 함께 등장하는 것인 만큼 이미 우리에게는 꽤 잘 알려져 있다. 가운데 나무 기둥이 여러 개 세워져 있는 원추형 돌무더기다. 기둥에는 푸른 띠가 무수히 걸려 있고, 돌무더기에는 술병, 우유병 따위의 제물이 놓여 있다.

나는 ‘어워’라고 쓰지만, ’오보’라고 쓰는 이도 있다. 몽골 사람들 발음을 귀 기울이고 들어 보면, ’업어 주세요’할 때의 ’업어’에 가장 가깝다. 육당 최남선과 일본 학자 아키바류우(秋葉隆)에 따르면, 우리가 유난하게 집착하는 ‘업(業)’이라는 개념은 몽골의 어워 신앙 체계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어워를 구성하는 소재, 어워가 놓이는 곳, 어워 신앙의 양태는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이고 그 상징적 의미 또한 복잡해서 이것을 다 설명해낼 힘이 내게는 없다. 어워에 대한 논문을 몇 편 읽었지만 그걸 간추리는 일조차 내게는 벅차다. 내가 본 어워, 어워에 대한 내 느낌만 여기 적겠다. 어워는, 범박하게 말하자면 높은 곳, 거룩하게 여겨지는 곳, 한 지역과 다른 지역의 경계에 세워진다.

돌이 많은 지역에는 돌을 쌓고는 가운데 나무 기둥을 세우고, 돌이 없는 동 몽골 지역에서는 나무만 원추형으로 세운다. 몽골인들은 어워를 그냥 지나치는 일이 거의 없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여기에 돌을 세 개 보태거나, 하닥(신성한 푸른 띠)을 건다. 어워에 놓여 있는 것을 들어내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길 떠날 때면, 어워를 시계 방향으로 세 바퀴 돈다.

반대 방향으로는 절대로 돌지 않는다. 말을 타고 있으면 말 탄 채,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으면 차로써 세 바퀴 돈다. ‘시계 방향으로 세 바퀴’는 아무래도 16세기 이후 몽골인들의 종교적인 삶을 지근거리에서 돌보아 온 라마교의 영향때문인 것 같다. 라마교의 기도간(祈禱桿, praying wheel)에는 라마 경전이 쓰여 있다. 신도들은 이것을 시계 방향으로 돌리면서 기도하는데, 반대 방향으로는 절대로 돌리지 않는다.

거룩한 곳이나 지역 사이 경계선에 만들어!

어워의 중앙에 세워지는 나무는 대개의 경우 버드나무다. 몽골인들은 버드나무가 상대적으로 귀한 산악지대에서도 어워의 기둥나무만은 버드나무로 세울 것을 고집한단다. 산꼭대기에 세워진 어워는 멀리서 보면, 젖무덤에서 발기한 젖꼭지 같다. 금방이라도 젖방울이 솟을 것 같다고 했더니, 몽골인 친구는, 그렇지 않아도 몽골인들은 거기에서 산신제(山神祭)나 기우제(祈雨祭) 같은 것을 올리기도 한단다. 하지만 여성은 오를 수 없단다. 거룩한 곳이기 때문이란다. 여성은 안 거룩한가?

성산 보르항은 여성을 거절한다. ‘보르항’은 ‘버드나무’를 뜻하기도 한다. 버드나무, 여성이 지닌 풍요의 상징이 아니던가. 그런 여성(버드나무)이 보르항(버드나무) 산에서는 거절당한다. 중앙에 버드나무 기둥을 세운, 산꼭대기의 어워도 여성을 거절한다. 둘 다 거룩한 태음(太陰)이기 때문인가?

섬기는 것이 없으면 사람은 막 살게 된다고 내 누님은 말했다. 나는 어워 앞에 설 때마다, 이것은 민중들 사이로 내려온 그들의 성산 보르항이 아닐까, 싶어진다. 어워는 자리를 옮겨 다닐 수 없다. 나는 그들이 신성시하는 푸른 띠 하닥을 볼 때마다, 이것은 언제 어디서나 신성을 체험하게 하는, 막 살게 내버려 두지 않는 그들의 포터블(portable) 성소, 포터블 어워가 아닐까, 싶어진다. 러시아는 근 80년 동안 몽골인들의 속신(俗信)을 뿌리 뽑고 그들을 사회주의자들로 계몽하려 했다. 하지만 1991년 러시아가 물러가자 몽골인들은 불씨로 간직했던 이 중세의 신앙 체계를 바로 되찾아 지금의 형태로 되살려 놓았다. 흡사 제 자리로 돌아온, 잔뜩 당겼다 놓아버린 고무줄 같은 형국이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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