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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백제 잊혀진 왕국을 찾아서 - 하남 위례성으로 가는 열쇠

한성백제 잊혀진 왕국을 찾아서 - 하남 위례성으로 가는 열쇠 국내외 여행정보 2008. 10. 5. 14:36

한성백제 잊혀진 왕국을 찾아서 - 하남 위례성으로 가는 열쇠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의 능너머 고분군이 앞으로 본격적인 발굴에 들어가 백제 초기왕릉으로 확인될 경우 동아시아 고대사는 다시 쓰일 것이 확실하다.

능너머 고분군은 2000년동안 베일에 가려온 백제 초기 도읍지 한성(漢城)백제(기원전 17∼475년) 하남 위례성의 수수께끼를 풀 결정적 열쇠일까. 고고학계가 주목하고 있는 능너머 고분군은 지명 ‘능너머’에서 보듯, 옛날부터 능이 있을 것으로 추정돼왔다. 춘궁동과 교산동주변 사방 수㎞ 평지에는 이곳외에는 어디에도 능을 찾아볼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경주 다음으로 문화재가 많은 고장 하남이 위례성, 즉 한성백제 도읍지라는 주장은 학계에서는 비주류의 소수의견으로 묵살돼왔다. 그러나 최근들어 하남이 2000년전 도읍지였을 것이라는 조짐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15년간 발굴작업이 진행중인 하남 서쪽의 이성산성,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목조 건물유적인 교산동 건물지가 능너머 고분에서 동쪽으로 불과 200m 위치에 있다. 한성백제 왕궁터로 추정되는 춘궁동의 천왕사지에는 최근 거대한 목탑지 2개가 발굴됐다. 현재 동양 최대의 목탑지로 논란을 일으킨 동사지등 하남시 문화재는 다른 곳에서는 볼수 없는 거대한 규모로 한 나라의 국력을 집중하지 않고서는 건립할 수 없는 건축물이라는 것이 백제문화연구회(공동대표 차옥덕 성신여대교수·한종섭 백제사연구가)측의 주장이다.

지하자원탐사업체 지오테크코리아는 지난해 4월 미국에서 도입한 최첨단 지하탐사장비로 고분내 금동관과 금 혁띠의 존재 가능성을 포착해냈다. 허찬사장은 “지난해 8월 최첨단 장비를 미국에서 도입, 현재 전세계적으로 가장 과학적인 유물발굴 장비를 보유하고 있다”며 “능너머 고분이 민간인에 의해 훼손되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곧바로 탐사작업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지난달 15, 26일 2차례 실시한 지하탐사에 사용된 장비는 ‘지오 메트릭스 G858G’, ‘지오메트릭스 G856AX’등 지자기(地磁氣)탐사장비를 비롯, 지중(地中)레이더(GPR) 장비등이다. 물체 분석작업에는 지하물체에 전자파를 쏘아 주파수 데이터로 재질을 정확히 파악하는 다우징(PMR)기법등 최첨단 지질탐사방식이 동원됐다.

석실 규모(폭 2∼2.5m, 길이 3m)를 비롯, 금동관과 금 혁띠로 추정되는 물질 간격이 70∼80㎝로 정북 방향을 향한채 가지런히 놓여있다는 것은 왕과 왕비의 순장무덤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학계의 지적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2기의 석실에서 금과 동, 철 세라믹 물체가 포착된 것외에 석실 주변에 5∼10기의 석실이 더 있을 것이라는 자료가 속속 나오고 있다. 이것은 폭 50m, 길이 70m에 이르는 이 거대한 고분이 왕과 왕비의 무덤 외에 다른 왕이나 배총(倍塚·신하등의 무덤)이 더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그러나 실제 땅주인이 고분위를 불도저로 밀어 배총 유구들이 일부 훼손된 채 밖으로 나뒹굴고 있다. 현재 훼손된 부위에서 석실까지의 깊이는 불과 1.5m 정도에 불과해 도굴등의 위험성도 크다.

남한지역의 3대 도읍지는 1000년의 고도 신라 경주, 600년의 서울, 500년의 한성백제 하남 위례성이 꼽혀왔다. 그러나 하남 위례성의 위치를 두고 학계의 논쟁은 그치지 않았다.

고고학계 주류측은 지금까지의 발굴 성과를 토대로 하남시 북쪽에 위치한 한강 아래쪽에 위치한 풍납토성이 위례성이었다는 추측에 머물고 있다. 백제하면 떠오르는 공주는 63년, 부여는 122년간의 짧은 기간 백제 도읍지였다. 이에비해 493년간 도읍지였던 한성백제의 도성이 6만평 정도밖에 안되는 몽촌토성이나 22만평에 이르는 풍납토성이었다는 주장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하남 위례성의 수수께끼를 20여년간 추적해온 사람들이 있었다.

한성백제의 비밀을 파헤쳐온 구심체는 백제문화연구회.

하남시 일대 유적을 20여년간 뒤져온 한종섭(50)회장은 능너머 고분이 백제 초기왕릉이라고 주장해왔다. 한회장은 지금까지 하남시 문화재전문위원으로 일해왔는데, 지난달말 하남시측이 후임자에 대한 인수인계 절차도 없이 계약을 해지해 하남시에는 춘궁동 일대 유적지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전무한 실정이다.

학계 일각에서는, 고대의 고구려와 신라를 비롯한 모든 왕도의 규모는 300만평 이상이라며 풍납토성이 왕성터라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해왔다. 초기 백제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매우 강성한 국가로 역사서에 소개되는데, 시골 마을 단위에 불과한 몇십만평 정도의 토성이 왕성이라는 학설은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더구나 한강변의 풍납토성은 침수지대에 위치해 수차례 물에 잠긴 흔적이 있어 상식적으로 왕도의 수비성이면 모를까, 왕성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백제문화연구회 회장을 지낸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 강찬석 문화유산위원회 위원장은 “하남시 일대 전체가 매장문화재의 보고”라고 주장한다. 그는 “현재 능너머 고분군이 심하게 훼손돼 석실 유구까지 약 1.5m까지 남지않아 고분군이 완전 훼손될 위기에 처해있다”며 “문화재청과 하남시측이 향토유적등 문화지구로 지정해 시급히 발굴작업에 들어가야 도굴을 막을수 있다”고 지적했다.


제2의 경주’ 고대 도시 하남 
 
“의심나는 곳을 파기만하면 어김없이 고대의 유물이 나온다. 하남은 제2의 경주로 손색없는 고대도시다.”

백제문화연구회 한종섭회장과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 강찬석 문화유산위원회위원장이 20여년간 경기도 하남시 일대 유적을 이잡듯이 뒤지며 내린 최종 결론이다. 하남이 백제의 첫수도 한성(漢城)백제라는 한회장은 백제초기 왕릉으로 판단되는 춘궁동 능너머 고분군이 위치한 고골(춘궁동과 교산동) 일대가 왕궁터가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이곳은 최근 2∼3년새 고대도시의 흔적을 보여주는 건물터가 집중적으로 발굴되면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어왔다.

◈풍납토성 왕성은 식민사관의 유산〓우리나라 고고학계 주류측은 초기백제사 연구분야에서 몽촌토성(6만평)과 풍납토성(22만평)이 왕성일 것이라는 ‘환상’에 매달려온 것은 아닐까. 백제문화연구회측의 주장에 따르면 그동안 우리 고고학계는 ‘우물안 개구리’ 신세였다는 것이 솔직한 표현이다. 그 환상의 배경에는 일제 식민사관이 똬아리를 틀고있다는 것이다.

“풍납토성이 있는 곳은 한강변의 상습 침수지대입니다. 왕이 풍납토성에 살고있다고 가정할 경우 한강 건너 아차산에서 굽어보면, 왕이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 속속들이 알수 있지요. 그런 위치에 왕도를 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이겠습니까.”

한회장은 “풍납토성을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이라고 최초로 주장한 사람들은 일제시대 일본학자들로 이들의 학설이 굳어져왔다”고 말했다. 한반도 남부에 일본이 경영한 임나일본부설등이 신빙성을 가지려면 백제의 왕도는 축소돼야 한다.

실제 일본서기 역사서에는 백제사 관련 기록이 무수히 많다. 시골마을 단위밖에 안되는 풍납토성 정도가 초기 백제 왕도여야 일본인은 뿌리깊은 ‘백제 콤플렉스’에서 해방될 수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한성시기 백제는 한반도의 허리에 해당되는 한강유역을 차지하였으며 근초고왕때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황색 깃발을 사용하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할 정도로 강력한 정복국가였다. 더구나 중국 정사에는 서해 큰섬인 강화도를 발판으로 수군을 이용해 중국의 요서(療西), 양자강 하구지역으로 뻗어갔으며,, 왜국(倭國)으로 진출했다는 기록까지 있다. 4세기 들어 남진정책을 감행한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와 치열한 공방전 끝에 475년 한성을 전면 공격, 개로왕이 전사하면서 수도가 함락당해 공주로 남천했다.

◈하남 고대도시의 흔적들〓몽촌토성, 풍납토성에 집착해오던 주류 학계가 하남시 유적에 눈길을 준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지난해 5월 하남시 서쪽 이성산성을 주제로 열린 학술심포지엄에서 김윤우 동양학연구소전문위원과 일본의 아라이 히로시교수등은 ‘이성산성이 삼국시대 이전의 건축물로 초기백제 수도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백제 초기왕릉으로 추정되는 능너머고분은 남북 70m, 동서 50m의 장방형 구릉으로, 높이는 4∼5m이다. 이 능위에서 삼국시대 명문 기왓조각이 다수 발견됐다. 한회장은 ‘으뜸되는 지아비’를 뜻하는 ‘원부(元夫)’는 시조의 능일 가능성을 제시했다. 명지대 오순재(문화재관리학과)교수는 ‘왕을 지킨다’는 뜻의 ‘왕수(王戍)’라 쓰인 기와는 고구려 장군총 꼭대기에 있었던 것처럼 으로 보이는 향당(享堂)과 같이 이 능 정상부의 향당(享堂)에 쓰인 기와로 추정했다. 그외 ‘장해(丈解)’는 ‘10척이나 되는 태양’으로 거대한 태양과 같은 왕의 존재를 일컫는다. ‘수언유(壽言由)’는 ‘오래 살기를 빈다’는 뜻으로 고구려 천추능에서 나온 ‘천추만세(千秋萬歲)’와 비슷한 뜻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하남시 고골일대 도성체제 삼국사기 기록과 유사〓오교수는 삼국사기 백제 온조왕대 기록을 토대로 ‘한성시대 왕성은 북으로는 강을 끼고 동으로 고악(高岳또는 숭산·崇山)을 의지하며, 남으로 기름진 평야를 갖고 서쪽으로는 머리바다(西海)를 끼고 있는 천혜의 분지임을 나타낸다’며 하남시 고골일대의 형태와 그대로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교산동 토성을 중심으로 한 하남시 고골일대는 북쪽에 한강이 흐르고 동쪽에 숭산인 금단산이 자리잡고 산 정상부근에는 동명묘(東明廟) 제단터로 볼수 있는 제사유적이 발견됐다. 남쪽으로는 한산(漢山)으로 볼수 있는 청량산과 남한산성이 있고 남한산성 남쪽 탄천변의 둔전동에는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다는 것이다.

오교수는 “한성백제 왕성은 고구려 침입에 대비해 한강 건너편의 수석리토성-안산성-역촌토성을 비롯, 왕궁 주변에 이성산성 일자산과 미사리 주변 강변을 따라 뻗은 토성, 한강 수로관리성인 몽촌토성과 풍납토성등이 겹겹이 에워싸고 최악의 경우 후방인 남한산성으로 대피하는 도성체제를 갖춘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인구100만 운하도시의 수수께끼 
  
‘머리바다(서해) 해풍을 헤치고 온 상선이 한성백제 영토로 접어드는 강화대도(大島)에서 한강의 세찬 물결을 거슬러 동쪽으로 한참 나아간다. 강 왼쪽 아차산성, 오른쪽 강변에 바짝 붙은 수비성인 몽촌토성·풍납토성, 길게 뻗은 제방 토성을 지나 곧바로 남쪽으로 꺾어들면 운하도시 덕풍천을 유유히 거슬러올라간다. 한성의 민가와 춘궁동 동사지등 사찰을 지나자마자 토성으로 된 내성과 중성 외성으로 둘러싸인 고도 하남 위례성(한성)이 그 위용을 드러낸다.’

경기도 하남시 고골일대를 한성백제의 왕도로 지목해온 백제문화연구회(공동회장 한종섭·www.paekche.or.kr)의 한성 도성체제 청사진에 따라 묘사해본 한폭의 풍속도다.

◈운하도시 한성〓최근 덕풍천에 운하 유적이 발견돼 상류에 있는 왕성까지 이어진 흔적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2001년 5월 덕풍천 지류인 교산동에서 오수관 매설공사를 하던 중 배를 정박할 닻줄을 매는 데 쓰던 석물 여러개가 발견돼 고고학계를 놀라게 했다. 도성 내부까지 배가 들어온 흔적도 드러났다. 배 닻줄 매는 석물은 높이 2m가 넘는 큰 돌로 윗부분을 가공해 밧줄을 맬수 있도록 인위적으로 홈이 파여 있다. 이 석물은 상류쪽 하천 수위를 높여 덕풍천 상류에 배가 다닐 수 있도록 일종의 물막이 댐을 한 기초 흔적이 있었다. 배를 정박하도록 한 시설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밖에도 길이 155㎝, 폭 67㎝, 두께 20㎝의 돌다리 석판과 함께 덕풍천을 이용해 운하가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수로 흔적이 하천바닥에서 약 3∼4m 깊이의 지하 몇곳에서 발견됐다. 당시 한성은 운하시설을 갖추고 동북아를 호령한 막강한 왕국이었다는 것이 백제문화연구회의 주장이다.

◈100만 인구의 거대도시〓500년을 지탱한 백제의 첫 수도 하남 위례성의 인구는 어느 정도였을까.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 강찬석 문화유산위원회 위원장은 삼국유사 기록 등을 근거로 대략 100만명 정도로 추산했다. 삼국유사에 고구려 전성기 가옥수는 21만508호, 백제 전성기는 15만2300호, 고구려와 백제의 차이는 5만여호에 불과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성백제 가옥수 76만호를 1가구당 식구 7명으로 계산할 때 당시 백제 전체인구는 500여만명으로 추산된다. 76만호 중 서울의 가구수는 17만8900여호. 수도권 집중률이 23.5%에 이르러 한성 인구는 대략 10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삼국시대에 최대의 군사를 일으킨 광개토대왕(391∼413)의 군사가 5만여명, 백제 개로왕을 사로잡아 죽이고 한성을 함락, 동북아 최강국을 이룬 장수왕(413∼491)의 군대는 3만5000여명,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죽이고 요서·산동·일본에 세력권을 형성, 동북아 강자로 군림한 백제 근초고왕(346∼375)의 군대는 3만여명이었다. 한성백제 왕도 규모가 당시 고구려나 신라의 왕도와 엇비슷해야 하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중·일 고대도시는 평지성과 산성이 한 세트〓한·중·일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도읍지는 평지에 있는 ‘도성(왕성)’과 유사시에 높은 곳으로 대피해 항전할 수 있는 ‘산성’이 연계된 것이 특징이다. 건축학을 전공한 강위원장은 한·중·일의 고대도시 규모 등을 비교분석, 도시공학적 시각에서 왕도 한성의 도시구조와 규모를 체계적으로 조명했다. 압록강변의 고구려 집안 도읍지는 국내성-환도산성, 평양 도읍시기는 안악궁성-대성산성이 세트를 이룬다. 신라는 월성-명활산성, 고려시대는 개경-대흥산성, 조선시대는 한양성-북한산성이 한 단위다. 한성백제에서 천도한 웅진(공주)도성은 공산성, 웅진도성과 판박이인 사비(부여)도성은 부소산성외에 청마산성, 성성산성 등이 사방으로 방어망을 형성하고 있다.

웅진도성의 규모는 200여만평, 사비도성 규모는 약400만평이다. 고구려 장안성은 358만여평, 신라 왕경(경주)은 484만평, 발해의 상경 용천부는 420여만평이다. 몽촌토성(6만평), 풍납토성(22만평)은 주변에 산성이 없어 왕성이나 왕도의 입지조건이 못된다. 강위원장은 “풍납토성에는 도로 유구가 발견되지 않고 한성백제시대의 대표적인 서민 주거형태인 육각형으로, 대략 8000명의 인구가 거주한 것으로 추정돼 왕궁이나 사원의 일부로 보기에는 너무 옹색하다”고 주장했다. 더구나 역사적 맥락에서 볼때 당시 한성의 인구가 웅진이나 사비보다 적었을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군사동원 능력에서 웅진·사비 시대에 한성백제의 근초고왕 때보다 더많은 군사력을 동원한 기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있다.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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